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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앵두나무 상영관 / 진혜진

 

신호등은 봄을 켠다

길 하나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그루

이도시에 앵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은 길목마다 앵두나무를 심었다


우듬지에 앵두가 켜지는 순간, 몇 갈래의 속도가 생긴다

몇 분 간격으로 익어 터지는 앵두

비와 졸음 사이에 짓무른 앵두

붉은 앵두는 금지된 몸에서만 터져 나온다

한 쪽 눈을 질끈 감는 사이

길바닥에 누운 흰 사다리를 오른다

아이가 손을 들고 소나기 그친 사이를 뛰어간다

할머니는 한 칸 한 칸 신호음 사이를 건너고 있다

사람들이 마중과 배웅으로

사다리를 건너면 앵두의 색깔이 바뀐다


빨강을 물고 순식간에 달려가는 계절이 다른 계절의 입술에 물리듯 

앵두나무 뿌리는 발설되지 않은 소문까지 뻗어있다


앵두가 지고나면 초록 이파리

여름 정원에 비비새 울음으로 남아

그 울음 끝으로 떨어질 이파리로 남아

세를 불리는 앵두나무

공중으로 발을 들어 올린다

언제라도 짧은 치마를 입듯 가벼운 신호음

떠나갈 사람과 돌아올 사람의 안부가 위태로워

처음 같은 얼굴로

막을 내리지 못하는 봄이 있다





<당선소감>


 아픔마저 아름답도록 시 그릴 것

 

 나의 사거리에도 앵두가 켜집니다. 자주 정체되고 시도 때도 없이 클랙슨을 눌러 댔습니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빈손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올해도 그냥 넘어가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가로수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봄이지만 우리 도시, 신호등의 봄은 봄이 아니었습니다. 눈이 아프도록 세상을 들여다보면 이미지가 펼쳐진다고 했습니다. 몇 개의 방향을 가진 사거리입니다. 저마다의 역할로 떠나가고 돌아와도 아무도 안부를 묻지 않는 횡단보도 앞에서 나는 그들의 안부를 묻는 배역을 담당하고자 합니다. 누군가의 발걸음에 젖어 있는 불안, 아픔, 무서움, 그리고 절규까지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될 수 있도록 시를 그리겠습니다. 비록 멈칫거리는 붓질일지라도.

 어둠 속에서 촛불을 밝혀주신 김영남 선생님, 늘 독특한 상상력을 갈구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막막한 가로수 길에서 제 시의 원근법을 쥐여주신 심사위원님들과 경남신문사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당선을 기원하며 마음을 모아주신 분들에게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신비디움 꽃대의 행운을 전송해준 친구 김분홍 시인, 시를 사모하는 김유진 시인에게 하루 9할의 시간이 어서 시와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늘 격려와 충고 아끼지 않은 스터디 선배님들 고맙습니다. 내가 시로 좌절하고 시로 서러워할 때 단 한 번도 시를 탓하지 않고 격려해주며 내 편이 돼준 남편 신용찬씨, 아들 채훈, 그리고 언니들, 오빠, 저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모든 분들을 사랑합니다. 그럼 제 배역에 어울리는 막을 올리렵니다. 



◎ 약력

▶ 1962년 함안 출생

▶ 마산대학교 졸업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심사평>


 활물의 비유 개성있게 선보여

 

 우리 선자들에게 넘어온 시는 총 786편이었다. 올해는 태작들도 많았던 반면 일정한 수준으로 고른 기량을 가진 분들도 골고루 응모해 와 문학의 위기와 위축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는 문학에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응모작들의 주된 주조는 경기부진과 어려운 세태, 사회 혼란 탓인지, 거시세계보다는 미시세계에 가까웠다. 자영업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는 시편들도 여럿 있었고, 일상의 소품들과 거리 풍경, 자연, 가족간의 관계에 대한 해석들이 많았다. 

 마지막까지 선자들에 남겨진 작품들은 열 분이다. 열 분의 작품들 중 우리 선자들의 의견이 쉽게 일치한 시 당선작은 진혜진의 ‘앵두나무 상영관’이었다. 진혜진은 당선작 외에 함께 투고한 시편들에서도 당선작에 버금가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미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시집 한 권 정도 분량의 작품을 가졌음직한 자유로움과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신춘문예 출신 시인들이 당선 후 일 년 만에 대부분 사라지는 상황에서 시를 오래 쓸 것만 같은 신인을 만나 기뻤다. ‘앵두나무 상영관’은 앵두를 거리의 빛에 대비해 사람의 내면과 일치시키는 활물의 비유를 개성있게 선보인 작품이다. 앞으로 쓰는 자로서의 강건한 정신의 높이를 획득해가는 큰 시인으로 대성하기를 바란다.

 당선작은 되지 못했지만, ‘버클’의 이희라, ‘삼각김밥’의 장시은, ‘온순한 짐승을 따라가다’의 이규정, ‘현호색 풀밭’의 김신유 등이 신선하고 재기발랄한 시적 세계를 선보였으나, 편차를 보여 끝까지 선자들을 아쉽게 했으며, ‘악성바이러스 치료하기’의 김혜강, ‘사막의 저녁’의 이선유, ‘이대 팔’의 정연희, ‘잡초의 발견’의 최수안, ‘합석’의 채선정 등도 풍부한 시적 기량을 갖추고 있으나, 뒷심이 부족해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분들도 꾸준히 정진하면, 머지않아 지면에 등장해 좋은 시인으로서의 기량을 충분히 선보일 자질을 갖추고 있으므로 다음을 기약한다. 


심사위원 : 김언희·성윤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