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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경운기를 부검하다 / 임은주

 

그는 차디찬 쇳덩이로 돌아갔다

움직이지 못할 때의 무게는 더 큰 허공이다

돌발적인 사건을 끌고 온 아침의 얼굴이 쾡하다

피를 묻힌 장갑이 단서를 찾고 일순 열손가락이 긴장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망치와 드릴이 달려들어

서둘러 몸을 빠져나간 속도를 심문한다


평생 기름밥을 먹은 늙은 부검의 앞에 놓인 식은 몸을

날이 선 늦가을 바람과 졸음이 각을 뜨는 순간,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진흙탕과 좁은 논둑길이 나타난다


미궁을 건너온 사인(死因)에 집중한다

붉게 녹슨 등짝엔 논밭을 뒤집고 들판을 실어 나른

흔적이 보인다 심장충격기에도 반응이 없는 엔진

오랫동안 노동에 시달린 혹사의 흔적이 발견되고

탈, 탈, 탈, 더 털릴 들판도 없이 홀로 2만Km를 달려 온 바퀴엔

갈라진 뒤꿈치의 무늬가 찍혀있다


가만히 지나간 시간을 만지면

그 속에 갇힌 울음이 시커멓게 묻어나온다

소의 목에서 흘러나온 선지 같은 기름이 왈칵 쏟아진다


임종의 안쪽에는 어느새 검은 멍이 튼튼히 자리 잡았다

길이 간절할 때마다 울음이 작동되지 못하고 툴툴거린 흔적이다

죽어도 사흘 동안 귀는 열려 있다는 말을 꼭 움켜쥔

얼굴의 피멍이 희미한 눈빛부터 쓸어내렸다


이제 습골(拾骨)의 시간이다

정든 과수원 나무들이 마지막 악수를 청했는지 뼈마디마다 주저흔이 보인다고 기름 묻은 손이 넌지시 일러주었다.




  <당선소감>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뜻밖의 선물"


  덧없는 희망과 함께 성탄절을 흘려보내고,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는 시기에 전화선을 타고 달려온 맑은 목소리와 또 한 번의 과분한 칭찬에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 뻔 했습니다. 당선이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포식자를 피해 십 수 년을 기다리다 나온다는 주기성 매미의 울음으로 오랫동안 기다리던 순간이었습니다.

  처음의 시는 아버지와 함께 왔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농촌에서 밀려나 한쪽 구석에 나무토막처럼 버려진 경운기의 풍경과 농사일로 고생하던 아버지의 주름이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마당 한쪽에 버려진 경운기가 불쑥 따뜻한 손을 내밀었습니다.

  하늘에서 지켜보시는 부모님 같아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이 당선이라는 선물을 저 허공을 유영하는 동박새 한 쌍으로 지나가신 노을 위로 올려드립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제 글이 낙심해서 주저앉아 있을 때 특별히 격려해 주신 박남희 선생님과 동국대 일산캠퍼스 동문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항상 마라톤처럼 쉼 없이 도전하는 월간'시와 표현'의 식구들, 그리고 박무웅 선생님과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늘 지지를 아끼지 않는 가족에게도 기다려 주어서 힘이 되었다는 말을 남깁니다.

  시는 늘 벗기려 할수록 손톱 밑을 가시로 찔러 피를 내는 밤송이이지만, 햇살 쪽으로 창문을 열어두고, 잘 여물 때까지 키워내겠습니다.

  끝으로 부족한 글을 많이 칭찬해 주시고 손잡아 주신 무등일보사와 관계자 분들 그리고 고재종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경기도 김포 출생 
  ● 2009년 부천 신인문학상
  ● 2014년 월간 《시와 표현》신인상으로 등단
  ●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 수료

 

  <심사평>


  "시적 진정성 돋보여


  2019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출품한 시는 총 369명 1426편이었다. 꽤 높은 응모 율이었다. 한데 양적인 투고에 걸맞게 작품들의 수준도 그 감각과 사유, 표현력에 있어서 고투를 보여주는 작품이 많아 기뻤다.

  세계와 존재의 비밀을 캐고 인식에 충격을 주는 시, 사회의 현안문제들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시, 무엇보다도 삶과 사랑에 대한 여러 감정과 담론을 펼쳐 대며 공명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시들에 가슴이 먹먹했다.

  이 중 시적 표현력의 진수를 보여준 '몰골'의 김길전, 화려한 상상력을 가진 '지느러미 떼라피'의 김휼, 인생 이해의 감각적 진술이 돋보이는 '붉은'의 최재영, 그리고 서정과 인식, 공감 그 어느 것에서든 자유로운 '그 그림은 아무 것도 낳지 않았다', '경운기를 부검하다', '오래된 그릇'의 임은주가 최종적으로 겨뤘다.

  여기 네 사람 누구를 당선으로 밀어도 큰 문제가 없었는데, 다만 김길전은 시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 확보에 실패했고, 김휼은 이미지들이 삶에 천착하지 못했으며, 최재영은 잠언 투의 문장이 거슬렸다.

  결국 위 문제점들을 잘 극복한 임은주로 결정되었는데, 당선작 '경운기를 부검하다'는 어느 날 사고로 박살난 경운기를 수리하며 그 경운기를 운영했을 농부의 죽음을 유추해내는 솜씨가 사유나 감각, 적확한 표현력에 있어 그 재능과 숙련도를 충분히 보여줬다.

  한데 이 시인의 다른 두 작품이 신춘문예용으로는 더 적합할 것도 같았는데, 나는 시적 진정성이 돋보이는 이 작품을 최종 당선작으로 밀었다.

  축하드리며 아쉽게 된 김길전, 김휼, 최재영도 금명간에 시인이 될 수 있는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알려드린다.



 

심사위원 : 고재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