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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깃발이 운다 / 이선우

 

눈을 떴다. 야광 삼각 깃발이 깃대에 매달려 파르르 떨고 있는 게 보였다. 몸이 땅바닥에 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오토바이를 벗어난 몸이 하늘로 치솟던 기억이 난다. 지금껏 물이 흥건한 수로에 꼬라박혀 있지 않은 것만도 다행한 일이다. 수로 바닥에 곤두박질 친 뒤로 풀숲으로 기어오르던 것에서 필름이 끊어졌다. 몸이 결려 꼼짝 할 수가 없다. 몸은 밤사이 내린 이슬에 흠뻑 젖어 매 맞은 것처럼 무겁고 욱신거린다. 오토바이는 수로에 곡예 하듯 아슬아슬 걸쳐있다. 오토바이 꽁무니에는 저팔계를 흉내 낸 아기돼지 야광 깃발만이 팔랑거리고 있다. 마치 우리를 진두지휘할 때 아버지가 흔들던 깃발 같기도, 공단 외국인 노동자숙소 벽에 붙은 색색의 삼각 깃발 같게도 보였다.

 

아버지는 성대 결절 진단을 받던 날부터 깃발로 의사를 소통하기 시작했다. 성대 쓰는 걸 최소화 하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온 후였다. 너희들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 너희들이란 말로 나와 어머니를 한축으로 묶어 깃발부대를 창단했다. 60센티 막대기 끝에 삼각모양 흰 천, 붉은 천을 각각 매달아 상하 좌우로 흔들며 진두지휘했다. 유치하네. 물론 이 말은 어머니가 내 앞에서만 했던 말이다. 그러니까 아버지 혀끝에 놀아나던 우리가 깃발 짓에 놀아나게 된 셈이다. 평소 마지못해 입을 열던 아버지는 깃발로 소통하는 것에 만족스러워 보였다. 문제는 어머니였다. 평소 잘 웃는 편이긴 해도, 아버지의 깃발 짓에 토를 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까르르 웃기까지 했다. 아버지의 깃발 소통은 쭉 이어졌다. 차려놓은 밥상 앞에서 맥 풀린 얼굴로 참 참 참 게임을 하듯 머릿짓과 동시에 붉은 깃발을 휘저었다. 삭힌 깻잎과 물에 동동 띄운 오이지 앞에서는 양미간에 팔자주름까지 합세해 붉은 깃발을 흔들었다. 어머니는 팔랑이는 깃발 짓에 맞춰 그것들을 상 밑으로 잽싸게 내려놓았다. 시장 통에서 어머니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을 보고 품격 운운하며 한 달간 어머니와 말을 섞지 않을 때도, 허벅지가 보이는 반바지 차림의 어머니를 슈퍼에서 만났을 때도, 열흘 동안 어머니 코끝에서 붉은 깃발이 오고갔다. 때로는 어머니가 차린 밥상에 앉지 않는 것으로 어머니에게 벌을 준다는 웃음도 안 나오는 일도 감행했다. 우유나 과일을 준비하겠다는 어머니의 말에는 강력하게 거부한다는 표시로 붉은 깃발을 수없이 팔락거렸다. 그럴 때마다 해적 깃발도 아닌데 어머니의 자존심을 해적질당하는 것 같아 나는 몹시 불쾌했다. 그런 아버지 앞에서 어머니는 여전히 명랑했다. 명랑할 일이 도대체 없어 보였지만 이해하기 어렵게 꾸준히 상냥하고 명랑했다. 나는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바보냐고 화를 냈다.

 

여자를 안에서 낚아채듯 끌어들인 건 아버지였다

똑깍, 문 잠그는 소리가 계단의 고요 속으로 사그라졌다

그 뒤로 성격 이상자로 생각했던 아버지와의 소통부재가

근거 있는 정황이었다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사수 끝에 입학한 네 아버지를 만났어. 적당한 몸피에 음식도 소식가였어. 소처럼 많이 먹는 남자 싫었거든. 어머니는 나를 설득하거나 이해시키려는 말투는 아닌 듯 보였다. 정갈한 남자의 표본처럼 하얘가지고, 말 수 없는 것이 좋았어. 그때부터 내가 네 아버지를 좋아했거든. 너는 명랑한 게 보기 좋더라. 그렇게 말하는 너희 아버지 말처럼 더 명랑해져서 나를 좋아하게 만들고 싶었어. 말을 맺는 어머니는 줄기 끝에 핀 보랏빛 붓꽃처럼 수줍어 보였다. 나는 수줍게 웃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아버지의 치부를 들추고 싶은 것을 참느라 어머니에게 성깔을 부렸다.

 

사 개월 전 공영주차장 관리실로 족발을 배달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공영주차장 관리실은 두 평 남짓 공간이지만 모든 집기들을 갖춘 원룸 같았다. 한가한 틈을 타 뭉치는 주변 소상인들 덕분에 자주 배달을 갔었다. 공영주차장 바로 뒷골목이 경일 한의원이었으므로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습관처럼 올려다보곤 했었다. 평상시라면 병원 문을 닫을 시각이었지만 웬일인지 한의원에서 연한 빛이 새어나왔다. 올라간다고 반겨줄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가게로 일찍 가봤자 주인의 새로 태어난 손자 자랑에 머리가 아플 것이고 30분 배달 수칙에도 여유가 있던 터였다. 계단을 절반쯤 올라갔을 때였다. 낮지만 정확하게 세 번 노크소리가 낮게 계단에 퍼졌다. 곧 문이 열렸다. 여자를 안에서 낚아채듯 끌어들인 건 분명 아버지였다. 똑깍, 안에서 문 잠그는 소리가 계단의 고요 속으로 사그라졌다. 나는 어느 사이에 절반쯤 올라갔던 계단을 순간이동 해 땅바닥을 밟고 있었다. 그 뒤로 성격이상자로 생각했던 아버지와의 소통부재가 근거 있는 정황이었다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어떤 것이 먼저였을까, 여자가 있어 가족과 소통하지 않은 것일까, 가족과 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여자를 품은 것일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 본인은 정갈한 인간이란 가면을 쓰고 살았다. 속이고 속는 삶의 경계에서 어머니의 삶을 구겨놓고 구경꾼으로 살아가는 아버지에게 이대로 돌진하고 싶어졌다. 어머니는 보지 않고는 아버지의 현실을 믿지 않고 태엽감은 인형처럼 언제까지고 명랑함을 잃지 않고 웃을 것이다.

 

아버지가 여자와 동행해 한의원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한 건 처음 여자가 노크하고 양극이 음극을 끌어들이듯 쭉 빨려 들어간 뒤로도 서너 번 더 모르는 척 지나친 후였다. 나와 아버지가 눈빛을 교환했을 때 아버지는 그 짓을 끝냈어야했다. 그 때 아버지는 네 놈이 알면 뭘 어쩌겠느냐, 마치 점수가 낮은 내 성적표를 받았을 때처럼 조소가 담긴 눈빛만 보냈을 뿐 멈추는 일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멈추지 않은 것처럼 나는 아버지에게 보낼 응징의 시도를 멈추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주문했다.

 

아버지는 12년째 같은 장소에서 노인환자가 대부분인 한의원을 하고 있었다. 대대로 대물리던 한의원은 규모가 줄고 줄어 뒷골목 작은 한의원이 남은 것이다. 아버지는 한의원을 간신히 꾸려갔다. 탕약이 필요한 환자에게는 전문탕제원에 맡겨 탕약을 줄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하루에 몇 안 되는 환자와 씨름하느라 성대 결절 되었다는 말 또한 이해되지 않았다. 시골 한약방 같은 규모가 못마땅한 어머니가 시외버스터미널 가까운 번화한 곳으로 확장을 권했지만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번화한 곳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이상하리만큼 동네를 고집했고 그 장소를 떠나지 못했다. 아버지는 내 성적표에 민감했다. 물론 한의원을 나에게 대물림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중간 이하인 성적표를 받은 뒤 조소가 섞인 눈초리는 햇볕에 눈이 녹아내리듯 나도 녹아내릴 것처럼 따가웠다. 그런 상황이 못마땅해 혀를 치던 어머니는 나에게 위로 삼아 시집와서 들었다는 얘기를 했다. 아버지도 동거 동락하는 독선생에게 과외를 받았대. 한의대 입학 할 때까지 도전시키겠다는 할아버지 말에 재수하다 미치겠다 싶어 미치도록 공부해서 네 번의 재수 끝에 지방한의대에 입학했단다. 그것도 턱걸이로. 어머니는 턱걸이에 악센트를 주며 무구하게 웃어보였다. 너는 재수만 했어도 지방한의대 쯤은 거뜬히 갔을걸. 아버지의 치부까지 끄집어내 위로하는 어머니가 고마워 나는 고갯짓으로 긍정의 답을 했다. 어머니는 내가 벌써 한의대생이 된 듯 으스댔다.

 

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수로에 처박혀 꼼짝 못하고 있는 걸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에이, 나쁜 놈아. 욕을 내뱉기 직전의 표정이 될까, 궁금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네 시간은 족히 흐른 듯했다. 더구나 한 밤중이었으니 인적이 끊겼던 것이 분명했을 것이다. 익어가는 수제비 반죽이 수면으로 떠오르듯 기억이 조각조각 떠올랐다.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하면서 3배속으로 내달렸다.

 

아기돼지 야광 깃발을 오토바이 배달통에 꽂고 출발할 때까지도 나는 족발집 주인에게 신임 받던 배달원이었다.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복학할 때까지 주어진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고 복학준비와 야식배달로 보낸 지 3개월이 지났다. 복학 할 때까지 남은 3개월, 꾀부리지 않고 오토바이를 몰면 등록금은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무늬만 한의사 사모님이었지 최소 생활비에 목매달려 있는 어머니를 위해 망신창이가 된 구두를 새 구두로 갈아주고 싶었다. 그런데 몸을 움직일 수 없다면 척추를 다친 확률이 높은데,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의식은 점점 또렷해지는데 통증으로 몸을 움직거릴 수가 없다.

 

공단 쪽에서 읍내로 나가는 중이었다. 농로라서 좁고 어두운 반면 시간은 반으로 줄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공단 쪽 야식배달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 길을 이용했다. 더구나 밤에는 거의 통행이 없는 곳이라 커브링을 즐기기에 최고였다.

 

“30분 배달시간 지켜라이.”

 

주문을 걸 듯 사장은 출발 전 매일 같은 말을 뒤통수에 대고 쏘아붙였다. 상호와 안전제일이란 문구가 새겨진 아기돼지 야광 깃발을 다는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30분 배달시간 준수를 염두에 두고 달리다보면 생계형 운전자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빨리 가야 한다. 그것만이 목표요, 목적이었다. 250cc 오토바이로 5킬로미터까지 10분 이내. 사장이 정해놓은 목표시간이다. 사장은 아무리 헤맸다고 사정해도 핑계로만 듣는다. 왕복 30분이 넘으면 배달 원칙 불이행이란 명분을 달아 땀으로 시큼해진 몸에 잔소리 샤워를 퍼부었다. 배달원 주먹에 쥔 돈을 건네받은 후에야 사장은 배달원의 무사귀환이 눈에 들어왔다. 늦은 배달은 다음 고객을 포기하는 것이라 했다. 나대신 영식이랑 승호가 혼쭐나게 달렸을 것이다. 웬만한 신호는 위반이 필수였다. 안전모 미착용, 신호위반 같은 교통법규위반 범칙금은 걱정 말고 댕겨라이. 사장은 범칙금을 대납해 줄 것이라 큰 소리쳤지만 한 번도 대납해준 적은 없다.

 

어둠을 뚫고 달렸다. 자정이 넘어 출발할 때, 알 것 같았던 3공구 B 블록을 찾기 위해 몇 바퀴를 돌았다. 어둠속에 그 건물이 그 건물 같았다. 즐비하게 선 높고 커다란 사각의 창고 형 건물들이 돌아도 계속 나왔다. 이상한 약품냄새가 밤공기에 섞여 구역질이 났다. 몇 번 왔던 길이지만 잡생각에 빠지면서 비슷해 보이는 공단 블록을 돌고 또 돌게 된 것이다. 도착했을 때 공장 한 켠 컨테이너를 불법 개조한 노동자 숙소에서 수난다와 안주라마가 나왔다. 염색공장에 다니는 티베트에서 온 벵가스 친구들이었다. 수난다와 안주라마는 우리 집 골목 끝 빌라에 사는 벵가스네 집에서 몇 차례 본 기억이 났다. 공장에서 얻어줬다는 빌라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낡은 집이었다. 벵가스는 가죽 가공 공장에 다니는 불법 체류자 수난다와 안주라마가 같은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사장 몰래 가끔 숙식을 함께했다. 배달하러 가면 여남은 명이 족발 하나 시켜놓고 현관문 앞에 바글바글 모여 족발을 맞이했다. 스무 개의 시커먼 눈동자를 굴리고 군침을 삼키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렸다. 벵가스는 가죽 염색 기술자였다. 본인만 불법 채류자가 아니라는 말을 하면서 으스댔다. 빌라로 족발배달 하러 갈 때마다 30분 배달 원칙 시간에 남는 10여 분은 그들의 애로사항을 들어 주곤 했었다.

 

염색약품냄새가 고약해 울컥 구역질이 났다. 그래도 어렵게 찾아낸 이곳에서 수난다와 안주라마를 보니 반가워 손을 내밀었다.

 

너 나쁜 놈이다.”

 

그래 너 진짜 나쁜 놈이다.”

 

나쁜 놈. 너 죽인다.”

 

그들이 다짜고짜 세 번을 반복해서 나를 향해 소리 질렀다. 나는 주위를 살폈다. 어둠사이로 열어놓은 컨테이너 문틈에서 비집고 나온 희미한 불빛아래 나쁜 놈이라 불릴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희미한 불빛을 등에 업고 서있는 수난다와 안주라마는 단호하고 의분에 찬 표정이었다. 염료가 반질거리는 더께가 진 작업복 색깔과 얼굴이 같아 보였다. 이 자식들이 미쳤나. 나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대거리를 가라 앉혔다. 손에 들었던 족발과 서비스로 가져온 쟁반 막국수를 내밀었다. 그들은 족발이 목적이 아닌 듯 했다. 족발은 나를 불러내기 위한 수단인 듯 보였다.

 

나쁜 놈. 아버지도 그들과 똑 같은 말을 나에게 했었다. 너 나쁜 놈이다, 너 진짜 무서운 놈이다. 아버지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귓속에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윙윙거렸다. 어머니는 많은 날을 연락 두절된 남편을 위해 밥상을 차렸다 물리기를 반복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갑자기 잡힌 세미나 때문에 그랬노라 했다. 어머니는 걱정에서 분노로, 안도에서 포기를 거듭했다. 어머니로부터 완전한 포기까지 가게하지 않는 아버지의 수단이 야비해 환멸스러웠다. 아버지의 불륜을 목도하던 날 이후, 어머니는 한동안 흔들지도 않는 아버지의 깃발에 복종 하듯 깻잎과 오이지를 상 밑으로 내려놓고 우유는 사오지도 못했다. 태엽이 모두 풀린 인형처럼 웃음기 없는 얼굴로 서성거렸다.

 

빌라에서 여럿이 만날 때와 달리 공장으로 처음 배달 왔을 때 수난다와 안주라마는 경계의 눈초리지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그때도 짐승의 가죽 냄새가 공기에 섞여 메케하고 메스꺼웠다. 하늘과 맞닿은 높고 맑은 곳에서 살다 화학냄새를 이겨내기 힘들었다고 했다. 가죽에 방충, 방습을 위해 사용된 화학약품과 염색에 쓰인 화학약품이 휘발되면서 유해가스가 나와 숨을 쉬기 어려웠다. 공단은 주로 도금공장이나 염색 공장이 있는 중소기업 정도의 열약한 공장이 밀집한 곳이었다. 야식 배달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곳에 이런 공장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이곳을 기피하기 때문에 주로 외국인 노동자가 주를 이루었다. 자연히 사장들끼리 단합을 하며 외국인 노동자들의 불법 체류를 약점으로 횡포를 부린다고도 했다. 두 번째 배달을 시켜놓고 그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들을 이야기했다. 나를 어떻게 믿고 그랬는지 모를 일이지만 나도 30분 배달 원칙도 망각하고 함께 울분을 삼켰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답답해서 말하는 것이라 했다.

 

외국인등록증, 여권 사장이 보관해. 뺏었다.”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나는 궁색한 대답을 했다. 그들의 까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공장 사장은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큰 행사마다 초대되던 사람이었다. 후원금도 내고 모범적인 기업인이라고 자랑하던 교장의 말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만일 밖에 나갔다 교통사고라도 나면 나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수난다와 안주라마는 본인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동조의 눈길을 교환했다.

 

잃어버릴까봐 그랬을 거야.”

 

여기 올 때 쓴 돈 갚아야하는데 사장이 월급 미뤄 내 친구 다루에나가 있는 합판공장으로 간다. 사장은 참고 기다리라고 여권 안준다. 우리 이틀 동안 다루에나에게 다녀왔는데 도망갔다고 은행에 정기적금도 정지시켜 우리가 못 찾는다.”

 

불법과잉대응이 확실하다는 생각이지만 나는 입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먼저 배달 왔을 때도 수난다는 울먹였다.

 

내 여자친구 E-6비자로 들어왔는데 소식이 끊겼다. 알아보니 E-6비자는 여자 데려다 술집에 팔아먹는다고 했다. 내 여자 친구 보고 싶다. 찾고 싶다.”

 

수난다는 마침내 줄줄 흐르는 눈물을 염료가 더께 진 옷소매로 문질렀다. 그 뒤 오늘이 세 번째 배달이었다.

 

컨테이너 주변은 재활용품인지 모를 것들이 점령해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족발이 들어있는 배달통을 열어 다시 내밀었다. 수난다는 족발을 받아 안주라마에게 건넸다.

 

수난다는 내 손을 끌고 컨테이너 박스로 들어갔다. 내심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쁜 놈이라 말하는 이유도 모를 일이었다. 숙소 안은 이불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고 향수병을 달래며 먹었는지 소주병이 흩어져 있었다. 벽에는 경전을 적어 넣은 색색의 삼각 깃발 사진이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 파르초가 우리를 지켜 줄 거다.”

 

팔락이는 파르초를 바라보는 수난다의 눈이 그윽했다. 내 감정이 뒤엉켜 소용돌이치듯 사진 속 파르초도 세찬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 갈 것 같았다.

 

새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있는 배경에 색색의 깃발은 그들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신성한 기가 들어올 것 같았다. 가시적으로만도 위안이 되었다. 수난다와 안주라마가 파르초의 기를 받아 나에게 마음 놓고 난폭해 질 수 있기를, 그래서 저들이 조금이라도 울분을 삭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창 아버지의 깃발정책이 무성할 무렵이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시원하게 티베트의 파르초가 나부끼고 있었다. 멀리 설산이 펼쳐있고 파르초가 바람에 찢어지도록 휘날리는 화면속이 장관이었다. 해발 4200m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마을, 티 하나 없는 하늘에 유채색 파르초가 모든 근심을 잠재울 듯 나부꼈다. 색색의 과일향이 배어나올 것 같았다. 똑같은 깃발인데 아버지의 깃발과 의미가 달리 다가왔다. 아버지의 깃발은 오너라, 가거라, 하거라, 말거라 명령일색이었다. 파르초는 희망과 감사의 깃발이고 두 손을 모으는 것만으로도, 나부끼는 것만으로도 위안의 깃발로 다가왔다.

왜 내가 나쁜 놈이야?”

너 사장한테 우리 일렀다. 어제 사장이 무서운 사람 데리고 와서 회사에서 있었던 일 다른 사람한테 왜 얘기했냐고 때렸다. 너 나쁜 놈이다.”

나 사장 만나지 않았어. 나 미안하지만 너희들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수난다와 안주라마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아직도 거짓말이야.”

수난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이방인이 자국민에게 손찌검은 쉬운 일이 아니었는지 벌벌 떨던 주먹을 떨어뜨리고 파르초 사진 쪽으로 나를 밀쳤다. 그들의 분노를 보면서 뒤편으로 보이던 파르초의 깃발도 심하게 펄럭이는 듯 보였다. 마치 나를 응징이라도 하려는지 윙윙 펄럭였다. 수난다가 안주라마에게 동조의 눈빛을 보냈다. 안주라마 역시 주먹 쥔 손이 내 턱밑에서 어퍼컷을 날리려다 파르르 떨던 주먹을 걷어 들였다. 주먹질을 해대는 것보다 차마 때리지 못하는 그들의 손이 더 아파보였다. 움켜 쥔 주먹에 돋은 힘줄이 터질까봐 겁이 났다. 나는 이상하게 반항할 수가 없었다. 오늘밤은 마음 놓고 난폭해져봐라. 그들이 흔드는 방향으로 흔들렸다.

나쁜 나라, 나쁜 놈.”

그래 나 나쁜 놈이다.”

공단 입구 편의점에서 맥주를 샀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맥주로도 갈증이 가라앉지 않았다. 좁은 농로로 접어들면서 속력을 가했다. 헤드라이트가 밝혀주는 시야만큼만 내가 알 수 있는 세상이었다. 왠지 어둠이 한결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차라리 밤에 달리는 야식배달이 편했다. 이상하게 객기를 부리고 싶었다. 커브링을 즐기며 속력을 높였다 줄이기를 반복했다. 이미 30분 배달 원칙은 깨어진지 오래다. 술기운이 올라왔다. 눈이 자꾸만 감겼다. 야광깃발이 정신 차리라는 듯 푸두두 거렸다. 참 오랜만이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오토바이를 몰다니, 더 힘차게 커브링을 즐겼다. 좁은 논두렁길을 신나게 달렸다. 아버지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들은 나쁜 놈이란 말이 납득되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달리면서 모든 것을 잊고 싶어졌다. 술기운이 확 돌았다. 오토바이 엔진소리와 펄럭이는 야광깃발 소리가 섞여 환호처럼 들렸다. 더 세게 달릴 것을 종용하는 듯 했다. 뒷배를 봐줄 테니 염려 말고 달리라고 우우 거렸지만 그 말은 절대 안 믿을 것이다. 아버지가 근엄하고 권위 있는 얼굴을 하고 깃발로 어머니와 나를 조종할 때, 나는 깃발을 따랐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조종하는 아버지를 믿고 싶었을 뿐이었다.

더 사납게 핸들을 흔들었다. 더 큰 환호가 들렸다. 30분 배달이라는 목줄에 끌려 다니던 분주함을 스티커처럼 똑 떼어내는 순간 굉음과 속도를 즐기는 진정한 라이더가 된 기분이었다. 헤드라이트가 비춰지는 시야 밖은 너무 어두워 안도감마저 갖게 했다. 기이하게 나에게도 이런 폭발력과 반항심이 있다는 것이 새삼 다행이며 대견하기까지 했다. 더 세게 핸들을 흔들었다. 펄럭이는 야광 아기돼지 깃발은 깃대에 꼼짝없이 붙잡혀 펄럭이고 있었다. 더 사납게 달렸다. 뺨에 스치는 오월의 밤공기가 아버지가 갈긴 뺨처럼 얼얼했다.

아버지는 매를 든 적이 없었다. 어려서 밥투정 할 때도 빌려 온 만화책을 볼 때도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뺨을 갈겼다. 늦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던, 그래서 밥상을 여러 번 차리던 어머니와 달리 나는 아버지의 부재가 편안했다.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뺨 맞은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긴 세월을 어머니의 인생을 우습게 만든 비겁한 것에 대한 응징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응징이 내게 필요했던 것인지, 어머니에게 필요했던 것인지는 지금도 헷갈렸다. 설령 그것이 어머니를 위한 응징이었다해도 결국 웃음을 잃은 쪽은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깃발을 휘두를 때 진작 붉은 깃발 대신 흰 깃발을 쳐들고 정전협정을 맺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어머니의 명랑은 지금껏 계속되었을까. 어머니의 명랑은 정말로 명랑이었을까.

죽어서도 썩지 못 할 놈.”

아버지가 쓰고 있던 두꺼운 가면이 완전히 벗겨지던 날,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가 처음으로 뱉은 말이었다. 그날 우리 앞에서 아버지의 가면이 벗겨졌듯, 어머니도 그 순간부터 명랑이란 두터운 가면을 벗었다.

그 여자 불쌍한 여자야. 건들지 마.”

아버지가 뱉어낸 말이 팔랑이는 붉은 깃발인양 여자에게 다가서지도, 털끝하나 건들지도 못하고 얼음땡 놀이하듯 굳었던 어머니는 동네를 헤매고 돌아다녔다. 장미넝쿨이 우거진 공터 앞에서 텅 빈 한의원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어머니는 세미나 관계로 휴원문에 붙은 안내문을 떼어내 발기발기 찢어버렸다. 그것이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분풀이인 것처럼 말이다. 묵직한 것에서부터 탈출을 시도한 사람처럼 걷고 또 걸었다. 또 태극기와 도기(道旗)가 펄럭이는 읍사무소 앞을 정신 내놓고 서성였다. 어머니는 힘차게 날갯짓을 하는 깃발도 깃대에 매달려 있을 때 우우 울어댈 수 있다고, 지난 세월을 리플레이 하는 듯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왠지 의무복무기간이 끝난 사람처럼 홀가분해보였다.

근엄하고 권위 있는 얼굴을 하고 깃발로 어머니와 나를 조종할 때,

나는 깃발을 따랐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조종하는 아버지를 믿고 싶을 뿐이었다

네가 아버지와 여자가 한의원으로 들어가는 걸 봤단 말이지?”

펄럭이는 깃발의 날갯짓만큼이나 여러 번 나에게 묻던 어머니는 혹한기를 견디고 돌아온 훈련병처럼 볼이 벌게 있었다.

꼭 열이틀 전 일이었다. 종일토록 비가 내려 집안이 온통 습기로 가득 차 짜증이 나 있던 때였다. 마침 한 달에 한 번 족발집이 쉬는 날이어서 방에서 빈둥대고 있었다. 어머니가 저녁상에 올릴 음식이 식으면 데우기를 댓 번 반복한 다음이었다. 연락도 없는 아버지 밥상을 뭘 예쁘다고 여러 번 차리느냐, 세미나 간 아버지가 언제 올지 모르지 않느냐, 서로 옥신각신하다 나도 모르게 뱉어낸 말이었다. 엄마 밥상 차리지 마, 세미나는 무슨……. 아버지 한의원에 있으니 같이 가봅시다. 한의원에 나타나는 어머니에게 남편 직장에 자주 오는 일이 얼마나 몰상식한 일인지 모르느냐, 얼씬도 못하게 했던 아버지 말을 상기하는 듯 잡시 망설이다 어머니는 내 손에 끌려 집을 나섰다. 한의원 앞에서 나는 계단을 오르며 돌아가야 할까를 계속 망설였다. 확인도 실망도 당사자의 몫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식으로든 정리해야한다면 당사자의 명료한 확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의원 침상 바람막이 겸 채광용 커튼 사이로 교묘하게 불빛을 차단한 실내에는 두 사람 사이에 작은 스탠드가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하얗게 질려있는 여자에게 다가가 여자 앞을 막아섰다. 어머니는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눈앞에 펼쳐진 삼각관계를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골낼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비위가 없는 건지, 아버지가 보내는 냉소와 질책을 받고도 늘 명랑함을 잃지 않았다. 아버지가 하는 어떤 상황에도 명랑하게 함박웃음을 웃던 어머니가 그날 처음으로 나는 무서웠다.

아니, 왜 여기?”

여자를 보자 어지러운지 잠깐 비틀거리던 어머니는 접수대를 잡고 중심을 잡았다. 우리 집에서 몇 집 건너 화장품가게를 하는 여자였다. 남편이 사다주는 스킨이나 로션을 잘 바르지 않는다는 둥, 남편이 한의원 원장이지만 쥐꼬리만큼 생활비를 타 쓴다는 둥, 군인 간 아들이 곧 제대해 올 거라는 둥, 얼마 전 제대해 등록금을 벌겠다고 야식 배달을 한다는 둥, 어머니는 순한 얼굴로 본인의 치부를 얘기했을 테고 10년이 넘는 단골이었다.

아버지는 하얗게 질려있는 여자 입에 청심환을 밀어 넣었다. 어머니 손바닥에도 어머니 비위 같은 새까만 청심환을 올려주었지만 바로 어머니의 손에서 떨어져 또르르 굴러가 아버지 발밑에 멈춰 섰다. 나는 속으로 어머니가 아버지의 멱살을 부여잡고 흔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또 여자에게도 머리끄덩이를 잡아 흔들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흔들지도 않는 붉은 깃발을 본 듯 또 얼음땡이 되어 꼼짝 못했다. 여자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버지는 뚜벅뚜벅 나에게로 다가와 뺨을 후려쳤다. 너는 나쁜 놈이다. 어머니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대거리 하나 못한 어머니에게 범접하기 어려운 포스가 느껴졌다. 두 사람은 어머니 앞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어머니에게 일어난 상황보다 내 뺨에 벌겋게 자국 난 일이 더 큰 일 인 듯 어머니는 내 볼을 만졌다.

가자.”

어머니가 앞서갔다. 나는 한의사 임성훈이란 명패를 내동댕이치고 밖으로 나왔다.

맘 쓰지 마라.”

속이 텅 빈 조각상처럼 어머니는 가볍게 걸어갔다.

나한테도 신경 쓰지 마요.”

몸 속 배관같이 연결된 신경을 차단하는 의식을 우리는 한 번 씩 주고받고 어머니가 앞서고 그 뒤를 따라 집을 향했다.

 

지금쯤 어머니는 아들의 부재를 눈치 챘을까. 점점 운신할 수 없는 것이 이상했다. 무릎을 세워보려고 했다. 통증이 심해 곧 포기했다. 허리를 오른쪽으로 틀어보았다. 허리가 꼼짝 할 수 없이 아팠다. 논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막 모내기를 끝낸 논바닥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쓰러진 어린모가 눈에 들어왔다. 끝 간 데 없이 너른 논바닥 너머에서 부연 빛이 퍼지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시야 끝나는 곳 야산은 어둠이 머물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찬란한 해가 떠오르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분명 어머니는 요즘 일어난 사건의 충격으로 어딘가에서 비명횡사 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 여길지 모른다. 전화도 불통인 아들을 앉아 기다릴 리 없을 어머니는 족발 집을 찾아가 행방을 물었을 것이고, 그런 어머니에게 손해를 되물었을 사장까지 상상이 갔다. 명치가 저려왔다.

어머니는 아버지 불륜을 목도하던 날처럼 지금도 뿌연 새벽 공기를 가르며 연락두절인 나를 찾아 무작정 헤맬 것이다.

너한테까지는 들키지 않기를 바랐는데……. 화장품 집 여자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어머니는 말하는 내내 명랑한 것이 뭐예요, 라는 얼굴을 했다. 나는 열흘 동안 어머니 뒤를 쫓아다녔다. 그렇게 딱 열흘, 어머니가 동네를 헤매고 쏘다니는 동안 아버지는 자취를 감추었다. 아버지는 지난 시간에 대한 변명도 사과도 없이 있었던 사실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재주를 도망가는 것으로 보여주고 떠났다. 스무 살에 만나 사랑했고 남자가 명랑해서 좋아 보인다는 한 마디에 평생 명랑함을 잃지 않은, 건초처럼 가벼워진 쉰 된 여자 뒷모습이 저녁 잔영 속에 희미하게 보일 간격으로 나는 뒤를 따랐다.

열흘 동안 아버지와 세 번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나쁜 놈이란 말만 되풀이했다. 아버지는 흔들리기 전, 말간 물로 보이고 싶었던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다고 믿었을까. 나로 인해 어머니에게 이중생활이 까발려진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여자와의 관계가 10년이라고 했다. 10년이란 말에 악센트가 들어갔다. 십년 밖에 안 됐다는 말인지, 10년이나 됐으니 인정하라는 것인지 애매했다. 아버지는 여자와 10년 됐다는 말로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흰 깃발을 단호하게 들어 올리고 사라졌다.

시골로 내려왔소. 월급쟁이 한의사로 취직했소. 모든 상황정리는 어머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여자는 내가 좋아한 사람이오. 불쌍하니 괴롭게 하지 마시오. 부탁이오. 문자메시지는 어머니에게 보내온 아버지의 오래 묵은 흰 깃발이며 동시에 붉은 깃발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불쌍하다고 지목한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라 화장품 집 여자였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지만 결혼 생활 통틀어 하고 싶은 것을 해봤을 리 없고, 해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조차 잊고 살았던 어머니였다. 이제 와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했다. 47평 대지에 일이층 합쳐 34평 단독주택이 전부인데 뭘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 집도 아버지 명의로 돼 있었다. 아버지가 흔드는 깃발이 밝은 가정, 풍요로운 가정 만들기를 기대했었다. 파르초처럼 바라보고 손을 합장만 해도 지켜주고 희망이 되어 주기를 기대했다. 아버지의 깃발은 그야말로 연출에 불과했던 것이다.

 

기억의 짜깁기는 명확하게 맞춰져갔다. 논두렁길에서 과하게 속력을 내다가 돌부리에 걸렸거나 심한 커브링을 하다 튕겨져 나갔을 것이다. 어머니와 사장이 여러 차례 전화를 했을 것이지만 사고 나면서 휴대폰도 박살났는지 아무 소리가 없다. 유일하게 어머니만이 연락두절 된 나를 찾아 족발 집으로, 도서관으로 가서 문 여는 시간을 기다리며 초조해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의지하고 싶은 대상을 찾아 마음을 모아 상황을 종료할 수 있는 힘을 얻고 싶었다. 10여 명이 모여 족발 한 접시 시켜놓고 둘러앉은 그들은 오히려 평안해 보였다. 비좁고 냄새나는 공장에서도 분노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대신 고향을 떠나와서도 그들의 소망을 기억하는 벽에 걸린 파르초 사진만이 그들을 대신해 화가 난 듯 벌떡 일어나 펄럭였다. 아버지가 휘날리는 깃발도 나와 어머니는 파르초가 될 줄 알고 복종했다. 웃음이 나왔다. 다리도 팔도 움직일 수가 없다. 지나가는 차량이 나를 발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손을 움직일 수 있다면 야광깃발을 들어 흔들면 좋을 텐데 말이다. 야광깃발을 흔든다면 그것은 간절한 구원의 표시일 테지. 훗날 내게도 깃발 하나쯤 가진다면, 그래서 그 깃발을 흔든다면 그 깃발은 파르초와 아버지의 깃발 사이 어디쯤 있을까. 깃발은 깃대에 매달려 있을 때만 제 역할을 한다. 아무리 아우성쳐도 깃대에서 떨어져 나가면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된다. 아버지는 그것을 진작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깃대에 붙은 채 펄럭이기만 한 것일까.

멀리 산기슭에서부터 해가 떠오르려는지 붉은 기미가 보였다. 잠깐 잠이 들었던 것일까, 푸르스름한 하늘이 퍼지는 햇살과 겹쳤다. 티베트의 하늘에 펄럭이던 깃발처럼 보였다. 수백 개의 깃발이 색색으로 제각각 바람을 맞으며 펄럭이던 장엄한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합장을 하고 싶다. 내 속에서도 뭔가 꿈틀댄다. 그런데 아무것도 움직일 수가 없다. 먼 곳에서부터 자동차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자꾸 눈이 감겨 왔다. <>



<당선소감>

 

걷고 걸었던 통학길, 나의 책이고 친구


지방 어느 카페에서 여고동창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당선소식을 받았다.


친구들의 축하를 받는 동안에도, 하룻밤을 보낸 지금도 잘못 연락했노라, 걷어 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두려웠다. 꽤 오랜 기간 응모와 무소식이 반복된 까닭일 것이다. 응모한 사실조차 잊겠다, 다짐했지만 허사였다.


모든 일상사 끝자락에서 응모한 소설이 끌려나와 괴롭혔다. 당선소감을 쓰면서 비로소 볼 위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나 자신을 품고 격려하는, 진통을 겪으며 태어날 미래의 내 소설을 위한 눈물이었다. 또 뿌연 시야를 뚫고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이 곁으로 다가왔다.


오늘 밤은 빈농으로 살다 간 부모님 생각으로 하얗게 지새우게 될 것이다.


특별할 것 없는 반복된 일상의 언저리에서 작고 큰 일을 소설로 풀어내는 것은 멀고도 험한 일이다. 그때마다 내 자양분이 되어준 고향의 땅을 떠올리며 써내려갈 것이다.


걷고 걸었던 12년의 통학 길은 내게 책이었고 친구였다. 작은 소나무 숲, 저수지와 끝도 없이 긴 둑, 과수원길, 눈 쌓인 산야, 자연이 피워놓은 야생화와 잡풀들.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걸었고 그들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비포장도로의 풀풀 피어오르는 먼지 사이로 신기루 같은 아지랑이도 나의 벗이었다. 이제야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게 되어서 참 다행이다. 작고 초라한 능력이지만 그들을 품고 멀리 갈 것이다.


먼저 부족함이 많은 제 소설을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해주신 영남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깊이 인사드린다. 소설 입문에 함께 계셨던 이원섭 선생님, 조동선 선생님, 끝까지 가는 자가 이기는 것이라 성실함을 일깨워주신 이순원 선생님, 문학을 가슴으로 품게 해 주신 양진채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내일처럼 기뻐해준 새얼 식구들, 부디 앞으로도 질책과 응원의 말로 소설 쓰면서 두려움과 막막함이 찾아올 때 외롭지 않게 함께해주길 부탁드린다.


먼 곳에서 또는 가까운 곳에서 지켜봐주고 격려해주시던 나를 아는 이들이 있어 용기를 내 소설을 썼다. 그분들께도 감사드린다. 더욱 깊은 소설로 보답하겠다.


짧지 않은 기간 지켜봐주고 격려해준 남편과 가족, 친지들께 지면을 통해 고마움을 전한다.

 


<심사평>

 

안정감 있지만 구식문체의 아쉬움 남아


편집부에서 넘어온 작품은 모두 8편이었다. 이 가운데 나는 12월에 택배를 보내고 있었다’ ‘빅뱅클럽’ ‘깃발이 운다로 좁혀졌고, 세 편 모두 장단점이 있어 어느 작품을 쉽게 당선작으로 결정하기 어려웠다. 과거에 우리 두 사람은 어느 신문에서 만나 단 한 마디 말만 나누고 당선작을 결정한 적도 있지 않았던가.


나는 12월에 택배를 보내고 있었다는 따뜻한 마음이 전달되는 작품이었으나 치밀함과 치열성이 조금은 아쉬워서 망설이게 되었고, ‘빅뱅클럽은 참신한 편이며 문학성도 뛰어났으나 세계가 어리다는 한계가 지적되었다. ‘깃발이 운다는 안정되었다는 점은 있으나 그 안정성이 구식 문체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세 편 다 결점들을 근본적으로 척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겼다.


어느 한 편이냐는 선택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당선은 시작의 씨앗이니, 앞으로 어떤 미래를 만드느냐 하는 작업은 끝없는 자기 혁신을 요구하리라.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더욱 깊은 성찰과 연마를 거듭하여 대성하기를 빈다.


심사 : 오정희, 윤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