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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유령의 2층 침대 / 도제희(도은숙)



세라믹으로 된 그릇이 되고 싶었다. 내가 먼지 같아서였다. 패턴도 없이 무리 지어 흩날리다 여기저기 떠도는 기분이었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저 지층 깊은 곳까지 성공적으로 진입해 흙이라 불리는 존재가 되고, 그러다 그릇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불에 구워져 더는 화학작용을 할 수 없고 그래서 더는 작은 들풀 하나 피울 수 없게 된다 해도 좋았다. 차라리 그릇이 되고 싶을 만큼,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32년을 살아온 기분이었기에, 누군가에게 견고하게 밀착돼 도저히 거기에서 떼어낼 수 없는 상태에 있고 싶었다. 말하자면, 연애라는 걸 해보고 싶었다는 뜻이다.


그러다 J를 만났다. 넉 달 전 J가 집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붙잡아 기습적으로 키스했을 때 깜짝 놀란 것도 잠시, 아 이게 키스라는 거구나 했다. 그의 입술과 몸에서 나는 체취에 숨이 찼다. 황홀했다. 너무 절박해 보이지 않아야 했겠지만 그가 몰랐을까. 나의 서툴고도 집요한 입술의 움직임을. 초연하기엔, 이것은 정말 드디어, 드디어였다. 기뻤다. 내가 남들처럼 한 남자와 몸과 얼굴을 비볐다는 사실이. 평범해진 기분이었고, 평범함이 주는 기쁨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견할 수가 없었다. 비로소 지표에 정착해 흙이 되고 마침내 견고한 자기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유령이 있었다. 그와 아쉬운 작별의 포옹을 나누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녀를 떠올리고 만 것이다. 나의 룸메이트 휘. 어째서일까. 굳이 휘를 떠올린 건. 나의 평범한 행복이, 비록 자발적이되 내 원룸에서 갇혀 살다시피 하는 휘에게 차마 끝까지 고개를 들 수는 없었던 걸까. 내 서른한 살 생일 선물로 7평 원룸에 2층 침대를 들여온 사람, 집주인이 1층을 쓰는 게 당연하다며 자신은 2층으로 올라가 순식간에 잠들었던 휘, 집주인인 나보다 내 공간에서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 나는 나의 연애가 휘에게 상당히 푸대접받으리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직감이랄 것도 없었다. 최근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나무꾼이 숨겨둔 날개옷을 찾아 하늘로 가버린 선녀처럼, 내가 웬 남자를 만나 원룸 생활을 청산하고 결혼해 그녀를 버리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시작한 이 연애에 대해 침묵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휘를 내보내기로. 그러나 아주 평화스러워야 했기에, 그러니까 휘가 우리의 동거가 끝나는 상황을 슬퍼만은 하지 않아야 나도 마음이 편할 것이기에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다.


아니 그래서 잠들었다고?”


. 너무 졸리더라고. 눈 뜨니까 갔던데?”


잘 좀 해보지. K 씨 진짜 괜찮은 남잔데. 내가 이번에는 졸려도 절대 잠들지 말라고, 걔 진짜 아까운 애라고 했잖아.”


어디가 괜찮은데?”


능력 있고, 훤칠하고, 키도 크고, 배려심 있고, 책임감 있고.”


그래? 근데 난지루했어.”


하지만 계획이란 건 원래 이렇게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닌 모양인지, 휘에게 남자 친구를 만들어주기란 정말 쉽지가 않았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갑자기 잠들어버리는 여자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신경질이 났다.


, 과자 부스러기 떨어지잖아. 조심해야지.”


응 미안.”


휘는 2층에서 잽싸게 내려와 바닥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입에 부셔 넣고는 다시 올라갔다. 내가 한마디만 해도 착한 막냇동생처럼 말 잘 듣는 그녀인데 이상하게 소개팅 주선만큼은 잘 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휘는 왜 남자를 진지하게 만날 생각이 없을까? 그러기에 휘는, 예뻤다. 그냥 적당히 예쁜 게 아니라 아주 예뻤다. 서른두 살에 눈 밑에 주름 하나, 기미 하나 없이 뽀얀 피부, 도톰한 데다 붉은 입술, 적당히 솟아 웃을 때마다 보기 좋게 도드라지는 광대, 높지도 낮지도 않은 귀여운 코, 강아지처럼 살짝 처져 웃으면 반달이 되는 눈, 아무리 먹어도 납작한 아랫배와 가느다란 팔다리. 그녀의 이름이 빛난다는 뜻이라고 했던가. 그보다 더 적당한 이름은 없었다. 한국 남자 십중팔구가 작당이라도 한 듯 이상형으로 꼽는 그런 외모를 아무런 노력도 없이 달고 태어난 것이다.


그에 반해 나는, 남자를 꽤나 만나고 싶었다. 마지막에 지독하게 배신당하고 차이더라도 평범하게 만나고 만지고 섹스하고 밥 먹고 하는 일들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외모가, 대체로 남자들에게 호소되지 않는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은 건 스물여덟 살, 4년간 죽자고 쫓아다녔던 대학 선배를 통해서였다. 그는 내가 인간적으로는 좋지만 자신의 성적 취향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성적 취향. 나는 그때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면서도 격한 비참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에게라면 어떤 모멸이라도 견딜 수 있었다. 그는 사람을 모멸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물었다. 내가 남자들에게 어필이 안 되는 외모인가요? 그는 침묵했다. 침묵의 시간 동안 나는 굉장히 어둡고 험한 지하, 바닥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를 그런 지하로 떨어지고 있었는데 내 톡 솟은 광대와 각진 턱, 넓은 어깨와 튼튼한 종아리가 험한 측면 지형에 부딪혀 크게 상처 입고 있었다. 역시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대단히 솔직했다. 차밍스쿨에 다녀 보면 어때? 정말 그렇게 말했다. 니가 여동생 같아서 그래(이건 거짓말이었겠지만). 자신감을 가져. 사람의 기본적인 매력은 자신감이야. 이런 훌륭한 말들을 했다.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다거나, 어설픈 위로를 하지 않았다. 그날 나는 내 외모를, 몸을 직시했고, 그러자 그간의 내 인생과 앞으로의 삶을 꿰뚫어 보게 되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예뻐지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는 아르바이트비를 고스란히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에 쏟지 않아도 되는 직장인이 되었으니 수입의 절반을 미용에 투자했다. 지속적인 안면 경락을 받아 얼굴선을 부드럽게 하고 얼굴이 최대한 응집돼 보이게 그러니까 작아 보이게 해서 광대에 함몰된 콧대도 최대한 살렸다. 피부 관리는 이 원룸의 월세만큼 지불하면서 꾸준히 받았고, 요가는 학원에서 집에서 수시로 했다. 걷는 자세나 체형이 잡혀가면서 내가 생각해도 나는 전보다는 훨씬 괜찮아진 것 같았다. 어느 순간엔 제법 예뻐 보이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J를 만났다.


당장 2층에 올라가 요란하게 과자를 씹어대는 휘의 엉덩이를 때려주고 싶었다. 내가 시간과 돈과 정신적 에너지를 들여 얻을 수 있는 것들을 휘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사람의 심리란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어서 휘가 상대들에게 무심할수록 그들은 더욱 열광했다. 심지어 그 열광의 대열엔 내 짝사랑 선배도 있었다. 휘는 내가 더 이상 선배와 연락을 하지 않자 고백하듯 말했다. 그 선배가 자기에게 지근댔다고. 나는 선배에게도 느끼지 못했던 모멸을 휘에게서 느껴야 했다.


왜 남자를 안 만나려고 해?”


휘는 배를 깔고 눕는 자세로 바꾸어 과자를 씹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나 같은 30대 백수가 남자 만나서 뭐해?”


야 니가 왜 일을 안 해? 하잖아.”


야 그거, 휴대폰 요금 내고 우리 집 관리비 내면 끝이야.”


휘는 한 웹 매체에 로맨스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다운그레이드해서 아침 드라마처럼 쓰면 그럭저럭 먹고산다고 했다. 그런데 고작 그 정도 벌이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관리비라도 내가 내서 휘에게 경제적 여유를 주면 좀 달라질까. 나는 한숨이 나는데, 휘가 천진난만한 얼굴을 2층 난간에 기댄 채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벗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미영아, 진짜 너 몸이 예뻐졌네. 완전 여자 같애.”


나는 심장이 쿵 하는 소리를 듣고는 마저 벗고 있던 슬립을 휘 얼굴에 집어 던졌다. 이내 슬립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배시시 웃는 휘의 얼굴이 보였다.


너무 예뻐지지 마. 니가 나 버리면 나 어디 가.”


또 그 소리. 그럼 우리가 평생 같이 살아?”


에이, 평생 어떻게 그래.”


휘는 바보가 아니었다. 언제 다리를 뻗고, 언제 접어 넣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뒷걸음질 친 사람이 계면쩍어질 만큼 정확하게 언제나 그랬다. 역시 신경질이 났다.


*


J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정말 그의 말이 맞는다면 휘는 천하의 사기꾼 아닌가.


정말 휘가 자는 척하는 거라고 생각해?”


니 얘길 들어보면 그래.”


하지만 그럴 리가. 휘가 부지불식간에 잠들 때에는 정말 숨소리도 규칙적으로 균일하게 났다. 흔들어도 꿈쩍도 안 했다. 자는 척하는 거라면 그야말로 명연이었다.


아니면 자기최면인 거지.”


자기최면이라니?”


J가 오른 주먹을 움켜쥐고 연기하듯 말했다.


바로 지금이야! 잠들자!”


하하하. 웃음이 났다. 하지만 웃다 보니 휘를 모독하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나는 그의 주먹 쥔 손을 거칠게 내리고 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역시 그의 체취가 아주 좋았다. 모텔에 들어섰을 때 날 불쾌하게 하던 특유의 세제 냄새도 금세 그의 체취에 점령당했다.


휘 씨는 주로 언제 잠이 드는데? 거기에서 패턴을 찾아야 해.”


패턴? 규칙?”


그렇지.”


자기 추리소설 좋아해?”


아니. 그냥 이건 아주 특이하잖아. 최근에 언제 잠들었는지 생각해 봐. 너랑 무슨 얘길 할 때였어?”


뭐였더라. 그래, 명절 얘기를 할 때였다. 내가 부모님, 조카들 용돈 주느라 허리 휜 얘기였다. J는 내 말을 듣더니 오른손 검지로 자기 코끝을 가볍게 두드렸다. 생각에 잠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왜 J가 굳이 휘 일로 골몰한단 말인가.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만 생각해.”


! 자기는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 그런 현실에서 도피한 거네. 서른이 넘은 백수는 명절이 제일 괴롭지 않겠어? 용돈, 결혼 그런 거 생각하기 싫은 거지.”


나는 상반신을 들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현실 도피라고? 물론 휘는 갑자기 발작적으로 잠드는 기면증에 걸린 게 아니었다. 우린 대학 2학년 때 리버 피닉스하고 키아누 리브스가 주인공으로 나온 아이다호를 같이 본 적이 있었는데 영화 속 리버 피닉스처럼 길 위에서든 어디서든 갑자기 발작하고 잠드는 증상이 휘에게는 없었다. 그냥 아주 평범한 상황에서, 주로 실내에서 아무 발작도 없이 시나브로 잠들었다. 휘 말로는 초등학교 5학년 사춘기 때부터였다고 했다. 가슴이 봉긋해지고 허리가 잘록해지고 아무나 쉽게 볼 수 없는 곳에 검은 체모가 돋아나는 그때부터였다고, 그렇게 2차 성징에 몸이 적응하느라 자꾸 자려던 것이 습관이 되지 않았겠냐고. 병원에서는 심리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유했지만 휘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사람과 얘기하다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가 잠드는 것이기 때문에 기면증 환자처럼 위험하지 않다는 게 휘의 생각이었다. 더욱이 본인은 갑자기 잠들었다가 깨는 그 느낌이 싫지 않다고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그 느낌이 좋다고. 그렇다면 J의 말대로 정말 그것은 회피일 수도 있었다. 추석에도 휘는 본가에 가지 않고 내 원룸에 있었다. 자식 노릇, 고모나 이모 노릇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자각시키는 상황에서 회피한다라꽤 근거 있게 들렸다.


내가 한번 휘 씨랑 만나볼까? 3자가 냉정하게 관찰해보는 거지.”


안 돼!”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르듯 말했다. 깜짝 놀란 J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뭐 휘가 실험 대상이야?”


왜 이렇게 말이 더듬거려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니가 너무 휘 씨 걱정을 하고, 니 베스트프렌드니까 나도 만나보면 좋은 거잖아.”


우리 원룸은 되게 좁아. 오죽하면 2층 침대를 쓰겠어.”


뭐 어때? 요즘 원룸들이 닭장 같고 다 그렇지. 같이 앉아서 맥주나 한잔하다 나오면 돼. 내가 가서 너랑 뭘 할 수 있겠어?”


그가 내 엉덩이를 툭툭 치고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계속 기분이 나빠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뭐야, 벌써 나가?”


그가 침대에 걸터앉아 브래지어 훅을 채우려는 내 손을 저지하고는 브래지어를 던져 버렸다. 오늘 J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입지 않았을, 레이스와 리본이 과하게 달린 연분홍 브래지어가 반투명 유리로 된 화장실 문 앞에 툭 떨어졌다. J는 곧 나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순식간에 그가 내 이마와 코와 입술과 목에 키스하고 내 가슴을 부드럽게 애무했다. 그의 혀가 내 배 위에서 춤추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곳까지 침범하고 있었다. 나는, 속수무책이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의 체취를 내 원룸에 배게 하고 싶지 않다. 휘가 있는 곳에 배게 하고 싶지 않다. 이 향기는 나만이 갖고 싶다. J는 오로지 내 거여야 했다.


*


K가 기안서를 들고 내 자리로 왔다. 문제가 없는지 한번 봐달라는 거였다. 나는 어떻게 소개팅 자리에서 갑자기 잠이나 자는 여자를 소개해 주었느냐는 핀잔을 들을까 걱정했으나 K는 며칠째 그런 말은 일언반구도 없었고, 지금은 정말 순수하게 내게 자기 업무를 살펴봐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K의 이 성실함과 겸손함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선배 대할 줄도 알았다. 최근 사내 세무 근거 자료가 유실되는 사태가 계속 발생하자 구매 발주서 시스템을 정립해야 한다는 오더가 내려왔는데 그것이 K의 업무였다. 이제 입사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은 K는 자신이 사용한 기안서의 문장이나 용어 등이 우리 회사에서 통용되는 것이 맞는지 걱정했다. 그럴 만도 했다. 우리 회사 회장은 60대 여성이었는데 유독 명문대 출신의 젊은 남자 직원을 지방이나 해외로 데리고 다니길 즐겼다. 딸만 둘 낳아 시댁에서 구박받던 콤플렉스라고 직원들은 수군거렸다. 명문대 출신인 K는 인물도 훤했고, 영어도 유창했고, 상식도 풍부해 유난히 회장 마음에 쏙 드는 듯했다. 그렇게 만 4개월 회장의 액세서리 생활을 하다가 얼마 전에야 실무 선으로 풀려난 K는 신입사원으로서는 벅찬 오더 프로세스 개선책에 투입됐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모두 회장의 지시였다.


여기 베트남 공장 옆에 청도 공장도 써요. 베트남보다 중국이 더 규모가 커요.”


직원들은 수군거리며 K를 경계했다. 특히 대리급 이상의 남자 직원들은 정도가 심했다. 그러나 나는 K가 괜찮았다. 회장 바로 뒤에 서서 어디론가 바쁘게 다닐 때 그의 표정을 보면 회장과의 동행을 전혀 즐기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저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 고맙습니다. 다른 덴 어디 문제 없나요?”


나는 관련 자료 미제출 시 당할 불이익을 좀 더 강경하게 표현하라고 조언해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안서를 한참이고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가 자기 자리에 갈 생각을 하지 않고 미적거렸다. 무언가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역시 휘 얘기를 안 할 수 없었다.


내 친구가 많이 미안해하고 있어요. 저도 모르게 잠들어버렸다고. 내가 미안해요.”


아니. 저는 사실 다시 만나보고 싶어요. 그날 깰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어요.”


K는 손에 든 기안서에 의미 없는 시선을 둔 채 말했다. , 결국 그랬구나. K도 휘에게 반하고 만 것이다. 초면에 그렇게 무례하게 잠든다 해도 다시 보고 싶은 얼굴인 것이다. 마음 한 곳에서 철썩하며 질투심이 일었으나 그보다는 기뻤다. 이건 계획대로 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우리 캔 커피 마실래요?”


그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소년의, 미소였다. 소녀의 미소를 품고 사는 휘와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나를 바짝 따라왔다. 동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허리와 목이 더욱 꼿꼿해지면서 내 자리와 출입문이 더 멀지 않은 게 어쩐지 아쉬웠다.


*


휘는 무릎이 툭 튀어나온 진회색 추리닝을 입은 채 현관 앞에 서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반달눈에 힘이 한껏 들어가 있었다. 이건, 계획에서 벗어나 있기는 했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인 휘에게 무턱대고 K를 데려올 참은 정말 아니었다. 그저 어쩌다 보니, 였다. 어쩌다 보니 K와 저녁을 먹었고, 어쩌다 보니 2차까지 고를 외치다, 어쩌다 보니 K가 우리 원룸 앞에까지 와 이렇게 우리 방에 초대하게 된 것이다. K는 경직된 휘의 얼굴을 보더니 돌아가려 했다. 나는 K를 붙잡아 휘가 좋아하는 육포를 좀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다녀오는 사이 휘를 설득하기로 했다.


어쩌다 보니?”


, 술에 좀 취해서 그랬어.”


너 잘 안 취하잖아.”


물론 나는 웬만해서는 취하지 않는다. 그저 기분이 좋았다. 초밥과 정종은 아주 맛있었고, K의 태도는 아주 신사적이었다.


“K가 널 꼭 다시 만나고 싶다고 나한테 아주 잘하더라고요.”


너한테 잘해서 데려왔다고?”


아니, 너랑 잘해보려는 게 기특했다고.”


난 싫다고 했잖아.”


나는 아직 구두도 벗지 못한 채 좁은 신발장 앞에 서 있었다. 하루 종일 앉아 있거나 서 있었던 탓에 발은 퉁퉁 부어 있었다. 신발장 문에 장착된 거울에 타이트한 투피스 정장을 입고 볼이 좁은 8센티 힐에 발을 욱여넣고서 휘에게 변명하고 있는 내가 비쳤다. 내 발가락은 힐 속에서 절규하고 있었고, 휘의 발가락은 화로 꿈틀대고 있었다. 우리의 발은 서로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럼, 그냥 내 친구라고 생각해. 집에서 가볍게 술 한잔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나는 맥주병이 든 편의점 비닐봉투를 바닥에 내려놓고 힐을 던져버리듯 벗은 뒤 다과상을 펼쳤다. K가 오기 전에 편한 바지로 갈아입고, 셋이서 가볍게 맥주를 한잔하는 거다. 그리고 K는 가고, 우리는 자고, 나는 내일 K에게 안됐지만 내 친구는 너에게 완전히 관심 없다고 통보해주는 거다.


, 폭력적이야.”


? 폭력적? 나는 그 말에 화들짝 놀라 옷을 갈아입다 멈췄다. 폭력적이라니. 그제야 강한 깨달음이 머릿속을 한 바퀴 휙 젓고 지나갔다. 어느 날 일언반구도 없이 배낭을 짊어진 휘가 2층 침대를 대동하고 나타났을 때의 당황스러움, 그것이야말로 내게는 어마어마한 폭력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휘가 10분 만에 대충 써낸 시가 백일장에서 상을 타고, 내가 심혈을 기울이고 기울여 쓴 시가 가작에도 못 올랐을 때 나는 이 세상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느꼈고, 그저 휘와 같이 길을 걷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낯모를 사람들에게 비교 어린 시선을 받을 때마다 거대한 폭력을 느꼈다. 가장 큰 폭력이 드러나는 때는 내 생각을 열과 성을 다해 휘에게 전달하고 있는데 휘가 그냥 잠들어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럴 때마다 수천 킬로미터나 되는 만리장성을 한낱 사람에게 쌓게 한 진시황의 폭력이 어떤 것인지를 느꼈다. 휘는 습관적으로 그래서?” “그래서?”라고 명령했고 나는 참으로 열성적으로 복종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노라면 그녀는 어느 순간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K를 데려왔다는 이유만으로 휘에게 폭력적인 인간이 된 것이다. 나는 무언가 대단히 잘못돼 있다고 느꼈다.


더 놀라운 건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휘는 마치 그런 말을 언제 내뱉은 적이 있느냐는 듯 화장대로 가 맨 위 칸 서랍에서 갈아입을 옷을 뒤지기 시작했다. 휘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내가 할애해준 수납 칸이었다. 나는 거기에 들었던 내 속옷을 이동식 미니 서랍을 사서 수납했다. 고마움을 모르는 나쁜 년 같으니. 진시황보다 나쁜 년 같으니. 욕지기가 치밀었다. 휘는 나를 등진 채 검은색 롱 원피스로 갈아입고 노란색 카디건을 걸친 뒤 얼굴에 파우더를 바르기 시작했다. 금세 눈썹을 그리고 입술에 립글로스를 발랐다. 내 눈을 의심했다. 휘는 지루하게 느끼는 상대를 위해 저렇게 꽃단장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휘가 계속 무릎 튀어나온 추리닝을 입고, 부스스하게 올려 묶은 머리 그대로, 노메이크업 상태 그대로 이 상에 둘러앉아서 맥주나 홀짝거리다가 갑작스레 잠들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래도 좋았다. 꼭 누군가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어쩐지 흥겨운 날이었다. 인터폰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접니다 하는 K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시 망설인 끝에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입고 있던 바지의 훅을 서둘러 채웠다.


*


허허허. 하하하. 흐흐흐.


7평 원룸 안에서 휘의 느릿느릿한 중저음의 목소리와 K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휘가 무슨 말만 하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K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그 웃음소리 끝에는 그래서요? 가 옵션처럼 따라붙었다. 절대, 교주의 말씀이 끊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자세를 지닌 열혈 신도 같았다. 헛웃음이 났다. 내가 K를 오래 알았던 것도, 휘를 뼛속까지 아는 것도 아니지만 저렇게 많은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휘였고, 저렇게 호쾌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 K였다니. 사람이란 상황에 따라 얼마나 다양한 면을 꺼내 드는 걸까. 그 여러 면이 모여 그 사람을 이룰 텐데, 각각의 모든 면은 한 사람 안에서 무사히 조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걸까.


미영이도 당황스러웠겠죠. 우리 집에 아무도 없다고 해서 자러 온 건데 엄마, 아빠, 형부, 조카들까지 모여 야식을 먹고 있으니 짜증이 났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때 집에 아무도 없는 거하고 똑같았고, 미영이가 있어야, 그러니까 우리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어야 나는 안전하게 느껴졌거든요.”


하지만 대화가 진행될수록 휘의 이야기는 미궁에 빠져들었다. 우리의 고등학교 시절을 말하는 건 좋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본인이 내게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하면서 나를 자기 집에 얼마나 많이 데려갔는지 기억이나 할까. 나는 번번이 믿었다. 집에 아무도 없다고, 혼자 자기 무섭다고 말끝을 흐리는 휘의 말을.


그러니까 미영 선배가 휘 씨한테 엄청나게 중요한 존재네요.”


, 미영이는 저한테 아주, 중요한 친구죠. 성실하게 사는 모습이, 속과 겉을 다르게 할 수 없음이,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계속 변화시키려는 그 뜨거운 것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이건 마치 열심히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거든요. 누구나 미영이의 그런 점들을 존경해줘야 해요.”


, 멋진 우정인데요.”


맥주잔을 두 손으로 움켜잡은 채 고개를 살짝 돌려 휘가 나를 보았다. 도톰한 입술 끝에서 냉소가 스쳤다. K를 데려온 것이 이렇게도 중죄였을까. K는 성실하고 예의 바르게 굴고 있었다. 물론 매끄러운 대화를 이끌어가려는 K의 노력이 나도 조금은 지루했고 성가시기는 했다. 대충 맥주 한잔하고 가는 센스를 발휘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회장 옆에서 사원으로서 제대로 일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견뎠듯이 휘 옆에서 휘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를 기다리고 견디는 걸까.


근데, . 넌 왜 그때 집에 아무도 없는 거하고 똑같았다는 거야? 내가 한두 번 간 것도 아닌데 거의 너네 가족이 있었어.”


나는 휘가 대답은 안 해도 좋으니 잠들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휘는 나와 K를 번갈아 가며 무표정하게 바라보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 그게아빠가 날 너무 좋아했거든. 아빤데, 이상할 정도로 날 좋아했어.”


삽시간이었다, 7평짜리 침묵이 찾아든 건. 우리의 원룸은 고요한 사각형이 되었다. 균일한 소리를 내며 구르던 시간도 갑자기 멈춰서 우리 원룸 안에 갇혀버렸다. 오로지 휘만이 이 공간을 지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작년에 아빠가 돌아왔고, 이제는 그때처럼 널 데려갈 수 없으니까, 그냥 내가 왔던 거야.”


휘는 1층에서 2층으로 연결되는 침대 다리를 검지로 툭툭 치며 빙긋 웃었다. K의 얼굴이 더없이 어두워졌다. 휘에게 물어야 했다. 대체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지? 왜 하필 지금 말하는 거지? 우리의 대화가 왜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지? 나한테 벌을 내리고 싶은 거야? 화가 났다. 너무 가혹하니까. K에 대한 대가치고 이것은 지나치게 가혹하니까.


K가 난데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곤 싱크대로 가 물을 틀어 손을 닦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세수식이 1, 2분 이어졌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K가 두 손을 바지에 쓱쓱 문지르며 작은 목소리로 이만 가보겠다고 말했다. 휘가 짧게 웃었다.


하하하.


그 소리가 몹시도 우렁차 K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 보아야 했다. K가 서둘러 자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인터폰이 울린 건 그때였다. K의 바로 뒤에 있는 인터폰은 조급한 소리를 내며 연이어 울렸다. K는 나를 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얼굴이었다. 번지를 잘못 안 야식 배달원인가. 나는 턱으로 인터폰을 가리켰다. K가 망설인 끝에 수화기를 들었다. 누구세요, 라고 말하는 K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격적인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영이네 집 아닙니까?”


, 네 맞습니다.”


당신 누구야?”


아 저는.”


맙소사. J였다. 그까지 왔단 말인가. 아무 연락도 없이? 그래, 내가 휴대폰을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와 연락이 닿지 않아 그가 온 것이다. 나는 K에게 남자 친구라고 해명하며 휘를 보았다. 우리에게 시선도 두지 않은 채 저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K가 열림 버튼을 누르고 한숨을 쉬었다. 나는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이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마자 나는 바로 J의 양팔을 잡았다.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아주 빠르게 말했다. 휘와 직장 후배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전화하는 걸 잊었다, 너는 진정해야 한다! 그제야 J가 좁히고 있던 미간을 풀었다.


, 그분이시구나. 들어오세요.”


휘가 어느샌가 내 뒤로 와 J에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분이시구나? 역시, 알고 있었던 걸까. J가 운동화를 벗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 풍경을 슥 훑고 K를 노려보듯이 하더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K가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시간이, 삐거덕 소리를 내더니 다시 천천히 구르기 시작했다.


*


방 안이 꽉 찼다. KJ는 둘 다 170 중반대의 보통 체격이고, 휘는 야리야리했으며, 나야 최근에 55반 사이즈 보통 체격이 되었지만 아무래도 성인 남녀 네 명이 편하게 둘러앉아 있기에, 2층 침대까지 있는 7평 원룸은 벅찼다. 휘와 J가 침대에 기대앉았고, K와 내가 맞은편에 앉았다. 숨이 막혔다. 갑자기 들이닥쳐 험한 분위기를 만들었던 자기 행동을 만회하기 위해 호들갑을 떨며 맥주를 따르는 J 때문에 더 숨이 막혔다. 반갑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하며 휘의 잔에 맥주를 붓는 J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담겼다. 진심으로 휘를 반가워했다. 그는 K의 잔에도 맥주를 채웠다. 생각보다 K는 우유부단했다. 나라면, 그냥 갔을 것이다. 아무리 J가 손을 잡아끌었다 해도 이렇게 불편한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휘는 나와 K를 완전히 농락하고 비웃지 않았는가. 아무 사정도 모르는 J는 마지막으로 내 잔에도 맥주를 부으며 눈을 찡긋했다. , 내가 전화만 받았어도 J가 이 방에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휘가 눈치챘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K는 갔을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게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J가 건배를 하자는 자세로 잔을 들어 올리자 모두 어색하게 잔을 들었다. . 휘가 상반신을 휘청하며 잔을 부딪치는가 싶더니 한 번에 들이켰다. 이내 스스로 잔을 채우고 다시 들이켰다. 휘에게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휘가 또 맥주병을 집자 K가 채어 가 휘의 잔을 채워주었다. 휘가 풀린 눈으로 살풋 웃었다. K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K를 붙잡은 건 J의 손이 아니라 휘였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순간 왜 J의 눈동자까지, 미세할지언정 함께 흔들렸을까. 휘는 분명 만취 상태였으나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느릿느릿 잔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JK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두 분이 서로 좋은 감정으로 만나보기로 하신 건가요?” K가 손사래를 치더니 말했다.


물론저는, 그러고 싶죠.”


휘가 픽 웃었다. 그녀의 웃음이 음주 신호이기라도 한 듯 K도 술을 들이켰다. 단 한 번 봤을 뿐인 여자 때문에 저렇게까지 감정적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휘는 왜 이렇게 술을 마실까. 그녀의 표현에 따르자면, 내 폭력적인 행동 때문이겠지. 나는 휘의 아버지를 여러 번 보았다. 무뚝뚝했던 그녀의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친절했고 인자했다. 휘의 방에서 잔 다음 날 아침엔 꽃게탕이니 하는, 내 자취방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식사를 대접받고 그녀의 아버지 차를 타고서 등교했다. 그런데도 몰랐다. 갑자기 집을 나갔던 아버지가 돌아오셨다기에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니 나는 그녀에게 폭력적인 걸까. 휘가 원하기 전에 남자를 소개해주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느릿느릿,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휘가 물었다.


미영아, 그런데 너 왜 남자 친구 소개 안 해줬어?”


휘의 시선을 따라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나는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남자 친구를 꼭꼭 숨겨둘 이유란, 전혀 없어야 했다. 그러니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난 남자의 체취를 독점하고 싶었다고 말한다면 이해할까? 나의 연애를 너에게 말하는 순간 내가 굉장히 슬퍼질 일이 생길 것 같았다고 말한다면 이해할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너는, 원하지 않는데도 밀려들고, 나는 원하는데도 쓸려나가는 것들이니까. 항상 궁금했다. 왜 너는 원하지 않는지.


J가 아무 말도 못 하는 나를 거들고 나섰다.


미영이가 자기 혼자 연애한다고 유난 떨기 싫다고 했어요.”


. . .


휘는 무슨 마이크 테스트하는 사람처럼 아. . , 를 반복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런가요. 아 나는, 아주 솔직히 누가, 누구를 만나든, 누구를 만나서 연애를 하든 지인짜 상관이 없어요. 아무런 감흥이 없어요. 연애그런 거하면 영화도 보고 공원에도 놀러 가고, 그런 거잖아요? 그리고 연애는, 저도 알아요. 섹스가 핵심이죠. 그러니까나는 그런 거에 관심이 없어. 어느 쪽이냐 하면 싫은 쪽이죠. 그렇지만나는 그게 미영이 너라면 네가 그렇게 해서 행복하다면 나는 상관없고 오히려 더 좋아했을 거라고, 해야 하나? 왜냐하면 너는그럴 권리가 있어. 니가 원하는 걸 가질 권리가 있어.”


휘의 말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하면서 이어졌다.


그런데너는 그게 좋아 가지고나를, 나를짐스러워하고뭐 피해망상 같은그런 거그런 거일 수도 있지만물론내가, 내가, 이렇게 니, 방에서사는 게잘한다는 건, 아니고.”


휘가 모를 수 있다고, 휘를 속일 수 있다는 생각은 자기기만이었다. 나는 잠들기 전까지 J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전화가 오거나 걸고 싶으면 밖으로 나갔다. 휘는 타인의 행동과 말과 생각에 무심하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버렸다. 그러면 편했다. 그러나 몇 번이고 드는 생각이지만 휘는 바보가 아니었다. 더욱이 그녀는 갈 데가 정말 없었으니까, 알고 보니 그녀는 절박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가족이 아니었다. 친구가 친구를 얼마나 돌봐줄 수 있을까. 아니 내가 돌봐준 건 아니지만 얼마나 더 이렇게 작은 원룸 2층 침대 위아래에서 사이좋게 살 수 있을까. 분명 나의 연애를 감추었던 게 배신감을 안겨줬겠지만, 막무가내로 남자를 소개했던 게 불쾌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두려웠던 것인데 그것을 나는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 할까. 더욱이 오늘 무언가 설명해야 한다면 내가 아니라 휘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휘, 너는 왜 말하지 않았어? 왜 이제야 말하는 거지? 그것도 오늘?”


J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말인지 모를 터였다. K가 나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힐난의 눈길이었다. 휘는 연신 나를 보았다 고개를 떨어뜨렸다 하며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 왜 이제야, 그것도 오늘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냐고?”


미영아, 휘 씨한테 왜 그래?”


어느새 방 안에 J의 체취가 가득 퍼져 있었다. 나 혼자 갖고 싶었던 이 냄새, 휘와는 결코 공유하고 싶지 않았던 것, 그러나 결국 실패한 그것. 나는 일어나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문을 열었다. 4월 말의 봄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이 바람이 어서 방 안의 공기를 희석해주기를 바랐다. K가 창밖을 응시하며 세상 다 산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지쳐 보였다. 하기는, 벌써 새벽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K 씨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이제 그만 가보지 그래요?”


싫습니다.”


왜요?”


들어오라고 한 건 선배잖아요. 이제는 또 맘대로 나가라는 겁니까?”


K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J가 눈을 치켜떴다. , 이제 모두 화가 나 있었다. 나도, K, J, 휘도 모두 화가 나 있었다. 화난 사람끼리 함께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싸움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나 휘는 앞으로 고꾸라지기 직전이었다. 아마도, 드디어 잠들 터였다. 모두의 화와 자기의 화를 품고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 것이다. 유령처럼 이 상황에서 유유히 빠져나가 우리 머리 위에 떠다니며 이 상황을 관조할 터였다. 정말 J의 말대로 휘의 잠은 회피일까. 그렇다면 잠들게 두고 싶지 않았다. 나는 휘의 어깨를 툭툭 쳤다. 휘는 내 쪽을 보지도 않았다.


, 내가 묻잖아. 왜 이제야 말하는 거냐고? 대답해봐, 말해보라고.”


J가 내 손목을 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거 놔. 나 휘랑 할 말 있어.”


K가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만 좀 하세요!”


K의 외침과 동시에 휘가 툭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다과상 위에 있던 과자, 육포, 맥주잔이 쏟아져 내렸다. KJ가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휘의 등을 다시 두드렸다. 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얘기하고 있었잖아, 또 잘 거야? ? ?”


J가 고꾸라진 휘를 사이에 두고 내 어깨를 잡았다. K가 내 등 뒤로 와서 나를 제압할 기세였다. 왜들 이러지? 휘는 내 친구지 당신들 친구가 아니야. 우리는 근 20년 지기라고. 얘기를, 얘기를 해야 했다. 휘야, , ! 등 뒤에서 K가 내 어깨를 부여잡고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너 뭐야?”


선배는 뭐예요?”


너 가! 내 방에서 나가!”


K는 내 어깨를 잡은 채 더는 대꾸가 없었고 J는 내 눈앞에서 휘를 들어 안으려는 자세를 취했다.


자기, 뭐 하는 거야?”

 

잘 사람은 자게 하자. 침대에 눕히자고, ?!”

 

그만해. 휘한테 손대지 마!”


뭘 그만해! 너 진짜 오늘 왜 이래?”


쿵쿵쿵. 쿵쿵쿵.


J가 목청을 높이자마자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J는 휘에게서 손을 떼고 방문을 열었다. 웬 남자의 고성이 들렸다. 야밤에 왜 이렇게 시끄럽죠? 지금이 대체 몇 십니까? 몇몇 사람의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J가 연신 사과를 했다. 나는 씩씩대며 문가로 가 방문을 닫아버렸다. J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보았다. 쿵쿵쿵.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J가 서둘러 문을 열며 다시 사과했다. 나는 또 문을 쾅 닫았다.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고함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새끼들! 나와! 당장 나와! 안 나와? 안 나와! 당신들 경찰에 신고할 거야. 어디 한번 계속 그래봐 어? ?

 

J가 다시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혔다. 누군가 방문을 툭툭 발로 찼다. J의 사과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술에 취해서 그렇습니다. 원래 이런 사람들이 아니에요.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얼른 정리하겠습니다. 다음부터 절대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나는 현관문 앞에서 서서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씩씩거렸다. 화가 났으니까! 정말 화가 났으니까! 휘에게! J에게! K에게! 그리고, 그리고!


얼마 후 J가 들어왔다. 나를 끌다시피 해 방 한가운데로 데려왔다. 어느새 휘는 침대 1층 내 자리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떠날 채비를 끝낸 K가 인사도 없이 방을 나섰다.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그 소리와 함께 나는 굉장히 어둡고 험한 지하, 바닥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를 그런 지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도중 험한 측면 지형에 내 톡 솟은 광대와 각진 턱, 내 넓은 어깨와 튼튼한 종아리가 부딪히고 부딪혔다. J는 양손을 내 어깨에 올린 채 나를 보았다. 많은 의문이 담긴 눈빛이었다. 이렇게 지척에 J가 있는데 나는 계속 떨어지고 있었고, 그래서 아주 멀리에서 J의 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 J 역시 외투를 챙겨 입더니 운동화를 꿰어 신었다. 그를 붙잡아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떨어지고 있는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J는 내일 연락하자는 말을 남기고 문을 열었다. 이내 쾅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드디어 나는 어느 바닥엔가 툭 떨어졌다.

 

바닥엔, 맥주병과 과자 봉지, 육포 같은 것들이 나뒹굴었고 공기 중엔 J의 향기와 다른 사람들의 향기가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휘가 있었다. 2층 침대의 1층에서 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잠은 정말로 고요할까. 깨고 나면 진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잠을 자고 있을까. 나는 형광등을 껐다. 밖에서 비쳐든 빛이 원룸의 유일한 가구랄 수 있는 2층 침대의 실루엣을 비추었다. 침대로 가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더듬었다. 한 칸, 두 칸, 세 칸 올라와 요를 판판하게 펴고 그대로 누워 이불을 끌어당겼다. 이불과 베개에서 휘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어디선가 단단한 자기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



<당선소감>


뜻밖의 두려움불신 반복하는 내 삶에 큰 힘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어서 집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집에 가서 전기장판을 켜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잠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늦은 밤 일어나 라면을 끓여 먹은 뒤 설거지를 하고, 춥다고 툴툴대다가 멍하니 있고 싶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두려워서였습니다. 제 속에는 아주 하찮게 살고 싶은 욕망과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이 제멋대로 교차해 있기에 갈팡질팡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미 마음 한편에서는 어떤 뜨거운 것이 올라와 코끝까지 찼습니다. 그리고 고마운 사람들 몇이 눈앞에 떠올랐습니다. 임고을 작가님, 고맙습니다. 제 게으른 글쓰기를 당신은 늘 좋은 언어와 따뜻한 마음, 공정한 시선으로 응원해주었습니다. 나도 당신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L, 고맙습니다. 당신의 대단히 인색한 칭찬과 날카로운 비판은 다른 의미에서 나를 독려했고, 마니악한 당신의 문화 취향은 내 감성의 폭을 넓혀주었습니다. 또한 저와 밥을 먹고, 대화를 하고, 웃고 울었던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들이 무심코 말했던 구절들, 스쳐 보였던 눈빛, 내쉬었던 깊은 한숨, 토해냈던 울음과 웃음소리는 각각 전혀 무관한 파편이었다가 이렇게 새로운 맥락에 함께 놓여 완전히 새롭게 숨 쉬게 되었습니다.


예심·본심을 보신 선생님들과 문화일보에도 감사합니다. 특히, 세상의 온갖 당선 소감을 볼 때마다 과연 심사위원께 그렇게도 감사한지가 의문이었는데, 그보다 더한 진심은 없음을 각성했습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한 번의 당선이 저를 꽤나 특별한 존재로 만들지는 않을 겁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어쩐지 안심이 되어 밥을 두 공기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에 대해 확신했다가도 불신하기를 반복하는 삶에서 이 상이 큰 힘이 되었음을 절대 부정할 수는 없겠습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본명 도은숙

1979년 충남 서천 출생

기독교교육, 신학 전공

 


<심사평>

 

심리적 갈등 응축절제된 문장·통제력 인상적

 

본심에 오른 작품은 11편이었다. 저마다 소재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다양했지만, 전반적으로 폭력적이랄까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가 두드러졌다. 사실 심사위원들이 당선작을 골라내기까지엔 다소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묘하게도 약속이나 한 듯 작품 다수가 비슷한 약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스토리와 장면을 그럴듯하게 이어가는 재치는 상당하지만, 정작 인물 형상화 및 객관적 거리 확보에서 약점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주제 형상화 미흡, 모호하고 맥락이 실종된 허술한 결말로 이어졌다.


늑대를 그리다는 차분한 이야기 전개가 장점이지만 결말의 무리한 설정이 문제였다. ‘하루는 과거 시간을 역추적해가는 추리적 전개가 인상적이긴 하나 역시 모호한 결말 처리가 아쉬웠다. ‘틀니 닦기는 시종일관 화자의 과도한 진술 안에 갇혀버린 인물들이 답답해 보였고, 다소 진부한 인물 관계 설정도 마음에 걸렸다. ‘당장 필요한 것은 매끄러운 전개가 장점이긴 하나 인물과 상황의 개연성이 부족했고, 특히 모호한 결말 처리에서 약점을 드러냈다. 유나가 과연 아버지를 살해했는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독자의 관심을 최소한 작가가 의식했어야 했다.


당선작 유령의 2층 침대를 지배하는 키워드는 화자의 내면에 은밀히 장전된 질투열등감이다. 그 대상인 친구 와 화자의 동거가 이루어지는 공간은 대학가의 원룸. 여기에 또 다른 두 남자가 우연히 합세하면서부터 소설은 마치 한밤의 소란한 무대극처럼 빠르게 전개된다. 언뜻 가벼운 시트콤에 더 어울릴 법한 공간과 인물의 구도로부터 보란 듯이 이 소설을 구해낸 힘은 무엇보다 정교하게 절제된 문장과 대화의 내공에 있을 것이다. 짤막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대화 속에 복잡 미묘한 심리적 갈등을 응축해내는 문장 감각, 그리고 마지막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해내는 절묘한 통제력이 매우 인상적이다.

 

심사위원 : 김원우 · 임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