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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당장 필요한 / 서동욱

 

마리는 올해 스물다섯 살로 준보다는 네 살이 많았다. 둘은 만나기 전부터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는데, 그건 한집에서 살고 있는 지금도 그랬다. 준에게는 두 번째 직장이었다. 첫 직장이었던 단추 염색 공장에서는 매일 지독한 냄새를 맡아야 했기 때문에 그는 지금 하는 일에 만족했다. 그러나 마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전에 다녔던 직장들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과는 상관없이이번 직장이 여덟 번째, 아니면 아홉 번째쯤 됐는데 일을 시작하고 나서 바로 다음 날부터 안 나간 것까지 합하면 그보다 더 될 수도 있었다언제든 일을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쓸 돈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일을 구하기 전까지는 그만둘 수 없었다. 그들은 모아둔 돈이 전혀 없었다.

같이 살게 되면서 그들은 에어컨이 옵션으로 딸린 이천에 오십짜리 투룸을 빌렸다. 관리비와 전기세, 수도세, 가스비, 통신비로 한 달에 삼십 정도가 나갔다. 집을 구할 때 얻은 은행 대출금과 소형 자동차의 할부 대금, 그리고 각자의 술값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햇빛이 거의 안 들어오는 집 안은 늘 춥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들은 밖에서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와 잠만 자고 나가거나 아니면 아예 안 들어왔다. 그런 경우에는 몇 잔 더 마시고 나서 공장 근처의 찜질방에서 잤다. 찜질방은 집보다 훨씬 포근했다. “나 오늘 자고 가.”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그건 찜질방에서 잔다는 뜻이었다.

새벽 2시가 넘어서 마리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밖에서 술을 마시고 막 집으로 돌아온 마리는 열쇠를 찾기 위해 현관문 앞에서 낑낑댈 때부터 울리고 있던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뭐야, 누구야? ? 잠이나 자라고.”

그러나 그건 준이 아니었다. 준은 마리보다 먼저 들어와 자고 있었다. 마리는 열려 있는 방문 사이로 준이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리는 비틀거리는 몸을 벽에 기댄 다음 귀고리를 풀어서 전화기 옆에 올려놨다.

수화기의 목소리는 아버지가 죽었다고 말했다. 둔기로 머리를 수차례 맞고 살해됐다는 것이다. 마리는 지금 시간이 몇 시냐고 물었다. 목소리는 마리씨가 아니냐고 물었다. 마리는 맞는다고 말했다. 잠시간의 정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보고 뭘 어쩌라고?”

목소리는 뭘 어쩌라는 건 아니었다고 대답했다.

먼 곳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마리가 준에게 잡으러 가자고 말한 적이 있는 부엉이였다. 준은 그건 부엉이가 아니라고 말했다. “여긴 도시야.” 부엉이는 아마존에나 사는 거라고. 그러나 준도, 마리도 그게 부엉이인지 아닌지 확신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마리가 아는 새 중에 밤에 우는 새는 부엉이밖에 없었다. 그게 뭐였건 간에, 부엉이가 우는 것 같은 소리가 집으로 들려오곤 했다. 그 소리가 지금 들려오고 있었다. 창밖으로 어둠이 깔려 있었다. 마리는 잠시 어둠이 깔린 바깥을 응시하다가 목소리에게 몇 번 더 소리를 지른 다음 수화기를 쾅 하고 내려놨다.

다음 날 아침 마리는 아빠가 죽었다고 준에게 말했다. 준은 이불 속에서 그 얘기를 들었다. 그는 손을 들어 형광등 불빛을 막으면서 말했다.

아빠가 죽어?”

.”

그럼 어떻게 해?”

마리는 방 안에 굴러다니는 양말 한 짝을 찾아 뒤집어 신었다. 나머지 한 짝이 보이질 않았다. 마리가 자기 양말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마리가 양말 한 짝을 찾으려고 서랍장 밑으로 머리를 낮추어 집어넣고, 또 이불을 들추어 보고 하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마리는 경찰이 자기를 불렀다고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

준은 베개를 가슴 위로 올려놓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마리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헝클어지고 기름이 낀 노란색 머리가 마리의 어깨 위에서 흔들렸다. 준은 마리의 머리를 새로 염색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몰라. 경찰이 와 보래.”

.”

준이 대답했다.

형사는 눈에 먼지가 들어간 사람처럼 수시로 안경다리를 들어서 눈을 감았다 뗐다 했다. 몇 가지 질문을 받은 후, 마리는 형사로부터 사진 몇 장을 건네받았다. 사진 속에는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 남자는 엎드려 자는 자세로 누워 얼굴을 카메라 쪽으로 돌리고 있었는데, 뒤통수에서부터 타고 내려온 피가 얼굴의 삼분의 이 정도를 가리고 있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냥 표정 없는 얼굴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어느 가정집의 내부이고 또 방 안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방은 마리의 방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마리가 어렸을 때 쓰던 방이었다. 마리는 머리받침이 없는 싱글 사이즈 침대와 그 위로 서로 다른 크기의 사각형이 종잡을 수 없는 규칙으로 그려진 하늘색 이불, 싸구려 꽃무늬 벽지, 원목을 흉내 낸 나뭇결 모양 필름이 마구잡이로 떨어져 너덜거리는 책상을 알아보았다.

.”

마리가 입을 다문 채로 소리를 냈다. 마치 그 사진이 많은 것들을 불러오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마리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형사는 마리가 뭔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자기는 이런 일을 많이 겪었다는 듯이, 자기가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안다는 듯이.

마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윽고 형사가 말했다.

아버님과 통화한 기록이 없더군요. 가장 최근에 만난 게 언제시죠?”

마리는 한동안 손가락으로 턱을 만지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역시 그렇군요, 그럼 대략적으로라도 짐작해 보신다면 언제쯤.”

얼굴이 잘 보이질 않아요.”

형사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던 것을 멈추고 마리를 쳐다봤다.

지금 그 말은 본인 아버지가 아니라는 뜻인가요?” 형사가 말했다.

마리는 손톱으로 이빨을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맞겠죠. 여긴 내가 살던 집이니까.”

때때로 다른 형사들이 그들의 뒤로 지나갔다. 그들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한 손에 별로 중요치 않아 보이는 서류 뭉치를 들고, 다른 손엔 자판기 커피를 들고. 지극히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그들은 의자에 앉아 한쪽 다리를 꼬아 다른 한쪽에 올려놓고 커피를 마시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 갔다 와?”

좀 어때?”

별거 아냐.”

어느 시간에 와도 그들은 매번, 언제나 그렇게 하고 있을 것처럼 보였다.

마리는 출입구 옆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자애를 보았다. 그 여자는 마리가 처음 왔을 때부터 움직이지 않고 거기에 앉아 있었다.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단발머리에 몸이 마르고 소심해 보였는데, 열넷이나 열다섯쯤, 많아도 중학생 이상으로는 안 보였다. 어쨌든 경찰서에 자주 드나들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쟤는 뭔데 저러고 있을까, 마리는 여자애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 형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집 나온 지는 10년쯤 됐어요. 정확히 언제인지는 나도 몰라요. 그때 이후로는 본 적 없어요.”

마리가 형사에게 말했다. 형사는 자판을 두드려 마리가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마리는 집을 나오고 나서 한참이 지난 후에 셀프 주유소에서 주유기를 손에 쥐고 걸어가는 남자를 본 적이 있었다. 그 남자는 보라색 구형 액센트 쪽으로 걸어가 미리 열어놓은 주유구에 주유기를 꽂아 넣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흙탕물이 여러 번 튄 것 같은 운동화. 먼지를 뒤집어쓴 검은색 야구모자. 기름줄이 주유구에 꽂힌 채로 진동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주유가 끝나고 나서도 담배꽁초가 완전히 사그라질 때까지 물고 있었다. 기름 따위는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듯이, 자기는 담배를 물기 위해 여기에 왔다는 듯이. 마리는 그 남자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빠였다. 그러나 그 얘기는 형사에게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평소에 원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까?”

몰라요.”

어머니는 어떻게 된 겁니까?”

나보다 먼저 집을 나갔어요.”

전화나 문자가 온 적은 없습니까?”

엄마와 아빠, 둘 중에 누구요? 아무튼 그땐 휴대폰이 없었어요. 누구에게든 전화가 올 일이 없었죠.”

곤란하게 됐습니다.” 형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니까 그쪽 말씀은 아는 게 전혀 없다는 말씀이시죠? , 그렇군요. 이거 아주 곤란하게 됐어요.”

그는 그 말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그는 몇 가지를 더 설명했다. 사망자가 맞은 부위와 횟수, 직접적인 사인다른 이유 없이, 망치로 맞아서였다용의자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 등등. 그러나 그것은 추정일 뿐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죽었다는 것뿐이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이제 뭘 하면 되죠?”

현장에 가보셔야죠.”

지금은 안 돼요.”

아직 시신이 그대로 있는데요.”

마리는 입을 다물었다. 형사는 다시 한 번 안경다리를 들고 눈을 깜빡였다. 누군가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의 소리였다. 그녀는 그 사람에게 힐끗 눈을 돌렸다. 형사, 이거나 아니면 그냥 여기서 일하는 어떤 사람이거나. 알 수는 없었다. 또 그걸 아는 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리는 그 사람이 두드리고 있는 자판의 내용을 상상하고 있었다. 한밤중에 벌어진 살인. 남자는 여느 때처럼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그때 누군가 뒤로 다가간다. 잠자코 있는 뒤통수를 망치로 후려친다. 남자는 쓰러진다. 쓰러진 남자의 머리를 향해 다시 망치를 휘두른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막노동으로 먹고살던 그 남자는 그렇게 죽었다. 마리는 갑자기 머릿속에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반도체. 반도체를 만들러 가야지. 그게 내가 할 일이지.

지금은 안 돼요.”

마리가 말했다.

그날 저녁에, 마리는 준과 함께 옛날 집에 도착했다. 마리는 올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준은 자기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

형사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어두운 카키색 판초 우의를 입고 서 있었다. 날씨가 추워서 현장에 남아 있는 걸 껴입었다고,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설명했다. 마리는 형사가 앉아 있는 모습만 봤었다. 그 사람은 자기 의자에 앉아서 일할 때보다 훨씬 작고 왜소해 보였다. 165정도. 정강이까지 내려온 판초 우의가 그의 다리를 더 짧아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햄버거 가게에서 포장할 때 줄 것 같은 종이봉투를 손에 들고 있다가 마리에게 주면서 말했다.

혹시 몰라서요. 현장에 토사물이 남으면 곤란하거든요.”

문 앞에서 경찰 둘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은 마리 일행이 다가오자 담배를 등 뒤로 돌려 감췄다.

우린 괜찮아요, 피우세요.”

준이 친절을 베푸는 듯이 말했다. 형사는 출입금지 테이프를 손으로 잡아서 들어 올린 다음 마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가 허리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갔고 준이 뒤따라 들어왔다. 마리 일행이 안으로 들어가자 그들은 다시 담배를 피우면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소파와 텔레비전이 있었다. 그것은 마리가 떠나오기 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것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대로 있었다. 벽지의 무늬, 바닥의 색깔, 천장의 색깔,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 모든 게. 마리가 살았던 집이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방 안에는 남자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는 사진에서 본 대로 등이 보이게, 고개는 옆으로 돌리고 누워 있었다. 두 팔은 차렷 자세였다. 사진보다 피의 붉은 색깔이 좀 더 선명하게 보였고 사진보다 여러 군데로 튀어 있었다.

어때요? 본인 아버지가 맞지요?” 형사가 말했다.

준은 마리를 쳐다봤다. 마리는 형사를 쳐다봤다. 마리가 고개를 저었다. 형사의 금테 안경 속에서 동공이 커다랗게 변했다.

아니라구요?”

맞겠죠.” 마리가 말했다.

확실하게 말씀해 주셔야 하는데요.” 형사가 말했다.

맞아요. 확실해요.” 마리가 말했다.

그는 사망자 확인 동의서를 꺼냈다. 준이 받아서 마리에게 건넸다. 마리는 그걸 받아 들고 잠시 동안 그 안에 있는 걸 읽었다. 그리고 사인했다. 준이 잠시 목청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혹시. 보험 같은 건 없었나요?”

형사는 팔짱을 꼈다. 그는 준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없었어요.”

마리는 사인한 종이를 그에게 건넸다. 그는 마리가 사인한 종이를 받아들고 서류철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좀 전에 담배를 피우고 있던 두 경찰에게 턱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한 명이 무전기를 들고 말했다.

들것 가져와.”

밖은 추웠다. 해가 떠 있는데도 추웠다.

봐야 할 사람이 있어요.”

형사는 집 밖에서 그들의 일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여자 아이를 데려왔다. 마리는 그 아이가 경찰서에서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던 바로 그 아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학생이 피해자를 잘 알았다는군요. 집에서 청소를 해주는 아르바이트를 했답니다. 가사 도우미 같은 거요. 그렇지, 제이?”

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신을 가장 먼저 목격하고 신고한 사람도 이 학생입니다.”

마리가 여자애를 응시했다. 그러자 제이는 고개를 숙였다.



혹시 아버지에 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제이에게 연락하세요. 자세히 알려줄 겁니다. 그런 건 자식의 권리니까요.”

그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준은 중간에 맥도날드에 들러 세트로 된 햄버거를 사서 차 안에서 저녁 대신 먹었다. 마리는 준에게 주의를 줬다.

감자튀김 먹고 아무 데나 만지지 마, 차 안에 기름 자국 나잖아.”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리는 준이 조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건 처음 봤어.”

준은 양손으로 동작을 만들어 보이면서이렇게 돼 있었단 말이야, 이렇게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동작은 그가 말하고 있는 것과는 상관이 없어 보였다.

나도야.”

정말 아빠 맞아?”

맞는 것 같아.”

그럼 어떻게 해?”

준은 아침에 했던 말을 다시 했다.

달라질 건 없어.”

마리가 말했다. 마리는 귀고리를 풀어서 전화기 옆에 두었다.

대체 달라질 게 뭐가 있겠어.”

그렇지.”

준이 대답했다.

그럴 건 없지.”

준은 형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 여자애, 갈 데가 없대.”

그래? 갈 데가 없는 애였군.” 그는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려 가면서 말했다. “갈 데가 없는 애였어.”

계속 돌려도 자기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나오지 않자 그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자연 다큐 프로그램에서 멈추고 리모컨을 내려놨다.

어떻게 그 집에 들어가게 됐는지 모르겠어. 아무튼 그동안 그 집에서 살았다는 거야. 근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이제 난감하게 됐다 이거지. 이 사건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는군. 그래서 형사 말은 걔를 우리가 잠시 좀 맡아달라는 거야.”

준은 그래?” 하고 물었지만 마리는 준이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걸 알았다. 그는 텔레비전에 들어가 있었다. 마리는 제이가 경찰에게 의심받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마리는 캔맥주 하나를 따서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 텔레비전을 켠 다음 마시기 시작했다. 탁자 위에는 기름이 거의 안 남은 라이터와 꾹꾹 눌러 꺼진 담배꽁초 수십 개가 들어 있는 종이컵이 있었다. 그 옆에는 며칠 전 마시다 남은 콜라와 콜라를 따라 마신 머그컵이 있었다. 그 안에는 콜라가 얕게 남아 굳어 있었다. 그 컵은 준이 자취할 때 쓰던 걸 가져온 것이었다. 준도 캔맥주 하나를 들고 와서 마리의 옆에 앉았다. 그러고 그는 담배를 꺼내 기름이 거의 안 남은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마리가 손짓하자 그는 담배 하나를 더 꺼내 불을 붙여 마리의 입가로 가져다줬다.

한번 할까?”

준이 말했다.

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는 형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넷이서 별로 달갑지 않은 얘기를 하고 있던 그때에, 형사는 마리를 따로 불러냈다. 그는 함께 담배를 피우자는 말로 마리를 무리에서 끌어냈다. 준이 자기도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했지만 형사는 여기서 피워도 된다고 말하면서 그를 남게 했다. 준이 상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마리는 그대로 놔두었다.

형사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가까운 사람이 범인일 수 있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은 대부분 그런 식이라고요.”

마리는 준과 제이를 슬쩍 쳐다봤다. 준은 경비를 보고 있는 경찰들에게서 라이터를 빌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는 라이터를 돌려주고 제복을 입고 서 있는 경찰들을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그 여자애, 제이가 고개를 숙인 채 벽 한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까지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제이를 용의선상에서 지우지는 않았다고, 형사는 말했다.

그런 식이라고요.”

그의 말이었다. 마리는 형사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왜냐하면 할 말이 없었으니까.

그들은 소파에서 한 번 하고 나서 잠들었다. 준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더 보다가 잠들었고 마리는 방 안에서 잤다. 텔레비전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이 잠든 지 한참이 지난 후에 전화벨이 울렸다. 마리는 몇 시나 됐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시계가 보이지 않았다. 마리는 집 안에 시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찰일 거라고 생각했다.

전화를 건 것은 제이였다. 처음에 마리는 잘못 걸린 전화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장난 전화이거나. 마리는 그 여자애의 이름이 제이였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잡음이 섞여 들어왔다. 약간의 바람 소리와 빗소리였다. 마리는 전화를 걸고 있는 여자애의 모습을 떠올렸다. 제이는 우연히 연락이 닿아서 전화했다고 말했다.

우연히 연락이 닿아서. 제이는 아버지 얘기를 듣고 싶으냐고 물었다. 마리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제이는 말을 멈췄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이가 입을 달싹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마리는 제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켜져 있는 텔레비전이 보였다. 마리는 리모컨을 눌러서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내일 집으로 와.”

마리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일이 끝나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리와 준은 제이가 오는 것에 대해 얘기했다.

난 애들 싫어.”

준이 말했다.

내가 애였을 때도 애들이 싫었어. 진짜 어린애는 괜찮아. 말도 할 줄 모르는 애들. 근데 말하기 시작하면 싫다고. 걔도 싫을 거야.”

차창 밖으로 전깃줄이 여러 줄 엉켜 있는 전봇대가 보였다. 차가 앞으로 전진해감에 따라 새로운 줄이 텔레비전 주파수 화면처럼 나타났다. 마리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전깃줄은 엉킨 채로 죽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풀어지는 듯하더니 다시 얽혀 버렸다.

그건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준의 차가 집 앞으로 들어섰고 공기 중으로 먼지가 일었다. 다른 차는 없었다. 마리는 창문 앞에 서서 준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았다. 준이 차에서 내린 곳에는 음료수 캔이 찌그러진 채로 버려져 있었다. 그건 준이 전에 먹고 버린 것이었다. 그는 음료수 캔을 발로 차서 다른 곳으로 가게 했다.

잠시 후에 여자애가 내렸다. 그 애는 빨간색 니트와 낡은 청바지를 입고 양손에 가방을 들고 있었다. 준이 뭔가 설명을 하는 듯이 손을 뻗으며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날은 일요일 오후였다. 제이를 태우고 오는 준에게, 마리는 뭔가를 해줘야 하는 건지 물었다.

뭐를?”

준이 말했고, 마리는 전화선을 손가락으로 비비 꼬았다.

왜 있잖아, 먹을 거 같은 거 말이야.”

몰라, 물어볼까?”

아냐, 됐어.”

마리와 준 외에는 아무도 이 집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마리는 그 사실을 준이 문을 붙잡고 서서 제이에게 들어오라고 말할 때 깨달았다.

들어와.”

준이 말했다.

제이가 양손에 가방을 들고 들어왔고, 마리는 안녕이라고 말했다. 제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제이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들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피자를 시켜 먹었다. 텔레비전 앞에서 웃고 떠들면서 피자를 잘라 먹고, 피클을 집어 먹고, 콜라를 마셨다. 마치 다음에 일어날 일은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처럼.

마리는 종종 준을 쳐다봤다. 준은 즐거워 보였다. 또 제이를 쳐다봤다. 제이는 준이 웃으면 따라 웃고 웃지 않으면 가만히 있거나 주변을 둘러봤다. 냉장고나 바닥에 깔린 카펫, 싱크대에 쌓인 그릇 같은 것들. 별로 걱정할 것은 없어 보였다. 무슨 걱정을 한단 말이지? 마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텔레비전에 집중했다. 얼마 안 가서 밤이 왔고 일요일은 금방 갔다.

넌 저 방에서 자. 우린 이 방에서 잘 테니까.”

마리가 이 집에 있는 두 방 중 하나의 문을 열어줬다. 둘의 방보다 약간 더 작은 방이었다. 하지만 어느 방이나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어차피 지저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리는 제이에게 남는 이불을 꺼내 줬다. 제이는 이불을 받아 들고 방문 앞에 서 있었다.

? 마음에 안 들어?”

아뇨.”

네가 여기서 잘래? 우린 상관없어.”

저는 원래 작은 방에서 잤어요, 그 집에서요.”

그 말은 마리에게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 같기도 했다. 마리는 제이가 더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리가 말했다.

화장실은 저쪽에 있어.”

밤중에 마리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이 켜지는 소리를 들었다. 마리는 방 안에 있었고 텔레비전은 바깥에 있었지만 전자파가 켜지는 느낌을 알 수 있었다. 텔레비전은 켜지자마자 볼륨이 줄어들었다. 마리는 고개를 돌렸다. 준은 마리의 옆에서 자고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자고 있었다. 거실에서 희미하고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의 소리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소리가 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방문 틈으로 푸른빛이 희미하게 흘러들어왔다. 마리는 잠결 속에서 그 빛을 바라보았다. 빛은 문 밑에서 미세하게 색깔을 다르게 하면서 조금씩 움직였다. 마리는 가만히 그 빛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다시 잠들었다.

다음 날 마리가 퇴근하고 돌아와서 집 안을 처음 봤을 때 마리는 자기 집이 아닌 줄 알았다. 제이는 거실에 돌아다니는 잡동사니들을 걸레로 닦고 있었다.

뭘 하고 있는 거야?”

마리가 신발장에 서서 말했다.

그때 준이 화장실에서 막 나왔다.

이것 봐, 제이가 집을 새 걸로 만들었어.”

준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였다. 화장실에서 세정제 냄새가 흘러나왔다.

왜 네가 여기 청소를 하는 거지?”

마리가 말하자, 제이는 얼굴을 붉히고 서 있었다. 제이의 뒤로 활짝 열린 창문에서 차가운 바깥 공기가 들어왔다.

청소를 해도 돈은 줄 수 없어.”

돈은 안 주셔도 돼요.”

정말 안 줄 거야.”

이봐, 마리.”

정말 안 주셔도 돼요.”

마리는 방 안에 들어가서 침대 위로 코트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팔베개로 머리를 받치고 코트 옆에 누웠다. 한숨을 한 번 쉬고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에 붙어 있는 별과 달 모양 스티커가 보였다. 예전에 비가 많이 왔을 때 옥상 배수구가 막힌 적이 있었다. 배수구 근처에 쌓여 있던 낙엽을 치우지 않았던 것이다. 낙엽은 배수구로 몰려들어 구멍을 막아버렸다. 옥상은 물탱크처럼 한동안 잔뜩 물을 이고 있었다. 불룩해진 천장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채고 옥상에 올라갔을 때는 시간이 한참 지나서였다. 옥상에 고인 물은 빼냈지만 오랜 시간 습기를 먹은 천장은 여기저기 누렇게 뜨고 곰팡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마리와 준은 침대 위로 올라가 천장에 생긴 곰팡이 자국을 닦아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자국도 있었다. “저것 좀 어떻게 해봐!” 마리가 소리를 질렀다. 마리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 마리는 마치 집이 통째로 없어진 사람처럼 굴었다. 그때 준이 별 모양 스티커를 사다가 붙였던 것이다. 붕 뜬 천장은 어쩔 수 없었지만 곰팡이 자국은 별과 달로 변했다. 누가 보면 인테리어를 해 놓은 줄 알 거라고, 준은 말했었다.

밖에서는 아직 제이가 청소를 하고 있었다. 준이 시시덕거리면서 제이에게 말을 걸었고 제이는 가끔씩 웃는 소리를 냈다. 마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지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오전에는 형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얘길 하던가요?”

형사는 뭔가 아는 것을, 알게 된 것을 말해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마리는 아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마리는 곧 전화를 끊었다.

우리 부루마블 어디에 있지?” 준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뭐라고?”

부루마블 말이야, 보드게임. 제이랑 부루마블을 할 거야.”

마리는 누운 채로 눈을 돌리고 준이 서랍을 뒤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애들 싫다고 하지 않았어?”

흐음. 어디로 갔지. 좀 찾아봐, 부루마블은 원래 셋이서 해야 재밌다구.”

준은 방에서 나갔고 마리는 한동안 그대로 더 누워 있었다. 부루마블을 찾게 되면 아마도 자기를 부를 것이다. 그때까지 마리는 더 누워 있을 생각이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러나 아무도 마리를 부르지 않았다. 마리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가 얼마 후에 깼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창밖으로 달이 떠 있었고,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는 침대 위에서 몸을 비틀고 몇 번 도리질을 하다가 몸을 일으키고 침대에서 나와 방 문고리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텔레비전이 꺼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마리가 화장실에 갔다 왔을 때 준은 소파 위에서 자고 있었다. 마리는 제이의 방문을 열었다.

안 자고 있는 거 알아.”

제이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슬며시 내렸다.

잠이 안 오니?”

.”

봐도 돼.”

괜찮아요.”

난 볼 거야.”

마리는 맥주를 갖고 와서 텔레비전을 켜고 바닥에 앉았다. 작은 소파여서 앉을 자리가 없었다. 옛날 영화를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복장이 촌스럽고 화면이 흐릿한 게 옛날 영화였다. 누가 총을 들고 있었다.

이년을 쏴 버릴 테다.” 총을 든 사람이 말했다.

할 테면 해보시지.”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정말 쏠 테다.”

제이가 천천히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마리와 준을 번갈아 쳐다보고 바닥에 무릎을 굽혀 모으고 앉았다. 준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너도 마실래?”

마리가 물었고, 제이는 잠깐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다가 제이에게 줬다.

처음엔 목이 좀 아파, 하지만 곧 익숙해지지.”

그들은 말없이 텔레비전을 봤다. 총을 든 사람은 계속해서 쏘겠다고 협박하고 있었다. 인질로 잡힌 여자는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총을 안 든 남자가 담배를 피워 물고 그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어디 한번 해보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리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 리모컨을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옮겨 쥐었다. 마리의 시선은 계속 텔레비전을 향해 있었다.

우리 아빠는,” 마리가 말했다.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고 말하곤 했지. 다음 일을 생각해 놓지 않으면 뭐가 뭔지도 모르게 상황이 닥쳐버린다고 말이야. 술을 마시고 와서 내 방문을 열고 이렇게 말했어. , 마리, 내일은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 봤니? 그럼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어. 내일은 어떻게 할 거냐니? 도대체 무슨 대답을 한단 말이야?”

제이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제이의 얼굴은 금세 붉어져 있었다. 제이는 마리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정말 못 들었을 수도 있었다.

내일은 어떻게 되는 거지? 맙소사, 난 하루 종일 반도체를 조립해. 반도체가 뭔지 알아?” 제이가 마리를 향해 붉은 얼굴을 돌렸다.

난 그게 뭔지도 몰라. 그게 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마리는 담배 연기를 천장을 향해 내뱉었다. 담배 연기가 천장을 맴돌았다.

세상에 반도체라니, 난 내가 반도체를 만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마리는 거실을 흘낏 훑어봤다. 거실은 달빛과 텔레비전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리는 고개를 돌려서 제이의 얼굴을 봤다. 자신과는 아무것도 닮은 것이 없는 그 애를.

밤에는 어딜 돌아다녔던 거니? 어두워지면 네가 그 집 주변을 걸어 다녔다는 걸 본 사람들이 있어.”

제이는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말을 할지 궁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자기가 뭘 하고 있었는지 정말 생각해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제이?” 마리가 말했다.

?” 제이가 말했다.

네가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경찰은 네가 뭘 했는지 궁금해하고 있어. 그리고 그게 중요한 거야.”

마리는 담뱃재를 바닥에 털었다. 그리고 맥주를 길게 한 모금 더 마셨다. 제이도 맥주를 더 마셨다. 제이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붉어져 있었다.

어젯밤에는 그 집에 다녀왔어요.” 제이가 말했다.

거긴 왜?” 마리가 말했다.

당장 필요한 것들을 가져왔어요. 여기에 당장 필요한 거요.”

그거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뭐가요?”

아냐, 됐어.”

마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담배를 물고 있던 남자가 담배를 바닥에 버렸다. 남자는 담뱃불을 발로 비벼서 껐다. 총을 든 남자가 여자를 풀어줬다. 살아난 여자는 울면서 도망쳤다.

.” 제이가 말했다. 제이는 손가락으로 부엌을 가리켰다. 마리는 제이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냉장고 위에 뭔가가 있었다. 제이가 일어나서 의자를 받쳐놓고 냉장고 위에서 뭔가를 끄집어냈다.

부루마블이잖아.” 마리가 말했다. “거기에 있었군.”

둘은 바닥에 앉아서 종이상자 안에 든 것들을 꺼냈다. 흰색 노란색 검은색 말들과 주사위 두 개, 백만 원, 천만 원짜리 돈이 쏟아져 나왔다.

준비됐어? 아직도 할 생각 있는 거 맞지?”

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난 화장실에 갔다가 맥주를 더 사 올 테니까 그동안 준을 깨워놔.”

아직 견딜 만했지만 점점 더 추워지고 있었다. 마리는 지퍼를 올려 목까지 채우고 양쪽 주머니에 각각 손을 집어넣었다. 달이 높이 떠 있었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마리는 걸어가면서 숨을 크게 뱉어서 입김이 나오는지 시험해 봤다. 그러나 어두워서 잘 보이지가 않았다.

마리가 맥주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제이와 준은 바닥에 앉아서 부루마블을 하고 있었다. 마리는 맥주가 든 비닐봉지를 소파 끝으로 던졌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맥주를 따서 마셨다. 부루마블을 해본 지 오래됐지만 룰을 기억해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주사위를 던지고 말을 옮기면 된다. 처음에는 각자에게 얼마간 돈이 주어진다. 하지만 건물을 사기 시작하면 돈은 곧 바닥이 날 것이다. 다시 돈을 채우려면 몇 바퀴는 돌면서 남의 땅을 피해 다녀야 한다. 무인도에 갇히면 오랫동안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려야 할 것이다. 돈이 없을 때는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마리는 내일 출근을 하려면 이제 자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준이 다시 주사위를 던졌다. 이어서 제이가 주사위를 던졌다. 마리는 말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




  <당선소감>

   "단 하나의 책 쓸 때까지… 쓰고 또 쓰겠습니다"


어떤 때는 독서라는 건 평생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몇 달, 몇 년씩은 책 따위는 들추지 않고 살았다. 글이란 건 평생 써본 적 없는 사람처럼 연필조차 손에 쥐지 않고 살았다. 그런 것 따위는 기억에서 진즉 잊었다는 듯이.

그러나 그것은 소리 없는 비둘기 걸음으로 다가와, 어느 순간 돌아보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깜빡 두고 간 것이 있지 않니, 묻는 것처럼. 나는 화들짝 놀라곤 했다.

내게 언어를 다룬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괴롭지만 매혹적이고, 내다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돌아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런.

죽기 전에 만족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책을 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할 일은 쓰는 일뿐이다. 그 밖에 모든 것은 불필요한 것이다.

필사적으로 붙들려 할 때보다 이미 잊었을 때 당선된다는 말을 흔히 들었다.

정말 잊었던 일이었다.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 1985년 출생.

  ● 문예창작대학원 졸업.

  ● 회사원.


 

  <심사평>


  "불필요한 낭비 없이 이야기 집중하는 솜씨 돋보여"


아쉬운 작품들이 많았다. 완결된 구조를 이루지 못하거나 핵심을 놓친 작품들, 그런가 하면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경향도 눈에 띄었다. 실험적이라고 할 만한 작품들은 깊은 인상을 남기는 대신 이해하기 어려운 혼란을 남겼다. 서툴지만 참신하다거나, 미완이지만 패기가 있어 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 드물었다.

'우체국 여자'는 고전적인 서사를 쫓아가는 작품이다. 불안한 인생에 대한 조밀한 묘사가 돋보인다. 그러나 화자의 심리를 쫓아가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작위적으로 흐른다. 그 결과 독자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한다. '횡단'은 차분하고 성실한 소설이다. 꾸역꾸역 살아갈 수밖에 없는 보통의 삶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돋보인다. 그러나 그 성실함을 넘어서는 도약은 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에피소드는 평범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피어펙터'는 어디서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누군지 모르겠는 사람들의 공허함을 쫓아가는 작품이다. 그래서인가, 흥미로운 소재에도 불구하고 흐릿한 느낌에 머물렀다.

'당장 필요한'이 당선작으로 결정됐다. 아버지의 돌연한 사망으로 인해 우연히 일가를 이룬 세 사람의 관계, 혹은 비밀을 긴장감 있게 쫓아간다. 문장이 빠르고 이야기도 빠르다. 불필요한 낭비 없이 이야기에 집중하는 솜씨가 돋보인다. 그런 나머지 결말이 돌연하다는 느낌도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다루는 솜씨,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패기 등에 점수를 크게 주었다. 앞으로의 작품은 분명 보다 더 단단해질 것이다.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 김인숙, 최수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