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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의 난독증 / 조유희

 

의자 위에 두 개의 오렌지가 놓여있어요 나는 저 오렌지를 노란 앵무새라 불러요 한 마리는 어제로부터 날아왔고, 또 한 마리는 내일로부터 날아왔어요 어제의 혀가 내일의 혀를 그리워할 때, 당신은 내게 상큼한 거짓말로 다가왔어요

나는 당신을 앵무새라 불렀지요 당신과 나 사이의 간격은 너무 아슬해서 도저히 잡을 수 없어요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한 앵무새는 사·랑·해·사·랑·해를 원했어요 그럴 때마다 하나씩 뽑아낸 깃털 때문인지 앵무새는 몇 초마다 각을 세워요 나는 우울한 오렌지를 갖고 싶었지요

구차한 변명 따윈 상관하지 않을래요 잊지 말자는 그 매혹적인 말, 그 말을 따라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어제의 의자에 내가 머물지 못한 것은 오늘의 당신이 혼자이기 때문이지요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서 오렌지는 앵무새가 되고, 오늘의 의자가 어제의 오렌지를 기억하듯 나도 내일의 앵무새를 기억할래요 오렌지가 오렌지를 사랑하는 오늘밤에 과연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당선소감] "혼자 아닌 세상 가르침 새길것"

 

아코디언같은 계단을 오를 때마다 행진곡처럼 돌진하였고, 연가처럼 슬퍼서 주저앉았고, 그러다가 심장 박동같은 운명임을 실감하는 순간 그렇게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아무 것도 아닌 나를 발견한다.
오후 다섯 시, 휴대전화가 울린다. 나는 얼떨결에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듣는다. 담당 기자분이 "기쁘지 않느냐"며 되묻는다. "나는 잠결에 받아서요"라고 대답한다.
시는 나를 들여다보는 거울이자 절대자다. 원고지같은 당선에 잠시 주춤한다. 혼자 걸어가는 길이기에 나는 두렵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 세상과 함께 내게 들려주던 선생님들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정에 동참한다.
나를 아껴준 문우와 원우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무엇보다 좌절할 때마다 나를 격려해 준 가족과 형제들에게 감사한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올린다.

■ 약력 1967년 목포 출생. 2013 목포문학상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 재학중

 

 

[심사평] 고은·최원식 "연애시 빌려 불통의 시대 횡단"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1인의 총 39편이다. 모처럼 따듯한 성탄 전날, 수원본사에서 회동한 심사위원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당선작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엘뤼시온'과 '앵무새의 난독증'이 단연 돋보인다는 점에 쉽게 합의했다. 우선 두 후보자 모두 응모작들의 전체적 수준이 비교적 고르다는 점이 고려되었다. 작품들 사이의 비대칭성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면 미래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의 시는 아류로부터 자유롭다.
만만치 않은 시력(詩歷)이 감지됨에도 불구하고 읽고 나면 어떤 기시감(旣視感)에 약간의 실망을 금치 못하던 작품들에 대한 안타까움 탓에 두 작품이 보여준 자신만의 활달한 어법은 종요롭다.
'엘뤼시온'은 무엇보다 관념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유능력이 주목된다. "타인의 웅변에 깃들어 살아왔다"로 시작되는 그 서두도 범상치 않지만 남의 시선에 지핀 즉자(卽自)가 그 장막을 찢고 스스로 대자(對自)로 진화하는 정신의 율동을 싱싱하게 보여주는 바가 아름답기조차 한 터다. 그런데 시 후반부로 갈수록 주의적(主意的)인 경구(警句)들이 돌출하여 관념성을 노출하는 게 흠이다. 교훈시 비슷한 경향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과제다.
'앵무새의 난독증'은 '당신'의 유혹에 응답하는 일종의 연애시다. 그렇다고 그냥 익숙한 낭만적 서정시냐 하면 아니다. 지적 조작이 만만치 않다. 리듬과 리듬, 이미지와 이미지, 그리고 논리와 논리 사이의 연락이 마치 재봉 자국이 보이지 않을 만큼 조밀한 터다. 그렇다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 시를 지배하는 어조는 기본적으로 해학이다. "어제의 혀가 내일의 혀를 그리워할 때, 당신은 내게 상큼한 거짓말로 다가왔어요"라든가, "잊지 말자는 그 매혹적인 말, 그 말을 따라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처럼 말과 말 사이가 성글다. 그 틈 사이로 사랑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실험하는 물음이 솟아오른다. "오렌지가 오렌지를 사랑하는 오늘밤에 과연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연애시를 빌려 이 불통의 시대를 횡단하는 용기를 불사하는 시인의 뜻이 이만큼 절실하다.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삼는 데 최종 합의하였다.

 

축하한다. 정진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