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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삼례터미널 / 김헌수

 

  빗물 고여 팔랑이는 흙바닥 길에 숨통을 터놓고 바퀴자국 훑고 간 자리에 안부를 걸쳐 놓는다 이때 삼례터미널은 빈집 같다 버스들은 벚꽃 잎들을 헤아리며 종점 없는 마을로 떠날 것 같다


  내 안에 새겨진 주름 패인 얼굴을 현상해 놓고 흑백사진 같은 터미널 지나 후정리 길목에서 손 흔들던 그의 모습을 던져주고 간다


  걸어 잠근 뒷문 곁에 그림자 없는 하루가 눕는다 들마루에 앉아서 나누던 습관들이 헐렁해졌다 가끔 자리를 내어주는 그곳, 떨어지는 너그러운 빗방울이 욕심을 내던 처마 밑이 환하다


  녹이 슨 남자가 떠난다 그를 엿보는 눈빛 덕분에 말은 쌓여가고, 버스가 지나간 자리에 희미하게 고요가 들어앉았다 나도 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다음 날이면 또 들어와 앉는 터미널에서 그를 만지고 있다


  삼례터미널은 빠져나갈 수 없는 출구다 살아온 지난날이 자동판매기 속에서 낡아가고 있다 쓸어내린 눈꺼풀을 길들이는 감각들, 아무도 몰래 음각해 놓은 문양으로 피어 목판화를 찍어내고 있다




  <당선소감>


   "섬세하고 발랄한 시 쓰고 싶어"


  비가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전화를 받았다.

  순간 멍하더니, 당선되었다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마음이 봄볕처럼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실컷 잡았다고 생각하면 달아나던 말, 성글게 짜여진 언어, 담백하고 슴슴한 문장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무엇보다 빛나게 어루만지고, 사람 냄새가 나는 시, 섬세하고 발랄한 시를 쓰고 싶다.

  시와 함께 뒹굴고 호흡하면서 마음의 채비를 달리하고 싶다.

  늘 다독여 주던 많은 분들이 생각난다.

  먼저 부족한 시에 손 내밀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전북일보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 모든 것의 동기가 되어주는 사랑하는 세윤, 세영, 요한, 누구보다 기뻐할 신영, 은영, 민휘, 인숙언니, 든든한 힘이 되어 준 선비유통, 대전식구들과 친지들,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님들과 날선 합평의 시간을 함께한 문우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시의 원동력이 되어준 글벗동인, 곁을 내어 준 열린시문학회, 깨복쟁이 금초27회, 선영회와 마음의서랍 친구들, 기도로 품어 준 봉동중앙교회, 모든 분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

 


  ● 1967년 전북 전주 출생.
  ● 우석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
  ● 문학동인 글벗 회장 역임.
 


 

  <심사평>


  "고요한 은유, 따뜻한 위로같아"


  예전에 결선 작품들을 보고 나와서 나눈 말이 생각났다. 시들이 너무 어려웠다는 의견이다. 해독이 불가한 암호와도 같은 난독증을 일으키는 시들은 화성악을 내치며 유리창에 스티로폼을 긁어대는 것처럼 불편한 불협의 음을 차용해 시종 들이대는 난해한 음악을 읽는 것 같았다.

  결선에 오른 10인의 작품들은 우수한 시들이 많았다. ‘소년병’과 ‘회전의 시간’과 ‘삼례터미널’에 주목했다. ‘소년병’은 시를 밀고 가는 힘도 단단하고 신선했다. 전혀 다른 시선이기는 하지만 문득 군대이야기를 쓴 이문열의 등단작이었던 ‘새하곡’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소년병’을 받쳐줘야 할 다른 시편들이 다소 무게감이 떨어졌다. 언어 선택이 젊다는 것은 장점이기도 하겠으나 정제되지 않은 수식어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회전의 시간’은 그의 다른 작품인 ‘오늘의 나이’와 ‘장항선’에서 보여주는 재치와 또 다른 시적 감각을 보여주는 수준에 오른 성취를 가늠케 했다. 그러나 “달맞이꽃을 깨운 샛노란 얘기들이”라든지 “물레의 올을 타래로 짓는 실패의 날들”과 같은 표현은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던 전체적인 시의 분위기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을 해서 오히려 풍요로운 시적 멋과 맛을 돋보이는 역할을 해야 하는 은유로서의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잔잔한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쓴 ‘삼례터미널’은 다른 작품인 ‘7번 출구에서’· ‘개개비의 여름’과 함께 대상의 이면과 그림자까지 관찰하며 사려 깊은 내면을 밀도 있게 그려놓았다. 모름지기 시인의 눈이라면 대상의 아득한 너머와 순간의 찰나까지, 쓰러지고 일어나 건너온 시간까지를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걸어 잠근 뒷문 곁에 그림자 없는 하루가 눕는다” “빗방울이 욕심을 내던 처마 밑이 환하다”라니, 이 같은 고요한 은유에서 볼 때 시를 짓는 새로운 시인의 눈이 따뜻하고 그렁그렁한 눈매로 대상을 위로하며 시를 풀어놓았을 것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당선작을 결정해야 한다. 실험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상상력이 꿈틀거리는 젊고 싱싱한 야생의 시에 손을 내밀어야 할까. “나의 음악은 울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가수 밥말리의 말처럼 상처받은 생명의 동굴 속 내면으로부터 울려나오는 부드럽고 깊은 응시의 위로와 산들을 껴안고 가는 먼 산빛과 같은 시를 불러내야 할까 망설였다.

  결국 ‘삼례터미널’을 당선작으로 선택하였다. 축하한다.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첫 시’이다. 당선작이 대표작이 아니라 삶의 길 위에서 시의 종착역행 나침반을 잃지 않고 오래오래 치열한 시마에 사로잡혀 먼 길을 가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이운룡, 박남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