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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지오노 나무를 심은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한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

 

40여 년 전의 일이다. 나는 여행자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고산지대로 먼 여행을 떠났다. 그곳은 알프스 산맥이 프로방스 지방으로 뻗어 내린 아주 오래된 산악지대였다. 이 지역은 동남쪽과 남쪽으로는 시스테롱과 미라보 사이에 있는 뒤랑스 강의 중류를 경계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드롬 강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디까지 이르는 강의 상류가 그 끝이고, 서쪽으로는 콩타브네셍 평원과 방투 산의 산자락이 뻗어내린 곳을 그 경계로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곳은 바스잘프 지방의 북부 전부와 드롬 강의 남쪽 및 보클뤼즈 지방의 일부 작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나는 해발 1,200 ~ 1,300미터의 산악지대에 있는 헐벗고 단조로운 황무지를 향해 먼 도보여행을 떠났다. 그 곳엔 야생 라벤더 외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폭이 가장 넓은 곳을 가로질러 사흘을 걷고 나니 더없이 황폐한 지역이 나왔다. 나는 뼈대만 남은 버려진 마을 옆에 텐트를 쳤다. 마실 물이 전날부터 떨어져서 물을 찾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폐허가 되어 있기는 했지만 낡은 말법 집처럼 집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니 옛날엔 이곳에 샘이나 우물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과연 샘이 있긴 했지만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비바람에 사그라져 지붕이 없어져 버린 집 여섯 채, 그리고 종탑이 무너져 버린 작은 교회가 마치 사람들이 사는 마을 속에 있는 것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그곳엔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6월의 아름다운 날이었다. 그러나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나무라고는 없는 땅 위로 견디기 어려울 만큼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뼈대만 남은 집들 속으로 불어 닥치는 바람소리는 마치 짐승들이 먹는 것을 방해받았을 때 그러는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나는 텐트를 걷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부터 다섯 시간이나 더 걸어 보았어도 여전히 물을 찾을 수 없었고, 또 그럴 희망마저 보이지 않았다. 모든 곳이 똑같이 메말라 있었고 거친 풀들만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에서 작고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림자 같은 그 모습이 홀로 서 있는 나무의 둥치가 아닌가 착각했다. 그것을 향해 걸어가 보니 한 양치기가 있었다. 그의 곁에는 양 30여 마리가 뜨거운 땅 위에 누워 쉬고 있었다.

 

그는 물병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고원의 우묵한 곳에 있는 양의 우리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는 간단한 도르래로 깊은 천연의 우물에서 아주 좋은 물을 길어 올렸다. 그 사람은 말이 거의 없었는데, 그것은 고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차 있고 확신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이런 황무지에 그런 사람이 살고 있다니 뜻밖이었다.

 

그 양치기는 오두막이 아니라 돌로 만든 제대로 된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집의 모습으로 보아 그가 이곳에 와서 망가진 집을 어떻게 혼자 힘으로 되살려 놓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지붕은 튼튼했고 물이 새는 곳도 없었다. 바람이 기와를 두드리면서 내는 소리가 마치 바닷가의 파도 소리 같았다.

살림살이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릇은 깨끗했고, 마루는 잘 닦여 있었으며, 총도 잘 손질되어 있었다. 불 위에서 수프가 끓고 있었다. 그때서야 난는 그가 산뜻하게 면도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옷에는 단추가 단단히 달려 있으며, 눈에 띄지 않게 옷이 세심하게 기워져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게 수프를 떠 주었다. 식사가 끝난 뒤 내가 담배쌈지를 건네자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개 또한 주인처럼 조용했으며, 살살대지 않으면서도 상냥하게 굴었다.

 

나는 그 집에서 그날 밤을 묵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 해도 하루 하고 반을 더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지역에는 마을이 드물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마을의 사정도 잘 알고 있었다. 이곳 고산지대의 기슭에는 너덧 마을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마을들은 마찻길이 끝나는 곳의 떡갈나무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는 숯을 만드는 나무꾼들이 살고 있었다.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곳이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견디기 어려운 날씨 속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서로 밀치며 이기심만 키워갈 뿐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곳을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부질없는 욕심만 키워 가고 있었다.

남자들은 마차에 숯을 싣고 도시로 갔다 돌아오곤 했다. 아무리 굳센 사람이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좌절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여인들의 마음속에서도 불만이 끓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놓고 경쟁했다. 숯을 파는 것을 두고, 교회에서 앉는 자리를 놓고서도 경쟁했다. 선한(美德) 일을 놓고, 악한 일(惡德)을 놓고, 그리고 선과 악이 뒤섞인 것들을 놓고 서로 다투었다. 바람 또한 쉬지 않고 신경을 자극했다. 그래서 자살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여러 정신병마저 유행하여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양치기는 조그만 자루를 가지고 와서 도토리 한 무더기를 탁자 위에 쏟아 놓았다. 그는 도토리 하나하나를 아주 주의 깊게 살펴보더니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따로 골라 놓았다. 나는 파이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도와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가 그 일에 기울이는 정성을 보고 나는 더 고집 할 수 없었다. 우리의 대화는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아주 굵은 도토리 한 무더기를 모으더니 그것들을 열 개씩 세어 나누었다. 그러면서 그는 도토리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고 그 중에서도 작은 것이나 금이 간 것들을 다시 골라냈다. 그렇게 해서 상태가 완벽한 도토리가 100개 모아졌을 때 그는 일을 멈추었고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이 사람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평화로웠다. 다음 날에도 나는 그의 집에서 하루 더 머물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무엇도 그의 마음을 흐트러뜨릴 수 없다는 인상을 나는 받았다. 반드시 하루 더 쉬어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호기심을 느꼈고 그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그는 우리에서 양떼를 몰고 풀밭으로 갔다. 떠나기 전에 그는 정성껏 골라 세어 놓은 도토리 자루를 물통에 담갔다.

 

나는 그가 지팡이 대신 길이가 약 1.5미터 정도 되고 굵기가 엄지손가락만한 쇠막대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걸으며 쉬며 그가 가는 길을 따라갔다. 양들의 풀밭은 작은 골짜기에 있었다. 그는 양 떼를 개에게 돌보도록 맡기고는 내가 있는 곳을 향해 올라왔다. 내 맘대로 올라왔다고 꾸짖으러 오는 것 같아 두려웠으나 그게 아니었다. 그가 가는 길에 내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나에게 달리 할 일이 없으면 자기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거기서 산등성이를 향해 200미터쯤 더 올라갔다.

그가 가려고 한 곳에 이르자 그는 땅에 쇠막대기를 박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구멍을 파고는 그 안에 도토리를 심고 다시 덮었다. 그는 떡갈나무를 심고 있었다. 나는 그곳이 그의 땅이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누구의 땅인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그곳이 공유지이거나 아니면 그런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는 그 땅이 누구의 것인지 관심조차 없었다. 그는 아주 정성스럽게 도토리 100개를 심었다.

그리고 점심을 먹은 뒤 그는 다시 도토리를 고르기 시작했다. 내가 끈질기게 물어보자 그는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주었다. 그는 3년 전부터 이 황무지에 홀로 나무를 심어왔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도토리 10만개를 심었다. 그리고 10만개의 씨에서 2만 그루의 싹이 나왔다. 그는 들쥐나 산토끼들이 나무를 갉아먹거나 신의 뜻에 따라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경우, 2만 그루 가운데 또 절반가량이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예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이 땅에 떡갈나무 1만 그루가 살아남아 자라게 될 것이다.

그제야 나는 그의 나이가 궁금했다. 그는 분명히 쉰살이 넘어 보였다. 그는 자신이 나이가 쉰다섯 살이라고 했다. 이름은 엘제아르 부피에였다. 지난날 그는 평야지대에 농장을 하나 가지고 자신의 꿈의 가꾸며 살았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고 나서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 뒤 그는 고독 속으로 물러나 양들과 개와 더불어 한가롭게 살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그는 나무가 없기 때문에 이곳의 땅이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달리 해야 할 중요한 일도 없었으므로 이런 상태를 바꾸어 보기로 결심했다고 덧붙였다.

그 당시 나는 젊지만 혼자 살고 있었으므로 다른 고독한 사람들의 영혼에 섬세하게 다가갈 줄 알았다. 그런데도 나는 한 가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젊은 나이 탓에 나 자신과 관계된 일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을 마음에 두고 미래를 상상해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30년 후면 떡갈나무 1만 그루가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만일 하느님이 30년 후까지 자신을 살아 있게 해 주신다며, 그동안에도 나무를 아주 많이 심을 것이기 때문에 이 1만 그루의 나무는 바다의 물 한 방울과 같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벌써부터 너도밤나무 재배법을 연구해 오고 있었으며, 그의 집 근처에서 어린 묘목을 기르고 있었다. 양들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쳐 놓았는데, 묘목들이 아주 아름다웠다. 그는 또한 땅 표면에서 몇 미터 아래 습기가 고여 있을 것 같은 골짜기에는 자작나무를 심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 날 우리는 헤어졌다.

 

이듬해인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나는 5년 동안 전쟁터에서 싸웠다. 보병이었던 나는 나무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사실 그 옛날의 일은 나에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하나의 이야깃거리나 우표 수집 같은 것쯤으로 여겨 잊어버리고 있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군복무를 마치고 받은 아주 적은 제대 수당과 조금이라도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는 강한 욕망밖에 없었다. 황무지로 가는 길을 다시 찾아 나섰을 때 나에게는 오직 그 생각밖에 없었다.

 

그곳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황폐한 마을 너머 멀리 회색빛 안개 같은 것이 융단처럼 산등성이를 덮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여기 오기 전날부터 나무를 심던 그 양치기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떡갈나무 1만 그루라면 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을거야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죽는 사람을 너무 많이 보아서 엘제아르 부피에도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20대의 나이에는 50대의 늙은이란 죽는 것 말고는 별로 할 일이 없는 사람들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그는 더 원기 왕성해 보였다. 그는 생업도 바꾸었다. 양들을 네 마리만 남기고 대신 100여 통의 벌을 치고 있었다. 양들이 어린나무들을 해쳤기 때문에 치워 버렸던 것이다. 그동안 그는 전쟁 때문에 불안을 느끼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흔들리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계속 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1910년에 심은 떡갈나무들은 그때 열 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무들은 나보다, 엘제아르 부피에보다 더 높이 자라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말문이 막혔다. 엘제야르 부피에도 말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말없이 그의 숲 속을 거닐며 하루를 보냈다. 숲은 세 구역으로 되어 있었는데, 가장 넓은 곳은 폭이 11킬로미터나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아무런 기술적인 장비도 갖추지 못한 오직 한 사람의 영혼과 손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니, 인간이란 파괴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는 하느님처럼 유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피에는 자기 뜻을 꾸준히 실천해 가고 있었다. 내 어깨에 와 닿는 너도밤나무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떡갈나무는 들쥐나 토끼들에게 갉아먹힐 나이를 지나 빽빽하게 자라나 있었다. 만약 신이 이 창조물을 파괴하려는 뜻을 갖고 있다면 앞으로는 태풍의 힘을 빌려야 할 것이다.

그는 훌륭한 자작나무 숲도 보여 주었다. 5년 전, 그러니까 1915년 내가 베르됭에서 싸우던 시기에 심은 나무들이었다. 땅 속에 습기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골짜기마다 자작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자작나무들은 젊은이처럼 부드러웠고 아주 튼튼하게 서 있었다.



창조란 꼬리를 물고 새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엘제아르 부피에는 그런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주 단순하게 자신이 할 일을 고집스럽게 해 나갈 뿐이었다. 마을로 다시 내려오다가 나는 개울에 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한 그 개울은 언제나 말라 있었다. 자연이 그렇게 멋진 변화를 잇달아 만들어 내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이 말라붙은 개울에도 물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앞서 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 말했던 폐허가 된 몇몇 마을들은 옛 갈로 로망의 터전 위에 세워진 것인데, 아직도 그 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래서 한 때 고고학자들이 이곳에 와서 발굴 작업을 하다가 낚싯바늘을 찾아내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는 물을 조금 얻기 위해서도 물받이 저수통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람도 씨앗들을 퍼뜨려 주었다. 물이 다시 나타나자 그와 함께 버드나무와 갈대가, 풀밭과 기름진 땅이, 꽃들이 그리고 삶의 이유 같은 것들이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는 아주 천천히 일어났기 때문에 습관처럼 익숙해져서 사람들에게 아무런 놀라움도 주지 않았다. 산토끼나 apt돼지들을 잡으려고 이 적막한 산속으로 올라온 사냥꾼들은 작은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으니, 그것을 그저 땅이 자연스럽게 부리는 변덕 탓이라고만 여겼다. 그래서 아무도 부피에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가 한 일이라고 의심했다면 그의 일에 훼방을 놓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의심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나 관리인들이나 누군들 그처럼 고결하고 훌륭한 일을 그렇게 고집스럽게 계속할 수 있다고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1920년 이래 나는 1년에 한 번씩은 엘제아르 부피에를 찾아갔다. 그동안 나는 그가 실의에 빠지거나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을 전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가 겪은 시련을 잘 아실 것이다. 나는 그가 겪었을 좌절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야 했을 것이고, 그러한 열정이 확실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절망과 싸워야 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한때 엘제아르 부피에는 1년 동안에 1만 그루가 넘는 단풍나무를 심었으나 모두 죽어 버린 일도 있었다. 그래서 그 다음 해에는 단풍나무를 포기하고 떡갈나무들보다 더 잘 자라는 너도밤나무를 심었다.

하지만 이런 뛰어난 인격을 가진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가 홀로 철저한 고독 속에서 일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는 너무나도 외롭게 살았기 때문에 말년에는 말하는 습관을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아니, 어쩌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1933년엔 숲을 보고 깜짝 놀란 산림감시원이 엘제아르 부피에를 찾아왔다. 이 관리인은 천연숲이 자라는 것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르니 집밖에서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이 노인에게 경고했다. 그 관리는 순진하게도 숲이 혼자 저절로 자라는 것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그 무렵에 엘제아르 부피에는 집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너도밤나무를 심으로 다니곤 했다. 그때 그는 이미 일흔다섯 살이었으므로 매일 오고 가는 수고를 덜기 위해 나무를 심는 곳에 조그만 돌집을 하나 지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 해에 그 집을 지었다.

 

1935년에는 진짜 정부 대표단이 천연 숲을 시찰하러 왔다. 산림청의 고위관리와 국회의원, 전문가들이 함께 왔다. 그들은 쓸데없는 말들을 많이 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하기로 결정했는데, 그러나 다행히도 단 한 가지 유익한 일을 빼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즉 그 숲을 나라의 관리 아래 두고 나무를 베어 숯을 굽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그들 역시 건강이 넘치는 젊은 나무들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름다운 숲은 국회의원까지도 사로잡았던 것이다.

대표단의 산림전문가들 가운데는 내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 숲의 비밀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 우리 두 사람은 엘제아르 부피에를 찾아갔다. 부피에는 대표단이 시찰한 지점에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한창 일하고 있었다. 산림전문가인 내 친구는 역시 그다웠다. 그는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볼 줄 알았고 입을 다물 줄도 알았다. 나는 선물로 가져간 달걀 몇 개를 내놓았다. 우리는 함께 점심을 나누어 먹고 말없이 경치를 바라보면서 몇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지나온 곳은 6~7미터 높이의 나무들로 뒤덮여 있었다. 1913년에 보았던 이곳의 모습이 생각났다. 황무지가 떠올랐다…….

평화롭고 규칙적인 일, 고산지대의 살아 있는 공기, 소박한 음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의 평화가 이 노인에게 놀라우리만큼 훌륭한 건강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하느님이 보내준 일꾼이었다. 나는 그가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땅을 나무로 덮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떠나기 전에 내 친구는 노인에게 이곳의 토양에 알맞을 것 같은 몇몇 나무의 종류에 관해 짧게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내 친구는 당연히 그분은 나무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 생각이 계속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는지 내 친구는 한 시간쯤 걷고 나서 다시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나무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알아. 그는 행복해질 수 있는 멋진 방법을 찾은 사람이야라고,

이 산림 전문가 덕분에 숲만이 아니라 엘제아르 부피에의 행복도 지켜질 수 있었다. 내 친구는 숲을 보호하기 위해 산림감시원 세 명을 임명했고 , 이들에게 겁을 주어서 숯을 굽는 사람들이 뇌물을 주어도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일러두었던 것이다. 엘제아르 부피에의 숲은 1939년에 일어난 2차 세계대전 때에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그 당시에는 많은 자동차들이 목탄(木炭)가스로 움직였기 때문에 나무가 항상 모자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엘제아르 부피에가 1910년에 심은 떡갈나무들을 베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숲은 도로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경제적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숲을 포기했다. 그러나 부피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는 그곳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평화롭게 자기 일만을 묵묵히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1914년의 전쟁에 마음을 쓰지 않았던 것처럼 1939년의 전쟁에도 마음을 쓰지 않고 자기 일을 계속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엘제아르 부피에를 만난 것은 19456월이었다. 그때 그는 여든일곱 살이었다. 나는 그 옛날의 황무지로 가는 길을 다시 찾아갔다. 전쟁이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었는데도 이제는 뒤랑스 강 계곡에서 산으로 버스가 다니고 있었다. 나는 옛날 내가 걸어갔던 곳이 어디인지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었다. 버스가 비교적 빨리 달렸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곳은 처음 와보는 것 같았다. 마을 이름을 듣고 나서야 내가 그 옛날의 황량했던 땅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베르공 마을에서 버스를 내렸다.

1913년에는 이 마을에 열 집인가 열두 집이 있었고, 사람이라고는 단 세 명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난폭했고 서로 미워했으며, 덫으로 사냥을 해서 먹고 살았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거의 원시인에 가까운 삶이었다. 버려진 집들을 쐐기풀이 덮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죽음을 기다리는 것밖에 희망이 없었다. 하물며 선한 일을 하며 사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공기마저도 달라져 있었다. 옛날의 메마르고 거친 바람 대신에 향긋한 냄새를 실은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 같은 것이 저 높은 언덕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숲속에서 부는 바람소리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못 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진짜 물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만들어진 샘에 물이 넘쳐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그 샘 곁에 이미 네 살쯤 되어 보이는 보리수가 심어져 있는 것이었다. 벌써 잎이 무성하게 자란 이 나무는 분명히 부활의 한 상징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더구나 베르공 마을에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져야만 할 수 있는 공동작업을 한 흔적이 뚜렷이 보였다. 희망이 이곳에 다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망가진 집과 담을 모두 허물어 버리고 집 다섯 채를 새로 지었다.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의 수는 스물여덟 명으로 늘어났는데, 그 가운데는 젊은 부부도 네 쌍이 끼어 있었다. 산뜻하게 벽을 바른 새 집들이 채소밭에 둘러싸여 있었다. 채소밭에는 양배추와, 장미, 파와 금어초, 셀러리, 아네모네 등 채소와 꽃들이 어울려 가지런히 자라고 있었다. 그곳은 사람들이 살고 싶은 마을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나는 다시 조금 더 걸어갔다. 이제 막 전쟁이 끝난 터라 그곳은 아직은 삶을 활짝 꽃피우지 못하고 있었지만, 라자로는 이미 무덤 밖에 나와 있었다. 나지막한 산기슭에는 보리와 호밀이 자라고 있었고, 저 아래 좁은 골짜기에는 풀밭이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이 고장 전체가 건강과 번영으로 다시 빛나기까지는 그로부터 8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1913년에 보았던 폐허의 땅 위에는 잘 단장된 아담하고 깨끗한 농가들이 들어서 있어서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비와 눈이 숲속으로 스며들어 옛날에 말라 버렸던 샘들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샘물로 물길을 만들었다. 단풍나무 숲 속에 있는 농장들은 모두 샘을 갖고 있었는데, 맑은 샘물이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싱싱한 박하 풀잎 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마을들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땅값이 비싼 평야지대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 젊음과 활력과 모험정신을 가져다주었다. 건강한 남자와 여자들, 그리고 밝은 웃음을 터뜨리며 시골 축제를 즐길 줄 아는 소년 소녀들을 길에서 만날 수 있었다. 즐겁게 살아가게 된 뒤로 몰라보게 달라진 옛 주민들과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을 합쳐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엘제아르 부피에 덕분에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한 사람의 오직 정신적, 육체적 힘만으로 황무지에서 이런 가나안 땅을 이룩해 낼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힘이란 참으로 놀랍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위대한 혼과 고결한 인격을 지닌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과 열정이 없었던들 이러한 결과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엘제아르 부피에, 그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신에게나 어울릴 이런 일을 훌륭하게 해낸 배운 것 없는 늙은 농부에게 크나큰 존경심을 품게 된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1947년 바농 요양원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장 지오노(1895-1970)

1895년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 마노스크에서 구두를 수선하는 아버지 앙뜨완느 지오노와 세탁공인 어머니 폴린느 사이에서 태어났다. 지오노의 할아버지 장 바티스트 지오노는 이탈리아 피에몽테 지역의 카르보나로(이탈리아 독립과 혁명을 위한 비밀결사조직)당원이었고, 1831년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지오노에게 할아버지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지오노는 마노스크 중학교에서 학업성적이 우수하였지만, 아버지의 병환으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1902-1911) 은행에 취직하고, 이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스와 라틴 고전, 프랑스 고전, 단테, 세르반테스, 세익스피스 등을 깊이 있게 읽는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전쟁의 참화를 몸소 겪은 뒤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전쟁 반대, 무절제한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 참된 행복의 추구, 자연과의 조화 등이 그의 작품의 주제가 되어있다. 지오노의 글에는 뚜렷한 도덕적인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참된 삶의 목표를 찾는 것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1953년 미국잡지 리더스 다이제트스트지에 처음 발표 된 후 1954년 미국의보그지에 의해희망을 심고 행복을 가꾼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책으로 출판되었다. 장지오노는 그가 살던 오트 프로방스이 고산지대를 여행하다가 한 특별한 사람을 만났다. 혼자 살면서 해마다 꾸준히 나무를 심고 가꾸는 한 양치기였다. 그는 홀로 묵묵히 나무를 심어 황폐한 땅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이 소설은 어느 소박하고 겸손한 사람이 지구의 표면을 바꾸어 놓은 실제 이야기를 문학 작품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는 첫 원고를 쓴 후 약 20년 동안에 걸쳐 이 글을 다듬고 또 다듬어 작품을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 지오노는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무를 사랑하게 하기 위해, 더 정확히 말하면 나무 심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 이글을 썼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