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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끌쟁이 / 정성우

 

출근하자마자 사장에게 진열대가 비었다는 짤막한 문자를 받았다. 샘플용 원단을 잘라 놓으라는 지시였다.

원단은 저마다의 음색을 갖고 있다. 굵고 드문드문한 옥스퍼드는 ''을 질기고 차지게 연발하다가 끝을 뭉개고, 얇고 촘촘한 모스린은 ''이 무르게 늘어지다가 떠버린다. 자수 박힌 자가드는 ''이 얼마 안 가 ''을 업은 무게를 못 버텨 추락하고, 울퉁불퉁한 린넨은 반 토막 ''''이 덮쳐누른다. 결이 비스듬한 트윌은 옅어지는 ''''이 물고 끝까지 놓지 않는다.

먼저 자가드 두루마리를 재단용 롤러 위에 얹었다. 오른쪽 모서리를 잡고 오른팔을 힘껏 뻗었다. 관성이 작용해 팔보다 길게 풀렸다. 아래쪽 테두리에 자를 댄다. 왼손 엄지로 90cm 지점을 책상에 누르고 왼쪽 가장자리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물린다. 고정부위를 맞당기고 녹슨 대가위를 벌려 팽팽한 자가드를 단숨에 가른다. 씨줄, 날줄 이만여 가닥이 가윗날에 베였다. 스극. 손톱만 한 나비에서 멎었다. 남은 한 뼘을 싹둑 잘랐다.

이어서 린넨, 트윌, 옥스퍼드를 차례로 잘랐다.

마지막으로 순백색 평직을 펼치고 귀를 쫑긋 세운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곡조가 깃들어 있는 듯하다. 날의 행로를 방해하는 어떠한 자수도, 실의 불거짐도 허락지 않은 순결한 재료. ''이 곧게 뻗다가 꼬리 없이 소멸한다.

이제 하나씩을 모두 열다섯 등분해 스테이플러로 찍을지 고민한다. 한 시간쯤 걸린다. 오전 중에 열두 곳을 다 돌려면 그럴 시간이 없다. 제때 원단 배달을 못 한다면 손님으로 득시글대는 복도로 내몰아 닦아세울 것이다. 샘플용 원단 한 묶음을 작두 손잡이에 걸쳐두었다. 푸른색 모스린과 주홍 줄무늬 옥스퍼드 한 절 원단을 말아놓은 단위(보통 한 절에 폭: 50inch 길이: 90m이다.)

씩을 포개어 왼 어깨에 얹었다.

1호 창고는 흥인지문 북서쪽 5리 길 고갯마루에 한 가닥 새치처럼 박혀 있었다. 시커먼 비탈은 발바닥에 팥알 모양 물집을 우글우글 볶아내곤 했다. 교복업체와 계약만 성사되면 창고를 광장시장 골목길로 옮기겠다던 객쩍은 소리를 철석같이 믿었다. 계약이 순조롭게 마무리 된 지 넉 달째다. 비탈길을 오를 때마다 거짓말쟁이 사장 험담을 씹어대기 바빴다. 중복 날엔 무릎을 깼었는데, 너덜너덜 찢긴 살점에서 흐른 피땀이 운동화 속 흰 깔창까지 벌겋게 적셨다. "원단은 상한데 없냐?" 부상당한 병사처럼 귀환한 날 보고 그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오십 마 원단을 펼쳐놓은 단위(보통 한 마에 폭: 50inch 길이: 90cm이다.)

짜리 주문에 한 마라도 더 잘라 보낸다면 악다구니를 된통 퍼붓는 자린고비니, 창고는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듯하다.

통나무 짊어진 노예 같은 형상이 중턱의 어느 간판 없는 점포 유리벽에 비쳤다. 어깻부들기가 욱신거려 원단을 잠시 내리려던 찰나에 뙤약볕이 동공을 정통으로 쑤셔 현기증이 핑 돌았다. 잇단 이명이 사그라질 즈음 위쪽 옥스퍼드 원단이 귓가를 쓱 긁었다. 허공에 뜬 정신을 퍼뜩 잡고 나슨한 팔뚝에 안간힘을 줘봤지만, 어깻죽지의 헐거운 감촉만 선명해질 뿐이었다. 돌아보니 옥스퍼드는 주홍색, 흰색 줄무늬를 물감처럼 뒤섞으며 굴렀다. 무턱대고 옥스퍼드를 쫓다가 모스린까지 놓칠 뻔했다. 연신 후들거리던 다리가 결국 꽈배기처럼 꼬였다. 흘러내리던 모스린을 가까스로 채고 쓰라린 무릎을 꿇은 채로 옥스퍼드의 질주를 멀거니 바라봤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평소보다 세 배의 힘이 발휘된다는 어느 기사가 떠올랐다. 이 상황이 생명에 견줄 만큼 급박하진 않았던지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어 날아가듯 훌쩍 뛰어 옥스퍼드를 잡아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잡다한 명세가 스키드마크처럼 그어졌다. 옥스퍼드 30만원, 한 달 월세 20만원, 옛날통닭 30마리, 돼지국밥 60그릇, 아침 대용 토스트 100, 박카스 350…… 고등학교 급식 값까지 거슬러 올라갈 때였다. 4.5t 화물트럭의 날파람에 잔머리 세 가닥이 흔뎅거렸다. 트럭이 지나간 대로변에 사장의 발그족족한 볼이 소름처럼 돋아나는 듯했다. 그의 악다구니에 딸려 나온 아침 반찬 냄새가 떠올라 욕지기가 올랐다.

초입을 가로지르는 리어카가 보였다. 얼핏 스무 절가량이 가분수처럼 쌓였는데, 한 절당 쌀 반 가마니에 육박할 걸 감안하면 바퀴가 구르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정신 팔린 틈에 원단은 어귀를 스쳤다. 뭉개진 원단에 곁들일만한 변명거리를 낚아채려 눈을 지려 감았다. .

눈 떠보니 옥스퍼드는 인도에서 짐꾼의 발밑에 폭 안겼다. 생침을 꿀떡 삼키는데 짐꾼, 아니 리어카꾼의 새된 목소리가 귓전에 박혔다.

"보고만 있을 거여?"

그는 누런 자욱이 찌든 희끄무레한 반소매 티셔츠에 감색 파자마 차림으로 슬리퍼 위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헐렁한 소매 밑으로 삭정이 같은 팔이 차들의 굉음에도 달싹였다. 나는 잰걸음 치다가 어깨가 아려 모스린을 가슴팍에 끌어안고 자춤자춤 내려갔다.

"조심혀, 젊은이가 그리 힘이 없어 쓰겄남."

"잠깐 어지럼증이 닥치는 바람에……."

"달걀도 후라이가 될 판이니 어지러울 만 허지."

그는 옥스퍼드를 내 가슴에 안기고 리어카 끌대로 쑥 들어가 손잡이를 잡고 땅을 힘껏 밟았다. 가슴통을 수그리자 바퀴가 서서히 돌았다. 그는 회전이 죽을세라 발을 제겨디뎠다. 거뭇한 팔꿈치에서 흰 뼈가 비어져 나올 듯했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들끓는 아스팔트를 꾸역꾸역 밟아갔다. 원단 더미 너머로 들썩이는 까칫한 어깨가 눈자위를 따갑도록 빨아들였다.

여섯 시, 작업복이 땀으로 흥건했다. 2호 창고는 종합상가 정문에서 종로를 가로질러 '태화한의원' 샛길을 쭉 따라 마흔 발짝쯤에 위치한 '삼미빌딩' 4층이었다. 평소 이곳에서 사장의 연락과 동시에 원단을 잘라 나를 수 있도록 대기한다. 5공 시절 지어졌다는 '삼미'는 계단 턱이 기울어 오르내리기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젖은 신발 밑창이 미끄덩 도망질을 놓기에 가까스로 난간을 채고 덴가슴을 쓸곤 했다. 퇴근 도장을 찍고 내려올 때면 긴장 풀린 넓적다리 열다섯 근육이 욱신욱신 놀뛰는 바람에 자춤발이가 된다.

1층은 주차장 겸 쉼터였다. 입구 옆 통로를 갈라 나지막이 솟은 벽돌 난간 언저리에 뒤집힌 안전모가 고동색 흙을 담고 있었다. 말보로 레드 두 개비를 연달아 빨고 꽁초를 흙에 쑤시고서야 뻐근한 척추 마디에서 새어 나온 뼈 소리가 마침표를 찍었다.

바로 앞, 동대문역은 혜화 사거리행 버스가 없어 종로5가역으로 허청허청 걸었다. 배달 중엔 경적 소리가 고막을 후려칠 때마다 애꿎은 이맛살을 찌그려댔지만, 퇴근길엔 남 일 같아서 느긋했다. 호객행위로 목이 쉰 싸구려 속옷 판매상, 파리채로 진열장 곳곳을 후비는 철물상, 갑오개혁 때 지어졌다는 남루한 약국을 지키는 늙수그레한 자손, 육수 열기를 머금어 볼이 발그레한 국수가게 아주머니…… 온통 종합시장 사방팔방에 들러붙은 껌딱지 같았다. 그들이 오랜 세월 끈질기게 버틴 끝에 거머쥔 것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균열 진 건물들이었다. 겉은 허름해도 중씰한 소상공인들은 뻑뻑한 문을 열고 나와 고급 외제차를 몰고 종로를 누빈다. 나 또한 그 부류에 끼고 싶어 이 바닥에 붙었다. 삭정이처럼 구드러지려 부질없는 욕심을 다시금 붙들어 맨다.

기어이 터져버린 물집에서 통증이 번져 올라 등줄기를 찔렀다. 마찰을 줄이기 위해 네댓 걸음마다 다리를 번갈아 절뚝였다.

5가 교차로에서 비롯된 체증 말미쯤이었다. 두 마모된 벽돌 건물 사이에 우뚝 솟은 미색 펜스가 제법 껄끄러운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번드르르한 외장재에 부착한 <유적 발굴> 출력물의 붉은 글씨가 난데없이 대범해 보인 탓이다. 십 년을 버텨온 베이커리의 자리였다. 천오백 원짜리 가격표에 눈을 박고 몇 분을 망설이곤 했다. 내 손에 피자 빵을 선뜻 쥐여줬던 붉은 앞치마 두른 아주머니는 어디로 간 걸까. 눈길을 살며시 거두다가 펜스 가장자리에 댄 리어카가 눈에 걸렸다. 까무잡잡한 얼굴이 기울은 짐칸에 걸터앉아 소주를 홀짝였다. 무심코 지나치다가 계면쩍은 느낌에 돌아봤더니 옥스퍼드를 세웠던 끌쟁이였다. 냉수 찜질이 굴뚝같았지만, 건성 공치사도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게 찜찜해 발길을 돌렸다. 그는 술에 정신이 팔려 날 면전에 두고도 입만 쩍쩍 다셨다.

"아저씨!"

그는 새우깡을 입구멍에 넣다가 눈을 홉떴다.

"누구?"

"감사하단 말도 못 드린 것 같아서요."

", 그 비실한 젊은이구먼."

그는 말끝에 눅눅한 종이컵에 든 소주를 젖혀 마셨다. 턱밑으로 소주 방울인지 땀방울인지가 뚝 떨어졌다. 그것은 희끄무레한 티셔츠에 얼룩 한 점을 덧대었다. 어스름에도 얼룩은 꽤 선명했다. 무턱대고 그의 옆을 훔쳤다. 그는 눈을 흘기더니 눅눅한 종이컵을 넌지시 건넸다.

"받어."

컵을 받아들자 그가 소주병을 기울였다. 그의 손등엔 정맥이 초가집 서까래처럼 불거져 맥을 이루고 있었다. 잔이 가득 차자 그는 한 손을 말아 쥐고 들이키는 시늉을 했다. 나는 고개를 젖혀 미적지근한 소주를 목구멍에 흘려보냈다. 혓바닥에 맴도는 쓴 기운을 털어내려 캭 신음을 내었다.

그는 내 손에서 잔을 채가더니 그대로 소주를 때려 붓고 들이켰다. 잔이 한 순배 돌자 술맛이 한껏 당겼다. 네댓 번 권커니 잣거니 하다 어느새 주변은 손에 잡힐 듯 아른거렸다. 꼭지 층에 남은 두 개의 조명 불 때문인지 종합상가는 도로의 차들과 인적이 잦아드는 골목을 야수는 하이에나 같았다. 시끌벅적한 대낮 풍경이 퇴색한 밤거리가 머금은 또 다른 생기에 취한 나머지 말이 한결 호기롭게 흘러나왔다.

"리어카 시작한 진 얼마나 됐죠?"

"그거이 왜 궁금혀."

그의 나지막한 음성을 따라 가느다란 눈빛이 꼬리를 물었다.

"그 많은 원단을 끌려면 보통 요령이 아니다 싶어서요."

"스물다섯부터 혔어. 한 사십 년 됐나?"

하루도 지긋지긋한 이곳에서 40년이나 붙박였단 것에 짐짓 숙연해져 마른침을 삼켰다.

"자네는 원단 두 절 이고도 낑낑거리는 걸 본께, 온지 별로 안 됐나벼?"

"1년 조금 넘었습니다."

"무릎 많이 깨겠구먼."

"……."

그의 말 때문인지 시큰거리는 느낌이 들어 왼쪽 무릎을 더듬었다. 그는 꾸물거리는 손에 대꾼한 눈을 겨누고는 덧붙였다.

"옛날에는 지금 불 꺼지는 집은 한 개도 없었어. 그때는 하나같이 다 약 빤 낯짝들이었지. 하루 종일 밥도 주먹 따까리만 한 거 집어 먹고 기계처럼 몸을 굴렸으니께. 샤스 공장에 가봤는감?"

"오늘도 원단 두 절 날랐습니다."

"자네가 알진 모르겠지만, 그곳은 생사의 고개였어. 여공들은 매일 스무 시간 재봉질로 가족의 밥그릇을 주근주근 담아냈지. 바늘 끝이 손마디를 꿰뚫어도 쉬지 못했어. 그 고개를 넘지 못허면 시궁창처럼 아득한 굶주림이 등 뒤서 아가리를 떡 벌리고 있으니께. 리어카 바퀴도 재봉틀 바퀴랑 매 한 가지여. 한 달 동안 뼈 빠지게 굴린 돈도 방값, 밥값, (버스), 뭐값에 다 날라갔지. 수금 날에 고개 돌리는 놈들만 없어도 좋았으련만."

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실소를 사리물고 소주병을 그러쥐었다.

"그냥 뒀나요?"

"그러면 어쩌겠나. 거기서 돈 달라고 배 까뒤집으면 까탈 부린다고 소문나서 내 리어카는 안 쓰는디. 더럽고, 치사해도 먹고살려면 굴려야지. 자네는 복 받은 거여."

명치서부터 바쳐 오른 신물이 목청을 살살 긁었다. 하루를 돌이켜봐도 복 받았다고 여겨지는 순간은 없었다. 살아온 세월을 내세워 거들먹거리는 건 일말의 변화도 틀어막아 버리는 억지에 불과하단 것을 사장의 지청구를 통해 무던히도 되뇌곤 했다. 푹 우리던 사골국물에 소태를 쏟아 마신 듯 혓바늘이 돋아 엉덩짝을 탁탁 털며 일어섰다.

"아침 일찍 출근해야 돼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려, 그려, 어여 가봐."

작별에 군소리가 묻어나지 않았다.

버스 창가 자리에 앉자마자 잠이 쏟아졌지만, 정신을 붙들었다. 곯아떨어지기라도 하면 집을 지나칠 게 뻔했다. 술에 취해 종점에서 허둥댔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혹여 잠들까봐 시릿한 유리창에 볼을 얌전히 붙였다. 시장 마감 시간이 훌쩍 넘어선지 도로는 한산했다. 세련된 체인점 간판 불만 다문다문 살아있었다.

아침부터 '삼미빌딩' 주차장엔 원단 두루마리가 통나무 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부천 공장에서 올라온 원단 열 절 모두 주문한 곳이 달랐다. 사장과 점심 교대를 제때 하려면 숨 돌릴 틈 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광장시장은 골목골목마다 미어터졌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다니느라 땀에 절어 따가운 눈을 비벼볼 겨를도 없었다. 마지막 주문지에서 가슴이 터져라 뛴 덕에 점심시간 삼분을 남기고 매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장은 팔짱을 끼고 샘플진열대 옆에 서 있었다. 얼굴이 변비라도 걸린 사람마냥 파리한 빛깔을 띠었다. 그는 내가 진열대를 짚고 등허리를 굽혀 날숨을 게워대느라 정신없는 중에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 한다고 전화를 안 받냐?"

휴대폰을 켜보니, 부재중 문자가 세 통이나 떠 있었다.

"아침 물량 나르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나 봅니다."

숨을 가다듬고 뒤통수를 긁적이며 목소리를 최대한 낮게 깔았다. 사실 벨소리를 들었지만, 일부러 꺼내 보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 추가 배달을 시킬 게 뻔했기 때문이다.

"내가 전화는 항시 받으라고 했냐, 안 했냐. 도둑놈 같은 지게꾼한테 돈을 얼마나 뜯겼는지는 아냐?"

"다음부턴 후딱후딱 받겠습니다. 가게는 제가 지킬 테니, 식사하고 오시죠."

"잘해!"

익숙한 상황이지만, 마주할 때마다 썩은 달걀 냄새를 맡은 듯 눈살이 죄 온다.

진열대에 다 담지 못한 샘플들은 매장 양 벽을 알록달록 장식했다. 샘플 컬렉션을 지나면 형형색색의 포목이 불규칙하게 따닥따닥 세워져 있었다. 더 지나면 미니 금고를 아래에 모셔둔 데스크가 나온다. 그곳은 사장석이었다. 푹신한 천연가죽 의자에 앉아 스테이플러로 찍은 노란 영수증을 넘겨봤다. 지게꾼 이용비는 만 원이었다. 코웃음이 씩 터졌다. 그들은 손님들로 복작대는 종합상가 층층을 쌀 두 가마니 정도 무게를 업고 다녔다. '부경직물'에 처음 들어왔을 때, 왜 상가마다 지게를 두지 않는지 퍽 궁금했다. 그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종합시장엔 일손이 모자란 매장을 위해 지게꾼 네 명을 층마다 두었다. 그 이상 두지 않은 것은 수입의 형평성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수요가 공급보다 월등히 많았기에 이문은 쏠쏠하게 남는 편이었다. 그래선지 공석이 나면 천만 원의 권리금이 붙을 정도로 자리다툼이 치열하단다. 하지만 지게꾼을 한 번이라도 마주친다면 수입이 갑절로 늘어난다 해도 선뜻 자리를 꿰차고 싶진 않을 것이다. 나 같은 직원들이 한쪽 어깨만으로 원단을 포신처럼 이고 다니는 것엔 나름의 노하우가 녹아 있는 터였다. 내내 붐비는 사람들 틈새를 헤집고 다니려면 지게꾼처럼 가로 드는 게 비효율적일뿐더러 어깨끈보다 원단의 표면적이 더 넓기 때문에 어깨에 무리도 덜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단거리 달리기 선수와 장거리 선수 간의 차이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지게꾼은 자율적이면서 행동반경이 종합상가로 한정적이기 때문에 많은 양을 운반한 뒤, 담배 한 개비 정도 물 여유는 있었다. 광장시장 전체를 쏘다니는 우리에게 지게는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어쨌거나 원단 네댓 절을 허리가 접질릴 것처럼 지고 다니며 이따금 예민한 손님과 부딪혀 실랑이를 벌이곤 하는 그들에게 지불하는 값이 과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지게비 만 원에도 벌벌 떨지만, 필드를 한 번 밟는데 드는 수십만 원은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 사장은 두 시간이 지나서야 이쑤시개로 잇바디를 긁으며 나타났다.

"밥 먹고 와. 씁씁."

점심때가 지나선지 장꾼들로 득시글대던 먹자골목도 휘적거리며 걸을 만큼 여유로웠다. 교대가 늦었기에 추가 물량을 제때 옮기려면 끼니를 단출히 때워야 했다. 메뉴는 두말없이 김밥이었다. 잰걸음으로 골목 끝자락 분식집에 들어가 구석에 자리했다. 손님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던지 테이블은 온통 양념 묻은 냅킨들이 라면 국물이 말라가는 흰 사발 주변에서 선풍기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나뒹굴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사이에도 배가 고파 냉수를 연거푸 들이켜다 사레가 들려 눈물이 핑 돌았다. 깜빡임에 터진 물방울이 햇살을 휘황하게 빨아 당겼다. 낯익은 뒷모습이 빛줄기 사이로 어렴풋이 드러났다. 냅킨으로 눈을 비벼보니 지난밤의 끌쟁이가 창가 자리에서 젓가락질을 바삐 했다. 괜히 그를 아는 체하기 싫어 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내가 김밥 두 줄을 다 먹을 때까지 잔 트림을 게워댔다. 음식값을 치르려 카운터에 서서 주머니를 뒤졌다. 그런데 웬걸 지갑이 닿아야 할 손가락에 실밥만 엉기는 것이다. 수금용 명세서를 꺼낸다고 매장 데스크에 올려둔 듯했다. 아주머니에게 외상을 부탁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통사정을 단념하고 사장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만 원짜리가 허리춤에서 스리슬쩍 기어 나왔다. 구김이 가 있었고 검댕이 거미줄처럼 번져있었다.

"이걸로 같이 혀요."

볼품없어도 돈은 돈이었다. 아주머니는 그것을 덥석 받아 계산대에 눌러 담았다.

"감사합니다."

"바빴나벼."

"……조금."

"가서 일 봐."

끌쟁이는 식당을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쏟아지는 주문에 맞춰 원단을 가위질하느라 정신없는 틈에도 겸연쩍은 마음이 좀체 가시지 않았다.

퇴근길이었다. 양말이 온통 터진 물집에서 비어져 나온 진물로 질벅거렸다. 그러나 걸음은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았다. 물집 껍데기가 속살을 문대는 통증이 왠지 받아 마땅하다고 느껴진 터였다. 그가 베푼 호의에서 온 부채감 때문만이 아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업무 중 사장의 성마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지저분한 만 원짜리가 눈 앞에 펼쳐졌다. 나는 흰 벽이 아스라이 드러날 때부터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어김없이 리어카가 펜스 앞에 덩그마니 대어져 있었다. 말을 먼저 붙이려 쭈뼛이 다가서자 끌쟁이는 이미 인기척을 느낀 눈치였다.

"자넨가?"

"여기가 좋으신가 봐요?"

"아무렴."

그는 흐르는 말을 담듯 소주병을 물고 꿀떡였다. 그의 목젖이 아래위로 놀뛰는 사이 빈자리에 살며시 앉았다. 그는 병을 비우고서도 무신경하게 손등으로 입술만 문질렀다.

"리어카는 왜 끄세요?"

"왜 끌기는 먹고 살려고 그르제."

"언제까지 하려구요?"

"몰러!"

제법 신경질적인 언성이었다.

"자넨 언제까지 이 바닥에 있을라구?"

그와 같은 답이 생각나는 게 멋쩍어 입꼬리만 지그시 올렸다.

"나라고 지금까지 이러고 있을 줄 알았겠남."

"……."

"나도 첨엔 자네처럼 원단 가게 막내로 이 바닥에 나앉았어. 고향 집 홀애비한테 깡촌에서 논매기 싫담스 큰소리 뻥뻥 치고 빈손으로 올라와 다이마루 면 소재의 원단.

가게에 붙어먹었지. 돈이 없응께 창고에 숨어 자고 그렸어. 자네도 알겄지만, 창고에 먼지가 참 많어. 원단이 굴러먹음서 붙들고 온 먼지가루가 허공에 날라다니고 그렸으니께. 아침마다 먼지 먹어 쓰린 명치를 꾹꾹 누르는 거이 예사였지. 그려도 방세 낼 걱정 없이 일만 허니께, 돈은 모이드라고. 한 이 년 버팅기니께 자연히 노량진에 사글셋방 얻을 보증금도 생기드만. 명세서를 하루 이틀 디벼 본 거이 아니니께 끌쟁이들 수입이 솔찮단 건 내 진즉에 알고 있었어. 여윳돈 모이자마자 리어카를 사버렸지. 근디 직접 해보니께 보는 것 허고는 천지 차이드만. 집채만 한 원단뭉텅이 끌멘서 골병만 들고 돈은 안 모여. 떼먹히지 않으면 다행이었지."

"그런 리어카를 지금까지 왜 끄신 거죠?"

"여자 때문이지."

그는 말을 툭 잘라버리고 새 소주병 뚜껑을 끽끽 돌려 한 모금 마신 뒤 이어갔다.

"점심때마다 샤스 공장 앞에 그네가 있었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동료들하고 김밥 한 줄 노놔먹음서 복숭아껍질처럼 발그레한 볼이 오물오물 허는 게 을매나 이쁘던지. 그 골목을 주구장창 밟아댔지. 원단을 스무 절, 서른 절씩 쌓고도 말이여. 미쳤지. 십분 남짓 비추는 그 얼굴을 볼려고. 그네는 일이 엄청나게 바빴나벼. 가슴팍을 조막만한 주먹으로 툭툭 두들김서 김밥을 허겁지겁 삼켜쌌는디. 안간힘을 써대느라 눈에 핏대가 서는 내가 봐도 안쓰럽드라고. 하루는 약국에서 박카스 세 병을 사다가 동료들하고 노놔먹으라고 그네 손에 쥐어줬어. 그거 주면 하루를 꼬박 굶어야 되는디. 손사래를 쳐대서 얼렁뚱땅 넘기고 냅다 튀었지. 다음날에 그 앞을 지나는디 그네가 먼저 김밥 한 줄을 손에 쥐여주드라고. 박카스, 커피, 보리차, 날 병이 차차 늘어났지."

그는 여인의 얘기가 시작되고부터 입가에 꽃봉오리 같은 활기를 머금었다.

"지금 그분과 함께인가요?"

"죽었어……."

그는 또다시 소주병을 젖혀 마셨다.

"어느 날은 검지에 검은 천 쪼가리를 칭칭 감았드라고. 손을 자꾸 허리춤으로 쭈뼛쭈뼛 숨기는디. 꽉 막힌 속에 잿물이라도 한바가지 밀어 넣고 싶은 맴이었어. 집 가는 길이라도 편히 해줘야겠다 싶어서 리어카에다 그네를 앉혔어. 웃드라고. 진즉에 태워 줬어야 하는 건디. 집 가는 길은 몸이 들쑤시기 십상인디, 그날은 내가 리어카를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드라고. 근디 싸락눈이 떨어졌어. 눈만 보면 뻐꾸기처럼 재잘대던 그네가 쥐죽은 듯 조용혔어. 돌아봤더니 그네가 입 막은 손에서 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는디. 한밤중에 문 연 병원도 없고 해서 일단 집으로 끌고 갔지. 날 밝는 대로 집에 꿍쳐놓은 돈 털어 병원에 끌고 갔어. 결핵이라드만. 재봉틀 위에서 풀풀 날리던 먼지가 폐를 좀먹은 것이지. 입원해야 된다고 허는디, 돈을 탈탈 털어도 그 돈이 안 나와. 그래서 그째까지 수금 못 한 것들 받아 낼려고 종합시장 이집 저집 쑤시고 봤어. 쌍놈 새끼덜 힘들 때는 사정사정함시롱 나중에 돈 준다고 빌어쌓다가, 나 힘들 때는 모르는 사람이여. 손발에 불이 나게 돌아다니고 비벼 댔는디, 젠장할, 달랑 한 집만 주드라고. 일단 그거라도 쥐고 가서 링거라도 놔줄라 혔어. 근디…… 뱃속에 애가 들앉았다드라고. 눈앞이 비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 그래서 살려달라고 빌었어. 하늘에 있는 것들한테는 다 빌었어. 부처님, 예수님, 하느님, 조상님. 썩을 코빼기도 안 비드만."

소주병은 쇠말뚝처럼 그의 입에 단단히 박혀 뽑힐성싶지 않았다. 소주가 꿀꺽꿀꺽 흐르는 소리가 끊긴 지 한참이 돼서야 그는 혀끝으로 병 입구를 날름 훑고 빈 병을 엉덩이 옆에 툭 놓았다.

"젊은이, 이제 난 가봐야겠구먼."

나는 뒤통수에 각목이라도 후려 맞은 듯 엉거주춤 일어서서 5가 역까지 늘어선 가로등을 멀거니 바라봤다. 끌쟁이는 담황빛이 어룽진 인도에 발 도장을 서걱서걱 찍어갔다.

토요일이라 추가 생산량이 없어 매장에서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다. 가게들은 디자이너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샘플 진열대를 설치하고, 원단을 자르느라 분주했다. 오전 매장 업무는 주문에 맞춰 원단을 일정량만큼 잘라 손님이 오면 곧바로 찾아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었다.

준비가 끝나고 사장이 고용비를 허투루 날린다고 여기지 않도록, 이미 외운 샘플 책자를 애써 되작거렸다. 꾸벅꾸벅하던 이마가 종이에 서너 번 닿을 때였다. "어이, 왔는가?" 사장의 목소리에 놀라 입술에 는질는질 매달린 침 줄기를 잽싸게 훔쳤다. 우중충한 그의 목소리가 실로폰이라도 삼킨 듯 경쾌하다면 교복업체 주임이나 이 바닥에서 부경사와 어깨를 나란히 한 '대림사' 늙은이가 방문한 것이다. 흘김에도 천장에서 내리찍는 백광이 눈알에 부시도록 박히는 거로 봐선 '대림사' 쪽이었다. 그는 평소의 후줄근한 차림새와 달리 새까만 정장을 차려입고 입구를 넘어왔다.

희멀건 정수리가 조명을 보탠 만큼 사장의 허풍도 풍성스러워졌다. 한창때는 한겨울에 버려진 원단을 청계천 빙판 구멍에서 뜬 물로 빨아서 팔았다느니, 여자 손님을 꼬여 수백 수천 절을 떠들쳐 보냈다느니 하는 영웅담이 한바탕 나도는 사이 목덜미를 옥죄던 사장의 눈초리에서 잠시 풀려날 수 있었다. 민머리에 핏기가 불그스름하게 오를 만큼 낭자하던 웃음소리가 구멍 뚫린 풍선처럼 누그러들자 귀가 쫑긋 섰다.

대머리 사장이 미국에 이민을 간다는 것이었다. 동대문 원단 시장은 그 소용돌이 같던 IMF 사태도 이렇다 할 흠집 하나 못 낸 천해 요새였다. 경기가 어려워도 옷은 사 입어야 하는 만큼 의류 소비가 크게 줄어들지도 않거니와 국내산 원단은 모두 이 바닥에서 나온다는 소문이 돌만큼 규모가 워낙 거대했기에 매출이 깎인다고 해도 적자는 면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런 노다지를 그것도 창고를 여럿 거느릴 정도로 옹골진 사업을 팽개치고 떠난다는 것이 의아하면서도, 그것을 외면할 정도의 여유를 가진 것에 짐짓 배알이 꼴리기도 했다. 마치 헤어지는 이산가족처럼 맞잡은 손을 쓰다듬던 사장은 끌끌 차대던 혀를 바로잡았다.

"떠나기 전에 술이나 한잔하지."

"그럽시다."

둘의 대화가 끝나자, 의례적인 인사라도 바치려 엉덩이를 뗐다.

바로 떠날 줄 알았던 대머리 사장은 진열대 좌측에 궁둥짝을 걸쳤다.

"여기서 일 한지 얼마나 됐지?"

"6개월 조금 넘었습니다."

그가 제법 긴말을 덧붙이려는지 팔짱을 지르던 참이었다. 복도 왼편에서 나타난 지게꾼이 푸른색 모스린 원단 끄트머리로 그의 등짝을 비껴 치고 종종걸음 쳐 사라졌다. 하마터면 그의 정수리가 내 명치를 찌를 뻔했다. 다행히도 그가 허리 뒤쪽으로 손을 잽싸게 허우적거린 덕에 가까스로 바닥과의 키스는 면할 수 있었다. 그는 지게꾼이 숨어버린 손님들 틈새를 흘겨보고는 덧붙였다.

"이 일 계속할 거냐?"

"."

"그래. 물고기도 많은 곳에서 낚아야 잘 낚이는 법이야. 그러니까 너도 다른 것 할 생각 말고, 여기서 오랫동안 일 배워. 어쭙잖은 길에 들어섰다가는 저 지게꾼이나 길바닥 리어카꾼처럼 평생 허리 못 펴는 수가 있어."

벽에 기대어 이를 조망하던 사장이 흐뭇한 미소를 흘렸다.

대머리 사장이 동대문 바닥을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1호 창고와 2호 창고의 중간지점에서 소나기를 만나 개점 전인 삼겹살집 처마 밑에서 비가 멎기를 기다렸다. 먹구름이 짧아 빗줄기가 그리 오래가지 않을 듯해 젖은 운동화 한 짝을 벗어 바닥에 탁탁 털었다. 그러다 지지 비비 하는 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어렴풋이 들려왔다. 주변을 살펴보니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아스팔트 흰 선의 야트막한 균열 틈에 한쪽 날개가 붙은 채 나머지 날개를 떨어 재끼고 있었다. 그 발버둥은 굵직한 빗발에 얼마 안 가 너누룩이 잦아들었다.

소나기는 예상대로 처마를 한 뼘 벗어나 비를 맞던 요강만 한 재떨이용 화분을 반도 채우지 못하고 그쳤다. 먹구름에 숨었던 해가 턱을 드러내자 젖은 길의 퀴퀴한 냄새가 빛줄기를 붙들고 늘어졌다. 오후 배달이 급해 후덥지근한 공기에 짓물러가던 양달로 나섰다. 채 물기를 털지 못했던지 걸을 때마다 운동화가 찔꺽거렸다.

경동 화물센터를 지나 '삼미빌딩' 골목에 들어서자 '우성사'의 새 간판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원래는 '대림사'의 창고였지만, 대머리 사장이 출국하기 전날 기존 간판을 허물고 새 간판으로 달았다. 그런데 간판만 바뀌었지 건물 주차장까지 비어져 나온 것은 '대림사'의 원단 그대로였다.

'우성사'에 가까워질수록 앙칼진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한 블록쯤 전부터 보속을 줄여 걷던 참에 낯익은 풍채가 원단에 한 발을 얹고 다부진 어깨에게 종잇장을 짚어가며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쏘아대고 있었다. 종잇장을 쥔 사람은 다름 아닌 끌쟁이였다.

"여기, 이렇게 증거가 있는디, 왜 돈을 안 준단 말이여!"

다부진 어깨는 오른손 검지로 귓구멍을 후비면서 입을 뗐다.

"그게 내가 쓴 것이여?!"

그는 한마디로 일축하더니 끌쟁이가 종이 쥔 손을 귀 후비던 손으로 탁 쳤다. 포개놓았던 종이가 석 장으로 나뉘어 둘 사이에 부나비처럼 나풀대다가 갑자기 불어 닥친 미풍을 탔다. 끌쟁이가 두 장은 가까스로 챘지만, 바람을 꽤 잘 탄 나머지 한 장 때문에 옆 건물까지 뛰어갔다. 다행인진 모르겠지만 연신 날리던 낱장은 우묵하게 비가 고인 곳에 빠져 그의 손에 낚였다. 그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종이를 어깨에게 들고 가 얼굴에 힘껏 던졌다. 종이는 터진 풍선껌처럼 어깨의 입 주변에 펴지다가 턱 끝까지 훑으며 떨어졌다. 어깨는 손등으로 입술을 쓱 닦고, 입술을 빤 침을 원단에 칵 뱉더니 끌쟁이의 매무새를 틀어쥐었다. 끌쟁이는 그에 아랑곳없이 되쏘았다.

"자그마치 삼십 만원이여! 삼십 만원! 원단 서른 절 옮긴 값이라구!"

"나는 모르는 일이야! 거기 적힌 것을 똑똑히 보라고, 지금 간판하고 뭣이 다른지."

어깨는 틀어쥔 그대로 끌쟁이의 가슴팍을 밀어젖혔다. 끌쟁이는 끝까지 넘어지지 않으려고 허공에다 대고 팔을 허우적거렸지만, 소용없었다. 시멘트 바닥에 제법 둔탁한 소리를 내며 퍼더버린 그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끙끙 신음을 흘렸다. 어깨는 아직도 화가 덜 풀렸던지 상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발길질을 놓았다. 나는 일이 이렇게까지 불거질 줄 모르기도 했고, 이름은 바뀌었어도 가깝게 지내던 원단가게의 일에 끼어들면 입장이 난처해질 것 같아 주차장 귀퉁이에서 숨죽이고 있던 참이었는데, 날 선 구둣발을 보니 뭔가 느꺼운 마음이 들어 어깨의 발길질을 막아섰다. 한창 퍼붓던 찰나여서 허벅지에 한 방 먹었다. 날카롭게 맞았던지 넓적다리가 욱신거렸다.

"이제 그만하시죠."

"뭔데 끼어들어?"

"주변에서 보면 장사하는 데 좋지 못할 겁니다."

어깨는 한숨을 한 움큼 내뱉고는 자신의 매무새를 잡고 힘껏 폈다.

"어이 할배, 오늘 운 좋은 줄 알어."

어깨가 사라지고도 끌쟁이는 한참을 퍼질러 앉아 숨을 골랐다. 패자는 말이 없다. 그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애석하게도 머릿속에 자꾸 맴돌았다. 왠지 패자라는 낙인을 떠안기기 싫어 말을 붙이려 해도 도저히 입이 안 떨어졌다. 그가 패자라는 게 싫은 건지, 패자는 침묵해야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에게 말을 붙이면 안 된다는 느낌에 끈덕지게도 입을 떼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는 엉덩이를 탁탁 털며 일어섰다.

"젊은이, 고맙네, 이제 가서 일 봐."

"횡단보도까지만 부축할게요."

"아니여. 혼자 가고 싶어서 그려."

끝내 외면하는 그의 관자놀이를 보니 미국을 유랑하며 반짝이고 있을 대머리가 불쑥 떠올랐다. 끌쟁이는 자신의 리어카로 비틀대며 걸어갔다. 그냥 보내기 언짢아 그의 겨드랑에 오른손을 슥 밀어 넣어봤지만, 그가 밀쳐내며 말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어. 그니께 괜찮어."

그의 한마디에 오른손은 무너지듯 찰기 없이 빠졌다.




  <당선소감>


   "어머니에게 바치는 첫 증명이자 선물"

당선 소식을 듣고 시커멓게 멍든 손이 먼저 떠올랐다. 인대가 끊어져 욱신거리는 신음을 삼켜가며 공장에서 일주일간 타이어를 날랐던 손이었다. 그 손엔 고등학생 딸, 중학생 아들의 입과 아파트 담보 대출 빚,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 버거운 운명이 도사리고 있었다. 냉면 사발에 우유를 가득 따라 벌컥벌컥 마시고 "칼슘이라 먹으면 낫는다"며 안개 같은 희망을 처절하게도 붙들었던 손은 인대접합수술을 받고 병실에 누웠다. 운명을 끈질기게 부인하던 손은 붕대로 뒤덮였다. 처음 그 모습을 봤을 때, 화장실 개수대에 얼굴을 처박고 터져 나오는 눈물을 녹였다. 내가 걸음마도 떼기 전부터 다닌 회사의 사직 통보와 빚의 반도 안 되는 퇴직금만 남은 어머니가 가족을 지탱할 힘이 없다고 여겼다. 가정이 해체된 아이로 살아가며 넘어야할 세상의 눈초리와 위압을 미리 겁냈던 게 괴란쩍었다. "어떻게든 안 되긋나"며 오렌지 주스를 덥석 쥐여주던 따뜻한 손이 운명을 책임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도움을 얻으려 가난을 부풀려 말하며 수없이 빌던 손을 볼 때마다 내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했던 게 한심스러웠다. 힘든 걸 힘들다 말하고 싶을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진다. 일주일간 인대가 끊어진 고통을 참을 만큼 처절해 본 적 없었고, 자신을 갉아먹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세상밖에 남지 않았을 때, 눈웃음 지어 보일 만큼 의연해질 자신이 없다. "내가 바보 멍치라서 너희들한테 해준 게 없다. 너무 미안하다"며 통화 마지막에 붙는 말을 이제 털어주고 싶다. 퇴원하자마자 비뚠 손가락으로 뜨거운 불판을 나르고 닦았던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가르쳐주었다. 제 삶은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자식한테 폐 끼치지 않을 거라며 돈 봉투를 건네도 손사래를 치는 당신이 내게 들이닥치는 장애물들을 가소롭게 여기도록 해주었다. 이는 글도 모르는 당신이 직접 키운 자식이 바치는 첫 증명이며 선물이다. 처연한 이들을 써왔으며 처연한 이들을 쓰는 손이 되겠다. 멋쩍어서 입 밖에 내기 꺼렸던 말을 남긴다.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할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꿋꿋하게 올라서는 모습을 앞서 보여주신 어머니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던 누나와 소중한 사람의 곁을 지켜주는 매형 감사합니다. 사려 깊은 성미, 매번 보약 같은 말을 해줬던 현호 고맙다. 소설 쓰는데 영감을 주신 모든 분께 감사한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어머니를 쓸 자격을 주신 심사위원,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그 밖에 도움 주신 분들께도 감사 인사 전합니다.



  ● 경남 양산 출생.

  ● 양산고 졸업.

  ● 서울디지털대 재학 중.

 


  <심사평>


  "신인다운 패기와 건강함 엿보여"


전국 각지에서 응모자들이 골고루 몰려들었다. 243편이었다. 선자가 지방지 신춘문예 심사위원을 20여 차례 위촉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왕성한 응모 현상은 처음으로 보고 겪었다.

응모작들의 소재와 주제가 매우 다양했다. 당대를 그대로 반영하듯 '미투', '애완동물', '요리' 등의 소재가 많이 등장했다. 그리고 예전에 비해, 노인을 소재나 주제로 하는 소설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는 점도 발견했다.

소설은 스토리이다. 하지만 스토리가 곧 소설은 아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우리 주변에서 벌어졌던 이야기(사건이나 현상)를 그대로 옮겨놓는다고 해서 소설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이란 작가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소설의 옷'을 다시 입혀야만 비로소 가치를 갖게 되는 법이다.

또 신춘문예 당선과 함께 등단을 꿈꾸는 예비 작가들은 단편소설의 특징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고 연구해보았으면 좋겠다. ·장편소설의 일부를 보는 것 같은 응모작이 의외로 많아서 드리는 조언이다. 신문사 사고(社告)에서 제시해 놓았던 응모 매수를 지키지 않은 응모자들도 많았다. 2백자 원고지 4십 내지 6십 매 분량이라든지, 2백 내지 3백 매(중편 분량)에 달하는 작품을 보낸 응모자들이 있었다.

응모작 총 243편 가운데 1차로 10(241)을 선정했다. 심사했던 순서에 따라 그 작품들을 소개하면, <고래 엄마>, <11월 어느 날>, <초상성축(初喪聖祝)>, <물푸레나무>, <그해 겨울 그림자>, <아란무늬 스웨터>, <통증들>, <두 개의 바다>, <끌쟁이>, <여행자>이다.

2차로 김세영의 <고래 엄마>, 정성우의 <끌쟁이>, 송현주의 <여행자>를 선정했다. 3편 모두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가 뛰어났고, 상당한 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선자가 이번 심사에서 가장 중시했던 것은 '문장력'이었다. 왜냐하면 소설(문학)"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3편 중에서 정성우의 <끌쟁이>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서사나 갈등이 부족하다는 점이 약간 아쉬웠으나,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문장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어휘력도 좋았다. 덧붙이자면, 신인다운 패기와 건강함이 엿보였고, 무엇보다 소설을 끌어가는 힘이 좋았다. 여기서 자만하지 않고 계속 정진하면 훨씬 좋은 작품을 생산할 수 있는 동량지재(棟梁之材)임이 확실해보였다.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 박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