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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바람은 가끔 옆으로 분다 / 김정진


남자는 방금 들어온 메일을 열고 얼굴이 굳어졌다. 내일까지 제출해야할 견적 자료를 이제야 보내준다는 것은 이 계약은 물 건너갔다는 말이었다. 아이템 종류로 봤을 때 족히 닷새는 소요될 작업이었다.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개자식!"

그동안 남자가 이 계약에 들인 공을 생각하자 이가 빠드득 갈렸다. 믿을만한 인간은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정도 받아먹었다면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껏 비행기로 기차로 불려 다니며 밑을 닦은 자신의 행적들이 적나라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직도 세상을 만만하게 보고 있구나, 혼잣말을 하고는 메일을 삭제 했다. 그날 밤 전화를 받지 말아야했다. 아니, 윤과의 질기디질긴 인연을 어느 한 모퉁이에서 사정없이 끊었어야했다고 남자는 후회했다. 후회란 게 늘 늦기 마련이지만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6개월 전, 늦게 시작한 골프에 재미를 들여 온통 골프 생각만 하고 틈만 나면 연습장으로 필드로 나가다가 몸살기가 느껴져 일찍 잠자리에 든 날이었다. 핸드폰이 진저리를 치다가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잠자리에 들면서 핸드폰 끄는 일을 깜박했나보다. 바닥에 떨어져서도 지치지도 않고 웅웅거렸다. 남자는 끙, 하고 짜증 섞인 신음을 내고 방바닥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들었다. 윤이었다. 하기야 이 늦은 시각에 전화를 할 위인도 이렇게 길게 신호음을 울릴 위인도 윤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자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통화버튼을 밀었다.

"아이쿠, 윤 부장님! 오랜만입니다."

남자는 반가운 느낌을 잘 바른 자기 목소리에 잠깐 놀랐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이 야심한 밤에 어인 일이신지요?"

윤은 이미 취한 상태였다. 

"어이, 정 사장, 우리 사이에 윤 부장님이라니! 친구야, 우리 친구 아이가?"

남자는 실소가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윤이 친구 운운하면 그 다음 이야기는 뻔했다. 돈이었다. 윤이 오늘 밤 마신 술값을 남자가 지불해야한다는 계산이 재빨리 나왔다. 윤은 자기과시를 하고 싶을 때 시간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술값이야기를 했다.

"친구야, 내가 아무 때고 술 사달라고 하면 술 사주는 친구가 있다고 했더니 아, 이 사람들이 요즘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냐고 안 믿는기라. 그래서 내가 화가 나서 전화했다."

윤은 술이 들어가면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서울살이가 십년이 넘어도 사투리만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액수를 물었다. 공치사가 늘어지는 윤의 혀 꼬인 소리를 중간에 자르고 전화를 끊었다. 남자는 문명이 지나치게 발달된 요즘세상이 싫었다. 아무데서나 아무 때나 통화가 가능하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아무데서나 아무 때나 송금이 가능한 환경도 마음에 안 들었다. 왜 핸드폰을 끄지 않아서 이런 덤터기를 쓰는지 억울하다가 윤이라면 내일 아침에라도 기어이 수금을 해 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숨만 크게 한 번 쉬었다.

송금을 하려면 아내를 깨워야했다. 남자는 아직 폰뱅킹이나 인터넷뱅킹 같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여자들의 몫이었다. 경리나 아내가 있다는 것은 참 편리한 일이었다. 한밤중에 아내를 깨운다는 게 좀 껄끄러운 일이긴 했다. 아내와 같은 방을 썼다면 통화를 하는 동안 아내는 잠을 깼을 것이고 통화내용을 유추해서 해야 할 일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남자가 아내와 각방을 쓰는 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거였다. 신혼 때는 한 이불을 덮고 잤다. 침대를 샀고 아이가 생겼다. 세 사람이 침대에서 자기는 너무 비좁았고 조그마한 아이는 예상 외로 많은 자리를 차지했다. 아내는 아이를 안고 바닥에서 잤다. 둘째아이가 태어나자 아내는 딴 방에서 아이 둘을 끼고 잤다. 그러다 큰아이가 혼자 잘 나이가 되자 2층 침대에 두 아이를 재웠다. 아내는 남자 옆에서 몇 번 자보더니 도저히 편치 않다면서 바닥으로 내려갔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공부하러 집을 떠나 방이 남아돌자 아내는 아주 딴방으로 옮겨 앉았다. 남자는 아내와 방을 따로 쓰는 게 편했지만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통화나 채팅을 할 수 있고 방귀를 붕붕 뀔 수도 있었다. 자다가 문득 깨어나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을 때는 TV를 틀거나 혼자 수음을 즐길 수도 있었다. 그런 일들은 조용하고 은근하게 해야만 해서 나름대로 스릴 있고 재미있었다.

남자는 작게 노크했다. 아내 또한 자신이 하는 조용하고 은근한 것들을 하고 있을 수도 있으므로 벌컥 문을 연다든가 하는 예의 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아내는 남자의 늦은 방문을 뜨악한 눈으로 맞았다. 남자는 미안한 낯으로 용건을 말했다. 아내는 고개를 두 번 까딱이는 것으로 남자의 용건을 마무리 했다. 윤의 이름을 뱉는 순간 아내는 남자의 방문목적을 파악했다. 남자는 송금액을 말하고 문을 닫았다. 남자는 돈을 뜯기는 느낌이 들었으나 잘 하면 투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아무 말 없이 노트북을 찾아든 것이다.

다음날 윤의 전화를 받은 남자는 어젯밤의 찝찝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남자 회사의 일 년 매출액의 2/3에 해당하는 구매 건이 연말에 있을 거라고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 계약을 성사시켜줄 테니 걱정 말라는 말을 속삭이 듯 했다. 남자는 사무실 비상계단에 앉아 주위를 살핀 후에 휴대폰을 입술에 바짝 갖다 댄 쥐새끼 같은 윤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남자는 돈을 벌게 해준다는데 쥐새끼면 어떻고 쥐벼룩이면 어떠랴 생각했다.

그날 이후 윤은 서울본사로 울산지사로 남자를 불러댔다. 남자는 요리를 사고, 술을 사고, 여자까지 옆구리에 끼워서 호텔방으로 윤을 올려 보냈다. 늘씬한 여자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걸어가는 윤의 뒤통수에 "너무 무리하지 마라, 친구야! 희숙아, 부장님 잘 모셔야 된다. 알것나?" 하고 혀 꼬인 소리로 말했다. 

남자는 술이 취한 게 아니었다. 접대를 하면서 한 번도 술에 취한 적이 없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었다. 순서는 늘 같았다. 거래처에서 건수가 있다는 냄새를 풍기면 향응을 제공한다. 견적서가 날아오고 적당한 선에서 네고가 이뤄진다. 계약서가 날아오고 다시 향응이 제공되면 물품대금이 입금 되었다. 밥줄이 달린 술자리에서 실수는 용납될 수 없었다. 남자는 적당한 선에서 술을 조절했다. 그러나 상대방에게는 나도 당신처럼 취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술이란 게 같이 시작해서 같이 취해야 마시는 맛이 나는 법인데 접대하는 자가 맨 정신으로 마주앉아 있다면 그런 결례가 없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윤은 신림동에 집이 있었다. 그런데 남자를 서울로 부르면 꼭 호텔방 하나를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단골 술집이 논현동에 있는데도 굳이 방 하나를 따로 요구했다. 그 말은 여자를 사달라는 말이었다. 남자는 울산에서 접대할 때와는 달리 집을 코앞에 두고 성 접대를 받는 윤보다 성 접대를 하는 자신이 더 역겹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남자는 서울에서 윤을 접대할 때는 여자 없이 혼자서 잤다. 오래 뒤척이거나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지만 오물을 피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윤을 만났을 때는 남자도 윤도 말단 사원이었다. 윤은 대기업으로 철강제품을 납품하는 회사의 구매부에, 남자는 철강유통회사 영업부에 근무했다. 사장의 지인을 끈 삼아 윤의 사무실에 들락거리며 공을 들였다. 그때의 윤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미터 65센티도 채 안 돼 보이는 단신의 왜소한 체구가 오히려 눈에 띄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눈빛이었다. 원래도 반들거리던 눈동자가 더 큰 회사로 옮기고 승진을 하면서 더 반들거리게 된 것이다. 남자가 기억하는 윤과의 첫 대면은 썩 유쾌하지 못했다. 분명히 발주가 있을 것이라는 연락을 받고 윤을 찾아갔건만 인사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고갯짓을 한 번 하고는 제 할 일만 했다. 남자는 그렇게 삼사십 분을 윤의 옆자리에 앉아서 기다려야했다. 윤은 남자에게 몹시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남자는 속으로 '좆만한 새끼가!' 하고 욕을 했지만 예, 예, 하면서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윤의 말을 들었다.

몇 번의 접대와 봉투가 오고 간 후 윤은 남자에게 부쩍 친한 척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일이 생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해졌다. 납품을 하다보면 녹이 슬거나 휘어진 파이프가 있기 마련이었다. 카본파이프는 습기에 취약해서 쉽게 녹이 슬었지만 녹이 깊어 곰보가 지거나 천공이 생기지 않는다면 사용에는 문제가 없었다. 윤의 상사가 제품에 대해 한 마디 했다면 윤은 상사를 설득하지 않고 즉각 새 제품으로 교환을 요구했다. 남자는 제품을 반품 받아서 쇼트나 샌딩 처리를 한 후에 다시 납품했다. 운송비와 기타 경비가 곱으로 들었다. 무엇보다 남자는 윤의 이중적인 태도가 혐오스러웠다. 그것은 사회구조의 가장 말단에 위치한 자기혐오이기도 했다. 

남자의 부모는 노점상이었다. 리어카에 채소를 싣고 주택가 골목을 누비며 무, 배추, 호박 따위를 팔았다. 판자촌에서 온 식구가 방 한 칸에서 살았다. 남자가 동생을 키우고 동생은 그 아래 동생을 키웠다. 그리고 각자 자신을 챙기며 살아야만 했다. 생활은 눈금자의 눈금만큼씩 펴졌다. 자세히 보면 제자리걸음만 열심히 하고 있는 꼴이었다. 남자는 언젠가는 사회구조의 중심이나 꼭대기쯤에 가보고 싶었다. 

남자가 가장 잘 하는 것은 견디는 것이었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를 만나든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적절히 대처했다. 그것이 구토가 날 정도로 고약한 것일지라도 견뎠다. 살면서 늘 해오던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런 견딤이 없었다면 하층구조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업은 견디는 일이었다. 초대받지 않은 곳에 가서 낯선 시선과 홀대를 견디며 초대가 빈번한 사람이 되어야했다. 

남자의 영업력은 탁월했다. 한 번 술을 마시면 누구든 호형호제하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술이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만드는 순간까지 비위를 맞추다보면 대개는 남자를 편하게 받아들였다. 술을 마실 줄 모르는 사람과는 밥을 먹었다. 그런 사람은 대부분 소극적이거나 자기관리가 철저한 성격이이어서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적재적소에서 분위기를 띄울 줄 알고 확실하게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도록 자신을 낮췄다. 그렇다고 남자가 화통하고 놀기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소심하고 쉽게 피로를 느끼는 편이었다. 자신의 소심함과 저질체력을 숨기기 위해 더 큰 목소리로 호응해주고 커피와 각성제를 빌어서 길고 긴 접대의 향연에 임했다. 뭐든 하면 늘게 마련, 남자는 화통하고 잘 노는 사람으로 거래처에서는 알고 있었고 남자도 어느 날부터는 자신의 성격이 원래 그랬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메일을 읽고 윤에게 욕을 퍼붓고 자책을 하는 것은 남자 혼자 할 수 있어서 그나마 덜 힘들었지만 아내에게 계약이 결렬됐다는 말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내가 할 실망보다 그 인간 너무 믿지 말라던 아내의 말을 무시한 데 대한 미안함과 쑥스러움 때문이었다. 아내는 표현이 솔직한 사람이었다. 에둘러 말하거나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못했다. 아내의 그런 면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 일로 쓰고 다닌 경비가 수천은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내는 몇 날 잠을 못 잘지도 모른다.

평소에 남자는 뭐든 제 손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자기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철저함이 있었다. 정기결제로 입금 될 물품대금도 통장에 찍히지 전까지는 내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돈이라는 게 간사해서 언제든 마음이 바뀌어 딴 곳으로 새어나갈 수 있었다. 자금사정이 좋지 않아 결제가 미뤄질 수도 있고 그 사이 부도가 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남자는 이번에는 왠지 자꾸만 들어올 돈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는 했다. 그런 낌새를 채고 '옜다, 엿!'하고 돈이 달아나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자가 영업직을 버리고 사무실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이 윤이었다. 구매부 과장이 된 윤에게 부스러기를 주우러 간 것이었다. 남자의 신용과 자금력으로는 윤의 회사와 큰 건의 거래는 불가능했다. 너무 보잘 것 없어서 선뜻 납품하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것들을 던져달라고 부탁했다. 윤 또한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사람이었으므로 남자는 비교적 편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윤은 언제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냐는 뜨악한 얼굴로 눈조차 마주치려하지 않았다. 건성건성 드문드문 영양가 없는 말 몇 마디를 듣고 엿 같은 기분으로 돌아섰다. 그 후로 한동안 남자는 윤을 잊었다. 가끔 윤을 생각할 일이 생기면 가래침을 뱉었다.

어찌어찌 사무실이 자리를 잡고 직원도 몇 생겼다. 남자는 철강단지 안에서 제법 잘 나가는 사장이었다. 고철장사로 시작해서 철강업자가 되었거나 그런 사장 아래서 일을 배워 독립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바닥에서 남자는 배운 놈이라 좀 다르다는 말을 들으며 비교적 빠르게 성장했다. 그래봤자 지방대학 출신일 뿐이었지만 남자는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나았다. 

어느 날 사무실에 나타난 윤을 보고 남자는 잠깐 동안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할지 난감했다. 서류가방을 들고 초라한 웃음을 짓고 있는 윤은 그 사이 더 작아진 것 같았다. 지난 감정을 앞세우기에는 윤의 몰골이 남자의 뒤통수를 친 격이었다. 윤을 데리고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윤은 슬금슬금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남자는 그런 윤을 그냥 보낼 수 없어서 술도 샀다. 술이 들어가자 윤은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근무하던 회사가 부도가 나서 더 작은 회사에 평사원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사람을 부리다가 부림을 당하는 게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윤에게 말했다.

"형편에 따라 적응해야겠지요? 그게 가장의 비애 아니겠어요? 또 부릴 날이 오겠지요."

정작 남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새꺄, 정신 차려!' 였다.

윤이 본론으로 들어갔을 때 남자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장난을 치자는 이야기였다. 남자에게 구매를 하겠다. 단, 일정 금액을 얹을 테니 얹은 금액만큼은 자신에게 달라는 말이었다. 윤의 말에 따르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남자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런 일을 해도 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고 윤에게 쉽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남자는 그때 서른 중반이었고 아직은 때가 덜 묻은 시절이었다. 

아내의 반응은 남자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내 그럴 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이미 지출된 경비에 대해서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중견기업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아직도 자금관리만은 직접하는 아내였다.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남자에게 묻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방법이었다. 게다가 남자의 씀씀이도 관리가 되는 일이기도 했다. 남자는 불편한 점이 없지 않았지만 돈 관리를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맡긴다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조카가 경리로 있으면서 몇 억인가를 빼돌려서 명품을 사는 데 탕진했고 그 회사는 결국 부도가 났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소규모의 회사뿐만 아니라 제법 규모가 있는 회사라도 일 이억에 부토가 나는 일은 흔했다. 그보다 적은 액수로도 부도는 날 수 있었다. 의리나 인정으로 어음결제를 미루고 부도를 막을 수는 없다.

"그 인간이 당신에게 물 먹인 게 이번으로 두 번째죠?"

남자는 아내의 말에 상처에 고춧가루를 뿌린 듯 고통스러웠다. 이번 상처와 지난 상처가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윤의 제안을 남자는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윤이 새로 몸담은 회사는 남자가 영업을 갔다가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한 곳이었다. 이미 거래처가 있고 이름도 듣지 못한 소규모의 회사와는 거래할 수 없다는 냉랭한 말을 듣고 돌아왔었다. 윤이 제안한 장난을 친 적은 없었지만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남자가 근무했던 곳에서도 그런 일로 쫓겨난 직원이 있었다. 일종의 도둑질이었다. 남자 입장에서 보면 도둑질이 아니라 도둑질을 눈감아 주는 일일 뿐이었다. 윤이 무슨 짓을 하든 그건 남자가 알 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직원 중 누군가가 그런 일을 한다면 남자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교묘한 도둑질에 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 일을 한다는 게 꺼림칙하고 끔찍했다. 며칠 뜸을 들이다가 윤에게 연락했다. 

"대금에 얹는 일은 하지 맙시다. 그건 도둑질이잖소? 그냥 내가 일정액의 커미션을 주는 걸로 합시다. 내 쪽에서는 영업비라고 생각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둘 사이의 거래는 성실하게 이루어졌다. 윤은 커미션 외에도 자주 찾아와서 밥값이며 술값을 축냈다. 윤은 커미션을 통장으로 받으려하지 않았다. 흔적이 남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꼼꼼한 일처리와 영리한 영업으로 윤은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 같았다. 구매량이 점점 많아졌다. 대금은 어음으로 결제되었지만 신용이 좋은 회사여서 남자는 걱정하지 않았다. 어음이 들어오면 만기일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할인을 했다. 업계에서는 '어음깡'이 통상적인 용어다. 적지 않은 수수료를 물었다. 어음할인 수수료, 윤의 커미션과 접대비를 계산해보면 별로 남는 것이 없었다. 그렇더라도 돈이 돈다는 게 중요했다. 돈은 혈액처럼 혈관을 타고 순조롭게 돌아야한다. 그것이 막혀버리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돈이 돌고 있는 한 적자가 나더라도 회사는 존재할 수 있었다. 회사가 존재해야 흑자를 꿈꿀 수 있었다.

처음으로 큰 물량이 떴다. 남자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큰 물량이었다. 공급을 위해서는 수급이 있어야한다. 수급에는 자금이 필요하다. 남자는 회사의 규모를 키우고 유지하는 데 전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늘 자금이 부족했다. 여기서 받아서 저기에 주고 저기에 받아서 여기에 주는 꼴이었다. 종종 사채를 쓰기도 했다. 이 건을 성공적으로 끝내면 그런 일들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윤이 말했다.

"친구야, 우리 이번 건으로 한 번 폼 나게 일어서 보자. 우리 친구아이가? 나는 정 사장이 내랑 갑장이라는 걸 알았을 때 마, 말도 놓고 농담도 하고 그라고 싶었다.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매고? 우리 친구 묵자!"

남자는 그 말에 비위가 몹시 상했지만 큰일을 도모하는 시점에서 자잘한 일에 신경을 쓸 게 아니란 생각을 했다. 십년을 알았으면 친구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윤은 남자의 자금력을 걱정하면서 믿을만한 사람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예순은 넘겼을 여자는 곱고 단아했다. 사채놀이를 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교양과 귀태가 흘렀다.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커피와 과일을 내오라고 이르고는 남자를 찬찬히 뜯어봤다. 커피와 과일이 나오자 여자는 입을 열었다.

"윤이 소개하는 사람이라 믿고 만납니다. 오래 쓸 것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이자율이 얼만지는 알고 왔지요?"

여자한테서 진한 향이 느껴졌다. 뿌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향수는 몹시 자극적이었다.

"네, 석 달만 쓰면 됩니다. 이자는 4부로 들었습니다."

남자는 제 입으로 말하고 나서야 4부라는 게 얼마나 높은 이자인지를 실감했다. 원금의 4퍼센트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만큼 큰돈을 융통할 수 있는 곳을 남자는 알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자는 차용증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여자는 미소를 지으면서 공증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커피가 썼다. 과일도 썼다. 

일은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적당한 물건들을 적당한 가격에 매입했다. 윤은 큰 건수이니만큼 얼마간의 선수금을 원했다. 남자는 커미션에도 선수금이 있는지 의아했지만 이 일에서 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기에 커미션 중 일부를 건넸다.

납품이 끝나고 윤은 직접 어음을 들고 남자에게 왔다. 남자는 거하게 윤을 접대했다. 윤은 대접이라고 말했고 남자는 접대라고 생각했다. 그날따라 윤은 남자에게 더 자주 '친구야'를 외쳐댔다. 싫지 않았다.

어음을 할인한 돈을 들고 집으로 갈 때 남자는 난생처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바닥을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행복감으로 바뀌었다. 아내를 침대로 불렀다. 수표와 돈다발을 아내에게 던지며 큰 소리로 웃었다. 아내도 남자를 따라 오랜만에 큰 소리로 웃었다. 두 사람은 너무 행복해서 서로 껴안고 울었다. 그동안 견뎌온 많은 일들을 다 털었다. 아내는 이제 더 이상 친정이나 친구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제일 좋다고 했다. 남자는 파이프를 잔뜩 사서 창고를 가득 채울 수 있게 되어서 좋다고 했다. 파이프 천 톤을 가지는 게 남자의 목표였다. 남자는 그 정도면 아들까지도 먹고 사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남자와 아내는 머리맡에 돈뭉치를 두고 오래 서로를 탐했다.

남자의 행복은 딱 한 달로 끝이 났다. 납품하고 익월에 정기 결제가 있는 회사가 있고 두 달 만에 정기 결제가 있는 회사가 있었다. 윤의 회사는 후자였다. 3개월짜리 어음 만기가 돌아왔을 때 어음할인을 해줬던 곳에서 부도사실을 알려왔다. 남자는 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윤의 회사로 달려갔다. 채권자들과 물품공급업자들이 회사 집기를 던지며 사장 나오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창고라도 털자고 누군가 말했지만 또 다른 누군가가 이미 은행에 넘어갔지 남았겠소? 털면 절도죄로 잡혀갈 거요, 하고 말했다. 남자는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았다. 집기를 부수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은 이겨낼 정도의 여력은 있는 사람들일 거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인생은 도미노와 같은 것이었다. 하나가 무너지면 옆에 것들이 연이어 무너지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땡, 소리 나게 바닥을 쳤다. 남자는 경찰서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어음을 회수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경찰서를 나올 때 한 순간 휘청하면서 앞이 캄캄했다. 남자는 경찰서 계단에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서 윤이 소개해 준 여자에게 갔다. 여자는 이렇게 빨리 다시 올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남자는 윤의 소재를 아느냐고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윤이 내게 연락을 해오지 내가 윤에게 연락을 하지는 않지요, 하고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은 윤의 소재를 모른다는 말인지 안다는 말인지 애매했다. 남자는 여자가 윤에 대한 질문을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다는 것을 눈치 챘다. 

"아마도 사장님은 지난 번 보다 더 돈에 쫓기고 있을 테지요? 그런 상황에선 돈을 빌려주지 않거나 이자를 더 받는 게 통상적입니다만, 거래가 한 번 있었고 그 거래가 성실했으니까 지난번과 같이 이자를 받도록 하지요."

여자는 선심 쓰듯 말했지만 차용증과 함께 담보를 요구했다. 남자는 지난번에는 왜 담보이야기가 없었는지 생각해 봤다. 윤이 계약서를 여자에게 담보로 제공했을 거라 짐작되었다. 남자는 윤도 무서웠고 앞에 앉아 우아하게 커피 잔을 든 여자도 무서웠다. 교양과 귀태는 남자와 같은 사람들이 제공하는 피 같은 돈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것을 남자는 알게 되었다. 

매달 이자를 감당하기도 벅찼다. 그러다보니 물품대금을 미루게 되고 신용이 하락했다. 신용이 하락하자 남자는 비싸게 물건을 사와야만 했다. 비싸게 사온 물건은 비싸게 팔거나 마진이 거의 없이 팔수밖에 없었다. 비싼 물건은 잘 팔리지 않았다. 남자는 더 이상 철강단지에서 잘 나가는 젊은 사장이 아니었다. 경험도 없는 놈이 먹물 좀 들었다고 까불다가 말아먹은 놈에 불과했다. 직원들을 모두 내보냈다. 전세로 있던 사무실과 창고를 정리하고 8평짜리 철강단지 사무동으로 옮겼다. 창고 안에 쌓아두었던 파이프들은 헐값으로 처분한 지 오래였다. 

북쪽에 위치한 사무실은 언제나 어둡고 추웠다. 혼자 있을 때는 가능하면 난로도 때지 않았다. 월세도 밀리기 일쑤였다. 추락한 젊은 사장은 금세 잊혀졌는지 전화도 몇 통 오지 않았다. 남자는 춥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외롭기도 했다. 무엇보다 경리도 한 명 없는 사무실을 누가 신뢰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학습지 교사로 생활비를 벌고 있는 아내를 불렀다. 아내 역시 인터넷이 세상을 바꾸는 바람에 학습지 교사를 그만 둬야하는 상황과 마주하고 있었다. 방문교사가 찾아와서 문제지 검사나 하고 가는 교육은 구식이 되었고 불편한 일이 되었다. 그런데도 학습지 회사는 회원 수를 늘리라고 아침마다 닦달했다. 아내는 사교적이지도 못하고 비위가 좋지도 못해서 근근이 가방을 메고 벨을 누르며 다니고 있었다.

아내가 사무실에 나오자 남자는 좀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함께 출근하고 함께 추위를 견디고 함께 퇴근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좋았다. 아내가 사무실에 나와서 일을 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남자는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마누라까지 불러내 일시키는 무능력한 남자로는 안 보이고 싶어." 지금은 이미 사람들에게 무능력한 남자라는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그런 시선 따위는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어쩌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남자 혼자 예민하게 군 것 일지도 몰랐다.

전화 한 번 울리지 않는 날도 남자는 괜찮았다. 트럭에서 파는 어묵을 국물과 같이 비닐봉지에 담아 와서 아내랑 점심을 대신했다. 아내는 괜찮아질 거라고 주문을 걸 듯 자주 말했다. 어쩌다 걸려오는 전화를 얼마나 상냥하게 받는지 남자는 놀라곤 했다. 파이프 몇 개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건너 편 사무실의 창고에서 외상으로 물건을 사고 그 사무실의 절단기와 크레인을 빌려 썼다. 일은 많고 복잡한데 이문은 얼마 남지 않는 일들을 남자에게 주기 시작했다. 남자는 일부러 귀찮다고 투정부리듯 말하면 아내는 짐짓 아이를 나무라는 엄마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작은 일일지라도 일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작은 일이 쌓이자 신용이 되었다. 남자는 쓴 맛을 본 뒤에 정신 차린 괜찮은 놈으로 철강단지 안에서 인식되기 시작했다. 

철강단지의 월세 사무실을 벗어나 창고 옆 컨테이너박스에 사무실을 꾸린 남자는 뿌듯했다. 아직은 파이프 몇 다발이 재고의 전부지만 창고를 가득 채우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남자는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새롭고 희망차기만 한 어느 날 남자는 컨테이너박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낯익은 얼굴에 눈을 의심했다. 윤이었다. 남자가 인사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할 때 윤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이상한 악수였다.

"“어이쿠! 정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너무 격조했지요? 하하하하"

남자는 격조라는 단어에서 비위가 확 상했다. 도무지 윤과 격조를 운운할 사이는 아니었다. 남자가 아직 입도 열기 전에 윤은 번지르르하게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윤이 내민 명함에 산업용 열교환기용 보일러를 제작, 수출하는 상장회사 이름이 찍혀 있었다. 그 아래 윤의 이름이 있었다. 부장이었다. 명함을 보다가 윤을 보았다. 의기양양한 얼굴로 남자의 시선을 맞받았다.

"정 사장, 이제 퇴근 하지? 한 30분 먼저 퇴근해도 안 되나? 사장인데?"

남자는 이 자리에 아내가 없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아내는 몸살기운이 있다며 일찍 퇴근했다. 윤의 방문은 늘 해가 질 무렵이었다는 것을 남자는 기억해냈다. 밥과 술과 잠자리까지 쓰리스텝으로 연결이 되는 소위 '풀코스'를 즐길 타이밍을 윤은 잘 알고 있었다. 남자는 어떻게 거든 거절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잊고 있었던 여자의 향수냄새까지 기억이 났다. 헐값으로 떠넘긴 재고들과 다른 사무실로 보내야했던 일 잘하던 직원들 얼굴도 기억이 났다.

"이제 단순하게 파이프를 파는 시대는 끝났어. 저거 팔아봤자 얼마나 돼? 고부가가치의 아이템으로 갈아타야 된다고. 한 두 공정만 더 거치면 두 세 배의 이익이 창출 되는데 왜 이렇게 구시대적으로 사업을 하고 있어?"

남자는 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열교환기용 튜브에 대한 이야기였다. 파이프는 두께와 길이만 맞춰서 팔면 되지만 열교환기용 튜브는 기계적 성질을 고려해서 인발과 열처리 등을 거쳐야하고 그런 과정에서 금속의 성질이 변하는 것도 감안해야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파이프는 단순한 만큼 용도가 다양해서 소용 되는 곳이 많았지만 튜브는 사용이 한정되어있었다. 한정된 업체를 상대로 영업과 판매를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복잡한 공정을 거쳐 한정된 업체에 공급하는 형태이니 고부가가치일 것이고 동시에 치열한 경쟁을 의미하기도 했다. 남자는 사전적 의미만 알고 있을 뿐 구체적인 것들은 알지 못했다. 

"끝난 시대 붙잡고 있는 나는 왜 찾아왔소? 아직은 내가 털릴 게 아무 것도 없으니 뭐가 좀 생기면 그때 오지 그랬소?"

남자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게 많다는 것을 직감했다. 잘만하면 실질적인 공정들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더 잘 하면 새 시대에 걸맞는 사업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부한다, 생각하고 밥값 술값은 수업료다, 생각하기로 하니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한편으로 설마 이 인간이 또 나를 엿 먹이기야 할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윤은 작은 체구에도 잘 먹었다. 그렇게 사라졌다 나타났는데도 어색함이나 미안함 따위는 어디에도 없는 듯 했다.

"정 사장, 지난번에는 속 마이 상했제?"

남자는 부도 사실을 진즉에 알고 있었을 텐데 왜 미리 귀띔을 안 했는지 묻고 싶었다. 그 정도 규모의 회사가 하루아침에 부도가 날 리 없었다. 윤은 부도가 날 조짐을 알고도 남자에게 발주를 하고 여자를 소개해서 사채를 쓰게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자에게서 커미션을 먹었듯 여자에게서도 커미션을 먹었을 것이고 회사에서는 또 뭔가 잇속을 챙기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늘 들었다.

"정말로 나도 몰랐다. 알았으믄 내가 그랬겄나? 너무 면목이 없어서, 거래처가 한두 군데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잠수를 탄 기라. 오해 했을 끼고만. 암, 나라도 오해 했제!"

남자는 윤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그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지나온 그 캄캄하고 막막했던 세월은 들추고 싶지 않았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튜브를 생산한다고 해도 판로가 있어야지. 인발공장도 뚫기 힘들고 수압테스트니 뭐니 하면서 제품 검사도 꽤 까다롭다고 하던데?"

윤은 어떤 소재를 사서 어느 공장에서 가공을 할 것인지는 자신이 다 알아서 선을 댈 것이니 염려 붙들어 매라고 했다. 판로는 자기가 있지 않느냐고 했다. 절대 부도날 일은 없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남자는 여러 손을 거쳐 윤의 회사 어음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할인 수수료가 다른 어음에 비해 훨씬 쌌다. 어음할인업자는 이런 어음을 들고 와야 나도 좋고 사장님도 좋은데 말입니다, 하고 말했었다.

남자는 윤의 소개로 소재를 사고 가공을 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귀동냥도 하고 전문서적도 읽으면서 튜브에 관련된 지식들을 쌓았다. 화학적 성질과 기계적 성질, 물성치에 대해서 알아갔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대체 소재들까지도 알게 되었다. 남자는 단순한 판매가 아닌 제조가 마음에 들었다. 물건을 만든다는 것은 다양한 변수를 가졌다. 온도와 시간, 처리방법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경제적 손실 위험도 따랐다. 언제나 긴장해야했고 연구해야했지만 재미있는 일이었다.

윤은 처음의 호언장담처럼 든든한 구매처는 되어주지 않았다. 남자는 큰 기대가 없었으므로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부만 열심히 한 것이 더 안심이 되었다. 윤과의 거래는 어쩐지 불안할 것 같았다. 어차피 큰 물량을 공급할 재력도 실력도 없었다. 남자는 자기 통장에 든 돈 외에는 어떤 돈도 믿지 않았다. 남에게 돈을 빌리는 일은 비싼 이자를 주고도 비굴하고 구차했다.

어쨌거나 윤은 파이프에서 튜브로 갈아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남자는 그것만으로도 윤과의 과거는 덮을 수 있었다. 철강단지에서 했던 것처럼 튜브를 팔았다. 부스러기부터 천천히 덩어리를 향해 갔다. 속도라는 게 가속이 붙게 되면 더 이상 힘을 가하지 않더라도 달리게 되어있다. 덩어리까지 가기가 힘들었지 그 후로는 남자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붙었다.

제조 시설도 없는 남자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외주공장 직원들을 자신의 직원처럼 대했기 때문이었다. 두세 달에 한 번씩 회식비를 보내고 휴가철이 되면 휴가비를, 명절이 되면 갈비를 보냈다. 남자는 내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면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외주공장 직원들은 남자의 주문을 가장 신속하게 처리했고 어떤 요구도 흔쾌히 들어주었다. 남자는 한 공장에만 생산을 의뢰했다. 정확한 결제로 가격 조정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은 경쟁업체들 보다 싸고 질이 좋았다. 문제가 생기면 남자는 업체와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았다. 무조건 새 제품으로 교환해 주었다. 업체들은 남자와 거래할 때 불안해하지 않았다.

국가경제가, 세계경제가 어렵다고 매년 난리를 쳐댔다. 남자에게 경기가 좋았던 세월은 인생을 통 털어 지난 5년이 전부였다. 그 5년 동안 아이 둘을 유학 보냈고 작지만 사무실과 공장도 지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좋지 않은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산 소재로 튜브를 가공해서 일본산으로 둔갑을 시켜 유통한 업체들이 경찰 조사를 받고 사장이 형을 살기도 했다. 아예 중국에서부터 일본브랜드로 마킹까지 해서 들어오는 제품들도 많았다. 한국에서 가공을 한 제품보다 더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쉽게 그런 일들을 그만두지 못했다. 일본산으로는 수지타산을 맞출 수도 없었고 아예 발주가 불가능했다. 남자도 몇 번 알고도 모르고도 그런 제품을 사기도 했고 팔기도 했다. 욕심을 부리다가 나락으로 떨어져본 기억이 남자를 그런 일에서 서둘러 손을 떼게 만들었다. 그러자 총매출은 비슷한데 이윤이 대폭 감소했다. 이미 씀씀이가 커진 회사와 집을 유지하기에도 빠듯했다. 남자는 3천 톤의 재고를 갖고 있었지만 그걸로 아들 대까지 먹고 살 수는 없었다. 뭔가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남자는 제자리걸음만 하다가 종내는 뒷걸음질 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종종 잠을 설쳤다. 그런 남자에게 윤이 자기 회사 프로젝트 하나를 슬며시 내민 것이었다. 

윤의 제안을 남자가 덥석 문 것은 아니었다. 남자도 나이를 먹으면서 먹을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크고 달콤할수록 무병장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 알았다. 아내와 이야기해보고 절친한 거래처 사장과도 의논했다. 두 사람 다 비슷한 말을 했다. 투자가 아니라 투기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라고 했다. 잘 되면 크게 한 탕 하는 것이고 아니면 얼마간의 손해와 상처를 안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남자는 아무리 자제하려고 해도 자꾸만 꿈을 꾸게 되었다. 자체브랜드를 가지고 싶었다. 그러자면 제조공장이 있어야했다. 지금의 사무실과 창고의 세 배의 부지와 제조시설이 있어야했다. 남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도 못 저지를 일은 아니었지만 은행 빚을 과도하게 짊어지고 사업을 벌이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은행 배만 불려주다가 쪽박을 찰 수도 있었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신중해지는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한 번 했던 쓴 경험들은 반복하지 않는다는 게 남자의 신조였다. 중국에서 파이프를 수입해서 자신의 공장에서 가공을 하고 금속비파괴검사기로 테스트를 거치면 일본제품 못지않은 튜브를 만들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일본제품과 동등한 품질의 제품을 일본제품보다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다. 한국제품에 대한 신뢰도는 일본 다음으로 높은 편이어서 해외수주에도 경쟁력이 있을 게 분명했다. 남자는 합법적이고도 고부가가치사업에 대한 아이디어와 기술력이 있었다. 자본만 있다면 남자는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윤과 다시 긴밀하게 얽히는 일은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면 윤이 남자에게 지금의 안정을 가져다 준 것이기도 했다. 남자는 딱, 이번 한 번만 위험한 관계를 가지기로 결심했다. 물량확보는 발주서를 받는 날부터 하면 되니까 위험부담이라고 해봤자 윤의 접대비가 전부일 것이었다. 어차피 사업을 시작한 그 순간부터 배알은 출근하면서 집에 두고 나왔다. 자존심쯤은 일이 끝난 후에 챙겨도 된다고 자신을 독려했다.

생각보다 윤은 강적이었다. 남자가 더 신중해진만큼 윤은 더 영리해져 있었다. 윤이 요구하는 것들은 언제나 상상 이상이었다. 남자를 서울로 울산으로 불러서는 윤의 부하직원들을 접대하게 했다. 윤의 접대까지는 어찌해보겠는데 윤의 부하직원들까지는 남자의 자존심에 작은 상처를 냈다. 윤은 부하직원들 앞에서 남자를 잘 나가는 사업가로, 친구로, 수하로 들었다 놨다 했다. 윤이 들면 목을 길게 빼고 들리고 윤이 놓으면 몸을 최대한 낮췄다. 남자에게 6개월은 너무 긴 세월이었다.

어제, 남자는 윤의 부하직원의 전화를 받았다. 몇 번 술자리를 같이 했던 사람이었다. 

"이게 말입니다. 사실 업체를 통해 시행할 프로젝트는 아니었거든요. 이렇게 큰 물량을 왜 한 손을 거쳐 하겠냐고요. 그냥 우리가 직접 구매하기로 애초부터 계획되어 있던 거였다는 말입니다. 구매 리스트를 부장님이 굳이 보내라고 해서 보내는데 그냥 견적이나 한 번 내 보세요."

남자는 뒷목을 잡았다.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나왔다.

"사장님, 부장님과 20년 지기 친구가 맞긴 맞아요? 부장님을 저보다 모르시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견적서는 내일까지 보내주셔야 한답니다."

아내와 거래처 사장의 조언은 잘못된 것이었다. 윤에게 들인 돈은 생각나지 않았다. 윤에게 바닥까지 보인 자존심이 창피하고 부끄럽고 이가 갈렸다. 같은 인간에게 계속 같은 일을 당하는 자신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남자는 벽에다 머리를 짓찧고 싶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엘리제를 위하여가 구슬프게 늘어졌다. 핸드폰 화면에 윤의 이름이 떠 있었다. 남자는 전화를 받을지 말지 고민했다. 무시를 할 것인지 욕을 퍼부을 것인지 결정해야했다. 어느 쪽도 시원한 결말을 없을 것 같았다. 화면을 밀었다.

"친구야, 견적은 뽑고 있나? 가격을 잘 조정 해봐라. 그게 말이야 워낙 경쟁이 치열한 프로젝트라서 웬만하면 쪼끔만 붙이라. 그래야 내가 어떻게든 힘을 써 볼 수 있지 않겠나?"

남자는 잠깐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침을 삼키고 깊게 숨을 들이 쉬었다.

"고맙다 친구야. 내가 너 때문에 살맛이 난다. 오늘 거하게 살 테니까 논현동 그 술집으로 올래? 예약해 놓고 저녁비행기로 갈게. 뭐, 부하직원들도 함께 나오면 좋고."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윤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부하직원을 전부 데리고 나와서 부서회식을 시켜도 되겠냐고 물었다. 남자는 그것쯤이야! 라고 대답했다.

남자는 일찍 퇴근해서 아내와 극장에 갔다. 침대형의 좌석에서 음료 서비스를 받으며 아무 생각 없이 영화를 관람했다. 집에서 핸드폰은 저녁 내내 울고 있을 것이었다.

 

[수상소감] "3년 '짝사랑' 끝내고 소설가로서의 첫발 떼다"

 

낯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당선 소식을 전해주신 분은 축하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성함 좀 알려주세요"하고 말했습니다.

원고를 두 번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개인정보도 없이 보냈고 다시 마지막 장에 전화번호 하나만 적어 보냈습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나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사람의 부끄러움과 부질없는 희망을 잘라내고자 하는 의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꼬박 3년 소설과 짝사랑을 나누다보니 방어기재 같은 것이 생긴 것 같습니다.

저에게 있어 소설을 쓰는 일은 행복하면서도 얼마쯤은 아프거나 슬픈 일입니다. 제 안에 고여 있던 것들을 풀어내거나 덜어내는 일이면서 본연의 나와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아주 다른 나를 만나고 내가 알고 있던 '사람'과 전혀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놀랍고 철이 드는 일입니다.

함께 소설쓰기를 공부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고 세상 밖으로 당당히 걸어 나갈 때, 열심히 박수치고 축하를 하고서 쓸쓸해지는 나를 본 것은 작년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욕심인지 욕망인지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욕망이라고 생각하려합니다. 부족하지만 노력하면서 채워나갈 수 있다는 믿음도 가지려합니다. 난해한 이야기보다는 위로가 되는 글, 무거운 이야기도 눈물과 웃음을 섞어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목과 허리디스크, 충돌증후군을 가진 저는 적어도 몸은 소설가로서 최적화를 이루었다는 농담을 하고는 합니다. 그 농담 속에 들어앉은 좌절을 들킬까봐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 가끔은 누군가가 '헛된 짓은 그만하라'고 등을 떠밀어주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도 있었습니다. 격려는 많았고 만류는 없었던 탓에 오늘 나는 당선소감을 쓸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너무 늦은 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딱 소설 쓰기 좋은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을 하건, 특히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는 '때'라는 게 정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좋은 나이에 좋은 때를 만나 좋아하는 일을 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언제나 격려해주는 남편과 두 아들, 치열하게 글쓰기를 하는 교실문우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끝으로 거친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선생님, 저의 시작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발전하고 성장하는 글쟁이가 되겠습니다.

 

 

 

 

 

 

 

 

 

 

우수상

어느 교수로부터의 편지 / 채종성

 

 

왼손으로 악수합시다. 그 쪽이 심장에 더 가까우니까
- 지미 헨드릭스 -

"자네들은 돈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나?"
촘스교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강의실 안은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 이 교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40년 간 수많은 저서를 내고, 그 숫자의 수 천배에 이르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기업윤리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그는 또한 '선한 기여를 하기위해' 라는 모토를 지닌 자신의 투자운용사를 설립해 7년 동안 성공적으로 운영해 온 실천하는 지성의 상징이기도 했다. 노벨상 수상자라는 수식어는 그에게 쏟아지는 존경을 표현하기에는 진부하고도 짧았다. 너무나 짧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철학적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이 먼 땅에 온 것이 아니었다.

"종호야 밑에서 사모래 늦게 쳐대니 위로 곤방 올라와도 제대로 쳐 낼 수가 있나. 공구리 하루이틀치나, 정신은 어디다 팔고 있는기고?"
일본용어와 뒤섞인 경상도 사투리가 막노동판의 매케한 먼지로 덮인 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나는 다시 체를 들고 흔들어댔다. 방금 전까지 들었던 삽자루가 꽁꽁언 땅위에 내동댕이쳐진 채 칼같이 매서운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MBA 첫 학기의 시작은 촘스교수의 특이한 헤어스타일만큼 낯설게 시작되었다. 오후 2시, 수업이 모두 끝났다. 다들 자유롭게 어디론가 흩어져 갔지만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갈 곳은 없었지만 목적지는 뚜렷했다. 돈을 벌러가는 것이었다. 미국의 물류창고는 그 넓이가 나를 압도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평야에, 수만평 넓이의 창고가 수십개가 지어져 있었다. 삽을 들던 내가 지게차 레버를 만지고 벽돌지게짐을 지는 대신 거중기 조종간을 쥐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노동의 강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한 빌게이츠의 말은 자본주의의 진리를 내포한 모순이었다. 그의 말은 내 삶의 무게를 줄여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내게 어떤 위로도 되지 못했다. 

밤이 되어 창고일이 끝나면 나는 다시 편의점으로 내달렸다. 최저임금 시간당 8불. 내 서른 한 살은 그렇게 연장해가는 하루의 무한반복이었다.

파트타임 동료들은 내이름 종호의 J자를 따 나를 제이라고 불렀다. 클래스메이트들은 잠이 부족해 늘 충혈된 내 눈을보고 레드아이라고 불렀고. 

11월이 되자 사막지대라는 말이 지리학적오류가 아닌가 할만큼 애리조나주는 추워졌다.
어느날 아침, 눈을 뜨자 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침대는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고 머리는 누군가가 망치로 계속 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온몸의 뼈마디 하나하나가 분리 되는 것처럼 아팠고 살갗은 따갑다 못해 자지러질 것 같았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거울 앞에 섰다. 꺼칠한 얼굴에는 열꽃이 피어 있었다. 시험치는 날에 몸살이라니……
캠퍼스를 가로질러 강의실로 가는 길에는 언제나처럼 새소리가 들렸지만 내 몸은 뒤로 걷고 있는것 같았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세월을 견디는 사람의 힘만큼 위대한 돈버는 기술은 세상에 없네. 가장 안전하고 가장 확실하기 때문이지. 오늘날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도래한 것은 모두이런 인내가 필요한 제조업이라는 실체를 무시한 채, 금융공학이라는 미사여구로 장식된 허영체로 돈을 벌려고 했기 때문이지."

그의 강의를 듣고 있노라면 촘스 교수가 은퇴를 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혁신의 아이콘이었던 이 미국이 공자같은 말을 하는 사람을 유명 교수로 그것도 현역으로 두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설사 현역으로 있더라도 나처럼 배고프고, 머리좋고, 성공에 목마른 한국의 젊은이를 학생이라는 이름으로 가두도록 용납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유명한 대학에 개발도상국에서 온 유학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이 대학 MBA에 한국인은 나보다 몇 년 전에 딱 한사람 있었다고 들었다. 아마 그도 나처럼 주변인으로 살아갔으리라. 2003년의 애리조나 겨울은 추웠을 뿐만 아니라 삭막하고 지루하기까지 했다.

"아빠 이거 입으니 젊어 보인다. 아빠 늘 회사점퍼입고 있잖아. 그동안 사실 나, 너무 미안했어. 나도 이제 취직했으니 아빠 옷도 사주고 하려고."
민정이 민섭을 거울 앞에 떠밀다시피 세운 뒤 그에게 골프복풍이 나는 디자인의 재킷을 입히며 말했다. 
"이 녀석아, 나 옷 같은 거 관심 없는 거 알잖아. 아무 옷이나 입으면 어때?"
주민섭이 대답했다. 
"아빠가 그렇게 입고 다니면 사람들이 욕해. 아빠를 욕하는 게 아니라 자식들을 욕해. 그걸 원해? 아빠 딸이 사람들에게 욕먹고 다니는 거?"
민정이 입을 씰룩거렸다. 
"허, 그러냐? 미안하다. 그래도 아빠가 이래뵈도 너 시집가고 나면 어디 외곽지에 가서 농사나 지으려고 땅 사두었다. 그러니 너는 나 옷살 돈 모아서 시집이나 가렴. 내가 늘 얘기했지. 나 너 시집갈 때 혼수품이나 마련해주고, 그냥 니 엄마 볕좋은 곳에 모셔놓고 나는 혼자 농사나 짓는다. 그러니 너도 니 앞가림은 니가 해야해."
"또 그 얘기야? 그리고 나머지 돈은 기부할 거라고? 걱정마, 아빠 돈 안바래. 나도 시집갈 돈 모으고 있거든. 이 색깔 예쁘다."
두 사람의 망중한을 깨 건 민섭의 점퍼 속 휴대폰 벨소리였다.
"회장님.회사로급히 와 주시면 합니다."
수화기 너머 정사장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또 회사가야 해?"
민정의 말에 주회장은 언제나 그랬듯 두관자놀이의 눈썹 끝을 떨어뜨리며 어린애처럼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열살 이후로 그녀의 태양이었던 아빠. 오늘은 왠지 민정이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주회장이 회사로 들어서자 정사장이 달려 나왔다.
"회의실로 가시죠. 긴급이사회를 소집해두었습니다."
그의 표정은 그의 말보다 더 다급함을 얼굴에 새겨 놓고 있었다. 주회장이 회의실에 들어서자 모두 일어섰다. 회의장의 공기는 무거웠다. 주회장은 가슴 한켠이 조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착석하자 기획실장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오늘 제 주관으로 긴급회의를 주관한것은......"

나는 비서가 넘겨 준 최근 10 년 간 재무제표를 들여다 보았다.
회계는 사업의 언어라고 했던가. 제무재표는 이 회사가 얼마나 탐스럽게 무르익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영업이익률, 현금흐름, 유동성자산, 비유동성자산,주가 이 모든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하나의 유기체를 만들어 보여주고 있었다.
지방에서 공업용 특수부품제조사로 출발해 30년만에 계열사 8개를 갖춘 중견 기업으로 성장한 회사였다. 
2013년의 한국은 내게 확실한 성공의 디딤돌로 변해있었다.
조사한바에 따르면 이 회사는 회장이 아직도 현장에 살다시피하는 제조회사이다. 성실하고 좋은 회사다. 이런 좋은 회사들은 공통적으로 한가지 흠을 가지고 있다. 촌스러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토머스 프리드먼이 옳았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선한 사람이다. 그는 올리브나무가 렉서스를 맞이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단지 올리브나무들이 렉서스가 돌아다니는 바깥세상에 한시라도 빨리 적응하도록 도와주고 싶다. 내가 십 년 전 미국에서 겪었던 문화충격을 한국사람들도 얼른 겪고 이 새로운 물결에 적응하기를 바란다. 아니 빈다.
11년 전 내가 미국에 나왔을 때 29살의 나를 보고 공부하기에는 나이가 많다고 했었다.
이제 40살의 나를 두고 성공한 것 치고 나이가 젊다고 한다. 세상은 이리도 변덕이 심하다.

"그래서 지금 요지가 뭐야?"
수많은 차트와 그래프가 장식된 프로젝터빔이 꺼지자 주회장이 기흭실장에게 재촉성 질문을 던졌다. 
"지금 저희회사 주식이 아무 요인이나 특이사항이 없는데 주가가 급격히 뛰고 있습니다."
"이유가 뭔데?"
"아직 정확한 원인이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거 참. 아니 그럼 무슨 나쁜 일이 있을 수 있다는거야. 뭐야?"
주회장이 조급하게 맞받았다.
"저희가 분석한 바로는 작전세력이 주가를 조작하는것 같은데 이렇게 주식으로 장난치면 다음번에는 저희주식의 신용도가 떨어져서 주가가 하락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획실장이 안경을 만지작거리며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답변을 했다.
회의가 끝나고 이사들이 회의장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거 뭐 잘 해결 되겠지. 언제는 안 그랬나?"
누군가가 입을 열자 다른 사람들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들 틈에 휩쓸려 나오면서 장이사는 계속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매출량으로만 따지면 순위권에 들어오는 회사지만 체계로는 중소기업이라고 봐야했다. 하드웨어가 주력인 회사의 소프트웨어는 생각보다 단순하기 마련이다. 제일베어링의 핵심인력은 대개 회사와 함께 성장을 해와기술자 출신이었다. 자기 분야에서는 국내 최고의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머리속에는 전략, 기획, 분석에 대한 개념이 들어갈 공간이 부족했다.

김성도씨는 잔업이 막 끝난 상태였다. 주변사람들에게 먼저 간다는 인사를 하고 공장문을 나섰다. 회사문을 나서자 바람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그는 어깨를 움츠리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의 머리카락새로 찬 바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서른 여덟, 한 인간으로서는 젊은 나이였다. 그러나 생산직으로 다시 출발하는 사회인으로서는 많은 나이였다. 그 직장은 두 아이의 아빠로서는 힘이 나게 만들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는 힘이 날 일은 아니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형님, 뭐 하세요? 퇴근 하신다구요? 그럼 술 한잔해요."
장이사는 연탄 꼼장어집안으로 들어서자 매케한 연기에 눈이 따가웠다. 성도는 구석자리에 앉아 있었다. 소주병은 벌써 반쯤 비어 있었다. 그가 앉자 성도는 인사보다 먼저 술잔을 건넸다.
"할만 하니?"
그의 잔을 받아들며 장이사가 물었다. 
"네."
성도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열심히 해. 이제 시작해도 안늦다"
"네."
고개 숙인 채 술잔만 기울이던 그는 술잔이 몇잔 더 오가자 그제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책상물림만 하던 그가 현장에서 일하는 느낌, 애들 크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두 사람이 한 동네에 살던 옛날 이야기까지 오고 갔다.
"성도, 너, 우리 동네 자랑거리였잖아. 그 때 너 때문에 그 좁은 우리 군내에 애들이 얼마나 열등감느꼈는지 아냐? 나도 너 부러워했는지 아냐?"
장이사가 운을 뗐다.
"제가 생각해도 그 땐 잘 나갔죠. 좋은 대학의 4년 전장학생에, 군대는 카투사 출신이고, 미국국비유학도 갔다왔겠다. 직장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들어갔죠. 형님, 저 그 때 첫 연봉이 얼마였는지 아시죠?"
장이사는 안다는 듯 눈을 맞추며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좋았죠. 주식에 손 대기 전까지는……학교 동기놈 하나가 젊은 나이에 최연소 지점장승진했다고. 이건 무조건 된다고. 저도 갓 승진하고 연봉도 갱신했겠다. 술마실 때 마다 우리는 골든 제네레이션이다. 우리는 황금기를 달릴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보이는 게 없었죠."
말을 하던 그가 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다행이다. 술 기운이라도 빌어 옛날 자랑이라도 하는게 기죽어 지내는거 보다 낫다고 장이사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너도 우리회사 주식이나 사두지 그랬어. 요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막 뛴다. 호재가 없는데, 공시가 있던 것도 아닌데."
"시중에 물량이 이렇게 많고 가격도 낮은 거도 아닌데, 작전세력도 아닐테고."
성도가 맞받았다.
"그러니까 더 이상하지."
장이사가 술잔을 치켜 들며 잔을 쳤다.
두 사람은 적당하게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헤어졌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던 성도는 생각에 잠겼다. 왜? 주가가 올랐을까? 왜?
두어 정거장을 지나자 차 유리창에회사 점퍼차림의 자신이 비쳤다. 그의 호기심은 파도가 지나간 뒤 해변 모래사장위의 글씨처럼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지난 몇 년간 받았던 고통을 다시 연장해 갈 수는 없었다. 현관문을 열자 그의 아내와 아들이 달려나왔다.
그는 그들을 힘껏 안았다.

뉴욕의 아침은 커피와 담배로 시작된다. 오늘은 출근하자마자 회의다. 보통 회의는 사람들을 녹초로 만들지만 나를 활기차게 만든다. 내 아이디어를 공격하는 자들이 회의섞인 질문을 던지면 나는 어김없이 그들을 물어뜯었다. 명쾌한 답변이라는 송곳니를 드러낸 채.
그것이 단순한 호기심에 다름 아닌 질문일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오늘 회의에서는 내 기획서가 인정받아 내게 총지휘를 맡기다시피한 이번인수 건에 대해 왜 좀 더 과감하게 추진하지 않냐는 요지의 질문이 나왔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속전속결을 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헤지펀드업계 사람들의 본능 같은 것이었다.
"나는 한국인이라 한국의 정서를 아주 잘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비난이 겁나 주저하는게 아닙니다. 단지 이번 건을 성공했을 때 우리가 전면에 부각되면 다음번에는 그들의 정서상 외국인인 우리를 경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건은 성공할지 모르지만 다음 건은 매우 힘든 싸움을 해야할겁니다.그것을 피하려면 우리는 유령처럼 물밑에서 조용히 천천히 작업을 해야합니다. 서서히 고삐를 조으다가 상대가 공포에 질려 더 이상 저항의 의지가 없을 때 나는 킬러 본능을 발휘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들의 눈에 느리게 보이는 것은 더 오래 우리 회사의 성공을 보장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답변이 끝날 무렵 나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겨드랑이에서도 땀방울이 팔의 뒤쪽으로 흘러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마의 땀을 닦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는 차렷자세로 주먹을 꼭 쥐었다. 내가 말을 마치고 의자에 앉자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나는 이미 내 성공을 보장받고 있었다.

"민지야, 우리 다음 달쯤 여행갈까? 나 어제 합격 발표났다."
그는 그녀의 맞은편에서 서프라이즈를 말하고 있었다. 햇볕이 그의 얼굴에 비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델의 노래소리와 뒤섞여 그녀의 귓속으로 녹아 들어왔다.
"믿어줘서 고마워."
그가 또 다시 부드러운 음성을 들려주었다. 따스한 햇살이 넓은 창을 통해 마주앉은 두 연인에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확실히 노동일은 아침을 활기차게 열게 해주는 장점이 있었다. 찬공기가 코끝을 시리게 하자 성도는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여, 좋은 아침."
작업반장이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손을 들며 인사하자 김성도는 고개숙여 인사를 건넸다. 군대나 회사나 아랫사람을 만나는 윗사람은 한마디라도 더 섞으려 하는 법이다. 
그는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짜리몽땅하고 배가 나온 사내가 그런 모습으로 다가오는 모습에 성도는 웃음이 터지려 했다. 
"좋아 보이십니다."
성도가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맨날 똑같지. 어제도 술을 너무 마셔서. 어이구 지겹다, 이놈의 회사. 주식이나 사 놓을 걸 그랬지. 그 때 우리사주 받은거도 다 팔아먹었으니."
그의 말에 성도는 웃음이 났다. 
"아까우세요?"
"아깝다마다인가, 요즘 우리 회사 주식이 날아가요. 오르는게 아니라 난다고."
반장은 벗겨진 머리위로 한손을 들고 비행기가 나는 시늉을 했다.
"저는 주식으로 쪽박찬 인생이라 그쪽 보고는 오줌도 안눕니다."
"그런가? 이거 괜히 미안해지네 나는 아직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어서 아하하하…"

며칠전부터 증권투자카페와 커뮤니티에는 제일베어링에 대한 뒤숭숭한 소문이 돌기시작했다.
그 소문은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에 전달자의 생각이 덧 보태져 확실한 것으로 재탄생되어갔다
"정확히 말하면 저희 회사는 사모펀드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일주일 후 2차 회의에서 장이사가 발언을 하자 회의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모펀드에 대해 설명을 좀 해주시오."
누군가가 말을 했다
장이사는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일반적인 펀드와는 달리 개인돈을 모아 움직이기 때문에 사모펀드라고 불립니다. 법적인 제약으로 부터 자유로와 기업사냥꾼들이 자주 사용합니다. 지난 10년간 한국에서 기업사냥꾼들의 공격을 받아 325곳이 상장폐지되고 피해액만 40조에 이릅니다. 이들은 은행권의 돈을 빌리지 않습니다. 움직임이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액수의 개인자금을 모아 공격할 회사의 이사를 선임할 만큼의 의결권주식을 사들인 뒤 그들을 조종해 상장폐지 후 다시 대표를 선임해 비싼 가격에 회사를 분할 매각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어제와는 다른 선명한 그림이 나오자 사람들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가 말을 끝내자 누군가가 요청했다.
"거 좀 더 긍정적인 의견을 내 봐요. 사실여부 보다 중요한 게 우리의 대처방법 아니오?"
금형기사출신이었던 홍이사였다.
"이번 상황은 우리들이 예상했던 단순한 작전세력의 개입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작전세력은 개미를 농락해 시세 차익을 노리지만 기업 사냥꾼들은 회사자체를 먹잇감으로 노린다는 면에서 저는 긍정적인 이야기를 드리기 힘듭니다."
"그건 대기업에나 해당하는 얘기 아니오?"
홍이사의 목소리에는 의심이 짙게 배어 나왔다. 
"여태까지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적대적 M&A에 대한 대비가 전무했었습니다. 통상 이들은 전체 의결권을 가진 주식의 5퍼센트정도를 가지고 작전을 시작하는데 우리 회사의 대주주이신 회장님께서 모든 이들의 회사를 표방하신 삼년 전, 우리회사에 대한 회장님의 지분율을 2퍼센트까지 떨어뜨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힘든 씨움을 하게 될것 같습니다."
"지금 회장님의 선의를 무시하는 거요?"
"사실만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장이사는 홍이사를 노려 보았다. 
회의장은 이내 침묵에 휩싸였다. 
주회장이 침묵을 깼다. 
"막을 방법이 없소?"
"이 자들은 비상식적일 정도로 비싼 가격에 주식을 사기 때문에 주식보유자들이 그들에게 주식을 안 팔 이유가 없습니다. 통상적으로 이런 경우를 대비해 다른 회사와 서로 협력을 맺어 서로의 주식을 보유해 경영권을 방어해 주는 방식이 있긴 한데 현재 저희와 그런 협정을 맺은 회사는 없습니다. 한마디로 저희는 지금 거대한 적이 몰려오지만 연합해 싸울 같은 편이 없는 형국입니다."
주회장은 회사앞에 거대한 쓰나미가 밀려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제 시장의 사람들은 우리코너스톤에게 주식을 넘기거나 의결권에서 우리의 편을 들겠다는 밀약을 맺어가고 있었다. 한국은 기업사냥에 있어서는 개념도 잘 성립되지 않았다. 우리같은 사자에게는 먹잇감들이 지천으로 뛰어다니는 세렝게티같은 곳이다 내게는 그야말로 천국이다.
나는 요즘 웃음이 나온다. 막노동판을 전전해가며 대학교를10년 만에 마친 내가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이제 내가 가장 잘 아는 한국땅에서 기업사냥을 하고 있다. 이 나라는 대기업도 경영권방어에 취약한 곳이다. 하물며 중견기업이랴....
어쩌면 신은 내게 오늘을 주려고 나를 한국에서 태어나게 한지도 모르겠다.
이번 제일베어링 인수만 잘 되면 나도 M&A회사를 만들 것이다.
누구도 나를 무시못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 아니 되어야 한다. 모든 일에는 보상이 따라야 한다. 그게 자본주의 아닌가?

"아빠, 요즘 뭐 힘든 일 있어?"
명선이 숟가락을 뜨다 말고 툭 던졌다.
"아니다. 힘든 건 무슨."
"다 표시나. 내가 아빠 한 두번 보나."
그녀가 코끝을 귀엽게 찡그렸다. 
"민지야, 민지는 아빠 딸이어서 좋았니?"
"당연하지."
"민지가 아빠 회사에서 일했음 아빠는 어떤 윗사람 이었을거 같애?"
"눈치없는 사람. 윗사람이 현장에서 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자고 하다시피하니 얼마나 밑에 있는 사람들이 힘들겠어? 하지만 아빠로서는 만점이지. 그래서 딸로서는 너무 행복했고 아빠로는 존경해."
잠시 후 그는 마당으로 나갔다. 별이 밝았다. 
"이 만큼 지낼 수 있던것도 감사한 일이지."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주식에 대한 루머는 사내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아침 출근길에 점심식사시간에 퇴근길에 야근에도 회사 주식이야기는 빠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루머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파급효과는 현실로 다가 오기 시작했다. 

이번주에만 영업3팀 2명, 재무팀 1명, 무역2팀 2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말이 들렸다.
못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남아있는 사람들도 특별한 애사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나이가 많아서 혹은 다른 곳에 취직을 할 자신이 없어서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직원들의 사기는 급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임원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의 대다수는 우직하게 자기 길을 가면 길이 열린다는 신념을 믿고 살아왔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이들을 지탱시키는 건 어떻게 되겠지하는 요행수에 지금까지 그래도 잘 되어왔다는 반복된 경험이 가져다 준 기존시스템에 대한 집착이었다. 이사라는 직함이 없다면 그틀의 충성심은 현장 일꾼들의 어리석어보이는 우직함보다 나은 점은 없었다.

햇살 가득한 공원에는 나들이 나온 가족들로 가득했다.
"여보, 요즘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성도의 아내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무슨 소문?"
"회사가 위험하다면서요?"
성도는 가슴이 철렁내려앉는것을 느꼈다.
"누가 그래?"
"며칠전 김장 도우러 갔더니사택에 같이 있는 직원들 부인들이 그러더라."
"에이 참, 아니야 괜찮아."
하지만 성도의 말에도 아내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만약이라도 회사가 넘어가면 우린 어떡해요? 이제 겨우 빚 좀 갚아가나 싶었는데."
"아니래도."
성도는 입안이 마르는것이 느껴졌다. 바람이 차갑게 그의 얼굴을스쳐 지나갔다.

"오빠, 혹시 주변에 주식에 대해 좀 아는 사람없어?"
민지의 남자친구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되물었다.
"왜?"
"아니야, 아무것도."
괜한 걱정인지도 몰랐다. 아빠가 특별히 무슨 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민지는 얼른 다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오빠, 우리 아빠 언제 만나러 갈래?"


나는 포르쉐에 올라탔다. 도로는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고 주변에는 다른 차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액셀레이터 페달을 꾸욱 밟았다.
부웅
경쾌하면서도 진동이 느껴지는 엔진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3천불짜리 수트, 4백만불짜리 집, 백만불짜리 차. 성공은 이런 것이었다.
도시 뒤편 언덕에 올라서자 도시가 내려다 보이기 시작했다. 석양에 물든 도시의 실루엣이 두 눈을 채웠다. 정상에 올라선자만이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순간이었다. 나는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전화를 해 이 성공을 같이 나눌 가족이 없다는 것이 허전했다.
이번 건만 성공하면 나도 연인을 만들어야 겠다.

"모든 인력을 풀가동해 주주들을 접촉해 코너스톤에게 주식을 팔지 말도록 설득해야 합니다. 현재로서는 이게 최선입니다. 재무팀에서는 긴급예산을 편성해서 주주들에게 최대한 높은 가격으로 우리가 주식을 매입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십시오. 설득 작업은 우리 주식담당자가 필요한 인원이 몇 명이든 인원을 차출할 수 있게 각 계열사의 협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부탁드리는건데 임원분들은 사재를 동원해서 가족,친지 분들에게 우리 회사의 주식을 매입하시도록 권유해주십시오."
"그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장이사의 발언에 최연장자 최 이사가 제동을 걸었다. 장이사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부탁드리는겁니다. 가족이나 친지분들께 돈을 빌려주는 형태로 해서 매입하시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중입니다. 회사가 사라져도 여러분들의 재산은 그대로 이겠지만, 우리회사식구들은 길거리에 내다앉아야 합니다."
최이사는 장이사를 쏘아보았다.
주회장이 입을 열었다.
"장이사 말이 맞아요. 나는 장이사에게 모든 걸 일임했소."
"회장님, 주식회사는 회의에 의해 결정된 사안으로 일을 진행시켜야 합니다."
최이사의 눈이 검은 뿔테 안경너머로 번쩍였다. 그의 말은 엄연히 맞는 말이었다.
"최장한 이사, 우리 회사에 자네 라인의 영업부장이 그저께 그만 둔 것에 대한 화풀이를 어디다 하는거지?"
주회장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최이사는 입을 다물었다. 
주회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30년간 피땀 흘려 이 회사를 일궜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에게 한번도 무언가를 강요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렇게 회사가 풍전등화같이 위험한 이 시기에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여러분들을 보며 한탄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맨 주먹으로 우리가 30년전 제일베어링을 일굴 때를 생각해보시오. 누가 우리보고 가능하다고 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다시 한번만 손잡고 이겨 나갑시다. 잘 해 낼 수 있습니다."

나는 총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수천억원의 돈을 들여 장내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으로 주주들을 만나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금융게임에서 요는 누가 더 많은 돈을 푸느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의리나 가치투자를 외치던 이들도 물밑으로 금전적 보상이나 이면계약으로 감투자리를 약속받자 더 적극적으로 배신의 깃발을 들고 선봉에 나섰다. 이들이 무너지자 개미들은 그들을 따라 속절없이 흘러갔다.
물론 가끔은 방어자들의 극렬한 저항이 따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일로 밥을 먹고사는 우리를 이기기에는 그들은 역부족이었다. 우리의 파상공세는 우리도 통제하기 힘들만큼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여러분....."
장이사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우리는....."
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지만 어제 연기금을 운용하는 펀드가 판 우리의 주식을 저들이 매입했다는 것이 확인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주식보유비율이 우리쪽을 앞질렀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주회장은 눈을 감았다.
"그 동안 우리회사와 함께 동고동락을 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주회장이 일어섰다.
"지난 30 년간 저희 제일베어링은 혁신의 상징이었습니다. 외국수입에 전량의존하던 베어링의 국산화를 시작으로 거의 매년 더 가볍고 더 내구성있는제품을 시장에 내어 놓아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시장이 이렇게 되어 우리회사가 원치않는 방향으로 매각이 분해되어 매각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두의 회사를 만들기 위해 제 주식비율을 최소화한 것에 대해 어떤 분들은 너무 이상적인 생각이었다고 비난하시는 분들이 계신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제 결정에 후회하지 않습니다.다만 급변하는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해 장인정신만을 강조해서 마치 백여년전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이 위기를 맞이한 듯한 위기를 우리 회사에 초래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주회장은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제 제일 베어링이라는 회사는 아마 시장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 식구들 특히 현장직원들이 받게 될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는 마지막까지 저들에게 고용승계를 주장할 것입니다. 결과와 상관없이 지난 30년간 부족한 저와 함께 해주신 여러분들께도 그 동안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주회장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몇 몇 이사들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회의가 끝나고 주회장은 걸어나와 차에 올라탔다
"1공장으로 가지."
운전기사는 시 외곽지의 공장으로 차를 몰았다.

"자네 이야기 들었어?"
"뭐요?"
성도는 기계를 잠시 중지시키고 반장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우리회사가 팔릴지도 모른다네."
성도는 말문이 막혔다. 애들과 아내의 얼굴이 먼저 떠 올랐다. 그가 오랜 방황끝에 찾은 희망이 손가락사이로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것 같았다

"민지야, 나 할 이야기가 있어."
"오빠, 무슨 이야기?"
그는 늘 앉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민지야, 앉아. 나 아버지 만나러 못 갈 거 같아. 사실 나 해외지사로 발령이 났어."
"그런 이야기 전혀 없었잖아. 우리 결혼은?"
"사실 너한테 미안해서 말 못했는데 내가 자원했어. 나도 언제까지 한국에서만 썩을 수는 없잖아."
민지는 오빠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가는 눈썹, 오똑하지만 가는 콧대, 굳게 다물었지만 얇은 입술. TV 특강에서 관상강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민지는 그가 낯설었다. 이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변함없이 자리에 앉아서 똑 같은 커피를시켜놓고 몇 년을 만난 사람이랑 대화하는 데 왜 모든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여보? 왠 일이야? 이 시간에 전화도 다 하고."
그녀는 청소기를 껐다. 
"응, 오늘 밖에서 저녁먹을까?"
"정말? 당신이 왠 일이야?"
말끔하게 차려 입은 아내와 대로에서 마주서자 장이사는 어색함을 감추려고 무진 애를 썼다.
시외곽의 골목길에는 카페가 아직도 그대로 있었다.
"어머, 왠 일이야, 여보 이 카페가 아직 그대로 있어요. 22년이나 흘렀는데……"
아내는 연신 감탄을 해댔다.
"당신도 이제 흰 머리가 제법 보이네. 그래도 예뻐."
장이사는 머리에 손을 갖다대는 아내의 손을 움켜 쥐었다. 진심이었다. 아내는 장기현이 대학교 때 낙엽지던 러브로드에서 처음 본 때 만큼 이뻤다.
스테이크와 와인을 시킨 뒤 장기현은 말을 건넸다
"여보,나도 이런 레스토랑이나 할까? 당신이랑."
"회사는?"
"나 곧 짤릴거야."
아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거좋지, 말 나온 김에 이 동네에 바로 차릴까? 걱정마 애들 등록금 같은 거. 애들 공부 잘해서 다들 장학금 받을건데 뭐. 유학은 보내지 말지. 우리 때 어디 유학 같은 게 있었나? 그래도 다들 잘만 살았잖아."
아내는 와인잔을 들어올렸다.
"건배."
와인잔 사이로 아내의 미소가 반짝였다

차가 마포대교에 접어들자 주회장은 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회장님."
19년간 그를 모셨던 기사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한밤중에 한강다리위에는 차들이 쌩쌩 지나갔다. 주회장은 차에서 내려섰다. 기사가 따라 내렸다. 주회장은 다리 난간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사가 다가 오려하자 그는 손으로 그를 제지 했다. 
"담배 한 대 피려는 걸세."
그는 다리 난간 사이로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여보, 나 망했다. 당신 곁으로 갈까?"
그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기사는 한순간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열 걸음정도 떨어져 서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레고블록의 마지막 한조각이 얹힌걸 확신한 순간 나는 내 방에서 승리의 표호를질렀다.
뜬 눈으로 밤을 새다시피한 채 회사로 차를 몰고 갔다.
"하이, 미스터 손." 사람들이 인사와 더불어 축하를 건넸다.
나는 모두가 기다리는 회의실로 직행했다. 보스와 핵심멤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프로젝터빔을 쏘았다. 사람들이 스크린을 주시했다. 
"제가 지난 여섯달에 걸쳐 추진한 프로젝트 이팅얼라이브가 완료되었습니다. 오늘 부로 제일베어링은 저희 코너스톤이 1대 대주주가 됨과 동시에 새로운 이사를 선임하고 상장폐지를 시킬 것입니다. 또한……"
잠깐 이건 뭔가 이상하다. 왜 사람들이 박수를 치지 않는 거지?
나는 기분나쁜 적막감과 마주하고 있었다.
"아울러 저는 실무추진을 위해 한국으로 저희 코너스톤의 실무 담당자를 보내 법적인……"
아니, 표정들이왜 이렇지? 나는 육개월을 이 프로젝트를 껴안고 살았단 말이야.
당신들은 이 프로젝트의 성공이 뭘 의미하는지 몰라?
겨드랑이에서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보스가 말을 조용히 입을 떼었다.
"미스터 손, 이 프로젝트는 중지하기로 했네."
잠깐 잘못 들은거겠지. 아니,그가 잘못 말한건가?
중지라니?
사무실 불빛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지. 내 모든 커리어를 무너뜨리는 말을 이작자는 왜 이리 쉽게 지껄이는 거지?
"미스터 손, 괜찮나? 자네 마음 이해는 가네만 일단 진정하고 앉게. 이따 내 방으로 좀 오게."
회의는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무거운 발검음으로 사장의 방에 들어섰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에드가 모리스씨가 투자금 철회를 요청했네. 자네도 알다시피 에드가 모리스씨가 그렇게 나오면 이 프로젝트는 콜오프 될 수 밖에 없네."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그는 이런 일을 수 없이 겪어 본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멍하니 서있자 그는 일어서서 내게 다가오더니 나의 어깨를 툭툭쳤다. 비틀대며 나의 방으로 돌아오자 비서가 내게 편지를 한 장 내밀었다.
"정말 중요한 편지랍니다."
나는 힘없이 편지 봉투를 뜯었다. 아직도 친필 편지를 쓰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미스터 손, 잘 지냈나? 나 마빈 촘스교수네. 
기억나지? 기업윤리 강의하던.....
안 그래도 자네 소식 들었네. . M&A전문기업 코너스톤에서 일하고 있다고....
내게서 배운 학생이 사회의 일원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에 기뻤네.
일년 전부터 자네회사가 제일베어링의 인수를 추진하고 있었다지?
자네회사의 사모펀드에서 이번 프로젝트펀드에 가장 큰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자네도 알다시피 에드가 모리스씨네. 모리스씨는 이번 펀드의 33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네. 
자네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잠시 모리스씨 이야기를 해주겠네. 이 분은 글로벌 보험회사를 가지고 있네. 다른 계열사도 가지고 있지만 어쨌건 그 분의 사업의 핵심은 씽크로 인슈어런스 보험회사이네. 너무나 유명한 회사지.
갑자기 자네가 수업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던 생각이 나는군. 
돈은 선과 악의 개념이 없다. 선악의 개념이 없다는 것은 돈 그 자체는 가치라는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따라서 돈은 외부변동 요소에 의해서 가치를 부여 받게 된다. 그 자체는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외부 요소가 없으면 돈은 매개체라는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고. 하지만 변화의 시대에 돈의 개념도 변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 돈을 가용하는 기본철학의 변화범위는 무한대로 가능하다고 그래서 그 속에는 악함도 포용해야 한다고…..그 악함도 어쩌면 돈에게 매개체라는 가치를 부여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자네의 이야기는 인상 깊었네
이젠 비밀도 아니겠지만 내가 블랙앤화이트라는 투자사를 운영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여러회사에 투자를 했는데 최근 일년간 씽크로사의 주식을 주로 매입했네. 아무래도 개인 투자회사 성격이 강하다보니 내가 어떤 회사를 매입하든 별 견제는 없더군. 그래서 주식을 매입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네. 내 투자운용사는 내가 지난 40년 간 대학강단에 서면서 쌓아올린 철학을 실천한다는 데 의미가 있네. 
즉, 내가 운용하는 주식에서 나오는 이익금은 좋은 일에 사용한다는 명분이 필요했네. 원래는 나는 이 회사의 주식으로 차익을 남겨서 그 차익을 기부하거나 사회개선에 쓰려고 했었다네. 
아, 참, 자네도 알다시피 자네가 이수했던 MBA코스에 자네 이전에 한명의 한국인이 더 있었네. 미스터 김이라고. 풀네임은 김성도라고. 그 친구가 편지를 보내왔더군. 자신의 회사가 적대적 M&A를 당하고 있다고.
뭐, 나는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네. 우리가 한 일은 지난 일 년간 매입해오던 씽크로 인슈어런스의 주식을 한달간에 걸쳐 집중매입해 우리의 씽크로사에 대한 블랙앤 화이트사의 지분율을 23퍼센트까지 올린 것 뿐일세. 
나의 블랙앤화이트사가 씽크로 인슈어런스의 대주주가 되었지. 
자신의 회사가 넘어가게되자 에드가 모리스씨는 우리를 막기 위해 코너스톤에 출자한 자금을 회수하기로 결정했네. 따라서 자네 사모펀드의 프로젝트는 자동 중단 될걸세.
미스터 손, 내가 수업시간에 했던 말 기억나나? 
제조업을 무시하지 말게. 오늘 날 인류의 발전은 전부이렇게 실물로 만든 물건들이 이끌어 왔네. 또한 세월을 견디는 사람의 힘만큼 확실한 돈 버는 방법은 없다네. 
아마 지금 자네가 우리 블랙앤 화이트 사로 인해 입는 손실은 아직은 젊은 자네에게 큰 약이 되어줄 걸세. 진심으로 자네의 앞날에 행운을 비네.

Sincerely yours Marvin Choms
2014. 8. 9

 

 

 

 

 

 

 

 

[심사평]"대상작 '바람은 가끔··',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경제"

이번 경제신춘문예는 응모편수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풍성했다. 특히 소설과 수필의 응모 편수가 예년에 비해 급격히 늘어났다. 대상과 우수상이 모두 소설부문에서 나왔고, 가작 작품은 시에서 나왔다. 심사 과정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응모자들의 인적사항은 감춘 채로 심사를 진행했다.

소설 및 수필 부문은 일상생활의 얘기를 경제와 잘 연결시켜 표현하는 부분이 돋보였다. 회가 거듭될 수록 경제·금융의 소재가 소설·수필에서 분야에서 틀을 잡는 모습이다. 

대상으로 뽑은 소설 '바람은 가끔 옆으로 분다'는 문단의 일반 문예공모와 비교해서도 작품의 질이 결코 떨어지지 않는 수작이었다. 파이프를 생산하다가 여러 번의 실패와 우여곡절 끝에 튜브를 생산하게 된 제조업체 사장과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관계처럼 질긴 인연을 맺어온 윤이라는 인물 사이 악연을 제조업 현장의 모습을 긴장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결말의 반전도 작품의 묘미를 더한다.

우수작 '어느 교수로부터의 편지'는 기업의 약육강식 생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인수·합병(M&A) 전문기업에서 오직 개인과 회사의 이익만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일하는 화자, 그런 회사에 먹잇감이 되고 있는 기업의 경영자, 그리고 오래전 화자에게 기업윤리 과목을 가르쳤던 노교수 등 세 사람의 이야기가 박진감 넘치게 그려진다. 흠이라면 은연중 기업윤리를 강조하다보니 결말이 조금 도식화됐다는 점이다.

올해 소설 분야가 풍성한 성과를 거둔 반면 시 부문 응모작은 예년 수준에 머물렀다. 눈에 띄는 작품이 드물었다. '경제 신춘문예'라고 해서 반드시 주식이나 돈을 얘기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삶이 대부분 경제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소재의 다양화가 필요하다.

아울러 전년도에 출품했다 예선을 통과했지만 낙선한 작품을 올해도 계속 출품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한 번 낙선한 작품은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시로 도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여러 작품 속에서 '집배일기' 외 6편이 손에 잡혔다. 아마도 시인 스스로가 우체국 집배원으로 보인다. 집배원의 삶을 살며 느끼는 애환과 소소한 느낌들을 매우 솔직하고 담백하게 표현했으며, 무엇보다도 희망적으로 그리고 있다. 6편의 작품 중 ‘집배원’과 ‘실천에 대하여’의 시적 완성도가 특히 높았다. 그 중 ‘집배원’을 가작으로 뽑는다. 

이밖에 다른 응모작 중에서는 '나의 느티나무', '넥타이, 늙은 말', '낙타' 등에서 가능성을 엿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