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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홈메이트 / 천종숙

 


눈꺼풀 위로 빛이 스며들었다. 티엉은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방안이 온통 하얀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늦잠을 자다니. 티엉은 당혹스러웠다. 아무래도 꿈 때문인 것 같았다. 고향 마을을 헤매는 꿈이었다. 구릉마다 낮게 엎드려 있는 카사바 밭들, 산사태로 허물어져 내린 흙담집, 긴 장대에 널려 있는 옷가지, 어른 키보다 높게 자란 바나나 나무. 그리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 사탕수수를 든 노인, 켜켜이 포갠 바구니를 등에 진 남자, 닭을 안고 아이까지 업은 여자. 그들은 하나같이 티엉을 낯선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렇게 티엉은 돌아갈 곳도, 머물 곳도 없는 막막함에 눈물을 쏟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왜 하필이면 그런 꿈을 꾸었을까. 아무래도 하노이 여자, 중리를 만난 탓인 것 같았다.

며칠 전, 티엉은 큰길에 있는 마트에 갔다. 노파가 불러준 품목들을 적은 쪽지를 손에 들고 식품 관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얼굴빛이 창백한 한 여자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구워서 잘라놓은 시식용 돼지고기를 허겁지겁 집어먹고는 곧바로 뱉어냈다. 무슨 상한 음식이라도 입에 넣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여자는 시식코너를 돌면서 그런 행동을 되풀이했다. 티엉은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무래도 여자가 자신과 동족인 것 같았다. 여자도 똑같은 생각을 한 듯 티엉과 눈이 마주치자 옅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역시 여자는 티엉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베트남어로 물었다. 그렇죠? 베트남사람 맞지요? 티엉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곧바로 티엉의 손을 잡아끌었다. 티엉을 자판기 옆 의자에 앉히고 음료수 두 잔을 뽑아왔다. 음료수를 건네며 자신은 하노이에서 왔다고 했다. 티엉은 가끔 베트남 사람을 보기는 하지만 고향사람을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어쨌든 반가웠다. 경계를 풀고 잠시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자는 말했다. 자신의 이름이 중리라고, 한국에 들어온 지 일 년도 채 안되었다고. 티엉처럼 베트남에서 중개인의 소개로 지금 남편을 만났다고.

그렇게 한창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던 중리가 갑자기 헛구역질을 했다. , 지금 아기를 가져서 입덧이 심해요. 하며 울상을 지었다. 티엉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얼떨떨했다. 중리의 사정을 몰라 힘들겠다고 하기도, 축하한다고 하기도 이상했다.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중리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중리가 갑자기 울음 터뜨렸다. 중리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엄마가 만들어주는 pho()가 너무 먹고 싶어요. 중리의 말을 듣는 순간 티엉도 고향생각에 왈칵 눈물이 났다. 티엉과 중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더욱 감정이 북받쳤다. 와락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헤어지기 직전 중리가 말했다. 베트남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한 동네에서 자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고 했어요. 나도 언젠가는 그 사람에게로 돌아갈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나 봐요. 그런데 아기가 생겼어요. 이젠 정말 다 끝이에요.

중리의 막막함이 가슴에 와 닿았다. 티엉은 꿈속에서 느꼈던 막막함을 떠올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파와 함께 살게 된지 다섯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낯설었다. 티엉이 노파의 집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은 여성회관의 사회복지사를 통해서였다. 남편과 사별한 할머니가 가족처럼 함께 살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마침 티엉도 이혼하고 오갈 데 없던 차였다. 노파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딸처럼 지내자고 했다. 티엉은 그 말에 심장이 뛰었고, 마음이 움직였다. 선뜻 노파의 집으로 들어왔다.

노파는 벌써 일어났을 터였다. 다른 때 같으면 문을 쾅쾅 두드리거나 벌컥 열고 들어 왔을 텐데 조용했다. 쯧쯧!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볼 노파의 시선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노파가 거실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시간이었다. 티엉은 방문을 살며시 열었다. 노파는 보이지 않고 창으로 스며든 햇빛이 저 혼자 뒹굴고 있었다. 티엉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며 잔뜩 움츠린 어깨를 폈다.

티엉은 햇빛 속의 먼지알갱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먼지알갱이들이 와글와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보였다. 꿈속에서는 왜 저런 햇빛이 느껴지지 않았는지. 티엉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부챗살처럼 펼쳐진 햇빛은 벽에 걸린 사진액자위에서 끊겨 있었다. 노파의 가족사진이었다. 젊잖게 생긴 남편과 노파를 빼닮은 아들딸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속의 노파는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깊게 팬 주름살과 쳐진 군살이 얼굴의 모습을 바꿔 놓은 것 같았다. 어쨌든 사진을 볼 때마다 티엉은 우울했다.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노파의 가족이 될 수 없다는 생각.

잠시 사진을 바라보던 티엉은 노파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노크하려던 손을 멈추고 가만히 손잡이를 잡아 오른쪽으로 돌렸다. 달칵!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티엉은 순간 멈칫했다가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커튼을 드리운 방안은 아직도 어두웠다. 열린 문사이로 스며든 빛이 방안을 비췄다. 노파는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이불을 걷어내고 웅크린 채 자고 있는 노파의 모습은 화장실 거울에 붙어있는 하얀 거미를 연상케 했다. 몸통이 볼록한, 가느다랗고 긴 다리를 가진 거미는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에서 제 존재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티엉은 거미가 언제부터 거울에 붙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 발견했을 때는 곤충의 사체인 줄 알았다. 닦아내려고 보니까 거미가 거울의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조금 이동해 있었다. 티엉은 거미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생명이 다할 때 까지 살다갔으면 싶었다. 노파가 보면 잔소리 할 게 뻔했지만. 방안의 화장실을 쓰고 있어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티엉은 가끔 한 번씩 거미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려 보았다. 살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거미는 실처럼 가느리고 여린 다리를 조금쯤 움직여 살아있음을 증명해보였다.

티엉은 거미처럼 노파를 건드려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언젠가 숨을 쉬는지 확인하려고 노파의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가 된통 혼이 난 적이 있었다. 죽은 듯이 누워있던 노파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소리를 질렀다. 무슨 짓이야! 이년! 순간 티엉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노파가 지르던 쇳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했다. 어쩌면 지금도 노파가 자는 척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티엉은 이불을 덮어주려다 그만두었다. 소리 없이 물러나 방문을 닫고 나왔다.

노파가 일어나기 전에 먹을 음식을 만들기 위해 주방으로 갔다. 싱크대 앞에 서서 어떤 음식을 만들어야할지 생각했다.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떠올려보았다. 노파가 좋아하는 들깨를 갈아서 넣는 된장국은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노파는 어떤 음식을 만들어도 맛있게 먹어 준 적이 없었다. 몇 번 휘젓다 숟가락을 놓아 버렸다. 티엉은 음식을 만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근거렸다. 티엉은 주방의 창문으로 건너편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주방에 들어설 때마다 저절로 시선이 가는 곳이었다. 앞치마를 두른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와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볼 때마다 부러웠다. 티엉의 꿈은 저렇게 단란한 가정을 일구고 사는 것이었다. 티엉은 오늘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여자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 집의 식탁에는 어떤 음식이 차려졌을까? 발뒤꿈치를 들고 식탁을 엿보려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티엉은 시선을 거두고 다시 이것저것 궁리해보았다. 노파가 그나마도 잘 먹었던 음식이 돼지고기를 다져서 넣은 짜조와 멸치로 다시를 낸 퍼였다. 한국에 온지 3년이 지났지만 티엉이 잘 만드는 요리는 여전히 베트남 음식뿐이었다.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만큼 한국 요리 실력도 늘지 않았다. 오늘따라 티엉 자신도 퍼를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퍼를 만들기 위해 싱크대 안에서 중간 크기의 냄비를 꺼냈다. 정수기의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그리고 멸치를 찾기 위해 냉동실 안을 뒤적였다. 어찌된 일인지 멸치가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에 노파가 된장국을 끓인다고 멸치 봉지를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또다시 엉뚱한 곳에 둔 모양이었다. 노파는 자신이 둔 곳도 잘 찾지 못했다. 그러고는 티엉에게 핀잔을 주었다. 왜 제 자리에 두지 않느냐고. 멸치는 야채실에 들어가 있었다. 멸치가 든 비닐봉지를 찾아들었을 때 노파와 보물찾기 게임을 한 것처럼 피식 웃음이 나왔다.

티엉은 다시마 한 조각과 멸치와 비프스파이스를 한 줌 집어서 냄비에 넣었다. 그때까지도 노파는 일어나지 않았다. 티엉은 한 번씩 노파의 방문을 쳐다보았다. 티엉은 퍼에 들어갈 쇠고기와 야채들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마트에서 퍼에 들어갈 재료를 사왔을 때 노파가 쓸데없는 물건들을 사왔다고 몇 번이나 곱씹던 모습이 떠올랐다. 티엉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쌀국수봉지를 들고 잠시 망설였다. 내친김에 뜯어놓은 비닐봉지에서 쌀국수를 한줌 집어 찬물에 불려두었다. 냄비에서 쌕쌕거리며 이내 물이 끓기 시작했다. 다시금 노파의 방문을 쳐다보았지만 좀처럼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너무 오래 잔다 싶어 덜컥 겁이 났다. 저러다가 잘못될 수도 있었다. 노파와 같은 나이로 죽은 티엉의 할머니가 그랬다. 어머니는 너무 오래 잔다 싶었던 할머니가 영영 깨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티엉은 가스레인지 불을 중간으로 낮추고 노파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심호흡을 했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노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티엉은 엉뚱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화들짝 놀랐다. 노파는 뿌옇게 수증기가 감돌고 있는 주방을 힐끗 쳐다보았다. 숨을 들이쉬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아침부터 무슨 비린 냄새야? 쌀국수를 만들려고 다시 물을 끓이고 있었어요. 티엉은 재빨리 말해 놓고 노파의 안색을 살폈다. 표정으로 봐서는 싫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노파의 얼굴은 언제나 표정이 없었다. 얼굴의 모든 근육이 굳어버려 표정을 지을 수 없는 사람처럼. 하얀 밀랍 같은 얼굴이 부석부석 부어 있었다. 걸음조차 어둔해 보였다. 노파는 거미처럼 휘어진 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습관처럼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티엉은 환기를 시키기 위해 베란다의 창문을 조금 열었다. 열린 문사이로 기다렸다는 듯이 찬바람이 와락 달려들었다. 문을 열어놓고 고개를 돌려 노파의 눈치를 살폈다. 노파의 시선은 텔레비전에 붙박여 있었다. 티엉은 안심하고 문을 열어놓은 채 거실로 들어갔다. 주방에서는 냄비 뚜껑이 들썩거리며 다시물이 끓고 있었다. 비프스파이스향이 집안에 가득 찼다. 티엉은 다시물이 끓는 동안 퍼에 들어갈 재료들을 준비했다. 텔레비전에서 여자와 남자가 주고받는 말이 들렸지만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가 흐느끼는 소리로 보아 아침드라마가 방송중 인 것 같았다. 노파는 드라마를 보면서 쯧쯧! 혀를 찼다. 종종 그랬다. 티엉은 자신에게 혀를 찬 것인 줄 알고 또 뭘 잘못했는지 한참 생각했었다.

티엉은 고수와 숙주, 양파와 파를 씻어 소쿠리에 건져 두었다. 노파는 퍼에 들어가는 향신료 냄새를 싫어했다. 다른 것은 노파의 입맛에 맞추어 주었지만 베트남 음식만큼은 향신료 하나라도 빼고 싶지 않았다. 집안에 비프스파이스와 포플레이버 향으로 가득 차자 우울했던 기분도 조금씩 풀려갔다. 삶아서 건져놓은 쌀국수 위에 다시 물을 붓고 잘게 다진 쇠고기를 얹었다. 틀니를 하고 있는 노파는 부드러운 음식 외에는 잘 씹지 못했다. 음식물을 씹다가도 틀니가 덜컥 빠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얼굴이 벌게지면서 숟가락을 내던졌다. 이렇게 질긴 음식을 나더러 먹으라는 거냐고.

노파와 식탁에 마주 앉으면서 티엉은 문득 가족이란 말을 떠올렸다. 한 집에서 자고 일어나서 밥을 먹고 함께 생활하는, 그것은 보통 가족들이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티엉은 고향의 가족도 생각이 났다. 어머니, 아버지, 오빠, 동생들이 밥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던 장면들. 따뜻한 분위기속에 오가던 대화며 동생들이 깔깔거리던 웃음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는 듯 했다. 이제는 영영 볼 수 없는 가족이었다. 그들은 믿을 수 없게도 티엉이 베트남을 떠나온 해에 산사태로 모두 죽었다.

티엉은 애써 가족 생각을 지우려고 노파를 쳐다보았다. 노파의 굳은 표정은 언제 봐도 불편했다. 노파는 퍼를 젓가락으로 휘젓더니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러고는 티엉 앞에 놓인 퍼를 슬며시 끌어당겼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노파가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몰랐다. 하지만 곧 티엉을 못 믿어서 그러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노파는 젓가락으로 쌀국수를 감아올려 입으로 가져가기도 전에 주르르 흘렸다. 입안으로 들어가는 쌀국수는 몇 가닥 되지 않았다. 젓가락을 쥔 손이 흔들렸다. 거미다리처럼 여윈 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티엉은 불안했다. 노파는 평소에도 음식을 먹을 때 자주 흘렸다. 젓가락질을 하다 흘리기도 했고 입안에 넣은 음식물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기도 했다. 오늘은 유난히 심했다. 젓가락질이 잘 되지 않자 노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몇 번 더 시도하던 노파는 젓가락을 소리 나게 탁! 내려놓았다. 아침부터 국수를 주다니, 이제 너까지 나를 늙은이라고 우습게 보는 게냐? 티엉은 노파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파는 식탁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소리 나게 닫았다. 어제 먹다 남은 무국도 있는데 괜히 퍼를 만들었나 싶었다. 티엉은 식탁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퍼를 휘젓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노파가 방으로 들어간 뒤에도 텔레비전은 저 혼자 떠들어댔다. 한국말은 언제 들어도 낯설었다. 타국에 와 있다는 것을 더 실감나게 해주었다. 노파는 잠자기 전까지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켜두었다. 티엉은 설거지를 끝내고 청소기를 돌렸다. 진공청소기가 텔레비전소리까지 빨아들였다. 바지주머니에서 미세하게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꺼내든 순간 전화는 끊겼다. 티엉에게 딱히 전화가 올 데는 없었다. 누구일까? 괜히 궁금했다. 전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전남편의 전화번호는 아니었다. 얼마 전에 전화번호를 바꿔버렸기 때문에 전남편이 티엉의 전화번호를 알리도 없었다. 전남편은 이렇게 한 번씩 불쑥 티엉의 생각 속으로 뛰어들었다.

혹시 위층남자일까? 위층남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며 눈인사정도 나누는 사이였다. 인상이 서글서글한 남자는 티엉에게 호감을 보였다. 티엉도 남자가 싫지 않았다. 한 번씩 남자와 함께 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꿈같은 일이었다. 어제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오다가 건널목에서 남자와 마주쳤다. 남자는 티엉이 들고 있는 짐을 선뜻 들어주었다. 그렇다고 남자가 티엉에게 전화를 걸었을 리는 없었다. 남자는 한 번도 전화번호를 물어온 적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 하는 미련이 남았다. 찍힌 번호로 전화를 걸려다 잠시 망설였다. 스팸이거나 보이스피싱일 수도 있었다. 전화만 걸어도 수십만 원씩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간다는.

진공청소기를 끄자 집안에는 텔레비전소리만 들렸다. 텔레비전에서는 이주민여성에 대한 프로가 진행되고 있었다. 텔레비전에 나온 여자들은 각 나라에서 시집온 사람들이었다. 몽골, 필리핀, 베트남, 중국 등. 여자들은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출연해 있었다. 여자들이 자신들이 겪은 이야기를 풀어놓는 동안 아이들이 방송국 안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티엉은 나에게도 아이가 있었다면.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다. 화면에 비친 아이들은 어쩐지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한국에 온지 6년 되었다는 베트남여자가 유창한 한국말로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갓 시집와서 문화의 차이와 언어 때문에 시댁과의 갈등이 심했다고. 지금은 부모와 자식처럼 서로 허물없이 지낸다고. 여자가 소리 내어 웃을 때마다 붉은 잇몸이 드러났다. 여자의 파마가 풀린 듯한 긴 머리와 낮은 코를 보면서 또다시 중리를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티엉은 전화를 건 사람이 중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는지. 위층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실망스러웠다. 휴대폰에 찍힌 발신번호를 쳐다보며 잠시 망설였다. 헛구역질을 하던 중리의 모습이 떠올라 전화를 거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텔레비전에는 여전히 소란을 피우는 아이들이 비쳤다. 아무도 나서서 아이들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여자들은 그런 자신의 아이들이 자랑스럽기라도 한 것처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짜증스러웠다. 게다가 여자들이 하는 이야기들도 뻔했다. 티엉은 채널을 돌려버렸다. 다른 채널에서는 전문의가 나와서 당뇨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티엉은 텔레비전을 켜둔 채 걸레를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티엉은 베란다의 타일바닥을 걸레로 닦았다. 베란다는 겨울햇빛으로 눈이 부셨다. 따사로운 겨울햇빛이 좋았다. 고향의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햇빛 같았다. 보리수나무와 비파나무에도 겨울햇빛이 가득 들어앉아 있었다. 나무들은 햇빛 속에서도 생기가 없어보였다. 병이 들었는지 잎은 비틀려 있고 하얀 점 같은 것들이 부스럼처럼 붙어 있었다. 키도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노파의 집에 처음 왔을 때나 다섯 달이 지난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화단이나 산에 심어야 하는 나무들이었다. 티엉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파는 남편이 살았을 때 심어놓은 나무라며 자주 나뭇잎을 쓰다듬었다.

티엉은 시선을 옮겨 창밖으로 보이는 학교운동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이 모여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내지르는 함성과 해맑은 웃음소리가 티엉에게까지 건너왔다. 아이들은 공을 i아 우르르 몰려다녔다. 한 아이가 힘껏 공을 차올리자 유난히 파란 겨울하늘이 쨍! 하고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무리 중에 키가 제일 작아 보이는 아이가 키가 큰 아이의 다리사이로 공을 빼앗아 요리조리 몰고 다녔다. 아이는 발이 빨랐다. 위기의 순간에 뒷발로 공을 살짝 빼돌려 골대를 향해 힘껏 차 넣었다. 골대의 그물이 출렁! 물결치듯 뒤로 밀려났다. 골인! 하고 티엉은 낮게 탄성을 질렀다. 그런데 무리 속에 끼어들지 못하고 저 혼자 계단에 앉아 있는 아이가 눈에 띄었다.

저 아이는 왜 저러고 앉았을까, 한참을 보아도 아이는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아이들과 한 무리가 아닌지, 흔히 말하는 왕따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은 아이의 간절한 마음이 읽혔다. 아이들은 아무도 그 아이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왠지 아이가 딱해 보였다. 티엉은 아이에게 그렇게 앉아 있지 말고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자꾸 입을 달싹거렸다. 한바탕 땀을 흘린 아이들이 축구를 그만두고 교문을 빠져나갔다. 그 아이도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과 몇 발자국 떨어져 엉거주춤 따라나서고 있었다. 아이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티엉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아이가 자꾸 눈에 밟혔다. 아이들이 사라진 텅 빈 운동장은 쓸쓸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아이들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듯 했다. 텅 빈 적막감을 바라보고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티엉은 화들짝 놀라며 창문을 닫고 돌아섰다.

전화벨 소리는 잠시 바깥으로 나가 있던 생각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티엉은 무심결에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새까맣게 꺼져있는 액정화면을 보고서야 거실의 전화기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티엉이 쫓아가 받는 순간 전화는 끊겼다. 돌아서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집어 들자 톤이 높은 여자의 목소리가 와락 달려들었다. 왜 전화를 빨리 안 받고 그래요, 언니 바꿔요! 노파의 사촌이었다. 티엉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노파의 방으로 들어갔다. 노파가 침대에 누워서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나가라고 수화기를 들지 않은 손을 내저었다.

티엉이 방문을 닫고 나와 거실의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데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미국에 있는 얘들한테서는 여전히 연락이 안와요? 그러기에 애써 키워놔 봤자 아무 소용없다니까요. ! 잃어버렸다는 물건은 찾았어요? 패물이나 귀중품은 내게 맡기라니까 고집은. 베트남 여자를 절대 믿어서는 안 돼요. 보기는 순해 보이지만 당찬 구석이 있는 여자에요. 티엉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져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사촌이란 여자의 말이 티엉의 귀에 우렁우렁 울렸다. 돈은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가끔 언니가 정신을 놓을 때가 있으니 아마 잃어버린 것조차 모를 거야. 티엉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참에 언니, 아파트 처분하고 저희 집으로 들어오세요. 아파트 처분한 돈은 우리 아들 사업자금으로 빌려주고. 이자는 은행보다 많이 챙겨 줄 테니까. 그러면 언니는 덜 외롭지 않겠어요? 자식도 못 믿는 세상에 남을 어떻게 믿고 한 집에 살아요? 그것도 베트남여자를. 그렇게 살다가 베트남여자가 언니에게 몹쓸 짓이라도 하면 어쩌우. 잠자코 듣고 있던 노파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쓸데없는 소리하려거든 전화 끊어! 노파가 일방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티엉도 놀라서 서둘러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티엉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언가 자신의 가슴을 압박해오는 느낌. 한 번씩 마트나 은행을 가기위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자신의 방에서 느껴지던 석연찮았던 모습이 생각났다. 서랍장위에 놓인 사진액자나 화장품들이 조금씩 위치가 바뀌어 있고 서랍 속에 차곡차곡 개어놓은 옷들이 흐트러져 있던. 트렁크 안까지 구석구석 뒤진 흔적들. 편지며 수첩, 통장, 사진들은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티엉은 전남편과 살던 악몽이 떠올랐다. 결혼하고 이 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시어머니는 티엉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티엉의 소지품을 뒤졌고 전화내역까지 알아내곤 했었다.

티엉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호흡이 가빠오며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겉옷을 걸치고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급하게 현관문을 나서려다 발이 워커에 걸려 몸이 앞으로 휘청했다. 노파의 죽은 남편 신발이었다. 노파는 현관바닥에 늘 워커를 놓아두었다. 워커는 왠지 위압적으로 보였다. 크기가 매우 커서 자리차지도 많았다. 그 때문에 한 번씩 걸릴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티엉은 자신이 낯선 곳에 와 있다는 것을 더욱 실감 했다.

티엉은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데 어디선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다니. 티엉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혹시 환청이 들린 것일까, 귀를 기울이자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다. 티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복도에는 흐릿한 불빛 속에 어둠이 낮게 드리워 있을 뿐이었다. 계단으로 향하는 비상구문을 열어보았다. 거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앞집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종종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곤 했지만 이 시간에 아이가 집에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앞집여자는 네 살배기 여자아이와 단둘이 살았다. 아이는 아침이면 어린이집에 갔다가 저녁에 여자가 퇴근하면서 데려왔다.

티엉은 엘리베이터 앞에 섰지만 딱히 갈 데가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바로 위층에 머물러 있었다. 위층남자가 타고 올라간 것 같았다. 티엉은 엘리베이터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동안에도 아이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이상하게 아이의 울음소리가 티엉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평소에도 웬일인지 위태위태해 보이던 여자와 아이였다. 티엉은 앞집 현관문 앞으로 다가갔다. 무심코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그런데 달칵, 하고 문이 열렸다. 티엉은 멈칫하다 현관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여자는 보이지 않고 아이혼자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티엉은 걱정이 되었다. 누워 있는 아이를 덥석 안아 들었다. 아이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이마를 짚어보니 이마도 불덩이 같았다. 티엉은 아이를 눕혀 놓고 찬물에 적신 물수건으로 아이의 손부터 닦기 시작했다. 물수건이 몸에 닿자 아이는 경기를 일으키듯 울어댔다. 그래도 티엉은 멈추지 않았다. 잠시 뒤 열이 내린 아이는 잠잠해졌다. 티엉이 가슴을 토닥이자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잠든 아이의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보드라운 피부며 곱슬머리에 속눈썹이 긴 아이는 인형 같았다. 티엉은 아이를 가만히 안아들었다. 아이에게서 향기로운 살 냄새가 났다. 아이는 티엉의 몸에 착 감기듯이 안겨왔다. 텅 빈 가슴이 가득 차는 느낌. 티엉은 아이를 안고 한참을 서성거렸다. 어쩐지 이 아이만 있으면 다 괜찮아질 것 같았다. 티엉은 그대로 아이를 안고 현관문 쪽으로 다가갔다.

현관문을 막 나서려는데 여자가 들어섰다. 여자의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티엉과 아이를 번갈아 쳐다보던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 여자가 다그쳤다. 티엉은 선뜻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가 많이 울어서……열이 나기에 병원에 데려가려고…… 티엉은 우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여자가 티엉에게서 아이를 빼앗듯이 낚아채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남의 아이를. 잠에서 깬 아이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여자가 손을 내저으며 소리 질렀다. 당장 여기서 나가요, 경찰을 부르기 전에! 티엉은 도망치듯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학교운동장에는 사람들이 트랙을 돌고 있었다. 티엉은 히말라야시다 나무 옆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눈은 사람들을 보고 있는 데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이 떠돌았다. 왜 그랬을까, 여자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정말 아이를 안고 나왔을지도 몰랐다. 아찔했다. 티엉은 생각할수록 자신의 행동이 어처구니없었다. 남의 아이를 데려와서 어쩌려고. 자신이 점점 이상해져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사람들과 외떨어져 앉아 있는 자신이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티엉은 한 번도 이렇게 멀리 떠나는 꿈을 꾼 적이 없었다. 꿈보다 더 꿈같았다. 27살이나 많은 남편과 결혼, 가족의 죽음, 이혼. 지나간 3년 동안 한 생을 다 살아버린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노파는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사촌에게까지 말했다면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는지 몰랐다. 귀중품이나 금붙이 같은 것인지도. 문득, 노파가 가진 패물이 얼마나 될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사촌이 하는 말로 봐서는 꽤 많을 것 같았다. 노파는 옛날에 포목장사를 해서 큰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것들을 대체 어디다 숨겨놓았을까? 거미처럼 휘어진 노파의 몸에는 아무 소용도 없는 물건이었다. 자신에게 주면 얼마나 힘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패물구경도 못해보고 꼼짝없이 도둑으로 몰릴 처지였다. 티엉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답답했다. 어디에도 물어볼 데가 없었다.

불쑥 전남편 생각이 났다. 티엉이 그래도 한때 아버지처럼 의지한 사람이었다. 이제는 가족도 아니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다. 전남편은 이혼하고도 티엉을 몇 번 찾아왔었다, 다시 합치면 분가해서 살겠다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전남편은 지극한 효자였다. 그런 사람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가끔은 못이기는 척 따라갈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되었다. 한번만 더 찾아왔어도 따라나섰을지도 몰랐다. 티엉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싶었다. 티엉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전화기가 울렸다. 언니 나에요, 중리. 지금 만날 수 있어요? 하노이여자였다. 티엉은 중리의 전화가 반가웠다. , 잠깐 시간 낼 수 있어.

학교정문 앞에서 기다린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중리는 모습을 드러냈다. 며칠 사이 얼굴 표정이 밝아보였다. 목소리도 한층 생기가 있었다. 중리는 만나자마자 자랑처럼 떠벌리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아기 가졌다고 자신에게 너무 잘해준다는 거였다. 행여 유산이라도 될까봐 시어머니는 아무 일도 못하게 한다고. 남편은 먹고 싶은 거 말만 하면 제다 사다 준다고. 왕비 대접받는 기분이라나. 그러면서 아직 불러오지 않은 배를 앞으로 내밀며 어루만졌다. 티엉은 왠지 그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며칠사이에 달라진 중리가 혼란스럽기도 했다. 자신의 이야기는 꺼낼 기회조차 없었다. 티엉도 아기를 가졌다면 전남편이 얼마나 좋아했을지,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아기였는데. 중리를 만나고 나니까 기분이 더 착잡해졌다. 티엉은 자신이 갈 곳이 노파집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가슴이 답답해왔다.

티엉은 살며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티엉이 들어서자 노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다그쳤다. , 그 물건 어떤 놈에게 주고 오는 길이냐? 티엉은 영문을 몰라 하며 노파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게 어떤 물건인데 감히 그걸 네가 훔쳐가! 할머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나를 속이려고, 어림도 없다. 당장 다시 찾아와! 노파가 손으로 티엉의 가슴을 떠밀었다. 티엉은 뒤로 떠밀리며 말했다. 할머니, 저는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몰래 나갔다오는 게야? 가슴이 답답해서 잠시 바람세고 왔을 뿐이에요. 허튼수작 부리지마! 할머니, 대체 어떤 물건을 잃어버리신 거예요. 말씀해보세요. 같이 찾아보게. 또 엉뚱한 데 두셨는지 모르잖아요. 네가 지금 나를 치매 걸린 노인 취급하는 게냐. 그렇게 해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티엉은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티엉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집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며칠에 한번 정수기 아저씨가 다녀가고 한 달에 한번 우유아줌마가 요구르트대금을 받기 위해 방문했다. 그 사람들이 물건을 훔쳐가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 사람들이 올 때마다 노파나 티엉 자신이 있었으니까. 노파의 사촌이 다녀갔을까? 노파의 사촌은 아파트 도어록 번호까지 알고 있었다. 노파의 자금출처라든가 귀중품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제일 의심스러운 인물이었다. 그래도 의심을 가장 많이 받게 되어 있는 사람은 한집에 사는 티엉 자신이었다. 딸처럼 지내자고 하더니. 마음 같아선 당장 이 집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먹고 자고 하는 일자리가 그렇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며칠만 있으면 월급을 받는 날이었다. 노파는 다른 것은 인색하게 굴어도 월급만큼은 언제나 제때에 챙겨주었다.

시계를 쳐다보니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티엉은 며칠 전에 만들어서 넣어둔 짜조를 꺼내려고 냉동실 문을 열었다. 아침에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냉동실 안이 뒤죽박죽이었다. 짜조를 가지런히 랩으로 싸서 넣어두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노파가 버렸나 싶어 티엉은 쓰레기통까지 뒤졌다. 하지만 곧 노파가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노파는 짜조를 잘 먹었다. 티엉은 다시 꼼꼼히 찾아보았다. 냉동실에 들어있는 생선이나 고기 같은 것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냉동실 구석에 놋쇠로 된 이상한 물건이 눈에 띠었다. 크기가 꼭 담뱃갑만 한 게 모양도 담뱃갑과 비슷했다. 귀중품은 아닌 듯, 그저 손때가 묻은 오래된 물건 같았다. 티엉은 이게 뭘까? 하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케이스를 열자 속에 또 하나의 케이스가 들어 있었다. 뭔지 모르지만 노파가 찾고 있는 물건도 아닌 듯 했다. 짜조는 그 물건 밑에 깔려 있었다. 티엉은 짜조를 꺼내놓고 놋쇠로 된 물건을 거실장안에 넣어 두었다.

티엉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꽁꽁 언 짜조를 올렸다. 짜조가 녹으면서 기름이 튀었다. 불을 낮추고 프라이팬 뚜껑을 덮어놓고 생각했다. 노파는 대체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노파가 말을 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었다.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 티엉은 노릇노릇 구워진 짜조와 노파가 좋아하는 메밀차를 꽃무늬 쟁반에 담아 들고 노파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 앞에 서자 노파가 보일 반응이 눈에 선했다. 그렇다고 식사를 안 챙겨줄 수는 없었다. 티엉은 노파의 방문을 노크했다. 할머니, 식사하세요.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시 기다린 뒤 방문을 열었다. 노파는 화가 잔뜩 묻어난 목소리로 말했다. 너나 실컷 먹으렴. 할머니가 드시지 않는데 저 혼자 어떻게 먹겠어요. 그러지 말고 드세요. 글쎄 먹고 싶지 않다는데도. 안 드시면 더 기력이 없어요. 억지로라도 드셔야지요. 일없다! 음식에 무슨 짓을 했는지 어떻게 알고. 노파가 쟁반을 손으로 밀쳤다. 메밀 차와 짜조가 방바닥으로 쏟아졌다. 그 순간 티엉도 몹시 화가 났다. 할머니가 저를 그렇게 못 믿겠다면 이집에서 나갈게요. 노파가 움찔 놀라며 티엉을 쳐다보았다.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훔친 물건을 돌려줄 때까지 아무데도 못가! 할머니, 저는 정말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어요. 제발 믿어주세요. 뭘 잃어버리신지 모르지만 다시 한 번 잘 찾아보세요. 노파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내가 제대로 찾아보지 않고 너를 의심하는 것 같으냐. 백번도 더 찾아봤어. 네가 나를 정신 나간 노인네 취급하는데 아직 말짱해.

티엉은 잠이 오지 않았다. 억울한 생각에 화도 나고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이런저런 생각에 뒤척였다. 별로 먹은 것도 없는데 배까지 살살 아파왔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무심코 화장실 거울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화장실 거울에 붙어있던 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지? 티엉은 변기에 앉아 타일바닥이며 벽, 천장 등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방이 꽉 막힌 화장실안에서 어딘가로 이동해 갈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티엉은 변기에서 일어나 타일바닥이며 화장실 구석구석을 들여다보았다. 죽었다면 사체라도 있어야했다. 거미는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티엉은 화장실에서 나와 노파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방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자신이 지나치게 과민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깟 거미가 사라진 것이 노파와 무슨 상관이라고. 괜히 노파의 잠을 깨웠다가 또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그냥 돌아서려다 그래도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티엉은 살며시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침대위에 자고 있어야 할 노파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티엉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티엉은 방안에 있는 화장실이며 침대 밑을 살펴보았다. 이 밤중에 노파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왠지 사라진 거미가 떠올랐다.

티엉은 방안에서 나와 집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주방이며 서재가 있는 방까지. 밖의 화장실도 다시 살펴보았다. 혹시나 하고 거미가 있던 곳을 살피는데 사라졌던 거미가 벽과 거울 틈에 끼어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티엉은 거미가 무척 반가웠다. 거미를 조심스레 꺼내 거미줄에 올려 주었다. 노파도 거미처럼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티엉은 베란다로 나가보았다. 베란다를 살펴보는데 검은 물체가 눈에 띄었다. 저것이 뭘까? 티엉은 가까이 다가갔다. 노파였다. 놋쇠골동품을 움켜쥔 채 노파는 보리수나무화분 뒤에 쓰러져 있었다.

의사는 조금만 늦게 발견했어도 큰일 날 뻔 했다고 했다. 머리의 혈관이 터졌으면 죽었을 거라고. 수술을 하고 의식이 돌아온 노파는 티엉을 돌아보며 뜬금없이 희정아! 하고 불렀다. 티엉은 영문을 몰라 하다 곧 노파가 자신을 딸로 착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노파는 다시 한 번 희정아! 하고 다정하게 불렀다. 티엉은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티엉은 노파의 침대 맡에 바싹 다가앉았다. , 저 여기 있어요. 나 좀 일으켜다오. 우리 집에 가야지. 아버지 기다리실라. 티엉은 바닥에 널려 있는 노파의 신발을 가지런히 놓아주었다. 그리고 노파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 우리 집에 가요. 신발을 신으며 노파가 물었다. 아버지 재떨이는 찾았어? 잠시만 재떨이가 안보여도 찾아대는 양반 아니냐. 티엉은 그제야 노파가 잃어버린 것이 재떨이였다는 것을 알아챘다. 놋쇠로 된 골동품 같은 물건이 재떨이였다는 사실도. --



<당선소감>

 

"꿈이 없이 산다는 것은 무생물과 같다"


  여자의 집은 해가 빨리 졌다. 그 때문에 겨울은 더 춥고 스산했다. 오늘도 역시 네 시쯤 되니까 창밖은 회색빛으로 점점 짙어져갔다.하나의 계절이 문을 열고 사라지고, 또 다른 계절이 또 다른 문으로 들어오는 동안 미처 그 문을 빠져나가지 못한 장미는 고개를 꺾은 채 얼어붙어 있고. 중력도 없이 떨어져 내리는 나뭇잎, 그 잎들을 바라보면서 하릴없는 오후가 지나가는 그늘 속에 여자는 스산한 풍경처럼 놓여 있었다. 붙잡아보려 하지만 도무지 붙잡히지 않는 꿈의 조각 같은 것을 매만지면서. 자신을 자꾸 다독였다. 괜찮아, 언젠가는 저 문을 통과할 수 있어, 하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당선통보가 왔다.


  꿈이 없이 산다는 것은 무생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순간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시간들이, 어쩌지 못하는 내 육신이 너무 버겁다는 생각이 찾아들었다. 살아 있으니 어쩔 수없이 살아가야했고, 살기 위해서는 어떤 일에든 의미를 부여해야했다. 그것이 소설이었다. 내가 가장 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이제 소설은 내게 숨쉬기와 같은 일이 되었다. 내가 창조해낸 캐릭터들에 숨을 불어넣으면 덩달아 내 숨쉬기도 한결 편안해지는.


  당선통보를 받는 순간 여러 고마운 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또 한 번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문을 활짝 열어주신 부산일보와 심사위원들께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천종숙(필명 천이경)/1957년 고성 출생. 방송통신대학 국문과 졸업. 200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심사평>

 

홈메이트, 단일성과 긴장감 놓치지 않는 솜씨 믿음직

 

  예심을 통과한 작품은 모두 7편으로 '' '진실의 순간' '태풍을 기다리며' '홈 메이트' '미끼' '달야' '엄마의 강' 이었다. 다수의 작품들이 가족문제를 다루고 있었지만 신인으로서의 새로운 문제의식과 그에 수반되는 서술방법의 고민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또한 소설의 세계가 요구하는 기본으로서의 산문정신과 서사성의 부족도 눈에 띄었다.


  '홈메이트'는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주인공은 노파와 같이 사는 베트남 여성 티엉이다. 노파는 딸처럼 대하겠다고 했지만 치매 초기인데다 티엉이 외국인이라는 데서 오는 거리감을 쉬 지우지 못한다. 그러던 차에 아끼는 물건이 없어졌다고 의심하면서 갈등을 증폭시킨다.


  하루라는 압축된 시간 안에 노파와 티엉이 부닥치는 세세한 장면들을 실감나게 그려낼뿐더러, 노파의 사촌동생과 이웃집 여자들의 적절한 등장으로 이야기를 확대시키면서도 단일성과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솜씨가 믿음직하다. 거미와 같은 소도구의 활용과 잃어버린 물건이 무엇인지가 폭로되는 후반부 처리 등이 습작에 들인 시간이 적지 않음을 알게 했다. 당선자는 물론 모든 투고자들의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 김성종·조갑상·박명호·박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