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 소설 가작] 별을 그리다 / 오승경
<당선작>
별을 그리다 / 오승경
1.
‘서희수 / 과장 / 태안리조트 고객지원실 / 8월 20일’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갔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어두워지면서 짙은 어둠이 나를 끝없는 심연으로 밀어냈다. 암전이라도 된 마냥 눈앞이 캄캄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사고가 정지된 사람마냥 그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태안리조트? 그래, 자회사 중 그런 데가 있기는 하다. 회사가 지방 리조트 사업도 병행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퇴사하기 전까지 그런 곳에서 일하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다.
인사발령이 별 대수로운 사항은 아니다. 1년에 2번 꼬박꼬박 인사발령통지서가 사내 게시판에 올라왔다. 풋풋한 신입직원 임명부터 부서 간 업무이동, 승진, 퇴직까지 많은 이름들이 새로 들고 이동하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부서이동이나 직급승진과 관련하여 하마평에 오르는 사람들이야 인사시기가 도래할 적마다 인트라넷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마음을 졸이겠지마는 나머지 직원들에게 자기와 상관없는 이들의 인사발령이 그리 큰 의미가 있지는 않을 터이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닌지라 지난번까지만 해도 회사의 인사발령통지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프로젝트 진행 중에는 부서이동을 시킬 리 만무했고 여자인데다 일류대 출신도 아닌 내가 다른 동기들을 누르고 초고속 승진할 가능성 역시 전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얼마 전 나는 글로벌 셀럽인 A의 결혼식을 우리 호텔에서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처음 그 미션을 받았을 때 얼마나 걱정이 앞섰는지 몰랐다. A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언론에 공표되자마자 서울시내 유명 호텔 관계자들은 그를 잡기 위해 저마다 혈안이 되었다. 우리 호텔과 라이벌 관계인 S호텔에서는 A 결혼식 유치를 위한 전담 테스크포스까지 조직했다고 들었다. 타 호텔과의 경쟁에서 우리 호텔만의 장점을 부각시켜 A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데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어쨌든 나는 해냈다. 또한 회사 측에서는 웨딩 촬영이나 드레스 대여까지 포함해서 최대 1억까지 A의 결혼식에 협찬할 의향이 있었는데 그가 협찬 일체를 거절하면서 비용부담까지 덜었으니 돈은 돈대로 벌고 홍보는 홍보대로 톡톡히 효과를 거둔 셈이었다. A야 여러 호텔의 각종 협찬공세에도 흔들리지 않고 인륜지대사인 결혼식 장소만큼은 본인이 스스로 결정하였다며 나름 뿌듯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우리 호텔이 본인의 결혼식에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판단하게끔 내가 A와 친한 연예부 기자들과 기획사 식구들은 물론이고 A가 다니는 헤어샾 원장님, 심지어 그의 피앙세의 어머니가 자주 이용하는 피부과 상담실장까지 구워삶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음을 그도 알고 있었을까.
또한 지난 여름시즌에 기획한 골드미스들과 동갑, 혹은 연하의 미혼 남성 직장인을 연결하는 스페셜 서머 이벤트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골드미스라는 이유로 연하이거나 적어도 동갑인 남자를 원하는 여자들이 많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남자라면 닭 중에 영계를 제일 좋아한다는 대한민국에서 돈 많고 예쁘기만 하다면 누난 내 여자라며 덤벼드는 젊은 청년들 역시 적지 않음에 신선한 충격을 받기도 했다. 하긴 물가는 계속 치솟는데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불안한 직장생활을 영위하며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배우자와 자식들을 평생 이고 지고 가자니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막힐 노릇이리라. 그러니 외벌이로는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없다며 경제적 짐을 나눌 수 있는 아내를 희망한다하여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또한 골드미스라면 의학의 힘을 빌려 돈 없는 영계보다 피부도 곱고 몸매도 잘 빠졌는데 마다할 이유가 뭐가 있으랴. 어찌되었든 서울의 유명 호텔들이 기획한 여러 여름휴가 이벤트 중 우리 호텔 프로그램이 가장 상종가를 쳤고 덕분에 회사 이미지도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다고 부장님도 상당히 흡족해 하신 바 있다.
이러다보니 내가 인트라넷에 인사발령 공문이 새로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고 일말의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A의 결혼식도 그렇고 여름 스페셜 이벤트도 그렇고 최근 내가 호텔에 끌어온 이익이 엄청나지 않았던가. 실적만 놓고 따진다면 내가 승진했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릇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결과가 모든 걸 설명한다고 하지 않던가. 여직원이지만 남자 못지않게 모든 업무처리를 척척 해 내었고 입사동기 중 차장 승진자가 벌써 세 명이나 나왔으니 내가 이번에 승진하더라도 그리 초고속까지는 아닌 셈이다. 게다가 내 이름이 인사팀에서 조금씩 거론된다고 동료에게 전해들은 바 있고 우리 회사가 인사적체가 심해 승진시기가 늦어서 그렇지 다른 회사라면 내가 지금 과장 8년차니 진작 차장 타이틀을 달았을지도 몰랐다. 뭐 그렇긴 해도……선배들 중에도 차장급은 아직 그리 많지 않다. 너무 앞서가면 승진 못한 선배나 동기들에게 미움 받을 수도 있다. 특히 차장 승진을 못 한 여자 선배들이 아직 한참 줄 서 있는데 만약 이번에 내가 승진하면 그 아주머니들의 시샘은……아,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인가. 한숨이 나왔다. 차라리 대충 동기들 승진할 때 같이 우르르 올라가야 내부의 적을 만들지 않을 테니……장기적 관점에서 그게 더 나으려나. 전자결재시스템에 로그인하고 인사공문통지서에 접속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불쑥불쑥 떠오르는 잡다한 상념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내 이름이 있을까? 아니면 없을까? 있는 것이 과연 좋을까? 아니면 차라리 없는 게 나을까?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인사발령통지서를 클릭했다.
내 이름은 거기에 있었다.
2.
“별 일 없어?”
책상 위 스마트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전화를 받자 언제나처럼 다정한 남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핸드폰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복도 끝 비상구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울컥하고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왔다. 입을 열면 울음이 와락 터질 것 같아 쉽사리 말문을 열 수 없었다.
“여보, 희수야, 무슨 일 있어?”
“…….”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구나. 누구한테 한 소리 들었어?”
“오늘 인사발령 통지 났어…….”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르고 한참 만에 말문을 열었다. 전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지만 어차피 남편도 알아야 할 사항이다.
“응?”
“8월 20일부터 태안 리조트 근무야.”
“으응?”
“……”
“…오늘 집에 갈까?”
남편과 나는 소위 말하는 주말부부다.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그나마 중상층으로 살아보고자 작년까지 둘이서 아득바득 직장생활을 해 왔다. 하지만 회사에서 하릴없이 잘려 나가는 40대 선배들을 보며 우리도 어느덧 마흔을 코앞에 둔 시점이 되자 퇴직 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다 한다는 치킨집도 염두에 두었지만 나나 남편이나 몸을 쓰는 데에는 영 젬병이었다. 고민하다 남편은 작년 말 회사에서 대규모 구조조정이 있을 때 명예롭게 퇴직하여 취학 전 아동들과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코딩 학원을 시작했다. 남편은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하며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었다. 서울의 유명 학원가는 임대료도 비쌌지만 문과생인 남편이 경쟁력을 갖추기도 어려웠다. 결국 남편은 자신이 학창시절을 보냈던 경기도 외곽의 한 동네에 자그마한 코딩학원을 열었다. 그 동네에 아직 살고 있는 동창들을 부지런히 만나고 졸업한 학교의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학원홍보를 시작했다. 서울까지 광역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면 편도 2시간 반 정도의 거리였다. 출퇴근을 하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학원이 안정될 때까지 학원 근처의 조그마한 원룸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주말마다 집에 올라왔지만 지금은 2~3주일에 한 번씩 집에 들른다. 지난 주말에 집에 왔으니 이번 주는 집에 오는 일정이 아니다.
“오지 마”
“갈께. 저녁에 술이라도 한 잔 하자. 이럴 때일수록 남편이 든든한 위로가 되어 줘야지.”
“위로 안 돼. 혼자 있고 싶어. 오늘은 당신 얼굴 보고 싶지 않아.”
“……”
“…미안…”
“…알았어. 하지만 필요하면 언제든 전화하기다. 알지?”
“…고마워…”
남편이 전화를 끊었다. 서운해 하는 감정이 수화기 저 너머에서 파도처럼 밀려왔다. 자기가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그토록 서운한 모양이다. 그래도 예전 같았으면 뭐 내가 위로가 안 된다고? 이렇게 시작해서 남편 알기를 도대체 뭐로 아냐,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냐, 어려울 때 서로 아픔을 나누고 위로하는 게 부부 아니냐. 그럴 거면 결혼은 왜했냐, 우리 사이가 이것밖에 되지 않느냐 라고 다그치며 이미 힘들고 지친 마음을 한층 더 갈기갈기 찢어발기곤 했는데……. 부부로 함께 한 세월이 십 수 년 흐르면서 그도 나도 이제 어느 정도 상대방을 헤아리는 내공이 쌓였나 보다.
심호흡을 크게 했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말자. 지방발령을 받았다고 인사방침에 반감을 품은 직원처럼 보여서는 곤란하다. 눈시울이 젖어들거나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도 꼴사납다. 서희수. 너는 한순간도 당당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주눅 들지 말자. 쉼 없이 마인드컨트롤을 하며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에는 기획부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 과장, 인사통지서 봤습니다.”
부장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먼저 아는 체를 하며 악수를 권했다.
“부장님, 안 그래도 내려가기 전에 찾아뵙고 인사드리려 했는데……. 부장실로 부르시지 이렇게 직접 오셨어요?”
나는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얀 윗니가 정확히 8개 보이는 상냥한 미소를 만면에 가득 띠우고 목소리를 반 옥타브 높여 답했다. 그리고는 인사하듯 허리를 45도 각도로 굽히며 부장이 내민 손을 두 손으로 곱게 맞잡았다. 직속 상사를 대할 때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자세다. 기획부장이 직접 내려오자 사무실 모든 직원들은 좌불안석이다. 일개 과장 한명이 부서이동을 하게 되었다고 부장이 몸소 사무실에 내려오는 일은 흔하지 않다. 그만큼 나에게 힘을 실어 주려는 부장의 의도다.
“서 과장, 마이더스의 손이니까……. 지금 태안이 적자가 심각합니다. 아마 서 과장 내려가도 흑자로 돌아설 기미가 안보이면 회사 차원에서 태안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믿으니까 보내는 겁니다. 알죠?”
부장의 낮은 목소리에는 마치 적진을 향해 충복을 내보내는 장수처럼 표현하기 어려운 비장함마저 깔려 있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랄. 믿기는 개뿔. 정말 그렇다면 회사는 나를 승진시켜서 내려 보내야 했다. 최소한 인사팀이나 혹은 다른 루트를 통해 이러한 임무를 띠고 태안으로 파견될 테니 준비하라는 언질은 있어야 했다. 차장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내게 실적을 올리기 어려운 지방 리조트, 그것도 고객 지원실로의 파견은 정작 중요한 시기에 인사고과 점수를 쌓지 못하게 해 날 완전히 물 먹이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아무리 지방 리조트라고 해도 적자를 흑자로 전환시키려면 건물 리모델링부터 직원 채용 및 교육, 고객 유치를 위한 스페셜 프로모션 등 총체적인 변화를 필요로 할 텐데 내가 태안 리조트 임원이나 팀장으로 발령 난 것도 아니고 기획 및 홍보 부서로 이동하는 것도 아니고, 고객들의 민원을 접수해서 처리하는 일개 고객지원실 과장이 무슨 힘이 있어 적자인 리조트를 흑자로 전환시키겠는가. 이러다가 회사에서 태안을 포기하면 나 역시 리조트와 함께 버리겠다는 셈이 아닌가.
“기다려요. 아마 오래 있지는 않을 겁니다.”
부장의 말이 확신인지 희망사항인지, 진심인지 정치적 의도가 깔린 코멘트인지는 알 수 없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듯 보이는 심각한 표정과는 별개로 어쩌면 그가 직접 나의 지방발령을 조장하거나 혹은 묵인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리라. 그의 정확한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인사발령통지가 나자마자 기획부장이 나를 만나러 사무실에 들렀고 내가 태안 리조트 적자상황을 뒤집기 위해 회사에서 파견한 카드라더라 하는 소문은 곧 사내에 퍼질 테다. 그리고 이게 망가진 내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이다. 잘난 척 까불다 본사에서 쫓겨나는 이미지보다는 낫지 않은가. 젠장, 그가 조금은 고맙다. 이게 그가 내부에 적을 두지 않고 자기 사람을 만드는 방식인가 보다.
부장이 간 후에도 간간이 위로 전화며 문자가 당도했다. 그래도 직장생활을 헛하지는 않았나보다. 하지만 결국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하는 사람은 나다. 직장 동료들이 내게 위로는 될지 몰라도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차피 그들이 손해 보면서까지 나를 도와줄 리도 없지만 말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니 그들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나는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 있는 냉혹한 정글 한 가운데에 스스로 들어왔고 그들과 나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경쟁상대일 수밖에 없다.
업무시간이 종료하자마자 바로 퇴근했다. 평상시에는 잔업이 없어도 으레 한두 시간 정도는 사무실에 남아서 참고 자료도 찾아보고 서류도 정리하고 해야 할 일도 체크하곤 했지만 이제 내가 맡았던 업무는 더 이상 내 소관이 아니니까. 내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오고 나는 새로운 자리로 이동해야 한다. 잘 나가는 연예인이나 외교 대사, 기업의 CEO 등 초특급 VVIP들을 상대했던 자리에서 가족들을 이끌고 휴가를 즐기러 온 평범한 중상층의 아저씨나 아주머니들을 맞아 그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일하는 자리로 이동해야 한다. 회사를 나와 시내 영화관으로 향했다. 오늘은 평상시처럼 집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저녁밥을 차려 먹기 어려울 것 같다. 혼자 집안에 있으면 독한 위스키를 정신을 잃을 때까지 들이킬 수도 있다. 어쩌면 눈이 퉁퉁 부어오를 때까지 대성통곡할지도. 방안의 불을 모두 끄고 어두운 리듬 앤 블루스를 들으며 정신 나간 여자처럼 오도카니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밤늦게 학원에서 돌아오면 처음 보는 엄마의 모습에 흠칫 몸을 떨 수도 있겠지. 어떤 경우든 찌질하다. 나 서희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은 아니다. 영화관에 들어가 전광판에 쉴 새 없이 오르내리는 예닐곱 개의 영화 중 러닝타임이 가장 긴 작품을 선택했다. 그리고는 커다란 팝콘과 빨대를 꽂은 스프라이트 컵을 양 손에 들고 상영관 안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카톡으로 ‘엄마 늦음’이라고 아이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핸드폰을 껐다. 이제 영사기가 돌아가는 동안은 아무 생각 없이 영화에 파묻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생각하지 말자.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자.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테니까.
3.
요란하게 울려대는 핸드폰 소리에 눈을 떴다.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다. 간만에 늦게까지 잠에 빠져 있었나보다. 아니면 일어나기 싫었든지. 젠장.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인가.
“이따 오후에 시간 있어?”
김 차장 전화다. 차장님이 전화하시는데 시간이야 없어도 만들어야 하지 않은가. 김 차장은 입사 1년 선배다. 초고속 승진의 필수공식이라는 SKY대 출신이다. 이번 인사발령 시 차장으로 승진했다. 여자로서는 꽤 빠른 편이다. 그 동기 중 여자들은 이미 상당 수 퇴직했으니 아직도 회사에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용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여자가 상사라고 불평하는 남자 부하직원이 없지는 않지만 그들을 살포시 그렇지만 확실하게 내리찍으며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제대로 발휘한다고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이다. 특히 비서실 소속답게 상사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있다. 항상 방실방실 웃는 미소와 타고난 눈치로 상사들 비위를 잘 맞추어 회사 임원진에게 최고의 맏며느리감이라는 칭찬을 듣곤 한다. 웃기지 않는가? 회사에서 유능한 차장이 제대로 된 맏며느리 역할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 나이 되도록 여자가 꾸준히 승진하며 회사에 남아 있으려면 집안 꼴이 어떨지 안 봐도 뻔하지 않은가. 최고로 유능한 여직원에게 최고의 맏며느리감이라……농이 지나치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거리에는 사람들이 지겹도록 북적거렸다. 지하철에서 내려 김 차장과 자주 만나던 칵테일 바가 위치한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리 이름난 술집도 아닌데다 회사에서 거리가 좀 있다 보니 아는 얼굴을 마주칠 염려가 적어 애용하는 장소다. 회사 근처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아무래도 술 한잔하기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회사생활하며 선배들에게 지겹도록 들은 교훈이다. 사무실 안은 물론 복도에서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라도, 화장실에서 여직원들끼리 너 오늘 메이크업 예쁘다, 오늘 날씨 정말 죽이지 않니 등 별 영양가 없는 수다를 늘어놓을 때조차도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해야 한다. 그러니 회사 근처 술집은 오죽 하겠는가. 오늘따라 과장님 정말 분위기 있으신대요 라며 황홀한 미소를 날려대는 바텐더가 날카로운 매의 눈을 숨기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여 우리 회사 인사팀에 보고할 수도 있고 혹시라도 경쟁회사 직원이 썩은 고기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신규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라도 캐 볼까 하고 내 말을 엿들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금테가 둘린 묵직한 철문을 밀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여름이 지나지 않아서인지 축축하고 후텁지근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이제 막 영업을 시작한 시간이라 손님이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어두침침한 주황색 불빛 너머로 가게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출입구 맞은편 구석에 놓인 색 바랜 붉은 빌로도 소파 위에 한쪽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앉아 있는 김 차장이 보였다. 속이 살짝 비치는 하늘하늘한 핑크빛 블라우스에 스노우 화이트 재킷을 걸치고 엷은 광택이 도는 블랙 정장바지에 굽 높은 마놀로블라닉 샌들을 신고 있다. 집에서 나온 복장은 아니다. 토요일인데도 지금까지 회사에서 일하다 온 모양이다. 열심이군. 느지막하게 일어나 주섬주섬 집히는 대로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쳐 입고 나온 나와는 대조적이다. 얼마 전만 해도 같은 과장이었는데 이제 그는 차장이요, 나는 과장이다. 그는 최고급 정보를 소유한 본사 비서실 소속이고 나는…… 젠장. 그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를 쏘아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자원했니?”
“그럴 리가”
“이유는?”
“허허허, 일개 과장 따위가 어찌 회사 방침에 감히 이유를 논하겠습니까?”
삐딱하게 대꾸한 후 지나가는 웨이터를 불러 세워 하이볼 한잔을 시켰다. 김 차장이 노려보는 눈초리가 예리한 칼날처럼 나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쩝. 내가 좀 심했나? 김 차장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며 한 쪽 벽에 걸려 있는 앤디 워홀의 마를린몬로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이런 데 걸린 게 원본은 아닐 텐데……. 저작권료는 제대로 내고 달았을까? 저거 고소하면 얼마나 챙길 수 있으려나. 이런 조막만한 가게가 배상금은 몇 푼이나 낼 수 있을까……. 나는 한동안 애꿎은 그림만 바라보며 얼음을 품고 차가운 땀을 연방 흘려대는 하이볼 잔을 만지작거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김 차장은 한참을 말없이 내 얼굴만 노려보더니 결국 작은 한숨을 토하며 포기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몰랐다. 내 코가 석자다보니. 인트라넷 보고 알았어. 어쨌든 평상시 회사에서의 네 행동이 항상 아슬아슬해서 언제 한마디 해줘야지 했는데……. 부서도 다르고 나도 정신없이 바쁘다보니 따로 시간 낼 겨를이 없었네.”
김 차장이 보헴 시가마스터 한 개비를 집어 들고 불을 붙였다. 이런 모습을 어르신들이 보고도 맏며느리로 삼고 싶으실까? 어쨌든 김 차장이 담배를 물었다는 것은 지금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다는 의미다. 상사가 이런 기분일 때 엉뚱한 불똥이 튀지 않도록 아랫사람은 무조건 조심해야한다. 쳇, 자기는 승진도 했으면서……. 자기 심기가 좌천된 나보다 불편할까 싶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김 차장이 한쪽 팔을 소파에 걸친 채 천장을 향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했다.
“너랑 나랑 친한 거 인사팀은 물론이고 회사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거든?”
내가 회사에 입사했을 때 사수가 바로 김 차장이었다. 당시 나는 총무과에서 일반 서무를 담당하였는데 처음이라 그런지 회의자료 정리부터 사무실 소모품 구매까지 모든 게 다 어려웠다. 그래도 다른 남자 선배들은 귀여운 후배가 들어왔다며 내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주고 물어보지 않은 사항까지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는데 김 차장은 같은 여자라 그런지 나의 필살 눈웃음과 애교도 전혀 통하지 않는 무서운 선배였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서로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역시 대한민국은 학연사회다. 어쨌든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나누면서 김 차장의 1학년 담임이 내 3학년 담임이었다는 점을 발견했고 우리 둘 다 그 시절 학교에서 훈남으로 유명했던 총각 국어선생님을 짝사랑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는 학교 정문 근처에 위치한 붉은 벽돌색건물 이층 까치만화방에서 김동화와 황미나의 만화를 보며 울고 웃었고 만화방 옆 건물 만나분식점에서 삶은 계란을 포크로 잘게 으깨어 매콤한 떡볶이 국물에 비벼 먹으며 왁자하게 친구들과 미래를 논하였다.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던 고교 시절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상대가 삭막한 회사 내에 그것도 같은 부서 안에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오래지 않아 우리는 사적인 자리에서 언니동생하기 시작했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회사와 가정생활 병행이라는 그 절박함과 아찔함에 대해 논하며 실소하곤 했다.
그와 나 사이에 1년이라는 연차가 존재했지만 언젠가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짐작했다. 대담하게도 근무시간 중 아이 공개수업에 참석한다고 반차를 내고 나가는 김 차장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가 언제까지 회사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 궁금해 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입사 후 십 오년 이라는 세월동안 같이 입사했던 여자 동기들은 물론 유능하다는 남자직원들도 가차 없이 잘려나갔던 두 번의 대규모 구조조정 하에서도 별다른 실적 없이 굳건히 살아남았다. 그가 S라인의 미인이라면 임원진 실세 중 누구의 애인이라니 하는 루머가 나돌 만도 하지만 김 차장은 다행히도 어르신들이 맏며느리로 삼고 싶은 인상이기는 하나 애인으로 삼고 싶은 외모는 아닌지라, 어르신들과 그렇게 어울러 다니면서 귀여움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그런 악의적인 루머에는 시달리지 않고 있다.
그와 나의 개인적인 사이는 매우 좋았지만 나는 직장보다 가족을 우선시하고 가시적인 업무성과보다 회사 사람들하고의 관계에 더 집중하는 김 차장의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김 차장 역시 회사에만 매달려 각종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성공시키며 회사 내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면서도 일에 서툰 사람은 후배든 선배든 거래처 사람이든 위아래 가리지 않고 독설을 퍼붓는 내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프로젝트 성공률이나 회사에 가져다 준 이윤으로만 본다면 나는 내 또래 누구보다도 뛰어난 편이었고 최소한 아이 학교상담이며 공개수업까지 챙기는 김 차장보다는 승진이 빠르리라 예상했다. 아니 김 차장은 사람만 좋지 업무 실적은 뛰어나지 못하므로 40대가 되면 아무래도 회사에서 버티기 쉽지 않을 텐데 싶었다. 하지만 이번 인사발령시 그는 차장으로 승진했고 나는 좌천되었다.
“지난번에 홍 팀장하고 싸웠다며? 너 홍 팀장이 박 이사 라인인 줄 알면서도 그런 거지?”
“그게 뭐. 언니도 홍 기획안을 봤어야 했어. 어딜 그딴 걸 기획이라고. 도대체 그 사람 무슨 수로 차장 단거야? 내가 이번 여름 스페셜 패키지 대박친 거 언니도 알지? 홍 팀장 그 구닥다리 기획대로 했으면 이번 이벤트 우리 호텔 완전 적자야. 그럼 홍도 오히려 곤란해졌을 걸. 박 라인이면 실적이 개판이라도 용서되나 보지?”
“홍 팀장이 곤란하지 네가 곤란하니?”
“응?”
“적자가 나면 회사가 적자 나는 거지, 너네 집 재정이 파탄 나니?”
“응?”
“오지랖 넓게 나서지 말란 말이다. 알아들어?”
“하지만 회사가……”
“니 회사니? 네가 회사 오너야? 너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데……회사는 니 게 아니야. 넌 그저 일하는 소모품일 뿐이야. 그 부품이 아무리 제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주인 맘에 안 들면 그냥 버리고 새 걸로 대체하면 끝나는 거야. 알아?”
“……”
김 차장이 다시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었다. 줄담배라……이 사람 지금 상당히 흥분했군.
“주제파악을 해, 주제파악. 주인의식, 주인의식 하니까 마치 네가 회사 주인이라도 된 것 같아? 웃기지 마. 아래 것들이 가져야 하는 주인의식은 말이야, 지금 주인님이 무슨 생각을 하나 파악하고 주인님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서 그 분의 비위를 맞춰 드리는 걸 말하는 거야. 네가 주제파악도 못하고 마치 회사가 니 것인 마냥 그렇게 설쳐대니까 내부에 적들이 생기는 것 아냐. 입사 초창기에야 이리 저리 줄 대기보다 회사의 미래를 고민하며 열심히 일하는 게 기특해 보이지만 지금 네가 입사 몇 년차냐? 아직도 니가 올리는 실적이 너를 보호해 줄 거라는 순진무구한 생각에 허우적거리고 있냐?”
이틀 전에 이런 얘기를 들었다면 나는 피를 토하며 이에 반박하는 열변을 쏟아내었을 테다. 회사가 있고 내가 있지 회사가 망하면 직원들은 순식간에 일자리를 잃어버리지 않느냐. 하지만 지금 나는 확실히 알고 있다. 회사가 망하지 않아도 나는 잘릴 수 있다.
“여기 오기 전 권 차장이랑도 잠깐 얘기했는데……아무래도 니가 박 이사 눈 밖에 난 것 같다. 너, 나 뿐 아니라 권 차장이랑도 친하니까……자칫 잘못하면 너 하나 땜에 나나 권 차장이나 다 한가지로 엮여서 골로 가는 수가 있어. 알아?”
“……”
결국 이런 얘기다. 난 지금까지 회사의 성공과 나의 성공을 동일시해 왔다. 나를 고용하고 나와 내 가정을 유지할 수 있는 월급을 꼬박꼬박 지급하는 회사에 감사하며 내가 받는 월급의 세 배, 네 배……아니 그 이상의 수익을 회사에 안겨주고자 노력했다. 회사의 원초적인 설립 목적은 결국 이윤추구이며 회사에게 지속적인 수익을 안겨 준다면 회사도 나를 보듬고 예뻐해 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의 인사권한을 쥐고 있는 상사 마음에 드는 것. 그들이 원하는 바를 미리 읽어 내고 입의 혀처럼 구는 것. 그건 단순한 자존심 싸움이 아니었다. 생존의 문제였다.
“아부가 아니야. 관계 유지라고 여겨. 시쳇말로 네트워크 형성, 강화? 뭐 이런 거?”
“……하아……”
“우리 짬밥에 상사든 후배든 다른 직원의 생각을 읽어 내는 눈치가 없다면 능력이 없는 거야. 읽어 내더라도 그걸 이용 못한다면 더더욱 무능력한 거고…….”
“……후우……”
“아, 꼬우면 때려 치든가.”
“나 소녀 가장인 거, 언니도 알잖우.”
“소녀는 무슨……. 이제 불혹이 다 된 아줌마 가장이지.”
김 차장이 피식 웃었다. 처음 들어 왔을 때의 시퍼런 서슬은 이제 어느 정도 가라앉은 듯하다.
“남편은? 학원은 잘 되고 있냐?”
“늘 그렇지. 뭐.”
인사발령통지서를 본 후 사직서를 제출하는 내 모습을 열 번도 넘게 그려보았다. 내려가서 남편이 운영하는 학원이나 도와볼까. 하지만 남편 퇴직금에 은행 빚을 더하여 시작한 사업이 성공하면 다행이나 실패하여 그나마 있던 퇴직금마저 날려 버리면 사회 중류층에서 하류층으로의 곤두박질은 시간문제였다. 남편 학원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 전까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는 회사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서서히 목을 조여 오는 경제적 공포심과 두려움에 매일 밤잠을 설치기보다는 차라리 가슴 속에 가라앉은 자존심을 긁어모아 하늘 높이 날려 버리고 원래부터 그런 단어를 아예 몰랐던 척 사는 게 나을 수 있다.
“사고치지 말고. 당분간 납작 엎드려 있어. 좀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당장은 박 이사도 너 완전히 쳐낼 기미는 없어 보여. 홍 팀장, 그 인간 너 잘 알잖니? 아마 홍이 너한테 당한 후 마치 니가 박이사에게 반기라도 든 듯이 얘기했나봐. 회사 내에 니가 박 이사 뒷다마를 까고 다닌다는 소문도 있어. 나야 널 잘 아니까 너처럼 똑똑한 애가 바보같이 그러지는 않았을 거라 믿지만 어디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겠니? 원래 소문이라는 게 참 편리하잖니. 근거도 없고 사실이 아니라도 사람 하나 죽이는 거 금방이다. 박 이사도 네가 자기에게 기어오른다고 여겼나봐. 그래서 요놈 가만 두면 안 되겠네. 맛 좀 보여주자 뭐 이런 정도? 어찌 되었든 하극상은 하극상이었잖니. 그 곳에서 쓸데없이 일 벌리지 말고 맡은 업무만 제대로 하고 있어. 시간이 지나서 이번 일이 잊히거나 오해가 풀릴 때쯤 되면 다시 본사로 복귀할 수 있을 테니까.”
“시간이 지나면 내 이름 역시 본사에서는 잊히지 않을까?”
“잊히지 않게 해야지. 그것도 능력이다. 특히 명절 때가 되면 본사 윗분들 선물 잊지 말고. 생일은 기본인 거 알지? 무슨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정기적으로 텀을 두고 안부인사 드리곤 해. 태안에 무슨 유명한 특산물 없나? 있으면 챙겨 보내 드리고.”
“언니하고 권 차장님 것은 우선적으로 챙겨 보낼게.”
“야, 나랑 권 차장은 네가 사고만 안쳐도 만족해. 닥치고 웃어른들이나 잘 챙기고.”
마티니 한 잔을 새로 주문했다. 액체가 입술을 통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퍼지는 쓰디쓴 맛이 갑자기 그리웠다. 그래. 새로울 것도 억울할 것도 없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먹이사슬. 난 그저 약했을 뿐이고 그래서 먹이가 적은 정글 한 구석으로 쫓겨났을 뿐이다. 홍 팀장도. 박 이사도. 그들 역시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누구를 원망할 일도 아니다. 그저 자연의 이치일 뿐. 그나마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 회사 내에 있다는 게 못내 든든하고 안심이 되었다. 그것도 본사 핵심 부서에서 촉망받는 위치에 있다는 게.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을 읽기라고 한 듯 김 차장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잘 알겠지만……나나 권 차장도 절대적으로 믿지는 마라. 물론 가능하면 너 챙겨 주려 하겠지만……내 자의대로 회사에서 행동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아직 없다. 나도 라인 따라 이리 저리 움직이다보면 언젠가는 그러고 싶지 않아도 부득이하게 니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단 말이야. 그래도……난 미안해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너도 미리미리 알아서 방어하란 말이야. 알지?”
나는 씩 웃으며 김 차장을 바라보았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어떡하우. 서희수. 나만 믿어라. 나는 하늘이 두 쪽 나도 결코 너를 배신하지 않을 거다. 이렇게 안심시킨 후 뒤돌아서서 등 뒤에 칼을 푹 꽂아야 그게 고수지. 김 차장님. 그렇게 순진해서 어디 본사에서 살아 남겠수?”
김 차장이 나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제 좀 나아진 모양이구나. 재잘재잘 고 입만 산 걸 보니.”
우리는 마주보고 크게 웃었다. 인사발령 통지서를 마주한 이래 내 안에서 솟아올랐던 놀람과 분노, 슬픔과 억울함이 이제는 많이 옅어져 있었다. 어딜 간들 목구멍에 풀칠이야 못하겠는가. 본사에서 서로를 의심하며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보다 물 맑고 공기 좋은 태안에서 휴양삼아 일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명예퇴직해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복잡한 도시 생활을 접고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니 정말 행복해요 하며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화면 가득 미소 짓던 어떤 시골 부부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곳에는 시끄러운 알람 소리 대신 상쾌한 바닷바람과 갈매기들의 끼룩거림에 여유 있게 눈을 뜨겠지. 숨을 크게 들이쉬면 도시에서 경험할 수 없는 청아하고 속 맑은 대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서리라. 시장 통처럼 사람이 정신없게 바글거리는 스타벅스에서 휘핑크림을 가득 얹은 카페모카를 즐기는 대신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바닷가에서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으며 맥주 한잔 들이켜도 좋겠지. 끝없는 상상은 어느새 나를 싱그러운 바닷바람이 가득한 눈부신 백사장 위로 옮겨다 놓았다. 나는 시원한 맥주 대신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애음했다는 투명한 마티니 한 모금을 들이키며 눈을 감았다. 루이 암스트롱의 끈적하게 달라붙는 재즈 선율과 더불어 입술이 찌르르 떨려오는 마티니의 드라이한 맛과 향이 온 몸 구석구석을 짜릿하게 핥아 내렸다.
“서희수!”
갑작스레 내 이름을 부르는 김 차장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나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눈을 떠 보니 탁 트인 바닷가는 간데없고 나는 여전히 축축한 습기가 느껴지는 어두운 바 안의 붉은 빌로도 소파위에 앉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김 차장을 바라보았다. 술기운 탓인지 약간 불콰해진 그녀의 얼굴이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조명 때문일까. 김 차장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살아남아라. 반드시. 너마저 없으면……난……정말……많이 외롭다.”
선배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이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장수의 눈망울이 애정을 갈구하는 고양이의 그것처럼 쓸쓸해 보였다면……그건 내 착각임이 분명했다. 고수일수록 자신의 패를 완전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김 차장은 고수다. 이따위 서툰 신파로 내가 넘어가리라 어림했다면 나를 완전 띄엄띄엄 보는 거다. 적당히 술자리를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거리에는 네온사인만 즐비했다. 택시를 잡아 김 차장을 태워 보내고 나는 지하철역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가져오길 잘했다. 시도 때도 없이 뿌려대는 이번 장마는 정말 길기도 길다.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졌다. 우산을 펼쳤다. 갑작스런 비에 두 손이나 혹은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허둥지둥 어디론가 달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들은 어디를 그리 바삐 가는 걸까.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사람들이 정말 많기도 많다. 그래도 저들 중 그 누구도, 내가 이 커다란 우산을 펼치고 있는 한, 그 아래 숨겨진 나의 기이한 표정을 읽어 내지 못할 것이다. 다행이다.
고단하다. 내일은……내일은 간만에 새벽기도나 나가봐야겠다. 교회도 태안으로 옮겨야 하겠군. 아이는 태안으로 전학시켜야 하나? 아니면 남편 학원이 있는 경기도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아이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 하나하나 처리하다보면 언젠가 깨끗하게 정리되는 날이 오겠지. 하루하루 그렇게 살다보면……모르겠다. 내일 새벽기도에 참석하려면 일단 일찍 자야 한다. 하나씩 해결하자.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우산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점차 거세졌다. 집에 도착하면 그때는 우산을 접을 수 있겠지. 조급하게 굴지 말자. 이제 곧 집에 도착할 것이다. 비를 품은 바람이 우산이라도 뒤집을 기세로 거칠게 불어왔다. 나는 두 손으로 우산을 단단히 고쳐 잡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었다.
별이 몹시 보고 싶다.
<당선소감>
"오랜 직장 생활에 직장인 애환 그린 드라마도 웃기지 않았다"
‘TV손자병법’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직장인들의 애환을 코믹하게 그려낸 드라마였는데 어린 시절 가족들이 거실 소파에 둘러앉아 재미있게 시청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어릴 적 마냥 우습기만 했던 텔레비전 속 이야기들은 더 이상 웃기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 회사를 다니면서 나도 모르게 주고받았던, 농을 가장한 생채기들은 서로에게 웃음이 아닌 깊은 흉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런 상처쯤 아무렇지도 않게 견딜 수 있는 굳은살이 박일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사람들과의 만남은 쉽지 않습니다.
사당역 사거리에서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소음으로 전화 목소리를 잘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본심에 진출했다는 전화인 줄 알았습니다. 사진과 당선 소감을 준비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나서야 ‘당선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자 뒤늦게 기쁨과 함께 부끄러움이 밀려들었습니다. 돌아와서 찬찬히 내 글을 다시 읽어 보았는데 역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릅니다. 글을 읽는 건 좋아하지만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디선가 임계치까지 글을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쓰게 된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나한테도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무언가 새로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은 나이가 아닐까 싶었지만 이렇게 좋은 기회를 주시니 덥석 잡아야겠습니다. 좋은 글을 쓰는 것도, 발표할 지면을 얻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멈추지 않겠습니다. 부족한 글을 선정해 주신 심사위원과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주신 머니투데이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뭘 하든 여전히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봐주는 남편과 엄마에게 비타민 같은 활력을 안겨주는 진이에게도 사랑과 감사를 보냅니다. 시작이라고 생각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재능이 부족하다면 성실함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천재가 아닌 범재라 하더라도, 내가 쓸 수 있고 써야 하는 글은 있으리라 믿습니다.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심사평>
"해 거듭할수록 작품 수준 높아져…현장감 넘치는 흡입력"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가 해를 거듭할수록 작품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
소설, 수필, 수기를 망라한 산문 부분에서는 김기남씨의 수기 '경매는 대박이다', 오승경씨의 단편소설 '별을 그리다', 김태식씨의 수필 '철판을 다듬는 사람들', 신정근씨의 수필 '수표 한 장', 노현수씨의 단편소설 '대리인'이 최종 심사대상에 올랐다.
그 가운데 '경매는 대박이다'는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문장이 거칠다는 점에서, '철판을 다듬는 사람들'과 '수표 한 장'은 문장은 미려하나 이야기의 확장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 혹은 누구나 자료를 찾아보면 나오는 이야기를 벗어나 그 소재에 대한 작가만의 경험과 사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거기에 비해 소설 두 편은 이야기의 짜임새가 뛰어나고 지금 현재 시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그리고 일어났을 수도 있었던 일을 잘 그려냈다. 오승경씨의 '별을 그리다'는 여자라는 이유로(물론 다른 이유가 더해진 것일 수도 있지만) 지방에 있는 리조트로 발령이 난 여자 주인공이 겪어온 우리 사회의 유리천장에 대한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잘 풀어나갔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이해는 빠르게 전달되지만 그런 만큼 전체 이야기의 구조가 단순하다. 이 작품을 가작으로 올린다.
노현수씨의 '대리인'은 우리가 지나온 정권 어느 시기에 충분히 있었을 법한 해외자원 투자에 대한 금융기관 상층부의 담합 사기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이 방면의 업무 구조나 해외자원 투자에 대한 정책 사정을 모른 채로 글을 쓰면 자칫 허황하게 들리기 쉬운데 노현수씨는 이 방면에 대해 치밀한 취재와 업무 이해를 통해 실제 없었던 이야기라 하더라도 있었던 이야기처럼 현장감있게 글을 써나갔다. 현장감을 바탕으로 흡입력 있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솜씨도 대단하고 결말의 반전을 이끌어내는 솜씨도 대단해 올해의 대상으로 올린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으로 정진하길 바란다.
심사위원 : 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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