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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어느 삼거리에서 / 이한얼

 

  문득 그럴 때가 있다. 무심결에 어딘가를 봤을 때 그 장면이 화인처럼 뇌리에 박히는 순간이. 또는 길을 걷다 어떤 소리를 들었는데 의미 없는 그 음이 아주 오래 머리에 남아 있는 것처럼. 살다 보면 그런 경험이 있다. 당시에는 대부분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없던 듯 잊고 살다 보면 훗날 불현듯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그런 현상은 보통 가족이나 연인, 가까운 친구처럼 나의 소중한 사람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길을 걷다 혼자 밥을 먹는 누군가의 등이 유난히 신경 쓰일 때. 말할 때 습관적으로 입술을 삐죽이는 모습에 왠지 친근함이 들 때. 나중에 알고 보면 집에서 자주 보던 어머니의 뒷모습이었거나, 예전 사귀던 사람의 버릇이었음을 기억해낸다.

  점차 쌀쌀해지는 어느 날이었다. 나는 단골 카페에 세 시간째 머무르고 있었다. 카페는 2층이었고 건물 외벽이 온통 통유리여서 창가 자리에서는 바로 아래 길가뿐만 아니라 저 멀리 삼거리와 버스정류장까지 내려다보였다. 그 자리에서 글을 쓰던 중에 문득 집중이 풀어졌다. 자연스럽지 않은 끊김이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옮겨가는 시선을 무작정 따라가 보니 저 멀리 삼거리에 아버지가 서 계셨다. 황색 코트와 검은색 머플러, 왼손에 노트북 가방을 든 아침에 배웅했던 그 모습으로. 누군가를 기다리시는 것 같았는데 여기 다녔던 십이 년 동안 이런 식의 마주침은 처음이었다. 대뜸 소리쳐 부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벌어지던 입이 문득 도로 닫혔다. 그리고 물끄러미, 한동안 그분의 옆모습을 바라보는데 어느새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술에 닿기 전까지 흐르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 우두커니 서 계신 아버지의 모습은 사진처럼 눈이 아닌 가슴에 박혔다.(왜 이 장면이 눈이 박혔는지는 훗날 이 글을 쓰다가 알게 된다.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선 우리가 주차를 하고 걸어 내려오는 모습을, 그리고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늘 집 앞 넓은 마당 삼거리에 지켜보고 계셨다.)

  서른과 예순을 막 넘긴 아버지와 아들. 이제 서로에게 남은 시간보다 지나간 시간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했던 것보다 아직 하지 못한 것들이 훨씬 많이 남았다. 함께 먹을 수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많아졌고, 같이 갈 수 있는 곳보다 갈 수 없는 장소가 점점 늘어났다. 언젠가는 더 이상 낙지볶음에 소주 한 잔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다음 날 일찍 일어나 함께 산을 올랐다가 뜨거운 증기에 사우나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휴가 중 일출봉 앞에서 무릎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게 되고, 족구장에서 1세트가 끝나자마자 가슴을 두드리며 벤치에 앉는 모습을 점점 많이 봐야 할 것이다. 하려면 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반드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시간이 온다. 그때가 되면 나는 그간 하지 못했음이 아니라 하지 않았음에 서러워 눈물짓게 될 것이다. 그걸 알고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지금껏 하지 않았던 일이 갑자기 하는 일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저분은 어떠셨을까. 자식이 태어나면, 아들이 자라면 함께 무엇을 하고 싶으셨을까. 내가 처음 어머니의 배 속에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을 때, 무사히 태어났다는 의사의 목소리를 들으셨을 때, 잠든 어머니와 나를 두고 대문 밖에서 하늘을 보며 담배를 태우셨을 때, 무슨 생각과 결심을 하셨을까. 그 아이였던 내게 바라는 점이 있으셨을 것이다. 분명 언젠가 함께 이루고자 하는 바도 있으셨을 터. 과연 얼마만큼 이루셨을까. 그분께서 들어 올린 손바닥을 보며 나는 몇 번이나 마주 손바닥을 내밀었나. 나 역시 자라기 바빴고 자리 잡고 사는 일에 쫓겼다지만 효도할 궁리는 하면서 어찌 사랑받을 준비는 안 했나. 드려야 하는 것을 해드리는 것이 자의적 효라면, 반대로 자식을 원활히 사랑할 수 있게 돕는 것은 타의적 효가 될 텐데. 나는 결국 효도도 사랑받음도 반푼이인 채로 서른이 넘어버렸다. 스스로 큰 효는 못했어도 불효도 없는 자식이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내 역할은 자식으로서의 효,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나는 저분에게 자식을 떠나 한 사람의 괜찮은 인간이었는지. 같은 지붕을 이고 살만한 괜찮은 가족이었는지. 또는 인생의 삼분의 이를 함께 할 괜찮은 동반자였는지. 당신께서 원하신 바가 그런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과한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식은 늘 누군가의 불효자일 수밖에 없어서, 이런 하릴없는 상념들이 계속 입안을 적셨다.

  그렇게 몇 분 정도 말없이 바라만 보던 나는 끝내 휴대전화를 들었다. 비어 있는 까만 네모 안을 무슨 말로 채울까 잠시 고민하다가 ‘아버지. 저녁 맛있게 드세요. 파이팅입니다!’라는 말밖에 쓰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더는 적지 못하고 전송을 눌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손에 든 휴대전화를 한참이나 내려다보셨고, 나 역시 그런 모습을 오랫동안 훔쳐보았다.

  잠시 후, 꺾어진 코너에서 차가 튀어나왔다. 잠시 비상등을 켜고 아버지를 태운 차는 이내 차선 흐름에 따라 시야 밖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 짧은 10초의 장면이 내게는 마치 향후 30년을 압축시켜 놓은 동영상 같았다. 늘 가까워지고 싶었으나 일정 이상 다가가지 못했던 한 사람을, 나와 참 많이 닮았지만 그래서 숱한 평행선을 그렸던 당신을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하며 보내야 하는 마음으로.

  모두 그리 왔다가, 그리 살다가, 그리 가겠지. 지금 내 뒷모습이 할아버지를 바라보던 당신의 뒷모습과 닮아있듯이, 나 역시도 언젠가 그렇게.

  어느 저녁 날 삼거리의 풍경이었다.




  <당선소감>


   “앞으로도 뭔가 쓰며 살아갈 것”


  다른 누구로도 말고 오직 스스로를 등불로 삼아라. 석가모니의 말입니다. 실제로 저에게도 그랬습니다. 그것은 삶의 밑바닥에서 무엇보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등불이었고, 구르고 넘어지며 능선을 오를 때까지 놓지 않는 이상 절대 깨지지 않는 등불이기도 했습니다.

  성인이 되지 못한 나이부터 가슴속에 언제나 안개가 가득했습니다. 어렸던 저는 그걸 맑게 닦진 못할망정 꺼내기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해도 입 밖으로 나오는 건 답답하다는 네 글자뿐이었습니다. 종이 앞에서 한참 펜을 쥐고 있어도 여전히 네 글자밖에 적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매일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뭐라도 끼적여야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었고, 한두 장씩 종이의 껍질을 벗겨 내면 그제야 아랫배가 편해졌습니다. 처음 그것은 창작 행위가 아닌, 오히려 생명 유지 활동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혼자 오래 써와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딘가에, 누구에게 글을 보인다는 생각은 십 년이 지나도록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 넋두리들을 남에게 보이고 싶어졌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마치 그래야 할 것처럼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그때부터 남에게 보일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일 년뿐이었던 것이 이 년이 되고, 다시 삼 년이 되었습니다. 함박눈과 함께 걸려온 전화에서 처음으로 당선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많이 어립니다. 여전히 부족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 나는 세상과 부딪힐 만큼 준비가 되었나. 삶의 단면으로 타인을 감동시킬 만큼 그 이상으로 치열하게 살아왔나. 그것조차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계속 뭔가를 쓰며 살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가슴속 안개는 여전히 뿌옇기만 합니다. 나이를 먹으며 생기는 빈자리에 다른 하고 싶은 말들이 계속 쌓여갑니다. 아마 평생 이렇게 살겠구나 하고 깨달았던 스물일곱의 어느 겨울날처럼, 앞으로도 종이와 마주하고 살겠지요. 그 하얀 껍질을 벗기는 일에 울고 웃으며 나이를 먹겠지요.

  여전히 곁에 계셔주시는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대뜸 글을 쓴다며 일도 그만둔 백수를 응원해준 친구들께 감사드립니다. 서투르고 부족한 작품임에도 좋은 기회를 주신 매일신문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작년 이맘때쯤 포기하지 않은 저에게 감사합니다. 살아갈수록 어째 자꾸 감사할 일만 느는 것 같습니다. 이번 당선 사실은 앞으로 이어질 저의 글쓰기 인생에 커다란 방점이 될 것입니다. 매번 돌아보고 다독이며 계속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는 말씀만 거듭 전합니다.




  ● 배재고등학교(졸).

  ● 한서대학교 영문학과(졸)

 

 

  <심사평>


   세대 흐름 문제 섬세하게 묘사



  수필 응모작이 710편에 이른다. 지난해 514편에 비해 200여 편이 늘었다. 고무적인 일이고, 이례적인 일이다. 그 까닭은 수필 저변의 확산에서 찾아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 매일신문에서 매년 여름에 개최하고 있는 시니어문학상의 영향이 크지 않은가 싶다. 응모자 연령이 높아지고, 출신 지역이 제주까지 포함하여 전국으로 고루 퍼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짐작해 본다.

  재차, 삼차 심사 과정을 거쳐 남은 작품은 ‘수각화’(서울), ‘아버지 게밥 짓는다’(파주), ‘바람꽃’(전주), ‘풍화’(대구), ‘어느 삼거리에서’(서울) 등 다섯 편이었다.

  이들 중에 바로 손이 가는 작품은 없었다. 조금씩 아쉬움들이 남았다. 물론 이 외에도 윤곽은 뚜렷하나 공모전을 겨냥한 전투적 작위성, 과도한 수사적 은유로 말미암아 오히려 본심에 들지 못한 작품이 여럿 있었다.

  ‘수각화’는 글의 밀도는 충분히 인정되었으나 분량에 아쉬움이 있었고, ‘아버지 게밥 짓는다’는 참신한 소재임에도 ‘게’와 ‘아버지’의 연결이 흐릿하였다. ‘바람꽃’, ‘풍화’, ‘어느 삼거리에서’는 끝까지 심사자의 손을 맴돌며 애정이 가는 작품이었다.

  아쉽게도 ‘바람꽃’은 소재의 평이함을 극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소금꽃’이나 ‘염’ 등의 직설적인 글제로 바꾸어 주제를 수렴해 나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여운이 남았다. ‘풍화’는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읽히는 글이었다. 언어 선택도 섬세했고, 문장도 세련되었다. 다만 남아선호, 장손, 제사 등의 전통의식 문제를 좀 더 깊이 있게 사유적인 에피소드로 끌고나갔더라면 하는 의견이 있었다.

  결국 ‘어느 삼거리에서’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어느 삼거리에서’는 비교적 주제의식이 분명한 글이었다. 인간의 성장과 사멸이라는 세대 흐름 문제를 넓게 다룬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애틋하고 따뜻한 가족이야기를 다룬 것도 이 시대의 화소로 적절했다.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되는 어느 저녁, 어느 삼거리 그리고 대상이 되는 한 점, 아버지의 공간 배치가 마치 정지된 한 폭의 사진처럼 선명하게 각인된 것도 장점이었다. 이 집중된 풍경을 밀도 있게 전개해 나가는 풍부한 묘사력도 작품을 살리는 요소였다. 길고 불분명한 서두가 흠이었으나 작가의 젊은 연치에 기대를 보태어 두 심사자는 유쾌히 당선작으로 합의를 이루었다.


 

심사위원 : 홍억선, 백정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