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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바이러스 / 박민혁

 

 여기, 코로나 바이러스가 있다. 허공을 날아가는 침 속에 코로나 바이러스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들의 근원지는 왼편에 서서 소리를 치고 있는 입주민 박씨였다.

 

지난 일주일 동안 박씨는 심한 몸살감기를 앓았었다. 아내에게서 박씨로 옮겨온 코로나 바이러스들은 효과적으로 박씨의 몸에 침투하였으며 박씨의 체계적인 면역체계를 무력화시켰었다. 감기 따위는 두렵지 않다고 큰 소리치고 다니던 박씨로서는 한 방 먹은 셈이었다. 감기 따위에 병원에 간다고 부인을 타박했던 박씨는 자존심을 꺾고 감기에 굴복하고 말았다. 박씨는 병원에 가서 주사와 함께 약을 타왔다. 고작 10분도 안 걸리는 진료로 5천원이나 받는다며 투덜대긴 했으나 약효는 확실했다. 박씨의 즉각적인 대처에 의해 자신들의 생에 위협을 받게 된 바이러스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자신들이 박씨에게로 옮겨왔을 때의 방법을 취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박씨의 몸속에서 꽤 많이 증식한 자신들을, 박씨의 바깥으로 내보내 새로운 숙주를 찾아 자신들의 생을 이어가야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박씨가 갑갑하다는 이유로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다니는 것은 바이러스들에게는 호재였으나, 박씨가 집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점은―바이러스들은 박씨가 1년 전에 명예퇴직했으며, 퇴직금과 더불어 전세로 내놓은 아파트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도 알지 못했다―바이러스들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넓은 평수의 집에서 살아가는 존재는 오로지 박씨와 박씨의 아내 뿐이었으며, 따라서 바이러스들이 옮겨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박씨의 아내뿐이었으나 이미 바이러스들을 이겨낸 그녀에게 다시 바이러스가 옮겨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이러스들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대로 소멸해버리는 것일까, 전전긍긍하던 순간에 박씨가 집밖으로 나섰다. 바이러스들이 약성분에게서 겨우 버텨내고 있었을 때였다.

 

박씨가 경비실로 향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분노. 새로 온 경비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사실 이 사건의 시작은 박씨 때문이었다. 박씨가 며칠 전 홈쇼핑을 통해 구매한 홍삼진액 세트 3개가 아파트에 도착했다. 택배기사는 아파트에 들어서기 전에 박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xx택배인데요, 댁에 계신가요?"

 

박씨는 택배기사에게, 경비실에 맡기쇼, 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박씨는 택배기사가 아, 네 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2시쯤에 경비실에 전화해서 가져다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TV를 틀었다. 드라마 재방송, 낚시방송, 골프방송을 돌려보던 박씨는 시계가 2시를 가리키자 인터폰을 들었다.

 

"예, 경비실입니다."

 

느릿느릿하게 늘어지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새로 온 경비인가.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글자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발음하고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단어의 의미가 사라져버리기라도 하듯이. 박씨는 우선 경비의 느릿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박씨가 이 지점에서 분노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박씨의 요구는 단순했다.

 

"거 602호로 온 택배 하나 있죠? 그거 좀 가져다 주면 좋겠는데."

 

사실 박씨는 이 말만하고 전화를 끊을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지금껏 박씨의 요구는 언제나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박씨는 이러한 요구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의 대답은 박씨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직접 가져가셔야 되는데요."

 

이번에도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글자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천천히 말했다. 박씨는 처음엔 귀를 의심했고, 이후엔 단어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닌가 하고 자신의 머리를 의심했다. 그러나 상대가 한 말의 의도는 명확했다. 직접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박씨는 분노했다.

 

"거 그냥 가져다 주쇼, 그래야 하는 거요."

 

박씨가 말했다. 그러나 다시 상대가 대답했다.

 

"아니오, 직접 가져가셔야 합니다."

 

상대는 단호했다. 박씨는 순간 자신이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의심해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상대의 목소리는 너무도 당당했기 때문이다. 박씨가 잠시 할 말을 잃은 순간에 상대는, 그럼 전화 끊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박씨는 뚜우-거리는 통화음 앞에서 분노했다. 박씨의 분노는 곧장 박씨 신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박씨의 신체 온도가 올라감에 따라 바이러스들의 숨통이 트인 것이다. 만약 박씨의 신체 온도가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바이러스들은 타액에 섞여 새로운 숙주를 찾아 나서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축소되어 결국 소멸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박씨는 패딩을 거칠게 입고 집을 나섰다.

 

이것이 박씨의 몸에서 살아남은 코로나 바이러스들이 박씨의 타액을 타고 날아가게 된 경위였다. 박씨는 강압적인 목소리로 경비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경비는 박씨보다 나이가 20살은 더 많아 보이는 노인이었지만, 박씨의 분노는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박씨의 논리 속에서 갑의 위치에 서있는 것은 입주민 박씨이지 입주민들의 필요에 의해 고용되어 있는 경비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박씨의 타액을 탄 바이러스들은 극적으로 박씨의 몸을 탈출했으나 대다수는 노인의 옷깃에 떨어지며 의도대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부 소수의 바이러스들은 타액 방울에 타고 직접 노인의 입으로 침투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바이러스들은 노인의 약한 면역체계를 뚫고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는 준비에 착수할 것이었다. 아마 하루 정도 걸릴 작업이 될 것이었다.

 

바이러스들이 이렇게 급박한 과정 속에서 쾌거를 이룬 것과 마찬가지로, 박씨의 흥분 역시 고조되고 있었으며 그러나 정작 박씨에 의해 불행의 씨앗을 품게 된 피해자인 노인은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박씨는 마치 모래알을 상대하는 기분을 느꼈다. 노인은 그저, 예, 하고 듣고 있을 뿐이었다. 박씨는 노인에게, 알겠소, 라고 물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저 박씨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선뜻 나서서 박씨를 말리지 않았다. 결국 아파트 관리사무소장이 달려 나와 박씨를 중재하면서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며 이 사건과 그 어떤 직적접인 관련도 없는 관리사무소장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관리사무소장은 노인에게 박스를 들고 602호에 가져다주라고 말했다. 노인은 관리소장의 말만큼은 거역할 수 없었다. 노인을 고용한 용역업체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홍삼원액 3세트는 노인이 들기에는 무척 무거운 것이었다. 박씨는 여전히 옆에서 씩씩 거리고 있었고, 노인은 허리를 굽혀 박스를 힘겹게 들어올렸다. 관리사무소장은 박씨에게, 어제 밤에 첫 출근한 사람이라 일을 잘 몰라서 그런 거라며 양해를 구했다. 박씨의 흥분은 가라앉았다. 엘리베이터에 박씨와 노인이 함께 탔다. 박씨가 6이라고 쓰인 버튼을 눌렀다. 박씨는 노인에게 나름대로의 아량을 베풀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무래도 처음 하시는 일이라서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원래 입주자가 부탁하면 다 가져다주고 그래야 되는 거예요. 그게 경비실이 하는 일이니까요."

 

박씨는 노인에게 아량과 더불어 삶의 지혜를 알려주는 것만 같아서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노인은 박씨의 말을 하나도 들을 수 없었다. 박스가 너무도 무거웠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박씨는 노인을 배려를 한다는 마음으로 박스를 대신 받아들었다.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박씨는 박스를 들고 602호로 들어가 버렸고, 노인은 천천히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사이로 사라지는 박씨의 등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꽤 짙은 피로감을 느꼈다.

 

코로나 바이러스들은 새롭게 터전을 잡게 된 노인의 몸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실한 태도로 작업에 임했다. 우선 노인의 몸속에 침투한 바이러스들은 자신들이 바이러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다. 이 작업은 생각보다 쉬웠다.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노인의 신체는 고령으로 인해 면역체계가 충실히 구축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노인의 신체로 침투한 코로나 바이러스들은 숙주세포에 자신의 유전물질을 심어 넣었다. 그리고 숙주세포를 속이기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로 기다렸다. 이제는 기다림과의 싸움이었다. 노인의 면역체계는 녹슬어있었고, 자신의 몸속에 침투한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노인의 긴장이 풀리는 순간이 찾아오면, 숙주세포들은 단백질을 만들 것이고 바이러스들은 이 단백질을 먹고 성장해 숙주세포를 완전히 장악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숙주세포를 완전히 장악하면, 바이러스는 장악한 숙주세포를 버리고 새로운 숙주세포로 이동할 것이고, 그렇게 계속해서 노인의 몸을 휘저을 것이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침투하여 벌인 조만간의 소동 때문인지, 노인은 자신의 몸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얼굴이 열로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그와 반대로 피부에 닿는 공기는 너무도 차가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감기가 아닐까, 노인은 덜컥 겁을 먹었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겠지. 감기라기엔 기침이 나지 않잖아. 그저 오랜만에 일을 해서 피로를 했을 뿐이야.

 

세 시간 뒤, 다음 근무자와 교대를 하고 노인은 첫 퇴근을 했다. 경비실을 나오자 갑자기 차가운 공기가 노인의 호흡기를 급습했다. 노인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기침을 토해냈다.

 

노인이 일하는 아파트 단지에서 노인이 사는 원룸텔까지의 거리는 버스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노인은 마을버스에 올라탔다. 아직 애매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버스는 사람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상태였다. 노인은 조심스럽게 젊은 여자가 앉은 좌석을 비집고 들어갔다. 좁은 공간을 넘어 안쪽 자리로 가기 위해선 안간힘을 써야 했다. 자리에 앉자 숨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노인은 차가운 콧물이 입술에 닿을 때가 되어서야 콧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손등으로 콧물을 닦아낸 노인은 억지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옆자리에서 불편한 기색이 느껴져 왔기 때문이다.

 

버스는 거칠게 도로를 달렸다. 해가 일찍 지는 계절이어서 핏빛으로 물든 하늘이 창밖에 서렸다. 그러나 창이 너무도 뿌옇게 얼룩덜룩해서 노인의 늙어버린 눈은 하늘의 색을 모두 담아내지 못했다. 옆자리 젊은 여자가 내리고, 이제는 젊은 남자가 앉았다. 젊은 남자의 덩치 때문에 노인은 구석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노인이 입은 품 죽은 패딩은 젊은 남성의 풍성한 덕다운에 눌려버렸다. 노인은 어깨를 둥글게 말아서 창에 바싹 붙었다. 창밖의 찬 기운이 얇은 창 너머로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인은 잠에 들었다. 노인이 잠에 들자 바이러스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노인이 퇴근하고 버스에 올라타서 잠든 사이에 숙주세포들은 단백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바이러스들은 이 단백질을 자양분 삼아 숙주세포 안에서 증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증식하고, 증식하고…첫 번째 세포 탈출이 일어났다. 이제 바이러스들에게 노인의 몸은 노다지나 다름없었다. 바이러스들이 애쓰고 있는 동안에 노인은 짧은 꿈을 꾸었다. 버스기사와 노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버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가는 꿈이었다. 노인은 내려야 할 정류장을 알리는 안내방송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긴장이 채 돌아오지 않은 상태로 노인은 급하게 벨을 누르고 일어섰다.

 

버스에서 내리자 오한이 느껴졌다. 찬 공기가 입을 통해 노인의 몸으로 들어와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마치 두들겨 맞는 느낌과 흡사하여서, 노인은 벌써 50년이나 지난 자신의 군대생활을 떠올렸다. 자신을 미친 듯이 때렸던 김 병장….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몇 년 전, 노인은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만난 동기에게 김 병장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암에 걸려 죽었다고 했다. 노인은 처음엔 통쾌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도 김 병장의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죽었음에도 김 병장은 노인의 곁에 여전히 머물고 있었다. 왼쪽 가슴이 아파왔다. 김 병장을 떠올리면 노인은 언제나 왼쪽가슴이 아파왔다. 그 날 밤, 노인은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도 김 병장은 여전히 권위적이었으며, 그 단단하고 야무진 주먹으로 노인의 가슴을 강타했다. 꿈에서 깨어난 노인은 왼쪽 가슴을 손으로 문질렀다. 빌어먹을 놈. 노인이 중얼거렸다. 40년여 전에 김 병장의 야무진 주먹에 맞았던 왼쪽 가슴은 이후로 줄곧 노인의 발목을 잡아왔었다. 그리고 언덕을 오르는 지금 이 순간에도 노인은, 김 병장을 떠올려서인지 왼쪽 가슴이 멍든 것처럼 아파왔다. 노인은 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올린 채로 언덕길을 올랐다. 숨이 가빴다. 무릎이 아파왔고, 왼쪽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추웠다. 온 몸의 뼈와 관절을 추위가 두들기고 있었다.

 

노인이 사는 원룸텔은 모텔을 개조한 허름한 건물이었다. 노인은 우편함에 303호 앞으로 온 편지가 있나 살펴보았다. 고지서가 두 개 와 있었다. 전기세와 가스비 고지서였다. 노인은 주머니에 고지서들을 넣고 힘겹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303호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냄새가 노인을 반겼다. 곰팡이 냄새와 노인의 몸냄새. 둘은 퀴퀴하고 불쾌감을 유발한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오랫동안 삭고 삭아서 생긴 냄새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었다. 낡은 벽지 사이로 곰팡이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은 이사 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무렵부터였다. 그때부터 곰팡이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노인은 냄새의 근원을 찾아서 헤매다가, 원래부터 있었던 작은 옷장을 힘겹게 밀어보았다. 옷장에 가려진 벽면에 푸르스름한 곰팡이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노인은 휴지로 곰팡이를 슥 닦아보았다. 지워졌다. 그러나 노인은 알고 있었다. 곰팡이들은 지워지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을. 결국 노인은 다시 힘들게 옷장을 밀었다. 노인의 눈에서 곰팡이는 사라졌다. 그러나 곰팡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곰팡이는 옷장 뒤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었다. 냄새로 말이다.

 

오한이 노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노인은 전기장판의 온도를 3으로 올렸고, 이불 안으로 몸을 뉘었다. 그러나 이제 막 열을 올린 전기장판과 공기 속에 놓여있던 이불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노인은 차가움과 차가움 사이에 놓인 샌드위치 햄이 된 기분으로 추위에 떨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서서히 열이 올라오기 시작하자 노인은 자신을 옥죄고 있던 패딩을 벗었다. 옷을 벗자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서 노인은 어디론가 숨고 싶은 기분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노인은 이불 안으로 자신을 숨겼다. 노인은 니트를 입은 채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이불로 얼굴을 완전히 덮으면 소리 소문 없이 숨이 멎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얼굴만큼은 찬 공기 속에 내버려둬야 했다. 장판의 열이 이불 안을 덥혔다. 얼굴을 파고드는 찬 공기와 장판의 열은 노인에게 열과 땀과 고통을 함께 유발하고 있었다. 노인은 감기기운이 점차 심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내일 오후까진 낫겠지. 노인은 생각했다. 나아야만 해. 그러나 어떻게? 약도 먹지 않았는데. 오는 길에 약국을 들렀어야 했는데. 아니야, 약을 먹지 않더라도 이 정도 감기는 금방 나아. 아니, 웃기는 소리야. 나는 늙었어. 노인은 두 달 전에 앓았던 감기를 떠올렸다. 그 감기는 아직도 낫지 않은 거 같아. 어쩌면 그 감기가 다시 활동을 시작한 건지도 몰라, 내 몸속에서. 어쩌면 새로운 감기 바이러스가 들어와서 잠들어있던 바이러스와 만났을 지도 모르지. 아무튼 내일 낮까지는 무조건 나아야 해. 한 숨 자고 나면 나을 거야. 1년 만에 겨우 구한 직장이야. 첫 출근을 했는데 바로 다음 날 아파서 못 나간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역시 약국에 들렀어야 했나? 아니야, 약을 살 돈은 없어. 갑자기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어지는군.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건강이 나아졌다면, 해장국집에 가서 콩나물해장국이나 한 그릇해야지. 아니, 그럴 수 없어. 11만원으로 한 달을 버텨야 해. 그럼 110만원의 월급을 받을 수 있어. 그때 콩나물해장국을 사먹자. 라면이 남아 있던가? 아마 하나 남아있을 거야. 그래, 그럼 내일은 라면을 먹자. 대신 월급을 받으면 콩나물해장국을 사먹는 거야.

 

노인은 아주 깊은 잠에 들었다. 깊은 잠은 노인을 꿈의 세계로 인도했다. 노인은 꿈속에서 자신의 몸속을 유영했다. 시뻘건 식도를 타고 내려온 노인은 자신의 몸속에 들어온 코로나 바이러스들을 만나게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들은 동그라미에 팔과 다리가 달린 단순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노인은 바이러스들에게 말했다. 네놈들이었어. 네놈들이 나를 아프게 했던 거야. 코로나 바이러스들이 노인을 비웃었다. 노인은 그런 코로나 바이러스들에게 부탁했다. 이제 그만 날뛰게나. 그러자 코로나 바이러스는 갑자기 노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쳤다. 노인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가슴을 부여잡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겨우 고통을 수습하고 노인이 고개를 들었을 때, 코로나 바이러스는 김 병장으로 변해 있었다.

 

"차렷."

 

왼쪽 가슴이 아파왔다.

 

노인의 늙은 숙주세포들은 판단능력을 상실했고, 면역체계는 유명무실했다. 숙주세포들은 이미 바이러스들에게 잠식된 지 오래였다. 첫 번째 숙주에서의 탈출이 일어난 뒤로, 노인의 수많은 세포들에 바이러스가 침투했다. 바이러스는 자신의 포크를 찔러 넣었고, 노인의 세포와 결합했다. 세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바이러스들이 노인의 세포들을 장악해감에 따라 노인의 신체에는 커다란 무리가 따르고 있었다. 탈출은 세포의 죽음을 동반했다. 세포의 죽음은 노인에게 고통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원래대로의 역할을 해야 할 세포들이 죽고, 감염되고, 마비되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노인이 잠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노인은 꽤 오랜 시간동안 죽은 듯이 잠들어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인이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아예 인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노인의 무의식은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변화, 그리고 그에 동반되는 고통을 꿈을 통해 경고하려 했다. 노인이 꿈속에서 바이러스들을 만난 것도, 김 병장에게 오랜 시간 시달린 것도 전부 바이러스가 야기하는 고통 때문이었다. 왼쪽 가슴이 아파오는 것은 바이러스들이 난장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 병장에게 맞아 호흡이 곤란해졌던 것은 실제로 기침을 했기 때문이다. 꿈속의 배경이 한 여름의 병영이었던 것은―전기장판의 열과 노인의 몸에서 나는 열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노인이 악몽을 꾸게 된 것은, 그러니까 한 동안 노인의 꿈에 나오지 않았던 김 병장이 다시금 노인의 꿈에 나타나게 된 것은 오로지 바이러스들 때문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잠에서 깨었다가 잠드는 것을 반복했다. 노인은 악몽에서 벗어나 다행이었으나 몸은 노인에게 다시 휴식을 강요했다. 노인은 어둠 속을 몽롱한 시선으로 쫓다가 다시 잠들었다. 새로운 꿈을 꾸었지만, 노인은 기억하지 못할 꿈이었다. 감기기운에 전의식이 마비가 되어 무의식의 언어가 그대로 꿈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꿈이어서 노인은 이해할 수도, 그리고 기억할 수도 없는 꿈이었다. 물론 한 가지 감정만큼은 노인에게 남겼다. 고통. 계속되는 꿈의 늪에서 노인은 지쳤다.

 

노인이 잠에서 깬 것은 오후 12시였다. 원래 노인이 일어나던 시간보다 훨씬 늦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노인이 출근하기까지는 2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그러나 노인은 몸을 일으키는 것이 버거웠다. 이불은 무거웠고, 전기장판은 뜨거웠다. 온 몸은 땀에 젖어있어 불쾌했으며, 분명 뜨거운 곳에 있음에도 오한을 느끼고 있었다. 뜨거우면서도 온 몸이 시린 느낌이 노인을 지배하고 있었다. 노인은 이제 자신이 감기가 걸렸다는 사실을, 걸려도 아주 심하게 걸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약을 먹었어야 했는데. 노인이 중얼거렸다. 1시간만 더 누워 있을까. 노인은 그러기로 했다. 1시간 동안 노인은 누워서 자신이 꾸었던 꿈의 조각을 쫓았다. 김 병장. 이름만 들어도 온 몸이 벌벌 떨리는 이름. 그토록 선명하게 남은 인상과는 다르게 꿈의 내용은 흐릿했다. 꿈의 인상은 오로지 김 병장만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었다. 김 병장, 님. 노인은 조용히 되뇌였다. 다시 내뱉어도 지독한 이름이었다. 권위의 자체였던 그. 그의 주먹 아래 모두가 엎드렸었던 기억이 노인에게 떠올랐다.

 

김 병장은 노인을 처음 본 날, 노인을 자신의 앞으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잘 부탁한다."

 

노인은 자신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김 병장의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바짝 짧게 깎은 깍두기 같은 머리에 우람한 어깨, 단단한 팔뚝을 드러내고 있던 김 병장은 듬직해보였다. 그리고 그 날 밤부터 집합이 시작되었다. 집합의 원인은 노인이었다. 새로 들어온 신병인 노인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김 병장 아래의 사람들이 모두 소집되었다. 김 병장의 말에 모두 아무런 불만도, 대꾸도 하지 않고 머리를 박았다. 첫 날 노인은 뺨을 맞았고, 둘째 날은 복부를 차였다. 세 번째 날에는 정강이를 군화발로 차였다. 노인의 선임이었던 이 상병도 옆에서 함께 맞았다. 김 병장이 떠나면, 이 상병의 폭력이 시작되었다.

 

폭력의 굴레였다. 노인은 둥글게 매듭지어진 굴레를 견딜 수밖에 없었다. 폭행의 흔적이 명백히 드러나 있음에도 간부들은 쉬쉬했다. 일상이었다. 김 병장에게 노인뿐만 아니라 김 병장 아래의 모두가 복종하고 있었다. 김 병장의 동기들과 간부들은 김 병장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폭력이 통용되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랬다. 공포와 위압, 권위가 온 나라를 장악하고 있던 시기여서 그랬다. 굴종과 복종이 온 국민들에게 심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노인은 각오를 하고 군에 입대했었다. 노인은 자신보다 먼저 군에 다녀온 동네 친구 칠성이가 바보가 되어 돌아왔던 것도 보았고, 오른다리가 병신이 되어 돌아온 형의 모습도 보았다. 그러나 이는 시대의 아픔이었을 뿐이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개인의 불행은 어쩔 수 없는 것이며, 군인 출신의 독재자의 나라에서 사는 국민이란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할 숙명이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맞닥뜨린 현실은 짊어질 수조차 없이 무거웠다.

 

몸이 무거웠다. 노인은 힘겹게 이부자리에서 일어섰다. 온 몸에서 땀이 나서 불쾌한 냄새가 방안에 진동을 하고 있었다. 전기장판에서 벗어나자 찬 공기가 노인의 몸을 강타했다. 온 몸이 두들겨 맞는 것과 같은 오한이 노인을 감쌌다. 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며, 이부자리 근처에 급하게 벗어두었던 패딩을 위에 걸친 채로 방에 바로 붙어있는 싱크대로 향했다. 노인은 싱크대를 틀어 목을 축였다. 싱크대 위의 찬장을 여니 라면이 하나 있었다. 맞다, 라면을 먹기로 했지. 노인은 라면을 꺼냈다. 작은 양은 냄비에 수돗물을 붓고 가스를 켰다. 맞다, 고지서. 노인은 패딩에 꽂아두었던 고지서를 꺼내 읽어보았다. 가스비가 5만원이나 나왔고, 전기세는 3만원이 나와 있었다. 11만원에서 5만원과 3만원을 빼면 3만원이 남는군. 3만원으로 한 달을 버텨야 하나. 아니야, 보름만 일하면 월급을 가불 받을 수 있을 거야. 그 수밖엔 없겠군. 그러나 오늘 일을 나갈 수 있을까? 물이 끓었다. 끓는 물의 열기가 노인에게로 향했다. 기침이 시작되었다. 기침은 꽤 오랫동안 멈추지 않았다. 라면을 다 먹고 나서도 노인의 몸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몸은 더 나빠지고 있었다. 미리 말을 해야 할까. 그래, 지금 연락을 해야 해. 나를 대신해 줄 사람을 구하려면. 이미 늦을 대로 늦어버렸지만. 그래도 양해를 해주겠지. 요즘 같은 시대에 하루 만에 사람을 자를 수는 없어.

 

노인은 핸드폰으로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 어제부터 경비로 일하는 천씨입니다."


"아, 예."

 

노인은 수화기 너머로 메아리치듯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저, 감기에 걸려서…몸이 안 좋아서…오늘 못 나갈 거 같아서 말입니다."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침묵이 끝나고, 짜증이 섞인 탄식소리가 들려왔다.

 

"아, 편찮으셔서요. 정말 못 나오실 정도로 아프신가요?"


"예."

 

상대방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묻어나왔다.

"아, 예. 아침에 알려주시면 더 좋았을 텐데…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생기면 하루 전에는 미리 말씀해주세요. 대체할 사람을 구해야 되니까."

 

전화가 거칠게 끊어졌다. 노인은 부담스러워졌다. 이런, 눈도장 찍혔겠는데. 기침과 오한이 너무 심해져서, 노인은 다시 장판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한숨 더 자자. 내일은 나가야 되니까. 약 사러 가야지, 약도 사고 먹을 것도 사와야 해. 그러나 지금 밖에 나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몸이 좀 괜찮아질 테니 그때 나가자. 노인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 기침과 두통, 오한 때문에 노인이 잠에 든 것은 자리에 누운 지 한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만약 노인이 아프지 않았더라면 일터에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노인의 꿈은 어둠의 연속이었다. 어둠을 걸으며, 자신이 어둠 위를 걷는 것인지 어둠을 밟고 있는 것인지를 고민하는 꿈이었다. 꿈속의 노인은 단 한 가지, 밝은 빛이 저 끝에 있을 거란 희망을 품고 걸었을 뿐이다. 꿈에서 깨어난 노인은 자신이 빛에 다가갔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물음은 방안의 어둠 속에서 뭉개져버리고 말았다. 저녁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노인은 다음 날에도 일을 나가지 못했다. 감기는 더욱 심해졌다. 도저히 집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으며, 전화를 걸 수 있는 기력도 없었다. 노인은 녹슨 주전자에 받아둔 수돗물로만 목을 축이며 삼일을 내내 앓았다. 삼일 동안 노인은 자신이 깨어있는 것인지 잠들어있는 것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혼수상태에 놓여 있었다. 노인은 분명 방안의 어둠을 직시하고 있었다. 노인은 누운 채로 어둠을 바라보았다. 어둠에는 김 병장의 얼굴이 어리기 시작했다. 앓아누운 노인을 내려다보는 김 병장의 얼굴이. 관리소장의 얼굴이 어리기도 했다. 택배기사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고, 자신에게 윽박지르던 박씨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다. 버스에서 노인의 존재를 불편하게 여기던 젊은 여자와 남자의 얼굴이 어리기도 했다. 다리가 병신이 되었던 형의 모습이 어리기도 했으며, 바보가 되어 웃기만 하던 칠성이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없는 아내와 집을 나가버린 아들의 모습도 보였다. 노인은 3일 동안 그 동안 살아오며 만났던 사람들 중에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보았다. 노인은 자신의 방에 찾아온 손님들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노인을 보러 와주었다. 노인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서. 노인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 찾아온 손님들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죽음에 굴복하지 않았다. 노인의 신체가 드디어 바이러스에 저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주 서서히, 천천히 회복이 진행되었다. 3일이 지나고,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노인은 아주 말라 있었다. 왼쪽 가슴은 폐병에 걸린 것처럼 아팠고, 여전히 오한이 있었지만 고비는 넘긴 상태였다. 노인은 찬물로 얼굴을 대충 씻었다. 대충 모자를 눌러쓰고, 패딩을 입고 노인은 천천히 집밖으로 나왔다. 매서운 한파가 노인을 반기고 있었다. 노인은 온 몸을 웅크렸다. 발가락까지 둥글게 말아서, 자신의 몸을 껴안아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 4일 만에, 노인은 아파트 단지로 나왔다. 노인은 기대를 했다. 자신을 바라볼 소장의 얼굴을. 자신을 반겨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장의 표정은 노인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소장의 얼굴에는 짜증과 당혹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이제 오시면 어떡합니까."

 

노인은 숨이 찼기 때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소장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전화도 안 받으셔서. 3일이나 무단 결근하셨어요. 딱 하루 나오시고."


소장은 노인의 얼굴을 훑었다.

 

"아프셨던 건 사실이었나 보네. 흠흠, 아무튼. 죄송하지만 이제 자리가 없어요. 저희도 시스템이란 게 있잖습니까. 서클이 돌아가야 되는데, 어르신 때문에 무너졌단 말이에요.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소장은, 원래는 주면 안 되는 돈이에요, 오히려 저희가 손해를 본 거기 때문에…그래도 정이 있으니까, 라고 중얼거리며 서랍을 열어 흰 봉투를 꺼내 노인에게 건넸다.

 

"보아하니 약도 못 드시고 밥도 못 드신 거 같은데, 이걸로 사드시고 들어가세요. 그리고 이런 일 하기에는 체력도 안 되시는 거 같고…. 아무튼, 유감입니다."

 

노인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흰 봉투와 소장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수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 노인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관리사무소를 나왔다. 터벅터벅 아파트 단지를 걷는 노인의 옆으로 홍삼진액 상자를 경비실에 배달했던 XX택배기사가 지나갔다. 노인을 발견한 택배기사는 멈춰서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외출 후 집으로 들어오던 박씨도 노인을 발견했다. 그러나 노인은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노인은 흰 봉투를 꼭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노인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콩나물해장국집에 들어섰다. 콩나물해장국 한 그릇을 시키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노인은 봉투를 열어보았다. 5만원이 들어있었다. 5만원. 노인은 조용히 되새겼다. 뜨거운 콩나물해장국이 나왔다. 날계란 하나가 풀어져있는 콩나물해장국 국물을 한 입 떠 입에 넣었다. 온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노인은 몇 숟가락을 더 뜨지 못하고 결국 먹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입맛이 없었다. 노인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만 원짜리 한 장을 카운터에 건네고 5천원을 거슬러 받았다.

 

언덕을 오르고, 계단을 올라 303호의 문을 연 노인은, 쾌쾌한 방을 바라보며 이곳이 나의 관이라고 생각했다. 노인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오한이 다시 시작되었다. 무리한 외출이었다. 회복세로 접어들었던 노인의 신체는 다시 바이러스들의 세상이 되었다. 바이러스들은 신이 나서 세를 넓혀나갔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김 병장부터 잘못되었다. 김 병장을 만난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노인은 생각했다. 김 병장의 야무진 오른손이 노인의 왼쪽 가슴을 후려쳤던 순간이 모든 비극의 씨앗이었다. 그래, 김 병장은 감기였어. 우리 부대의 감기, 바이러스였다고. 모두를 폭력과 권위와 위압으로 전염시킨 바이러스. 김 병장이 남기고 간 바이러스는 모두를 전염시켰다.

 

노인은 왼쪽 가슴이 불편한 채로 전역을 해야 했다. 왼쪽 가슴은 언제나 노인의 발목을 붙잡았다. 김 병장 때문이야. 노인은 매일 같이 생각했고, 그럴 때마다 왼쪽 가슴은 찌르는 듯이 아파왔다. 사람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이 자살했다. 번개탄을 피웠지. 노인은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흰 봉투를 바라보았다. 흰 봉투에는 4만 3천원이 들어있었다.

 

노인은 이불을 덮고 누웠다. 노인은 어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둠 속엔 김 병장이 있었다. 30년 전에 길에서 만났던 김 병장이 있었다. 데모가 한창이었다.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화이트칼라들이, 교수들이 길거리를 점령했다. 그들의 행렬과 반대방향으로 노인은 뛰어가고 있었다. 집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집에 가서 한 시간이라도 더 자야, 내일 더 많은 상자를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달려가던 노인은 행렬 속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흰 소매를 팔뚝까지 걷은 김 병장의 얼굴을. 김 병장은 군중 속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쿠데타 세력 타도하라! 노인은 멍하니 멈춰서 김 병장을 바라보았다. 김 병장이 속한 행렬은 금방 지나가버렸다. 아…. 노인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왼쪽가슴의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노인은 그저 모두가 지나가버린 공허한 길거리에서 왼쪽가슴을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김 병장이 사라졌다. 그리고, 어둠뿐이었다. 아무런 상도 맺히지 않았다. 아들을 낳고 죽어버린 아내나 도박 빚을 지고 집을 나가버린 아들의 모습은 어둠 속에 없었다. 자살한 형의 모습도 없었다. 어둠 속엔 어둠 밖에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뿐이었다. 노인은 어둠을 걷기 시작했다. 끝에는 빛이 있기를 바라며….

 

며칠 뒤에 노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껍질도 벗겨지지 않은 번개탄이 노인의 머리맡에 있었다. 노인은 감기 바이러스를 이겨내지 못했을 뿐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노인의 시체는 화장장으로 옮겨졌다. 노인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노인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며칠 뒤에, 부동산에 한 중년의 남자가 찾아왔다. 다 헤진 골덴 바지와 품 죽은 패딩을 입은 남자는 원룸텔의 주인이기도 한 부동산 사장에게 자신이 노인의 아들이라며 보증금을 찾으러 왔다고 말했다. 원룸텔 주인은 노인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듣지 못했다고 대꾸했다. 그러자 남자는 원룸텔 주인에게 서류를 보여주었다. 원룸텔 주인은 서류와 남자를 못마땅하다는 듯이 번갈아 쳐다보았다. 남자는 원룸텔 주인의 시선을 피했다.

 

"우리 원룸텔은 보증금이 없어요. 잘못 찾아온 거요. 가뜩이나 노인네가 전기세랑 수도세랑 가스비랑 다 안 내서 그거 내가 내게 생겼는데…당신이 내줄 거요? 보아하니 못 내줄 거 같은데. 딱한 노인네. 정 뭐라도 있나 궁금하면 303호로 가 봐요. 여기 열쇠. 아직 안 치웠거든, 장례 치러준다 생각하고 안 치웠으니까. 불쌍한 노인네 같으니."

 

남자는 열쇠를 받아들고 부동산을 나섰다. 원룸텔에 들어서서, 3층까지 올라온 남자는 303호의 문을 열었다. 쾌쾌한 냄새가 남자를 반겼다. 남자는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섰다. 남자의 눈이 번뜩였다. 가장 먼저 남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놓인 흰 봉투였다. 흰 봉투에는 4만 3천원이 들어있었다. 남자는 흰 봉투를 주머니에 넣었다. 이후에 남자는 노인의 작은 방을 뒤지고 또 뒤졌다. 마지막에 남자는 옷장 구석에서 통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통장에는 113,43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남자는 통장도 주머니에 넣었다. 더 이상 챙길 것이 없음을 확인한 남자는 미련이 없는 발걸음으로 303호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날 밤, 남자는 감기에 걸렸다.

 

<끝>





<당선소감> 


"글을 쓴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


 소감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있다. 새삼 느끼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처음으로 써보는 소감문이니 멋있게도 써보고 싶지만, 그럴 능력이 내겐 없는 것 같다. 수차례 쓰고 지우며 얻은 결론이다.

 

아마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글을 써서 상을 탔다고 말을 하면 놀랄 것이다. 특히나 소설이라고 한다면 더욱 더. 꿈에 대한 확신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꿈도 제대로 말하고 다니지 못하는 쫄보였다. 그나마 다시 글을 열심히 쓰기 시작한 재작년부터야 누군가 물어보면 조용히, 글을 쓰는 게 꿈입니다, 라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좀 더 큰 목소리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글을 놓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그런 내게 손을 내밀어주신 것 같아 감사할 뿐이다. 내밀어주신 손을 붙잡고 일어서서 힘이 닿는 데까지 걷고 싶다.

 

휴학하고선 대책도 없이 집에만 있는 아들을 내쫓지 않은 아버지, 먼 곳에서 항상 나를 응원해주신 어머니, 청주에 살고 있는 누나, 항상 부족한 나를 믿고 응원해주시는 가족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언제나 곁에서 응원해준 이승림, 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항상 재미없는 글들을 읽어주고 진지하게 평가해준 O, 수라의 길을 걷고 있는 박철웅, 그리고 재창조 사람들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글틴에서 3년 동안 가르쳐주신 초록불 선생님, 그리고 문장에서 지난 1년 동안 많은 도움을 주신 대관령 선생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족한 글을 좋게 봐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세상에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충청일보사에게 감사드린다.



▲△1994년생 △인천광역시 출생 △인하대학교 사학과 재학


<심사평


"신인다운 패기·주목끄는 작품 다수"


  모든 신춘문예가 정월 초하룻날에 발표하는데 비해 창간 일인 봄날에 맞춰 작품을 공모한 충청일보의 새로운 신춘문예가 나름대로 의미 있어 보였다. 타작이 끝난 뒤에 추려낸 알곡을 뒷목이라고 하는데, 본선에 올라온 24편 모두 알곡처럼 일정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특히 주목을 끈 작품은 다음과 같다. '올가미'는 밀렵꾼을 소재로 한 특이한 작품으로, 사건 전개나 문장이 안정됐으나 신인다운 패기가 아쉬웠다. '초생달 회심기'는 특이한 소재의 이야기인데, 이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 의도가 아쉬웠다. '붉은 립스틱'은 모녀의 고단한 삶을 차분한 호흡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비극성 외에 확장된 의미가 없었다. '하루살이의 변태'는 능숙한 말솜씨가 힘 있게 보였지만 안이한 플롯구조가 흠이었다. '촛불'은 소재가 풍부하고 신기했으나 하나의 내용으로 집약되지 못한 흠이 커보였다.


이런 연유로 배제된 뒤 선자의 손에 네 편이 남았다. '멀고 먼 길'은 이혼 부부의 고단한 삶의 여정을 형상화 했다. 오늘의 세태를 반영한 장점이 있었지만 신인다운 패기가 아쉬웠다. '줄리엣 장미'는 문장력은 돋보였으나 이야기가 집약되지 못한 흠이 컸다. 많은 등장인물이 빚어낸 사건을 단편소설로 소화하기에는 벅차보였다.


마지막 두 작품을 놓고 고심했다. '돼지'는 형제와 아버지 어머니 각자의 삶을 균형 있게 그린 작품으로, 고단한 삶의 여정이 잘 드러나는 완성도 높은 글이었다. '바이러스'는 주인공 노인에게 서사가 집약된 장점에 주제도 무게감이 있었다. 두 작품을 놓고 마지막까지 고심했지만 신인다운 패기에 방점을 둬 '바이러스'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모두의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 채길순 명지전문대 교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