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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고양이가 사는 집 / 길성미(정정화)


집을 나와 진눈깨비가 날리는 길을 걸었다. 눈발이 굵었지만 땅에 닿자마자 녹아 내렸다. 하늘은 잿빛 구름을 낮게 드리우고 도시를 집어삼킬 듯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차고 습한 공기를 타고 된장국 냄새가 났다. 집에서 멀어질수록 추위는 더욱 시퍼런 날을 세웠다. 나는 호주머니에 든 명함을 만지작거려보았다. 반장이라고 직책이 새겨진, 지금은 쓸모없는 명함인데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모서리의 뾰족한 감촉이 손끝을 스칠 때 납작한 동물의 사체가 눈에 들어왔다. 형체가 조금 남아 있는 머리 부분을 보니 고양이였다. 붉은 피와 흰 살점과 누르스름한 털이 짓이겨져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흰색 털로 뒤덮인 폐가의 고양이가 뇌리를 스쳤다. 그 고양이는 별일 없는지 걱정이 됐다. 고양이의 사체 위로 차 한 대가 지나가자 고양이는 더 납작해졌다. 밟고 지나가는 바퀴의 흔적만큼 고양이는 자신의 형체를 잃어갈 것이다. 길 건너 골목길은 짐승이 사는 동굴처럼 어둑해 보였다.


폐가의 마당을 들어섰을 때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요 며칠 조용하던 녀석들이 시끄럽게 우는 이유가 궁금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어미 고양이는 새끼는 신경도 안 쓰고 혼자서 문 쪽을 빙빙 돌았다. 뭔가에 홀린 듯 나를 보고도 시큰둥하더니 벌러덩 누워 몸을 좌우로 굴렸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새끼가 울었다. 평소에는 새끼를 끼고 다니더니 오늘은 관심도 없었다. 고양이의 이상행동은 아내의 속마음처럼 난해하기만 했다. 내가 실직을 하고도 아내에게 비밀로 하는 것은 아내와 부딪히는 걸 피하고 싶어서다.


아내가 한창 부업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였다. 말이라도 나누려면 일을 같이 하면 좋을 것 같아 아내 쪽으로 발걸음을 뗐다. 아내는 세 걸음 이내에 앉아 있었다. 물리적 거리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지만, 아내와 나 사이에 메워지지 않는 미세한 틈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아내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말린 야생화가 장식된 머리끈으로 묶은 채 기계적으로 손을 놀렸다. 박스 안에는 아귀가 맞춰진 플라스틱 원형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고무 패킹을 집으려는 순간 아내는 눈을 치뜨곤 손사래를 쳤다. 일을 같이 하다 보면 자연스레 전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한 말문이 트이거나 잠시라도 잡념에서 벗어날 텐데, 극구 말리는 바람에 나는 소파에 몸을 뉘었다. 걱정이 머리를 헤집어놓았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보았지만 쉬이 오지 않았다. . . . 회색 원형이 하얀 원형의 테두리에 딱 들어맞는 소리가 들렸다. 흰색 패킹이 회색 패킹을 감싸도록 끼우는 것이 아내가 맡은 일이었다. 규칙적인 소리는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언젠가 경쾌하게 들리던 소리가 지금은 나를 옭아매는 소리로 바뀌어 주위를 맴돈다. 분무기에 물을 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는 패킹이 부드럽게 잘 끼워지게 하려는 비법이다. 물을 뿌리지 않으면 패킹은 빡빡해서 잘 들어가지 않는다. 아내와 나 사이에도 물 같은 물질이 있다면 뿌리면 좋을 것 같았다. 아내는 아직 눈치를 못 챈 듯하지만 자꾸만 위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아내는 여전히 딱, , 소리를 내며 패킹을 끼우고 있었다. 나는 실눈을 뜨고 아내의 손을 내려다봤다. 가느다란 손가락 끝부분엔 밴드가 말려 있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손가락은 끝없이 움직일 것만 같았다. 지문이 다 닳았어. 아내가 자주 이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아내의 말이 때론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그런 아내에게 일을 그만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아내에게는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 앉았다.


현지 엄마…….”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드는 아내를 보는 순간 말할 용기를 잃고 말았다. 입을 꼭 다문 아내가 쌀쌀맞게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불편한 말들은 안으로만 파고들었다. 그것이 아내에 대한 배려인지 내 자존심 때문인지 정확히 구분 지을 수 없었다. 나는 왼손 엄지손톱을 잡고 꼭꼭 눌렀다. 아내는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싱겁기는, 하고는 다시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할 때마다 두 개의 패킹이 만나 정확히 한 덩어리가 된다. 아내와 나도 저렇게 한 몸이 될 순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놈의 딱딱 소리. 내 말을 가로막는 저 소리.


사택에서 생활하다 한 달에 두세 번 집에 들르곤 했다. 정상 출근이라면 주로 일요일 저녁에 회사에 들어갔다. 지금은 가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아내에게 월차를 냈기에 내일 가도 된다고 했다. 아내는 자세히 묻지도 않았다. 아내가 꼬치꼬치 물어왔다면 자연스럽게 내 처지를 알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에 몰두하느라 내게 무관심한 아내라는 사람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텔레비전을 틀어놓은 채 리모컨을 들고 애꿎은 채널을 계속 바꿨다. 아내는 한가득 쌓인 부업 상자를 차에 싣기 위해 패킹을 갈무리해 담았다. 내가 도와주려고 일어났을 때 아내는 혼자 해도 된다며 상자를 들었다. 아내가 나간 뒤 나는 베란다로 갔다. 모자를 쓴 사내가 지정 장소에 놓아둔 상자를 싣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아내가 나타났다. 사내는 아내가 든 상자를 받아서 차에 실었다. 아내는 사내에게 지나칠 정도로 입을 벌리고 웃으며 뭐라고 말을 했다. 사내도 미소를 띤 채 은근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유쾌하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은밀한 연인들처럼 달떠 보였다. 평소에 나를 보면 닦달하는 아내는 온데간데없고 상큼한 매력을 발산하는 아내가 그곳에 있었다. 비스듬한 자세로 곁눈질을 하던 나는 아내가 볼까 봐 거실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짐을 싣는 것 같았다. 뒤늦게 나타난 아내는 내게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점심 때 먹던 김치찌개를 데우더니 밥 먹자고 했다. 찌개 위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국물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으니 쓴맛이 받쳤다. 아내는 호기심도 애정도 없는 무덤덤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입술 근육을 움직여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새끼 고양이의 털은 어미 고양이와 다르게 검정색이다. 나는 가방에서 멸치를 꺼내 고양이 앞에 놓았다. 어미 고양이는 먹을 생각도 않고 머리를 벽에다 부딪고 있었다. 새끼 고양이는 깔짝거리며 멸치를 먹기 시작했다. 처음엔 나를 경계하느라 가까이 오지 않던 놈들이 먹을거리를 갖다 주다 보니 요즘은 먼저 다가와서 머리를 비비기도 했다. 새끼 한 마리를 잃고 난 뒤 남은 새끼를 더욱 살뜰히 보살피던 어미 고양이가 오늘은 본 척도 안 했다. 나는 어미 고양이의 목을 쓰다듬고 엉덩이를 툭툭 쳐주었다. 그랬더니 제법 얌전해져서는 머리를 내 몸에다 비비적거렸다. 창밖에는 바람에 떠밀린 진눈깨비가 시야를 가릴 정도로 뿌옇게 내리고 있었다. 축축한 겨울바람에 몸이 선득했다. 아내와 나를 갈라놓은 큰길도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진눈깨비가 몰아쳤다.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큰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서로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한쪽은 사람들의 고성이 창밖을 넘기도 하고 세제가 섞인 퀴퀴한 하수구 냄새가 들이치는 주거지역이었고, 다른 한쪽은 빈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가끔 바람이 찾을 뿐 인적이 드문 재개발 예정 지역이었다. 너덜거리는 광고지가 붙은 전봇대 너머로 방치된 집들이 오종종하게 모여 있었다. 아이들이 빠져나간 학원처럼 사람들이 떠나고 없는 빈집들은 기다림을 떠올리게 했다. 시멘트가 갈라진 틈새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오래된 집들에서는 곰팡내가 났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서는 고양이와 쥐들이 건물 안팎을 누비고 다니며 주인 행세를 했다. 먹장구름이 드리운 하늘에서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차 유리창을 열고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빗물로 흥건해졌다. 가구는 비닐을 덮은 상태였지만 조금씩 젖어들었다. 길 건너 빈집들은 쏟아지는 비에 포위된 채 음습한 기운을 풍기며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듯했다. 우리 집은 달세를 줘야 하는 열여덟 평짜리 집이다.


이삿짐을 풀고 난 뒤 잡동사니들을 버리러 갔을 때였다. 쓰레기봉투를 담는 통 옆에 덩치가 큰 길고양이 한 마리가 쪼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고양이는 뭔가를 애타게 바라는 모습이었다. 빗소리와 뒤섞인 울음소리는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쓰레기봉투를 집어넣고 통을 닫는 순간 고양이는 앙칼지게 울어댔다. 비에 젖은 고양이는 등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두 눈에는 연녹색의 빛이 났고, 이빨 사이에 분홍 혓바닥이 꿈틀거렸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소파에 앉지 못하고 거실을 왔다 갔다 했다. 고양이의 애끓는 울음이 귓전을 맴돌았다. 멸치 몇 마리를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고양이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고양이 앞에다 멸치를 떨어뜨렸다. 고양이는 캬아악,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내게 위협을 가했다. 내가 뒤돌아가는 척하자 그제야 멸치에 달려들었다. 머리를 좌우로 돌려가며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리곤 어딘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네 개의 다리가 가볍게 움직였다. 마치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는 것처럼 등줄기가 출렁거렸다. 고양이가 가고 있는 곳이 궁금해서 발소리를 죽이며 미행했다. 고양이는 주변을 경계하며 담장을 넘거나 건물 사이 텃밭으로 난 지름길을 이용했다. 사뿐사뿐 움직이는 고양이에 비해 나는 힘들게 고양이를 따라갔다. 고양이는 침침한 폐가의 골목으로 달렸다. 길고양이들은 아침저녁으로 김치찌개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나는 곳과 곰팡이꽃을 피운 빈집들이 비린 냄새를 풍겨대는 지역을 넘나들며 주린 배를 채웠다. 전깃줄이 거미줄처럼 엉킨 아래로 펼쳐진 골목길에는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봉투가 길가에 늘어서 있었고, 스멀거리며 기어오르는 악취에 코를 막아야 했다. 대문은 누가 떼어갔는지 시멘트 속에 녹슨 철심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화단이었음직한 담벼락 밑 좁은 땅에서는 잡초가 뒤엉켜 자라는 중이었다. 빈 상자와 스티로폼이 마당가에 흩어져 있었다. 고양이가 들어간 집 안에는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엎드린 채 꼬물거렸다. 나는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벽과 천장에는 검푸른 곰팡이가 얼룩져 있었다. 바닥에는 불에 그슬린 흔적이 흉터처럼 보였고, 누군가 피우고 버린 짧은 담배꽁초와 빈 병들이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얼굴과 몸을 혓바닥으로 닦더니 새끼에게 젖을 물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에 홀려서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고양이가 눈치채지 못하게 멀찍이 선 채로. 마당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더욱 굵어졌다. 아무도 없는 폐가인데도 언젠가 와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 이후 고양이가 궁금하거나 아내와 말다툼할 때면 이곳을 찾곤 했다. 집에 와서 자고 가는 날이면 아내 몰래 멸치 몇 마리를 들고 고양이를 찾았다. 앙상한 고양이의 등허리가 올 때마다 홀쭉해져갔다. 내가 이곳을 네 번째 들렀을 때 새끼 고양이의 사체가 폐가 마당 한쪽 구석에 다리를 뻗은 채로 굳어 있었다. 흰 털이 유난히 고운 것이 이곳에 머물던 새끼 고양이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진눈깨비가 나무에, 지붕에, 마당에 퍼부어댔다. 새끼 고양이를 묻어 둔 화단에는 눈이 쌓였다가 녹았다가를 반복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우리 집이 있지만 나는 폐가에서 고양이들과 놀았다. 며칠 전부터 몸을 기대온 은신처이다. 허기가 밀려들었다. 누런 알루미늄 냄비에다 물을 붓고 간이 가스레인지 전원을 켰다. 가스레인지 밑에는 신문을 깔아 놓았고, 그 주변으로 생활 정보지, 광고지가 뒤섞여 흩어져 있었다. 창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바람에 종이들이 팔랑거렸다. 소주를 일회용 컵에 따랐다. 컵라면을 밥 삼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알싸한 소주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와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회사를 나오는 날 김 씨를 만났다. 그에게 사정을 해보면 수가 날 것도 같아서였다. 회사에서 김 씨는 형님 동생하며 지낸 사이로 내가 작업반장이 되었을 때부터 웃기는 일이 없는데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실없이 웃을 때가 많았다. 우선 김 씨에게 얼마간의 돈을 빌려 융통해 쓰면서 일자리를 알아볼 요량이었다.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한갓진 돼지국밥집에서 김 씨와 마주 앉고 보니 뭔가 어색했다. 절반 이상이 일자리를 잃은 구조조정의 된바람에도 살아남은 김 씨가 신통해 보이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다. 어떡해서든지 돈을 좀 빌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내 앞에서 곧잘 머리를 조아리곤 하던 김 씨는 그날따라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는 눈을 자주 내리깔았다. 사람의 처지가 손바닥 뒤집듯 달라진다는 것이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나도 모르게 욕을 내뱉을 뻔했다. 뚝배기의 뜨거운 김이 코끝으로 올랐다. 내심 소주라도 한 병 시켰으면 하는데 김 씨는 눈을 끔뻑이며 내 눈치를 살피더니, 술은 다음에 한잔하자고 했다. 반주를 곧잘 마시던 김 씨는 그새 습관이 바뀐 것처럼 점잔을 뺐다. 국밥을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몇 번이나 돈 얘기를 꺼내려다 말고 했다. 아쉬운 소리를 할 때는 자꾸 망설여졌다. 국밥을 먹는 건지, 말을 삼키는지 모를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니 뚝배기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입이 참 안 떨어지는데 어째 돈 천 정도 융통 안 되겠나?”


김 씨는 대답 없이 탁자에다 시선을 고정했다. 김 씨의 표정은 무덤덤해서 마음을 읽기가 어려웠다.


돈요? 요즘 쌓아두고 사는 사람이 어딨는교?”

그럼 되는 대로라도 …….”

우리 집도 요즘 굴러가는 기 빡빡함더.”


김 씨는 자세한 설명 없이 툭 내뱉었다. 폰과 계산서를 챙기며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자리를 피하고 보겠다는 속셈인 것 같았다. 겸연쩍은 얼굴로 김 씨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김 씨는 국밥 값을 계산한 뒤 목례를 하고는 음식점을 나갔다. 나는 쇠 냄새가 나는 김 씨의 체취를 따라 걸었다. 갈 곳이 있는 뒷모습이 의기양양해 보였다. 잰걸음으로 달려가 김 씨의 팔을 잡아챘다.


사정 좀 봐 주게.”

형님, 와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교?”


김 씨는 내 팔을 가볍게 떼어놓았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김 씨는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 섞였다. 언제까지 갚겠다는 확실한 믿음을 주고 말하지 않았다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다. 김 씨는 나보다 6개월이나 늦게 그곳에 입사했다. 허드렛일이나 주로 하는 그가 내게 용접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형님, 형님 하며 다가오는 김 씨를 외면할 수 없어서 틈날 때마다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학원에서 배우고 닦은 실력을 한 달 만에 다 가르쳤을 때 김 씨는 나를 끌어안았고, 나는 웃으며 김 씨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한동안 김 씨는 뻔질나게 술을 샀다. 외동이라 형님으로 모시고 싶다는 김 씨가 마음에 들었었다. 김 씨가 모르는 타인처럼 멀게 느껴졌다. 차라리 그랬다면 기대감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일자리가 바로 연결되면 아내에게 말하기가 수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길거리에 비치된 벼룩시장 홍보지를 꺼내서 천천히 훑어보았다. 매물 부동산에 대한 정보가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구인구직란에 학원 강사를 구한다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기다린 후 세상 풍파를 겪지 않은 듯 안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사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전화 드렸습니다.”

벌써 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거절을 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나는 평소에는 괜찮다가 긴장을 하면 말을 더듬을 때가 있다. 간절하다는 건 때로 비굴하게 만든다. 다시 구인란을 훑었다. 이곳에 찍힌 내용 중에 아직 사람을 구하지 않은 곳은 어디일까? 직원을 구하고도 광고가 그대로 실린 채 내보내는 경우가 잦았다. 몇 군데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모두 구했다는 답변이었다. 나는 홍보지를 구겨서 길바닥에 던졌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을 구한다고 나붙은 곳이 있는지 찾아 헤맸다. 일을 다니고 있을 때는 눈에 쉽게 띄던 구인 광고도 막상 찾으려고 하니 잘 보이지 않았다. 출입문에 붙은 광고를 보고 들어간 빵집 주인은 내 행색을 위아래로 훑더니 나이 때문에 안 된다며 잘라 말했다. 반나절을 발품을 팔아 헤매 다녔는데도 성과도 없이 애꿎은 발가락만 욱신거렸다.


겨울옷을 깔아놓은 곳에서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스멀거리는 느낌에 잠을 깼다. 새끼 고양이가 내 배 위에 올라와 있었다. 눈언저리가 당겼다. 속이 쓰리고 목이 말랐다. 생수를 마셨다. 위가 한 차례 뒤틀리는 느낌이 났다. 한기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한참 잠잠하더니 어미 고양이가 또 울기 시작했다. 나는 고양이의 엉덩이를 손으로 때렸다. 고양이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평소에는 목을 쓰다듬어주거나 내 무릎 위에 안고 놀기도 했는데 오늘은 다른 고양이를 보는 듯했다. 안락함을 주곤 하던 곳이었는데 뭔가 어수선했다. 새끼 고양이는 한쪽 구석에 앉아 어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친 듯한 어미 고양이의 행동에 새끼 고양이가 놀라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어제는 유독 바람이 많은 날이었다. 큰길가에 장식된 트리는 거센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바람을 타고 귓전에 부딪혔다. 얇게 눈이 쌓인 거리에는 트리에서 불빛이 뿜어져 나와 흔들거렸다. 황금색 불빛이 빙글빙글 돌았다. 불빛의 시작과 끝을 찾아 눈을 돌려 따라가다가 놓쳤다. 아내는 내가 직장에 나가고 있을 때도 불만이 많았다. 전에 살던 아파트를 그리워했고, 학원이 잘되고 있을 때를 되씹곤 했다. 그때 이랬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내는 소용없는 말을 고장 난 오디오처럼 되풀이했다. 아내의 말은 오히려 절망감을 키웠지만 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내의 그 말은 쉬이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아내에게 실직은 큰 충격을 줄 것임에 틀림없다.


아내는 내게 챙겨 주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어느 순간 중지하고, 딸아이에게 주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섭섭한 것은 아니었다. 기다릴 일이 한 가지 줄었을 뿐이다. 그동안 비밀에 붙인 것을 알게 되면 아내는 나를 혐오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뭐해?”

몰라서 물어?”


전화선을 타고 딱딱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고개를 모로 젖히고 전화기를 어깨와 턱 사이에 고정한 채 일을 하고 있을 아내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크리스마스에 집에 못 가는데 어째?”

딴생각 말고 일이나 해. 나 지금 무지 바빠.”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대신 목이 칵 매여 왔다. 나는 아내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실은 널린 게 시간이었기에.


밤거리를 흐느적거리며 걸었다. 수은등 불빛이 내리쬐는 길목에서 어둠 속에 파묻힌 폐가를 쳐다봤다. 내 그림자가 기다랗게 골목에 드러누워 있었다. 내가 움직이자 그림자가 조금씩 뒷걸음을 쳤다. 갈림길에서 나는 폐가로 들어서지 않고 불이 켜져 있는 집으로 향했다. 더 늦기 전에 아내에게 털어놔야 한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칼바람이 부는데도 이마에 땀이 바짝바짝 났다. 이백 아흔 아홉, 삼백, 삼백 하나. ‘삼백 하나라고 마음속으로 헤아렸을 때 드디어 나는 우리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가까운 곳에 내가 머물고 있는데 아내는 그것을 모른다. 벨을 누르려는 순간 손끝이 부르르 떨렸다. 한참을 서성이다 비밀번호를 눌렀다. 아내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집은 고요했다. 밤에는 외출을 할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부업을 마치면 늦은 오후에 시장을 보고 와선 집에 있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안다고 할 순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아내가 없는 집에 몰래 들어온 내가 도둑고양이처럼 느껴졌다. 바로 나갈까 하다가 거실로 들어섰다. 아내가 없는 빈 공간이 낯설었다. 아내는 바쁘게 나갔는지 침대 위에 옷가지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장면, 침대가 이렇게 너저분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내의 옷들이 아무렇게나 구겨진 채 흩어져 있었다. 거실에는 부업 상자가 거실 중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내 손을 거치지 않은 미완의 패킹들이었다. 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내가 일거리를 이렇게 미뤄놓고 어디로 간 걸까? 냉장고 문을 열어 보았다. 내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내는 집안 살림과 부업, 자식 뒷바라지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내게 바라는 것이 많았다. 어떤 일이든 완벽하게 잘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단점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내의 그런 점 때문에 주눅이 들곤 했다.


소파에 앉아 폰을 만지작거리며 초조하게 기다려도 아내는 오지 않았다. 큰맘 먹고 왔는데 왠지 불안한 마음이 일었다. 집안의 공기가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았다. 신발을 신으려는데 검정색 단화에 군데군데 흙이 묻어 있었다. 흙을 따라가다가 신발 밑창을 뒤집어봤다. 가운데 부분에는 흙덩이가 바싹 말라붙어 있고, 반질반질하게 닳은 밑바닥에는 여러 개의 실금이 뒤얽혀 있었다. 바닥에다 놓고 엉거주춤하게 엎드려 신발을 신었다. 썰렁한 느낌에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폐가의 골목을 들어서려는 순간 용달차 한 대가 불빛을 쏘아대며 올라왔다. 눈이 부셔 처음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부업을 실어 나르는 차였다. 완성된 부업 상자는 이미 다 실어갔는데 밤중에 부업차가 왜 왔을까? 차는 우리 집이 있는 빌라 앞에서 멈췄다. 나는 전봇대 뒤에 몸을 숨기고 차를 주시했다. 운전석에 앉은 사내와 옆에 앉은 여자가 포옹한 상태로 격렬하게 키스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행인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잠시 뒤 운전석 문이 열리면서 모자를 쓴 사내가 내렸다. 그러더니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여자가 차에서 내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 원피스를 입은 아내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였다. 용달차는 기역자로 차를 꺾어 돌렸다. 아내는 사내를 향해 손을 흔들더니 아쉬운 듯 차의 뒤꽁무니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굳어 있었다. 아내에게 달려가 속사정을 따져보고 싶었지만 오늘 잔업이 있다고 말했기에 망설여졌다. 아내를 목격한 것이 사실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나는 아내를 따라 바삐 걸었다. 아내는 밤하늘을 쳐다보며 꿈에 젖은 듯 사뿐 걸었다.


이 밤에 어디 갔다 오는 거지?”

깜짝이야! 그나저나 당신은 웬일이야?”

지금 도대체 시간이 몇 신데 싸돌아다녀?”

열두 시가 넘었네, 친구들과 수다 떨다 보니 벌써…….”


아내의 목소리는 긴장돼 있으면서도 애교가 묻어 있었다. 아내는 비밀번호를 눌렀다. 두 번을 실수한 뒤에야 문을 열었다. 아내의 뻔뻔스러움에 심통이 났다. 아내의 진한 화장이 눈에 거슬렸다. 나는 거실 중간에 놓인 부업 상자를 넘어뜨려 왈칵 쏟아부었다.


이딴 거 다 집어치워.”

당신 도대체 왜 이래? 한 푼이라도 벌어서 살림에 보태려는 거 몰라서 이래?”


아내는 눈에다 쌍심지를 켜고 눈을 파르르 떨었다.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졌지만 그 말이 두 사람을 벼랑으로 몰고 갈까 봐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아내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아내의 가면을 벗기고 싶은 욕구가 일었지만 참고 있었다.


이제 부업 그만해.”

그만하면 감당할 능력은 되고?”

내가 못 본 줄 알아. 어디 코앞에서 허튼 수작하고 다니는 거야.”

누군 좋아서 그러는 줄 알아?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아내는 씻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닫았다. 평소에 아내는 피부 상한다고 꼭 씻고 자는 사람이었다.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아내에게 갈 수가 없었다. 아내와 끝장을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치솟아 오르는 분노로 이를 악물었다. 이 사이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소파에 누워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폐가의 창문에는 어젯밤처럼 바람이 몰아쳤다. 진눈깨비가 잦아들었지만 낮은 구름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바람이 배롱나무 잔가지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마당가에 플라스틱 파편이 구르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렸다. 곰은 사람이 되기 위해 쑥과 마늘을 먹으며 동굴에서 살았다고 했다. 사람이 되려고 맵고 쓰고 어두운 고행을 참을 필요가 있었나 싶다. 먹고, 싸는 건 비슷하고 단지 생각의 차이가 있을 텐데 말이다. 그 생각이라는 것이 사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만큼의 수고도 감수해야 하니까 나로서는 그리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이 구름층을 밀어낸 사이로 여린 빛살이 창을 뚫고 들어왔다. 어미 고양이는 빗장을 풀고 기어이 외출을 감행했다. 연이어 새끼 고양이도 따라 나갔다. 빈방에 홀로 남으니 고요 속에 갇힌 것 같았다. 깊은 고독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하늘은 잿빛을 일부 걷어내고 연푸른빛을 군데군데 드러냈다. 어릴 적, 태양을 향해 눈을 감고 있으면 오렌지 빛이 닫힌 눈꺼풀 안을 가득 메우던 때가 떠올랐다. 사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끊임없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을 시도했던, 어쩌면 어린 연구가였을지도 모르던 그때가. 보자기를 펼쳐놓은 듯 마름모꼴 모양의 햇살이 비쳐들었다. 벌어진 창틈으로 바람이 쉬쉬 소리를 냈다. 불꽃이 푸르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나는 햇살이 퍼지는 장판 한쪽을 차지하고 앉아 하늘을 바라봤다. 부업하느라 바쁜 아내는 하늘을 볼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고무줄을 질끈 동여맨 아내의 머리카락 일부가 얼굴 쪽으로 헝클어져 내려와 있었다. 눈 밑으로 거무스레하게 그늘이 번져 있었다. 일이 급할 때는 잠을 제때 자지 못하고 물량을 맞춰야 하므로 아내는 다크서클이 끼어있을 때가 많았다. 약간 벌어진 아내의 입술 사이로 이가 하얗게 보였다. 아내는 부업이 긴급하다고 해도 자신을 가꾸는 일에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나는 아내의 발그레한 입술이 꿈틀대는 것을 보았다. 대학을 졸업한 아내는 단순한 부업을 하면서도 여전히 생기가 있었다.

아내와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숨 쉴 틈 없이 짜인 시간 속에서 긴장하며 살았다. 아내의 잔소리에 나는 해야 할 말을 감추며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무표정했는지도 모른다. 빨리 돈 벌어서 넓은 집에 가서 살아요, 아내는 잊을 만하면 그 말을 했고, 나는 그에 발맞춰 살려고 애를 썼다. 물질이 풍성한 세상에 가진 만큼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아내에게 나는 늘 성에 안 차는 가장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회사에서 김 씨의 이중 처신쯤은 별 것 아닌 양 버텨야 했고, 비굴함을 느끼면서도 상사에게 때때로 억지웃음을 흘려야 했다. 회사 생활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학원을 운영할 때보다 부담감은 덜했지만. 프랜차이즈 학원에 밀려 문을 닫을 때까지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낸 나로서는 많지 않지만 꼬박꼬박 일정 금액의 봉급을 받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시간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절반 정도의 인원 감축설이 돌자 같은 파트에서 내 밑에서 일을 하던 김 씨가 윗사람들에게 알랑방귀를 뀐 보상으로 나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돈을 썼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폐가엔 아무것도 없었다. 약육강식도, 사람들의 가면도, 김 씨의 이중처신도, 모자 쓴 사내의 위협도, 빵빵거리는 차 소리도, 딱딱거리는 패킹 소리도, 직장을 구해야 한다는 강박감도 없었다.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더없이 평화롭고 안온한 공간이었다.


고양이 우는 소리가 아기 울음처럼 들려왔다. 소리는 커졌다가 작아졌다가를 반복하며 절규하듯 이어졌다. 어미 고양이는 발정이 난 것 같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떠올린 건 내가 아내 생각에 골몰해 있었던 탓이었다. 아내는 지금도 패킹을 끼우고 있을 것이다. 나는 불현듯 아랫도리가 뻐근해져 왔다. 불쑥 솟아오른 성기는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모자를 쓴 사내에 대한 질투심이 불길같이 치솟았다. 아내의 패킹 끼우는 소리와 교성 소리가 뒤엉켜 들리는 것 같았다. 아내는 젊을 때의 모습으로 내 곁에 누워 있다. 긴 생머리에서는 풋풋한 과일향이 난다. 나는 아내를 부둥켜안는다. 고양이 울음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여섯 개의 면으로 둘러싸인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오롯이 나만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느끼는 익숙한 감정, 하지만 고립된 느낌이 서로 뒤섞였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삐져나와 창으로 비쳐들었다. 명주실 가닥처럼 줄줄이 빛이 갈라져 내렸다. 회색빛 지붕들에 햇빛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축축한 마당에도 햇살이 드리웠다. 마당 표면은 바람이 불어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었다. 저 길을 건너면 아내가 있는 집이 있다. 환청처럼 아내가 내는 딱딱 소리가 들려왔다.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에게서 온 전화였다.

여보, 현지 등록금 어찌 됐어? 아직 입금이 안 됐던데.”

아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은 어투였다. 아내의 말이 혼란스러워 머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고양이의 털이 빛줄기를 타고 떠돌았다. 수십 가닥의 털이 햇빛 속을 부유하며 나를 포위했다. 나는 팔을 휘저었다. 숨이 막혀 왔다. 창문이 흔들렸다. 비틀린 문 사이를 비집고 불청객이 들어와 한 바퀴 돌았다. 웅웅. 나는 찬바람의 습격에 몸을 떨었다.

폰에서 알림 소리가 났다. 이번 달 보험금이 미납되었다는 내용의 문자였다. 정해진 날짜가 되자 독촉이 한꺼번에 날아왔다. 오래전부터 넣어 오던 생명보험을 떠올렸다. 쌓아둔 옷가지와 흩어진 신문지 뭉치를 방 가운데로 모았다. 내게 남은 최후의 방법은 이것뿐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가 받는 순간 나는 전화를 끊었다. 나와 통화가 되지 않으면 아내는 나를 찾을 것이다. 전화벨이 울렸다. 라이터에 불을 댕기려다 멈칫했다. 화면에는 아내의 이름이 떠 있었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창틈으로 휘이이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방 한가운데 물건을 쌓아둔 앞에 섰다. 라이터 부싯돌 휠에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순간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창밖을 보니 낯선 고양이가 한 마리 더 끼어 세 마리로 늘어 있었다. 집 나간 어미 고양이가 수컷 고양이를 데리고 새끼와 함께 돌아온 것이다. 두 마리의 고양이는 밀착되어 있었고, 새끼 고양이는 그 주변을 맴돌며 뛰었다. 세 마리 고양이의 보드라운 털 위로 햇살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아내는 어떤 일이건 내가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좋아서 그러지 않았다는 아내의 말을 믿고 싶었다. 아내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막노동이라도 하면서 일자리를 찾아야겠다. 손에 힘을 빼고 라이터를 떨어트렸다. 구석에 둔 가방을 어깨에 메고 어두침침한 그곳을 빠져나왔다.

진눈깨비가 뿌옇던 골목길에는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을 향해 걸었다.



<당선소감>

 

 한걸음 한걸음, 문장을 찍는 작가

 

따듯한 마음으로 글을 쓰겠습니다.


그해 겨울, 몹시 추운 날, 무리하게 일을 해서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살갗은 짓무르고, 몸 구석구석이 어긋나고 있었습니다. 면역 기능이 마비될 정도로 나빠졌습니다. 큰 병을 앓으시던 아버지가 링거병을 품고, 그것이 딸을 일으켜 세울 거라는 소망을 담아, 차가운 길을 걸어서 병원으로 오셨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딸을 두고, 응급실에 실려 간 아버지는 며칠 후에 운명하셨습니다. 당신의 바람대로 저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연처럼 아버지의 기일에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오래 함께하길 꿈꾸어도 짧게 그치는 인연을 생각하면, 글에서 무엇을 찾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중심을 알아야 하는데 자꾸 변두리를 건드렸나 봅니다. 아직 덜 여물어서 마음 다잡으며 글을 씁니다. 이 잠시의 기쁨이 기나긴 인내를 요구하겠지요?


따뜻한 격려와 조언으로 소설에 대한 열정을 지니게 해주신 권지예 선생님, 작가 정신을 일깨워 어제보다 나은 글을 쓰게끔 이끌어주신 장창호 선생님, 동리목월 문창대학의 엄창석 선생님, 이우상 선생님, 소설에 첫발을 딛게 하신 조돈만 선생님, 함께 공부한 문우, 고맙습니다. 독서회에서 책을 마음껏 볼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울주도서관 관계자님의 덕분입니다. 믿고 응원해준 우리 가족, 여든 나이에도 밭일을 하시는 어머니, 하늘나라에 사시는 아버지와 기쁨을 함께하겠습니다.


제가 가는 길에 힘을 실어주신 경남신문사와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문장을 찍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1968년 울산 울주군 출생

1992년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단편의 미학·신인의 신선함 가득


선자(選者)들에게 넘겨진 60여 편의 소설은 다양했다. 가족 플롯을 근간으로 하면서 고단한 현실을 서술하는 소설이 주류였지만 간혹 새롭고 신선한 내용과 형식을 지닌 작품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삼는 작품이 눈에 띄게 부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구직과 실직의 모티프는 읽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지구화 시대에 어울리게 이주와 여행의 서사가 더러 보였고 판타지나 해양소설과 같은 유형을 선택한 이들도 없지 않았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모습을 지닌 작품들을 두고 우리는 단편소설이 지녀야 할 미학과 신인이 품어야 할 신선함을 잣대로 작품을 읽었다.


그리하여 걸러진 엄마를 읽는 밤’, ‘고양이가 사는 집’, ‘퍼즐’, ‘다투등 네 편을 두고 논의를 거듭했다. ‘다투는 제재의 신선함과 주제의 무거움을 겸비한 작품이지만 서사의 안정감이 다소 부족했다. 이러한 점은 퍼즐에서도 흡사하게 나타났다. ‘엄마를 읽는 밤’, ‘고양이가 사는 집은 질병의 고통과 실직의 가난이 매개된 가족서사이다. 여타 소설에서도 자주 반복되는 내용이어서 주제의 참신함이 떨어졌다.


새로움과 미학이라는 관점에서 최종 남겨진 작품은 다투고양이가 사는 집이다. 선자들은 이 두 작품을 두고 오랫동안 판단을 유보했다. 전자가 지닌 신선함과 후자가 지닌 완결성이 일방의 선택을 망설이게 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고양이가 사는 폐가와 자신의 집을 병치해 서술 능력을 증명한 고양이가 사는 집을 당선작으로 선정하게 됐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낙선자들에게도 격려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 구모룡·조명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