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 소설 대상] 대리인 / 노현수
<당선작>
대리인 / 노현수
나는 서류를 챙겨 감사팀장실을 찾았다.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매단 듯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런 경우 안다만이나 비케이, 힐스는 탈세와 돈세탁을 목적으로 한 페이퍼컴퍼니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선 국내 법인의 대표를 찾고 역으로 그 법인에 대출을 해준 지점을 파악하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감사팀장은 서류를 눈으로 대충 훑어보며 저녁에 술이나 한잔 하자고 했다. 퇴근 시간에 문자메시지가 왔다. 시크릿. 7시. 그리고 주소가 보였다. 문을 열자 홀이 나타났다. 긴 테이블을 따라 한 명씩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놓여있었다. 흰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를 맨 삼십대 중반 정도의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감사팀장의 이름을 말하자 남자는 홀 끝으로 가서 벽처럼 보이는 곳에 노크를 했다. 문이 열렸다. 룸 안에는 팀장과 양복차림의 오십대 초반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연거푸 두 잔을 마셨다. 목이 따끔거리면서 술이 식도로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팀장이 빈 잔에 위스키를 따르면서 말했다. 이게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를 기념해서 만든 술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잔을 잡고 목을 젖혔다.
“아, 소개하지. 역동지점의 하 지점장이야.”
나와 악수를 한 후 지점장이 나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한 마디 했다. 이 술은 또한 왕에 대한 경례를 의미해, 끈적이는 눈길이 따라붙었다. 나는 지점장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윤 과장, 행장님이 관심을 가지고 승인한 해외투자야. 그냥 모른 척 하고 있어. 아, 해외투자전략 본부장님은 잘 계셔?”
지점장은 말하면서 혀로 윗입술을 빠르게 닦았다. 날름거리는 뱀의 혀를 본 것 같았다. 나는 지점장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감사팀장과 지점장의 눈빛을 온몸으로 받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국내 법인인 월드와이드는 호주 현지시행사인 랜드 매니지먼트에 천팔백 억을 주면서 공사를 맡겼다. 랜드 매니지먼트는 싱가포르에 본사가 있는 안다만 디자인컨설팅에, 안다만은 푸켓에 있는 비케이 골프앤레져 회사에, 비케이는 케이만 군도에 주소가 있는 힐스 리조트에 하청을 주었다. 정작 리조트 공사 현장은 부지만 닦아놓은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내가 호주 현지 시행사인 랜드 매니지먼트 본사를 찾아갔을 때 대표는 출타 중이고 여직원 한 명만이 빈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현장 실사를 나왔지만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헛웃음만 나왔다. 막대기에 사람 옷만 칭칭 감아놓은, 새들도 속지 않는 허수아비를 보고 온 느낌이었다.
일 년 전에 감사팀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불법대출 건을 적발하여 조사를 밀어붙인 민수 선배가 생각났다. 결국 지방으로 발령이 났고 한 달 전에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말을 들었다.
뉴질랜드 은행을 주목해. 민수 선배의 송별회 날이었다. 비틀거리는 몸으로 택시를 타면서 내게 한 말이었다.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당시 민수 선배가 조사한 사건은 뉴질랜드에 대규모 주상복합 빌딩을 짓는 사업이었다. 현지 시행사는 뉴질랜드 교민인 사업가가 대표로 있는 회사였다. 은행은 국내 법인을 통해 뉴질랜드 시행사에 대출하고 시행사는 현지 금융기관의 수익증권을 매입하며 이를 담보로 다시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는 방식이었다. 현지 금융기관이 로열 오브 뉴질랜드 뱅크였다. 문제는 담보로 잡은 수익증권이 해지되어 있었다. 또한 토지 근저당도 임의 해지된 상태였다. 시행사 대표는 일반 투자자들의 분양금까지 가지고 행방불명되었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부동산 투자 사기였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태도였다. 은행에서는 담보해지도 뒤늦게 알게 되었으며 현지 시행사가 은행 담당자의 이메일과 서명을 도용하여 해지한 것으로 주장하며 은행도 피해자라는 관점을 취했다. 몇 번이고 반복되던 민수 선배의 술자리 단골 레퍼토리였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우리는 대출해준 이백 억을 찾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민수 선배는 이 말로 일명 뉴질랜드 사기사건의 이야기를 끝맺었다.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감사팀장이 전화를 받았다. 네, 네, 알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하 지점장과 악수를 하고 나를 보면서 함께 가자고 했다. 택시를 타고 이십분 정도 달려 왔다. 서울 시내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한적한 숲 속이었다. 한옥에는 청사초롱이 켜져 있었다. 한복을 입은 아가씨가 입구에서 일행을 안내했다. 바깥채를 지나 안채로 갔다. 미닫이문을 열자 안에는 벌써 술판이 벌어져 있었다.
수석부행장이 가운데 앉았고 양옆으로 해외투자전략 본부장과 처음 보는 오십대 중반의 남자가 보였다. 수석부행장이 술 주전자를 들고 낯선 남자에게 술을 따르는 중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본부장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나의 고등학교, 대학교 선배였다. 입사 초기부터 그는 각별히 나를 챙겼다. 지방 소도시에서 같은 학교를 거쳐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게 보통의 인연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감사팀에 온 것도 본부장의 입김이었다. 입사동기들 중에는 이런 나를 부러워하는 축도 있었다.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라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본부장은 낯선 남자에게 나를 소개했다. 그는 금융감독원에서 나왔다고 했다. 수석부행장이 금감원에서 나온 남자에게 물었다.
“송 국장, 우리 사업 건은 크게 문제될 건 없겠지?”
“그럼요. 정부의 해외투자정책에 협조하는 건데, 오히려 표창을 줘야죠.”
하하, 수석부행장과 송 국장이 함께 큰 소리로 웃었다. 본부장이 눈짓을 하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가씨들이 각각의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옆에 앉은 아가씨가 하얀 사기주전자에서 따라주는 술을 마셨다. 아까 먹은 위스키보다 더 독했다. 식도가 타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몇 잔을 더 마셨다. 띄엄띄엄, 대화들이 섞여 들려왔다.
다른 데서는 몇 조씩 해쳐먹는데, 우린 고작 일조, 무슨 저축은행도 아니고……, 걱정마시라니깐요, 어차피 이번 정권 끝나면 흐지부지 돼요, 내년이면 벌써 대선정국으로 들어갈 거고……, 장관님과 서 의원님도 아시니깐, 있다 적당히 좀 챙겨드리고, 아, 비에이치에 계시는 이 수석님도 도와주시고 있습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단순한 은행 내부의 부당대출이 아니었다. 본부장이 나에게 손짓을 하면서 말했다. 윤 과장, 이리 와서 술 한 잔 받아, 본부장은 내 잔에 술을 따르며 송 국장에게 말했다. 이번에 실무에서 우리를 도와줄 직원입니다, 제가 친동생같이 아끼는 고향 후배입니다. 송 국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눈을 맞췄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팀의 윤영식 과장입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송 국장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수석부행장이 윤 과장, 내년에는 차장 달아야지, 라고 말하면서 나의 어깨를 툭, 쳤다.
감사팀장과 나는 한옥에서 제공한 승용차를 타고 다시 시내로 나왔다. 팀장이 나에게 조금 걷자고 했다. 오늘 들어서 알겠지만 우리는 뒤처리나 잘하고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챙기자며 나를 바라봤다. 내가 눈치를 챘다고 하니까 본부장이 오늘 이 자리에 데리고 나오라, 고 했으며 곧 하 지점장이 수고비를 챙겨줄 것이니 받으라고 했다. 대신 어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완벽하게 서류정리를 하고 실사를 나와도 걸리지 않게 하라, 며 당부했다. 다음 주에 호주 출장 좀 다녀 와, 라고 말하며 감사팀장은 멀리서 오는 택시를 세웠다.
아침부터 속이 좋지 않았다. 식도 어딘가에 묵직한 게 걸려있는 느낌이었다. 헛구역질이 계속 나왔다. 어제 안 먹던 술을 마셔서 그런가 싶었다. 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눈에 힘이 없었다. 앞을 바라보았지만 사물이 선명하지 않았다.
“불러도 대답도 없고, 왜 이렇게 멍하게 있어?”
감사팀장이 나의 어깨를 치면서 말했다. 그는 두툼한 서류봉투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하 지점장이 보내온 서류들인데, 그러면서 목소리를 줄이면서 자세를 낮추었다. 좀, 허술하지? 급하게 추진해서 그래. 이번 주에 검토하고 다음 주에 호주가서 보완해, 라고 말했다. 호텔에 있으면 월드와이드 대표가 찾아올 거야, 라고 하면서 비행기 표를 서류봉투 위에 놓았다.
감사팀장이 가고 난 후 나는 후우, 한숨을 길게 쉬었다. 서류봉투를 뜯었다. 같은 서류인데도 목적이 바뀌어 있었다. 적발하는 것이 아니라 감추기 위해서였다. 눈은 서류를 보고 있는데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글인데도 읽히지가 않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글자가 보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글자의 그림자였다. 글자에서 그림자가 떨어져 나와 안개처럼 글자 위에 떠 있었다. 떠다니던 그림자들이 먹구름으로 변했다. 금방이라도 그림자들이 비로 변해 사무실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과장님, 이 기사 좀 보세요.”
김 대리가 메신저로 보낸 링크의 주소를 클릭했다. ‘전 00은행 감사과 차장 정00(43)씨 자살’,
굵은 글씨의 제목이 보였다. 3일전 가족들에게 자살을 암시하는 문자를 남기고 실종된 정00(43)씨의 승용차가 충남의 한 저수지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보조석에 연탄을 피운 흔적이 있고 문이 잠겨있었으며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구역질이 나면서 신물이 넘어왔다. 나는 입을 막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변기 커버를 올리고 웩웩거렸다. 나올듯하면서 침만 고였다. 몇 번을 반복하다가 손가락을 목구멍 속으로 집어넣었다. 우웩, 어제 저녁에 먹은 술과 안주였다. 한번 쏟아내고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났다. 변기 커버를 내리고 그 위에 앉았다.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허벅지 부위의 바지가 어느새 축축해졌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한번 가야지? 크루즈 타고 가서 갈라파고스 거북이 할아버지께 인사나 하고 오자.”
민수 선배의 음성이 들렸다. 내 컴퓨터 바탕화면의 사진을 보고 민수 선배가 한 말이었다.
“나는 그랜트 핀치가 보고 싶은데.”
그게 뭐냐, 는 질문에 나는 내가 읽은 책의 내용에 대해 말했다.
“갈라파고스 섬에 거주하면서 핀치의 부리를 조사한 그랜트 부부가 있어. 섬 안에 있는 모든 핀치를 잡아 크기, 부리치수, 생년월일, 가족관계, 교미횟수 등을 기록하고 심지어 지저귀는 소리까지 녹음했어. 이렇게 40년을 조사하니까 섬 안에 있는 모든 핀치를 구별할 수 있었고 족보까지 외울 수 있었다고 해. 이종교배로 서서히 모양이 달라지는 핀치에 주목했고 추적한지 몇 세대 만에 기존의 핀치와는 완전히 다른, 생물학적으로 새로운 종을 발견되었다고 학계에 보고했어.”
“이종교배로 태어난 종은 열성이라 생식능력이 없어.”
민수 선배가 끼어들면서 덧붙였다.
“사자와 호랑이의 잡종인 라이거나 말과 당나귀의 잡종인 노새는 모두 1세대에서 끝났잖아.”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 라이거와 수컷사자 사이에 2세대 잡종인 릴리거가 태어났다는 보고도 있어. 유전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자연 상태에서는 환경적으로 강한 외부적 충격이 있으면 가능하다는 논문도 있어.”
“잡종들의 탄생과 대를 이은 지속이군.”
민수 선배의 비꼬는 말투를 듣고 싶었다. 눈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민수 선배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말과 말투는 기억이 나는데 얼굴이 흐릿했다. 고개를 드는데 화장실 손잡이 주변에 무언가 흐릿한 것이 어른거렸다.
‘낙하산 행장, 당장 물러가라.’, ‘투명경영, 개X이다!’, ‘해외자원투자, 너나 잘 하세요.’, ‘평생 ○○○똥꼬나 할아라.’ 등의 글자가 눈에 띄었다. ‘할아라’가 맞나, 순간 의문이 들었다. 호주머니를 뒤적였다. 양복상의 안주머니에서 볼펜을 찾아 ‘할’에 크게 엑스를 했다. 그 밑에 ‘핥’이라고 적었다. 통쾌하지가 않았다. 나는 문에 달라붙어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거기에 있는 글씨보다 가장 크게 적었다. 인간잡종의 탄생! 글씨 위에 한 번 더 덧칠해서 적었다. 진해졌다.
‘자연한상’이라는 뷔페식당이 보였다. 며칠 전 아내가 처형과 저녁식사 약속을 잡았다며 퇴근하고 바로 오라는 곳이었다. 문을 열고 가족들을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멀리서 아빠닷, 소리와 함께 지아가 일어나서 뛰어나왔다. 여섯 살짜리 계집애가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지아는 멈출 때 멈추면서 내게로 뛰어왔다. 펄쩍, 지아를 안았다. 뽀, 하자 지아는 내가 내민 입술에 앙증맞은 입술을 갖다 대었다.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쳤다. 해외투자전략 본부장 부부였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아내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형부는 점점 젊어지시는 것 같아요.”
아내가 본부장에게 인사를 하면서 말했다. 처제는 점점 예뻐지네, 라면서 서로 웃었다. 본부장 사모가 아내의 이종사촌 언니였다. 입사 때부터 지금의 본부장과 지연과 학연으로 얽히면서 자연스럽게 본부장 집을 드나들었다. 은행에서 함께 회식을 하면 흐느적거리는 본부장을 부축하여 안방에 눕혀준 적도 여러 번이었다. 주말이면 산을 좋아하는 본부장 부부와 함께 등산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토요일 저녁이었다. 함께 식사나 하자며 집으로 불렀다. 아는 후배인데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라며 본부장 사모가 지금의 아내를 소개했다. 수수하게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본부장 부부는 주로 전복을 가지고 왔다. 내장이 몸에 좋다면서 처형이 내 접시에 전복을 하나 건넸다. 씹히는 식감이 나쁘지는 않았다. 내장은 먹고 싶지 않았지만 처형이 바로 앞에 있었다. 입에 털어놓고 두 번 씹는 척하다가 꿀꺽, 삼켰다.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아내는 아이들 준다며 즉석코너에서 바로 구운 스테이크를 받아왔다.
“여보, 뉴질랜드에서 방목한 소래. 풀을 먹고 자라 칼로리가 낮고 콜레스테롤이 적대.”
아내는 말하면서 아이들 접시에 한 조각씩 나눠주었다.
식사를 마칠 즈음 본부장이 담배나 한 대 피러 밖으로 나가자, 고 했다.
“엊그제는 당황스러웠지?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미리 말하지 못했어.”
“네. 이해하지만 솔직히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조금 혼란스럽네요.”
나는 본부장이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여주면서 말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너까지 다치는 일은 없을 거야. 이일이 잘 마무리되면 차장으로 승진도 할 거고.”
본부장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멀리 하늘을 쳐다봤다.
“내가 살아보니까 인생은 결국 선택의 문제였어. 요즘 아이들 말로 낄끼빠빠야. 낄 때 끼고 빠질 때는 확실히 빠져야 돼.”
본부장의 뒷말이 음식냄새에 섞여 식당을 맴돌았다.
민수 선배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알이 깨진 안경, 찢어져서 회색 솜이 보이는 패딩 점퍼를 입고 나를 향해 손을 젓고 있었다. 입술을 중얼거렸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다만 그 입술의 움직임이 남았다.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무슨 말이냐, 고 물었지만 민수 선배는 미간에 주름이 잡힌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얼굴빛이 유난히 까맣게 보였다.
지하도였다. 돌아서서 걸어가는 민수 선배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니, 선배의 그림자였다. 선배의 키 절반만 한 그림자가 앞과 뒤, 오른쪽과 왼쪽에 네 개가 있었다. 꿈속에서도 그림자가 보이네, 라고 나는 생각을 한 것도 같았다. 순간, 네 개의 그림자가 쭈욱, 쭉 길어졌다. 그리고 서로 엉키더니 순식간에 블랙홀 같은 어둠을 만들어 냈다. 민수 선배는 그 속으로 빨려 들어 사라졌다. 선배, 하고 부르는데 그 어둠이 내 앞으로 확, 다가왔다.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영식아, 살려줘, 라고 외쳤다.
나는 선배, 라고 부르며 잠에서 깼다. 축축했다. 베개가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갈증이 났다. 거실에 나가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벌컥, 벌컥 마셨다. 옷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소파에 앉았다.
이전에도 가끔 꿈을 꾸었지만 깨고 나면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나 생생했고 그 느낌까지도 생각이 났다. 다시 으스스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한참을 소파에 웅크리고 있었다. 안방 문이 열리면서 아내가 잠옷 바람으로 나왔다.
“여보, 거기서 뭐해?”
“응, 잠이 깼어. 애들 얼굴 좀 보려고.”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아들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층침대가 보였다. 쌔근거리는 아이들의 숨소리가 들렸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둘째가 일층에서 자고 있었다. 3월 한 달 동안 학교가기 싫다며 등교시간마다 버둥거리며 떼를 썼다. 방학이 가까워진 지금은 방학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친구들과 노는 게 재미있단다. 나는 혼자 웃으며 둘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첫째의 침대 옆에는 책이 놓여 있었다. 아마 읽다가 잠든 모양이었다. 요즘은 세계 위인전집에 빠져있다. 슈바이처를 읽으면 의사가, 링컨을 읽으면 대통령이 될 거라고 했다. 나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
어제도 지아는 아빠를 기다리다가 잠들었을 것이다. 부쩍 아빠를 찾았다. 혼자 자는 게 무섭다며 안방에서 자는 날이 더 많았다.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그 조그만 입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출근하려고 현관문을 여는데 햇빛이 얼굴을 덮쳤다. 눈을 감았다가 뜨자 머리가 아팠다. 처음에는 오른쪽 머리 윗부분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왔다. 툭,툭 거릴 때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그러졌다. 짧게는 십초, 길게는 이, 삼분 정도 지속되다가 사라졌다. 머릿속에 조그만 바늘이 돌아다니다 내키는 대로 막 찔러대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통을 갈라서 바늘을 콕, 핀셋으로 집어내고 싶었다. 출근하자마자 팀장에게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택시를 탔다. 대학병원의 의사에게 머릿속의 바늘에 대해 이야기했다. 알겠다며 검사부터 하자고 했다. 엠알아이를 찍었지만 바늘 같은 것은 없었다. 혈관의 넓이도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신경성일 것 같다, 며 의사는 건조하게 말했다. 진료실의 하얀 벽이 수분을 흡수하는 듯 나는 입안이 까칠해지면서 침이 말랐다.
병원 밖으로 나왔다. 훅, 열기가 얼굴을 덮쳐왔다. 끈적끈적한 공기가 몸에 달라붙었다. 이마 윗부분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얼굴을 찌푸리는데 약간 어지러웠다. 실내보다는 밖에 나오니 두통이 더 심해졌다. 택시를 잡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 나를 뒤에서 잡아당겼다. 누구지?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 이번에는 목덜미 쪽의 셔츠 윗부분을 누군가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돌아섰다. 아무도 없었다. 아악,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앞머리를 바늘이 아니라 칼로 긋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 서너 명이 쳐다봤다.
나는 손을 앞머리에 댄 채 눈을 감고 잠시 서 있었다. 통증이 여운을 남기면서 서서히 잦아들었다. 살며시 눈을 떴다. 다섯 시 방향에 뭔가 어른거리는 물체가 보였다. 고개를 돌리니 그 물체도 따라 움직였다. 그것을 보려고 몸을 뒤로 돌렸다. 어두운, 검정색의 물체도 뒤로 이동했다. 열한시 방향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다시 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세시 방향에 서 있었다. 숨바꼭질 같았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아야만 되는 술래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가 하는 일이 숨바꼭질이었다. 사람들이 들키지 않게 꼭꼭 숨겨놓은 것을 찾는 것이 일이었다. 세 개 정도의 서류를 교차 검토하면 대부분 허점이 나왔다. 그러면 실사를 나가서 확인하고 담당자를 불러 추궁하면 증거 앞에서 자백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술래를 피해 머리카락도 하나 보이지 않게 숨겨야만 했다. 술래가 오더라도 찾지 못하게 위장을 하거나 아예 술래가 오지 못하는 곳으로 안전하게 숨어야만 했다.
역동지점의 부당대출은 민수 선배가 조사한 뉴질랜드 사기사건의 확장판이었다. 주상복합빌딩에서 리조트단지로의 변화였다. 국내법인인 (주)월드와이드는 역동 지점에서 구백팔십 억을 대출받았으니까 재무제표를 그 정도 규모의 회사로 바꾸고 현지 시행사인 (주)랜드 매니지먼트는 로열 오브 뉴질랜드 뱅크의 수익증권을 매입하여 이를 담보로 대출받는 것으로 하면 기본적인 의심은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투자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국제투자자문기구의 보고서가 필요했다. 페이퍼컴퍼니를 조금 더 다양하게 만들어 자금의 흐름은 로열 오브 뉴질랜드 뱅크에서 더 이상 추적이 불가능하게 만들고 혹시 현지 실사가 나오면 현지인들을 고용하여 사무실이나 공사현장이 활발하게 운영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또 뭐가 있을까, 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준비 가능한 서류부터 챙겨야 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비서실입니다, 행장님 호출입니다, 지금 바로 오십시오, 또박또박 사무적인 말투에 명령이 가미되어 있었다. 행장의 얼굴은 발광크림을 바른 것처럼 번들거렸다. 익숙하지 않은 향수냄새도 진하게 났다. 악수를 하는 손바닥에도 향수가 배어있었다.
“윤 과장, 해외투자전략 본부장과는 동서지간이라며? 아무래도 가족이 믿을 만하지. 아, 이번에 큰일 한 번 같이 하지?”
무슨 말씀이신지, 라는 물음에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이번 인사발령 때 하 지점장, 본점 자금관리 이사로 승진할 거야. 자네는 윤 차장? 하핫, 미리 축하하네. 아, 호주 간다며? 그건 다른 사람에게 적당히 코치 좀 해서 맡기고 자네는 볼리비아에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에 갔다 와. 그걸 우리가 살 거야. 아니지, 한국미래공사가 사는 거지. 하하.”
그러면서 저녁에 해외투자전략 본부장이 자세하게 말해 줄 것이라고 했다. 행장은 공군1호기를 타는 사람의 친구라고도 했다. 그래서 낙하산인가, 싶었다. 행장이 부임하면서 해외자원투자사업이 진행되었다고도 했다. 친구의 그림자인가, 그림자의 그림자, 그림자가 또 다른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도 이런 식으로 그림자로 변할까 두려웠다.
고급 일식집이었다. 해외투자전략 본부장의 이름을 말하니 종업원이 방으로 안내하였다.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방이었다. 역동지점 하 지점장과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사내가 앉아 있었다. 사내는 술이 많이 취한 듯 보였다.
“김 부장, 일 년만 거기 가 있어. 그럼 금방 복직시켜 본점으로 부를게.”
“아아니, 제가 뭐얼 잘못했어요. 시키는 대에로 했을 뿐인데, 왜에 해에고냐고요?”
지점장의 말에 김 부장이라는 사람이 대답했다. 혀가 꼬여 말이 늘어지고 있었다. 본부장이 거들었다.
“김 부장, 나를 믿고 조금만 기다려. 자네가 이렇게 희생하는 것까지 다 합쳐서 갚아줄게.”
그러면서 양복상의를 집어 들고 나보고 일어서라는 눈짓을 했다. 복도로 나가 다른 문을 여니 흡연실이 보였다. 간이의자 몇 개가 놓여있고 가운데 재떨이가 보였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본부장이 말했다.
“이것도 해결 못하고 지점장이 데리고 왔잖아. 역동지점 대출담당부장인데 이번 대출의 책임을 지워 일단 해고시키는 거야. 협력업체 이사로 보냈는데 저렇게 징징거리네.”
본부장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주름이 잡혔다가 다시 펴졌다.
“영식아, 볼리비아 같이 갈 사람들이야. 미리 얼굴이나 한 번 보라고 불렀어. 실무진들끼리 할 이야기도 있을 거고. 이번 건만 잘 해결하자. 그럼 평생 돈 걱정 안하고 살 수 있어. 이게 거의 일조짜리 프로젝트야.”
본부장은 담배꽁초를 비볐다. 복도로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 다른 방문을 열었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저희 은행 윤 과장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고 말하고 본부장은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세 명이었다. 선채로 악수를 하며 통성명을 했다. 미래공사 이 차장, 매퀸시 한국지점 배 부장, 그리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사람은 국정원의 박 부장이라고 했다. 내가 국가정보원? 이라고 혼잣말을 하자 선글라스를 벗으며 나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스포츠머리에 다부진 체격이었다. 쳐다보는 눈길에 나도 모르게 움찔, 몸을 뒤로 뺐다. 손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매퀸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자, 다금바리도 나왔는데 한 잔씩 하시죠? 작년에 저희 본사에서 한국에 관심을 돌리면서 인천공항을 사려고 했는데, 아, 그놈의 여론 때문에. 지금도 아쉽네요. 그걸 만회하려고 이번에 저희 회사에서는 볼리비아에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에 투자하려고 합니다. 물론 전문가인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그제서야 나는 표창을 줘야 한다는 금융감독원의 송 국장 말이 생각났다. 미래공사 이 차장도 최근 정부의 정책이 해외자원의 개발에 있다면서 각 나라에 있는 유전과 가스를 직접 사들이고 있다고 했다. 일이 잘되면 우리나라도 석유와 천연가스의 생산국이 될 수 있으며 이번에는 다이아몬드 생산국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띄엄 띄엄, 대화가 이어졌다. 윤 과장님, 자금은 어떻게 잘 준비되고 있습니까?, 매퀸시가 나를 보며 물었다.
“네, 저희들은 뉴질랜드와 호주 건, 그리고 다른 건과 합치면 일 조 정도 됩니다.”
나는 본부장의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네, 좋습니다. 미래공사도 그 정도 된다고 하니까 계획에 따라 이제 실행만 하면 됩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상대로 매퀸시가 깊숙하게 개입하고 있었다. 매퀸시의 한국지점장이 정권의 핵심인물과 닿아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우리가 이 조에 광산을 매입하고 일 년 후에 채산성과 근로자의 파업을 이유로 광산을 매각할 것입니다. 매각 비용은 오천억 예상합니다. 아, 윤 과장님, 현지 은행은요?”
“뱅코 오브 내셔널 볼리비아인데 저희 은행의 남미 주거래 창구입니다. 이미 충분한 신뢰관계가 쌓여 있습니다.”
나는 조금 전 본부장에게 들은 내용을 말했다. 들으면서도 궁금한 게 있어 물었는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럼 남은 차액금 일 조 오천 억은 어떻게 배분됩니까?”
내 질문에 매퀸시는 선글라스를 쳐다봤다.
“그건 이 자리에서 논의될 사항이 아닙니다. 나중에 윗선에서 결정할 문제입니다.”
선글라스는 단호하게 말하면서 나를 쳐다봤다. 눈빛이 서늘했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자 선글라스가 술병을 들고 내 자리 옆으로 와서 앉았다.
“한 잔 받으시죠? 저번 정 차장 일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라고 묻는 내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저희들의 끝까지 말렸는데도 나쁜 선택을 하더군요. 저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했는데 온몸이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몸에서 열이 났다.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런 나를 선글라스가 쳐다보고 있었다. 술상을 엎고 달려들어 선글라스의 얼굴을 갈기고 싶었다. 내 앞에 있는 젓가락으로 눈을 찔러 버릴까, 라고 생각하고 젓가락을 쳐다보는데 손이 떨려왔다. 간간이 대화가 오고 갔지만 내 귀에는 민수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연 넓고 굵은 부리지”
내가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갈라파고스에 오랜 가뭄이 들어 식물이 거의 말라 죽었어. 선인장 즙이나 곤충을 먹는, 부리가 얇고 뾰족한 핀치는 굶어 죽었어. 그런데 씨앗이나 열매를 먹는, 크고 넓고 굵은 부리를 가진 핀치는 살아남았어. 그럼 다음 세대의 핀치는 어떤 부리일까?”
선배도 굵은 부리를 가지고 살아남았어야지, 나는 혼잣말을 하면서 왼손으로 왼쪽 발목을 만졌다. 볼록 튀어나온 것이 양말 속에서 제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 혹시 몰라 유에스비가 장착된 초소형녹음기를 양말 속에 넣어두었다. 일식집을 나오는데 사장인 여자가 나를 불렀다.
“아까 하 지점장님이 드리라고 했어요. 포장한 초밥입니다.”
제법 묵직했다. 택시 뒷자리에 앉아 일식집 이름이 적힌 쇼핑백 안에 손을 넣어 상자를 꺼냈다. 두 개가 들어 있었다. 하나는 초밥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만 원 권으로 묶인 지폐다발이 스무 개 정도 있었다. X새끼들,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문을 열자 아빠닷, 하는 소리와 함께 거실에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동화책 읽어줘, 어느새 내 품에 안겨서 지아가 말했다. 씻고 거실로 나오는데 지아가 동화책을 들고 따라다녔다.
“여보, 낮에 택배왔는데, 식탁 위에 올려놨어.”
나는 나중에 볼게, 라고 말하고 지아를 안고 지아 침대에 함께 누웠다. 동화책을 펼쳤다.
“옛날 어느 마을에 아기돼지 삼형제가 살고 있었어요. 어느덧 다 큰 삼형제는 할머니집을 떠나 각자 집을 짓고 독립할 때가 되었답니다. 할머니는 몸집이 큰 못된 늑대를 조심하라고, 절대 문을 열어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 했답니다.”
나는 최대한 밝고 명랑하게 읽었다. 지아는 내가 연극배우처럼 인물 특색에 맞게 다양한 목소리로 읽어주는 것을 좋아했다.
“늑대, 우리 유치원에도 늑대 같은 덩치 큰 남자애가 있어. 차민혁이라고, 짝꿍이 되면 선생님 몰래 꼬집고 발로 차고 그래.”
지아는 말하면서 정말 꼬집혀 아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오늘도 내 친구 지혜를 꼬집은 거야. 저번에 선생님 앞에서 안 한다고 약속했는데. 지혜는 아프다고 울고. 그래서 나랑 내 친구 태연이랑 지혜랑 셋이 차민혁한테 갔어. 앞으로 우리 꼬집지 말라고 하니까 혀를 내미는 거야. 지혜가 민혁이를 발로 찼어. 그리고 나랑 태연이가 차민혁이 팔을 하나씩 잡고 물었어. 차민혁이는 넘어져서 막 울었어. 히힛. 차민혁은 하아.”
지아가 하품을 했다.
“이제 우리를 다시는 안 괴롭힐 하아.”
손으로 눈을 비볐다. 나는 잘했다, 며 지아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렇지, 나쁜 놈은 여럿이 힘을 합쳐서 물리치는 거야. 그래야 다시는 그런 놈들이 안 생기지. 알았지?”
지아는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다. 대답이 없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나는 거실로 나와 택배상자를 보았다. 보내는 이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고 주소도 낯선 곳이었다. 상자를 여니 서류봉투가 보였다. 대출서류들, 담보 증권들 사본이 식탁위에 쏟아졌다. 서류뭉치들 속에 투명한 지퍼백이 보였다. 안에는 유에스비가 들어 있었다. 노트북에 꽂으니 음성파일이 나타났다.
“정 차장, 정말 이럴 거야?”
“본부장님, 죄송합니다. 이 서류들 박 기자에게 보낼 겁니다.”
“안 돼. 그럼 자네가 위험해져. 가족들은?”
안방 문이 열리면서 아내가 거실로 나왔다. 나는 급히 중지 버튼을 눌렀다. 서재에서 정, 정리하고 잘게, 머, 먼저 자, 말이 떨리면서 가슴도 떨렸다. 머리가 아팠다. 톡톡거리는 통증이 다시 느껴졌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떨렸다.
핑크 다이아몬드였다. 볼리비아 라꼬르 다이아몬드 광산은 천구백삼십년 대에 개발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이미 매장된 다이아몬드는 대부분 채취되었겠지만 매퀸시는 새로운 광맥줄기가 있다는 자문을 할 것이었다. 그것을 근거로 미래공사와 은행은 광산을 매입할 것이고 그리고 잘못된 정보였다고 하고 매각하면 그만이었다. 그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았다. 핑크빛 영원한 사랑의 상징이 몇 사람의 영원한 부로 귀결될 것이었다.
도착하면서부터 내린 비는 다음날까지 줄기차게 이어졌다. 마지막 날은 거짓말처럼 맑았는데 한국의 한여름보다 더 더웠다. 처음으로 겪어보는 열대우림기후였다. 아마존의 습기가 안개로 변하여 온몸을 휘감는 느낌이었다. 광산을 방문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나는 호텔에 머물렀다.
출국하기 전에 나는 심부름센터에 전화를 걸어 택배를 대신 부쳐줄 사람을 구했다. 민수 선배의 자료와 내가 가진 자료를 2부 복사하여 하나는 박 기자에게, 하나는 시민참여경제연대에게 보냈다. 박 기자는 억울해서 뭐라도 해야겠다, 며 자비로 권력층의 비리를 취재하고 다니는 월간잡지의 기자였다. 민수 선배가 만나려던 그 사람이었다. 이 땅에 정의라는 두 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났다. 시민참여경제연대는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만든 단체였다. 혹시 내 신분이 드러나더라도 나와 함께 행동해줄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원본은 역시 민수 선배에게 맡겼다. 민수 선배가 자살했다는 그곳에 땅을 파고 묻어두었다.
“선배,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안 돼? 선배가 그런다고 은행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결국 피해보는 건 선배잖아?”
“나도 그 생각 했는데 안 되더라. 한참 고민할 때 우연히 아들 방에 들렀어. 아들의 자는 얼굴을 보는데 이 아이들은 뭐랄까, 나보다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적어도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고 싶었어.”
술자리에서 들은 민수 선배의 말이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늘 아침 볼리비아와 함께 왔던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나는 현지 은행과 은밀히 해야 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남았다. 호텔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핸드폰에 저장된 녹음파일을 재생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진흙탕에 빠지는 심청이와 같습니다. 아버지의 눈처럼 국민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사람들은 몸을 던집니다. 하지만 심청이는 연꽃을 타고 세상에 다시 나오지만 내부고발자는 그냥 진흙탕에서 질척거려야 합니다.”
공익신고센터 관계자와 통화한 내용이었다. 나는 짐을 챙겨 호텔 정문으로 나왔다. 예약된 택시가 내 앞에서 멈췄다.
‘연꽃도 진흙탕에서 피잖아요.’ 나는 혼잣말을 하면서 택시 문을 열었다. 갈라파고스로 가서 핀치를 볼 것이다. 새로운 종의 기원이 되었다는 핀치가 너무 보고 싶었다. 택시는 공항으로 빠르게 달렸다.
<당선소감>
"현실의 아픔과 내면의 소리를 우물처럼 고요히 응시하겠다"
깊은 우물이 생각납니다. 어린 시절, 무심코 바라본 그 깊이에 아득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서늘한 한기에 몸이 떨렸습니다. 물바가지를 우물 속으로 던져 물을 길어 올리다 제가 빠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우물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목이 말라, 너무 그리워서 우물로 뛰어갔습니다. 우물 뚜껑을 열고 바라본 그 속에는, 그 끝에는 동그란 점처럼 제 얼굴이 있었습니다. 한참이나 우물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물의 가장 밑바닥에서는 매순간, 끊임없이 새로운 물이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날이 오는구나!’
당선 전화를 받던 날, 처음으로 떠올랐던 문구입니다. 아내와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차와 연결된 블루투스로 통화를 하던 내내 아내의 손을 꽉 잡고 있었습니다. 전화를 끊었는데 심장의 박동소리가 들렸습니다. 오른손바닥을 심장 근처에 갖다 대었습니다. 울림이 전해졌습니다. 오래 전, 몇 년 전, 혹은 몇 개월 전, 어제 우물을 바라볼 때 들려오던 소리였습니다.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서 간절하게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 나는 소리였습니다.
주변에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았음을 새삼 알게 됐습니다. 이분들의 응원과 격려가 모여 울림이 되고 소리가 되어 기쁜 소식으로 저에게 전달됐습니다. 마산에 계시는 이성모 선생님,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과 믿음에 의지해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최수철, 임철우, 서영채 선생님, 소설이 현실을 응시하는 눈임을, 깨어있는 정신임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넉넉한 인품으로 감싸 안아 주신 우한용 선생님, Just Be-주의를 다루는 법을 알게 해주신 소천, 정말 감사합니다. 날카롭고 치열한 합평으로 도움을 준 작가동네의 화요반 문우님들, 그리고 부족한 글에 언제나 용기를 채워주신 조동선 스승님, 고개 숙여 말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늘에서 흐뭇하게 웃고 계실 아버지, 그리고 항상 저를 믿고 지지해 주시는 어머니,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철없는 투정을 묵묵히 받아주는 아내 은영이와 의젓한 고딩이 되는 아들 명환, 저에게는 든든한 힘입니다. 끝으로 긴 여정의 첫발을 내딛게 만들어주신 심사위원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현실의 아픔과 내면의 소리를 우물처럼 고요히 응시하겠습니다.
<심사평>
"해 거듭할수록 작품 수준 높아져…현장감 넘치는 흡입력"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가 해를 거듭할수록 작품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
소설, 수필, 수기를 망라한 산문 부분에서는 김기남씨의 수기 '경매는 대박이다', 오승경씨의 단편소설 '별을 그리다', 김태식씨의 수필 '철판을 다듬는 사람들', 신정근씨의 수필 '수표 한 장', 노현수씨의 단편소설 '대리인'이 최종 심사대상에 올랐다.
그 가운데 '경매는 대박이다'는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문장이 거칠다는 점에서, '철판을 다듬는 사람들'과 '수표 한 장'은 문장은 미려하나 이야기의 확장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 혹은 누구나 자료를 찾아보면 나오는 이야기를 벗어나 그 소재에 대한 작가만의 경험과 사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거기에 비해 소설 두 편은 이야기의 짜임새가 뛰어나고 지금 현재 시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그리고 일어났을 수도 있었던 일을 잘 그려냈다. 오승경씨의 '별을 그리다'는 여자라는 이유로(물론 다른 이유가 더해진 것일 수도 있지만) 지방에 있는 리조트로 발령이 난 여자 주인공이 겪어온 우리 사회의 유리천장에 대한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잘 풀어나갔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이해는 빠르게 전달되지만 그런 만큼 전체 이야기의 구조가 단순하다. 이 작품을 가작으로 올린다.
노현수씨의 '대리인'은 우리가 지나온 정권 어느 시기에 충분히 있었을 법한 해외자원 투자에 대한 금융기관 상층부의 담합 사기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이 방면의 업무 구조나 해외자원 투자에 대한 정책 사정을 모른 채로 글을 쓰면 자칫 허황하게 들리기 쉬운데 노현수씨는 이 방면에 대해 치밀한 취재와 업무 이해를 통해 실제 없었던 이야기라 하더라도 있었던 이야기처럼 현장감있게 글을 써나갔다. 현장감을 바탕으로 흡입력 있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솜씨도 대단하고 결말의 반전을 이끌어내는 솜씨도 대단해 올해의 대상으로 올린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으로 정진하길 바란다.
심사위원 : 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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