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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레이 / 박은성


- 베이지색 핫팬츠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계셨죠? 머리는 단발 파마고요. 폐쇄회로에 찍혀 있습니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식의 조롱을 내뱉듯 전화기에서 말이 이어졌다

놀이터 입구에 한 개, 앉아서 잠시 쉬는 벤치에 한 개, 아파트 입구에 두 개

하물며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곳에도 여지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방에 설치된 카메라를 나는 한 번도 의식한 적이 없었다

 

-문이 안 열려.

 

조가 소곤거렸다. 나는 어둑한 복도로 고개를 돌렸다. 복도 바닥에는 융단처럼 폭신한 러그가 길게 깔려 있었다. 길바닥의 후끈한 열기와 상관없이 실내는 서늘했다. 낮은 조명은 쾌적함마저 느끼게 했다. 초콜릿색 문 뒤에서 여자들의 신음이 들렸다. 나란히 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누군가 나타날까 봐 나는 머리를 방문에 기댔다. 조는 몹시 취해 있어서 카드키를 꽂았다 뺐다 반복하며 씨발, 씨발 욕을 했다. 줘봐 내가 해 볼게. 나는 카드키를 뺏어서 문에 꽂고 문고리를 돌렸다.

 

-안 열려. 이거 어떻게 하는지 물어봤어?

 

내가 다그치자 조는 입술을 내밀었다.

 

-여긴 너무 고급이야. 카운터에 내려갔다 올게.

 

조가 투덜거리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조가 내려간 사이, 나는 도망가 버릴까 망설였다. 돌 지난 셋째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셋째는 걸음마를 시작해 아장아장 걸어서 내게 오곤 했다. 눈동자에 함박웃음이 맺혀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는 깨끗하고 달콤한 침이 흘렀다. 찌찌. 엄마 찌찌. 젖을 뗀 후 내 가슴을 보며 셋째는 말했다. 나는 셋째가 입맛을 다시곤 하는 가슴에 팔짱을 껴 가렸다. 비상계단이 어디 있을까. 두리번거리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방문에 고개를 처박았다. 302. 호수의 숫자가 뚜렷하게 뇌리에 새겨졌다. 줄줄이 선 문 뒤에서 숨넘어가는 여자들의 신음이 넘어왔다. 자극적이지 않고 어쩐지 음산했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을 돌렸다. 중얼거리면서 복도 끝으로 가는 남자의 신발이 눈에 잡혔다. 조였다. 만취해 방을 못 찾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기야 조.

 

침대 위에 누운 조를 봤다. 조는 고깃덩어리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에 음모만 새까맸다. 음모 속에 손가락처럼 가느다란 성기가 쪼그라들어 있었다. 조의 몸은 처음 봤을 때보다 이십 킬로그램 정도 더 부풀어 있었다. 덩치만 커졌지 조의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소년의 것처럼 가늘었다. 내 속에서 은밀하게 들끓던 욕망이 조의 벗은 몸을 보자마자 식어버렸다. 살 때문에 스트레스야. 조 자신이 한 말이었다. 허연 살덩어리가 천장에 설치된 거울에 비쳤다. 성욕이 풀린 조의 몸에 남은 것은 취기와 살이었다. 나는 서둘러 옷을 입고 양말을 찾아 신었다. 양말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 펭귄이었다. 둘째가 붙이고 놀던 스티커였다. 이게 왜 양말에 붙어 있지? 집에서 나오기 전에 둘째 아이를 안았었다. 그때 붙었을까? 스티커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조가 버린 콘돔 두 개가 성기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조는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두툼한 조의 아랫배가 오르락내리락 거렸으므로 나는 불쾌감에 인상을 찌푸리며 방을 나섰다. 방금 조의 몸을 안았던 것이 악몽 같았다. 차라리 취해 있었다면 죄책감이라도 느끼지 않았을 것을. 지저분한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었다.

 

그것이 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틀 후 전화가 왔다.

 

첫째와 둘째는 유치원에 가고 없었다. 나는 유모차를 밀고 셋째와 놀이터에 나가 있었다.

 

-여기 경찰서 형사과입니다. 조씨를 아십니까?

 

두툼한 먹구름이 낮게 내려와 있었다. 수풀처럼 우거진 가로수들이 스산하게 흔들렸다. 곧 비가 시작될 것 같은 날이었다. 나는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조씨가 이틀 전 모텔에서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조사 중입니다. 마지막에 통화하고 만나신 분이 김윤아씨로 알고 있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경찰서로 나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손을 떠느라 제대로 대꾸하지 못했다. 조가 죽었다고? ? 잠에서 깬 아이가 앙, 울음을 터트렸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울어서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휴대폰을 끊으려는 내 귀에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베이지색 핫팬츠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계셨죠? 머리는 단발 파마머리고요. 폐쇄회로에 찍혀 있습니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식의 조롱을 내뱉듯 전화기에서 말이 이어졌다. 형사과로 나오셔야겠습니다. 나는 이틀 전 내 차림새를 그려봤다. 셋째가 더 크게 울었다. 손에 든 휴대폰을 우는 아이 쪽에 대고 있다가 입을 뗐다. 조금 있다가 전화할게요. 유모차를 밀며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은 신도시 아파트의 놀이터였다. 신도시라지만 생긴 지 20년 가까이 돼 가고 있어서 건물은 노후했다. 페인트칠을 새로 하고 광고하고 있는 이름으로 바꿨다지만 낡음은 구석구석 드러났다. 지하철역과 백화점, 대형마트, 학원과 학군, 강남과의 인접 거리, 공원 같은 인프라가 구축돼 있다는 이유로 낡은 아파트는 터무니없는 가격대였다. 내 머리 위로는 20년 동안 굳세게 자란 플라타너스가 울창하게 버티고 있어 그늘이 졌다. 나는 유모차를 흔들어 아이를 재우려 했다. 모처럼의 평온한 오후를 깨 놓는 전화였다. 결혼생활 칠 년 동안, 딱 한 번뿐이었다.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울어댔다. 집에 돌아가려고 유모차를 밀고 놀이터를 빠져나왔다. 놀이터 입구에 설치된 카메라가 보였다. 나는 그 앞에 서서 고개를 들었다. 나와 아이의 모습을 꽉 붙잡듯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아파트 현관 입구에 당연한 듯이 카메라 두 대가 설치돼 있었다. 놀이터 입구에 한 개, 앉아서 잠시 쉬는 벤치에 한 개, 아파트 입구에 두 개. 하물며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곳에도 여지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방에 설치된 카메라를 나는 한 번도 의식한 적이 없었다.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신도시는 조와 함께 살았다면 꿈꿀 수 없는 곳이었다. 내가 겨우 한쪽 발을 걸치고 있는 현실은 조와는 멀었다. 조는 시를 썼다. 작은 출판사에 근무하며 십 년 전에도 지금도 시를 썼다. 시 쓰는 남자와 여자는 같이 자기는 쉬워도 같이 살기는 어려운 법이다. 나는 시보다 아파트를 택했고 열심히 아이를 낳았다. 조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조와 나는 결혼 후 칠 년 동안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내가 자신을 버리고 맞선을 봐서 결혼한 것에 대해 조는 침묵했다. 조는 내가 정신을 져버렸다고 속물 취급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새벽이면 술 취한 조의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화가가 자신의 애인을 벗겨놓고 사랑을 담아 누드화를 그리듯 조는 나와 사랑을 나눈 후 시로 나를 그렸다. 새벽의 문자메시지에는 그때 썼던 시가 적혀 있었다. 눈에 뭐가 씌었을 때는 낭만적으로 보이던 시가 현실에 눈뜨고 나니 치기로 얼룩진 낙서였다. 나는 조의 문자메시지를 받지 않으려고 새벽이면 휴대폰을 꾹, 눌러서 껐다. 그때처럼 두려움에 떨며 휴대폰 종료 버튼을 눌렀다.

 

젖살이 보송보송한 셋째는 거실에 내려놓으니 뒤뚱거리며 돌아다녔다. 첫째와 둘째가 오기 전에 저녁을 지어야 했다. 나는 잡생각을 떨치려고 믹싱볼을 꺼내 쌀통으로 갔다. 남편은 건강을 생각해 현미밥을 먹었다. 현미는 찹쌀과 멥쌀을 반씩 섞어 물에 불려 놓으면 부드러운 밥이 된다. 나란히 놓인 쌀통에서 현미를 퍼내 물에 게워 씻었다. 양상추와 당근과 파프리카를 씻어 샐러드 할 재료를 만들었다. 현미밥과 채식식단. 남편이 즐기는 밥상이었다. 거기에 견과류와 생선을 한 토막 구워내면 만족스럽게 숟가락을 드는 남편이었다. 삼겹살과 소주를 즐기는 조와는 반대의 식단이며 그래서 조의 몸은 풍선처럼 부풀고 남편의 몸은 체중이 일정하게 유지되는지 모른다. 남편은 혈압도 혈당도 걱정 없이 오래 살 것이다. 벌써 죽은 조의 몸이, 마지막 보았던 살덩어리가 생각나 몸을 떨었다. 분명 내가 방을 나설 때는 숨을 쉬고 있었다. 조가 나를 더듬던 손길이 떠올랐다.

 

아파, 새게 쥐지 마. 멍들면 안 돼. 조는 말라비틀어진 내 젖꼭지를 세차게 빤 다음 손으로 쥐었다. 콘돔을 껴. 나 임신 잘 되는 거 알지? 내 말에 조는 멀뚱멀뚱한 표정을 짓더니 한 손을 더듬어 콘돔을 찾았다. 다음 순간 조의 손이 아랫도리를 파고들었다. 조는 칠 년 전처럼 거칠고 어설펐다. 나는 몸을 씻으려고 일어섰다. 실내는 낮은 조명으로 어두웠다. 다행이었다. 아이를 셋 낳고 기른 자국이 아랫배며 가슴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임신할 때마다 배는 부풀었으며 터졌다. 젖을 먹이고 떼고 나면 젖꼭지는 축 처졌다. 그것을 세 번 반복하고 나니 뱃가죽이 흐물거렸다. 밥을 많이 먹으면 배는 주체할 수 없이 나왔다가 늘어졌다 했다. 낯선 남자의 손을 탈 일이 없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나는 아랫배 가릴 것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침대 옆에는 컴퓨터가 있었고 침대 발치에는 벽걸이 텔레비전이 있었다. 인터넷이 되나 보군. 나는 촌스럽게 중얼거리며 샤워 부스로 갔다. 방 안은 벽을 사이에 두고 침대와 침대만 한 대형 욕조가 나란히 있었다. 변기와 샤워부스가 유리문 안에 있는 것에 비해 욕조는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어, 그 안에서 좀 해봐?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욕조 안에는 자동 안마기가 설치돼 있었다. 도대체 이 방에 침대 말고 이딴 게 왜 필요할까? 내 중얼거림을 듣고 조가 대꾸했다. 욕조 안에서 해보라는 거지. 한번 해 볼까? 술 취해 눈도 못 뜨는 조는 낄낄 웃었다. 안마기 말이야. 이런 건 찜질방에나 어울리지. 이거 만든 사람 취향이 궁금하네. 나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말했다. 안마받고 싶네. 안마하면서 해볼까? 조가 또다시 낄낄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조가 틀어 놨던 물이 욕조에 쏟아지고 있었다. 과거의 조와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모텔 풍경이었다. 나는 샤워 부스에 발을 들였다. 나는 몸에 묻은 조의 냄새를 지워냈다.

 

지난 19일 서울의 한 모텔에서 삼십 대 중반의 남자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사인은 정확하지 않으나, 경찰은 사건 직후 모텔을 빠져나간 삼십 대 중반 여자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뉴스는 간략하게 지나갔다. 화면에 내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돼 있지만, 몸은 그대로 노출됐다. 모텔 방에 들어가기 전, 복도에서 서성이던 모습이었다. 남편은 샐러드 접시에 있는 파프리카를 집고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부엌 식탁에서 밥을 먹는 중이었다.

 

-, 베비 좀 봐요.

 

첫째가 셋째를 가리키며 나를 불렀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행주를 찾았다.

 

남편과 아이들은 열한시가 되기 전에 잠이 들었다. 남편의 하루는 정직하게 흘렀다. 아침에 채소와 현미밥, 견과류를 먹고 출근해 하루를 보내고 퇴근해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놀아 주고 잠이 들었다. 12시를 넘기는 날은 드물었다. 의사인 남편은 병원 환자들에게 채식과 현미밥을 권하고 약물남용이 해가 되는 것을 말했다. 잘 듣는 약을 찾아온 환자들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병원은 근근이 유지됐다. 우리 부부는 서로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대신 텔레비전과 아이들을 보다가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 아이들이 잠들기 전까지는 세상에 아이들 보는 일 말고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싶었다. 먹이고, 씻기고, 이 닦이고, 어지른 물건 정리하고. 남편과 나는 허겁지겁 아이들을 챙겼다. 아이들은 잠잘 때가 제일 예뻤다. 남편은 늘 지쳐 떨어져 잠들었다.

 

불 꺼진 집안은 아이들이 쌕쌕 자는 소리와 냉장고 소리만 들렸다. 휴대폰을 꾹, 눌러 켰다.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다. 경찰서 형사과에서 온 것이었다. 내일 출두 바랍니다. 가슴을 콱 누르는 글자였다. 가슴이 덜컥거려 휴대폰을 껐다.

 

-잠깐만 일어나 봐요. 무서워요.

 

잠든 남편의 어깨를 흔들었다.

 

-피곤해. 제발제발, 잠 좀 자자.

 

남편은 귀찮은 듯 팔을 휘젓고 돌아누웠다. 나는 입술을 물어뜯다가 서재로 갔다. 컴퓨터 파워 스위치를 켜며 문득 외로웠다.

 

-아기를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도 돌쟁이를. 애한테 창피하지도 않습니까? 나 이거야 원, 개념 상실한 아줌마시네.

 

베이비 캐리어가 어깨를 짓눌렀다. 나는 일부러 셋째를 앞에 달고 경찰서에 왔다. 형사의 고함에 셋째가 눈을 떠 두리번거렸다.

 

-애를 맡길 데가 없어서요.

 

아기 엉덩이를 추켜올리며 대꾸했다. 셋째를 맡기려면 아이 돌보미를 부르면 된다. 돌쟁이 아기가 있으면 심하게 못 하겠지. 내 바람이었고 그 순간 아기는 방패 막이었다. 부끄러움보다 아기에 대한 동정심을 이용하려 했다. 밤새 잠 못 들고 생각해 낸 묘안이 이것밖에 없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누가 죽었든 나는 세 아이의 엄마이니 나를 내버려 두라는 항의를 하고 싶었다.

 

-애 엄마가 불륜한 게 자랑이요? 사고사라는 거 밝혀졌으니까, 참고인이라는 거요. 그렇지 않으면 용의자로 구금될 판인데 다행인 줄 아시오.

 

형사가 불퉁스럽게 말했다.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소란스럽던 경찰서 안이 일순간 잠잠해지면서 모두의 시선이 나한테 쏠렸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셋째를 데려간 것은 오히려 역효과였다. 형사가 여경을 불렀다. 셋째는 여경한테 안기면서 숨넘어가게 울었다.

 

-요즘 엄마들은 무서운 게 없어. 자식 생각하면 저러면 안 되는 거지. , 나 애한테 뭔 좋은 꼴 보인다고 데리고 와.

 

옆에서 다른 형사가 투덜거렸다. 셋째를 안은 여경은 인상을 찌푸리며 경찰서 밖으로 나갔다. 아기를 뺏긴 것처럼 가슴이 허전했다.

 

- 조씨가 죽기 전에, 당신이 나간 것을 폐쇄회로 텔레비전이 기록했기에

당신의 알리바이는 완벽한 겁니다

 

나를 보고 있는 카메라는 넉 대였다. 그것은 네 개의 눈처럼 보였다

한 개의 눈 속에는 죽은 조가 있었다

 

-빨리 끝냅시다. 어제 일은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기자 하나가 냄새를 맡아서 사건을 키웠죠. 입장이 난처해졌다면 뭐, 어쩔 수 없죠. 사실, 모든 증거가 김윤아 씨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아시죠? 콘돔에 묻은 체액과 침대에 널려 있는 머리카락은 유전자 검사하면 금방 나오죠. 하물며 아들 건지, 딸 건지, 뽀로로 스티커에까지 지문이 찍혀 있더군요. 그런 걸 왜 모텔까지 달고 왔는지 어이가 없었죠.

 

형사는 사진을 내 앞에 나열했다. 고깃집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던 나와 조. 오카메라는 일본술집에서 정종을 마신 후의 나와 조. 모텔에 들어가기 전 길목에서 내가 조에게 기댔던 모습. 모텔 카운터 앞에서 머뭇거리는 나와 조. 그리고 뉴스에 나왔던 모텔 복도에서의 나와 조. 내가 모텔 방을 나설 때의 뒷모습이었다. 사진 속 나는 희미한데 분명 나였다. 나는 내 걸음걸음이 찍힌 사진을 보며 내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파트 숲 구석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숨어 살던 내가 화면에는 뚜렷하게 잡혀 있었다. 나는 미리 설치된 함정에 걸려든 기분이었다.

 

-제가 죽이지 않았어요. 제가 나올 때 조는 자고 있었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남편한테 알리지 말아 주세요.

 

형사의 눈이 조소로 가늘어졌다. 그는 이 정신머리 없는 아줌마를 어떻게 처분할까, 하는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조씨는 사고사였어요. 조씨는 욕조에 죽어 있었습니다. 감전사예요. 욕조 안에 설치된 안마기 전선이 노출돼 있었어요. 안마기를 켜자마자 감전된 겁니다. 설치만 해 놨지, 거의 사용하지 않아서 낡아 있었어요. 물에 자주 잠기는 전선이 부식된 거죠. 남들 안 하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모텔에서 안마기 사용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김윤아씨가 같이 있었으면 바로 119를 불렀을 테니까 죽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아니면 둘 다 죽었을 수도 있고요.

 

나는 발가벗은 조와 내가 둥둥 떠 있는 욕조를 상상했다. 터지도록 살이 찐 조와 뱃가죽이 추하게 늘어진 나, 늘어진 젖가슴, 물풀처럼 흔들리는 두 사람의 음모, 풀린 눈.

 

형사가 조의 사진을 내 앞에 내밀었다. 풍선처럼 부푼 조의 몸이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조는 내가 마지막 본 모습처럼 나체였다. 그러나 조의 얼굴은 내 상상과 달랐다. 조는 요람에 누운 아기처럼 착하디착한 얼굴이었다. 거대한 욕조는 아기 침대로 보였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해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형사의 얼굴을 봤다. 젊은 사람이 안 됐지, 싶은 표정이 형사의 눈에 들어 있었다. 그 날 조가 틀어 놨던 물소리가 내 귀에 쏴쏴, 들렸다.

 

-비가 오는군요.

 

형사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폭우가 내렸다.

 

-조와는 결혼하고 한 번도 만나지 않았어요. 조가 등단했다는 소식이 들렸어요. 조는 시를 썼는데, 등단했다고 동기들이 알려왔죠. 조가 등단 축하 겸 만나자고 했어요. 그 날 조와 만나서 삼겹살에 소주를 한 잔 먹고, 오카메로 갔어요. 정종을 마셨는데, 저는 그 맛이 싫다고 해서 조가 다 마셨어요.

 

-조씨와 만나지는 않았지만, 에스엔에스에서 가끔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형사는 발뺌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했다.

 

-. 에스엔에스로 대화를 주고받았어요. 조의 블로그도 가끔 봤고요.

 

조의 등단 소식을 알린 것은 동기들이 아니었다. 조였다. 조는 신문사는 아니고, 문예지 등단이라며 그래도 십 년 만에 어디냐고 잔뜩 들떠 있었다. 나는 그간 조가 썼던 시를 모두 읽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시는 조의 블로그에 있었다. 조의 시 세계는 초기의 유치함과 큰 시인의 아류 시들에서 점점 벗어났다. 시어는 단단해졌으며 풍부해졌다. 나는 진심으로 조의 시가 부러웠다. 내가 평범하고 안온한 생활에 정신을 판 사이, 조의 정신은 자라고 있었다. 과거에 시는 내 정신이었다. 블로그 속 조의 잘 쓴 시는 현재의 내 정신 같았다. 나는 밤마다 조의 블로그를 탐했다. 올려놓은 시들을 읽고 또 읽으며, 소란스럽지만 공허한 내 하루를 정리했다. 시 한 편을 읽고 나면 머릿속이 꽉 찼다. 등단한 조는 어떤 모습일까.

 

삼겹살과 김치, , 버섯, 마늘이 비스듬한 불판에서 익어갔다. 조는 내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나는 내가 세 번씩이나 다리를 벌리고 산고를 겪었던 걸 까맣게 잊었다. 조와 이렇게 살아도 좋았을 텐데. 같이 술을 마시고 시 이야기를 하면서.

 

-나 월급 많이 받아. 출판사가 잡지사로 바뀌면서 스케일이 달라졌거든.

 

조는 월급이 얼마라는 것까지 이야기했다. 보잘것없는 금액이었다. 조는 거들먹거리면서 대학 동기들의 형편없는 월급을 깔보듯 말했다. 그때부터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 조의 정신적 멘토였던 선배가 있었다. 선배는 사업하다가 어려워져 조에게 자주 온다고 했다. 담배를 사 달라고, 술을 사 달라고, 밥을 사 달라고. 조는 자신이 그 선배한테 어떤 모욕감을 줘서 어떻게 쫓아버렸는지 자랑스럽게 말했다. 조금씩 식어가는 삼겹살처럼 조가 혐오스러워졌다.

 

-나 돈도 많이 모았어. 등단한 것도 다른 출판사에서 연봉을 더 주니까 한 거야. 우리 술 실컷 마시고 쉬다 갈까? 직장에서 내가 직급이 높잖아. 술 마시면 끼리끼리 다 자. 여직원들도 완전 내 밥이지.

 

조는 슬며시 다가와 내 허벅지를 꼬집었다. 나는 아프게 깨달았다. 내가 정신을 안온함에 팔았다면 조의 정신은 아주 부서지고 깨진 것이다. 조는 계속 내 잔에 술을 따라줬다. 나는 오랜만에 마신 술에 머릿속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오카메에서도 조는 내 환상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오카메에는 볼이 볼록한 일본 탈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나는 허연 탈바가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분칠한 게이샤를 우습게 묘사해 놓은 듯했다. 나는 조의 얼굴이 우스꽝스러운 오카메처럼 보였다. 문학에 대한 끝없는 갈망, 어떻게 하면 더 완벽한 시를 쓸까 고심하며 잠 못 이루던 조는 사라지고 없었다. 시어 하나를 찾으려고 밤새 천변을 서성이며 풀꽃을 쥐어뜯던 아름다운 조는 어디 갔을까. 조는 주식투자와 재테크 이야기를 했다. 주식해서 돈을 날린 이야기를 허풍을 섞어가며 하던 조는 나보고 나가자고 신호를 보냈다. 내가 신도시 아파트 숲에 숨어 존재감을 지웠듯 조는 연봉과 주식에 자신을 지워가고 있었다. 나는 지치고 피곤하고 허탈했다. 조는 어느 틈에 내 옆자리에 앉아 내 가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오카메의 실내는 어두웠다. 시끄럽게 떠드는 남자들이 뒷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다행인 것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를 모를 거라는 사실이었다.

 

-주식 오른 거 알지? 이번에 크게 투자할 건데.

 

, 돈 거리며 계속 지껄이는 조의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 나는 진한 키스를 했고 조는 그것이 신호라고 생각했는지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에, 끝없이, 끝없이, 우리는 찍히고 있었구나.

 

-다시 말하지만, 조가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했어요. , 이름도 없는 문예지에 등단했다고요. 모텔은 조가 술을 먹여서 억지로 데리고 갔어요. 아시잖아요. 전 아이가 셋인 엄마예요. 취하지 않았다면 절대 가지 않았을 거예요.

 

형사는 흥흥, 웃었다.

 

-, 자료에는 억지로 끌려다닌 흔적은 없네요. 좀 취해 보이기는 하는군요. 그렇다고 죽은 사람을 강간범으로 고소할 수는 없으니. 조씨는 김윤아씨가 나간 후, 바로 죽지 않았어요. 폐쇄회로에 찍힌, 김윤아씨가 나간 시간만 봤다면, 우리는 김윤아씨를 용의자로 잡아들였을 겁니다. 조씨는 김윤아씨가 나가고 두 시간 후에 카운터에 전화를 걸었죠. 모닝콜을 부탁한 겁니다. 그래서 김윤아씨의 알리바이는 완벽한 겁니다.

 

형사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여경이 셋째를 데려왔다. 아이는 너무 울어서 눈이 시뻘게져 있었다. 여경은 나한테 셋째를 던지듯 안겨주었다. 경찰서 안의 시선이 다시 나한테 쏠렸다. 폭우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졌다. 셋째는 내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배고픈가 봐요.

 

여경이 지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빨리 좀 끝내요. 어차피 사건 종결됐잖아요. 팔이 빠질 것 같아요. 비는 또 왜 이렇게 지독하게 내리는 거야?

 

여경은 두 손을 털고 어깨를 두드렸다. 형사는 나를 데리고 조용한 장소로 갔다. 나는 다른 사람을 돌아볼 사이 없이 따라갔다. 가방에서 우유병과 보온병을 꺼내 분유를 탔다. 형사는 내 행동을 지켜보며 조금 실망한 눈빛이었다. 젖을 먹일 줄 알았는데, 하는 표정으로 내 가슴에 시선을 주었다. 아이한테 우유병을 물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동그란 카메라의 눈이 비스듬히 열린 문으로 보였다. 사방에, 정말 사방에서 나는 끝없이 찍히고 있었다. 저것도 언젠가는 증거가 될까.

 

-조씨가 주식에 투자해 빚을 졌던데, 돈 이야기는 안 하던가요? 젊은 사람이 뭔, 떼돈을 벌고 싶었는지 도박에도 손을 댔던 것 같고. 집에 아픈 사람도 없고, 먹여 살릴 처자식도 없는 사람이 욕심이 과했더군요.

 

나는 오카메에서 조가 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입을 다물었다.

 

-내 아줌마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 잘 들어요. 사는 게 그래요. 과거에 못 맺은 인연 때문에 안달해 봤자 소용없는 거요. 열심히 자식 낳고 만들어온 인생, 자기 거 지키는 것도 잘사는 거요.

 

베이비 캐리어에 안긴 아기는 잠이 들었다. 낯선 곳에서 엄마랑 떨어져 지치도록 운 아이가 안쓰러웠다. 가슴에 안긴 아기의 숨소리가 빗속에서 또렷이 느껴졌다. 머리 받침대를 올려 아기 머리를 감싸줬다. 비가 우산을 뚫을 듯 쏟아졌다. 집중호우였다. 내 발은 물속에 푹 잠겨 있었다. 종아리까지 올라온 물은 탁한 황토색이었다. 도시 한복판이 물에 잠겨 있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동차들은 찰랑거리는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택시를 잡으려 해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길을 되짚어 돌아다닌 것이 후회스러웠다. 우산을 살짝 들어 앞쪽을 봤다. 카메라가 가로수에 숨겨지듯 설치돼 있었다. 내가 오늘 센 카메라의 숫자는 80개가 넘었다. 어쩌면 내가 놓친 것이 더 많을 수도 있었다. 우산으로 가리며 세던 카메라를 올려다봤다.

 

삼십 분 전에 경찰서를 나선 나는 그날 조와 나의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셌던 카메라에 모텔로 향하는 길에서 본 카메라의 숫자를 더했다. 삼겹살집이 있던 곳과 모텔이 위치한 곳, 오카메는 내가 처음 가본 곳이었다. 나는 머릿속에 그 날의 길을 그렸다. 지하철역 계단을 숨 가쁘게 올라와 두리번거리던 2번 출구, 거기서 조를 만나 대학을 끼고 돌았었다. 빌딩 사이를 지나면서 불었던 여름밤의 바람과 길거리 음식점의 호객행위, 그 많은 음식점을 지나서 가장 구석에 위치한 삼겹살집. 여기가 유명한 곳이래. 검색해 봤거든. 조의 말이 떠올랐다. 저기서 한 잔 더 하자. 일본술집이니 정종을 마시면 되겠네. 나는 조가 했던 말을 되뇌며 붉은 등이 걸린 술집을 올려다봤다. 3층이었다. 그리고 또 빌딩을 돌고 돌아 모텔들이 궁전처럼 서 있던 곳. 내가 택시 탔던 곳까지 걸어 나오니 도시가 물바다였다. 수없이 찍힌 내 모습이 물 위에 비쳤다. 무거운 짐을 안은 듯 아기가 달려 있었다. 나는 내내 가리고 다니던 우산을 치웠다. 내가 숨어도 어딘가 다른 곳의 카메라가 나를 찍을 것이다. 바닥이 물에 잠긴 길을 찍고 그 위를 힘겹게 걷는 여자를 찍을 것이다.

 

우산을 치우고 자세히 보니 폐쇄회로가 한 대만 설치된 게 아니었다. 가로등처럼 생긴 지주에 자그마치 여섯 대의 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 이곳에 뭐가 있는데 이렇게 많을까. 나는 거리를 둘러봤다. 특별할 게 없는 인도의 교차로였다. 나를 보고 있는 카메라는 넉 대였다. 그것은 네 개의 눈처럼 보였다. 한 개의 눈 속에는 죽은 조가 있었다. 대형 욕조 안에서 착하디착한 얼굴로 흔들렸다. 안마받고 싶네. 안마하면서 해 볼까? 낄낄. 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또 한 개의 카메라 속에는 내 뒷모습이 있었다. 모텔을 나서면서 죄책감과 수치심에 몸을 떠는 내 어깨가 찍혔다. 카메라는 내가 나간 시간을 정확히 기록했다. 그것은 형사의 말처럼 중요한 사실이었다. 두 시간 후에 조가 카운터로 전화를 할 것이니까. 그 사이 카메라는 모텔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끝없이 찍었다. 조가 카운터에 전화하고 죽은 시간, 다음날 직원이 모닝콜을 해도 반응이 없자 방으로 찾아왔을 시간을 카메라는 기록했다. 형사들이 달려오는 모습, 조의 나체를 찍어대는 또 다른 카메라의 등장까지 면밀히 찍었다. 그것들은 모두 내가 살인범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는 자료였다. 또 한 개의 카메라 속에서 나는 형사 앞에 앉아 떨고 있었다.

 

-저는 정말 죽이지 않았어요.

 

형사가 조의 사고사에 대해 말하기 전이었다. 그 순간 폐쇄회로는 나의 구차함을 드러내는 증거였다. 나는 마지막 한 대의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했다. 형사 앞에 앉아 있는 내가 보였다. 형사는 내 뒷모습을 기록한 카메라에 대해 말해주었다.

 

-조씨가 죽기 전에, 당신이 나간 것을 폐쇄회로 텔레비전이 기록했기에, 당신의 알리바이는 완벽한 겁니다.

 

그때 마지막 카메라는 내 얼굴에 번지는 안도와 한숨을 모른 척해 주었다. 세 아이의 엄마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살아갈 길이 열린 것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던 순간이었다. 나는 폭우 속에서 넉 대의 카메라에 내 얼굴을 또렷이 각인시켰다.

 

나는 가로수를 지나 몇 걸음 걸었다. 잠시 뒤돌아보자 내가 올려다보지 않았던 카메라 두 대가 보였다. 그것은 두 개의 눈이 되어, 조와 걸었던 길을 다시 걸으며 내내 슬퍼하던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사의 전화를 받은 밤, 조의 블로그를 봤었다. 조의 마지막 글이 올라와 있었다.

 

-너는 여전히 붉었고 너는 또다시 나를 버리고 갔다.

 

그 글을 읽었을 때 묘한 쾌감이 들었다. 죽기 전까지 나를 잊지 않았구나. , 웃음이 나오면서 외로움이 가셨다.

 

휴대폰이 울렸다. 첫째와 둘째가 다니는 유치원이었다. 집중호우로 아이들을 일찍 귀가시킨다는 전화였다. 어떻게 해야 집에 빨리 돌아갈 수 있을까. 밥할 쌀도 불려 놓지 않았는데. 나는 길을 좌우로 둘러봤다. 넋을 잃고 카메라를 올라다 보는 동안 도로가 강으로 변해 있었다. 갈 길이 막막했다. 나는 허방을 밟듯 빠져드는 발에 힘을 주고 폐쇄회로 밀림을 향해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걸음걸음마다 수천 개의 내가 재생되고 있었다.




[당선소감] 단언컨대, 글을 쓴다는 것은 나의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매 순간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짐승을 다스리려 애썼다. 밤마다 나를 찾아와 준 그 짐승, 열정에게 입 맞추고 싶다. 때론 지친 내 머리맡에서 나를 내려다보다가 돌아간 열정, 나를 끝없이 찾아오고 기다려주었던 열정, 고맙다. 나이 들지 않는 너를 품고 살겠다. 

오늘에서야 꿈을 살며시 꺼내본다. 글을 쓴다는 것은, 등단하지 않으면 ‘거위의 꿈’과 같다. 남들이 내 꿈을 탓하고, 헛된 꿈은 독이라고 말할 때, 가슴속에서 눈뜨는 짐승을 잠재우며 살았다. 단언컨대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숨쉴 수 있는 유일한 구멍이었다. 

지금 이 순간 다짐해 본다. 지금부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큰 글을 쓰자. 가슴속에서 요동치던 짐승을 내놓고 살자.

꿈꾸는 것에 다가갈 수 있게 도와준 스승님들께 감사한다. 문학을 사랑하게 해주신 김혜순 교수님, 나태함을 탓해주신 박상우 선생님, 마지막에 충고해주신 박기동 교수님께 감사한다. 내 옆에서 늘 힘이 돼준 문우 미선, 언제나 내 편인 뽁, 아름다운 이십 대를 보내게 해준 엔젤클럽 친구들, 지금 내 글을 읽어 준 바로 당신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마감 때마다 열이 나서 내 의지를 더욱 불타게 해준 찬과 내 삶의 거울인 지, 밤마다 잠들지 않는 나를 견뎌준 존경하고 사랑하는 남편, 내가 만들어 놓은 가족이라는 조각에게 늘 미안하고 고맙다. “신춘문예가 뭔지 모르지만 좋은 일 같으니 기름 두 도라무만 넣어 달라”는 사랑하는 엄마 김세금 여사님, 당신이 나를 일곱 번째 딸로 낳은 것은 실수가 아니라 행운이었다는 것을 꼭 보여줄 겁니다. 

마지막으로 밝은 눈을 가진 영남일보 문학상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한다.



[심사평] 실체 없는 삶에 대한 묵직한 질문... 안정감 있는 문장, 문학상 格 높여


본심에 올라온 열 편의 단편을 읽으면서 어떻게 쓸 것인가,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다시 하게 되었다. ‘불편한 계절’은 베트남 이민여성과의 결혼 이야기다. 몇 해 전부터 단골 소재가 된 만큼 색다른 시각에서 풀어나가주길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예상을 뛰어넘지 못했다. 여타의 소설들과 구별되는 ‘사적’인 에피소드가 하나만 있었더라면 금방 차별화되었을 것이다. ‘기념품’은 탄탄한 구성과 문장력이 뒷받침된, 작가의 내공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소설 도입부의 강력하고 자극적인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뒤로 갈수록 흥미가 반감되었다. 독특한 소재임에도 흥미를 붙잡아둘 수 없다면, 그것이 단순히 흥미만을 위한 선택인 건 아니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친부의 폭행과 상처는 쉽게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좀더 차분하고 내밀하게 땅 아래를 흐르는 물처럼 이야기를 써나갔다면 좋지 않았을까, 아쉬웠다.

‘식탁’은 몸에 대한 관심을 소설로 옮겼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로웠다. 구체적이고 즉물적인 어휘를 적절히 사용해 읽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사실 희극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다. 그런 면에서 이야기가 좀더 극화되었다면 주제가 돋보였을 것이다. 중심적인 사건이 뚜렷하게 등장하면 갈등들이 생기고 희극을 통한 세태 비판이 더욱 신랄해졌을 것이다.

‘지오이드면’은 인간의 불안과 공포의 힘을 잘 구현해냈다. 실화를 소설로 이끌어내는 솜씨가 출중할뿐더러 주제를 지오이드면과 연결시킨 부분 또한 자연스럽고 감동으로 다가온다. 정면으로 보여주지 않으며 실체를 향해 들어가는 솜씨가 좋다. 하지만 문장과 구성면에서 아직은 거친 면이 보인다. 작가에게 필요한 건 습작의 기간인 듯 보였고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플레이’는 CCTV가 주된 소재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노출되고 사생활이 보호, 보장되지 않는 현대 생활을 잘 그렸다. CCTV가 포착하고 있는 것이 주인공인 여자와 시인의 삶인데, 그들의 삶은 실체적이지 않다. 유령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의 일상을 포착해낸 CCTV의 장면들 속의 그들을 과연 그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장이 화려하지 않고 안정감이 있다는 점 또한 큰 장점으로 뽑혔다. 영남일보 문학상의 격을 한 단계 끌어올린 수작이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다음을 기약하는 분들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 방민호, 하성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