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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타동사 연습 / 전태호

 

소리가 크면 반드시 무언가를 괴롭힌다. 타동사는 발산의 성질을 띠고 있어서 소리가 크다. 따라서 타동사는 반드시 무언가를 그러니까 목적어를 괴롭힌다.

화요일

타동사가 기능하려면 주어가 필요하다. 아빠는 아침부터 꽝 소리가 울리도록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신발을 벗자마자 집이 떠나가라 큰기침을 해댔고, 식탁이 쨍쨍대거나 말거나 유리컵을 함부로 내려놓았다. 내 방 바로 앞에선 신문지를 짜증스럽게 넘겼다.

나의 잠은 이미 타동사에 의해 깨어지고 머리맡의 유리창과 블라인드는 가늘게 흔들거렸다. 주황색 귀마개는 밤사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타동사는 나를 이불 속으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침대에 걸터앉았다가 도로 눕게도, 냉랭한 방바닥에 납작 엎드리게도, 나중에는 그저 가만있게도 만들었다.

아빠가 잠을 청하기 전까진 내 방에 있으면서도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아빠는 오전 교양 프로그램을 틀고 볼륨을 어지간히도 키워 놓았다.

채널을 돌리면서 정치인을 헐뜯기도 하고 약 떨어진 리모컨을 손봐주고 나서는 거실 바닥을 발뒤꿈치로 쿵쿵 굴렀다. 배까지 움켜잡고 웃어 댈 즈음 엄마도 참다못했는지 안방 문을 열고 나왔다. 이어 나를 대신해서 빨리 좀 자라고 잔소리를 퍼부었고, 위아래 작업복을 벗긴 뒤 아빠를 안방으로 밀어 넣었다.

엄마 역시 스스로 주어라는 걸 알고 주어들처럼 행동했다. 나를 생각해서 나름 믹서나 그릇을 조심히 다루는 듯했지만 내 귀에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거슬렸다. 가스레인지 경고음을 무시하고 불을 켤 때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머리칼까지 곤두섰다.

부엌 쪽에서 소리가 잦아들고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쯤 엄마는 내게 식사하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이제 밖이 위험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가 작으면 아무것도 괴롭히지 않는다. 자동사는 수렴의 성질을 띠고 있어서 소리가 작다. 따라서 자동사는 아무것도 괴롭히지 않는다. 자동사도 기능하기 위해선 주어가 필요하다. 나는 살짝 목감기에 걸렸는지 말이 제대로 안 나오고 그마저도 목소리가 갈라졌다. 햇살이 들어오는 거실 창문 아래에 섰더니 부엌에서 국을 뒤적이는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부엌 바로 옆으로 보이는 동생 방은 오늘도 굳게 닫혀 있었다. 아빠는 안방에서 코를 골았는데, 한 번씩 숨을 몰아쉬거나 컥컥 숨을 뱉을 때마다 내 귀는 쫑긋 섰다. 돌아서지는 못하고 고작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는 순간, 테이블 아래에 있던 페인트 붓과 롤러가 발에, 그러니까 털슬리퍼에 밟혔다. 엄마는 배고플 텐데 어서 밥부터 먹으라며 나를 부엌으로 불러들였다. 나는 순순히 식탁 의자에 앉았다.

된장찌개엔 지나칠 정도로 건더기가 담뿍 들어 있었다. 숟갈에 뭐라도 걸릴라치면 나를 위해 따로 빼놓은 것 같아서 마음이 몹시 무거워졌다. 엄마는 어질러진 페인트 도구까지 대신 정리해 주었다. 불러들인다든가 위한다든가 정리한다든가 하는 세 가지 행위 모두 타동사였다.

타동사는 아무리 의도가 선하다 한들 반드시 목적어를 괴롭힌다. 내 입술은 일자로 굳게 다물리고, 어깨는 티 안 나게 움츠러들었다. 엉덩이는 밥상머리에 붙박였다. 큰소리를 내지 않으면 비록 주어로 태어났을지언정 끝내 누군가의 목적어가 되고 만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를 목적어 취급했다.

내 꼴은 회사에 속해 있는 동안 이렇게 되고 말았다. 처세술이랄까, 동기들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타동사를 구사하니, 사회생활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금방 주어 자리를 하나씩 꿰찼다. 나는 딱히 밉보인 것도 아닌데 목소리 큰 주어들 틈에서 점점 작아지다 결국 목적어 자리로 밀려났다.

그래도 퇴사 직후에는 일부러 더 주어처럼 굴었다. 집안에서 입지가 흔들린다 싶을수록 목소리를 높였고, 고민 끝에 프리랜서 번역가가 되겠다고 밝혔더니, 어느 순간 엄마와 아빠의 입은 목적어처럼 떡 벌어졌다. 굳이 두 사람의 입을 틀어막기도 전에 나는 일본 식자재 쇼핑몰을 운영 중인 지인으로부터 일감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타동사로 큰소리치는 게 어려워졌다.

무역 거래 조건까지 공부해 가며 일에 파묻혀 지냈건만, 건당 수입은 기껏해야 커피 값 수준에 지나지 않았고, 지인의 사업 악화로 나도 덩달아 빈둥빈둥 놀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어서 좋은 색싯감을 찾아야 할 텐데…… 라고 아빠가 한마디 던졌다.

술김에 건성으로 한 소리란 걸 알면서도 지금 누굴 놀리나 싶었다. 타동사 중에서도 놀린다는 표현은 유독 날을 세우고 있었다. 똑같이 타동사로 받아치고 싶었지만, 짧은 사이 몇 가지 생각이 스치면서 내 말문은 콱 막혀 버렸다.

아빠는 비록 24시간 격일제로 근무하기는 하지만, 안정적인 직장에서 꼬박꼬박 돈을 벌어왔다. 벌어오는 것은 틀림없는 타동사이다. 따라서 타동사는 큰소리를 낼 수 있다.

반면 불안정한 프리랜서 생활만으로는 돈을 거의 못 벌었다. 문득 세상만사가 거대한 문법에 의해 돌아가는 듯했고, 그날 이후로 내 입에선 큰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옥상에 방수 페인트를 칠하려고 준비를 서둘렀다. 아빠는 여전히 세상 모르고 벽을 뚫을 기세로 코만 골았다. 물론 세탁기가 탈수를 돌릴 때는 아빠가 깨는 건 아닌가 싶어 가슴이 졸아들었다. 나는 엄마가 현관을 나서자마자 허겁지겁 욕실로 들어갔다.

변기 물을 내리고 몸을 씻는 동안엔 큰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내리거나 씻는 건 의심의 여지 없이 타동사이다. 나는 엄마와 아빠가 잠을 자거나 집을 비울 때에만 타동사를 만끽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처럼 조용한 시간을 틈타 번역을 해야만 했다.

최근에는 그래도 번역 중개 사이트 서너 군데에 유료로 멤버십 가입을 하고,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등록해 두었더니 조금씩 의뢰를 받기 시작했다. 꾸준히 번역을 하고 돈을 벌면 눈치 안 보고 큰소리를 낼 수 있다. 버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타동사이다.

아빠 몰래 타동사를 통장에 쌓아 두고 벼르다 보면 기회를 잡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노트북을 켠 뒤 의뢰인 메일을 열었다. 모니터 한쪽에는 인터넷 사전을 띄워 놓고 전문 용어로 된 내용을 찬찬히 살폈다.

삿포로 다시 이리 미소의 분석치에 관해서.

표준치 색(Y%)27.5%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가공 시 작업자가 수치를 높이면 색(Y%)은 하얗게 변합니다. 반대로 낮추면 색(Y%)은 검게 변합니다. 파랗게 변색된 부분은 효모에 의한 발효 과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2월 출하분의 색(Y%)26.2%로 기준치에 적정하다고 판단됩니다.

번역을 해 놓고도 무슨 의미인지 도통 읽어낼 수 없었다. 몇 번을 다시 읽어 내려가며 내 방식대로 정리하고 이해해 보려 했다. 우선, 작업자는 수치를 높이거나 낮출 수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Y%)의 수치는 규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작업자는 규정되어 있는 색(Y%)의 수치를 높이거나 낮출 수 있게 된 것일까. 규정된 것을 높이거나 낮출 수는 있다. 그렇지만, 높이는 것을 규정될 수는 없다. 낮추는 것도 규정될 수 없다. 반면, 높이는 것을 규정할 수는 있다. 낮추는 것도 규정할 수 있다. 나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아까와는 다른 심장 소리를 오래도록 들었다.

(Y%)은 왜 스스로 규정하지 않고 규정되기만 할까. 어째서 제 뜻과 상관없이 높아지고 낮아지는데 잠자코 있기만 할까. 타동사 때문이라고 납득은 하면서도 뭐랄까, 갑갑한 느낌을 견디다 못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머지 부분을 번역하고 있을 때 하품 소리를 듣고 말았다. 엄마가 현관문을 여는 바람에 그만 아빠가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켰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4시가 되어 있었다. 나의 온 신경이 자꾸만 바깥으로 쏠렸다. 아직 일이 남았는데 집중력도 흐트러졌다. 나는 다시금 자동사의 영역으로 내쫓겼다. 늘 그렇듯이 타동사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아빠가 전화기에 대고 귀청이 따갑도록 목청을 높였다. 그기 아이라 카이, 현장에 반장님 없능교? 그라믄 내가 내일 확인해 볼게예, 그라게심더. 통화를 마친 뒤에는 본인의 타동사를 과시하고 싶은지 엄마를 찾았다. 여보야 여서 일하는 젊은 아들 어뜬 줄 아나, 아침에 내 가면 눈만 껌뻑껌뻑하고 있는 기라, 반장도 내 없으믄 일이 안 된다 카더라. 억센 사투리로 된 아빠의 말은 절반도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매사에 둔감하고 무딘 점이 주어들의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아빠는 대수롭잖은 일로 작업반 동료들을 들이받고, 집에 돌아와선 그걸 또 자랑삼아 떠벌리고, 자기 방식만 고집하는 데다 나이를 먹을수록 남의 말도 거의 안 들었다. 저러다 꼭 말을 함부로 하니까 오래 못 붙어 있는 거라고, 엄마도 가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주어는 타동사로 목적어를 괴롭힌다. 그러나 아주 가끔 형세가 뒤집힌다. 타동사를 많이 가진 쪽은 무조건 주어 자리를 차지한다. 타동사를 적게 가진 쪽은 끝내 다 잃고 목적어 자리로 내몰린다. 일자리를 전전한다는 건 아빠의 타동사도 의외로 별 볼 일 없다는 뜻으로 풀이되었다. 자꾸만 입가가 실룩거리고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해가 저물고 화장실이 급해서 안달하던 차에 엄마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코 골고 취침함. 내일 근무임. 엄마도 곧 취침. 가스레인지 위에 알탕 있음. 나는 우선 화장실을 다녀온 뒤 창가 블라인드를 끝까지 걷어 올렸다.

망설이다 노트북 단자에서 이어폰을 빼고 고막이 찢어지도록 볼륨을 높였다. 금속성 록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기도, 몸부림치듯 온몸으로 리듬을 타기도 했다. 나중엔 기지개를 쭉 켜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내일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정리해 봤다.

수요일

현관 타일 바닥에다 딱딱 발뒤축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큰기침도 한바탕 터지는가 싶더니 현관문이 안전하게 닫혔다. 발소리 때문에 계단이 울렸지만 곧 잦아들었다. 시동이 켜지면서 밤새 얼어 있었을 경유차 엔진이 탈탈거렸다. 마모된 브레이크 라이닝 소음도 차츰 멀어졌다.

나는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방문을 활짝 열었다. 티브이를 켜고 낄낄 웃음을 터뜨리다 가죽 소파를 쓰다듬으며 햇빛 속에서의 자맥질을 즐겼다. 그러다 문득 아주 작은 인기척을 느끼곤 주의 깊게 우리 집 전체를 둘러봤다.

3층에는 내 방이 있고,

중앙으로 거실과, 여러 살림살이와, 부엌이 있고,

현관부터, 안방과, 화장실과, 여동생 방이 붙어 있다.

2층에는 월세로 내놓은 빈 방과, 50대 남성 세입자가 있다.

1층에는 40대 남성 세입자와, 60대 남성 세입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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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동생이 지금 제 방에 틀어박혀 있는 듯했다. 그릇과 접시를 꺼내려고 찬장을 여는 순간, 급히 침묵이 만들어지는 걸 보고 알아차렸다.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라 아빠가 있는 날에도 수없이 되풀이되었다. 밤늦게 내가 전기밥솥을 열고 밥 한술을 떠먹거나, 흔적을 지우려고 잽싸게 설거지를 할 때, 화장실 변기에 앉아 힘을 줄 때면 동생 방은 수상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내가 알기로 동생은 평생 목적어 자리에만 머물러 있었다.

한때 나는 월급을 받으면 어깨를 으쓱하며 동생에게 용돈을 줬다. 그러면서 공무원 시험 준비는 잘 하고 있는지, 노량진에 보내 준다는데 왜 싫다고만 하는지 등을 빼놓지 않고 물었다. 아무리 물어도 자동사밖에 돌아오지 않으니까 나는 종종 동생 방 앞에서 귀를 대고 엿들었다.

잘못 들었길 바랐지만 동생은 의지박약 탓인지 책상 앞에는 붙어 있지 않고 늘 빈둥거리기만 했다. 바닥에 늘어지거나 쿠션 또는 인형에 파묻혀 있었고, 내가 퇴근해서 돌아올 시간이면 게임이나 유튜브에 빠져 지냈다. 결국 공부는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해야 하는 거라고 꾸짖고 말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회사 내에서 목적어 자리로 밀려났다.

요새도 아빠가 없는 날이면 엿듣기 위해 동생 방 앞으로 갔다. 하지만 이제는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그냥 못 들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동생이 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생은 돈을 못 버니까 큰소리를 못 냈다. 나 또한 용돈을 못 주니까 큰소리를 못 냈다. 주는 것은 타동사이다. 나로서는 역시 번역 일을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뜨거운 물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었다. 시간을 들여 면도를 한 다음엔 온몸에 로션을 살뜰히 발랐다. 흰색 와이셔츠 단추를 채우고 칼라를 빳빳하게 세우며 아까부터 내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 엄마가 현관문을 열더니 백시멘트 포대를 안으로 끌어당겼다. 이어서 백색 가루를 한 바가지 덜어 놋쇠대야에 넣고 물을 부어 개기 시작했다.

"2층에 내려가 보니까 천장에 금이 갔나 봐. 곰팡이가 시퍼런 게 아주 엉망이더라. 엄마는 가서 시멘트 좀 바르고 올게. 시끄럽겠지만, 대못을 쳐서 천장을 좀 부술지도 몰라."

나는 손 소독제를 손에 받아 비비면서 넌지시 물었다.

"도와줘?"

"아아냐, 네가 무슨."



엄마는 어렵사리 꺼낸 나의 타동사를 단숨에 두 동강 내버렸다. 타동사는 바닥에 떨어지면서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고 흩어졌다. 손쉬운 소일거리조차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현관 앞의 운동화와 슬리퍼도, 거실 건조대 위의 빨래도, 욕실 수납장 속 수건과 속옷도, 변기 옆 두루마리 화장지도, 음지 또는 양지에 있는 화분도 이미 엄마에 의해 질서가 잡혀 있었다.

엄마는 밖에서 발디딤용 나무 의자랑 흙손이랑 쇠망치 등을 챙겨 왔다. 방이 오랫동안 놀아서 그저께는 손수 찌든 때도 벗겨냈다. 하루하루 그렇게 2층에 세입자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부터 층간소음 문제가 걱정되었다. 그럼에도 세입자는 내게도 도움이 되었다.

월세를 받으면 엄마는 큰소리를 낼 수 있다. 게다가 엄마는 법적으로 우리 집을 가지고 있다. 받는 것도, 가지는 것도 타동사이다. 아빠는 돈을 벌어오기만 할 뿐, 집을 가지지는 못했다. 두 개의 타동사는 한 개의 타동사보다 큰소리를 낼 수 있다. 머지않아 나의 타동사까지 보태면 도합 세 개가 된다.

엄마는 가급적 혼자 사는 남자를 세입자로 들였다. 한집에 둘 이상을 들일 경우 내 신경이 곤두선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부부싸움이라도 벌이면 내 머릿속에는 집집마다 주어 자리를 놓고 다투는 광경이 그려졌다.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만 엄마와 아빠도 처음에는 집주인과 세입자로 만났다.

당시 나는 유치원생이나 겨우 됐을까, 물론 이따위 문법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았다. 전세 계약이 끝나고 아빠를 내가 사는 3층에 들인 결정에 대해선 어찌되었든 조금이나마 이해가 됐다.

가뜩이나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됐을 텐데, 어린 목적어 둘을 건사하겠다고 애쓰던 장면 장면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사실혼 관계를 고집했다. 아빠와의 사이에서 새로운 목적어를 낳지도 않았다. 그렇게 자기만의 원칙에 따라 타동사를 지키고 있었다.

엄마는 내려갈 채비를 거의 끝내고 내 쪽을 힐끔 보더니 미소와 울음을 동시에 머금은 채 말했다.

"마주쳐도 그냥…… 그냥, 무시해버려."

"어어, 알았어."

귀가 번쩍 뜨여서 잠시 머뭇거렸다. 당장 내 방으로 아니면 화장실로 내빼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런 대화가 동생 방에서도 들릴 것 같았다. 내가 목적어라는 사실을 엄마도 알고 아빠도 분명 알 테고 이제는 동생 귀에도 들어가고 말았다. 엄마는 입을 삐죽이며 작정한 듯 말을 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

"알았어, 알았어."

"요즘은 엄마도 할 말 다 해."

", 알았으니까…… 알았어."

내 가슴 한쪽이 우그러들었지만 일부러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차근차근 타동사를 모으는 중이라고,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중이라고, 제발 부탁이니 알아서 해결하게 좀 내버려 두라고, 말대꾸하고 싶었지만 그냥 그러지 않았다. 타동사를 하나도 갖고 있지 않으니까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엄마는 타동사를 하나 갖고 있으니까 끈질기게 덧붙일 수 있었다.

"여긴 아빠 집도 아닌데, ."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래."

가만히 서 있는데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엄마에게서 놓여나자마자 내 방으로 돌아와 차가운 방바닥에 퍼더앉았다. 잠시 뒤 현관문이 열리고 엄마가 계단을 내려갔다. 다시 한 번 현관문이 열리고 이번엔 동생이 우당탕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도저히 계단을 내려갈 수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면 사회생활 당시처럼 주어들과 부딪치고 만다. 내려가는 건 마찬가지로 타동사이다. 타동사는 발산의 성질을 띠고 있어서 또 다른

주어들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 주어들과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두려워진다. 그런데 나와 같은 처지의 동생은 대체 어떻게 계단을 내려간 걸까. 엄마는 내가 소리 때문에 내려가지 못한다고 어느 정도 맞게 짚어 냈다.

하루는 아빠가 없을 때 나를 거실로 내보내고 계란판처럼 생긴 차음재와 스펀지 같은 흡음재를 가져왔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동안 엄마는 방음 장치를 내 방 벽과 문에 설치해 주었다. 달라진 내 방 앞에서 좀처럼 입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또 그냥 있을 수만은 없어서 고맙다고 멋쩍게 속삭였다.

엄마는 난생처음으로 내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쩔쩔맸다. 고마워한다는 건 어찌됐든 타동사이다. 타동사는 아무리 의도가 선하다 한들 반드시 목적어를 괴롭힌다.

나는 잠깐이지만 주어 자리에서 어떤 식으로든 엄마를 괴롭힌 셈이다. 요즘도 엄마가 번역 열심히 하라고 응원을 해줄 때, 월세를 받아서 일본어 원서를 사줄 때, 결과물에 깊은 관심을 가져줄 때면 고마워해야 하는데 오히려 두려워졌다.

나는 엄마를 괴롭혀서 조금이나마 얻은 타동사로 몸을 일으켰다. 쥐어짜듯 방문을 닫고 노트북을 열었다. 노트북이 열리자마자 웹 브라우저를 열었다. 웹 브라우저가 열리자마자 포털사이트를 열었다. 포털사이트가 열리자마자 메일함을 열었다.

메일함이 열리자마자 의뢰인 메일을 열었다. 다른 의뢰인 메일도 열었다. 더 이상 고마워하지도 두려워지지도 않을 때까지 의뢰인 메일을 죄 열어 보다 첨부 문서 여럿 가운데 하나를 열었다. 파일명은 '일본 고용법'으로 대충대충 훑어보다 잠시 손을 놓았고, 다시 페이지를 쭉쭉 넘기다 시선을 끄는 조항을 골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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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장 정년퇴직 및 해고

(정년 등)

38

직원의 정년은 만 65세로 하고 정년에 이른 날이 속하는 달의 말일을 가지고 은퇴한다.

(퇴직)

39

전 조항(38)에서 정하는 것 외에, 직원이 다음 중 하나에 해당하는 때에는 퇴직한다.

퇴직을 청원 회사에서 승인된 때 또는 퇴직 원을 제출하고 14일이 경과한 때.

기간을 정하여 고용되는 경우 그 기간이 만료된 때.

사망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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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넘기려다 말고 정년퇴직에 관한 조항을 한 번 더 읽었다. 혹시나 해서 아빠의 나이를 따져 봤지만 아무리 하여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대략 예순에서 예순둘 사이로 어림잡았는데, 다 떠나서 아빠는 오늘 당장 퇴직할지도 몰랐다. 아빠는 하루걸러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을 내려가면 무수히 많은 주어들과 부딪친다. 처음에는 싸워 이길지 몰라도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두려워진다. 법적 구속력을 지닌, 그 거대한 타동사 앞에서는 다들 납작 엎드린다. 아빠는 돈을 벌어오지 못하게 되는 순간, 그나마 하나 있던 타동사마저 잃게 된다.

그러면 나랑 동생처럼 목적어 자리로 밀려난다. 이 순간을 얼마나 오래 기다렸나 싶으면서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천장만 올려다봤다. 아무리 엄마의 타동사라 할지라도 나와 동생과 그리고 아빠까지 건사할 수는 없었다. 몸부림치며 미쳐 날뛸 것만 같은 기분을 죽을힘을 다해 억눌렀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나서 다시 마우스를 이리저리 놀려 보았다.

관련 정보를 죄 열어 보는 동안 나도 모르게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소액 결제로 논문 몇 편과 기사 몇 토막을 받아 열었더니, 하나같이 우리나라 정년퇴직 기준은 만 60세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아아, 앓는 소리를 내며 방문을 확 열어젖히고 번역 중이던 문서를 닫았다.

문서가 닫히자마자 메일을 닫았다. 메일이 닫히자마자 메일함을 닫았다. 메일함이 닫히자마자 포털 사이트를 닫았다. 포털 사이트가 닫히자마자 웹 브라우저를 닫았다. 웹 브라우저가 닫히자마자 노트북을 닫았다. 너무 많이 열고 닫았더니 타동사가 바닥났다.

어지러워져서 침대에 누웠다. 눈앞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눈이 저절로 감겼다. 온몸이 차가워지고 오슬오슬 떨렸다. 몇 푼 안 되는 타동사를 모으는 족족 이렇게 다 써버릴 셈이야? 그러면 하나든 둘이든 커다란 타동사는 결코 거머쥐지 못할 거야. 결코 거머쥐지 못할 거야. 거머쥐지 못할 거야. 못할 거야. 못해. 못해. 못해. 못해. 못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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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기 아이라 카이.

. . . . . 여보야 요새 젊은 아들.

. . . . . . . . . . .

. . . . 어뜬 줄 아나? . . .

. . . . . . . . . . .

현장에 반장님 없능교? . . . . .

. 반장도 내 없으믄. . . . . .

. . . . . . . . . 일이

안 된다 카더라. . . . 그라믄 내가.

. . . . . . . . . . .

. . . . . . 내일 확인해 볼게

. . . . . . . 아침에 내 가면

눈만. . . . . . . . . .

. . . . . 껌뻑껌뻑하고 있는 기라.

. . . . . . . . . . .

. . . 그라게심더. . . 빨리 잠 좀

자라고. . . . . 아아냐, 네가 무슨.

. . . 마주쳐도 그냥 무시해버려. .

. . . . . . . . . . .

. . 배고플 텐데 어서 밥부터 먹어. .

. . .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

. . . . . . . . . . .

. . . 아아냐, 네가 무슨. . . .

. . . 요즘은 엄마도 할 말 다 해. .

. . . . . . . . . . .

. . . 아아냐, 네가 무슨. . . 여긴

아빠 집도 아닌데 뭐. . . . . . .

. . . . . . . . . . 2층에

금이 갔나 봐. . . . . . . . .

대못을 쳐서. . . . . . . . .

. . . . . . . 천장을. . .

. . . . 아아냐, 네가 무슨. . . .

. 부술지도 몰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책장 못. . . .

. . . 책장 서랍장 못. . .

. . 책장 조명 방문 못. .

. 책장 공기청정기 라디에이터 못.

. . 침대 나 의자 책상 못. .

. . . 옷걸이 노트북 못. . .

. . . . 블라인드 못.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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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못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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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이 밤새 울린 탓에 목부터 어깻죽지까지 결렸다. 옆집은 아침부터 공사를 하려는지 자재를 연신 옥상으로 나르기도 하고 괄괄한 목소리로 한바탕 웃기도 했다. 반면 여기 집안에서는 어쩐 일인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미 나를 괴롭히고도 남았을 아빠 차가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을 때 냉장고 여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아빠가 지금 내 방에다 귀를 대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문손잡이에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나는 방에 꼼짝없이 갇혀 있으면서 계속 안절부절못했다. 방광이 터질 것만 같아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방바닥에 누웠다가 꿇어앉았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일어났다. 그때 방문이 꼭 안 닫혀 있었는지 바람결에 홱 열렸다.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뒤에 있던 의자에 걸려 넘어졌다. 엄마가 현관문을 닫다 말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저런, 안 다쳤니?"

"."

햇살이 현관과 거실을 지나 내 방을 잠깐 기웃거렸다. 아빠의 신발이나 청색 작업복은 다행히 보이지 않았고, 대신 둘둘 말린 하얀색 벽지와 신문지만 눈에 들어왔다.

"배고프지? 어서 와 밥 먹어."

"."

엄마는 내게 아침 식사를 차려 주고, 냄비에 밀가루 풀을 쑤기 시작했다.

"내일은 하루 휴가 신청했다고 사람들이랑 술 마신대. 오늘은 거기 기숙사에서 잘 거고."

비로소 입맛이 돌고 밥이 목에 넘어갔다. 아빠가 없어지니까 아빠의 타동사도 사라졌다. 이제 1층부터 3층까지 우리 집은 엄마의 타동사가 차지했다.

"글쎄, 집에 사람들을 끌고 온다는데, 미쳤어? 안 된다고 했지."

"어어, 근데 옆집은 방수 공사하나 보네."

"? 아 그러게. 강판으로 옥상을 덮을 건가 봐. 남자 여럿이 엄청 낑낑대네. 그러고 보면 엄마는 여자 혼자서 참 대단하지?"

엄마는 부엌 창으로 옆집을 힐끔거리며 신나게 주걱을 저었다. 집안에서 다른 주어와 부딪칠 일 없으니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다시 입맛이 달아나고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식탁에서 일어나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가 슬그머니 화장실로 들어갔다.

넋이 나간 채로 변기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다리가 저려 오는 것도 한참 만에 느껴졌다. 그때 톱니바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분명 동생 방 문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방문이 빠끔히 열리고 믿기지 않았지만 동생이 방에서 나왔다. 잠이 덜 깬 듯한 느려 터진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아직도, 뭐가, 남았어?"

". 엄마는 내려가서 도배 좀 하고 올게."

동생의 하품이 길게 이어졌다.

"엄마아, 그걸, 혼자서, 다 하려고?"

한다는 건 타동사이므로 순식간에 나를 찌르고 들어왔다. 동생이 갑자기 주어로 느껴지고 화장실에 숨어 있는데도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엄마는 바로 전 동생의 말을 받았다.

"그럼, 혼자 하지."

"그래도……"

"아니야.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조용히 해."

타동사가 한 번 더 나를 찌르고 들어왔다. 이 와중에도 나는 누가 화장실 문을 열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바로 어제 두 동강 나버린 나의 타동사도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엄마는 방문을 닫으면서 동생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추우니까 나갈 때 따뜻하게 입어. 오후에 아르바이트 마치면 꼭 전화하고."

귀가 한순간에 뜨이면서 이제야 머리가 돌아가는 듯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다. 돈을 벌면 큰소리를 낼 수 있다. 버는 것은 타동사이다.

큰소리를 낼 줄 알면 처음 얼마 동안은 두려워지지 않는다. 계단을 내려갈 때도 나를 깎아내릴 때도 두려워지지 않는다. 동생도 곧 내게 용돈을 주는 건 아닐까, 공무원 시험은 아예 때려치운 걸까, 아니면 아르바이트와 병행하는 걸까,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됐지만 조금 뒤엔 전부 부질없는 짓으로 여겨졌다.

맥이 풀린 채로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여닫히고 엄마가 계단을 내려갔다. 곧이어 또 현관문이 여닫히고 동생이 계단을 내려갔다. 두 번 모두 발소리 때문에 계단이 울렸지만 곧 사라졌다. 엄마가 없어지니까 엄마의 타동사도 사라졌다.

동생이 없어지니까 동생의 타동사 역시 사라졌다. 타동사가 남김없이 사라지자 나는 더 이상 목적어가 아니었고, 물론 여전히 주어는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닌 나는 그럼에도 있었다. 문장 밖에 있었고 문법 너머에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갑자기 밖에서 타동사가 집안을 흔들어 댔다. 옆집에서 언성을 높여가며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집은 계속해서 흔들리고 나는 다시 문법에 사로잡히면서 문장 속 목적어 자리로 떨어졌다. 처음에는 공사 도중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싶었는데, 어쩐지 그쪽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울려오는 듯했다.

작은 부엌 창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환풍기 파이프를 타고 소리가 들어왔다. 엄마는 계단을 내려갔기 때문에 옆집 주어와 부딪치고 말았다.

"저기 아주머니, 내 집에다 덮개도 맘대로 못 씌워요?"

엄마도 스스로 주어라는 걸 알고, 똑 부러지게 따지고 들었다.

"여기 좀 보세요. 배수관 구멍을 우리 집 쪽으로 내시면 안 되죠."

"아니, 여기가 아주머니 댁이에요? ? 아주머니 댁이냐고요."

"물이 우리 집 보일러실로 떨어지잖아요. 저러면 또 곰팡이 슬 텐데, 우리는 어떡해요."

"어디요, , 보일러실이요?"

"."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아주머니네 담벼락 끝에만 스칠까 말까구만."

"……"

옆집 주어가 엄마의 타동사를 두 동강 냈는지 더 이상 소리가 이어지지 않았다. 서 있지 못할 만큼 숨이 가빠지고 피가 마르더니 팔다리는 따로 놀았다. 높이는 것을 규정될 수는 없다. 낮추는 것도 규정될 수 없다. 반면, 높이는 것을 규정할 수는 있다. 낮추는 것도 규정할 수 있다.

나는 규정할 수 있다고 소리 내어 읊조려 봤다. 덕분에 전에 없던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몸이 커 보이게 황급히 항공 점퍼를 찾아 걸치고 현관문을 있는 힘껏 밀었다. 설마 말싸움이 몸싸움으로 번진 건 아니겠지. 옆집 주어가 엄마를 목적어로 만든 건 아니겠지.

갔는데 타동사가 날아오면 어떻게 맞받아치지. 그때 황소바람이 창문을 요란하게 뒤흔들었다. 어찌 손쓸 새 없이 현관문도 재빨리 닫아 버렸다. 다시 현관문을 열면 되는데,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목이 잠겨서 이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타동사도 없이 갔다가 우스운 꼴만 될 것 같았다. 당장 계단조차 내려갈 수가 없었다. 마침 거실 전화기가 눈에 들어왔다. 경찰, 경찰밖에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와 동시에 계단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조금씩 커지고 가까워졌다. 그림자 하나가 창가에 어른거렸다. 얼굴에 피가 몰리고 똥줄이 타들어 가고 있을 때 뜻밖에도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휴, 사람들이 왜 그러냐."

엄마는 질렸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다행히 어디 잘못된 데도 없어 보였다.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어물거렸다.

"뭐가 우리 집 쪽으로 넘어온 거지?"

". 말이 안 통해서 잠깐 기다려 보시라 하고, 아빠한테 전화했네.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고, 아빠가 설명하니까 그제야 알겠다더라."

우두커니 서 있는데 느닷없이 오금이 저려 왔다. 옆집 주어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아빠는 생각보다 훨씬 커다란 타동사를 갖고 있었다. 타동사 단 하나로 옆집 주어를 단숨에, 그것도 전화 한 통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덤빌 테면 덤벼 보라고 실은 나를 두고 비아냥거리는 듯했다.

엄마는 속이 다 후련한지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했다. 월세를 받으면 엄마는 지금보다 큰소리를 낼 수 있다. 법적으로는 이미 우리 집도 가지고 있다. 받는 것도, 가지는 것도 타동사이다. 아빠는 돈을 벌어올 뿐만 아니라 실은 집도 잘 지킨다.

도합 네 개의 타동사는 당연히 큰소리를 낼 수 있다. 아빠는 돈을 못 벌어오게 되어도 집은 꾸준히 잘 지킬 것이다. 도합 세 개의 타동사는 여전히 큰소리를 낼 수 있다.

동생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곧 월급도 받을 것이다. 나만 떨어져 나왔구나 싶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고마워했다. 아빠에게 고마워할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하고 또 고마워해서 차라리 펑펑 소리 내어 울고 싶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고마워했다.

금요일

보스턴백을 어깨에 메고 현관문을 천천히 열었다. 구둣주걱을 사용해서 운동화를 신고 밖을 내다보았다. 조용히 현관문을 닫으며 시리도록 청량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밤새 내린 비로 대리석 특유의 냄새와 촉촉한 부엽토 냄새가 올라왔다.

파르스름한 가로등 불빛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몇 계단 아래에 떨어져 있는 신문을 집어 베란다 위에 올려놓았다. 간밤에 유명인이 자살했다는 기사를 힐끗 본 뒤 걸음을 재촉했다. 이렇게 꾸물거리고 있다간 아빠와 마주칠지도 몰랐다.

내게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달은 뒤로 진지하게 고민해 봤다. 집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를 밤새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평생 목적어로 사느니 사라지기로 마음먹었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생각보다 발걸음이 쉽게 떨어져서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대문을 열고 집 앞 언덕을 내려가며 발소리를 크게도 작게도 내보았다.

낯선 동네라 조금 걱정했지만 다행히 제대로 찾아왔다. 간판 끄트머리에 맺힌 빗물이 똑똑 떨어지는 걸 보았다. 여기 단층짜리 직업소개소 앞에는 빈 승합차 한 대만 세워져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물기가 없는 장의자 위에 짐을 내려놓았다. 더러워져도 상관없는 낡은 청바지를 입고 오길 잘한 것 같았다. 물을 마시고 잔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새하얀 입김이 차가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 패기 있게 타동사를 연습해 보았다.

"일은 아무거나…… 다시, 아아, 몸 쓰는 일은 뭐든 자신 있습니다. 장점은 큰 목소리입니다. 여기서 멀리…… 아니, 기숙사 생활도 괜찮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금쯤이면 아빠가 주차를 하고 계단을 올라왔을 것이다. 엄마도 동생도 이제 막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이러한 일상으로 미루어 앞으로 일어날 일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소리가 크면 반드시 목적어를 괴롭힌다. 타동사는 발산의 성질을 띠고 있어서 소리가 크다. 따라서 타동사는 반드시 목적어를 괴롭힌다. 하지만 목적어가 사라지면 괴롭히지 못한다. 괴롭히지 못하면 타동사는 기능을 상실한다. 타동사가 기능을 상실하면 결국 주어도 기능을 상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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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소감>


   "언어로 할 수 있는 실험 정신 지켜 나가겠다"

이 소설을 쓰고 있을 때로 기억한다. 우연히 찍힌 내 사진에서 작중 주인공의 얼굴을 보았다. 웃고는 있었지만 서글픈 눈을 감추지 못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 표정을.

작중 주인공이 되어 생활하는 동안 '절망'이라는 단어가 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수백 번 문장을 읽고 나면 꿈에서까지 같은 괴로움에 시달려야 했고, 그러다 가끔은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기도 했다.

"나가라고, 나가라고" 외치던 그의 잠꼬대가 요즘도 귓가를 맴도는 듯하다. 일기장을 들여다보면 당시 그가 내 손을 빌려 채운 글로 빼곡하다.

"외국어로 된, 그러니까 나 혼자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떠드는 기분이 어떤 건 줄 아세요?"

예술 작품을 즐길 때는 얼마만큼 작가가 투영되어 있는지 눈여겨보곤 한다. 작중 인물과 작가가 일치할수록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나는 현재 몇 가지 이야기를 구상 중이고 또 어떤 건 쓰고 있다. 아직 역량이 부족해서, 때가 되지 않아서, 생각의 정리가 필요해서 머릿속에 묵혀둔 이야기도 어서 꺼낼 날을 기다려 본다.

모두가 좋아하는 글, 읽었을 때 남들이 안심하는 글, 탕아가 돌아오는 글은 앞으로도 쓸 생각이 없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언어로 할 수 있는 실험 정신을 지켜 나가겠다.

늦었지만 심사위원 선생님께, 경인일보 관계자 분들, 나를 오래도록 지켜봐 온 사람들, 그리고 '타동사 연습'을 끝까지 읽어준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 -.


 

  <심사평>


  "재미있는 비유로 세태 풀어나간 발상 신선"


"재미있는 비유를 통해 지금의 세태를 풀어나간 발상이 신선하다."

2019 신춘문예 소설부문은 그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했다. 예년보다 편수가 많았던 탓도 있지만, 읽을만한 소설의 구조를 갖춘 작품들이 많아 심사위원들의 고민이 깊었다.

당선작인 '타동사 연습'은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에서 심사위원에게 신선함을 안겼다.

소설은 나이가 들어도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수동적인 인생을 사는 젊은 세대의 단상을 주제 삼아 그럴 수 밖에 없는 그들의 모습을 이해하면서도 비판적 시각 또한 겸비했다는 평가다.

무엇보다 세태를 풍자하는 방식의 새로움을 높게 평가받았다. 주인공인 자기 자신이 타동사의 목적어로서만 기능했다는 점을 인지하고,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고 살 길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타동사로 비유하면서 힘있게 풀어나갔다.

소설 부문 심사를 맡은 홍정선 심사위원(평론가)"소설이란 것이 모두 아는 이야기가 주제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써나가는 방식의 차이로 다른 평가를 받는데, 그런 면에서 현 세태를 풀어가는 방식이 독창적이었다"고 평가했다.

타동사 연습과 함께 최종 후보작으로 경쟁했던 '총부리''불편한 골짜기'는 제법 소설다운 모습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얻었지만 주제가 진부하다는 평가도 이어졌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의 잔인한 폭력성을 주제로 다룬 총부리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힘과 재미가 있지만,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소설가 특유의 도그마가 눈에 띄어 호불호가 가릴 수 있다고 평가받았다.

인공지능 로봇과 첫사랑을 주제로 한 불편한 골짜기의 경우 플롯은 색다른 맛이 있지만, 파편적으로 흩어진 이야기가 하나의 주제로 모이지 않으면서 소설이 주는 정서적 의미가 미약했다고 평가했다.

이번 심사를 마친 심사위원들은 소설가의 진정성을 강조했다.

정과리 심사위원(평론가·연세대 교수)"많은 작품들이 세상의 이야기를 쓰고 있지만 주관적 시각이 강하고, 이야기의 범위가 ''에 한정됐다""소설은 어디까지나 더불어 사는 세상의 이야기다. 경험의 폭을 넓히고 시야를 넓게 가지는 연습을 통해 보편적 의미를 끌어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심사위원 : 홍정선, 정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