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종이집 / 김수영
<당선작>
종이집 / 김수영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집이라고? 수인은 본 적도, 살아 본 적도, 가져 본 적도 없는 집이었다. 이런 집을 접을 수 있을까. 브이로그 '종이집'을 오픈하고 육 개월 만의 마수걸이인 데다 무려 다섯 채였다. 두 달치 월세와 맞먹는 이십만 원을 마다하기도 쉽지 않았다. 하루에 종이집을 한 채씩 납품하는 조건이었다. 선뜻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수인은 앞뒤 재지 말고 덤벼보기로 했다. 선금을 넣으라는 조항을 넣어 주문 확인 댓글을 달았고, 별도의 문자메시지도 보냈다.
승리 부동산 유리창에 붙은 숫자들을 올려다보았다. 전세 6.5억, 급매 15억 조정 가능, 월세 4억에 60, 급 월세 1억에 100. 평범한 숫자인데 뒤에 붙은 억, 때문에 하늘에 떠 있는 구름 같았다. 구름, 이라고 웅얼거리며 수인은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뻗고는 만세를 부르듯 기지개를 켰다. 의자를 빙글 돌리며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금연, 샤워 금지 스티커가 붙은 문을 열고 쪽방으로 들어갔다.
화장실 안쪽에 붙은 2.5평짜리 쪽방이 수인의 거처였다. 쪽방은 대각선으로 누워야 간신히 다리를 뻗을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어둡고 쿰쿰한 냄새까지 났지만 수인에게는 더없이 안온한 공간이었다. 소주병에 사는 열대어 무니, 수인이 접은 수백 채의 종이집과 함께 있어서였다. 태풍이 올라온다는데. 수인은 천장에 걸린 종이집을 손바닥으로 훑으며 물었다. 오늘은 말문이 좀 트일까. 종이집이 잇따라 부석거렸다.
수인은 쪽방, 화장실, 승리 부동산의 출입문을 차례로 열었다. 옅은 햇살을 타고 아침이 막 내려오고 있었다. 눅진한 바람이 컨테이너 안으로 길을 내며 지나갔다. 큰길에서 두 블록 안으로 들어온 승리 부동산 골목은 한적했다. 밤새 골목을 지켰을 가로수만 줄지어 서 있을 뿐 지나는 사람도 없었다. 유리 세정제를 뿌려가며 수인은 유리창을 맑게 닦았다. 휴대폰 진동소리가 고요를 깼다.
수인아. 너 어디 있니?
아버지?
한 달 만에 듣는 아버지의 첫마디에 수인은 좀 뜨악했다. 역시 받는 게 아니었다. 컨테이너요. 설마 바로 옆에서 전화하는 건 아니겠지. 예고도 없이 들이닥칠까 봐 수인은 조심스러웠다. 못 들었는지 아버지는 전에 살던 곳에 계속 사느냐고 되물었다. 요즘 컨테이너하우스가 핫 하잖아요. 무심코 대꾸하고는 바로 후회했다. 아버지에게 컨테이너는 금기어에 가까웠다. 삼십 년도 넘은 기억을 불러올 게 뻔했다.
목수인 아버지를 따라 수인은 전국의 건축 현장을 떠돌아다녔다. 가슴이 아프던 엄마가 죽은 다음부터였다. 건축 현장에서는 주로 컨테이너에 묵었다. 컨테이너 출입문에 걸터앉아 기계톱으로 목재를 재단하고, 못질을 하는 아버지를 구경했다. 혼자 땅따먹기를 했고, 굴러다니는 못을 집어 땅 위에 집과 엄마를 그리며 놀았다.
수인아. 어디 있냐. 수인은 수시로 아버지의 호출을 받았다. 뛰어가면 컨테이너 안에서 놀라는 말만 들었다. 컨테이너 안은 덥고, 답답하고, 벌레가 많았다. 그래서였을까. 수인은 컨테이너 안에 혼자 있는 게 무서웠다. 컨테이너 문을 열고 앉아 밖을 내다보면서 두루마리 휴지를 금 따라 찢었다. 찢은 휴지를 접어 엄마, 의자, 텔레비전, 강아지라 이름 붙이며 놀았다. 휴지는 더러운 것을 닦는 데만 쓰는 거다. 아버지는 컨테이너에 널린 휴지를 쓰레기통에 던지며 나무랐다. 눈썹을 찡그리며 담배를 피웠다. 몸에 달라붙는 파리를 탁탁 쳐 쫓았다.
어디냐고 물을 때부터 알아차려야 했다. 아버지는 돈이 떨어졌고, 대놓고 말하기 쑥스러운 거였다. 어-쩌-라-고-요. 수인은 평소보다 심하게 말을 더듬었고, 여태 술이 덜 깬 거냐는 핀잔을 들었다. 돈이 떨어져 심사가 뒤틀린 모양이라 여겼으나 수인의 속도 편치 않았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죠, 라고 말할 뻔했다. 뒤치다꺼리는 그만하겠다고 선언하고 싶었으나 바쁘다는 말만 겨우 내뱉었다. 전화를 끊으려는데 아버지는 엄마랑 같이 한번 만나자고 말했다. 수인이 귀를 후벼 파며 물었다.
엄마가 소-준-가-요. 마트에만 가면 있는.
그게 아니고.
아버지는 말끝을 흐렸다. 평소답지 않게 뾰족한 수인의 대꾸에도 심드렁했다. 내가 너한테 가마. 어디로 가면 되니? 풀죽은 목소리가 수인은 듣기 싫었다. 말려들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손님이 왔다고 둘러대며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이 계속 떨어댔지만 받지 않았다. 조만간 휴대폰을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손으로 이마를 짚고 수인은 골목을 내다보았다. 휴대폰 액정을 밀어 브이로그, 종이집으로 들어갔다. 동영상을 보며 마음을 다독였다. 마리의 브이로그, 향기로운 집으로 건너갔다. 밤새 붉은 박공지붕 집이 업로드되어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창틀, 잔금이 간 흙벽돌의 디테일, 차곡차곡 접어 올린 기와의 섬세함에 정감이 갔다. 대문을 열면 주름 골이 패기 시작했을 엄마가 웃으며 맞아줄 것 같았다. 이런 집에 살고 싶어요. 줄줄이 달린 댓글 밑에 수인도 댓글을 올리고, 엄지 척을 클릭하고, 좋아요, 를 눌렀다.
집사모로 들어가 우리 골목 프로젝트를 둘러봤다. 우리 골목은 마리가 기획, 개최하는 사이버 전시였는데 올해의 주제는 '특별히 레트로'였다. 오늘 정오가 동영상 업로드 마감이었다. 전시된 작품에 한해 실물 교환이 가능하다는 공지가 떠 있었다. 수인은 은근슬쩍 종이집 주문을 받았다는 셀프 홍보를 올렸다. 올리고 보니 멋쩍어서 팔뚝을 벅벅 긁었다. 커피포트에 물을 붓고 스위치를 올렸다.
사장 책상으로 옮겨 앉아 컴퓨터를 켰다. 회원으로 등록된 N 부동산 포털에 접속했다. 승리 부동산이 내놓은 매물 날짜를 변경했고, 클릭 수를 늘렸다. 새 물건이 나왔는지, 계약이 된 집은 있는지, 다른 부동산의 매물을 엿보고 돌아다녔다. 시세를 뒤지고 아파트 커뮤니티도 들락거리면서 주변 동향을 살폈다. 마우스를 클릭할 때마다 소리내기 연습을 했다. 아, 어, 오, 우, 으, 이. 모음이 끝나면 쉬운 단어부터 말하기 시작했다. 어눌하지만 말을 하고 나면 성대도, 혀도 조금 풀렸다. 수인이 아침마다 하는 작업이었다. 노란색 어린이집 차에 아이를 태우는 엄마를 보며 인스턴트커피를 마셨다.
백여 번의 서류전형 만에 처음으로 봤던 면접을 떠올렸다. 수인은 예상 질문이 적힌 휴대폰을 보며 말하기 연습에 전념했다. 긴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까 봐 조바심이 났다. 잔뜩 굳어서 면접관의 질문에 대답했다. 맞습니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고 되묻고 말았다. 당황한 나머지 다음 질문은 알아듣지도 못했다. 면접관은 눈을 끔벅거렸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면접을 망친 수인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통곡했다. 이비인후과로 바로 가 증상을 낱낱이 종이에 적었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절규하듯 입을 한껏 벌렸다.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말을 토해냈다. 바위가 성대를 꽉 막고 있는 것 같았다. 무테안경을 검지로 밀어올리며 의사는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 처방을 내렸다. 무슨 말이든 참지 말고 내뱉으라는 조언도 들었다. 누구에게 털어놓나. 내 걱정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누가 남의 걱정까지 듣나. 심리치료를 추천받았으나 수인은 말하지 않는 것으로 대신했다. 졸지에 무게 있는 사람처럼 과묵해졌다. 그때부터였다. 수인이 손에 잡히는 종이를 다시 접기 시작한 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일자리는 많지 않았다. 경력이 필요 없는 전단 돌리기, 주방 설거지, 청소 도우미 알바를 했다. 면접 따위는 보지 않는 부동산 사무보조로 들어갔다. 부동산 사무실에 딸린 방에 세 들어 사는 조건이었다. 출퇴근 비용도 안 들고, 월세도 싸잖아. 빨래방도, 편의점도 가까이 있고. 수인은 맞춤형 직업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알바 시급보다 조금 높은 급여도 받아들였다. 어영부영 서른 후반에 다다른 수인은 더 이상 알바를 전전하고 싶지 않았다.
오전 동안, 승리 부동산을 지키며 수인은 종이집을 접었다. 포스트잇, 24시간 배달 번호가 찍힌 메모지, 망친 계약서, 탁상 달력 종이, 담뱃갑, 은박지, 약봉지까지 어떤 종이든 수인의 손을 거치면 집이 되었다. 완성된 종이집이 쪽방에 가지런히 쌓였다. 쪽방에는 자연스레 마을과 이야기가 생겨났다. 문제는 한정된 공간이었다. 궁리 끝에 수인은 벽과 벽 사이를 잇는 줄을 맸다. 종이집에 끈을 달아 줄에 걸었다. 허공에 걸린 집들끼리 부딪는 소리가 이야기처럼 들렸다. 말 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수인은 자주 쪽방을 서성였다.
수인 자신도 접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그럴 땐 종이를 접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스스로를 감시하는 방식이었다. 더듬더듬 쪽방에 모인 종이집의 이야기, 소주병에서 사는 무니 이야기를 풀어냈다. 어눌한 대로 솔직하게. 완성되지 못한 말을 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 마음이 편했다. 짧은 메모까지 단 동영상을 브이로그에 올렸다. 종종 방문객을 확인했으나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브이로그를 오픈한 지 석 달 만에 첫 댓글이 달렸다. 마리라는 아이디였다. 밤에만 문을 여는 초미니 야간 편의점엔 밤이 손님인가요.
환하고 깨끗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밝고 깔끔할 듯. 수인은 댓글을 여러 번 읽었다. 환하고 깨끗한 곳이라는 말에 설핏 웃었다. 바로 고맙다는 댓글을 썼다. 종종 편의점에서 만나요. 자판을 누르는 수인의 손놀림이 춤이라도 추듯 경쾌했다.
마리는 수인의 브이로그에 간판도 달아줬다. 이름을 불러줘야 내 집이 된다면서. 종이집이 어떠냐고 물었다. 흔하고 평범해서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지만 그래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귀한 집이라며. 평범하지만 귀한이라는 마리의 댓글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내 일이 아닌데도 관심을 갖는 사람도 있구나. 얼굴도 모르지만 수인은 마리가 고마웠다. 마리 덕분에 수인의 브이로그는 그때부터 종이집이 되었다.
집사모, 집을 접는 사람들의 모임에 가입했다. 마리에게 들어서 알게 된 집사모는 접기 마니아들의 아지트였다. 수인은 집을 접는 사람이 많은 것에, 접는 이유가 끝도 없는 것에 놀랐다. 살 수도 없고, 값도 매기지 못하는 종이집에 집착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더 놀랐다. 익명이 원칙인 것도 수인의 취향과 맞았다. 처음 뵙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수인이 올린 평범한 가입 인사에 댓글이 계단처럼 이어졌다. 댓글을 밟고 올라가면 하늘에라도 가닿을 것 같았다.
손부채질을 하며 수인은 골목을 내다보았다. 정물화를 보는 것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예보는 오보 같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재난 안전 문자가 도착하는 걸 보면 또 아닌 듯도 했다. 골목 안에서 낯선 개가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승리 부동산 앞까지 오더니 안을 기웃거리며 컹, 짖었다. 수인은 부적처럼 넣고 다니는 주머니 속 파란 종이집을 만지작거렸다. 천천히 문으로 다가가서는 발을 굴러 개를 쫓았다.
유리창에 붙은 광고지 한 장을 떼어냈다. 206동 로열층, 급매 15억, 조정 가능이라는 문구를 읽었다. 숫자와 글씨를 손끝으로 문질러보았다. 집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광고지를 들고 냉동고에서 얼음덩이를 꺼내 혀 위에 얹었다. 얼음덩이가 쩍 달라붙자 혀는 감각이 없다가, 얼얼하다가, 시렸다. 얼음을 물고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그늘에 누워 승리 부동산을 쳐다보는 개와 눈이 마주쳤다. 누가 누구를 보는 건지 헷갈렸다.
수인은 뜯어온 광고지를 책상 위에 놓았다. 긴 쪽을 가로로 반듯이 폈다. 위에서 아래로 이등분해서 내려 접었다. 글씨와 숫자가 반으로 툭 꺾여 서로에게 맞닿았다. 접은 종이를 90도 돌려놓고, 이번에는 짧은 쪽을 가로로 놓고 아래를 위로 올려 접었다. 서로 다른 글씨와 숫자가 합쳐졌다. 손톱 끝으로 접힌 선을 꾹꾹 눌렀다. 문구용 칼을 접힌 선에 넣고 밀었다. 광고지가 넉 장으로 잘렸다. 집은 사라지고, 글씨와 숫자는 토막 나고, 조각난 종이만 남았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언짢아진 수인이 밖을 내다보았다. 가로수 밑에 있던 개는 사라지고 없었다.
힐링이란 뭘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수인은 포털 사이트로 들어가 힐링의 뜻을 검색했다. 1. 치유되다, 치유하다, 낫다. 2. 치료하다, 고치다(마음을 치유하다)로 나와 있었다. 종이집이 무엇을 치유할 수 있을까. 이십만 원을 선뜻 내놓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수인은 그쪽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종이를 접고, 그것을 종이집이라고 믿고 소중하게 간직하는 게 전부였다.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집이라고? 보기만에 방점이 찍힌 걸까? 아님 힐링에? 혹시 집에? 수인은 유리창 저편, 죽은 듯 움직임이 없는 골목을 보며 혼자 물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접나? 손님 없었어?
수인은 사장이 들어온 줄도 몰랐다. 급하게 일어서는 바람에 의자가 튕기면서 밀렸다. 의자 바퀴를 고정시키는 레버가 풀어지면서 수인의 복사뼈를 쳤다. 뼈가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이마를 잔뜩 찌푸린 수인이 컴퓨터를 껐다. 절뚝거리며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어디 아파요?
사장이 수인을 흘끗 보았다.
수인은 책상 밑에서 아픈 발을 다른 쪽 다리 위로 올렸다. 복사뼈는 불이 날 것처럼 화끈거리고 쓰라렸다. 아니에요. 얼버무렸지만 입속에는 말하지 못한 말들이 가득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목구멍에 돌이 박힌 것 같은데. 박힌 돌이 빠져 들어가 몸속이 온통 돌밭이 될 것 같은데. 돌 구르는 소리라도 속 시원히 질러보고 싶어요. 말이 되지 못한 말을 삼켰다. 에어컨을 켜지. 사장이 다정하게 책망하면서 리모컨을 눌렀다. 밑도 끝도 없이 아깝다며 입맛을 다셨다.
이름이 필요한데. 수인씨. 주민등록 이전했던가? 사장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이름값이 꽤 붙을 거라고도 했다. 부담은 갖지 말고. 은근하게 덧붙였다. 정수기에서 얼음물을 받아 마셨다. 냉커피라도 탈까요? 통증을 참으며 수인이 물었다. 발음을 잘하려고 온 신경을 쏟아서인지 목이 아팠다. 아냐. 마시고 왔어. 허스키한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매력적이었다. 저 정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데. 수인은 목을 매만졌다.
도와주고는 싶었다. 어쨌든 내게 월급을 주는 사장이 잘되는 것이 좋으니까. 그런데 이름이 여러 개 있는 것도 아니고, 내 것이라곤 이름 하나뿐인데, 이름값을 받고 빌려주면 나는 이름 없는 사람이 되나? 집도 없는데 이름까지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벌써 두 번이나 거절한 탓에 바로 아니라고 말하기도 망설여졌다. 수인은 야단맞는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입고 있는 셔츠에 그려진 빨간 지붕 집을 보았다.
빨간 지붕 집은 어느 미술관 앞에 세워져 있는 집이라고 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집이 찌그러지고, 주저앉고, 늘어나고, 짧아지고, 높아지고, 낮아진대요. 셔츠를 이리저리 돌리며 옷 가게 여자가 설명했었다. 어떻게 그래요? 셔츠를 만지작거리며 묻는 수인을 여자는 안타까운 듯 쳐다봤다. 도처에 이상한 집이 깔린 걸 여태 모른단 말예요? 외계인이라도 보는 듯한 눈초리로 물었다.
시간을 갖고 생각해 봐요.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돼. 사장은 수인에게 눈을 찡긋했다. 과하게 다정한 척해서 닭살이 돋았다. 옷 특이하네. 마음에 없는 칭찬까지 늘어놨다. 인쇄된 집 이야기를 하려다가 수인은 입을 다물었다. 어쭙잖게 설명하다 엉뚱한 말을 할지도 몰랐다. 사장에게 새겨들으라고 할 수도 없었다. 말을 할 때마다 수인은 파도에 휩쓸리는 자갈 소리가 떠올랐다. 자갈은 몸을 부딪치며 소리를 내지만 사람들은 파도 소리로 듣는.
내 정신 좀 봐. 대리점에 들렀다 온다는 걸 깜빡했네. 사장은 휴대폰을 귀중품 1호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사장 뒤로 아침에 보았던 노란 차가 달려왔다. 노란 차가 승리 부동산 맞은편에 멈추자 어디에 있었는지 아침에 보았던 아이의 엄마가 나왔다. 엄마는 차에서 내리는 아이에게 양산을 씌워주었다. 손을 잡고 골목길로 걸어 들어갔다. 수인은 엄마와 아이가 사라진 골목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번호가 재산인데. 말이 돼? 십 년 넘게 쓴 번호를 바꿀 순 없어. 두 대의 휴대폰을 쓰는 사장이 투덜거리며 들어왔다. 다 제멋대로라며 화를 냈다. 택배 온 게 없느냐고 물었다. 또 옷을 주문한 모양이었다. 손을 털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쪽방 문을 잠갔던가. 종이집이 가득한 쪽방은 수인만의 방이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수인은 손을 비비며 화장실 문 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수건이 없네. 사장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털며 나왔다. 손님과 모델하우스에 가기로 했다며 서둘렀다.
납품 시간 지켜주세요. 선금으로 요구한 오만 원 입금 완료했습니다. 차액은 종이집 실물을 받을 때마다 계산하죠.
수인은 액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덜컥 겁이 나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집은 어떤 집이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잡아 돌돌 말며 고민에 빠졌다. 떠오르는 집은 없었다. 컨테이너? 그건 아니지, 했다가 그렇지, 하며 주먹으로 머리통을 살짝 쥐어박았다. 수인은 사람 사는 냄새가 스며 있는 컨테이너를 접기로 했다. 손으로 허공을 접으며 손가락 워밍업을 마쳤다.
탁자 위에 있던 월간지를 책상으로 옮겨 차곡차곡 쌓았다. 휴대폰을 셀카 봉에 끼우고 월간지 위에 놓았다. 손이 잘 보이도록 휴대폰 각도를 조절했다. 여러 번 조정을 해가며 최적의 각도를 찾아 고정시켰다. 녹화 버튼을 눌렀다.
검은 색종이를 쓱 쓰다듬고 반으로 잘랐다. 긴 쪽을 가로가 되게 펼쳤다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 반으로 접었다. 세로만 반으로 준 길쭉한 직사각형이 되었다. 이번엔 길쭉한 쪽을 서로 맞접었다. 가로가 반으로 줄었다. 다시 한 번 똑같이 접어 더 작은 직사각형을 만들었다. 균형은 맞는지, 높이는 일정한지 살피고 양쪽 끝을 이어 붙이니 벽이 생겼다. 한쪽 벽에 구멍을 뚫어 창문을 냈다. 종이를 가늘게 꼬아 일정한 간격으로 창문에 붙였다. 문틀과 출입문은 따로 노란색 종이로 접어 창문의 맞은편에 달았다. 남은 검은 색종이로 천장을 덮고 바닥을 깔았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날까? 그러나 문에 등을 기대고 휴지를 찢어 접던 어린 수인도, 대패질과 못질을 하던 아버지도 보이지 않았다. 흔적은 사라지고 흐릿한 기억만 남은 집을 들고 수인은 녹화 버튼을 껐다. 책상 위에 놓고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겨우 한 채 접었을 뿐인데 목과 어깨가 뻐근했다.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벌을 서듯 스트레칭을 했다. 뚝뚝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 관절을 꺾었다.
휴대폰 배터리가 10퍼센트로 떨어졌다. 휴대폰이 낡은 탓이었다. 더 이상 쓰지 못할 때까지 쓰려고 했는데 바꿀 때가 된 것 같았다. 충전이 되는 동안 수인은 팔꿈치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방금 접은 종이집을 보았다. 옛날 컨테이너에 있었던 물건들의 이름을 불렀다. 바지, 수건, 휴지, 머리띠, 개미, 파리. 혼자 허공에 대고 말을 할 땐 발음이 명확했다. 엉뚱한 말실수도 하지 않았다.
목이 말랐다. 정수기 꼭지 밑에 커피를 마셨던 종이컵을 댔다. 물이 떨어지면서 정수기의 물통 안에서 기포가 올라왔다. 무니가 뻐금거리는 것 같았다. 아침에 먹이를 주었던가. 수인은 갑자기 무니가 걱정되었다. 물을 쭉 들이켜고는 컵에 새 물을 받았다. 컵을 들고 쪽방으로 들어갔다. 어둡고 후텁지근한 게 얼굴이 달아오르고 숨이 막혔다. 더위에 무니를 방치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쓰렸다.
무니는 몸길이가 1.5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열대어였다. 승리 부동산으로 오면서 키우기 시작해 일 년 가까이 동거 중이었다. 온몸이 새까만 무니는 쌀쌀맞은 게 매력이었다. 먹이를 줄 때조차 다가오지 않았다. 좀체 속내를 알 수 없어서 더 마음이 끌렸다. 밥 먹어. 시원한 물도 마시고. 좁은 소주병 입구로 먹이를 넣고, 물도 부어주었다. 어두워서 밤인 줄 아는지 무니는 움직이지 않았다. 수인은 소주병을 툭툭 치고는 승리 부동산으로 나왔다.
브이로그, 종이집에 접속했다. 댓글이 세 개나 달려 있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댓글을 읽던 수인은 얼굴을 찡그렸다. 종이집이나 접고. 팔자가 늘어지네. 아론이라는 아이디가 단 댓글이었다. 일은 안 풀리고 부탁할 곳은 없고 죽고 싶은 기분이었을까. 빈정대면 기분이 좋아질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간신히, 종이집이라도 접는 건데.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수인은 한숨을 쉬었다. 턱을 괴고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색색의 색종이, 노란색 둥근 통에 담긴 딱풀, 안전 가위와 문구용 칼, 뿔자, 연필과 볼펜이 어지럽게 늘어놔져 있었다. 물건들을 책상 한쪽으로 가지런히 몰아놓았다.
지갑 깊숙이 넣어둔 사진을 꺼냈다. 수인이 가진 유일한 엄마 사진이었다. 살이 오른 어린 수인을 안고 있는 엄마는 삐쩍 말라 있었다. 시간도 기억도 무화되어버린 사진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복사기로 확대 복사했다. 사진은 다시 지갑 속에 잘 넣었다. 휴대폰을 설치하고 녹화를 시작했다. 수인은 경계선이 흐리멍덩해진 눈과 입, 턱선을 또렷하게 그려 넣었다. 복사지를 0.5센티미터 간격으로 접어 주름을 만들었다. 지금의 수인보다 어린 엄마가 주름 속으로 숨었다가 튀어나왔다. 못 찾겠다. 꾀꼬리.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주름 사이에 길쭉한 창문을 냈다. 종이의 끝과 끝을 잇고, 위와 아래를 검은 종이로 감싸 지붕과 바닥을 만들었다. 지붕에 차양을 길게 다니 옛날 카메라처럼 보였다. 네모난 필름을 끼우고 검은 천으로 덮고는 공기주머니를 누르면 펑하고 터지며 찍히는 카메라. 기억을 찍는 집이라고 이름 지었다. 우리 골목 프로젝트 '특별히 레트로'에 올렸다.
찜이요. 댓글이 바로 달렸다. 피고였다. 피고는 벌집 모형을 17개 붙인, 허니 다방을 올렸다. 벌집엔 각기 다른 커피 메뉴가 적혀 있었다. 모닝커피, 쌍화차, 커피우유, 프림 커피, 계란 프라이 등등. 신속 배달 문구를 보며 수인은 빙긋 웃었다. 커피를 배달하는 장면이 떠올라서였다. 피고의 집은 지붕도 벽도 문도 하나같이 곧은 게 없었다. 휘어지고 굽은 집을 접은 걸 보면 피고도 굴곡이 많은 사람 같았다. 닉네임도 피고이고. 혼자 추측하던 수인은 아차, 싶었다. 그저 남과 다른 것일 뿐인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속 보이는 철학관. 마리가 접은 집이 떴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 벽에 푸른 셀로판 지붕을 얹은 집이었다. 수인은 감추고 싶은 곳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마리의 용기가 부러웠다.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지, 보지 못하는 건지 고민하는 신하를 생각하다 큭큭 웃었다. 허니 다방과 실물 교환 신청요. 피고의 댓글이 득달같이 올라왔다. 수인은 반사적으로 손바닥으로 책상을 쳤다. 피고의 댓글 밑에 수인도 찜한다고 썼다.
'특별히 레트로' 프로젝트는 실시간 좋아요, 숫자가 많은 집이 자동으로 앞에 배치되었다. 25위 안에 들지 못하는 종이집은 뒤로 밀려나 보이지도 않았다. 마감인 정오가 되기도 전에 벌써 스물다섯 채가 올라와 있었다.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는 일에 수인은 자신이 없었다. 수인의 기억을 찍는 집엔 아직 좋아요, 가 달라붙지 않았다. 씁쓸한 마음으로 수인은 집사모에서 빠져나왔다.
휴대폰엔 부재중 전화가 5통, 문자메시지가 2개나 쌓여 있었다. 전부 아버지였다. 급해지셨네. 갑작스레 불쌍한 척은. 아버지는 컨테이너에서 쓰던 휴대용 가스버너가 터지는 사고로 오른손 엄지와 중지를 잃었다. 목수 일은 더 이상 하지 못했고 화상으로 얽은 얼굴 때문에 두문불출하며 지냈다. 전화를 왜 안 받니. 수인아. 어디 있니. 삼십 년이 넘도록 같은 질문에 수인은 넌더리가 났다. 컨테이너에 있다고 소리 없이 외쳤다.
도로공사를 하는지 드릴 소리와 진동이 몰려왔다. 컨테이너까지 덜덜거리며 떨었다. 파란색 일 톤 트럭이 승리 부동산 골목으로 들어왔다. 컴퓨터, 냉장고, 못 쓰는 가전제품 삽니다. 녹음된 말이 반복해서 들렸다. 소음이 점령한 골목길을 내다보던 수인은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랐다.
승리-부동산-입니다, 세 번 만에 말을 완성했다. 별일 없어요? 사장이었다. 이름은 생각해 봤어요? 수인은 잠시 뜸을 들였다. 이름엔 수인의 생각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냥 주어진 거였다. 머뭇거리는 동안 사장은 안 들린다고 성화였다. 주변이 너무 시끄럽다, 나중에 말하자며 화가 난 듯 소리쳤다. 택배가 왔다고 전했으나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는 말만 되풀이했다. 바로 퇴근한다며 문단속 잘하고, 밤에도 전등불은 끄지 말라고 당부했다. 시간은 벌써 다섯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수인은 책상에 엎드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어깨를 주무르는데 눈이 스르륵 감겼다.
수인은 종이로 엄마를 접고 있었다. 접은 엄마 얼굴에 눈과 코, 입을 정성스럽게 그렸다. 엄마를 수인의 종이집 안에 앉혔다. 나도 들어갈까. 좁으면 끼어 앉으면 되지. 혼자 묻고 답했다. 다음엔 가방을 접었다. 가방 속에 엄마가 앉아 있는 종이집을 넣었다. 종이가방을 들고 버스정류장으로 나갔다. 종이가방을 무릎 위에 놓고 나무 벤치에 앉았다. 도착 시간이 뜨는 모니터를 흘긋거렸고 버스가 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버스가 도착하면 다른 버스를 기다리는 척하며 그냥 보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다. 나무 벤치엔 수인 혼자 남았다. 수인은 종이가방을 벤치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집을 못 찾아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두운 골목길을 돌아다녔다.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땀으로 끈적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대충 닦았다. 꿈치고는 너무 생생했다.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쓰며 수인은 문밖을 내다보았다. 가로수 잎이 이리저리 누웠다 일어섰다. 흙먼지와 잡동사니가 날아다녔다. 어수선한 걸 보니 태풍이 오기는 오나 보네. 띵동. 재난 안전 문자가 들어왔고 동시에 허기가 몰려왔다.
생각해보니 종일 먹은 게 커피와 물뿐이었다. 수인은 쪽방 안에 있는 컵라면을 꺼내왔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다. 출입문이 안으로 밀리면서 틈새로 바람이 휙휙 새어들었다. 유리창에 잔뜩 붙은 날벌레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수십 개의 눈알이 수인을 감시하는 것 같아 버거웠다. 승리 부동산의 출입문을 잠갔다. 컵라면에 끓는 물을 부었다. 한 손으로 종이집을, 다른 손으로 컵라면을 들고 쪽방으로 들어갔다.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며 우리 골목 프로젝트로 들어갔다. 다행히 기억을 찍는 집은 아직 살아남아 있었다. 양보 감사합니다. 수인의 집에 달린 피고의 댓글을 읽었다.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수인은 마리의 속 보이는 철학관을 찾아갔다. 세상을 얻은 것 같다는 피고의 댓글 옆에 하트가 열 개는 붙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집을 접느라 수인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양보한 적 없는데요. 피고의 댓글에 바로 댓글을 달았다. 끝난 거래로 시비 걸지 말라, 로 시작하는 장문의 댓글이 뒤따라왔다. 익명이라지만 집사모 회원이면 누구나 보는 공개 프로젝트였다. 수인은 대응을 포기했다.
찜찜한 기분으로 수인은 기억을 찍는 집을 내렸다. 먼저 손을 내밀어 준 마리에게는 미안했지만. 불어터진 라면을 한입 후루룩 삼켰다. 처음으로 갖고 싶은 집이었는데. 허공에 대고 떠오르는 말을 모두 쏟아냈다. 이웃이라니 속지 마. 다 남이야. 나는 내가 지켜야지. 평소엔 생각지도 않던 말들을 마구 쏟아냈다. 나쁜 새끼, 못된 년. 욕심에 눈이 멀었구나. 죄다 타버려라. 욕에 악담까지 해댔다. 한참을 지껄이던 수인은 흠칫 놀랐다. 말은 어눌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생각한 대로 말이 나왔다. 라면은 먹지 못할 만큼 불어터졌다.
라면 국물을 싱크대에 버리다가 소주병에 낀 녹조를 발견했다. 수인은 소주병을 들고 형광등 아래로 갔다. 불빛을 비춰도 무니는 움직이지 않았다. 너도 피곤하구나. 힐링이 필요한 거야? 그만 자고 일어나. 수인이 소주병을 흔들었다. 배를 위로 한 무니가 떠올랐다. 왜 그래? 수인은 소주병을 들고 우왕좌왕하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밤이 깊도록 소주병을 가슴에 안고 종이집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수인은 주문자가 지정한 G 클라우드에 힐링이라는 제목으로 동영상과 사진을 올렸다. 완성된 종이집은 성수역에 있는 로커에 넣어놓겠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양손을 깍지 껴서 뒤통수를 받치고 쪽방 문에 기대앉았다. 괜찮아. 그대로 괜찮아. 눈을 감고 종이집이 수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허공에 매달린 종이집이 한순간 요동쳤다. 바닥에 쌓아놓은 종이집까지 날리고 뒤집혔다. 찌지직, 쿵, 끼익, 무언가가 찢기고, 떨어지고, 부러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놀란 수인이 일어나 쪽창 밖을 내다보았다. 비바람이 마구잡이로 들이쳤다. 태풍이 상륙한 건가. 형광등이 깜빡거렸고 컨테이너까지 들썩거렸다. 새벽 다섯 시 오 분이었다. 지금 나가면 첫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종이집을 빨리 갖다 놓고 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수인은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컨테이너 지붕을 무언가가 내리쳤다. 쪽창이 찌그러지고 유리가 깨졌다. 비바람 소리에 얹혀 띵동, 띵동, 한꺼번에 여러 통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태풍 상륙을 알리는 긴급 재난 안내 문자였고, 아버지였고, 마리였다. 수인은 아버지 문자메시지부터 눌렀다. 수인아. 어디냐? 괜찮은 거야? 내가 가마. 아버지는 늘 같은 말만 반복했다. 컨테이너라니까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마리의 문자메시지를 읽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골목에 물이 들어오고 있어. 집이 잠길 것 같아. 수인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휴대폰 안에도 비바람이 치나. 휴대폰과 종이집을 챙겨들었다. 쪽방 문을 밀었으나 열리지 않았다. 전깃줄이 윙윙댔고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파도 소리 같았다.
컨테이너가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쿵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수인도 나자빠졌다. 바닥에 쌓여 있던 종이집이 무너져 내렸 다. 쪽방 문이 위에서 수인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깔린 쪽창으로 물이 새 들었다. 무너진 종이집이 바닥부터 젖어 주저앉았다. 벽과 천장에 걸어놨던 종이집도 찢기고 떨어졌다. 수인은 움츠린 자세 그대로 한참을 꼼짝도 못 했다.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집을 가슴에 안았다. 고개를 앞으로 접었다. 허리를 접고, 무릎을 접었다. 천천히 종이집 속으로 들어갔다.
<당선소감>
"소리 없는 말에도 귀 기울이겠습니다"
새벽에 눈을 뜨면 창밖부터 내다봅니다. 산을 향해 있는 창은 어둠이었다가 어스름으로, 이어 나무들의 실루엣으로 가득 찹니다. 날이 밝으면서 덩어리는 와해되고 나무줄기와 나뭇잎이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치 소설처럼. 새벽 안개가 자욱한 날은 오래도록 밖을 보아도 덩어리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럴 땐 마음속의 길을 봅니다. 아무도 없던 길에 누구라도 나타나면 눈이 저절로 크게 떠졌습니다. 저 혼자 지나가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습니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생각하면서.
내가 바라본 누군가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습니다. 지워지고 버려지다 남은 한 단어, 한 문장이 쌓여갔습니다. 내 문장이 턱없이 허술해 무너져 내리면 기꺼이 다시 쌓았습니다. 그것이 향기로운 집이 될지, 비뚤어진 집이 될지, 어둡거나 환한 집이 될지 미처 알지 못했으나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안온한 집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과 다짐으로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았습니다. 내가 만든 집이 결국 나 자신이라는 것을 이제야 어렴풋이 느낍니다.
종이집이 있는 골목길 사람들과 오래오래 같이 걸어가고 싶습니다. 길섶의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소리 없는 말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미끄러지고 삐끗거려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겠습니다. 길을 걷게 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소설과 인생이 다르지 않다고 가르쳐주신 박상우 선생님 감사합니다. 소행성 문우들과도 기쁨을 나눕니다. 소식을 듣고 함박웃음을 지은 엄마. 촘촘한 그물망 같은 엄마의 주름살이 저의 힘입니다. 마음 다해 응원해준 알피네, 해나, 해늘, 효근, 진옥 고맙고 사랑해.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 1957년 서울 출생
● 충남대 영어영문학과 대학원 졸업
<심사평>
"종이로 집짓는 행위를 치유의 상징으로 끌어올려"
예심을 거쳐 올라온 14편의 작품 중에, 본심의 대상이 된 것은 황화주의 '잠자리엽서 그리기', 하인선의 '하트비트' 그리고 김수영의 '종이집' 세 편이었다. 그중 앞의 두 편은 나름대로 탄탄하게 틀을 짰지만, 스토리텔링이 명료하지 못하여 주제의식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느낌과 함께 '소설'로 나아가지 못하고 세태적인 이야기에 그쳤다는 아쉬움을 가지게 했다.
거기에 비해 '종이집'은 소설을 쓸 때 무엇보다도 '상징'을 잘 다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서, 우리 주변의 상징적 사물들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더욱이 '집'을 중심 소재로 삼고서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세부를 꾸려나감으로써, 작품 전체가 강한 일관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도 높이 살 만했다.
소설 속에서는 실제의 집을 짓고 팔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종이로 집을 짓고 팔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인공의 섬세한 의식 속에서 서로 맞물린다.
그리하여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집'을 가지지 못한 채 살아가는 주인공은 '종이로 집을 짓는 행위'를 이를테면 치유의 상징으로 끌어올려서 자신을 반성하고 세상과 대면한다.
요컨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면밀히 들여다보면, 어디든 의미로 가득 차 있고, 그 각각의 의미는 구체적인 상징을 통해 가시적으로 드러나며, 따라서 소설 혹은 예술은 그 상징의 가치를 우리에게 일깨워 삶의 의미를 되살려내는 것임을,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신인 작가의 앞날에 충분히 신뢰를 가져도 되리라 생각된다.
심사위원 : 김인숙, 최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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