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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율가(栗家)  / 이소회

 

갓 삶은 뜨끈한 밤을 큰 칼로 딱, 갈랐을 때

거기 내가 누워있는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벌레가 처음 들어간 문, 언제나 처음은 쉽게 열리는 

작은 씨방 작은 알 연한 꿈처럼 함께 자랐네

통통하니 쭈글거리며 게을러지도록 얼마나 부지런히 밥과 집을 닮아갔는지

참 잘 익은 삶 


딸과 딸과 딸이 둘러 앉아 끝없이 밤을 파먹을 때마다

빈 껍질 쌓이고 허공이 차오르고 닫힌 문이 생겨났다

말랑한 생활은 솜털 막을 두르고 다시 단단한 문을 여미었다

강철 같은 가시는 좀도둑도 막아주었다 

단단한 씨방 덜컹덜컹 뜨거워지는데 

온 집을 두드려도 출구가 없네 

달콤한 나의 집, 차오른 허공이 다시 밥으로 채워질 때, 혹은 연탄가스로 뭉실뭉실 채워질 때 

죽음은 알밤처럼 완성된다 


죽음은 원래가 씨앗이기 때문이다




  <당선소감>


   펜으로 누군가에 보탬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칼을 쓴다는 사람이 한 말 앞에서 오래 숙연해졌다. 말이 말을 낳는 복잡한 상황을 헤쳐 나갈 힘이 없다는, 그분의 말 앞에서 오래 떨었다. 뾰족한 만년필 촉을 자주 들여다봤다. 날카로워서 누군가를 상하게 할 만했다. 그러나 참으로 무력하기도, 한없이 비겁하기도 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스티로폼 판을 들고 앞서 걷는 노인이 휘청휘청 바람에 밀리며 옆으로 걸었다. 나무에 남아있던 은행잎이 햇살 부서지듯 무더기로 떨어져 내렸다. 부끄러운 이름을 우체국 창구에 내밀고 나오던 길이었다. 이제 그만해야 할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정신 차리고 제대로 시작하라는 듯 소식이 왔다. 펜으로 누군가를, 무언가를 살리는 일에 보탬이 될 수 있으면 제일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더 작고 약한 것이길 바란다. 무력함으로라도 밀고 나가길, 적어도 비겁하지 않길 바란다. '변방은 창조공간'이라는 신영복 선생님 말씀도 다시 새긴다.

 

  늘 부족한 제자라 송구하기만 했는데 김재홍 교수님께 제대로 인사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시 스승이면서도 시 동무를 자처해주신 김수우 선생님, 그리고 이선형 선생님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함께 공부하고 글 쓰는 사람들이 있어 다시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가족들에게 큰 감사를 드린다. 어릴 적부터 유쾌함을, 꾸준한 노력을 몸소 가르쳐주신 부모님, 꼼지락거리며 자기 생을 펼쳐가고 있는 사랑하는 채은, 류원, 생각지 못한 것을 알게 해주는 남편, 모두와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다시 용기를 갖게 해주신 심사위원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글로 보답하도록 애쓰겠다는 말씀을 올린다. 


  ● 1974년생.

  ● 본명 이소연.

  ●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

 

  <심사평>


  선명한 주제의식·사물에 대한 섬세한 접근 돋봬


  올해 응모작들은 사회의식을 갖추거나 삶의 현장감 있는 작품이 드물고 너무 정감적으로 흘러가서 주제의식이 미약한 것 같다.

 

  감각적이고 감성적이며 말초적인 작품들에서 삶의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작품들이 상투적인 표현으로 흘러 미학적 성숙도도 많이 떨어지고 상상력의 고갈도 보여준다.

 

  주제의식을 갖추지 못한다면 산뜻한 이미지로서 독자의 영혼을 끌어당기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선뜻 눈이 가는 작품이 부족했다. 일반적인 생각에 머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선자들의 기대치가 높아서인지 선명함을 지닌 당찬 작품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철학적이고 투철한 저항 의식을 담는다든가 명료한 이미지를 끌어오지 못함이 짙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중에서도 최종심에 오른 '냄새가 구석을 살핀다' '달맞이꽃' '탄생비화' '당도' '겨울파밭' '율가' 등은 일반적 범주를 뛰어넘은 수작으로 여겨진다. 이 중에서 '율가'를 당선작으로 미는 힘은 주제의식이 선명하고 사물에 대한 접근 방식이 섬세하다는 것이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도 고른 수준이어서 선택에 어렵지가 않았다. 힘든 시의 길에 좋은 작품을 남길 것을 요구한다.

 

심사위원 : 강은교, 강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