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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폐선 / 조직형

 

  뱃머리는 거침없이 파도를 밀고 나아간다. 좌우 현의 오래된 균형이 삐걱거리며 서로 맞잡은 손을 거두어가자 갈라진 파도가 비명을 내지른다. 


  몸통을 지나 어깨 위로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앉을 때까지 뱃머리는 무지근해지는 통증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날카로운 예지는 분명한 걸 챙긴다. 단호하게 잘려나간 꼬리를 슬며시 감추고 씻은 얼굴 내미는 건 부끄러운 변명이다. 


  수평선에 맞닿은 흐리멍덩한 하늘이나 경계선을 뭉개버리는 저녁 안개는 늘 무시당하는 편. 말이 없는 것들은 모호해서 경계를 흐린다. 배의 무딘 허리를 훑으며 지나간 물결이 고물에 고물고물 맴돌거나 소용돌이치며 뒤따르며 밀어주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달리는 말이 뒤돌아본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 지나간 후미는 곧 사라질 물거품일 뿐이다. 사라질 것에 대하여 사랑을 퍼주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뱃머리를 벗기는 짱짱한 햇빛만이 대쪽같이 당당하다. 


  앞만 보고 달리던 뱃머리는 고물 뒤에 숨은 시선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켜보며 뒤따르며 드러내지 않을 뿐 침묵으로 밀어주던 흘수선 아래 감춘 어미 같은 마음이 아주 환하게 비춰주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당선소감>


   "마음 한편 따뜻이 지피는 시를" 


  말을 하고 싶었다. 꾹꾹 눌러 억제하고 있었던 내 안의 말과 내게 던지는 말들을 모아 이야기하고 싶었다. 

  새로이 보이는 아름다운 세계가 내 안에서 일어났다. 그 새로운 세계에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고, 말들이 뿌리를 내리면서 친숙했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전에 시가 무서워 경계하며 도망을 쳤던 적이 있었다. 시인들은 선택받은 사람만이 올라갈 수 있는 높은 곳에 있었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며 세상과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었다. 감히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늦게 내 말이 하고 싶어졌을 때 그 옛날로 돌아가 다시 한 번 뛰어들어보자고 용감하게 문을 두드렸다. 낯선 세계는 내가 부딪히지 않으면 안되었으므로 활력이 생겼다.

  제주문화원에서 같이 공부하며 힘이 됐던 문우들, 무엇보다 칭찬으로 고래를 춤추게 했던 선생님이 계셨기에 이렇게 올라설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한 것 같다.

  뱃머리를 빳빳이 쳐들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배는 뒤돌아보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것들이 사랑으로 밀어주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시를 읽는 사람들의 마음 한편을 따뜻하게 지피는 시를 쓰고 싶다.

  연습경기는 끝났다. 연습으로 돌릴 수 없는 본 경기에 임해야 한다는 무거운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니 청춘이다. 징징거리지 않고 내 말을 들어 줄 사람들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다가가고, 아름다운 세계를 열어가고자 한다. 제 작품들을 놓고 끝까지 고민했을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한라일보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1953년 대구 출생.

  ● 영남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 제주문화원 문예창작교실 수료.

  ● 3년째 제주 거주.

 


 

  <심사평>


  할 말 끝까지 밀고 나가는 고집스러움


  예심을 통과한 열 분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왔다. 본선에 부쳐진 38편의 작품 대부분이 시적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들이었다. 시적 이미지들이 거느린 확장성뿐만 아니라 시의 형식도 자세히 살피며 여러 차례 읽었다. 그 결과 본심에 오른 대부분 작품에서 시의 형식적인 면 즉, 연 나누기에서 많은 약점이 드러났다. 과도하게 연을 나눔으로써 시의 이미지들이 파편화되어 새로운 시적 의미로 확장되는 것을 방해한 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연 나누기는 단지 화제나 의미의 단위로만 끝나지 않는 더 큰 의미가 있다. 시적 이미지들을 서로 작용시켜 복합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며, 시적 의미를 확장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 작품에 담고 싶은 말이 많아서인지 없어도 될 사족들이 많았다.

  비교적 이러한 약점들을 극복한 이온정, 지관순, 조직형 등 세 분의 작품들을 두고 다시 심사에 들어갔다. 시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에 세 분 모두 재능이 있었다. 먼저 이온정의 '염소와 제천역'에 주목했다. '염소와 역'이라는 시적 대상에 대한 관찰이 세밀했고, 사유가 깊었다. 하지만 정작 시적 대상을 빌어 드러내야 할 '남도의 말씨'나 '톤이 익숙한 목소리'에 대한 형상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이 끝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지관순의 '저 희고 긴 새장'은 투고한 작품 중에서 가장 시적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이었다. '셔츠 소매'라는 시적 대상을 통하여 무리 없이 시의 외연을 확장해 나갔지만, 마지막 연이 문제로 지적됐다. 앞선 사고의 모든 과정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진술이었기 때문이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조직형의 '폐선'에서 선자들은 공통으로 시를 이끌어 나가는 진술의 힘에 주목했다. 현란한 언어의 기교가 아닌 자신이 할 말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고집스러움이 엿보였다. 시적 진술이 사물과 상황을 바라보는 오랜 사유의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면에서 신뢰감을 주었다. 투고된 네 편의 작품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 면도 영향을 주었다. 

 

심사위원 : 김광렬, 정찬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