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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넥타이를 맨 그 사내는 왜 산으로 갔나 / 김용훈

 

산 너머 태양이 지고 있다. 이파리 하나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태양의 빛이 강렬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주름은 이중으로, 아니 삼중으로 지어서 내 살 속에다가 시들어버린 고통을 감춰버린다. 바람은 그다지 불지 않는데도 추위가 느껴진다. 흙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기운이 몇 겹의 섬유를 비집고 들어와 살 속에 파고든다. 아직 태양이 남아있는 지금도 그렇다면, 태양이 지고난 후는 아마도 겨울의 매서움이 찾아올 테다. 나뭇잎이 몇 개 남아있지도 않은 발가벗은 은행나무는 주위에서 썩은 시체의 짙은 향을 맡으며 침체된 인생의 슬픔을 느끼는 듯하다. 나는 마찬가지로 썩어가는 나의 왼쪽 엄지발가락에서도 그와 비슷한 냄새가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당뇨병으로 괴사 중인, 살아있으나 죽어가는 나의 발가락. 쿱쿱하고 더러운 신발 속에서 평생을 살다가 그렇게 죽어가고 있을 나의 발가락은 이미 정상이 아니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도 못하고 진물만 쏟아내고 있는 나의 발가락은 정신이 나간 것이 분명하다. 아니, 발가락에 정신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그것은 생명, 온기, 피의 순환, 영양의 신비일 것이다. 그리고 이미 나의 발가락은 생명을 잃었다. 어쩌면 그것이 나의 인생인지도 모른다. 꺼져가는 생명 가운데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쥐어 짜내어 어두워지고 있는 산 중턱에 올라와 지고 있는 태양이나 바라보고 있는 나의 삶이 그것이다.

바스락 거리는 마른 낙엽의 마찰음이 들린다. 야생동물이라도 지나간 것 같다. 아마 다람쥐 쯤 되겠지. 어쩌면 그것은 야생의 쥐, 어두운 털을 덥고, 찍찍 거리는 괴상한 소리를 내고, 거대한 앞니로 썩은 고기를 갉아먹을지도 모를 그런 쥐새끼일지도 모른다. 혹은 들개일수도 있겠지. 쥐라고? 들개라고? 그 녀석들에게 썩은 피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나는 겨울나기에 좋은 먹잇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런 잡스런 것들에게 먹히진 않을 것이다. 삶의 마지막에 찾아오는 것이 살점이 뜯겨나가는 고통이라니, 뼈가 분리되고 관절이 빠져버리는 통증이라니. 삶의 마지막까지도 고통을 안고 가기에는 빌어먹을 인생이 너무 저주스러운 것이 아닌가. 만약 신이 있다면 내가 들짐승에게 잡아먹히도록 하진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그 신에게 찾아가 썩은 나의 왼쪽 엄지 발가락을 신의 입에다 집어넣고 막대사탕을 먹이듯 넣었다 뺏다를 반복하고 나서 양 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높이 치켜들어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어쩌면 정말 그렇게 되어서 신이라는 작자를 농락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쩐지 그깟 동물들의 이빨이고 끈적이는 침 따위는 견딜 수 있을지도.

어느새 태양이 나의 손톱만한 크기로 변했다. 손톱, 손톱의 낀 때, 손톱의 낀 때만도 못해져버린 빛이 상실되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빛을 잃어버린 숲의 공기를 내 폐에다가 집어넣었다. 어둠 따위, 이젠 무섭지도 않지.

주위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내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을. 부모도, 친구도 없어진지 오래였다. 언제나 내 주위에 있던 것은 바로 이 것, 추울 때는 온기요, 주릴 때는 배부름인 이 소주가 아니었던가. 가방을 뒤적거려 까지 않은 소주 한 병을 꺼내었다. 그래, 내가 보이진 않아도 너는 느낄 수 있지. 이 찰랑거림은 분명 네가 여전히 가득하다는 것이고, 너를 마시면 내가 가득해진다는 것이겠지. 그럼 나는 조금씩 떨려오는 내 몸뚱이에게 마지막 온기를 선물 해줄 수 있을 것이야. 그건, 내가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이 되겠지. 아무렴. 그렇고말고. 어라. 이거 왜 안 열려. 손가락이 자꾸 병뚜껑에서 미끄러진다. 아니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손가락 끝까지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네가 찰랑거렸던 건 내 손이 흔들려서 그랬구나. 시뻘. 갑자기 욕지기가 썩은 내 나는 창자에서 게워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온기까지 뺏어갈 거요? 정말 나를 이렇게 만들어야것소? 춥다. 손이 떨린다. 손을 따라 흔들리던 소주가 떨어진다. 소주가 손을 떠난다. 소주가……. 내 소주가! 흙바닥에 떨어졌다. 주우려고 땅을 뒤적여보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보이지가 않는다. 여기저기를 더듬다가 가시 같은 것이 손바닥을 긁는다. 아리는 것이 베엇나보다. 무엇에 베었는가. 얼마나 베었는가. 보이지 않으니 알 수가 없다. 그냥 아프다. 아픔이 밀려온다.

갑자기 신이고 나발이고, 서러움이 느껴진다. 으엉으엉. 소리를 내어 울어도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다. 나는 한참 동안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욕들을 내뱉었다. 그것 말고는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한참을 목 놓아 울다가 가방에 있던 수건이 생각났다. 일단 피부터 막자. 가방을 뒤적여 내 땀이며 침이며 온갖 먼지가 묻어 찌릉내가 나는 수건을 찾았다. 수건을 꺼내어 통증이 느껴지는 오른쪽 손에 돌돌 말았다. 손이 떨려 잘 할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했다.

나는 왜 여기까지 왔을까. 그냥 아무데서나 죽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어차피 사람들은 내가 잠을 자고 있는지 죽어 있는지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텐데.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죽나 관심을 가져줄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나 똑같은 것 아닌가. 그러나 난 이제까지 지하도 속에서, 정확히는 시멘트 바닥위에서 살아왔다. 마지막까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나의 잔여물들이 하수구로 흘러들어가게끔 하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내 육신이 흙으로 뒤덮인다면, 다음 해에는 피어날 봄꽃의 양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썩은 내 나는 나도 결국 향기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한번은 향기롭고 싶었으니까.

꽃을 생각하자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그 아이가 다시 떠올랐다. 제기랄. 그만 좀 머릿속에서 사라져주었으면 좋겠다. 풀리지 않을 매듭이라면 그냥 잘라버리는 것 밖에 방법이 없음에도, 나는 매듭을 자를 힘조차 없는 것 같다. 천 원짜리 몇 장, 가끔은 배춧잎 하나, 어쩌다 빵이랑 우유나 들어있었던, 때가 군데군데 끼어서 검은색으로 변한 빨간 바구니 속에 갑자기 하얀색 국화꽃이 들어있던 때가 있었다. 나 같은 놈도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 깨달아 한나절은 시멘트 바닥만 보던 눈을 들어 꽃을 놓고 선 형체를 보았다. 이제 막 이십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였다.

뭐여, 나랑 장난해? 이딴 걸로 뭘 하라고?”

나는 바구니를 들어 뒤집었고, 짤랑거리는 동전 소리가 구두굽 소리만 들리던 지하 복도를 울렸다. 떨어진 국화를 잡고 나를 주시하던 여자애에게 꽃을 집어 던졌다. 여자애는 허리를 숙여 꽃을 줍더니 내 손을 잡았다. 여기저기 갈라지고, 흐르는 피가 굳어 있고, 씻지 않아서 꾀질꾀질한 나의 손을 잡다니, 아니 씻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나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더럽고 냄새나는 내 옆에 서서, 그것도 내 손을 잡을 생각을 하다니. 그 때 나는 사람의 촉감이, 언제 느껴보았는지 생각도 되지 않는 그 촉감이 무서워서 몸서리를 쳤었다.

꽃이에요. 좋은 향기가 날 거에요. 힘내세요. 넥타이 아저씨.”

그 아이는 나를 대뜸 넥타이 아저씨라고 불렀다. 아마 내가 어울리지 않게 노란색 넥타이를 매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리고선 내 더러운 손 안에 국화를 꼭 쥐어주고서 떠났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슬며시 가슴을 후비고 들어오는 향기를 맡고 정신이 번쩍 들기 시작했다. 오줌이며, 똥이며, 침이며 땀이 쌓이고 쌓인 나의 겨울 점퍼에서 풍기는, 악취 속에서도 작은 꽃 한 송이가 자신의 존재를 희미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만으로도 내 안의 무언가를 시큰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한 여름의 더위 속에서 땀인지, 눈물인지, 콧물인지를 모를 어떤 무언가를 흘리고 있었고,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런 나를 더러운 쥐새끼인 마냥 흘겨보고는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아직 손에 남아 있는 그 아이의 체온과 살갗의 느낌이 어디인지 꿈만 같아서 몽롱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아무리 맡아도 닳지 않는, 어디서 그렇게 끝없이 올라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향기가, 마치 작은 구멍에서 마르지 않는 물줄기가 쏟아지듯 흐르는 그 향기가 그 아이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손을 바라보다가, 이제는 원래의 색이 무엇이었는지도 모르게 때가 타버리고 원래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도 모르게 갈라져버린 나의 손이 국화와 같은 그 아이에게 뭔가 불경한 짓거리를 한 것인 냥 역겹게 여겨져 슬그머니 자리에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에서 수도를 열어 손을 씻다가,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자 더럽고 누추한, 그리고 역겨운 노숙인 한 명이 서 있었다.

꽃은 얼어 죽을 꽃이냐. 시뻘.”

물에 젖은 손을 패딩 점퍼에 쓱쓱 문질렀다. 깨끗해졌던 손에 다시 땟국물이 묻어나왔다. 세면대 벽에 붙어 있던 파란색 봉비누는 회색빛을 띄고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화장실 밖으로 나와 오랫동안 주렸던 배를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머니에 있던 꽃은 배고픔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저 하얀색 쓰레기에 불과한 그것을 나는 쓰레기통에다가 처넣었다. 쓰레기통에는 사람들이 버리고 간 플라스틱 음료 컵들이 들어있었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빵이나 과자 같은 것은 잘 안 버려도 음료수는 절반이나 남겨서 버리곤 한다. 나는 여러 가지 컵들을 꺼내어 커피도 맛보고, 동그란 떡이 들어있는 달큰한 음료도 맛보고, 콜라도 마셨다. 개새끼들, 먹을 게 그렇게 많은가. 이런 것을 버리다니 참 고맙다. 미친놈들. 뒤를 돌아보니 어떤 남자 꼬맹이가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의 옆에서 손을 잡고 있던 아줌마가 나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아이의 팔을 힘들게 잡아끌었다.

저런 거 쳐다보지 마!”

나는 슬금슬금 그들의 뒤를 밟다가 탑승구를 넘어선 그들을 더 이상 쫓지 못하게 되어서야 자리에 돌아왔다. 당황하며 허둥지둥 탑승구로 들어가던 모자의 얼굴이 재밌었다. 한 여름에도 지하도 바닥에선 차가운 냉기가 올라온다. 시멘트가 뿜어내는 기운을 받다보면 삭신이 쑤신다. 나는 다시 이불을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카악- -!”

내 얼굴 앞에 무언가 떨어진 것 같았다. 살며시 눈을 뜨니 콧물인지 가래인지 모를 희꺼머헌 액체가 얼굴 바로 앞에 떨어져 있었다.

에이씨, 재수 없는 새끼. 찌린내 때문에 숨도 못 쉬겠네. 일 하는 놈들은 뭘 하는 거야?’

머리가 까지고 뚱뚱한 남자가 지나가고 있다. 몇 년이 지나서 운이 조금 안 좋으면, 혹은 사고라도 나면 나랑 별 차이도 없을 그 사내는 나에게 침을 뱉었다. 거 참.

생각이 생각을 물고 늘어지다 보니 하얀색 국화가 가래침이 되었다. 가래침이라니. 불쾌하기 그지없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질병의 찌꺼기라니. 그래. 어울린다. 어울려. 무슨 꽃이냐. 내 무덤 위에 누군가 찾아와 가래침이라도 뱉는다면 그것처럼 어울리는 모욕이 어디 있겠나.

먹은 것 없는 몸이 으슬으슬 떨려오기 시작한다. 그래. 여기서 잠들면 되겠다. 그러면 편하게 죽을 수 있을 테다. 주저앉아 있던 나는 허리를 눕혀 흙바닥에 머리를 대었다. 바스락, 껍데기만 남아버린 나뭇잎의 시체들이 내는 소리가 들린다. 달조차 뜨지 않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 그래도 별 서너 개가 떠있다. 빛이 너무 미약하여 하늘의 점 말고는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별들이 그래도 나의 마지막을 지켜봐주는구나. 저들은 너무 멀리 있어서 경멸하는 표정 따위가 보이진 않으니,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죽으면, 지난달에 먼저 간 김 씨가 기다리고 있을까. 김 씨가 정말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는 곳에 있다면 분명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누가 바구니에 돈이라도 던지려 하면 바로 소주를 사왔던 김씨. 빵이랑 우유가 바구니에 들어와도 냉큼 편의점으로 달려가 소주로 바꿔왔던 김씨. 편의점 주인이 찾아오지 말라고 욕설을 퍼부어도 편의점 문 앞에 누워서 결국에는 소주를 얻어냈던 김씨. 덕분에 나를 빈속에 소주만 냅다 마시게 해서 피똥을 싸게 했던 김 씨. 김 씨는 여자를 참 좋아했다. 빌어먹을 놈이 여자는 무슨. 개새끼도 그런 개새끼가 없었다. 김 씨는 술을 먹고 육교 계단 아래에 박스를 깔고 누웠다. 하늘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계단을 올라가는 여자들의 속옷이라도 훔쳐볼 요량으로 그따위 짓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김 씨는 나에게 같이 가자고 몇 번인가를 권했지만, 나는 그 따위 짓을 하는 놈까진 아니었다. 나는 김씨에게.

, 이 개새끼야. 내가 너랑 같은 놈인 줄 알아? 나 옛날에 싸장님이었어. 싸장님. 내가 사업만 안 망했어도 너 같은 놈이랑 같은 하늘아래서 숨이라도 쉴 것 같아? 어디 거지새끼가 그따위 짓을 하고 다니냐. 빌어먹을 자식.”

? 이 거지 새끼가, 지가 잘난 놈인 줄 아나! 네나 나나 똑같은 거지새끼여!”

꺼져! 이 잡놈아!”

김 씨는 내가 그렇게 이야기 한 후에는 그 같은 권유를 다시 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나와 소주를 먹고 난 이후에는 육교 계단 아래에 가서 누워 하늘거리는 하늘을 봤다.

김 씨를 더 생각하고 싶은데, 다시 그 아이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그 여자애는 그 뒤로도 몇 번을 내게 찾아와서 꽃을 쥐어주곤 했다. 내가 이딴 건 필요 없으니 돈이나 먹을 걸 달라고 얘기한 이후로는 꽃과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같이 주고 갔다. 하지만 내 옆에 있던 김 씨에게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 꽃 한 송이를 건넨 적이 없었다. 김 씨는 그 여자애에게 욕설을 하며 지금 사람 차별하는 것이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는데, 여자애는 그 이후로 김 씨에게도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넸다. 다만 꽃은 나에게만 주었다. 나는 그게 이상하긴 했지만, 내가 불평할 건 하나 없었다. 김 씨도 꽃 따위에는 일말의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여자애는 날씬하고 예뻤다. 적당한 키에 적당히 좋은 향기가 났다. 별로 꾸미지 않았는데 피부에서 빛이 났다. 처음 그 아이가 나타났을 때, 나는 그 아이에게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몇 번 모습을 비추었을 때는, 가끔 지하차도로 우르르 몰려와 빵이고 컵라면이고를 나눠주는 젊은 것들과 달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아이는 반드시 혼자 나타났다. 그 것이 다르다면 달랐던 점이랄까. , 빵이 아니라 꽃 따위를 주는 것도 특이했다. 처음 내가 그 아이를 부를 일이 있을 때 정신 나간 것이라고 부른 이유도 그것이었다. 정신 나간 것. 시커먼 노숙인의 손을 스스럼없이 잡고, 꽃 따위를 쥐어주는 것. 한 여름 고얀 냄새에서도 표정 한번 변하지 않는 것. 독한 것.

한번은 그 정신 나간 것이 나에게 옛날에 뭘 했냐고 물었다. 나는 귀찮기만 하여 그 애 앞에서 방구를 연속으로 세 번 뀌었다. 지독한 하수구 냄새가 났다. 나는 그 애가 당연히 거리를 둘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그 아이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술만 먹으니 이 따위 냄새가 나지. 돈 준거로 밥 좀 먹어요. 그리고 아저씨, 옛날에 뭐 했냐고요.”

나는 짐짓 그 정신 나간 것이 정신뿐만 아니라 후각까지 가출을 한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과 내가 맡아도 구역질이 올라오는 똥 냄새를 맡고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 그 독기에 놀라움을 느꼈다. 그 무표정에 눌려서 나도 모르게 내 과거를 말해버렸다.

내가, 내가 한 때 좀 대단했지. 넥타이, 넥타이공장 싸장이었다, 이말이야. 너 같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것이랑 상종 할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까지 마세요. 그런 사람이 지하도에서 똥냄새나 풍기고 있어요? 내가 꽃이라도 안줬으면 아저씨 코가 먼저 썩고 있었겠네.”

까지 마? ? 썩 꺼져! 이 정신 나간 것아!”

당돌한 그 것의 말에 나는 흥분해서 큰 소리를 질렀지만, 역시 너는 독한 것이었다.

그래요? 그럼 이거 안줘도 되죠?”

그 아이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파란색 배춧잎을 끼워서 흔들고 있었다. 나는 그 배춧잎이 녹색 소주병으로 보였고, 그걸 포기할 수 없어서 얼른 손을 뻗어 그것을 뺏으려 했다. 그러나 그냥 가만히 있어도 떨림이 멈추지 않는 나의 손이 이제 막 신체가 깨어나고 있을 그 아이의 속도를 따라갈 순 없었다.

아이, 뭘 치사하게 그러냐. , . 내가 잘 못 했어.”

아저씨, 그런 대단한 사람이 왜 이러고 있어요?”

하아...너도 좀 커보면 알꺼다. 사는 게 마음대로 되나. 미스 김 그것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 꼴 나지는 않는 건데.”

나는 오랜만에 끓어오르는 미스 김 생각에 온갖 욕설을 그 아이 앞에서 허공에 대고 퍼부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숨을 몰아쉬다가 헛구역질까지 했다.

허억...허억...우우욱! 이런 씨, 너 때문에 괜히 옛날 생각났잖아. , 너 그거 안내놔? 얼른 내놔! 소주라도 먹어야겠으니까.”

하나만 더 말해주면 이거 두 장 드릴게요.”

...? , 뭔데?”

그 미스 김이 뭔 짓을 했길래 아저씨가 이러고 사시는 거예요?”

미스 김?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할 거야? 너 뭔데?”

...저 사실 소설 쓰는 문창과 학생인데요. 아저씨를 제 소설 주인공으로 정했거든요. 넥타이를 맨 노숙인 아저씨라니. 느낌이 팍 왔달 까요. 저 돈 좀 있으니까, 걱정 말고 얘기 좀 해봐요. 그럼 아저씨는 돈 생기고, 저는 좋은 아이디어도 얻고 서로 좋잖아요.”

나는 내 얘기를 하는 게 너무 귀찮았지만 그 아이 손 위에서 소주병들이 겹쳐져 흔들리는 것이 보여서 얘기를 마저 해주었다. 솔직히 나를 시궁창에 처박힌 쓰레기 보듯 지나가는 사람들과 다르게 내 손을 잡고 이야기도 걸어주는 그 아이가 나타나면 어느새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미스 김과 나의 슬프고 슬픈 전설을 기억이 나는 대로 떠올려 전해줬다.

미스 김, 이 썅...그 년 때문에 나는 이 꼴이 났다. 잘 나가는 넥타이공장 사장이었던 나는, 밑에 직원만 80명을 두고 있었다. 아침에 공장에 나가면 80번의 아침 인사를 받았지만 나는 한 번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여주면 그만이었다. 공장이란 게 시스템만 잘 갖춰 놓으면 나 같은 사람은 앉아서 돈을 벌 수 있었다. 사람만 잘 굴리면 되었고, 번 돈에서 일부만 구르는 사람들에게 던져주면 되었다. 사실 그렇게 쓰는 돈이 큰돈도 아니었다. 자동차에 들어가는 기름 중에 엔진이 굴러갈 수 있게 쓰이는 휘발유가 있고, 엔진이 뻑뻑하지 않도록 기름칠을 해주는 오일이 있는 것처럼, 그저 기계가 잘 돌아가도록 하는 기름칠 용도의 돈을 흘려주면 나머지는 다 내 것이었다. 개중에 똑똑한 놈들 몇에게만 한 번씩 배부르게 해주고 진탕 마시게 해주면 알아서 잘 돌아가는 것이 또한 공장이었다. 그리고 미스 김은 내 공장의 경리였다. 사실 수완이 좋아서 뽑았다기 보다는 지원자 중에 제일 늘씬하고 얼굴이 반들반들해서 내가 뽑은 사람이었다. 땀 냄새 나는 수컷들만 가득한 공장에서 미스 김은 유일한 여자였고, 내가 이쁘장한 미스 김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이상할 게 없었다. 나는 미스 김에게 공장에서 가장 많은 돈을 뒤로 돌려주었고, 미스 김은 내게 자신의 몸뚱이를 뒤로 돌려주었다. 나는 점심시간 마다 미스 김을 안았고, 그걸로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공장에 들어오니 내 기계들 여기저기에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형사들이 들이 닥쳐 나를 쓰러트리고 수갑을 채웠다. 미스 김 이년이 내 재산을 다 빼돌리고 나를 성폭행으로 고소를 한 것이었다. 그날부터 내 인생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침을 튀기며 이야기를 했고, 그 여파로 소주를 7병 연거푸 마셔야만 했다. 시뻘. 미스 김 얼굴이 이젠 생각도 안 나는데, 그 때의 거지같은 기분은 잊을 수가 없다.

그 일이 있은 후 한동안 그 정신 나간 것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동전 몇 푼 들어있는 내 바구니의 가벼움이 아쉬웠지 그 애가 아쉽지는 않았다. 그냥 그 애도 자신의 목적을 다 이루었으니,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는가보다 했다.

이젠 그 년은 다시 안 오나보지?”

김 씨가 내게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너 같으면 이런 시궁창에 오고 싶겠냐고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것도 그렇지? 그런 년이 뭐가 아쉬워서 이런 델 와. 그냥 아깝다. 아까워.”

, ? 그깟 소주 내가 오늘 한 병 구해다 주면 되지.”

아니, 아니, 그 년 생각보다 이쁘장하게 생겨가지고 말이야. 한번 안아봐야 하는데 말이야...흐히히히힛.”

김씨는 여자들 속옷을 훔쳐볼 때마다 짓는 역겨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고 나는 미친놈이라고 한 마디 던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그 정신 나간 것은 어느 날 다시 오기 시작했고, 다시 국화 한 송이와 돈 만원을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그 여자애가 또 내게 얻고 싶은 것이 있겠거니, 잘 됐다고 여기며 또 진탕 소주에 취해 살았다. 다행히도 여자애는 다시 내 과거를 묻지는 않았다.

여름이 거의 끝나갈 즈음의 어느 날, 김 씨가 슬며시 내게 다가와 더러운 입김을 내쉬며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어이, 잠깐 나 좀 따라와. 내가 좋은 거 줄 테니까.”

지랄하네. 더우니까 다가오지 좀 마. 귀 간지럽게 뭔 귓속말이야.”

아아...! 조용히 하고 따라오기만 하라니까!”

나는 평소의 김 씨라면 보여줄 리 없는 박력에 그만 입을 다물고 김 씨를 쫓아갔다. 김 씨는 그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지하도 밖으로 끌고 나갔다. 골목을 돌고, 깊숙이 들어가면서 점점 인적이 드문 곳이 나왔다. 집집마다 빨간 색 스프레이로 엑스 표시가 되어 있는 동네였고, 창문이 다 빠져 있어서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집들이 많았다. 김 씨는 대문에 테이프가 둘러쳐진 어느 주택으로 걸어가 테이프 밑을 지나서 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도 김 씨를 따라 그 집으로 들어갔는데, 80년대에 지어졌을 법한 옛날 주택이었다. 벽지는 누렇게 떠 있고, 천장은 갈색 나무로 마감되어 있었으며, 전기가 끊어졌으니 당연히 어두웠다. 김 씨가 어느 방문을 열자 그 정신 나간 것이 누워 있었다. 머리가 찢어졌는지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정신이 정말 나가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이, 내가 자네니까 여기 데려온 거야. 나 혼자 즐기려고 했는데, 고마운 줄 알아!”

김씨! 뭐야 이건! 얘가 왜 여기 누워있어?”

뭐긴 뭐야! 오랜만에 회포나 풀어보자고!”

김 씨는 바지춤을 서둘러 내리고 있었다.

이런 미친, 시뻘, 자네 재정신이야?”

아 서둘러! 얘 정신 돌아오면 골치 아파지니까! 이런 기회가 흔한 줄 알아?”

바지를 다 내린 김 씨는 그 정신 나간 것의 허벅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허연 허벅지를 그 시커먼 손으로 문지르는 것이 난 또 다시 불경스럽게 느껴졌다.

자네 안 하면 내가 먼저 함세? 히히히힛

내가 주춤하는 사이 김 씨는 그 아이의 옷을 벗기려고 했다. 이쁘고 늘씬한 젊은 여자의 옷이 벗겨지는 것을 보자 잊혔던 욕구가 어디선가 고개를 쳐드는 것 같았다. 덜덜 떨리는 내 손은 나도 모르는 사이의 허리춤을 불끈 쥐고 조금씩 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

갑작스러운 외침에 나는 손을 멈추고 김 씨를 바라봤다. 김 씨는 입에서 피를 쏟으며 뒹굴고 있었고, 바닥과 그 아이의 하얀색 블라우스에 선홍색 핏물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꺼져! 이 미친놈들아!”

바닥을 구르던 김 씨는 시커먼 눈물과 시커먼 핏물을 눈과 입에서 뚝뚝 흘리며 그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이년이!”

김 씨가 휘두른 손바닥이 그 아이의 얼굴을 후려쳤고, 그 아이는 다시 쓰러졌다.

아으! 재수가 없으려니까! ! 더럽게 아프네! 넌 오늘 죽었어!”

그 아이는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바지춤을 잡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 때 그 아이가 했던 말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빠...살려주세요! 아빠!”

나는 아빠라는 말을 평생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식도 아내도 없었으니까 당연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나를 아빠라고 불렀다.

...내가 왜 네 아빠야!”

아악!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가 미스 김 딸이에요...제가 아빠 딸이에요!”

나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멈추었던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고, 몸 밖에 생각나지 않는 미스 김의 흐릿한 얼굴과 그 년에 대한 분노와 짧았던 정열과 만족감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나의 딸이라고 자처한 아이가 내 눈 앞에서 김 씨의 주먹으로 구타를 당하고 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옆에 떨어져 있는 시멘트 벽돌을 손에 쥐고, 김 씨의 머리 통으로 내리쳤다. 사방에 피가 튀기었고, 악을 지르고 있던 김 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엎드려 조용히 꿈틀대다가 이내 고요한 시체가 되어버렸다.

...괜찮니?”

아이는 뜯어진 옷깃을 양팔로 가리며 조용히 흐느껴 울었다. 그러다 내 허약해 빠진 손이 벽돌을 땅에 떨어트렸고, 그 소리가 우리 사이에 끼여 있던 적막을 깼다.

당신들은 정말 쓰레기였어. 당신 같은 사람을 언젠가 내가 구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니. 내가 미친년 이었지. 그 시궁창 속에서 평생을 썩어야할 당신을 왜 찾았을까. 당신은 정말 쓰레기야.”

그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그 집을 달려 나갔다. 집을 나서며 유리창이 없는, 뚫린 창 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그 경멸의 눈빛은 내가 익히 아는 눈빛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 아이의 마지막, 그리고 김 씨의 마지막이었다.

과연 그 아이는 정말 나의 딸이었을까. 정말 그 미스 김이 내 씨앗으로 낳은 내 자식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그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거짓말을 한 것이었을까.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죽음을 앞두고, 여러 가지 생각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 괴롭기만 할 뿐이다.

-! -!

바람 소리만 가득히 채운 허공을 동물의 울음소리가 찢어 놓는다. 본능적으로 눈을 떴지만 여전히 사위는 어둠에 가려져 있을 뿐, 분간이 되는 것이 없다. 다시 좀 전의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고, 나는 그것이 개의 울음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개다. 산을 돌아다니는 들개다. 먹을 것도 없는 야산에서 녀석은 피 냄새를 맡았다. 썩고 있는 고기 냄새를 맡았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들개에게 물어뜯기는 최후를 맞이할 것인지, 아니면 어딘가에서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나는 무관심이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몸소 느껴봤던 사람이지만 지금처럼 누군가의 무관심을 바래본 적이 없었다. 그저 평온하게, 지금까지처럼 쭉, 나라는 쓰레기를 피해가 달란 말이다. 왜 마지막에 와서야 무언가의 목적이 되느냔 말이다.

보이지 않는 내가, 손도 다리도 제대로 쓸 수 없는 내가 동물적 감각을 초월하리란 기대는 할 수 없다. 나는 어쩌지도 못하고 가만히 누워서 식은땀을 흘리고만 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 오른쪽 종아리에 불이 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커컹! !

몸이 들썩거렸고, 극심한 공포와 불안, 고통이 나를 마비시켰다. 나는 몸을 이렇게도 흔들고 저렇게도 흔들어봤지만, 종아리가 어금니에 관통이라도 된 듯 나를 물고 있는 것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고통에 몸을 흔들어대다가 손에 매끈하고 묵직한 무언가가 잡혔다. 나는 그것을 들어 힘껏 내리쳤다. -소리와 함께 내 몸통을 흔들어대던 그 녀석이 잠잠해졌음을 느꼈다. 알콜 향이 퍼지며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찮으...”

희미한 목소리가 들린다. 김 씨인가. 어이, 김 씨. 미안허이. 그래도 자네가 잘 한 것은 없으니 조금만 용서해주게나.

괜찮으십니까.”

...누구야? 여기는 어디야?”

처음 보는 젊은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하얀색 침대에 누워, 하얀색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여기는 병원입니다. 이제 정신이 좀 드십니까.”

내가 어떻게...어떻게 여기 있는 거요?”

나는 새벽녘 산행을 가던 등산객에 의해 발견이 되었고, 등산객의 연락으로 구조대가 출동했다고 했다. 간단히 몇 가지 설명을 해준 직원은 나에게 조금 쉬고 있으라고 이야기 한 후에 침상 옆 화병에 꽃을 꽂았다. 하얀 국화꽃이었다. 병원의 창문을 넘어서 겨울의 햇볕이 들어오고 있었다.

 


  <당선소감>


   "좋은 작품 쓰는 내가 되기를 다짐하죠"

당연히 그렇게 살리라 생각했던 삶의 모습이 있었다. 몇 년의 시간을 대학에서 쏟아 부었던가. 지겹게 이어질 앞으로의 삶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기에 견딜만 했다. 졸업 후 자연스레 공부해왔던 분야의 업종으로 취업을 했다. 그러나 몇 년, 몇 군데인가를 거치면서 깨닫게 되었다. 추구하던 것을 추구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실은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좋아하고 있다고 여겼던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길이 내 길이 아니었음을. 남은 것이라고는 졸업증명서와 자격증, 학자금 대출로 인한 빚뿐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하고 손에 쥔 것이라고는 초라하고 부질없는 것들이었다.

인생을 밑그림부터 다시 그려야만 했다. 자신을 철저하게 들여다보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은 뭐였을까. 즐겁고, 의미 있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글이었다. 이야기였다. 소설이었다.

힘들거나, 괴롭거나, 견디기 힘들 때마다 내가 가장 의지하였던 것은 손에 쥔 펜이었고, 키보드였다. 알 수 없는 감정과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글로 써내려갈수록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소설을 읽으며 타인의 삶 속 고통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한 연민에서 벗어나 거칠고 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라는 것을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기대가, 희망이 인생을 조금은 더 살아볼만하게 한다. 그래, 나는 글을 쓰고 싶다. 소설을 쓰고 싶다. 오랜 방치 속에서 먼지가 쌓이고 빛이 바랜 을 찾아냈을 때, 나는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고요하고 고요한 밤, 전화벨이 울렸다. 당선 소식이었다. 믿기지 않았고,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정말일까. 정말, 내가 쓴 소설이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괴로움을, 쓰리고 비릿한 삶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것일까. 누군가와 의 단면을 함께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한 것일까. 나는 꿈을 이루어낸 것일까. 전화기 옆에서 화장도 채 지우지 못한 아내가 누워 잠을 자고 있다. 어쩌면 나도 피곤한 하루가 이끈 단잠 속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당선 소감을 쓰는 지금까지도 나는 불안에 떤다. 내일 아침잠에서 깨어나면 이 모든 것이 허황된 망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하고 말이다. 나는 책상에 앉아서 삶의 충만함을 경험하고 있는 지금이 허무하게 끝나버릴지라도 괜찮을 방법을 고안하고 있다.

, 더 좋은 글을, 소설을 써내고 싶다. 누군가에게는 공기가, 수분이, 빛이, 바람이, 온기가, 그림자가 되어줄 수도 있을 만한 것을, 아니 나에게 있어서 조금 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용기를 만들어내고 싶다고 소망해본다. 새로운 꿈을, 푯대를, 희망을 세움으로 나는 또 다시 시작될 일상에서 살아갈 힘을 내보려고 한다.

소설 쓰기를 시작할 수 있도록 격려해준 아내에게 깊은 감사를 표현하고 싶다. 나의 글을 함께 읽어주고 비판하고 고민해준 벗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소설을 가르쳐주신 스승님께 감사한다. 나의 작품을 인정해주신 심사위원분들에게 진정 감사를 드린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좋은 작품을 쓰는 내가 되기를 다짐해본다.



  ● 서울 출생.

  ●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졸업.

  ● 종합사회복지관 사회복지사.

  ● 은평구립도서관 재직(책단비 서비스 담당) 재직.


 

  <심사평>


  "감정·연민 등에 치우치지 않고 묘사 돋보여"


일단 예심처럼 살펴서 걸려 놓은 작품이 12 편이었다. 모두들 일정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소설 심사가 늘 그러하듯, 소재를 다루는 방법과 스토리 구성의 응축력, 그것의 언어적 형상화에 어느 작품이 보다 우수하느냐를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최종심의 대상으로 5 편들이 선자의 눈에 일단 올랐다. 모두들 천칭에 올려놓고 보아야만 그 무게의 차이가 날 정도의 작품들이었고, 각각 나름대로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점을 먼저 밝힌다.

신춘문예나 현상문예 심사에서는 이들 작품들 중 상대적인 비교 우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비교적 결점 없는 작품들이 당선작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물론 소설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어느 하나가 우월하게 돋보인 경우, 그것이 다른 결점을 덮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를 제외하고는 두루 결점이 없는 작품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우선 필경사의 밤의 경우, ‘topoi’랄까, 공간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특히 이국 지역과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키는, 오경선의 필경사의 밤은 그러나 소재적 신기성을 뛰어 넘어서지 못했다.

최재호의 은 힘 있게 밀어 붙이는 문장력과 익명적 공간 안에서 연속적인 사건들이 흥미를 유발하여, 끝까지 단숨에 읽게 만드는 힘 있는 소설이었다. 그러나 서사성의 약화가 결말부분을 약화시키고 있다. 소설은 먼저 한 편의 이야기라는 점을 두 분 다, 더욱 깊이 숙고해야할 것이다.

넥타이를 맨 그 사내는 왜 산으로 갔나’, ‘후계자에 대하여’, ‘체기는 모두 당선작이 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조순아의 체기는 탄탄한 구성과 표현력이 좋았다. 때때로 심사자를 난처하게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지인인 듯한 사람들의 작품이나, 어디서 한 번 만남직한 작품들도 그것이다. 애석하게도, 특히 현상공모와 같은 등단 심사에는 더욱 난처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인물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독특한 설정에 의한 서사의 풍요성은 퍽 인상적이었다.

김만성의 후계자에 대하여는 소재성에서도 이야기를 구축하는 능력에서 빼어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일화(逸話)를 동원하여 중심 이야기를 눙치는 것 등, 습작을 오래, 또 많이 한 작가라고 생각된다. 소설은 언어예술이라는 점을 좀 간과하고 있다는 우려를 주었다. 멋진 문장만을 말하지 않는다. 소설이 예술성을 획득하는 것은 서사성에서만 아니라, 그것의 표현인 언어에 의해서도 완성된다는 점을 조금 간과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넥타이를 맨 사나이는 왜 산으로 갔나는 사실 흠이 있다. 특히 소재나 구성 역시 매우 평범하며, 그것은 막판 마지막까지 그러하다는 점이 후계자에 대하여와 마지막까지 고민하게 한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은 소설이라는 본연을 생각하고, 또 비교적 무난했기 때문이다. 구성과 언어적 형상화, 상투적이지만 안정된 이야기 선을 넘어서지 않으려 했던 자기 절제가 그것이다. 응모자들에 비해 비교적 젊은 나이인 것 같은데, 감정이나 연민 등에 치우치지 않고 묘사하려는 점 등 역시 선자에게는 결정하게 한 요소였다. 앞으로의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 채희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