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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병 속의 흙 / 권영갑

 

벚꽃잎 몇 개가 아내의 야윈 어깨 위에 떨어졌다. 마지막 숨결을 토해내듯 파르르 떨렸다. 아내의 약한 숨결이 화답했다. 솜사탕보다 부드러운 봄볕이 달콤한 내음을 풍기며 감돌았다. 아내의 몸에서 희미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아름다워요.”

아내가 꽃잎이 흩날리는 것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하얀 이가 벚꽃잎 같았다. 입술이 붉었다. 어디선가 남녘 바닷가에는 동백꽃잎도 뚝뚝 떨어지고 있으리라. 아내의 입에서 하얀 이가 하나 둘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화들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보니, 벚꽃잎이었다.

화장을 했네.”

아내의 입술에 내려앉은 꽃잎을 떼어 내면서 말했다.

루즈만 살짝 발랐는걸요, .”

예쁘다.”

새삼스럽게.....”

아내가 얼굴을 붉히면서 벚꽃잎이 흩날리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눈부시도록 푸른 하늘, 하얀 구름. 바람에 흔들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햇살과 초록빛 나뭇잎들. 그리고 아내의 붉은 입술과 향기로운 숨결. 소중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내의 눈에 살짝 눈물이 비치는 것 같았다. 나는 애써 모른척 했다.

추운데 그만 들어갈까?”

나는 아내가 앉아 있는 휠체어의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거기에도 벚꽃잎이 몇 장 떨어져서 가늘게 떨고 있었다. 생명의 마지막 떨림인가? 차마 땅으로 쓸어내리지 못하고 다른 곳에 손을 얹었다.

큰어머님 산소 이장이 내일이랬어요?”

아내가 시선을 내게로 옮기면서 물었다. 나는 아내의 휠체어를 병원 건물 쪽으로 밀면서 대답했다.

그래. 오늘 저녁 대구에 내려가려고.”

가서 내 자리도 좀 봐둬요. 좋은 자리로 골라 놓으라고요.”

아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자기가 죽어서 묻힐 자리를 살펴보라는 뜻이었다. 의사가 예고한 대로라면, 아내의 생명은 한 달 정도가 남았다. 지금 상태로 봐서는 그보다 더 짧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화가 났다.

그런 약한 소리하지 말라니까. 당신은 안죽어. 나하고 천년만년 같이 살 거야. 알았어?”

아내가 대답대신 내 손을 꼭 쥐었다. 뼈만 남은 아내의 앙상한 손은 온기가 없이 차가웠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고마워요.”

뭐가.”

나하고 천년만년 같이 살겠다고 말해줘서.”

그게 뭐 고마워할 일이야? 당연한 거지.”

그래도요.”

천년만년이 아니라 일억 년이래도 같이 살 거니까 딴 생각하지 말고 치료나 잘 받아.”

어쨌거나 내 묏자리 잡아 놓아요. 일억 년 같이 살 당신 묏자리랑. 알았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아내가 앉아 있는 휠체어를 조심스럽게 밀뿐이었다. 손잡이에 위태롭게 앉아 있던 벚꽃잎 몇 장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 또 조심.

아내는 병실에 들어갈 때까지 가볍게 콧노래를 불렀다. 꽃무늬가 수놓아진 예쁜 모자를 쓴 머리를 가볍게 흔들면서. 항암치료로 머리칼이 다 빠져버린 하얀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모자를 써서 가리듯이 죽음의 낙인을 가릴 포장은 정녕 없는 것인가?

아내는 2년 전 위암말기 판정을 받았다. 힘겹게 버티다

가 석 달 전 간으로 암이 전이 되었다는 진단과 함께 4개월의 시한부를 선고 받고 퇴원을 했다. 집에서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지내다가 죽음을 맞으라는 병원의 배려였다. 그러나 한 달 전 밀려오는 통증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해서 다시 입원을 했다. 집이나 병원이 모두 일산 신도시 내에 있어서 왕래가 편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들만 둘인데 첫째는 2년 전 학부를 마친 후 미국 유학을 떠났고, 둘째는 대학교 3학년. 첫째는 멀리서, 둘째는 가까이서 제 엄마의 병을 걱정하면서 부쩍 철이든 눈치였다. 오늘밤도 둘째가 병원에 와서 제 엄마 곁에서 밤을 보낼 것이다.

나는 집에서 혼자 커피를 끓여 마시며 잠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가 대충 짐을 꾸려서 길을 나섰다. 일산을 벗어나 자유로에 차를 올렸을 때, 시계가 5시를 가리켰다.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서 있는 벚나무들이 어김없이 꽃잎을 하얗게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아름다운 것은 착각일 뿐이고, 낙화의 본질은 죽음의 행렬이라고 몇번이고 되뇌었다. 어쩌면 낙화의 아름다움에 속지 않으려는 내 나름대로의 저항인지도 몰랐다.

자유로에서 강변북로로 넘어가서 한참을 달리다가 마포대교를 지난 후 좌측 원효로 방향으로 빠져나와서 효창공원 쪽으로 차를 몰았다. 대구에 가려면 강변북로를 계속 타고 가서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해야 했지만 중간에 들를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사도교용산센터는 효창공원 근처 5층상가 건물의 2층과 3층에 있었다. 2층은 소모임실 강의실 사무실, 3층은 대예배실 소예배실. 1층 출입구에 있는 디지털도어락에 카드키를 대자 삐-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를 괴롭히고 있던 삶과 죽음에 대한 온갖 불확실과 불신의 장막이 한꺼번에 확 걷히고 모든 것이 명명백백해지는 느낌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하루 종일 가슴이 두근거리던 것도 가라앉았다.

복도를 따라 좌우로 늘어서 있는 7개의 소모임실에서는 낮지만 간절한 기도소리가 새어나왔다. 수요일 저녁마다 있는 용산지파 소속 7개 분회의 기도모임이었다. 복도의 벽시계는 6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느라 30분이 늦었다. 내 마음 속의 갈등이 시간으로 환산된 분량이었다.

3번 소모임실의 문을 열었다. 분회장을 중심으로 10여명의 분회원이 모여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구석의 빈자리에 앉아서 잠시 숨을 고르며 기도를 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제야 누군가 눈을 뜨고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내와 자식, 직장까지 버리고 기도와 전도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마흔다섯 살의 윤계하였다. 그의 눈이 퀭했다. 고민의 티가 역력했다.

제 속의 아주 작은 의심도 털어내 버리고 싶습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 천년왕국을 누리고, 천국에서의 영생이 확실하다면 저는 어떤 경우에도 죽지 않아야 합니다. 높은데서 한번 뛰어내려볼까요? 아니면 독약을 먹어볼까요?“

지난 주 일요 집회를 마친 후 계하가 나에게 말했다. 평소 나를 형처럼 따르고 있어서 속내를 털어놓은 것이리라. 강한 확신을 바란다는 것은 그만큼 의심이 깊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내 고민을 들킨 것만 같아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디 가서 저녁이라도 먹으며 대화를 하고 싶다고 붙잡는 계하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듯이 센터를 벗어났었다.

나는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계하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지만그의고민에관심을기울이고싶지않았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 낼 수 있고 천년, 아니 그 이상,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로 가야하는 것이다.

뚜렷한 대안이 없는 한 확신을 갖고 제시한 해결책을 따르는 것이 현재의 불안을 잠재우는 최선의 방법이다. 설령 그것이 나중에 거짓으로 밝혀지는 한이 있더라도. 어쩌면 천년왕국과 영생에 대한 이 믿음은 미래의 삶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위해서 더 필요했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굳센 믿음을 달라고 신에게 간절히기도 했다. 그리고 나로 인해서 부모님과 아내, 두 아들이 천년왕국의 축복을 누리고 영생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고,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도를 끝내고 눈을 떴을 때 계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의 외면에 실망해서 자리를 떴을 것이다. 그리고 거리를 헤매면서 자신의 머릿속으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회의와 불신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불안과 좌절에 휩싸일 것이고, 그 역시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재영 선생, 나 좀 봅시다.”

기도회가 끝난 후 소모임실을 나가려는 나를 배찬석 분회장이 붙잡았다. 그는 최근에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기도에 매진하면서 천년왕국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제 144000명이 차면 천년왕국이 시작될 겁니다. 그러면 병환중에 계신 사모님께서도 영생의 몸을 입을 수 있으니 조금만 더 힘을 내시고 굳건한 믿음 유지하십시다.

분회장의 얼굴에 절박감이 깃든 간절함이 가득했다. 어쩌면 그도 시시각각 엄습하는 회의와 불신을 떨쳐내려고 그처럼 간절한 표정을 애써 짓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다! 거짓이다! 불가능하다! 외쳐대는 소리를 막기 위해 내면으로는 발버둥을 치고 있지는 않을까? 그가 측은해보였다.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 명심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겠습니다.”

센터를 나와서 차로 강변북로를 달려서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날 때 시계는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구의 부모님에게는 자정쯤 도착할거니까 먼저 주무시라고 전화를 했다. 대구 부모님 집 번호키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어서 혼자서 출입이가능했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여든셋의 아버지를 여든의 어머니가 수발을 들고 있었다. 형이든 나든 누군가는 부모님을 곧 모셔야 했다. 그러나 독신인 형이나, 아내가 투병 중인 나나 모두 부모님을 모실 형편이 되지 않았다. 아내가 건강할 때 부모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그래서 내가 천년왕국과 영원한 생명에 더 집착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부모님에게 영생의 삶보다 더 큰 선물은 없을 것이 기에.

하나님의 사도교는 정식명칭이 천년왕국하나님의 사도교인데, 기독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불교의 윤회설은 물론이고 주역이나 정감록 등의 동양 예언서도 인용하는 등 교리의 폭이 넓었다. 교주는 하나님의 사도라고 불리는 정백희라는 사람이었다. 10년 전 북한산 백운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예언이 적힌 책을 받아서 먹은 후 성경, 특히 요한계시록의 비밀을 모두 알게 되어 하나님의 사도교를 세운 것이라고 했다. 올해 60세인 정백희는 20세 이후 국내외를 떠돌며 유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까지 여러 종교를 섭렵한 후에 50세에 마침내 하나님을 만났다고 했다. 신도들은 그를 사도님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사도교의 핵심적인 교리는 성경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신자의 숫자인 144000명에 주목해서 하나님의 사도교 신자가 144000명이 되면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사도교 신자들은 모두 지구 곳곳에서 천년 동안 왕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의 부모 배우자 자식들까지 천년왕국의 백성으로 영화롭게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교주 정백희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이 시대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백희는 정감록에 기록된 예언의 인물인 정도령이며, 2000년 전 예수의 영이 임한 인물로서 이 시대의 유일한 사도인 그를 믿어야만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사도교 신자수가 12만 명에 달해, 24000 명만 더 채우면 예수의 영이 임한 정백희가 바로 예수로 환생하는 이적이 일어나면서 천년왕국이 시작된다고 했다.

부모님이 기독교 신자여서 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갔다. 아내도 교회에서 만났다. 그러나 믿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없었다. 교회에 나가는 것이 오래된 버릇이라고 표현하면 딱 들어맞았다. 그러다가 아내가 위암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보다 분명한 메시지가 간절해졌다. 그즈음 경영하던 출판사도 극심한 자금난으로 부도 위기에 몰려있어서 기적 구원 은혜 축복 같은 말들에 더욱 매달렸는지 몰랐다. 그러나 교회는 예배는 꼬박꼬박 드렸지만, 기적을 보여주지 않았고 천국도 미래의 일처럼 느끼게 했다. 당장 오늘의 기적과 영생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조바심이 나는 상황이었다.

아내가 암에 걸리자 무심코 지나쳤던 주변의 온갖 불행들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죽음이 그처럼 많이 내 주위에 널려 있는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물론 평소 한 달에 서너 번 상갓집에 문상을 갔었다. 그런데도 죽음을 그렇게 심각하게 의식하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아내의 암 투병 이후 죽음은 바로 나의 가장 절실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그러면서 죽음이 커다란 공포가 되어서 나를 짓눌러댔다. 고등학교 동창생 녀석이 뇌졸중으로 별안간 목숨을 잃었고, 거래처 사장이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하기도 했다. 죽음은 아내만 맞닥뜨린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도 현재 진행형임을 깨달았다.

그즈음 가깝게 지내는 출판사 사장의 권유로 하나님의 사도교의 교리공부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기독교의 다른 교파인줄 알았다. 성경을 기가 막히게 설명을 해서 눈이 번쩍 뜨였다. 특히 천년왕국을 성경적으로 풀이 하면서 곧 이뤄질 사건임을 확신하게 했다. 홍수에 휩쓸려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다가 누군가가 던져준 구명 밧줄을 붙잡은 느낌이었다. 하나님의 사도교는 그렇게 구원과 영생을 손에 분명하게 쥐어주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공부 모임의 강사가 나를 하나님의 사도교가 시온산이라고 부르는 북한산 근처의 대성전 집회에 데리고 갔다. 그리고 거기서 그 공부 모임의 정체가 하나님의 사도교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도교는 정통 기독교 교단에서 이단 사이비로 규정하고 신도들에게 미혹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나는 잠시 놀랐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내 스스로가 하나님의 사도교가 제시하는 천년왕국과 영생에 중독된 상태였다. 그것을 버렸다가는 금단증상으로 그 자리에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교주 정백희가 설교 시간에 사람을 쓰러지게 한다거나 절름발이를 일으켜 세워 걷게 하는 등의 이적을 눈앞에서 보여주어서 그에 대한 신뢰는 깊어갔다.

아내는 내가 하나님의 사도교 신자임을 밝혔을 때 크게 반발했었다. 그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워낙 깊숙하게 빠진 것을 알고는 나와 다투기보다는 나를 마귀의 소굴에서 건져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더 집중했다. 암 투병 중인 아내로서는 힘겨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곧 천년왕국이 이뤄지면 아내의 암이 치유되는 것은 물론 영생을 얻을 수 있으므로 현재의 고통과 갈등은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대구의 부모님이 내가 이단에 빠져 있는 것을 알면 충격이 클 테니 절대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래서 부모님께는 알리지 않았다. 천년왕국이 시작된 후에 알려도 늦지 않을 것이다. 내가 제대로 믿으면 부모님도 영생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곧 시작될 것이라던 천년왕국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리무중이었다. 내가 하나님의 사도교에 의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신도수가 3년 전부터 이미 144000명이 넘었다는 것을 최근에 알고 난 후부터였다. 하나님의 사도교는 전국을 12지파로 나누고, 각 지파에 3~7개의 센터를 두고 있었다. 각 지파의 지역별로 예배와 소모임을 하는 센터를 확장해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마가지파의 용산센터 제3분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급한 용무를 처리하려고 센터 행정실의 컴퓨터를 이용하다가 12지파별 신도수의 통계자료를 열어보게 되었다. 신도 수가 20만 명에 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144000명이 찰 때를 기다리자니. 내가 이런 사실을 분회장에게 털어놓았을 때 그가 하는 말이 뜻밖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144000명은 단순한 신도가 아니라 쭉정이를 가려낸 알곡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님께서 곧 거기에 대해서 설교를 하실 것입니다.“

나는 안도의 마음과 반발심이 절반씩 섞인 질문을 던졌다.

그 알곡과 쭉정이는 누가 가려냅니까?”

분회장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도님께서 현재까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알곡 144000명에 대한 말씀만 들으셨답니다. 하나님께서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는 방법도 곧 사도님께 알려준다고 하셨다니까 우리는 그저 기도하면서 기다려봅시다. 그래서 사도님께서도 아직 신도들에게 알곡과 쭉정이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믿음이 깊은 간부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쭉정이를 사도님께서 판단하시는 거군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죠.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불신은 저주의 다른 말이구요. 천년왕국이 눈앞에 와 있습니다. 세속에 물든 개신교와 천주교, 타락한 불교에는 하나님과 영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사도님을 따르는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의심을 버리고 담대히 나갑시다. 연로하신 부모님과 병환 중인 사모님께 새 생명을 선물하셔야죠.”

분회장이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는 의심이 또 다른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지만, 천년왕국과 영생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분회장의 그 같은 설득이 오히려 고마웠다.

사실 매스컴에서는 교주 정백희의 정체에 대한 폭로가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도교 교인들이 천년왕국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말씀 공부와 전도에 전념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는 것에 대한 사회의 걱정이었다. 특히 기독교 계통의 이단상담소는 정백희가 내세우는 교리들이 이전부터 있어온 기독교 이단들의 교리를 섞어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인 자료와 함께 제시했다. 그리고 정백희가 국내외에서 공부했다고 하는 학력이 대부분 허위이고, 주로 사이비 이단 종교를 전전해온 경력을 사진이나 문서 등을 제시하면서 폭로하였다. 인터넷에 검색을 하면 읽기에 벅찰 정도의 분량으로 폭로와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지도부에서는 모든 것이 허위이고 사탄의 마지막 발악이니 흔들리지 말고 더욱 열심을 내라고 신도들을 다독였다. 아예 인터넷은 거짓과 음란의 도구이니 금하라는 지시가 최근 지도부로부터 내려졌다.

천년왕국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했다. 그것이 무산되거나 거짓으로 드러날 경우의 허무와 절망이 두려웠다. 그래서 불쑥불쑥 솟구쳐 오르는 의혹과 불신을 그것 보다 더 강한 소망과 바램으로 꾹꾹 눌렀다.

운전을 하는 내내 천년왕국과 영생 불사를 외치는 정백희의 설교테이프를 크게 틀어놓았다. 하늘에서 땅으로 수많은 별빛이 마치 벚꽃잎이 떨어지듯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름다웠지만 그것은 허상일 뿐이다. 어떤 별빛도 별 그 자체 보다 나을 수는 없다. 나는 가속페달을 세게 밟았다. 별빛의 거짓된 유혹에서 벗어나 진정한 별의 세계로 가고야말겠다는 듯이. 천년왕국과 영생의 세계로 향해 달려가듯이.

동대구IC를 나와서 안심중학교 근처에 있는 부모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 무렵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당에 서있는 두 그루의 벚나무에서 떨어진 꽃잎들이 바닥에 눈처럼 하얗게 깔려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무수한 별빛이 다투어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어깨에 내려앉은 벚꽃잎 몇 개를 털어내고 현관문을 조용히 열었다.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동작을 멈추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머니의 기도 소리는 낮았지만 힘이 있었다.

우리 내외가 행복하고 아름답게 죽는 모습을 재영이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래서 이 땅에서 죽지 않고 천년을 왕 노릇하며 살겠다는 미련한 욕심에서 벗어 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나는 충격으로 그 자리에서 휘청거렸다. 인기척을 느낀 어머니가 기도를 중단했다.

재영이니?”

. 접니다. 안 주무셨어요?”

늙으면 잠이 없는 법이다. 피곤하겠구나. 씻고 자거라. 네 아버지는 주무신다.”

어머니가 현관으로 걸어 나오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기도를 듣지 않은 척했고, 어머니도 나의 천년왕국신앙에 대해서 여전히 모른척했다.

다음날 아침 청송으로 떠나기전 아버지가 중풍으로 뒤틀린 입술을 움직여 힘겹게 말씀하셨다.

다른 분들은 돌아가신 지가 오래돼 별 탈이 없을 것이 다만 형수님은 돌아가신 지가 겨우25년이라 육탈이 덜됐을까 봐 걱정이다. 어찌 됐든 집안 어른들과 잘 상의해서 이장을 하거라.”

아버지도 끝내 내가 하나님의 사도교를 믿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다음 말씀으로 내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대신 하셨다.

가거든 내가 묻힐 자리의 흙을 한 줌 병에 넣어가지고 오너라. 미리 좀 친해지게. 안 죽고 백년이고 천년이고 살까봐 그게 제일 겁이 난다.”

나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이장을 하고 난 후 부모님에게 하나님의 사도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장을 하게 된 것은 청송 현서면 수락리 과목골의 산소가 성덕댐 건설로 인해서 사방으로 물이 차 접근이 어려워서였다. 증조부모님과 조부모님, 그리고 큰어머니의 산소 등 모두 5기였다.

큰어머니는 스무 살에 과부가 되셨다. 결혼한 지 2년이 되던해 에 6.25전쟁이 터져서 군에 있던 큰아버지가 전사한 것이었다. 장교였던 큰아버지는 결혼 후에도 전방부대에서 근무했는데 큰어머니는 남편이 아닌 시부모와 같이 대구에서 살다가 제대로 된 결혼 생활도 못해보고 과부가 되고 말았다.

큰어머니는 스물세 살 때 큰 화상을 입어서 온몸이 크게 일그러졌다. 특히 얼굴의 화상이 심해서 보기 흉했다. 식당을 했던 아버지는 큰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큰어머니는 흉측한 얼굴 때문에 홀에는 못나가고 주로 주방에서 일했는데 어쩐 일인지 미각까지 잃어서 요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설거지 등의 잡일만 했다.

자식이 없었던 큰어머니는 늘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서 큰아버지를 만나는 것이 소원이었다. 쉰일곱 살에 간암판정을 받고 2년간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한 후에 소원대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큰어머님이 만약 육탈이 되지 않았다면 큰일이다. 시신을 수습해서 화장장에 가서 화장을 하거나, 육탈이 될 때까지 몇 년을 더기다렸다가 이장을 해야 하는데 어느 것도 쉽지 않네.”

아침에 부산에서 산소로 곧바로 와있던 재철 형이 내게 목장갑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제 형수님만 남았는데 아무래도 육탈이 안됐을 것 같구나. 물이라도 차 있으면 큰일이다.”

집안의 유사를 맡고 있는 당숙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른 아침부터 인부 5명이 작업을 시작해서 증조부모님과 조부모님의 유골은 이미 수습을 한 상태였다. 산소에 모신지 70년이 다 돼가는 증조부모님은 뼈조차 흙이 되어서 무덤안의 흙을 한 삽씩 퍼 담았고, 50년이 지난 조부모님은 작은 뼈 몇 조각을 수습할 수 있었다.

마침내 큰어머니의 산소가 파헤쳐졌다. 나무관은 썩었지만 시신의 두툼한 부피는 그대로였다. 지켜보던 친척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인부들이 조심스럽게 시신 주변의 흙을 파헤쳤다. 다행히 흙은 말라있었다. 삭아가는 천 조각들을 걷어냈을 때 하얀 뼈들이 드러났다. 완벽하게 육탈이 된 모습이었다. 처음에 두툼해 보였던 것은 완전히 썩지 않은 수의가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기 하나 없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형수님이 복이 참 많으신 분이구나.”

당숙이 보물이라도 발견한 양 큰어머니의 하얀 두개골을 비닐봉지에 담으며 말했다. 나 역시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얗게 드러난 뼈에는 큰어머니를 평생 힘들게 했던 흉측한 화상의 흔적은 없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새로 마련한 장지는 수락리의 옆 동네인 무계리에 있는 산이었다. 그곳에 일가친척들이 함께 쓸 수 있는 널찍한 납골묘 터를 마련해두었다. 시신을 화장해서 바닥에 묻고 작은 표석을 얹는 평토장방식이었는데, 원하면 부부나 가족의 유골 단지를 합장해도 되었다.

무계리로 이장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유골을 화장을 해야 했는데 화장장에 가는 것은 절차가 번거로웠다. 그래서 불법이지만 산소에서 엘피지 가스통에 연결한 토치로 유골을 화장했다. 증조부님의 유골은 흙이어서 금방 하얀 재로 변했고, 조부모님도 유골이 얼마 되지 않아서 금방 재로 변했다. 두개골부터 신체 대부분의 뼈가 남아 있는 큰 어머니의 유골은 한참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태워진 큰어머니의 유골을 절구에 넣고 곱게 빻았다. 형과 내가 번갈아 가면서 빻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밀가루처럼 보드라운 가루가 되었다. 쇠로 만든 공이로 찧으면 하얀 가루가 피어올랐다. 한참을 빻은 후 하얀 가루를 유골함에 쏟아 부었다.

문득 벚꽃잎들을 육탈시켜서 빻으면 이렇게 하얀 가루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벚꽃잎이 하얗게 휘날리며 지듯이 유골가루가 유골함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일부러 절구를 더 높이 들고 큰어머니의 유골가루를 유골함으로 쏟아 부었다. 고운가루 속에서 드문드문 좁쌀처럼 작은 뼛조각이 보이면서 햇빛에 반짝였다. 어젯밤하늘에서 땅으로 쏟아지던 별빛과 비슷했다. 재채기를 하자 콧구멍 속에서 유골가루가 나왔다.

이장이 끝난 후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묻힐 자리의 흙을 가져간 병에 한 줌씩 담았다. 그리고 다른 병에는 아내와 내가 묻힐 자리의 흙도 한 줌씩 담았다. 더 이상 죽음이 낯설거나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흙 빛깔이 참 좋구나. 그런데 재영아, 내 육신이 이 흙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너에게서 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병에 담긴 흙을 불빛에 비춰보시던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저도 제가 묻힐 곳의 흙을 병에 담아왔습니다.”

내 대답에 아버지가 빙그레 웃으셨고, 옆에 앉아 있던 어머니는 내손을 꼭 잡으며 쓰다듬으셨다. 어머니의 눈에는 별빛 같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 드렸다.

그날 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차를 세우고 윤계하에게 전화를 해서 다음날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 대신에 둘째가 받았다.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엄마가 통증이 너무 심해서 통화를 할 수가 없어요. 엄마 불쌍해서 어쩌죠.”

아내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슬픔이 다시 물밀 듯 밀려왔다.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전처럼 두렵고 떨리지는 않았다. 두려움과 공포는 그것을 피하려고 할 때 생기는 감정인 것 같았다. 호주머니의 흙이 든 병을 손으로 쥐어보았다. 따뜻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둘째에게 말했다.

엄마 손을 좀 잡아 주어라. 아빠가 곧 간다고 말해주고. 아니다. 엄마 귀에 휴대폰 좀 갖다대주겠니?”

엄마 들을 수 있으니까 말씀하세요.”

수화기 너머로 아내가 여보-라고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휴대폰에 입술을 바짝 갖다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하고 나 묏자리 좋은 곳으로 잡아 놨어. 그리고하나님의 사도교가 거짓이란 걸 알게 됐어. 걱정 마.”

수화기 너머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요. 내가 이제 안심하고 죽을 수 있겠어요.”

통증에 힘들어하면서도 밝은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 동백꽃처럼 붉은 아내의 입술이 떠올랐다.

천년은 못살더라도 내가 갈 때까지는 죽지 마. 알았지?”

알았어요. 빨리 와요.”

나는 다시 차의 시동을 걸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흘러내리는 눈물 사이로 하늘에서 무수한 별빛들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어디선가 벚꽃잎이 몇 개 날아와 차 앞 유리창에 부딪혔다. 큰어머니의 하얗게 곱게 빻아진 뼛가루가 온 세상을 날아다니는 느낌이었다.



  <당선소감>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진심 담긴 글쓰기 할 것"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저를 순식간에 행복하게 만드는 전화였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듯이 마냥 즐거웠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침체되어 있던

기분이 산뜻하게 전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을 써서 누군가를 이처럼행복하게만들수있다면참좋겠다는. 슬픔과실의에빠져있는사람의기분을단번에전환시켜줄수있는글을쓸수있다면얼마나 보람 있겠습니까.

지난해초, 이민생활중잠시교회에다니다가귀국해서는몇년동안 교회에 가지 않은 이웃을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곧잘 교회에 다녔는데 최근에 형제를 잃는 큰 슬픔을 당했습니다. 손을붙잡고같이눈물을흘리며기도를했지요. 위로의 말도 건넸습니다. 그러나 그 이웃은 슬픔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했고, 저는 결국 그 슬픔을 헤아릴 수가 없어서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기도만 하겠다 고 말해야 했습니다.

이단에 빠져서 자기가 고통 받고 있는지도 모른 채 고통스러운 시간을보내고있는분들에게도제대로된말, 제대로된글을전달하는 것에 한계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행복을 느끼게 하고, 때로는 위로를 하고, 때로는 각성을 하게하는 진심의 글 한 줄을 언젠가는 꼭 쓰고 싶습니다. 부족한 소설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과 한국기독공보에 감사드리며,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글을 쓰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 1959년생.

  ●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졸업.

  ● KBS 드라마극본공모 당선 스포츠투데이 신춘문예 드라마극본 당선. 지구촌교회.


 

  <심사평>


  "소설 심사평 현상에 대한 작가 해석 분명해"


응모 작품은 대부분 교회 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재로 한 경우가 많았다. 삶의 현장의 문제를 소설로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마는 단순히 기록으로 끝나서는 작품이 될 수 없다. 현상에 대하여 작가 나름으로 해석하고 얻은 문제를 작품으로 재생산해야 된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당선작 외에 저를 변호해 주시겠습니까였다. 그런데 이 작품은 작위적(作爲的)인 면이 강하여서 작품으로서의 격이 모자랐다. 반면에 당선작으로 선정된 병속의 흙은 인간의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인식을 정직하게 처리했다는 점에서 그 진실성이 돋보였다.

죽음의 문제는 신앙으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죽음을 앞둔 아내의 처지를 중심으로 천년왕국의 사교를 통해, 전통적인 장례의식을 통해서 극복하려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죽음에 대한 정직하고 진지함을 읽을 수 있었다. 더구나 이작품은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인식하려는 그 태도도 좋았다. 그래서 문장도 매우 건조하면서 현상을 드러내는데 상당히 기여했다. 이 점도 이 작품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정진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 현길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