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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염소 / 조향숙

 

1

그날 나는 장례를 치르고 고인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집이라기보다는 비닐하우스를 개조한 움막 같은 곳에 마시다 만 술병, 매트리스, 덮고 자던 홑이불까지 아직 그대로 있었습니다. 아우는 그곳에서 혼자 지내왔던 것입니다. 나는 유품을 수습한 후 천천히 한병의 소주를 비우며 아우가 생의 마침표를 찍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술병이 바닥을 드러낸 즈음 집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놈이 밖에 서 있더군요. 꼭 아우가 먼 길 가기 전에 짐승의 몸을 빌려서 찾아온 것처럼. 취한 나는, 아우님인가? 소리 내 불러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놈은 알아들은 양 작은 울음소리를 내는 겁니다.

아우는 전화가 잦았습니다. 전화할 때마다 취해 있었기에 나는 몸을 생각하여 술을 그만 먹으라고 꾸짖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알코올이라는 것이 진통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 또한 통증을 망각할 목적으로 때때로 술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그날따라 폰은 자주 울려댔습니다. 반복되는 일이어서 바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그즈음 나의 상황은 점점 나빠져가는 중이었습니다. 오래된 교각의 안전성을 점검하거나 수중의 유물을 발굴하거나 세상을 등진 사람들의 시신을 건져 올리는, 오랫동안 해왔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었습니다. 집을 팔고 전세를 얻어 이사를 한 후에는 더더욱 경황이 없었습니다. 이사한 곳에서 아우가 사는 곳으로 가려면 전철을 타고 한시간을 간 후 역에서 내려서도 시외버스를 타고 한참 가야 했습니다. 나는 계속 미루고 있었습니다. “심에게 가봐. 혼자 어찌 지내는지.” 장 선배가 재촉했을 때 가봐야지요해놓고는 가보지를 않았습니다.

열아홉살 때 부모를 한날한시에 교통사고로 잃은 아우는 나를 친형처럼 따른 편입니다. 아우는 한동안 트라우마센터에 다니기도 했으나 어느 시점부터 세상의 밖으로 나간 사람처럼 지내는 모습이었습니다. 의사는 죽음을 반복해서 겪은 사람의 증상에 대해 말했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어요. 부재중 전화의 기록과 몇통의 문자를 남기고 그날 아우는 기억의 세계를 벗어나 영원한 망각의 강을 건너간 것입니다.

그놈은 여전히 밖에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물속에 빠진 것 같았습니다. 떼 울음소리가 귓속으로 밀려들고 있었습니다. 귀에서 눈 밑까지 차올랐습니다.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유리의 자파 현상처럼 안에서 가득 차오른 것이 터질 듯 말 듯했습니다. 이윽고 오징어의 주머니가 터지듯이 붉은 물이 밖으로 줄줄 새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붉은 물이 다 빠져나간 후에는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입니다. 의식이 돌아온 것은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입니다. 술이 깨고 나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움막을 빠져나왔습니다.

집에 오자 왜 전화를 안 받았느냐고 연락이 안되어 혹시 사고라도 당한 줄 알았다는 말과 함께 아내가 나를 반겼습니다. 나는 아내의 얼굴을 보자마자 입 밖으로 무언가를 쏟아냈습니다. 그것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고 아내는 나중에 말해주더군요. 그 순간의 아내는 점점 슬픈 빛을 띠며 나를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그 순간 내가 보여준 모습에 대한 아내의 해석은 동료이자 후배였던 친한 아우의 자살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쇼크 상태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내는 큰 서점에 가서 몇권의 책을 사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내게 그 책들이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아내가 사온 책들이란 스리랑카의 승려 알루보물레 스마나사라, 이런 긴 이름을 지닌 승려가 쓴 책. 또 다른 명상법 대가의 책이었습니다. 명상법을 다룬 책 외에도 시베리아 북극에 사는 오래된 종족의 설화집이나 동화책 종류도 있었습니다. 명상서적 매대 옆에 놓인 책들이었는데 같이 읽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아 사왔다는 겁니다. 아내는 내가 그 책들을 읽으며 다른 생각, 또 다른 상상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 모양입니다.

처음에는 아내가 준 승려의 책에 적힌 명상법대로 열심히 따라 했지요. 마음 안정을 강조하는 그 책의 지침대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후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숨을 내쉬거나 이완시키기를 반복했습니다. 두 발, 두 다리, 두 손, 두 팔, 두 어깨, 심장, 위장 순으로 차례차례 집중하면서 마음속 회오리들과 감정을 내려놓는 연습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반복했습니다. 명상으로 의식이나 감정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아무리 쫓아내도 어느새 방 안으로 기어들어와 방구석에서 똬리를 틀고 앉은 뱀처럼 감정은 되돌아오곤 했으니까요.

아내는 일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당분간 돈 벌 생각은 말고 오로지 몸만 잘 살피라는 말로 나를 안심시켜주었습니다. 아내는 아침 이른 시각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이 끝나면 밤에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나에게 뭘 좀 먹었는지, 기분은 좀 어떤지를 물었습니다. 아침이 되면 간밤에는 꿈을 꾸지 않고 잘 잤는지를 물었습니다.

꿈속의 나는 유능한 수색자입니다. 어두운 미로 같은 여객선 내부가 꿈속에서는 형광등을 켜 놓은 강당처럼 밝고 환했습니다. 격실이 두루두루 잘 보입니다. 창문을 통해서 격실로 들어가면 통로가 나오고 긴 통로를 따라가면 또 다른 격실이 나타납니다. 격실 맨 구석에 이르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입니다. 서로를 안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꿈을 나는 매일 꾸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사람들에게 꿈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말을 하다보면 말을 듣던 사람들의 눈빛이 변해 있곤 했습니다. 외면하거나, 땅을 내려다보거나 더 이상 말을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기색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에는 아내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꿈 얘기를 좀처럼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승려의 명상법보다 또 다른 책 속 유카기르족의 주술사 얘기에 끌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맥락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에 맥락을 바꾸면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주술사가 말할 때 번쩍, 등줄기를 타고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었습니다. 인종학상으로 시베리아 인종에 속한다는 나의 혈관 속에도 유카기르족의 피가 단 몇방울일지언정 흐르고 있었던 것일까요. 적어도 그 순간에는 같은 피가 흐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공지능 로봇이 걸어 다니는 현대 문명 속에서 여전히 주술사와 사냥꾼이 남아 있는 종족이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수렵 채집기의 인간과 현대의 인간이 같은 종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 종족은 동물을 흉내 내면 그 동물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주술사의 얘기 중 맥락을 바꾼다는 내용은 단숨에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이를테면, 의자를 보면 앉는다, 단어를 보면 읽는다,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맥락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할까요. 바지를 보면 단지 바지일 뿐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바지는 맥락이 없는 바지여야 합니다. 가령, 흰 세로줄이 세개 그려진 운동복 바지를 보아도 바닷물 속에서 본 그 단체복 바지를 연상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알루보물레 스마나사라의 명상법은 그 점에서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고기, , 반찬 등등 그동안 먹어온 것들을 일체 입에 대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새로운 명상법을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원한 것은 살아온 방식을 모두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그다음에는 그놈을 생각하는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그놈을 생각했습니다. 그놈, 자꾸 그놈의 눈빛이 떠올랐기 때문이지요. 나는 변할 수만 있다면 다른 무엇보다 그놈이 되고 싶었습니다.

딸은 매일매일 조금씩 변해가는 나를 낯설어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얼마간 시일이 지난 뒤에는 아빠가 어떤 모습이라도 계속 사랑해말하면서 곁에 다가와 안기더군요. 아무래도 아내가 그렇게 말하라고 교육을 시킨 것 같았습니다.

잊을 수 없는 아침은 어느 날 찾아왔습니다.

나는 수풀 속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계곡 사이로 얼음 바위 위를 지나 한줄기 바람처럼. 바람의 속도에 몸을 맡기면 천산 만산이 그 속도 속으로 달려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은 들짐승들이 어둠 속에서 눈을 뜨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습니다. 수풀 속을 무서운 속도로 빠져나가는 공기의 흐름이 느껴지고 핏줄 속으로 회오리가 일어났습니다.

꿈에서 깨고 나서도 한동안 흥분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건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는 꿈이었어요. 물에 잠긴 배 안의 격실을 숨바꼭질하듯이 헤매고 다니는 꿈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꿈. 깨고 나서도 고요하면서 새벽녘처럼 서늘한 산과 계곡의 기운이 몸속에 고여 있는 느낌이었으니까요.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뭔가 조금 달라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문을 열면 맞은편 벽면에 사각 거울이 붙어 있어요. 얼굴에서 무릎까지이지만, 전신이 거의 다 보이는 거울이었습니다. 얼굴은 거울 위 끝에서 삼분의 일 지점에서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되어 있어요.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거울 속에 보이는 얼굴이 거울의 중간쯤에 있었다는 겁니다. 거울 앞에 바짝 다가가 발뒤꿈치를 치켜들어 올리자 키가 맞았습니다. 거울 면에 바짝 대고 본 거울 속 사내의 눈알은 약 일센티 정도 앞으로 불거져 나와 있고 눈자위에는 붉은빛이 감돌고 간이 안 좋은 사람의 얼굴처럼 살결이 검었습니다. 턱 밑에 거뭇거뭇 수염이 웃자라 꼭 유인원처럼 보였습니다.

이윽고 밀려든 것은 참을 수 없는 배고픔이었습니다. 며칠간 먹은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로소 아내를 찾았습니다. 이름을 불렀습니다. 매일 얼굴을 보여주던 아내와 딸이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그동안 오로지 훈련에만 집중한 것이었어요. 밖으로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와 딸을 찾아야 했습니다.

오랜 시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탓인지 땅을 딛는 순간 현기증이 났습니다. 햇빛은 유리조각 파편처럼 살갗을 쿡쿡 찌르는 충격을 주었습니다. 천천히 걷는데도 등에서 식은땀이 나고 등이 저절로 굽어지고 어깨와 팔이 자꾸 밑으로 처지기 시작했습니다.

걸어가는 길에 무언가 툭, 발에 걸렸습니다. 길가에 엎드려 있던 검은 물체가 순간 작은 돌멩이처럼 굳어지더군요. 검은 물체 앞에는 작은 플라스틱 바가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검은 물체가 돌멩이로 변한 곳은 계단 앞이었고 계단은 지하철역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아내와 딸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플랫폼에서 전철을 타고 몇 정거장을 더 갔다는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통로 쪽으로 걸어가는데 제복을 입은 남자가 걸어오다가 나를 쳐다보더군요. 조금 화난 표정이었습니다.

이봐요. 거기, 여기 있으면 어떡해요? 빨리 나가요. 얼른!”

빗자루로 쓸어내듯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네발로 기다시피 계단을 올라왔고 도로에 면한 상가건물 쪽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상가건물에 붙은 간판들을 올려다보는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뭘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한번 감았다가 다시 뜨고 보아도 낯선 기호들만 보였습니다. 그것들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리문 너머로 책들이 진열되어 있는 가게 앞으로 기어간 후 계단 턱에 앉아 새우처럼 몸을 구부렸습니다. 팔과 다리는 아까부터 덜덜 떨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떨림의 원인이 뭘 거의 먹지 않고 지낸 탓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은 길바닥에 버려진 종이봉지였는데, 그걸 집어서 봉지 속을 보니 누가 반쯤 먹다 버린 햄버거였어요. 냄새를 맡아보니 상한 것 같지는 않더군요. 배가 너무 고팠기에 단숨에 입속에 넣고 몇번 씹지도 않고 삼켜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굴을 들었는데 종종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하여 서둘러 가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소리들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처럼 들려오더니 위잉, 하고 하늘과 전봇대처럼 솟은 빌딩들이 배가 기울 듯 기우뚱하고 돌았습니다. 그렇게 길바닥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잠을 자거나 죽은 걸로 생각했는지 옆을 지나쳐 지나가더군요. 가까이 다가와 흔들어대거나 쫓아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햇빛이 이제 그만 자라고 나를 깨웠습니다. 몸을 일으켰고 어디든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잠시 멈춰 섰어요.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빨간불이었다가 파란불로 바뀌고 빠름 단추를 누른 것처럼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고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그때 건너편에서 책가방을 멘 남학생이 걸어왔습니다. 단발머리 여학생이 뒤따라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두 사람은 친구 사이인지 옆으로 나란히 서서 반말 조의 말을 주고받으며 오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두 사람 뒤에서 후다닥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키 큰 남자아이 하나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하얀 세로줄이 세개 그려진 바지를 입은 남자아이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나는 그 아이와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어요. 나도 모르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왜 달아났는지 나도 이유를 알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학생이 입은 그 운동복 바지를 보는 순간 그저 피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때 저만치 정류장 앞에서 버스가 달려와 급정거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나는 버스를 향해 뛰기 시작했고 열린 출입문 계단을 밟고 재빨리 올라섰습니다. 그렇게 버스 안으로 도망치듯 몸을 싣고 그곳을 빠져나갔습니다.

나를 태운 버스는 낯선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버스는 도시를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달려가던 버스가 멈춘 곳은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는 광장이었습니다. 버스는 더 이상 달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차 안에 탄 사람들을 모두 내리게 했습니다. 할 수 없이 나도 버스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큰 길을 따라 계속 걸었습니다. 새로 지은 건물이 많고 공원처럼 보이는 곳까지 걸어갔습니다. 공원의 입구에는 돌로 된 비석이 있고 아치형의 큰 문이 있었습니다. 문을 지나서 공원 입구의 광장을 지나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중앙에 자리한 가장 큰 건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흰색의 건물로 다가간 것은 독특한 건물의 모양새 때문이었어요. 건물의 중앙계단으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양쪽으로 길고 어두운 통로들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한쪽 벽면이 모두 유리관으로 되어 있는 그 방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유리관 위쪽에 달린 조명등이 꺼져 있어서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뚜렷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리관 가까이 다가가 본 것입니다.

그때 내가 본 것은 수백개의 사진 액자들이었습니다. 그곳은 일종의 묘지였습니다. 이윽고 벽에 걸린 어떤 동물의 두상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수풀 속을 뛰어다니던 길고 굵은 다리는 몸통과 함께 잘려나가고 잿빛 털로 덮인 어깻죽지에서부터 위로 솟은 두 귀와 부릅뜬 두 눈알, 각진 입매가 고정된 얼굴 윤곽 속에서 공중에 떠 있었습니다. 누렇게 변색이 된 이빨들 사이에 검은색 자갈 모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은 시퍼런 두 눈은 한 지점에서 정지된 채였고 생전의 시간은 두개의 눈알 속에 응고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습니다. “여보세요, 추모관 문 닫을 시간이에요. 나가주세요.” 목소리는 나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뒤돌아 나오는데 몇발자국도 떼지 않아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그 뒤로는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눈을 떴을 때는 건물 밖으로 옮겨져 있었어요.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을 때는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신을 잃기 전에 본 동물의 두상을 떠올렸습니다. 허공에 걸린 작은 짐승의 눈과 혀가 눈앞에서 생생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갑자기 옆에 있는 나무를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높이가 삼미터는 되어보이는 양버즘나무였어요. 매달릴 수 있는 굵은 나뭇가지를 찾았고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매달리자마자 나뭇가지는 툭 끊어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염소라고 주장하는 남자의 존재는 누군가의 제보를 통해 알려졌다.

여기까지가 아내의 설명이었다.

풍경 속에서 밖으로 나온 남자는 좀처럼 어떻게 그곳에 오게 되었는지 기억해 내지 못했다.

이미 많은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

그 이후에 내가 그곳을 어떻게 벗어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언뜻언뜻 기억하는 것은 참을 수 없이 배가 고파지면 나무 밑에 수북한 나뭇잎들을 긁어 입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는 내 모습입니다. 그동안의 훈련 탓인지 그런대로 먹을 만했습니다. 배가 부르면, 고치 속에 들어앉은 유충처럼 웅크린 채 잠이 들었습니다. 몇날 며칠을 그렇게 잠을 잤습니다.

어느 날은 숲속에서 눈을 떴는데 참 달빛이 환했습니다. 달빛은 나무에 가 부딪치고 바위에 가 부딪치고 산을 돌아 몸속으로 흘러왔습니다. 눈을 뜬 나는 달빛을 받아먹을 듯 입을 벌려 보았지요. 몸에 나뭇잎들이 가득 덮여 있었어요. , 밀쳐내자 고치가 벗겨지듯 몸을 덮었던 것들이 허물처럼 떨어져 나갔습니다. 몸속에 남아 있는 기운을 모두 끌어모아 힘을 내보았습니다. 두 다리와 두 팔이 바닥 위에 똑바로 서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땀을 흘리며 계속 두 팔과 다리에 힘을 준 채 서 있자 차츰 새벽녘의 서늘한 기운이 온몸으로 밀려왔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몸은 가볍고 맑아져 있었어요. 그때부터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숲과 숲으로 이어진, 짐승들이 다니는 길을 이용해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이 숲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 후로 나는 이 숲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한동안은 지낼 만했습니다. 어느 날 그 젊은 부부와 마주치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날은 햇빛이 참 좋았습니다.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사각사각 기분 좋은 소리가 나서 이리저리 걸어다니며 모처럼 일광욕을 했습니다. 그때 엄마, 저게 뭐야.” 아이의 소리가 들리더니 뒤이어 숲속으로 걸어들어오는 젊은 부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구덩이를 피해 빙 둘러가듯 거리를 두며 방향을 트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여자의 얼굴에 떠오른 혐오의 빛이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아래쪽에 있는 미니 동물원에 구경하러 왔다가 나를 발견한 듯했습니다.

그들이 사라진 후 며칠 지났을 때였어요. 난데없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숨어서 나를 찍기 시작했지만 점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몇가지 질문을 하겠다며 말을 걸기 시작했지요.

며칠 후에는 서()에서 나왔다며 제복을 입은 사람이 찾아와서 나를 이렇게 부르더군요.

이봐요, 고트맨씨. 여기 있으면 안돼요.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그러면서 이곳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물러난 뒤 한참 뒤에 선생이 왔어요. 선생은 방송에서 나를 보았다고 말했어요. 명함을 주면서 사람들의 말을 기록하는 일을 한다고 자신을 소개했어요. 나의 이름도 알려주었습니다. 선생은 자꾸 기억해보라고 했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자, 떠오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기억, 또다시, 그 기억을 살려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말이 내가 기억하는 전부입니다.

선생은 나의 말을 끝까지 다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습니다.

 

2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켜놓은 텔레비전 속에서 다투는 음성이 들려왔다. 아내는 처음부터 그 방송을 보고 있었고, 대체 저 사람들이 왜 싸우는 거야? 물어보자 앞부분의 방송 내용을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카메라가 비춘 것은 서울 근교 휴양지의 근린 숲이다. 그곳에 가족단위 여행객을 유치할 목적으로 조성된 관상용 미니 동물원이 있었다. VJ 카메라는 동물원과 인근 숲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남자를 며칠 동안 관찰하는 중이었다. 자신을 염소라고 주장하는 남자의 존재는 누군가의 제보를 통해 알려졌다. 여기까지가 아내의 설명이었다. 담당 피디가 도청 사회복지과에 도움을 요청하고 경찰서에도 신원조회를 의뢰하는 과정에서 남자의 신원이 밝혀지는 장면이 이어졌다. 제복 입은 사내가 다가가 설득할 때 남자가 그에 저항하는 장면부터 그는 보았던 것이다. 이윽고 제복 입은 사내는 물러섰고 머리를 흔들며 길을 내려갔다. 한시간 분량의 방송에서 남자가 등장하는 파트의 방영 분량은 삼십분이 못 되었다.

방송이 끝나갈 즈음이었다. 불현듯 페리나미오우에라는 단어가 귓전에 들려왔다. 남자는 페리나미오우에의 초기 구조과정에서 선체의 수색, 수습에 자원한 민간 구조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내레이션이 이어서 들려온 순간이었다. 시각과 청각의 집중은 그때부터 일어났다. 조명 속의 무대처럼 기억의 어느 부분에 환하게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3년 전 그가 연구원으로 있는 구술사 학회에서 이백명의 사람들과 함께 페리나미오우에가 침몰했을 당시 관련자들의 구술 채록작업을 추진한 적이 있다. 그 프로젝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보류되었는데 신청서를 낸 후 연구비를 지원해주기로 약속한 기관에서 지원을 취소하겠다고 통보해왔기 때문이다. 그때 계획대로 추진되었다면 만났을지 모를 사람들의 명단을 그는 한동안 갖고 있었다.

그는 남자의 입을 통해 뭔가 구체적인 사연을 듣고 싶었지만 방송은 정해진 시간이 끝나자 재빨리 광고로 넘어갔고 이윽고 9시 뉴스가 시작되었다. 한동안 서랍 속에 있던 구술 채록자 명단에 마음이 머물렀다. 남자를 찾아가 보겠다는 생각으로 길 찾기 검색 서비스 사이트에 들어가 주소지를 입력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가로막은 것은 그날 예정된 발표, 회의, 세미나였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가자 어느덧 방송의 잔상은 흐려져 있었다.

논문을 빨리 완성해야 한다는 것은 핑계였다. 사실은 무릎 수술을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장모와 얼마간 불편한 공존을 해야 하는 상황, 이를테면 장모의 입에서 분명 흘러나올, 박사논문을 쓰면 조만간 교수가 되는 건가? 식의 말을 듣게 될 곤혹감. 이런저런 감정을 내비치는 것보다 그런 이유가 더 합리적이었다. 아내는 오히려 반기는 기색이었다. 인터넷을 뒤져서 비수기 특가로 나온 방을 재빨리 찾아내 예약까지 해주었다.

비수기 할인. 그것이 함정이었는지 모른다. 서울에서부터 한시간 거리를 달려온 처음 기대와 달리 불청객 같은 소음들이 밀려들며 논문을 마무리할 결심으로 방에 들어앉은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대낮부터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확성기 음향이 벽을 타고 울려오므로 몸을 일으켜 방을 빠져나갔다. 지하층 마트에서 간단한 요깃거리와 음료, 캔맥주를 사는 걸 잊지 않았다.

주차장을 지나 실개천이 흐르는 곳의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산책길이었다. 옥산. 그가 머물고 있는 객실 베란다 창 너머로 보이는 그 산으로 난 길이었다.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자 애견놀이터로 꾸며 놓은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놀이터 위쪽으로 또 다른 언덕이 있고 목책이 빙 둘러 세워져 있다. 목책 안쪽은 작은 마당이 있는 축사. 산양 한마리, 세마리의 염소, 다섯마리의 토끼, 열마리의 닭이 수용된 이름만 동물원일 뿐, 동물 우리와 다를 게 없는 곳이었다.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울타리와 울타리 사이에 들어 있는 동물들이 제각각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동물원 아니 동물 우리를 지나쳐 위쪽으로 더 걸어갔다. 완만하게 이어지던 산길은 비탈길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 덜 가파른 편편한 땅에 자리를 잡고 캔맥주부터 천천히 비우기 시작했을 때 등 뒤에서 자꾸 무슨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자 저만치 군락의 나무들 사이에서 희뜩한 빛깔들이 어른거렸다. 도란도란 그들은 모여서 이동하는 중이다. 무리는 눈에 익은 풍경이지만 그 속에 색다른 퍼즐 조각이 하나 낀 것처럼 기이한 형체가 보였다.

그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는데 처음에 떠올린 것은 언젠가 유심히 들여다본 책의 표지 사진이었다. 동물이 되기로 결심한 남자가 염소가 되기 위한 도전을 거듭한 끝에 염소 비슷하게 되어 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었다. 그 책 표지 사진 속의 사람은 염소 모습과 비슷하게 제작된 의상을 입고 염소 무리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는데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가 조금 전에 본 것은 분명 염소가 아니라 염소 비슷한 사람이 맞았다. 그는 몇걸음 더 다가가 자세히 보았다. 분명 염소들은 남자를 자신들 무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양 내버려두었고 남자는 그들의 한 무리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의 두 눈은 일곱마리의 염소와 함께 풀 속에 머리를 박고 엎드린 채, 염소인 양 함께 어울린 사람을 담고 있었다.

책 표지 사진 다음으로 뒤늦게 떠오른 것은 그 예능 프로그램 방송이었다. ‘세상에 이런 희한한 일이카메라에 찍힌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남자가 계속 그곳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방송을 본 것이 4월이니 당연히 방송 이후 다른 곳으로 떠났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는 조용히 숨을 죽였다. 이제껏 본 적이 없는 풍경의 관객이 된 느낌이었다. 그의 역할은 계속 고요한 관객이 되는 것이었다. 그게 남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인 듯 여겨졌다.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계속 숲으로 갔다. 어떻게든 논문을 마무리하고 되돌아오라는 문명의 도시에서 전해져 오는 강력한 제어의 전파보다는 숨은 관객의 노릇에 더 이끌렸다. 때때로 직립한 두 다리와, 두 팔이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늘어뜨린 두 팔을 땅 위에 내려놓고 머릿속 가득한 먹물들을 지우고 네발 짐승이 되고 싶은 충동이 몸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지만 하루 한번씩 걸려오는 아내의 전화는 그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곤 하였다.

방에 되돌아와서 창 너머로 옥산을 바라보다가 그는 또다시 서랍 속의 명단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대학원에서 그의 전공영역은 사회사와 구술사로 확장되어 있었는데 새롭게 도전한 연구방법은 난관에 부딪히곤 했다. 기존의 연구와 문헌, 자료들은 늘 빈곤했다. 가장 힘든 것은 구술자들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전화접촉 과정에서의 거절, 구술 허락을 받고 집까지 찾아간 상황에서 구술자의 심경변화로 면담이 좌절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필요한 대화의 기회를 놓친 경우는 더 많았다. 숲속의 남자는 오래전에 만났어야 할 구술자 중 하나였다. 결국 그는 관객의 위치에서 벗어나 다가가기로 했다.

풍경 속에서 밖으로 나온 남자는 좀처럼 어떻게 그곳에 오게 되었는지 기억해 내지 못했다. 이미 많은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 한병의 소주를 다 비웠을 때 얼마간 기억의 일부가 그의 입술을 벌리고 흘러나왔다.

태풍이 몰려오는 계절이었다. 텔레비전을 켜자마자 오키나와를 휩쓴 초강력 태풍 시속 30km 속도로 북상 중속보 자막이 나타났다. 나무가 부러질 듯 휘청이고 건물 구조물이 뿌리째 뽑힌 가로수와 함께 거리에 나동그라지는 장면이 뉴스 첫 화면으로 이어졌다. 유리창을 깨뜨릴 정도로 위협적이라고 알려진 태풍의 진행 방향은 시시각각 보도되기 시작했다. 태풍 루사 때처럼 베란다 유리창에 신문지를 붙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중계되었다. 태풍이 중부 내륙에서 동해 해상으로 빠져나가버렸다는 뉴스가 전해졌을 때 그는 안도했다. 이윽고 부동산 가격의 이상 폭등현상 뉴스가 채널마다 뒤덮기 시작하자 태풍은 금세 잊혔다. 뒤이어 화덕처럼 뜨거운 열기가 닥쳐왔다.

그는 내비게이션에 옥산 주소를 입력하고 차를 몰았다. 태풍 예고 때부터 걱정이 되었다. 논문을 제출하고 심사를 받는 일정으로 그는 너무 늦게 남자를 다시 찾아가고 있었다.

산책로 입구는 폐쇄되어 있었다. ‘태풍의 영향으로 산책로와 곰바위 쪽 통행을 일시 중단합니다.’ 입구에 안내문이 붙여져 있다.

숲에서 걸어 나오는 인부에게 미니 동물원에 있던 동물들과 그곳에 함께 있던 남자의 행방에 대해 물어보았다. 태풍의 영향으로 지붕이 파손되는 손실이 있었고 동물들은 그때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남자는 동물원이 폐쇄되기 전에 사라져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숲을 되돌아 나와야 했다. 차를 주차해 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검은 염소 한마리가 서 있다. 예전에 본 그 숲의 무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종이었다.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갔다. 셀룰로이드로 만든 구슬 같은 눈을 가진 염소였다. 그것은 어떤 기억도 담고 있지 않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염소는 그의 앞을 가로질러 폐쇄된 산책로를 넘어갔다. 검은 염소가 숲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는 눈을 떼지 않고 조용히 바라보며 한동안 서 있었다.


 



  <당선소감>


   "보내준 기대 헛되지 않게…세상으로 한걸음 내디딜 것"

도서관 한 귀퉁이에서 매일 조금씩 글을 썼다. 시간은 빠르거나 느릿느릿 흘러갔다. 백지를 앞에 놓고 촛불 대신 시간만 태우고 있을 뿐이던 그 시간 동안, 써야 할 그 무엇은 단단히 돌 속에 틀어박힌 채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따금 창밖을 보면 언뜻언뜻 투명하고 가냘픈 무늬들이 보였다. 그렇게 가까워졌다가 멀어져가곤 했던 수많은 실루엣들이 있다.

그 실루엣에 육체를 만들어주는 일, 말의 혀를 달아주는 일. 글 쓰기는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끝없이 더듬거렸던 오랜 시간이 헛되지 않은 것은 그 시간이 준 깨달음 때문이다. 소설 쓰기란 인생·인간·마음에 대한 탐구의 여정 그 자체라는 사실을 가르쳐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나는 도망쳤으나 문학은 한번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절대로 도망치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때 돌무덤의 한 귀퉁이가 열리면서 그곳으로 한줄기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이제 무덤 속에서 나와 밖으로, 세상 속으로 더 깊이 한걸음 내디디라는 의미일 것이다. 두꺼운 쇠문을 열어주시고 한줄기 바람을 선물처럼 보내주신 성석제·하성란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열심히 쓸 것이고 그 기대, 절대 헛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1964년 전북 익산 출생.

  ●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심사평>


  "중립 지키며 아픔 되새겨…완성도 높은 ‘수작’ 만났다"


열편의 본심작 중 집중적으로 논의된 소설은 네편이었다.

스테고사우르스는 불의의 사고로 아이를 잃은 DM, 그리고 D의 옛 연인인 T의 이야기로, 살아남은 자들의 피폐한 삶과 얽힌 인간관계가 잘 그려졌으나 스테고사우르스하나로 결집하기에는 미진하다는 느낌이었다. 인물들을 이니셜로 처리한 점도 그들의 관계를 조금씩 드러내려는 의도가 부각되기보다 단문과 현재진행형의 문장이 겹치면서 가독성을 떨어뜨렸다.

그녀의 기억지혜의 악몽과 사촌의 죽음, 죄의식이 미스터리하게 진행되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악몽 속 미나리꽝이 사실은 사촌의 죽음과 연관된 사내의 팔에 있는 거머리 문신이라는 것이 강렬한 이미지로 부각되는데, 기억들이 돌연 떠오르는 점이 아쉬웠고 자신의 이름을 죽은 사촌의 이름으로 개명한 점이 납득되지 않았다.

걱정 마세요는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탄탄한 소설로 환자의 다리를 살리려는 외과의사 경민의 노력이 결국 자신의 다리로 귀결되는 점이 흥미로웠다.

다만 수술은 일종의 의식과도 같다라는 경민의 발언 등 이야기의 전개가 다소 통속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익숙한 도식이 깨지는 것은 수술대 위의 경민이 모두를 의심스러워하며 불안해하는 부분이었다.

당선작인 염소는 참사 이후의 문학이다. ‘는 참사현장에 투입된 잠수부로 매일 밤 꿈속에서 가라앉은 배 안에 들어가 부둥켜안고 있는 아이들을 본다. 그를 그 꿈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모두에게 무해한 염소가 되려는 염원이고, 염소 무리에서 염소처럼 살아가는 그는 예능프로그램에 고트맨으로 소개되기에 이른다.

중립적일 수 없음에도 작가는 중립적 위치를 단단히 지키면서 참사를 기억하고 그 고통을 되새김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쓰디쓴 물이 올라오듯 가슴이 아렸다. 이야기의 완성도는 물론이고 탓할 것이 없는 소설이었다. 이런 작품은 오랜만이었다.


심사위원 : 성석제, 하성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