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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크레바스에서 / 박정은

 

  왁자지껄함이 사라졌다 아이는 다 컸고 태어나는 아이도 없다 어느 크레바스에 빠졌길래 이다지도 조용한 것일까 제 몸을 깎아 우는 빙하 탓에 크레바스는 더욱 깊어진다 햇빛은 얇게 저며져 얼음 안에 갇혀 있다 햇빛은 수인(囚人)처럼 두 손으로 얼음벽을 친다 내 작은 방 위로 녹은 빙하물이 쏟아진다 


  꽁꽁 언 두 개의 대륙 사이를 건너다 미끄러졌다 실패한 탐험가가 얼어붙어 있는 곳 침묵은 소리를 급속 냉동시키면서 낙하한다 어디에서도 침묵의 얼룩을 찾을 수 없는 실종상태가 지속된다 음소거를 하고 남극 다큐멘터리를 볼 때처럼, 내레이션이 없어서 자유롭게 떨어질 수 있었다 추락 자체가 일종의 해석, 자신에게 들려주는 해설이었으므로 


  크레바스에 떨어지지 않은 나의 그림자가 위에서 내려다본다 구멍 속으로 콸콸 쏟아지는 녹슨 피리소리를 들려준다 새파랗게 질린 채 둥둥 떠다니는 빙하조각을 집어먹었다 그 안에 든 햇빛을 먹으며 고독도 요기가 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얼음 속에 갇힌 소리를 깨부수기 위해 실패한 탐험가처럼 생환일지를 쓰기로 한다 햇빛에 발이 시렵다




  <당선소감>


  열린 문틈, 더 깊이 걸어 들어가겠다


  스무 살 무렵 한 프랑스 소설가가 제 삶에 문을 만들어준 이후, 어느 길로 가야 그 문이 열리는지 알 수 없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당선 통보를 받고 그 최초의 문틈이 살짝 열린 것 같아서, 드문드문 내리는 비처럼 온종일 떨었습니다. 

  터질 듯한 열망과 열정으로 꿈을 좇는 제게, “지금 자신의 방에 앉아 시를 쓰고 있다면 그는 이미 시인”이라는 격려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계속 시를 쓸 수 있었습니다. 지금껏 수많은 실패를 겪으며 걸어왔던 것과 똑같이 앞으로도 그 수많을 실패와 함께 걷겠습니다. 시를 향해 걷겠습니다. 더 깊이 걸어 들어가겠습니다. 더 멀리 걸어가고 싶습니다. 

  부족한 제게 문을 열어주시고 귀한 기회를 주신 최정례, 장석남, 강성은, 신용목 심사위원님들과 경향신문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서툰 문장에서 저를 발견해주시고 시를 계속 쓸 수 있도록 고무해준 손택수 시인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최고의 튜터 신동옥 시인께 감사합니다. 추운 날에도 대학로에 모여 함께 합평했던 동기분들 고맙습니다. 언제나 한쪽 날개를 빌려주는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곁에서 수많은 좌절을 지켜보며 한결같이 지지해준 정근, 고맙고 사랑해요. 

  일요일 오후, 한강으로 이어지는 쭉 뻗은 천변을 따라 계속 걷고 싶지만 발길을 돌려야 하는 그 마음들을 생각하며 계속 쓸 것입니다. 우리들의 산책로에는 끝이 없습니다. 낮은 곳에서 끝없이 정진하겠습니다. 


  ● 1985년 서울 출생, 서울 거주..

  ● 한양대 법학과 졸업, 방송통신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과 재학 중.


 

  <심사평>


  삶의 비극적 일면을 웅숭 깊게 구현


  완벽한 시 한 편이 이 세상에 있을까마는 만족스러운 그 한 편에 가닿기 위해 그저 그렇고 그런 시들을 백 편 천 편 쓰게 되는 것 같다. 예심을 통과한 열셋 응모자들은 시를 향한 열의와 욕망을 한껏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세세히 살피면서 어느 한 편을 선택하자니 만족스러운 작품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엉뚱한 단어로 문장을 조립 교체하여 새로운 감각을 만들려는 시도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적확한 단어가 놓일 마땅한 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의 생각은 구체화되고 발전하며 새로운 길을 찾는다. 정확한 문장을 통해 구체화되는 생각, 그 생각이 이행 혹은 비약하면서 깊이를 얻고 새 길을 찾을 때 시에 힘이 생긴다. 


  ‘밀밭의 생성’을 쓴 백선율은 초반부의 신선한 발상을 매력적으로 끌고 갔으나 중반 이후부터는 그 생각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하고 말았다. ‘경영혁신추진팀’이라는 전혀 시적일 것 같지 않을 제재로 시를 시도한 변호이는 현대를 사는 우리 일상의 일면을 새롭게 보여주려 했으나 이분 또한 끝마무리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신선한 생각과 그 생각의 발전 과정과 비약의 정점을 내장한 시의 마지막 문장을 찾기 위해 우리는 시를 계속 시도하는 것이다. ‘모서리의 생활’을 쓴 전윤수의 시를 마지막까지 당선작으로 고려한 이유는 이 도시의 한 모서리, 방 한 칸의 틈에서 신산스럽게 사는 우리의 일상이 언뜻 보였기 때문이다. 정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뚜렷하게 묘사했더라면 올해의 당선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심사자 둘이 동시에 손뼉을 친 한 작품을 발견하였다. 박정은의 ‘크레바스에서’는 절제된 감정을 인상적으로, 긴장과 이완의 국면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그 속에서 우리 삶의 비극적 일면이 웅숭깊게 구현되어 울림이 컸다. 2018년의 신인 박정은의 발견으로 우리 시단이 한층 풍요로워질 것을 의심치 않는다. 만족스러운 시 한 편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 그에게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 장석남, 최정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