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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나무의 문 / 김후인

 

몇 층의 구름이 바람을 몰고 간다

그 몇 층 사이 긴 장마와

연기가 접혀 있을 것 같다

바람이 층 사이에 머무르는 種들이 많다

發芽라는 말 옆에 온갖 씨앗을 묻어 둔다

여름, 후드득 소리 나는 것들을 씨앗이라고 말해본다


나는 조용히 입 열고

씨앗을 뱉어낸 최초의 울음이었다


오래된 떡갈나무 창고 옆에

나뭇가지 같은 방 하나 들였다

나무에 걸린 바람을 들여놓고 싶었다

지붕이 비었을 때엔 빗소리가 크다

빈 아궁이에 솔가지 불을 밀어 넣으면

물이 날아올랐다

물기를 머금고 사는 것들이

방안을 채울 줄 알았다

아궁이 옆에서 뜨거운 울음의 족보를 본다


실어 온 씨앗으로 바람은 키 작은 뽕나무를 키웠다

초여름, 초록이 타고 푸른 연기가 날아오르고

까만 오디가 달렸다


문을 세웠더니 바깥이 들어와

빈 방이 되었다

바람의 어느 층이 키운 나무들은 흰 연기를 품고 있다

어제는 나무의 안쪽이 자라고 오늘

나무의 바깥이 자랐다


나무는 어디가 문일까


문을 열어 놓은 나무들 마다

초록의 연기가

다 빠져나가고 있다




  <당선소감>


   "어머니 밥 짓던 밥 불 생각나"


  나무의 문이 만들어준 빈 방에 첫 불을 넣으면서 그 옛날 어머니 밥 짓던 밥 불이 생각납니다. 젖은 불 연기에 짓던 눈물. 그 연기는 그리움이겠지요. 제게는 일찍 떠난 것들이 많습니다. 그 상실들이 시로 와서, 오래 같이 살다보면 아랫목 같은 문장 하나 남을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 빈자리가 깨워준 서툰 글밭이 자칫 묵정밭이 될 뻔 했지만 이런 지경까지 넓히게 해주신 박해람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경운서당 학우들, 그리고 하엽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제 시 한 편을 쓸 때마다 빈방 새로 들이는 각오로 첫 불을 넣고 두려운 불길도 손에 익혀야겠지요. 찬바람이 불지만 제게는 씨앗을 생각하게 하는 봄날입니다. 미숙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부산일보사에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제게 글 쓰는 마음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늘 격려해주신 재림문협 회원님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등기 심부름을 자주 시켜도 참고 기다려준 남편, 아들, 딸, 그리고 방해꾼이면서 따로 글감도 주는 정후에게 사랑한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발아(發芽)라는 말 옆에 시의 씨앗을 틔우고 묻습니다.



  ● 1952년 경남 통영 출생.
  ● 삼육대학교 졸업.
  ● 재림문인협회 회원.



  <심사평>


  치밀한 문맥·팽팽한 거리 믿음직


  세상은 갈수록 미궁이지만 시를 읽는 일은 여전히 즐겁다. 우리 앞에 놓인 한 아름의 희망들이 온 세상을 새롭게 밝힐 것이란 기대를 갖게 했다. 응모 편수는 예년과 비슷했으나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향상된 수준이었다. 고만고만하게 다듬어진 시들이 주류를 이루던 예년과는 달리 수작과 태작의 경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는 강습 등을 통해 만들어진 시가 아닌 자생적인 시 쓰기가 회복되고 있는 조짐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우리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박길숙의 '적도에서 온 남자' 외 2편과 김후인의 '나무의 문' 외 4편이었다. 박길숙의 시들은 발랄한 감각과 자유분방한 보폭이 흥미로웠다. 시의 큰 덕목인 새로움의 추구에는 부합하지만 완성도가 다소 떨어지는 편이었다. 반면 김후인의 시들은 단단하고 치밀한 문맥, 팽팽한 거리두기가 믿음직스러웠다. 그동안 연마한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보내온 다섯 편 중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아도 좋을 만큼 수준도 골랐다. 빈틈을 보이지 않는 견고한 윤곽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시의 힘은 숨 쉴 여백을 만들며 출렁거릴 때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오랜 숙의 끝에 우리는 박길숙의 시들이 좀 더 숙성되는 과정을 거치기를 바라며 김후인의 '나무의 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가장 작고 낮게 발언하면서도 가장 높고 멀리 퍼져가는 시의 위대한 과업을 성실히 수행하리라 믿는다.


심사위원 : 정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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