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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전에도 봐놓고 그래 / 최정나

 

노모는 거실에 웅크리고 앉아 졸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기독교방송이 나왔다. 목사의 말끝마다 탄성을 내지르는 성도들을 카메라가 훑고 지나갔다. 거실에 들어선 여자가 노모의 손에서 빠져나온 리모컨을 집어 텔레비전을 껐다. 집안이 고요해지자 노모가 눈을 떴다. 여자와 그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노모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일어났다. 껑충하게 올라간 바짓단 밑으로 붉은색 내복이 삐져나왔다. 절반쯤 드러난 종아리엔 살비듬이 껴 있었다. 노모가 허둥대며 다가가 여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여자의 목 뒤에서 노모의 손가락이 단단하게 겹쳐졌다 풀어졌다. 얼굴이 붉어진 여자가 헛기침을 했다. 노모가 남자를 향해 두 팔을 벌렸을 때 남자는 케이크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남자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모는 불쑥 여자에게 다가가 리모컨을 빼들었다. 

“설교 중에 끄면 벌 받는다.” 노모가 말했다. 

“잘 지내셨어요? 엄마?” 남자가 물었다. 

“손님들은 언제 오세요? 어머니?” 여자가 물었다. 

“돈 들여서 저런 건 뭐 하러 사왔냐?” 노모가 케이크 상자를 가리켰다. 

“아버지 생신인데 있어야죠.” 남자가 형광등 스위치를 올렸다. 

“아껴야 한다.” 노모가 형광등 스위치를 내렸다.

여자가 케이크 상자를 가지고 주방으로 갔다. 노모도 따라갔다. 식탁 위는 어수선했다. 그릇과 된장병이 여러 개 나와 있었고 플라스틱 반찬통엔 약봉지가 수북하게 쌓여 밖으로 흘러넘쳤다. 노모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여자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여자가 싱크대 선반에서 물 잔을 꺼내자 노모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가스레인지에 주전자를 올렸다. 

“조금만 기다려라, 새아가.” 여자가 쳐다보자 노모가 다시 말했다. 

“물 말이다. 이게 느릅나무 거죽을 끓인 거다. 그러니까 이걸 마셔라. 찬물을 마시면 콜레스테롤이 혈관에서 그대로 굳는다. 뜨거운 걸 마셔야 혈관에 붙은 기름기도 쏙 빠지고, 게다가 느릅나무는 염증에도 좋단다. 나도 너 때는 그걸 모르고 찬물을 하루에 한 통씩 마셨지 않았겠냐? 텔레비전에서 박사님이 하는 말을 들었으니까 알았지. 안 그랬으면 혈관이 다 굳을 뻔했다.” 

냉장고 옆에 쌓인 빈 생수병을 내려다보던 여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다. 너, 내가 어디 전봇대 밑에 가서 주워 온 줄 알지? 아버지가 약수터에서 매일 떠 오신다. 병을 버리고 가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다는구나. 아버지도 너처럼 찬물을 좋아하셨잖냐? 그런데 요즘은 이것만 드신다. 아버지가 떠오는 물은 밥 지을 때 쓴단다. 그게 건강에도 좋다.”

주전자 밑바닥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 물 잔을 쥔 노모의 약지가 살짝 들렸다. 여자는 물 잔을 입에 대는 척하다 내려놓았다. 

“왜, 뜨겁냐? 호호 불어가며 마셔라. 그래야 혈관에 들러붙은 기름이 싹 다 떨어져 나간다.” 

“약재엔 부작용도 있어요. 어머니.” 

“그게 무슨 말이냐?” 

“몸에 맞지 않으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고요.” 

“내가 말하는 게 아니야. 공부 많이 하신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거야. 신문에서도 봤는데 그러는구나.” 

“손님들은 언제 오시는 거예요?” 

“올 때 되면 오겠지.”

“몇 분이나 오시는 거예요?”

여자가 물었을 때 남자가 화장실에 들어갔다. 

“소변이냐?” 노모가 소리쳤다. 

남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노모가 화장실에 다가가 문에 귀를 붙였다. 

“대변이냐?” 

남자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휴지도 아껴야 한다. 알고 있지?” 

여자는 노모의 비틀어진 목에 사선으로 난 주름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린 노모와 눈이 마주쳤다. 미소 짓는 여자의 얼굴이 한쪽으로 틀어졌다. 

“몇 분이나 오시는 거예요. 어머니?” 

“가만 있어봐라, 내가 병원에서 받아 온 게 있는데 그게 아주 유용하다.” 노모가 약봉지 사이에서 종이 한 장을 빼들었다. 

“읽어봐라. 얼마 전에 병원에서 준 거다. 밑을 닦을 땐 앞에서 뒤로 닦아야 한다. 세균이 자궁으로 들어가면 안 되니까 말이다. 내가 그걸 모르고 반대로 닦아서 고생이 많았다. 너네도 비데 놓았냐? 나는 너네가 사준 비데 쓰다가 치질에 걸린 줄도 몰랐다. 다 의사선생님이 가르쳐 주니까 알게 된 거다. 몰라서 좋아했지. 정말 무식했다. 너도 쓰면 안 된다. 알아들었냐? 알고 있지?” 노모가 종이를 건넸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비데하고 치질하고 무슨 상관이라고요?”

“생각해봐라. 비데를 쓰면 휴지를 안 쓰지 않냐. 휴지를 안 쓰면 항문에서 피가 나는지 치질이 빠졌는지 알 수가 없지 않냐? 휴지를 써야 금방 아는데 그걸 안 쓰니까 치질이 걸린 줄도 모르고 살지 않겠냐? 그렇지? 그러니까 한번 읽어봐라. 거기 다 나와 있다. 이런 걸 많이 알아야 한다.” 

“음식준비는 어떻게 할까요?” 여자가 몸을 돌려 노모의 시선을 피했다. 

“못 봤냐? 아버지가 마당에 계신다.” 

“날도 추운데 또 보신탕이에요?” 

“그래도 오늘은 날이 푹하다. 은혜지 뭐냐. 이것 좀 가져다주고 오너라. 아니다. 그러지 말고 인제 그만 들어오시라고 해라. 날이 암만 푹해도 오래 계시면 감기 들린다.” 노모는 건네려던 물 잔을 자신의 가슴께로 말아 넣었다. 

노부는 노란 들통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들통 안에는 국이 끓었다. 구수하고 누릿한 냄새가 주변에 떠돌았다. 노부가 국자로 기름을 걷어내 마당에 뿌렸다. 붉은 국물이 시멘트 바닥에 스며들어 마당에 얼룩이 졌다. 남자가 들통을 들여다봤다. 

“늦었구나.” 노부가 국자로 탕국을 휘저었다. 

“죄송해요.” 

“아니다. 내일 안 오고 오늘 왔으니 다행이다.” 

남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생신인데 아버지가 음식을 차리세요?” 

“그럼 누가 차려 주냐?” 

“나가서 드시면 편하죠.” 

“니들 주려고 잡아왔다. 잡느라 애먹었어.”

“사오면 되지, 왜 애를 먹어요?” 

“말도 마라! 며칠 전에 개를 보러 갔는데 말이다. 내가 이놈을 점찍어두고 백숙까지 고아 먹이지 않았냐? 토실하게 살이 올랐다기에 어제 잡으러 갔는데, 이번에 통장이랑 간 게 화근이다. 그놈이 내 개에 눈독을 들이더라 이 말이다. 귀한 것엔 원래가 액이 끼는 법이다. 그래도 안 나눴으니 다행이다. 우리가 맛있게 먹으면 된 거다. 개장수가 깨끗하게 잡아서 핏물까지 싹 빼줬지 뭐냐. 너네 주려고 하는 거지, 너네 아니면 하지도 않는다.” 노부가 흐뭇한 표정으로 들통 안을 들여다봤다. 

“안 드시는 분들도 계시잖아요?” 멀찍이 서 있던 여자가 껴들었다. 

“너나 안 먹지, 다들 좋아한다.” 

“이제 저이도 안 먹기로 했어요.” 

“쟨 이거 좋아한다. 니가 안 먹는다고 쟤까지 못 먹냐?” 

노부가 막걸리병을 들고 일어나 마당 이쪽저쪽에 술을 뿌리며 고함쳤다. 

“고수레다, 고수레에!” 

들통 앞에 앉은 노부가 개고기를 도마에 올렸다. 나무로 된 도마는 개 한 마리가 다 놓이고도 남을 만큼 컸다. 머리와 내장이 제거된 개가 모로 누웠다. 뻣뻣해진 네 개의 다리가 허공에 들렸다. 발톱 몇 개가 떨어져 나간 게 여자가 서 있는 곳에서도 보였다. 노부가 왼손으로 갈빗대를 잡고 넓적다리 안쪽에 식칼을 꽂았다. 손놀림이 능숙했다. 순식간에 몸통에서 다리가 잘려 나왔다. 엉치뼈, 등뼈, 갈빗대가 부위별로 분리됐다. 노부가 차례대로 살점을 발라 큼직하게 찢었다. 양념에 무친 살점과 남은 뼈들은 다시 들통으로 들어갔다. 도마에 넓적다리만 남았을 때 노부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다리 안쪽에서 조심스레 살점을 저며 입에 넣었다. 

“잘 익었다. 이건 수육으로 먹자.” 

노부가 다시 살점을 발라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가 입을 벌렸다. 노부의 기름진 손가락이 남자의 턱에 닿았다. 

“어떠냐?” 

“육질이 살아있는데요.” 남자는 손으로 턱을 닦았다. 기름이 가로로 번졌다.

“불알도 먹어볼 테냐?” 

“어휴, 그건 아버지 드세요.” 

“너도 먹어봐라.” 칼을 쥔 노부의 손이 움찔거렸다. 여자가 몸서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다 됐다. 이제 놔두면 된다.” 

노부는 무릎을 양손으로 짚고 일어나 담장으로 걸어갔다. 담장은 노부의 허리춤 높이였다. 마당 안쪽에서 자라난 담쟁이넝쿨이 외벽까지 줄기를 틀어 담장은 붉은 잎으로 뒤덮였다. 줄기에 달라붙은 마른 잎사귀가 작은 바람에도 들썩거렸다. 노부가 담장에 몸을 붙이고 서서 골목길을 살폈다. 노부의 몸이 넝쿨을 눌렀다. 잎사귀가 바스락대며 줄기에서 떨어져 나왔다. 움켜쥔 손가락처럼 생긴 잎사귀 몇 장이 허공에서 갈지자를 그렸다. 소리에 놀란 개가 제집 밖으로 나왔다. 개는 페키니즈와 누런 개의 잡종이었다. 오래전 동네를 오가던 유기견이었는데 대문 안으로 들어와 나가지 않았다고 노부가 말했다. 개가 노부의 다리에 매달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목줄이 짧아 움직일 때마다 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언제들 오려나?” 

“누가 와요?” 남자가 물었다.

“누구긴 누구냐? 작은아버지랑 둘째, 넷째 작은 아버지네지. 올 사람이 또 있냐?” 

“그냥 생신인데 뭘 다 부르셨어요?” 

“생신이 뭐, 그냥 생신, 특별 생신 따로 있냐?” 

“사촌들이랑 제수씨들도 오겠네요.”

“부모가 움직이는데 자식들이 모셔야지!”

“귀찮아해요.”

“닦아야겠다.” 노부가 평상을 가리켰다. 

“여기서 드시게요?” 

“개는 밖에서 먹어야 제맛이다.” 

“추운데요.” 

“가을인데도 춥냐?” 

“아버지도. 이제 겨울이죠.” 

“지하실에 가서 파라솔이나 좀 꺼내 와라.” 

“파라솔은 뭐하게요?” 

“평상에 파라솔 꽂고 그 위에 비닐이라도 씌우면 되지 않냐?” 

“어머니가 감기 걸린다고 그만 들어오시래요.” 여자가 말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지하실 문을 열고 들어서다 장도리에 발이 걸렸다. 휘청대던 남자가 이내 중심을 잡았다. 여자도 남자를 따라 들어갔다. 퀴퀴하고 습했다. 어둠이 눈에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자가 형광등을 켰다. 촉 낮은 전구가 노랗게 빛났다. 쪽창 아래 네 개의 운동기구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발판이나 손잡이가 고장 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남자는 복지관에서 버린 것들을 옮겨오는 노부를 이해할 수 없다며 투덜댔다. 기구들은 몇십 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고장 난 곳엔 철사나 노끈이 둘둘 말려 있었다. 칠이 벗겨진 데는 기름을 먹여놓았다. 누런 기름이 흐르던 채로 진득하게 굳었다. 날개가 부러진 선풍기나 오래된 텔레비전 같은 것들은 김장용 비닐에 싸여 있었다. 

“당신, 개고기 먹을 거야?” 여자가 남자에게 바짝 다가섰다. 

“왜 그래?” 남자가 바닥에서 파라솔을 찾아냈다. 

“개를 어떻게 죽이는지 몰라서 그래?” 

“그렇게 다 따지면 먹을 게 없어.”

“쇠파이프로 머리를 후려 패잖아? 그것도 다른 개들이 보는 앞에서. 저번에 봐놓고도 그래?” 

“원래 그래.”

“그렇게 원한을 가지고 죽은 애들이 몸에 좋을 리 없어.”

“아버지가 정성 들여 끓이니까 몸에 좋을 거야.”

“쟤넨 힘없는 애들이라고.”

“우리도 힘없어.” 

남자가 파라솔에 묻은 먼지를 손바닥으로 털었다. 먼지가 일자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자도 뒤로 물러났다. 남자는 플라스틱 의자 위에 파라솔을 겹쳐 들고 밖으로 나갔다. 뒤뚱대며 계단을 오르는 뒷모습을 여자가 바라봤다.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노란 불빛이 여자 아래 그림자를 만들었다. 여자는 자신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여자의 머리 높이에 달린 쪽창으로 남자의 다리가 지나갔다. 노부의 다리도 스쳤다. 여자는 박제품처럼 놓인 운동기구를 피해 쪽창 가까이 다가갔다. 흙물이 들이쳐 생긴 물 자국이 벽면을 타고 흘렀다. 자국은 누렇고 얼룩덜룩했다. 그 위에 곰팡이가 슬었다. 여자가 사방 벽을 둘러봤다. 벽면엔 실금이 나 있었다. 뿌리처럼 뻗은 틈이 아래로, 옆으로, 위로 퍼져나갔다. 여자가 뒷걸음쳤다. 시멘트 더미가 떨어져 나간 곳 안쪽에서는 붉은 흙이 삐져나왔다. 흙은 시멘트를 밀어내며 구멍을 키웠다. 구멍을 비집고 넝쿨 줄기가 나왔다. 줄기는 흡착근을 벽에 붙이고 자라났다. 여러 개의 넝쿨손이 벽을 휘감았다. 여자가 쫓기듯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남자가 평상에 파라솔을 고정했다. 파라솔은 평상에 비해 턱없이 작았다. 노부가 비닐막을 덮어씌웠다. 담장 밖에서 몸집이 작은 노파가 그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노파는 눈꼬리가 늘어져 매서웠다.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노파는 굽은 등을 보이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현관문이 열리며 노모가 걸어 나왔다.

“아이, 이게 다 뭐예요?”

노모가 마당을 휘둘러봤다. 여자는 평상 위에 놓여 있던 마른걸레로 플라스틱 의자를 닦기 시작했다. 노모가 이쪽저쪽 오가며 말을 건넸지만 노부와 남자는 귀먹은 사람들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가 구두를 벗고 평상에 올라갔다. 마른걸레로 먼지를 털어내는 여자에게 노모가 소리쳤다.

“너, 그런 신발을 신으면 안 된다. 넘어진다. 얼마 전에 내가 그런 신발을 신었다가 미끄러져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냐? 아직까지도 쑤신다.” 노모가 자신의 허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들 셋은 여자가 벗어둔 삼 센티미터 굽 달린 구두를 바라봤다. 여자도 자신의 구두를 내려다봤다. 

“엄마는 그러니까 왜 어울리지도 않는 신발을 신어요?” 남자가 말했다. 

“그 신발은 벗어두고 가거라. 너 발이 몇이냐?” 

“괜찮아요. 어머니.” 

“아니다. 안 된다. 그런 신발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한다.”

“뭐, 별로 높지도 않은데?” 비닐막을 고정하던 노부가 말했다. 

“모르는 소리 말아요. 저런 신발이 사람 잡아요. 말해봐라. 발이 몇이냐? 이백사십이냐? 신발을 준 이가 이백사십이던데, 너도 그렇지?” 노모가 해맑게 웃었다. 

“커요. 어머니. 저번에 주신 것도 컸어요.” 

“운동화는 괜찮다. 조금 커도 끈을 단단히 매면 된다. 그건 여기에 벗어두고 가거라. 아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얼른 들어가자.”

앞장서 걷던 노모가 뒤돌아서서 소리쳤다. 

“빨리 들어오세요. 감기 걸리면 약값이 더 들어요.” 

“들어가 봐라. 신발 하나 생기겠구나.” 노부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여자에게 말했다. 

“저도 들어갈래요.” 남자가 말했다. 

노모는 작은 방을 향해 굼뜨게 걸었다. 남자가 결혼한 후에 작은 방은 노모의 물건을 쌓아두는 창고로 쓰였다. 노모가 방문을 열자 고릿하고 누릿한 냄새가 냉기에 딸려 나왔다. 열린 틈새로 실타래 같은 것이 얼크러져 나왔다. 노모가 몸을 비틀어 방으로 들어갔다. 안쪽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손잡이를 비틀었다. 

“아니다. 여긴 들어오지 마라.” 방에서 노모가 소리쳤다. 

“거긴 엄마 비밀 창고다. 나도 못 들어간다.” 노부가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 방에 뭐가 있는데 그래요?” 

“난들 아냐? 얻어온 옷들이 산더미처럼 쌓였을 테지. 저번에는 거기서 나방이 나왔다.” 

“나방이라니요?”

“여름에 말이야. 이만한 게 나왔어.” 노부가 주먹 쥔 손을 내보였다. 

“아버지도 참, 옷은 어디서 난 거래요?”

“나도 모르지, 죄다 쓸모없는 것들인데 신당을 차렸다.”

“그럼 교회에 갖다 주지 그래요?”

“하나님이 달래도 안 줄걸. 그냥 놔둬라. 시끄러워지면 나만 힘들다.”

한참 후에 발그레한 얼굴로 방에서 나온 노모는 손에 움켜쥐었던 대여섯 벌의 옷을 바닥에 펼쳐놓았다. 목이 늘어나거나 색이 변한 것들이었다. 남자가 힐끔대다 텔레비전 채널을 바꿨다. 뒤축이 닳고 발볼이 해진 운동화는 여자의 손에 들렸다. 여자가 멍한 표정으로 운동화를 내려다봤다. 노모가 보풀이 인 보라색 스웨터를 남자의 몸에 이리저리 대보았다. 

“입어봐라. 이건 너한테 참 잘 어울리겠다.”

“그런 거 입으면 사람들이 쳐다봐요.” 

“가끔 이런 것도 입어야 기분전환이 된다. 돈도 아끼고 일석이조지?”

“필요하면 사야죠.”

“이것도 다 비싼 거야. 만져봐라, 아주 보들보들한 게 따뜻하겠지?” 

“집에 다 있어요.” 

“샀냐?”

“샀죠.”

“그냥 가져가라.” 노부가 슬그머니 일어나 종이봉투를 들이밀었다. 

“싫다는데 그러세요.”

“너는 괜히 그러는구나. 이거 다 좋은 거야.” 

“그게 다 어디서 난 거예요?” 

“앞집 엄마가 백화점에서만 산다더라. 한 번 입고 맘에 안 들면 안 입어.” 

“십 년은 됐겠네.” 남자가 혀를 찼다. 

“전도한다고 가서 집안일까지 다 해주고 저런 걸 받아온다.” 노부가 말했다. 

“집안일까지 해줘요?” 

“전도하면 교회에서 한 명에 이만 원씩 준다더라.” 

“당신도 그걸로 먹고 입잖아요.” 노모가 말했다. 

“그게 다 자식들 욕 먹이는 일이에요.” 남자가 나무라듯 말했다. 

“모르는 소리 마라. 거기는 집이 아주 따끈따끈하다. 아버지가 니들 올 때만 집에 불 때지. 나 있을 때는 불 안 땐다. 아주 으슬으슬해. 가서도 일 많이 하는 줄 알지? 안 한다. 그냥 빨래만 해준다. 손빨래하는 것도 아니고 세탁기가 다 알아서 해주는데 뭐가 어렵냐. 널고, 걷고, 개고, 그게 끝인데 어렵지 않다. 힘든 건 나도 못한다. 게다가 갈 때마다 만 원씩 돈도 주는데, 이게 일석 몇 조냐? 나도 예전엔 일도 하고 살림도 해봐서 그 마음 잘 안다. 서로 돕고 살면 좋은 것 아니냐? 게다가 우리도 좋고 니들도 좋고.” 

“며느리도 일하는데 거긴 안 가잖아?” 

“행사장은 요즘 안 가세요?” 여자가 화제를 바꿨다. 

“안 간다.” 노모가 대답했다. 

“뭘 안 가? 요즘에도 간다.” 노부가 말했다. 

“행사장이라뇨?” 남자가 물었다. 

“싸구려 물건 가져다 비싸게 파는 데 있지 않냐? 노인들이 돈을 엄청 쓴다더라.” 

“거긴 아들 같은 청년들이 어깨도 주물러준다. 친절한 데다 갈 때마다 휴지도 하나씩 나눠준다. 옥장판에 누워있으면 찜질방이 따로 없으니 몸도 풀리고, 따끈하고, 그만한 게 없다.” 

“백만 원이나 주고 옥장판을 샀으니까 그렇지.” 

“백만 원요?” 남자가 놀라 물었다. 

“아들 같은 청년들이라면서요? 어머니.” 여자가 물었다. 

집안은 점점 어두워졌다. 창문엔 간유리가 끼워져 있었고 그 때문에 창을 투과한 흐릿한 석양빛이 거실의 어둠에 섞여들었다. 선반엔 주민 센터에서 받은 표창장과 상패가 놓여 있었다. 노부가 물걸레로 먼지를 닦았다. 남자와 여자의 결혼사진도 닦았다. 사진 속에서 여자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 위로 물걸레가 지났다. 남자는 오락 프로그램을 보며 킥킥 웃었다. 웃을 때마다 모로 누운 남자의 한쪽 다리가 허공에 들렸다. 남자를 바라보던 여자가 흠칫 놀라 눈을 돌렸다. 여자는 화면에 시선을 두었지만, 텔레비전을 보고 있지 않았다. 노모는 멍하니 앉아 유리창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소쿠리 한가득 귤을 가지고서 다시 나왔다. 주먹만 한 귤은 껍질이 다 말랐다. 노모가 귤을 집어 하나씩 건넸다. 노부가 손을 저었다. 여자도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는 귤을 받아들었다. 노모가 남자를 주시했다. 남자가 껍질을 깠다. 노모가 침을 삼켰다. 남자가 과육에 붙은 하얀 실을 떼어냈다. 

“귤은 그 흰 부분을 다 먹어야 한다. 나도 니 나이 때는 흰 거를 다 까냈다. 그땐 너무 몰랐다. 지금이라도 이렇게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그게 피를 맑게 해준다. 뿐이냐? 암도 없애주고 숙변도 제거해주고 피부도 좋게 한단다. 너는 까지 말래도 그렇게 까니?”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고, 노모는 다시 시무룩해졌다. 두 눈을 끔뻑대며 옷가지를 바라보던 노모는 자신의 방문 너머 어딘가를 응시했다. 

“손님들이 늦으시네요.” 여자가 시계를 바라봤다. 

“고기가 많은데 무슨 걱정이냐?” 노부가 말했다. 

“고기도 다됐는데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어요?” 남자가 간유리를 쳐다봤다. 

“채소나 넣어야겠다.” 

“전화비가 아까워서 그러는 거예요? 전화해보면 되잖아요.” 

노부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나갔다가 와.” 여자가 말했다. 

“당신이 갔다 오면 되잖아.” 남자가 길게 뻗은 다리를 꼬고 움지럭거렸다. 

노부를 따라 여자가 밖으로 나갔을 때 도마 앞에 쭈그리고 앉은 노파와 마주쳤다. 몸집이 작은 노파는 열심히 입을 우물거렸다. 도마엔 넓적다리가 저며져 있었다. 입이 쩍 벌어진 노부는 말없이 노파를 노려봤다. 

“누구세요?” 여자가 물었다. 

“권사님 보러 왔는데.” 

“어머니는 집에 계시는데요.” 여자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권사님이 여기 어디 폐지를 모아 놨을 텐데 영 찾을 수가 없잖아.” 

“폐지라니요?”

“평소엔 잘도 가져가더니 오늘따라 안 보인다는 건 무슨 소린지.” 노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노파가 수육을 뭉텅이로 집어 입에 구겨 넣었다. 

“고기가 다 풀어졌어. 너무 삶았어!” 

“이 망할 놈의 노인네가! 이도 없으면서 뭐가 풀어졌다는 거요?” 

“들어왔다가 있길래 잘 익었는지 잠깐 본 건데 뭐, 잘못됐나?” 

“우리도 아직 안 먹은 건데 이러시면 어떻게 해요?” 여자가 말했다. 

“뉘신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노파가 마당에 가래침을 뱉었다. 

“할머니! 침을 뱉어놓으면 그걸 누구 보고 치우라는 거예요?” 

“폐지도 모자라서 남의 집 귀한 고기까지 축내기요?” 노부가 허공에 대고 삿대질했다. 

“아이고, 맛도 없는데 유세는?”

“맛이 없다니?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이번 주엔 교회도 갈라고 했는데 못 가겠네. 못 가겠어!” 노파는 탕국에 침 뱉는 시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놈의 노인네가?” 

노부가 노파 앞으로 달려갔다. 노파가 노부를 피해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노파는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노모의 것과 같았다. 종아리엔 부푼 핏줄이 징그럽게 엉켜 있었다. 

“다시 이 집에 얼씬거리지 마요!” 노부가 소리쳤다. 

노파가 개집 위에서 폐지를 그러모아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저런 정신 나간 할망구들을 전도한다고 저런다.” 

주저앉은 노부가 들통에 채소를 밀어 넣었다. 

거실엔 대여섯 벌의 옷가지와 운동화, 빈 종이봉투가 늘어져 있었다. 소쿠리 주변엔 귤껍질이 떨어져 지저분했다. 남자는 텔레비전을 보느라 노부와 여자가 들어온 줄도 몰랐다. 힘이 빠진 노부가 바닥에 앉았다. 여자도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노모는 작은 방 문지방 쪽에 머리를 두고 잠들었다. 노부가 잠든 노모를 슬쩍 쳐다봤다. 피곤한 표정이었다. 노부가 노모를 깨웠다. 노모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여자가 노모를 흔들었다. 코를 고는 노모의 입이 벌어졌다. 

“곧 손님들이 오실 텐데.” 여자가 걱정된다는 투로 말했다. 

“온다고 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안 온다냐?” 

“오시긴 하는 거예요?” 남자가 시계를 봤다. 

“저녁이 다 지나는데 왜 아직까지 한 명도 안 오냐?” 

“어떻게 해요?” 여자가 물었다. 

“우리라도 먼저 먹자.” 노부가 체념한 듯 말했다. 

“어머니는요?” 

“배고프면 일어나겠지.” 

셋이 마당으로 나왔다. 노부가 도마 앞에 앉아 넓적다리를 저몄다. 소쿠리에 수육이 차곡차곡 놓이는 동안 남자는 냄비에 탕국을 퍼 담았다. 여자는 평상 위에 상을 폈다. 양념장과 깻잎, 들깻가루를 가져다 놓고는 다시 파절임과 깍두기를 꺼내왔다. 수저통은 통째로 옮겨놓았다. 날은 이미 어두웠다. 노부가 지하실에서 손전등 몇 개를 꺼내왔다.

“수육이 알맞게 익었구나.” 노부가 말했다. 

“발은 별미로 구워 먹을까요? 족발보다 쫄깃하다던데?” 남자가 웃었다. 

“먹어봤냐?” 

“아니요.”

“이거나 먹어봐라.” 노부는 남자의 그릇에 개 껍데기를 올려놓았다. 

껍데기를 먹던 남자가 갑자기 헛기침했다. 음식물이 비닐막에 튀었다. 

“개털이 들어갔어요.” 얼굴이 붉어진 남자가 말했다. 

여자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들키지 않으려고 담장을 바라봤다. 담쟁이넝쿨이 뻗어 가고 있었다. 담벼락이 붉었다. 넝쿨손은 마당 안쪽까지 감겨 내려와 회양목 화단으로 줄기를 늘어뜨렸다. 부푼 줄기가 마당을 타고 뻗어 나와 평상 다리를 휘감았다. 바람이 일자 잎사귀들이 일었다. 마른 잎사귀들은 쉭쉭 소리를 냈다. 

밖에서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문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동시에 탕국으로 시선을 옮겼다. 개가 꼬리를 흔들며 짖었다. 노부가 갈비뼈를 던졌다. 뼈에 코를 박고 킁킁대던 개가 뼈다귀를 물고 집으로 들어갔다. 오독오독, 개집 밖으로 뼈 씹는 소리가 빠져나왔다. 수육을 입 안에 넣고 우물대는 노부의 입 주변이 번들댔다. 남자는 탕국을 퍼먹었다. 노란 손전등 불빛이 남자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었다. 

“맛이 어떠냐?” 노부가 물었다. 

“개죽 같아요.” 남자가 대답했다. 

“얘도 꼬리를 흔들었겠죠?” 여자가 젓가락으로 수육을 들췄다. 

“그야 개니까.” 노부가 수육 한 점을 여자 앞에 놓았다. 

“아버지, 도저히 못 먹겠어요. 케이크를 가져와야겠어요.” 

여자가 들어갔을 때 노모는 잠들어 있었다. 케이크 상자를 들고 선 여자가 노모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노모의 얼굴은 허물처럼 흐늘거렸다. 눈 아래 불룩 튀어나온 지방이 늘어져 눈두덩엔 검은 그림자가 졌다. 다리를 대자로 벌리고 잠든 노모의 발목에서 불거진 혈관이 종아리를 휘감고 올라갔다. 굵고 가는 줄기가 아래로, 옆으로, 위로 퍼지며 꼬이고 풀어졌다. 꽈리처럼 부푼 것도 있었고 거미줄처럼 펼쳐진 것도 있었다. 꼬불꼬불한 줄기는 노모의 몸을 타고 넘어 바닥까지 퍼져나갔다. 바닥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 노모의 몸을 타고 자라는 것 같기도 했다. 여자는 한동안 잠든 노모를 내려다보다가 방문 가까이 다가갔다. 노모가 여자의 발밑에서 뒤척였다. 여자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망설이며 서 있던 여자가 손잡이를 돌렸다. 틈새가 벌어졌다. 방안을 들여다보던 여자의 손에서 케이크 상자가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감겨있던 노모의 눈꺼풀이 스르르 열렸다. 





<당선소감>

 

소설은 진혼굿 아닐까… 더 차가워지고 싶다

 

“차가워, 그래서 도통 정이 가지 않아.” 

이런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내가 아니라 내가 쓰는 소설 이야기다. 지금 이런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은 그만큼 아팠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정말 차가운 사람인가? 인물들을 위로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그래서 인물에게 애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 따뜻함이라면, 그것이 소통과 공감이라면, 그렇다. 나는 차갑다. 그리고 더 차가워지고 싶다. 

냉동고에 걸린 개고기를 본 적이 있었다. 거기엔 어떤 의미도 과거도 수식도 없었다. 나는 죽은 개고기에 온기를 주거나 그래서 무언가를 위로하거나 조금 더 따뜻해졌으면 하는 희망을 품지 않았다. 그 순간을 그대로 얼려버리고 싶었다. 개를 보며 소설은 진혼굿이 아닐까 생각했다. 바다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서 믿지 못하는 아내에게 남편의 죽음을 직시하게 하는 것이 소설이 아닐까. 직시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이후의 삶은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따뜻함이다. 

함께 찬 공기를 견디며 말없이 같은 곳을 바라봐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나는 따뜻한 곳에서 차가운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 약력

▶ 1974년 서울 출생

▶ 숙명여대 영문과 졸, 명지대 문예창작과 석사 재학 중




<심사평>

 

우리의 자화상… 담쟁이넝쿨·노모 종아리 대비 돋보여

 

본심에 오른 10편 중 마지막까지 남은 건 세 작품이었다. 

먼저 무명의 늙은 재즈밴드 단원들 얘기를 다룬 ‘하우스 오브 페인’은 일단 소재와 서술기법 면에서 신인다운 패기와 의욕이 돋보였다. 그렇지만 스토리의 촘촘함에 비해 주제의 틀이 다소 허술한 점, 과도한 각주 사용, 재즈에 관한 현학적인 사설 등이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남은 두 작품은 어느 쪽을 당선작으로 내세워도 무리가 없을 만한 수준작이었다. 결국 전체적인 짜임새에서 선후가 갈렸다. ‘태풍이 지나고 나면’은 소설의 극적장치의 안정감, 풍부한 모티프의 활용이라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중소기업의 도산, 실직, 외국인 노동자, 고독사 같은 당대현실의 문제들을 짚어낸 점도 미더움을 주었다. 그러나 소설의 키워드라고 할 ‘의자’라든가 ‘실종’에 대한 모호한 마무리가 두고두고 아쉬웠다.

‘전에도 봐놓고 그래’는 작가의 의도와 형식이 놀랍도록 짜임새를 이뤄낸 작품이다. 흡사 한 편의 무대극 같은 이 소설은 두어 시간 동안 벌어지는, 한 가족의 평범하고 남루한 생활의 단면을 칼로 오려내듯 보여준다. 극히 무의미하고 진부하게만 뵈는 이 풍경의 내면엔 시종 독특한 불안감과 긴장감이 흐르는데, 그것의 원동력은 극도로 단순하고 절제된 서술과 인물 간의 건조한 대화에 있다.

노인의 생일날 마당에 둘러앉아 개를 통째로 삶아 뜯어먹고 있는 일가족의 풍경은 삶이 아닌 말 그대로 ‘생존’의 섬뜩한 민얼굴이다. 그 풍경이 더없이 끔찍하고 괴기스럽기만 한 것은 다름 아닌 이 시대 우리들의 자화상인 까닭이다. 그리고 담벼락과 땅바닥을 뚫고 거침없이 틈입해오는 담쟁이넝쿨과 노모의 종아리를 타고 번지는 정맥류의 넝쿨손을 절묘하게 대비시킨 결말은 단연 돋보였다. 역량 있는 신인의 탄생에 축하를 보낸다. 



심사 김원우·임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