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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미륵을 묻다 / 김형수

 

이천여 년 전의 방가지똥 씨앗이

스스로 발아가 된 적이 있다고 한다

한 해밖에 못 사는 풀이 때를 기다린 것이다


사랑할 만한 세상이 오지 않아 

이천 년 동안 눈 감은 태연함이라니

고작 일 년 살자고 이천 년을 깜깜 세상 잠잤다니


그런 일이 어찌 꽃만의 일이랴

우리도 한 천 년쯤 자다가

살고 싶은 세상이 왔을 때 눈 뜨면 어떨까


사람이 세상을 가려 올 수 없으니

땅에 엎드린 바랭이들 한 천 년쯤 작정하고

나무를 묻었다는 매향埋香의 기록


아, 어느 어진 왕이 천 년 후를 도모했던가


침향이 되면 누구라도 꺼내 아름다운 향기로 살라고

백 년도 아닌 천 년을 걸어 나무를 묻었단다

그것은 사람이 땅에 심은 방가지똥이었다


한 해 지어 한 해 먹던 풀들이

천 년 후의 나무 씨를 뿌렸다는,

우리 오천 년 역사에서 가장 뿌듯한 매향에 관한 몇 줄의 글


읽고 또 읽고

노오란 꽃을 든 미륵이 눈에 어른거렸다 




  <당선소감>


   막 싹 틔운 나의 시…채찍과 격려 해주시길


  큰 산 앞에 섰다. 

  두렵기만 하다. 시라는 것이 알면 알수록 더욱 거대한 산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그래서 두렵다.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10년쯤 전의 일이다.

  개인사가 힘든 시기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그 어려웠던 때 시가 나에게 왔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힘들 때마다 시 한 줄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그런 한편으로 시인이 되고 싶었다. 물론 문청 시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공부 없는 객기만 앞섰다. 


  요즘 시는 아주 어렵거나 너무 쉽거나 두 가지 중 하나다.

  어려운 시는 독자가 외면하고 너무 쉬운 시는 독자가 경멸한다. 

  나무의 목숨값에도 미치지 못할 가벼운 시집들이 버젓이 나온다. 

  시인은 넘쳐나는데 시는 멀어지고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수많은 문청은 지금도 시대의 각혈로 글을 쓰고 있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제 막 싹을 틔운 나의 시에 많은 채찍과 격려가 함께하길 빌어 본다. 

  부족한 글에 손 내밀어 주신 정일근, 손택수, 조향미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 1958년 경남 창원 생.

  ●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졸.

  ● 전 부산일보 기자. 전 경향신문 기자.
  ● 현 부산지방공단스포원 공로연수 중.



  <심사평>


  전체적으로 고른 성취로 안정감 돋보여 


  수사의 과잉이 사물과 현실을 왜소하게 한다. 문장들은 매끄러우나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지 않고, 이미지는 넘치나 소비되기에 급급하다. 또한 전반적으로 삶과 시에 대한 예각적 인식보단 장황한 요설과 실험실에서 배양된 인위적 표현들이 유사한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심 인상기를 공유하며 본심에 올린 최종 대상작은 권수찬, 김형수, 김현곤, 박민서의 작품이었다. 이들의 응모작은 적어도 언어 실험실의 폐쇄성과 자의식 과잉 그리고 지나친 경험 추수로부터 미학적 거리를 확보하면서 개인의 방언을 소통의 장으로 옮겨오는 데 모두 성공하고 있었다. 자신의 시대와 몸을 관통한 언어로 좀 더 자연스럽게 공적 음역을 확보할 수 있다면 머지않아 성과들이 있으리라 믿는다. 


  먼저 권수찬은 드물게 사회학적 렌즈로 시대 현실을 조명하는 힘을 보여주었으나 안타깝게도 인식이 감각으로 전환되는 지점을 보여주지 못했다. 김현곤은 성큼성큼 내딛는 남성적 어법에 호감이 갔으나 이분법적 문명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김형수와 박민서의 작품을 두고 장고에 들어갔다. 박민서의 작품은 이미지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아슬아슬 위태로운 감이 없지 않았으나,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하는 힘에 있어서 탁월한 기량을 선보였다. 김형수의 경우는 기시감이 문제적으로 다가왔으나 전체적으로 고른 수준과 성취로 안정감을 주었다. 위태로운 새로움과 오래된 울림 중 격론 끝에 간신히 선택된 ‘미륵을 묻다’는 지층에서 캐어낸 미륵처럼 시간을 뛰어넘는 울림을 간직하고 있는 시다. “고작 일 년 살자고 이천 년을” 견딘 이 빛나는 시적 순간이 “한 해 지어 한 해 먹던 풀들”의 삶에 뿌리를 내리면서 측정 불가의 우주적 시간 단위로 시인을 밀어가길 바란다. 

 

심사위원 : 정일근, 조향미, 손택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