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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누룩을 깎다 / 김해숙

 

남자가 항아리 뚜껑을 열고 베보자기를 푼다. 항아리 속에는 밥알이 둥둥 떠 있다. 남자는 항아리 안의 물을 퍼 솥에 넣고 걸쭉해질 때까지 끓인다. 돌복숭아 줄기와 뿌리를 넣고 오전 내내 만든 단술이다. 남자는 단술을 큰 밥그릇에 떠 꿀을 넣는다. 어릴 적 비쩍 마른 남자에게 아버지가 해 주었던 단술이 떠오른다. 남자는 바닥에 누워 있는 아들을 흔든다. 아들은 남자 손이 닿자 이마를 찡그린다. 남자는 그런 아들을 못 본 체 한다. 멱살이라도 잡고 싶지만 이십 년 만에 재회한 터라 참고 있다. 

“마셔라, 단술이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이틀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았잖아?”

“그냥 두라고요.”

“이거 마시고 가라.”

“안 간다고, 안 간다고. 안 들려요?”

“가. 이제 와서 나랑 살 이유가 있어?”

“살 거라고, 그냥 팍 눌러 살 거라고요!”

남자가 입을 닫는다. 아들의 험한 말을 들을 때마다 한 쪽 가슴이 먹먹하다. 아들은 처음, 오랜만에 만난 남자를 낯설어 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점점 변했다. 종일 방안에 누워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남자가 타박을 하거나 말을 걸면 시위하는 사람처럼 목에 핏대를 세워 날카롭게 짖었다. 

아들이 온 뒤로 남자는 마음이 편치 않다. 서울에 살던 아들이 갑자기 시골 공방을 찾아온 것도, 며칠 삭힌 밥알처럼 힘이 하나도 없으면서 톡 쏘아 대는 것도 싫다. 아들은 이제 밥도 먹지 않는다. 손도 대지 않은 음식을 치우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밥 대신 단술을 먹이려 해도 먹지 않고 하루 종일 남자의 행동을 주시한다. 남자는 감시당하는 것 같아 불쾌하지만 약초를 우려 낸 찌꺼기를 발로 짓이기며 화를 삭인다. 아들은 경계하고 낯설어하는 눈빛에서 점점 살기로 변해간다. 투명한 갈색 눈동자와 양쪽으로 가늘게 찢어진 매의 눈이다. 남자는 시간이 갈수록 아들과 지내는 게 고단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남자가 말을 잇지 못한다. 화이트보드에 ‘酒’를 써 놓고 술의 어원에 대해 설명을 하려던 참이었다. 덩치가 큰 아들이 불쑥 들어와 강의실 제일 앞자리에 앉는다. 아들은 정면에 시선이 고정된 사람처럼 남자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 모습에 남자는 할 말을 잃는다. 농업기술센터 과장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남자는 굳이 봄 학기 강좌를 열지 않았을 것이다. 과장은 손을 비비꼬며 지원금이며 혜택, 실적 따위의 말을 내뱉었다. 남자는 곧 출시될 술이 농업기술센터의 지원을 받은 터라 거절하지 못했다. 그래서 군민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전통주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되었다. 남자가 어물거리자 개강 첫날이라 농업기술센터 소장이 인사하러 왔다며 소개 시간을 달라고 한다. 남자는 그제야 술의 어원을 읊조리며 자리를 비킨다. 남자 목소리는 소장의 인사와 박수 소리에 묻힌다.

오전 수업이 끝났다. 남자는 오전 내내 술의 정의와 어원, 밑술을 담그는 여덟 가지 재료와 누룩의 종류를 순서 없이 지껄였다. 문헌을 찾아 정리한 책자가 있었다. 그 책만 봐도 순서가 헷갈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아들을 본 순간 술독에 푹 가라앉은 지게미가 됐다. 남자는 차를 마시자는 수강생의 말도 무시하고 곧장 휴게실로 걸어간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들이 그 뒤를 따른다. 남자가 흐느적거리며 방향 감각을 잃은 것처럼 걷는 반면 아들은 곧은 일자로 걷는다. 남자는 입술을 꽉 깨물고 큰 소리가 새 나가지 않도록 아들을 다그친다.

“도대체 왜 그러냐?”

“뭘요? 난 여기서 살 거라고요.”

“이미 넌 네 아버지랑 살잖아?”

“당신도 내 아버지잖아? 아니 아버지였잖아요!”

“너랑 이러고 싶지 않다. 돌아가.”

남자가 돌, 아, 가, 라는 말에 잔뜩 힘을 준다. 반복되는 입씨름에 지친다.

둘은 쉬는 시간 내내 침묵한다. 쉬는 시간이 끝나자 아들이 먼저 휴게실 문을 열고 나선다. 남자가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른다. 아들 뒤통수가 군데군데 비어 있다. 남자는 문득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손을 뻗었다 다시 내린다. 아들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어 피한다. 가만히 두 손을 그러쥔다.

통밀을 분쇄기에 넣자 수강생들이 그 앞으로 몰린다. 몇몇은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실습하라고 지시해도 사진을 찍는 탓에 몇 번씩 수업이 중단된다. 남자는 분쇄된 밀을 체로 쳐 밀가루를 제거하고 밀기울만 취한다. 빨간 고무통에 그것을 담고 살짝 물을 뿌린다. 밀기울과 물의 비율이 팔 대 이라고 알려 준다. 남자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밀기울이 손바닥에 엉켜 붙지 않도록 바슬바슬하게 반죽하라고 이른다. 남자가 먼저 시범을 보이자 웅성거리며 조별로 실습에 들어간다. 다섯 명씩 4개 조다. 남자는 반죽이 다 되자 누룩 틀에 베보자기를 올려놓고 반죽을 채운다. 베보자기 끝을 오므려 감자 갑자기 아들이 일어선다. 아들은 누룩 틀을 바닥에 내려놓고 발뒤꿈치로 꾹꾹 눌러 밟는다. 그 모습을 보자 오래 전 아들 모습이 떠오른다.

남자와 아들은 좁은 공방에 옹송그리고 앉아 누룩을 빚고, 발로 밟았었다. 누룩 틀 안에 담긴 작은 발 때문에 남자 눈이 흐려졌다. 남자는 울컥거리는 마음을 누르고 누룩을 채웠다. 아들은 그 틀에 올라갔다. 심란한 남자 마음과 달리 아들은 소풍을 가는 것처럼 들떠 있었다. 어떻게든 아내와 아들을 잡아 보려 했지만 더 이상 아내는 남자를 믿지 않았다. 누룩을 띄우는 25도와 30도의 일정한 온도처럼 아내는 미지근한 상태로 남자를 대했다. 그런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겠다고 했다. 남자는 누룩을 빚는 순간에도 아내와 아들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누룩은 모든 술을 빚을 때 다 필요해. 누룩에 따라 술의 맛과 향이 달라진단다. 되도록 단단히 디뎌라.”

“저, 내일 서울 간대요.”

“…….”

“이제 안 올 거래요.”

“…….”

“진짜 안 올 거래요. 엄마가 그랬어요.”

“누룩이 발효되면 좋은 균들이 커서 술을 만들지. 그래서 난 술을 빚는 게 아니라 키운다고 생각한단다. 잘 커줘서 고맙다.”

“아빠 몸에 두드러기가 났어요. 두드러기도 키우는 거예요?”

아들 말에 남자가 당황한다. 양쪽 팔목과 목, 얼굴이 가렵다. 남자는 눈에 띄는 곳마다 ‘절분초’ 생즙을 발랐다. 생즙을 바른 곳에 두드러기가 나면 아내는 집을 나가겠다고 해도 다시 주저앉았다. 남자는 그럴 때면 두드러기가 난 쪽을 더 긁어 피가 맺히게 했다. 남자는 이번에도 아내의 환심을 사기 위해 생즙을 발랐고, 온 몸에 두드러기를 키웠다. 그러나 아내는 더 이상 남자에게 오지 않았다. ‘절분초 뿌리를 말려 차로 마시면 통증을 잡아 주지만 생즙은 몸에 그냥 바르면 독이 퍼진다’ 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였다. 남자는 약용약주를 만들기 위해 약초를 연구하다 유럽에서 거지들이 환심을 사기 위해 절분초를 발랐던 걸 알게 돼 따라 했다. 아들은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고물고물한 손으로 베보자기를 벗겨 내고 누룩을 고석 위에 늘여놓았다. 남자는 그 위에 다시 고석을 덮고 아들이 발로 밟은 누룩들을 켜켜이 쌓았다. 

남자는 마음이 약했던 아내를 어떻게든 잡아 보려 했지만 끝내는 떠나보내야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내 대신 아들이 남자 곁에 머물려고 한다. 부의주처럼 아내와 아들이 둥둥 떠오른다. 남자가 고개를 가로 젓는다. 

남자가 이불 속으로 온도계를 집어넣는다. 30도. 이불을 걷어내자 검은 봉지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봉지를 열자 쑥 향과 알코올 냄새가 진동한다. 축축하게 젖은 누룩은 백곡균이 피었다. 가운데 쪽은 백색이 더 짙어 메밀밭으로 보인다. 남자가 누룩 끝을 오른쪽 검지로 콕 찔러본다. 아직 겉은 말랑하지만 안은 조금 단단하다. 남자는 봉지를 완전히 벗겨 창문틀에 올려놓고 수분을 말린다. 다 마르자 누룩을 봉지에 싸 다시 온돌 매트 안에 넣는다. 수업 시간에 빚은 누룩이다. 곰팡이가 어떻게 피는지 살피라고 나눠줬는데 아들은 가지고 와서 황토방에 그냥 내던져 두었다. 남자는 아들 대신 누룩을 띄웠다. 아들 얼굴에 흑곡균이 피어 있다. 

“얼굴빛이 왜 그리 검냐?”

“신경 쓰지 마세요.”

“봄볕이 좋다.”

“…….”

“서른이면, 서른이라…… 뭐라도 해야 하지 않니?”

“귀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왜요? 제가 귀찮으세요? 그런 거예요?”

“그게 아니라…….”

“씨발, 이제 와서 왜 아버지 행세예요?”

남자가 참지 못하고 아들 뺨을 후려친다. 손바닥에 아들이 내뿜는 분노가 그대로 전달된다. 손이 녹아버릴 것 같다. 아들 얼굴에 남자 손이 그대로 찍혔다. 고개를 반쯤 돌린 아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놀란 남자가 어깨를 잡자 아들이 저지한다. 잡힌 손목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위태롭다. 아들에게서 온갖 누룩꽃이 한꺼번에 피어오른다. 곰팡이 꽃으로 가려진 아들 얼굴이 사라진다, 일그러진다. 남자는 심하게 일그러진 아들의 얼굴을 보고 제 정신이 돌아온다.

아들이 무겁게 입을 연다.

“원망 안하세요?”

“뭘 말이냐?”

“어머니요.”

“…….”

“원망 안 하시냐고요?”

“…….”

“또 입을 다무시군요. 말을 하세요. 말을!”

아들이 매몰차게 황토방을 나선다. 남자는 아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욕을 들었을 때보다 얼굴이 더 화끈거린다. 남자를 베보자기 안에 넣고 눌러 짜는 것처럼 숨이 막힌다. 

남자는 허전한 마음에 이제 막 익기 시작한 술 항아리의 베보자기를 벗겨낸다. 항아리에서 토도독 소리가 난다. 술을 잘 빚기 위해서는 효모가 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 효모에 의해 발생되는 이산화탄소로 발효 상태를 알 수 있다. 뚜껑을 열어보니 죽으로 빚은 밑술 항아리다. 밑술 재료에 따라 항아리 안은 발효되는 소리도 달라진다. 술을 빚을 때면 밑술에서 나는 항아리 소리가 정말 듣기 좋았다. 토도독 소리도 나고 고두밥으로 빚은 밑술에서는 소나기 소리도 들린다. 때로는 할 말이 있어도 꾹꾹 참아대던 아내의 한숨 소리가 들릴 때도 있다. 남자는 술이 익으면서 내는 소리에 취할 때도 있다. 

남자는 아내를 한 번도 원망해 본 적이 없다. 그냥 자신의 무능함이 아내를 지치게 했고, 빼앗기듯 아내를 놓쳤다. 아내는 마치 남자가 곰팡이라도 된 것처럼 질색하고 남자의 아이를 데리고 가버렸다. 아내는 남자가 술을 빚을 때마다 누룩곰팡이가 좋은 효모라도 해도 믿지 않았다. 곰팡이는 흰색, 노란색, 검은색 이외에도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곰팡이 등 종류도 다양하고, 서로 갖고 있는 능력도 조금씩 다르다. 남자는 아내에게 좋은 곰팡이를 얻는 것이 좋은 술을 얻는 비법이라 누누이 말해줘도 아내는 듣지 않았다. 아내는 누룩꽃이 하얗게 피어도 소리를 질렀고, 잡균이 번식해 검은 곰팡이가 피면 아예 황토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내는 남자에게 누룩을 띄우는 온도 같은 존재였다. 남자는 그런 아내를 품을 때마다 아내에게서 나오는 젖산균을 다 죽이는 느낌이었다. 아내는 남자의 친구를 사랑했지만, 그의 결벽증으로 인해 잠시 남자에게 왔다. 남자는 어떻게든 자신이 좋아했던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내의 겉은 미지근해도 마음은 얼음장 같았다. 남자는 그런 아내를 모른 척 했지만 순간순간 차갑게 느껴지면 아내를 폭력으로 제압하며 아내의 틈을 비집고 들어갔었다.

남자가 기술센터의 지원을 받아 만든 ‘쾌담주’가 내년에 출시된다. 남자는 홍화, 구기자, 절분초 등 이 지역에서 나는 약초로 청주를 만들 예정이다. 술 이름도 남자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이미 남자가 사는 군에 여덟 가지 약초로 만든 ‘팔목주’나 당귀와 산다화 등 향이 독특한 한약재를 넣어 빚은 ‘진고색주’를 만든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재료와 비법을 공개하기 꺼려했기 때문에 시판용으로 나오지 않는다. 자꾸만 기술센터에서 특별한 비법을 찾으라고 하는 게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설레기도 한다. 남자는 공방에 진열된 술병을 하나하나 쓰다듬는다. 

마을 입구에 검정색 자동차가 들어선다. 남자는 마당에 나와 자동차가 멈춘 곳을 쳐다본다. 자동차가 멈추고 오랜 시간이 지나자 여자가 내린다. 여자는 공방 입구에 세워진 나무 간판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린다. 옆에 있는 강아지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여자는 고개를 숙인 뒤 천천히 남자에게 걸어온다.

아내다.

남자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아내는 절분초의 근생엽처럼 얼굴이 둥글었고, 팔다리는 가느다랗고 길쭉했다. 지금 남자 앞에 가까이 있는 아내의 얼굴은 맵쌀을 분쇄한 것처럼 희멀겋다. 게다가 남자와 살았을 때보다 온기를 더 잃어버린 듯하다. 아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자를 훑는다. 아내는 무심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눈빛은 재빠르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남자는 작업복 바지에 묻은 밀가루 얼룩을 검지로 문지른다. 아내가 말을 건다. 말은 남자에게 하지만 시선은 아들이 있는 황토방에 가 있다.

“돌려보내.”

목소리는 미지근한 온도, 그대로다.

“데려 가.”

“돌려보내. 제발…….”

“가라고 해도 안 가. 당신이 데려 가. 이제 와 서로 엉키는 거 나도 싫어.”

“밀어내. 당신이…….”

남자는 대답 대신 아내의 눈빛을 살핀다. 아내는 입을 닫고 말없이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일부러 어깨가 흔들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낸다. 한숨 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오기가 붙은 얼굴에 기가 질린다. 아내 모습에서 아들의 얼굴과 언제나 거들먹거리며 휘청휘청 걸었던 아내의 남편이 겹쳐진다. 셋의 얼굴이 합해지자 큰 키에 단단한 체구, 회색 빛 쥐를 닮은 눈빛이 남자를 보고 있다. 남자는 몸을 긁기 시작한다. 작업복 사이로 드러난 팔목과 다리, 얼굴이 가렵다. 남자는 짧게 깎인 손톱으로 여기저기 긁는다. 아내가 콧방귀를 뀐다.

“아직도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런 거 아냐.”

“제발, 언제까지 날 속일 셈이야? 예전에 한 것도 모자라 이십 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그런 짓이냐고?”

“그런 거 아니라고. 난 그저 가려워서 긁는 거라고.”

“왜 또 해 보시지. 예전처럼 날 속이려고 절분초 생즙을 발라보시라고.”

“…….”

“내가 미쳤었어. 그런 당신을 잠시라도 믿었던 게 후회스러워. 거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 상처만 보면 발길을 돌렸지.”

남자는 할 말이 없다. 그때는 어떻게든 아내를 붙잡고 싶었다. 남자는 아내를 사랑했다. 친구의 여자였던 아내를…… 2남자는 친구의 여자를 빼앗은 흔한 사람이다. 그러나 남자는 삼킨 말이 많다. 사랑이라는 게, 윤리라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처음에는 죄책감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희한한 상황은 금방 익숙해졌다. 그것을 긁어내거나 깎아낼 수 없었다. 남자는 반죽을 단단하게 뭉쳐 누룩 틀에 집어넣듯 자신을 다독이며 살았다. 헛된 욕망일지라도 남자는 그런 것들을 개의치 않았다. 다만 아내가 남자에게 왔을 때 완전히 소유할 수 없었던 게 후회스러웠다. 남자는 술을 빚고, 술이 키워지는 동안 아들을 키울 수 없었던 시간들도 잊었다. 아내가 떠나버린 마당에 아무리 핏줄이라 해도 남에게 키, 워, 지, 기 때문에 남자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솟구쳐 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다.

“제발, 데려 가. 가 버리라고!”

“자기 자식하나 책임지지 못하는데 이 많은 술을 빚어서 뭐해? 아, 맞다. 당신은 술을 키운다고 했지? 그래 당신 자식은 잘 키웠나?”

“키우지 못하게 한 건 당신이야.”

“키울 수 없게 만든 건 당신이야.”

남자는 아들처럼 아내도 후려치고 싶다. 실컷 두들겨 패서 입을 다물게 하고 내쫓고 싶다. 남자는 목울대로 침을 삼키며 침묵한다. 일이 커지거나 아들이 끼어들면 복잡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마당에 아내를 그대로 둔 채 대문을 나선다. 공방과 연결된 황토방에서 아들은 소란스런 아내와 남자의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남자가 힐끔거리며 황토방을 살피지만 인기척이 없다. 아들은 대자로 누워 남자와 아내가 하는 실랑이를 가만히 듣고 있는지 아니면 둘에게 침묵시위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남자는 좋은 일을 앞두고 갑자기 찾아온 두 사람을 짓이기고 싶다. 

아들은 황토방으로 들어선 아내를 아는 체하지 않는다. 대신 누룩 봉지에 얼굴을 대고 쑥 향과 곰삭은 젓갈 같은 누룩 냄새를 맡는다. 이틀에 한 번씩 봉지를 열어 두세 시간 정도 수분을 말리고 다시 밀봉해 온돌 매트에 올려놓기를 벌써 세 번째 하고 있다. 떡 누룩에 잡균이 핀 곰팡이가 잔뜩 자랐다. 남자는 봉지를 낚아 채 누룩을 만져본다. 밀봉했던 터라 약간 수분기가 있지만 이틀 전보다 더 단단하다. 남자는 물기가 완전히 마를 때까지 법제한 다음 다시 이불을 덮는다. 

술을 빚는 과정은 모든 게 반복이고, 기다림이다.

밑술을 만들고 그 밑술에 고두밥을 넣어 치대 덧술을 만들고, 또 덧술에 고두밥을 넣어 다시 삼양주나 사양주를 만들 때까지. 술을 빚는 과정은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번 손이 닿을 때마다 달라진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룩의 품질이다. 누룩에 따라 맛과 향 그리고 알코올 농도가 달라진다. 아들은 보통 이십 일 정도 말려야 하는 누룩을 검은 봉지로 밀봉하고 수분을 말려 십일 정도로 단축한 걸 모른다. 정석대로 배워야 하지만 수업이 끝날 때까지 누룩 빚는 방법이나 누룩에 번식하는 곡균이나 공기 중에 있던 효모균, 유산균 등이 함께 번식하는 것을 보고, 각자 만든 누룩을 평가하려면 속도를 내야 한다. 아들은 그저 술 빚는 과정이 간단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남자는 아들에게 누룩곰팡이가 피고 술이 익는 시간을 기다리는 지루함과 반복에서 오는 무력함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 

아내는 봉지 안에 든 쑥대처럼 축축한 눈으로 아들을 본다. 눈동자에서도 한숨 소리가 날 것 같다. 아내는 아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불을 걷고 봉지에 있는 누룩을 바닥에 던진다. 

“이딴 거 왜 만들어? 넌 이런 게 중요하니?”

“모르면 가만히 계세요.”

“몰라? 내가 뭘 몰라? 여기서 뭐 볼 게 있다고 이 난리야?”

“못마땅하면 그냥 가시면 되잖아요.”

“가라고? 네가 여기 있는데 가라고?”

“어머니는 여기를 싫어하시잖아요.”

“…….”

“저는 아버지랑 살 거예요. 절 책임질 사람은 아버지잖아요.”

“버린 사람이 이제 와서 키울 거 같아?”

이번에는 아들이 입을 다문다. 남자는 아내 말에 화가 난다. 아들을 버린 게 아니라 빼앗겼다. 오염된 밑술처럼 막을 치고 남자를 밀어냈던 아내이다. 밑술이 오염되면 산패하거나 막이 생기는데 그 막을 걷어내도 술이 실패할 확률이 크다. 남자 입에서 거품이 인다. 

“헛소리하지 말고 둘 다 가.”

“당신 아들이 안 간다고 하잖아. 아들, 나도 안 갈 거야. 결정해라.”

아들은 답이 없다.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 들러붙는다. 아내는 눈을 흘겨 아들과 남자를 번갈아 본다. 아내는 재킷을 벗고 원피스의 소매를 걷어 올린다. 그런 다음 황토벽에 등을 기대고 입을 꽉 다문 채 쌍꺼풀 없는 눈을 깜박거린다. 흐트러짐 없는 꼿꼿한 자세는 비정해 보인다. 아들이 신트림을 하다 헛구역질을 한다. 아내의 이마가 찡그려진다.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아들을 노려본다. 남자는 둘 틈에 끼어 오도카니 앉아 한숨만 내쉰다. 둘을 감당하기 벅차다, 고단하다, 귀찮다. 남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황토방을 나온다. 등 뒤에서 누가 오래 버티나 해 보자, 라는 말이 들린다. 밖으로 나오자 찬바람이 훅 스친다. 가슴에도 바람이 분다.

아내는 황토방을 나와 마당, 농업기술센터까지 줄곧 남자와 아들을 따라다닌다. 셋은 죽 늘어서 걷는다. 센터에 도착하자 수강생 몇이 셋을 번갈아 힐끗거린다. 남자가 강의하는 동안 아내는 아들 옆에 앉아 자신을 쳐다보는 수강생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남자는 수강생들이 수군거리지 않게 미리 잠시 다니러 온 손님이라고 소개한다. 첫 강의 때보다 말이 뒤섞인다. 하필이면 수강생들끼리 술 빚는 도구를 가지고 싸워 강의실 분위기도 삭막하다.

오늘은 밑술을 이용한 덧술을 빚는다. 지난 시간에 죽으로 빚은 밑술에 찹쌀 고두밥을 섞어 덧술을 만들 예정이다. 덧술을 치대는 아들 팔뚝에 힘이 들어간다. 같은 조원들이 아들의 모습을 구경하고 서 있다. 누룩을 빚고, 단양주를 만들고, 죽으로 빚은 밑술을 만들 때까지 아들은 멀찍이 떨어져 구경만 했다. 누룩을 밟을 때 잠깐 호기심을 보였었다. 그런 아들이 술을 빚겠다고 팔을 걷었다. 남자는 다른 조들의 밑술 상태와 고두밥을 확인하며 치댈 시간을 정해준다. 그러다 틈틈이 아들을 훔쳐본다. 밥알이 으깨지지 않도록 살짝 눌러야 탱글탱글해지면서 물과 섞이는데 아들은 쌀을 씻듯 거칠게 누른다. 아내가 나선다. 아내 역시 거칠다. 아들은 아내 손이 닿자 손을 뺀다. 조장이 덧술을 빚는 과정을 찍으려 하자 아내가 카메라 쪽을 보며 환하게 웃는다. 남자가 고개를 돌린다. 이양주가 다 되자 자리를 정돈한다.

남자는 아내 모습이 낯설다.

술이 다 되자 지난번에 빚은 누룩을 평가한다. 네 개 조가 같은 양의 밀기울과 물을 사용해 빚었지만 다 달랐다. 남자는 1조부터 4조까지 일일이 돌아다니며 누룩을 검사한다. 백곡균과 황곡균이 핀 누룩이 제일 좋다고 하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진다. 남자는 황곡균이 가장 많이 피고 누룩의 직경이 얇은 것 하나를 골라 반으로 쪼갠다. 속은 겉처럼 황곡균이 피었지만 가운데 부분이 썩었다. 남자가 엄지로 그 부분을 긁어내자 손톱에 물기가 묻어난다.

“이 부분만 도려내면 쓸 수 있어요.”

“진짜예요?”

“햇볕에 바짝 말려야 안 썩어요. 누룩은 썩은 부분, 즉 잘못된 부분만 도려내면 다 쓸 수 있어요.”

수강생들은 의심쩍어하면서도 안심하는 눈치다. 아내가 끼어든다. 혼잣말 같지만 강의실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다.

“이거 다 못써요. 썩은 걸 어떻게 써. 더럽게.”

순간 강의실에 적막이 감돈다. 남자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붉어진다. 아들은 도망치듯 강의실을 빠져나간다. 예전의 아내는 남의 눈치를 보거나 쉽사리 의사표현도 하지 않았다. 떨어져 사는 동안 변해버린, 아니 남자가 보지 못했던 아내 모습일 수도 있다. 남자는 누룩을 도려내듯 아내를 긁어내고 싶다. 남자는 아내 목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말한다.

“쓸 수 있습니다!”

수강생들이 흩어진다.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공방에 있는 술 항아리 뚜껑을 열고 술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 싶다. 아내의 투박한 말투가 쏟아진다. 이산화탄소가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고 술덧 부피를 팽창시켜 항아리가 넘치는 것처럼 남자도 끓어오른다. 

아들 대신 남자가 덧술 항아리를 든다. 그 뒤를 아내와 아들이 따라 걷는다. 셋은 다시 황토방으로 돌아간다. 아내가 온돌매트를 켠다. 그 위에 책을 하나 올려놓고 술항아리를 놓은 후 아내가 묻는다.

“온도가 몇 도야?”

“…….”

남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황토방에 장작을 더 넣을 셈이다. 굳이 온돌매트를 틀지 않아도 된다. 남자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술을 빚기 위해 방에 불을 지펴 미지근하게 만들 참이었다. 따뜻한 방바닥에 온돌매트를 켠다면 온도가 높아 항아리가 넘칠지도 모른다.

“30도라고 했잖아요.”

아들이 조심스레 말한다. 아내와 닮았다.

아내는 온도를 조절한 다음 항아리를 이불로 감싼다. 이제 술이 익으면서 점점 온도가 올라갈 것이다. 남자는 공방으로 간다. 아내가 뒤따른다. 아내는 공방에 진열된 술병들을 훑는다. 전통주 연구회 회원들과 일 년 가까이 백 가지가 넘는 술을 담갔다. 아내는 절분초로 담근 술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절분초? 그 꽃 아냐? 아예 사람을 죽이려고 아주 작정을 했구나.”

남자는 대꾸하지 않는다. 대신 숙성실로 들어가 숙성이 끝난 술항아리를 꺼낸다. 술을 부어 베보자기에 담고 아내의 목을 조르듯 힘껏 누른다. 누룩을 치대던 아들 팔뚝처럼 힘이 들어간다. 

“독으로 술을 빚는다고? 당신이 만든 술에도 이 풀을 넣은 거야?”

아내 얼굴이 붉다. 숨도 거칠다. 남자도 얼굴이 붉어진다. 숨도 거칠어진다. 남자는 참지 못하고 끝내 소리친다. 머릿속이 하얗다.

“약초야, 약초라고!”

“약? 독이야. 그런 거짓말로 날 붙잡았잖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아니 일부러 날 속였잖아.”

“그건, 그러니까…… 그건 사랑이야.”

“비겁하고 옹졸해.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을 속일 작정이구나.”

비겁하고 옹졸해. 남자는 아내의 말을 따라한다. 

남자는 아들이 온 이유를 알지 못한다. 묻지 않았다.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는 말도 참아내며 들끓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남자는 이제 그게 아들을 위한 일인지 아니면 아버지로서 모른 척 하는 건지 의문이 든다. 남자는 누룩 틀에 들어갈 만큼 작은 발을 가진 아들과 그때처럼 다정하게 말을 나누지 못한다. 예전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지금은 다시 돌아간다 해도 자신이 없다. 아내와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아내를 속여서라도 붙잡으려 했지만 냉담하게 거리를 두는 아내의 변하지 않은 모습에 남자 또한 거리를 두고 싶다. 

아들은 다시 황토방에 누워 누룩처럼 굳어 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일어나 걷잡을 수 없이 원망의 말을 퍼부은 다음 다시 생각에 잠겼다가를 반복한다. 자신을 파괴하는 행동에 남자와 아내는 아들을 말릴 수 없다. 아내는 피로한 듯 남자와 아들의 눈치를 본다. 남자는 실소한다. 혼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둘이 오고 나서 셋이 된 후, 항상 둘의 눈치를 보게 된다. 남자는 아들과 아내, 아들은 아내와 남자, 아내는 아들과 남자. 황토방을 들어서면 셋이 만들어낸 괴이한 분위기 때문에 술에서도 산패된 맛이 날 것 같다. 남자는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온다. 언짢은 기분을 내색하지 않으려 하지만 쉽지 않다. 

남자는 공방 난간에 놓인 항아리 뚜껑을 연다. 작년 여름에 빚은 누룩을 거의 다 썼다. 항아리에 남은 건 흩임 누룩과 떡 누룩 조금 뿐이다. 남자는 이미 손질해 둔 누룩을 꺼내 다시 꼼꼼히 살핀다. 그러다 황토방으로 가서 아들의 누룩을 가져온다. 반복된 작업이 끝나면 마지막은 햇볕에 바짝 말려야 하는데 아들은 그걸 잊고 한쪽 구석에 두었다. 아들 몫으로 띄운 누룩도 황곡균이 피었지만 꼭짓점 부위가 썩었다. 남자는 썩은 부분을 나무칼 끝으로 찌른다. 나무칼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여러 번 찔러도 나오는 건 작은 알갱이뿐이다. 단단하게 굳은 누룩을 떼어내는 일이 쉽지 않다. 여러 번 찌르자 겨우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다. 

누룩을 절구에 넣는다. 나무칼로는 속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남자는 절구공이를 들고 힘차게 누룩을 찧는다. 분가루가 날리면서 누룩이 반으로 쪼개진다. 누룩 속이 까맣다. 남자는 한 덩이를 꺼내 엄지로 긁어낸다. 남자의 손길에 따라 고랑처럼 텅 빈다. 남자는 나무칼로 썩은 부분을 깎아 낸다. 겉껍질이 깎여나가자 누룩은 하얗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남자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지난번 강의실에서 아내가 했던 말도 부정하고 싶고, 술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기술센터에서 자꾸 요구하는 게 많아지는 것도 신경 쓰인다. 남자 머릿속도 누룩처럼 불안하고 잘못된 것은 깎아내고 싶다.

기술센터 과장은 출시될 술에 독성분을 살짝 넣자고 한다. 남자가 머뭇거리자 먼저 제안해 왔다. 과장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1970년 맥주가 소비되기 시작하면서 막걸리 시장이 죽자 유명한 양조장에서 특별 비법을 가지고 막걸리를 만들었는데 최고의 맛이었다고. 그 뒤로 막걸리 사업이 쇠퇴해 주조장이 문을 닫았을 때, 그제야 사장은 몇몇 친한 사람들에게만 비법을 알려 주었는데 그게 청산가리였다고. 과장은 그게 사실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홀릴 수 있도록 우리도 절분초의 생즙을 넣든지 아니면 양을 늘리든지 해서 최고의 맛을 만들라고 한다.

남자는 누룩을 깎으며 고민한다. 이미 절분초에 독성분이 들어 있다. 하지만 그건 잘 말려서 사용할 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약초를 달인 물에 술을 담그면 은은한 향과 달콤한 맛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수많은 막걸리 중에 남자가 만든 쾌담주가 과연 군의 사업과 남자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은근히 걱정된다. 그렇다고 아주 미세한 양이지만 무조건 기술센터 과장의 말만 듣고 청산가리를 넣을 수 없는 문제다. 남자는 차라리 사람들을 속일 거라면 썩은 누룩을 깎지 않고 그대로 두고 나중에 쓴맛이나 술이 부풀어 오르지 않을 때 ‘술약’을 넣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초조하다. 남자가 일일이 손으로 빚은 거라면 재료가 어떤 게 들어갔는지 알 수 있지만 주조장에서 나온 것은 알 수 없다. 이미 특허를 내는 과정에서 재료를 공개했지만 기술센터에서는 더 많은 이익금을 내기 위해 주조장과 은밀히 만나고 있는 듯하다. 남자는 자신이 만든 술이지만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 애매한 누룩만 더 깎아댄다. 

남자가 농업기술센터 과장이 했던 것처럼 손을 비비꼬며 출시될 술을 취소해 달라고 한다. 소장은 잔뜩 찡그리며 번질거리는 이마를 쓸어내린다. 벌써 한 시간째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지만 뚜렷한 해결 방법이 없다. 소장은 서류를 들이대며 이미 지원된 금액이나 주조장 계약서로 대답을 대신한다. 남자는 서류상 금액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에 놀란다. 

“취소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요…….” 

“이렇게 책임을 못 지시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이미 다 공개하기로 했잖아요.”

“지원 받은 금액은 제가 전부 변상을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왜 그러시냐고요. 이제 와서. 술이 나오면 이쪽 지역에 팔릴 거고 그러면 돈도 벌고 선생님 이름도 알려질텐데.”

“그러니까, 저는 그냥 제 술을 빚고 싶습니다.”

“요즘 그렇게 해서 어디 돈을 벌 수 있습디까? 아시면서 괜히 그러지 마세요.”

남자는 대답도 얻지 못하고 농업기술센터를 나온다. 꽃샘추위 때문에 바람이 차다. 

황토방과 공방에는 아들과 아내가 있다. 남자는 느릿하게 집으로 향한다.

남자가 누룩 항아리에서 향온곡을 꺼낸다. 녹두로 빚은 누룩이다. 지난번에 깎아 놨는데 금세 다시 한 쪽이 썩었다. 남자는 나무칼을 가지고 누룩을 깎기 시작한다. 밀기울은 하급 술을 담글 때 쓰지만 향온곡은 고급술을 빚을 때 사용한다. 남자는 누룩을 돌려가며 썩은 부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깎아 절구에 넣고 분쇄한다. 분쇄된 향온곡을 저울에 올려놓고 육백그램을 맞춘다.

남자가 찹쌀가루 다섯 되를 갈아 물에 풀고 죽을 쑨다. 나무 주걱으로 밑바닥이 눌러 붙지 않게 한다. 죽이 다 되자 식을 때까지 주걱으로 뒤적거린다. 향온곡을 죽에 넣자 녹두 향이 올라온다. 남자는 죽과 누룩을 정성스럽게 치댄다. 남자는 쾌담주를 다시 만들기로 한다. 주조장에서 나온 술과 비교하려면 몇 번이고 다시 만들어야 한다. 누룩 냄새도 없애고 은은한 약재 향과 효능이 우러나도록 빚을 것이다. 

남자는 누룩을 치대면서 자신이 이제껏 해온 것들이 과연 옳았는지 의문이 든다. 누룩을 치대는 손길이 점점 거칠어진다. 아들이 공방으로 들어선다. 남자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남자는 아들에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누룩은 모든 술의 근원이다. 누룩처럼 너도 처음부터 잘못된 거야. 깎을 수만 있다면…….”

아들과 아내가 남자가 있는 곳으로 걸어온다. 남자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남자는 두 사람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당선소감>

 

집을 짓듯, 오래 읽힐 글집을 짓고 싶다

 

어느 날 문득, 정말 어느 날 문득 땅을 밟으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배터리 게이지에 갇힌 느낌과 단조로운 삶에서 오는 권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도시를 벗어난 시골에 작은 집을 지었습니다.

가을장마 때문에 공사가 미뤄져 미완성인 채 이사를 했습니다. 진흙과 흙탕물 때문에 자동차 바퀴며 신발에 노란 얼룩이 묻었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짐은 구석구석 쌓였었고, 난방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여기저기 공사하는 소리 때문에 머리가 아파 집 주변이 난민촌처럼 느껴졌습니다. 

집에 대해 고민하다 어쩌면 소설도 집을 짓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 그 주인공들과 엮여 나가는 사람들과 사건들…… 그 재료로 집을 짓듯 틈새를 메워 나가면 어느새 한 편의 집이 지어집니다. 그 집은 미숙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멋을 부린 탓에 겉만 화려합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울음을 삼키며 자연을 닮은 집을 짓기 위해 다시 더딘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게 힘이 되어주신 광주일보에게 감사드립니다. 다시 시작하는 길목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시던 광주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과 지인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습작을 할 때마다 예민해지는 제 자신을 다독이며 살았습니다. 이제 앞으로 더 잘하라는 축복을 받았기에 재능 탓을 하지 않겠습니다. 제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방황하던 일도 하지 않겠습니다. 묵묵히 노력한 자에게 언젠가는 대가가 온다는 것을 믿고 백 년 살 집을 지었듯 이제 백 년 읽힐 글집을 짓고 싶습니다.




◎ 약력

▶ 1976년 전북 고창 출생

▶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심사평>

 

사람살이의 진실 성찰한 안목 돋보여

 

본심에 오른 10편의 작품들은 몇 가지 점에서 특이한 현상을 보였다. 외국어 혼용의 제목과 인물, 공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가속화된 고령화 사회의 현상들로 삶의 마지막 여정을 다룬 작품들도 여전히 강세였다. 이러한 흐름은 세계를 품은 통찰과 감각의 발현이라기보다 기발한 아이디어 차원에 머물렀고, 고령화 현실의 소재들은 결말이 쉽게 간파되는 에피소드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신인에게는 문장의 기본기와 새로움이 요구된다. 문장과 새로움은 사회적인 맥락, 나아가 세계사적인 흐름 속에 작동된다. 소재를 선택하는 감각과 장악력, 서사 언어를 구사하는 감각과 필력, 이를 효과적으로 이끌어 미학적 감수성과 주제 관철력을 충족시킨 작품은 박정웅의 ‘해를 보러가는 동안’과 김해숙의 ‘누룩을 깎다’였다. ‘해를 보러가는 동안’은 신춘문예에서 흔치 않은 미세한 결(結)의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해가 뜨고도 계속되는 주인공의 사념이 결말을 지지부진하게 만들면서 긴장과 균형을 와해시키는 아쉬움을 남겼다.

‘누룩을 깎다’는 술 빚는 과정을 통해 해체되었던 한 가족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작가는 한때 가족이었던 이들의 친숙하면서도 예외적인 일상을 한 장의 사진처럼, 한 편의 영화처럼 작동시키고 있다. 몇 문장에서 친절한 설명이 노출되어 거슬렸으나, 사람살이(관계)의 진실을 성찰해낸 안목과 가족의 초상을 삼각형의 미학으로 창출해낸 솜씨가 돋보였다.

‘해를 보러가는 동안’의 새로운 의식의 흐름과 ‘누룩을 깎다’의 인간적 연륜을 놓고 고심 끝에 후자를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전자의 작품을 가까운 미래에 더 읽어보고 싶다는 말로 아쉬움과 기대감을 전하며, 수상자에게 축하를, 모든 응모자들에게 격려의 마음을 전한다.



심사 함정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