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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유실수(有實樹) / 차원선

 

너의 눈 안에는 열매를 맺으려 하는 나무가 있다


너의 눈에 나무를 심은 사람이 저기 소각장에 앉아 있다


자신의 옷을 다 태우고도 헐벗은 너를 보고 있다


멀뚱히 있는 너와 떨어진 잎을 한데 덮는다


앙상해지도록

베고 누웠다


잔향 더미로 만든 모래시계


마른 낙엽을 주워 구덩이로 몰아넣었다


왜 내 얘기를 듣고 있어요?

낯선 사람인가 봐 쓸쓸하다고 하면 데려갈 텐데


그대로 있어요


반딧불이 무리지어 올리는 온도

올라가는 건물


빈 곳은 비어있었던 적이 없고

마지막으로 옮긴 불씨 조각이 다 자란 나무의 잎에 옮겨붙는다


오랫동안 그를 알았다


열매를 남긴 나무, 앨범에 적히고


눈 안에 마른 씨앗을 품던 자리가 바스러져 날아간다


몇은 땅으로 몇은 모를 곳으로




  <당선소감>


   "내가 머물렀던 자리 돌아봐…주변에 귀 기울일 것"


12월의 당선 소식은 그동안 내가 머물렀던 자리들을 되돌아보게 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가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했던 날이 있다. 그 사람에게 내 말이 어떻게 들렸는지 몰라도 나에게는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진심으로 떨리는 일이었다. 그 사람은 담담하게 내가 쓴 시를 읽어주었고 그때의 그 벅찬 순간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줬다.

어디에나 쓸쓸한 소식이 번지던 한 해가 지났다. 이겨내겠다는 말이 무색하게 시간은 흘러 새해가 밝았고 크게 변한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1년을 더 보낸 내가 조금 더 성장했음을 느낀다. 무언가를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삶의 순간들에 주목하는 시를 써나가고 싶다. 나와 함께하는 시간들을 담아나갈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기회를 준 한국경제신문과 내 시에서 가능성을 봐준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같은 자리에서 말없이 나를 헤아려준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도 감사드린다. 혼란스러운 날에 그들이 있어 말하고 싶은 것들을 변함없이 써내려 갈 수 있었다.

나와 내게 주어진 것들을 믿는다. 견고한 나와 내 작품이 되기 위해 주변에 귀 기울이되 나를 잃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창작을 해나갈 것이다. 한 사람으로서 창작자의 몫은 모두에게 동일하다는 마음으로 해 볼 수 있다. 내게 곁을 내어준 신께도 감사드린다.



  ● 본명 고보경.
  ● 1993년 대전 출생.
  ● 중앙대 작곡과 졸업.


 

  <심사평>


  이미지가 눈에 생생…기교와 비약 참신


본심에서는 네 분의 시를 다뤘다. ‘전래동화’ 외 네 편은 직설적인 언어로 기성세대와 맞서는 자세가 만만치 않았다. 다만 그것이 사회와 깊이 부대껴서 얻은 것은 아니어서 시야가 좁고 다소 막연해 보였다. ‘가장 내밀한 스펙트럼’ 외 네 편은 흡입력과 호소력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시에서 흐름을 끊는 직접 발화를 자주 사용하면서 자신의 장점을 잘 살리지 못했다. ‘어둠’ 외 네 편은 과감한 생략과 거침없는 반복 등 난숙한 화법으로 이목을 끌었다. 다만 논리가 시를 압도하는 지점이 가끔 눈에 띄었고, 최근 시의 스타일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침윤된 것은 아닌가 하는 혐의도 받았다. ‘유실수’ 외 네 편은 각각의 시마다 이미지를 극적으로 쌓아가면서 심화시켜 가는 상상력이 돋보였다. 본 적 없는 기교와 비약이지만 우리는 이 상실에 맞닥뜨린 자의 눈에 비친 낯설고 속절없이 슬픈 풍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유실수’ 외 네 편을 응모한 차원선 씨를 당선자로 정했다. 게임의 흐름을 바꾸지 못하면 아류가 되기 쉽다. 우리는 차씨가 익숙한 새로움을 되풀이하기보다 낯선 전환점을 만드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심사위원 : 황인숙. 손택수, 장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