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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부드러운 시간을 어느 곳에 쓰면 좋을까 / 이성배

 

미선나무 가지마다 밥알 같은 꽃들이 총상꽃차례*로 수북하다

이 부드러운 시간을 어느 곳에 쓰면 좋을까.


십여 년 전 겨울,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무차별 폭격이 있을 때

나는 군고구마를 사 들고 눈 오는 거리를 걸었지 싶다.

재빨리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들과 그 어머니들은 사락사락 죽어갔다.


하굣길에 장벽 쪽으로 돌을 던진 팔레스타인 소년 사미르 아와드가 이스라엘

군인들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즉사한 2013년 1월,

나는 따뜻한 거실에서 유치원에서 돌아올 네 살배기 딸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총상꽃차례 같은 폭탄 다발을 투하하는 인간적인, 그 인간적인 인류애

엉뚱하게 우리 집 마당에 던져진 밥다발을 두고

고슬고슬한 밥알이 어머니 젖가슴 냄새 비릿하게 스며 있는

이 질기지 않은 의미를 어찌하면 좋을까.


햇볕 좋은 마당에 과분한 꽃

장벽 아래 양지바른 팔레스타인의 언덕에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의 폐허 사이에 수북수북 피어

덤불 사이를 뛰노는 아이들 얼굴에 밥알이 하얗게 붙는다면

꽃 하나가 그럴 수 있다면



* 꽃이 촘촘히 피는 형태의 하나




  <당선소감>


   “어르신들의 祈福이 만들어준 선물” / 건강검진 받은 날 당선 통보받아 선생님들께 반가운 소식 전할 것


  혈관 나이 오십이라는 건강검진 결과를 받은 날 오후 당선 통보를 받았다. 혈관 건강에는 좋지 않았으리라. 순찰하다가 다리 불편한 노인들을 순찰차에 태워드리면 노인들은 가장 순한 말로 “복 받을 것”이라 했다. 이십년 가까이 묵은 말도 있었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니…. 말의 무게와 울림은 새삼 경이롭다.

  컨베이어벨트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시대, 뒤처진 사람들이 자꾸 눈에 밟힌다. 어느 한곳씩은 불편한, 느린 사람들과 함께 걷는 길이 편하다. 가만히 발음해볼수록 마음이 순해지는 ‘사람’이라는 말은 오래오래 나의 미숙한 글을 공글려줄 것이다.

  여전히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널찍한 마당을 마련해두고 계신 정효구 선생님과 퇴임 후 ‘자연과 시의 이웃들’을 통해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나누시는 임보 선생님께 반가운 소식 전해야겠다. 생각나는 사람들은 너무 많아 천천히 만나야겠다.

  국어국문학과 시창작 소모임 ‘사람들’은 언제나 나의 든든한 배경이다. 심사위원님들이 지그시 눌러준 지점 잊지 않겠다. 언제나 푸른 배추밭처럼 빛나는 농민신문사에도 감사한 마음 전한다.



  ● 1973년 충북 괴산 출생 
  ●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시상이 협소하지 않고 두루 넓어…작가의 굳센 기상 보여 / 내가 누리는 평화로운 시간, 어떤 의미인지 아프게 질문해


  예심을 통과해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면밀하게 읽었다. 농촌을 시공간으로 한 작품들이 많았고, 농촌에서의 사실적인 형편을 시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런 만큼 시편들은 삶의 현장의 생생한 실감을 느끼게 했다. 마지막까지 경쟁한 작품들의 수준도 높았다.

  심사위원들이 손에 쥐고 끝까지 고민했던 작품들은 ‘내 떠나온 골목’ ‘사과도 선크림을 바른다’ ‘화각장’ ‘부드러운 시간을 어느 곳에 쓰면 좋을까’였다. ‘내 떠나온 골목’은 골목에서의 추억을 통해 과거의 시간에 교우했던 옛사람을 불러내는 작품이었다. “미숙 은정 혜원 은희도 놀러 오고”라고 써서 직접 인명을 기술한 것이 정감 있고 특별하게 느껴진 반면, 골목의 아침 가로등 이름을 “‘이별’이거나 ‘후회’이거나 ‘눈물’”이라고 명명한 것은 상투적으로 느껴졌다. 염천에 사과농사를 짓는 농부의 애타는 심정을 고스란히 담은 ‘사과도 선크림을 바른다’는 방언의 활용이 효과적이었으나 감정의 과잉이 있어 아쉬웠다. ‘화각장’은 대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쇠뿔을 얇게 오려서 오동나무장에 붙이는 그 과정 그대로 시행이 전개되어서 극적인 효과는 오히려 줄어들게 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고심 끝에 당선작으로 ‘부드러운 시간을 어느 곳에 쓰면 좋을까’를 선정했다. 우선 이 작품 외에 다른 작품들에서도 시 쓰는 이의 강기(剛氣)를 느낄 수 있었다. 또 당선작인 이 시는 시상이 협소하지 않았고 두루 넓었다. 이 시는 세계가 전쟁과 폭력과 가난의 고통 속에 있는데,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이 평화로운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프게 질문한다. 세계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사회적 주제와 연결되는 이러한 시의 창작은 타인의 고통에 점점 더 무감해지는 우리 시대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앞으로도 자신만의 뚜렷한 육성으로 소신껏 시인의 길을 가길 당부드린다. 다시 한번 당선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 곽재구, 문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