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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점성의 히스테리아- 김이듬론1) / 성현아

 

우리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흘러 들어간다

미완의 것 아직 시작하지 않은 것

가능한 것 속으로2)


1. ‘나’라는 과거와 ‘우리’라는 영원


쓰러지기 위해 일어서는 사람이 있다. 잊지 않기 위해 애초에 기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나로부터 나를 구원하기 위해 대체로 나를 부수는(<파수꾼>) 이 사람은 김이듬의 시 전반을 흘러 다닌다. 우리는 이 사람을 히스테리 환자라고 불러볼 수 있겠다. 히스테리 환자는 명확한 징후를 보이지만 동시에 그 병을 현실적인 수준에서 지정될 수 없도록 하여 오히려 진정한 투사(鬪士)의 역할을 해낸다.3) 김이듬의 시세계는 이러한 모순으로 사랑을 만들고, 그 사랑이 히스테리적이기에 수난을 껴안을 수 있는 교묘한 역설로 축조된다. 이는 첫 시집인 <별 모양의 얼룩>(천년의시작, 2005)부터 최근 발간한 <마르지 않는 티셔츠를 입고>(현대문학, 2019)까지 줄곧 이어져 온 독특한 시세계라 할 수 있다. 다수의 논자들이 분석한 대로 김이듬은 주변으로 밀려난 희생양들을 위한 ‘실천적 시쓰기’를 감행한다. 다만 김이듬의 ‘폭력에 맞서는 시작(詩作)’에는 여타의 시인들과 구별되는 점이 있다는 말이다. 김이듬의 시에는 폭력의 자리인 바깥을 향한 저항과 폭력의 피해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안으로의 충돌이 공존한다. 그는 ‘한국 문학사 전반의 남성주의’에 대항하는 여성주의를 공고히 하는 길로 가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주의 안의 숱한 실패와 균열을 가시화한다. 이를 통해 폭력에 대항하는 소수자들의 자리에 연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차이와 배반이 있음을 드러낸다. 또한 이들이 쉽게 뭉쳐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수많은 지배 담론과 체화된 위계가 자신의 시에도 각인되어 있음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비가 내렸고 나는 방화에서 내렸다 비비안 마이어를 읽느라 화곡과 우장산을 지나왔다 (…) 골목을 돌아 나오다가 공중화장실로 끌려갔다 큰 트럭에 나를 던져 넣었다 저기 내 치마가 걸려 있다 막사와 막사 사이 산허리에 제8사단 사령부와 고요한 사원 사이에// 하루에 몇 번 했냐 임질이냐 너도 즐겼냐 친구가 물었다// 내 치마는 장막으로 펼쳐지고 어두운 치마 속으로 벼락치는 칼날, 총알들이 별처럼 총총 박혔다// 월요일에는 기병대 화요일에는 공병대 하루도 빠짐없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군인들이 줄을 섰다 (…) 여기 치마가 걸려 있다 (…) 빌딩이라는 축사 플래카드와 구름 사이에 (…) 내 목을 꼬아 머리로 퀘스천 마크를 만든다 더듬더듬 문을 두드리는 손 같다 갈고리인지// 치렁치렁한 밤의 치마 아래 숲에서 내가 잠든 관 속으로 죽은 할머니가 힘찬 숨결을 불어넣는다/ 아 뜨거, 누가 우리 가랑이를 찢어 걸어 놓았나 벌건 노을의 쇠막대기에(김이듬, ‘옷걸이’ 부분)


우장산역을 지나 방화역에 내리는, 지하철을 이용하는 현대인인 “나”는 골목을 돌아 나오다가 공중화장실로 끌려간다. 시에 명시되지 않았으나 “나”가 성폭력 피해를 입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폭력을 당한 “나”는 트럭에 내던져지며 줄을 선 군인들에게 유린당하는 일본군 ‘위안부’가 된다. 현대 여성이 일본군 ‘위안부’였던 여성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위안부’에게로 겹쳐지며 그 당사자가 되는 전개는 주목할 만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통해 한국의 식민지 경험은 처음으로 젠더화되었다.4) 여성과 남성이 겪은 식민지 경험의 차이가 분명하다는 말이다. 일본군 ‘위안부’에는 식민-피식민의 구조 안에서 피식민지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젠더 권력의 구조 속에서 여성이 겪게 되는 폭력이 이중으로 겹쳐 있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들을 민족의 수난자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중첩은 지워졌다. 이는 민족 공동체로 포섭될 가능성이 제기될 때만 위안부 피해 사실에 대한 고백이 포용되었다는 말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민족주의라는 시금석을 통해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만 ‘우리’로 선별된다.

김이듬은 시 속에서 피해자를 심문하는 담론을 재심문한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수난의 역사를 국가나 민족이라는 큰 틀에서 닫힌 사건으로 인식하지 않고 현재 여성들이 겪고 있는 폭력으로 연결해낸다. 이는 위안부 피해를 고정된 역사관 안에서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흐름으로 재의미화하는 작업이기에 중요하다. “나”가 위안부 소녀가 되어 듣게 되는 말은 “하루에 몇 번 했냐 임질이냐 너도 즐겼냐”는 피해자를 향한 모독의 말이다. 시에서 이 대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친구”의 말로, 가해자의 발화가 아닌 위안부를 열심히 ‘우리’로 묶으려 했던 공동체 내부의 발화다. 이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냉대했던 민족, 국가의 이면을 상기시키며 위안부 사건을 영유하려던 민족주의 담론에 균열을 낸다.

나아가 시인은 위안소 막사에서 다시금 “빌딩”이라는 현재의 시공간을 불러와 겹쳐놓는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비난이 오늘날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듣게 되는 ‘꽃뱀’, ‘창녀’ 등의 욕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비로소 일본군 ‘위안부’의 피해 사실들이 민족주의 담론으로 탈젠더화되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김숨이 <한 명>(현대문학, 2016)에서 집단의 서사가 된 위안부 이야기를 개인의 서사로 복원해냈다면, 김이듬의 시는 그 개인이 여전히 재생성되며 반복되고 있다는 점까지 생각하게 한다. 공중화장실로 끌려가는 지금의 여성들은 트럭에 내던져지는 위안부 소녀들과 피해 경험과 그 감각을 공유한다.

성폭력 피해가 민족이라는 범주로 엮일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는 “퀘스천 마크”로 가시화된다. 어렵사리 빚어낸 이 물음은 젠더 폭력의 자리에 위안부를 다시금 소환한다. “아 뜨거, 누가 우리 가랑이를 찢어 걸어 놓았나 벌건 노을의 쇠막대기에”라는 마지막 시구는 ‘벌겋게 달군 철막대를 자궁에 넣기도 했다’5)는 정옥순의 증언에서 착안한 문구일 텐데, 이 발화를 기점으로 “내 치마”로 시작한 개인이 “우리”로 확장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죽은 할머니”, 혹은 죽었다고 믿어지는 할머니가 잠든 나에게 찾아와 “힘찬 숨결”을 불어넣은 후에야 비로소 폭력을 당해온 여성들이 서로를 “우리”라고 부르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나”가 “관”에서 자고 있다는 점은 내가 죽고, 죽은 할머니가 또다시 소녀로 태어나고, 그 소녀가 다시 내가 되는 악순환을 상징한다. 이는 과거이자 민족의 역사로 닫혀 있던 위안부의 자리를 열고 현재의 “나”와 매개한다.

이때 ‘나’로부터 ‘우리’로의 확장은 더 이상 민족으로의 뭉뚱그려짐이 아니다. 이는 한국인 사장에게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당하는 베트남 소녀(‘내 치마가 저기 걸려 있다’), 미군에게 만삭의 몸으로 가학적 성행위를 강요받는 한국 여자(‘철수’), 몽트뢰유에서 사내에게 끌려가는 흑인 소녀들(‘행복한 음악’)에게로까지 뻗어 나간다.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 일상 어디에서든 성폭력의 대상으로 전락하던 여성 공동체로의 확장이다.


가장 청순했던 아가씨는 환청에 실신했던 밤들을 겪었고

상냥했던 심장의 창이 무너져 절망을 위한 노래마저 접었던 날도 있었으리라

그리하여 지금/ 과거의 한순간이 지금이어서/ 광기의 시계는 그날에 맞춰졌다


오, 나는 바로 지금조차 배겨 내질 못하는데

대부분의 지금은 방금으로 끝나는데(김이듬, ‘생존자’ 부분)


그리하여 김이듬의 시는 폭력을 당한 과거의 한순간을 “지금”으로 정의한다. “광기의 시계”는 여전히 “그날”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실존하는 고통의 감각은 제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하더라도 표준시간의 개념을 초월한다. 이로써 일본군 ‘위안부’는 기억되어야 할 민족 수난의 표상이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방금으로 끝나”며 영원히 지속되는 “지금”이 된다. 젠더 폭력의 역사를 끝나지 않는 순환의 선상으로 호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이러한 폭력은 그대로 있기에 “나는 살아 있는가”라고 스스로 반문하는 생존자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여성이 된다. 이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수많은 피해 소녀들, 그 소녀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들, 더 나아가 이들에게 공감하며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까지 연결해낸다. “망각으로 살고 있”(‘늪’)다고 고백하는 ‘나’는 망각으로써만 겨우 버티며 존재할 수 있는 생존자이자 지금까지 그 모든 폭력을 지속적으로 견뎌온 ‘우리’다.


2. ‘우리’로의 자발적 실패


독특한 점은 어렵사리 구축한 ‘우리’라는 여성 공동체를 시인이 스스로 폐기한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를 상정하고 결속하는 일에도 균열을 가하며 의도적으로 ‘우리 되기’에 실패한다.


우르르 유령 시인들이 몰려와 여자의 종이를 찢어버립니다. 종이만 찢었을 뿐인데 여자의 가슴에서 피가 흐릅니다. 욕조 안에 핏물이 고입니다. 유령 시인들은 종이에 대고 협박합니다. 자신의 시를 모방했다고, 갖은 기교 범벅 비스킷 같다느니 뭐니 벽돌로 여자의 머리를 빗어줍니다. (…) 전 당신들을 닮을 생각도 없고 오마주도 모르는데요. 우리는 영원히 무한히 우리를 배신하여…… 입에서 두부만 한 핏덩이가 쏟아집니다. (…) 여자는 잠에 빠지듯 혼몽합니다. 몸이 조금씩 빠져나갑니다. 스르르 욕조 구멍에서 빠져나가 다른 세계로 흘러갑니다. (…) 기고 있지만 날아가는 것 같고 유령들과 한패가 된 듯도 하지만 동물들의 울음을 이해합니다. 용감무쌍하지 않고 나약하지 않습니다.(김이듬, ‘유령 시인들의 정원을 지나’ 부분)


이 시에서 여자는 우르르 몰려온 유령 시인들에게 협박을 받고 폭력을 당한다. 또다시 피해자의 자리에 놓여 유린당하는 여성은 입에서 피를 쏟으며 괴로워하면서도 “당신들을 닮을 생각도 없고 오마주도 모르는데요”라고 대꾸한다. 그러한 항변의 말과 각혈 사이에 “우리는 영원히 무한히 우리를 배신하여”라는 의미심장한 시구가 틈입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는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가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집단에 우리가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이 여자는 우리를 향한 의심에서 한발 나아가 자신이 “유령들과 한패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는 “소문을 트위터에 퍼트리는 녀석은 나의 다른 몸”(‘공중뿌리’)이라는 자신의 이중성에 대한 폭로와 일맥상통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조선인들이 직접 알선하기도 했다는 점을 분명히 증언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가 민족주의로 포섭되며 사죄 받아야 할 피식민 역사의 일환이 되자 제국주의를 체화했던 조선인의 알선은 함구되었다. 더 나아가 조선인 여성이 직접 위안소로 조선 여성들을 팔아넘긴 것에 대한 언급은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남성성을 체화한 혹은 남성 중심 사회로의 편입을 갈망하는 여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한 언급은 남성주의에 대항하는 여성주의에 혼선을 주기 때문에 금기시되어온 셈이다. 김이듬은 금기를 깨고 “봐라! 너도 더럽잖아”라며 딸에게마저 “도덕적 우열을 따지는 엄마”(‘유령 시인들의 정원을 지나’)와 같은 여성들을 시에 등장시킨다. 그리하여 연대하고 결속하는 것으로만 비쳐온 여성 공동체 ‘우리’의 틈을 포착한다.

김이듬은 주저하지 않고 피해자의 자리에서 지배 담론을 내재화한 폭력의 자리로 가 포개진다. 이때의 겹침은 사회에서 여성 피해자에게 부과한 도덕적 기준을 갖추기 위해 여성들이 내적 검열을 거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피해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받은 폭력을 또 다른 소수자들에게 대물림하게 되는 스스로에 대한 폭로에 가깝다. 이는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공동체를 결속하고 구성원들의 공통점을 부각하는 방식과 상반된다. 김이듬은 시에서 구축한 ‘우리’ 공동체 안의 내부적 균열과 상충을 기꺼이 내보인다. 그는 완성된 형태의 공동체를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오늘도’)어 ‘우리’ 확정을 무한히 연기한다.


굴다리 아래 애 업은 여자가 뛰고 있었다 포대기에서 두상이 떨어졌다 내게 굴러왔다 무심코 발로 차 강으로 보냈다 거지 여자는 미친년이었고 여전히 뛰고 있었다

아저씨네 앞마당에서 암소가 울었다 더 짧게 교복 치마를 접어 올렸다(김이듬, ‘표류하는 흑발’ 부분)


위 시에서 김이듬은 “거지 여자”-“미친년”-“암소”-‘교복 치마를 더 짧게 접어 올리는 소녀’를 연결해낸다. “거지 여자”는 자본주의에서 도태된 인간이자, 젠더 권력에서도 소외되는 자이고, “미친년”은 정상 범주에서 탈락한 여성이다. 이는 스스로 대상화되기 위해 “교복 치마”를 줄이는, 즉 남성 중심의 지배적 시선을 스스로 체화한 청소년에게로 뻗치는데, 이 소녀는 또다시 성년의 범주로 진입할 수 없는 미성년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의 범주로 편입할 수 없으며 인간에게 억압받아온 동물, “암소”로 이어진다. 여성주의가 미시 파시즘이 되는 것을 막아내며 김이듬은 사이에 존재하는 이들을 불러내 연결시킨다. 그리하여 남성/여성, 어른/아이, 정상/비정상, 부자/거지, 인간/동물, 수컷/암컷과 같은 지배/피지배의 다층적인 구도를 그 구분이 모호해지도록 쌓아 올린다. 이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어느 쪽이 안이고 밖인지 분간할 수 없기 때문에 묶이지도 구분 지어지지도 못한 채 내부적으로도 충돌을 빚으며 표류하게 된다. 김이듬이 연결지은 소수자들은 이원 젠더를 넘어, 이항 대립을 여러 방향에서 가로지르며 더 많은 가짓수의 성을 생산한다. 위계 구조가 식별 불가능하게 뭉쳐지자 아이러니하게도 구조의 모순이 선명해지며 이를 허물어버릴 틈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로써 분명해지는 점이 있다. 김이듬의 시가 말하고자 하는 공동체는 단순히 남성주의에 대항하는 여성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중심에 대항하여 주변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순간, 이는 내용을 달리한 또 다른 파시즘이 된다. 남녀의 이원적 대립을 통해서만 페미니즘을 유지할 수 있다는 명목으로 트랜스젠더리즘을 억압하는, 여성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폭력들을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다. 김이듬은 새로이 확장한 공동체를 통해 체제의 중심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중심-주변의 구도를 허물고자 한다. 미시 파시즘, 즉 민족, 편향된 역사, 또 다른 파시즘이 되려는 여성주의 그 모든 것에서 달아나며 동시에 그것들과 싸워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여성인 한에서 우리 되기’에 자발적으로 실패한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남성에 다시금 방점을 찍게 되는 오류에서 벗어나 충분히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분자적 여성”6)이 되고자 한다.


3. 점성(粘性)을 지닌 흐름


김이듬은 더 소수자로 남아 있기 위한 몸부림을 거듭한다. “가끔은 살아 있다고 착각”(‘나의 수리공’)하는, “임시로 숨 쉬는 것 같”(‘비탄 없이 가난한’)은 ‘나’는 이 사회에서 부작용하는 존재다. 그러나 김이듬의 시 속에서 ‘나’는 사회에서 작용하기 위해 스스로를 변형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실어증을 일부러 앓”(‘늪’)으며 다른 나와 “손을 맞잡고 한 걸음도 안”(‘하반기’) 나아간다.


나는 춤춥니다/ 춤추기 시작했어요 (…) 뒷걸음질이 중요합니다 (…) 당신이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 / 나는 왼쪽으로 갑니다 (…) 이곳에 살기 위하여/ 피하고 흥분하고 싸우기도 하듯이/ 나는 춤추겠다는 겁니다 (…) 다가오는 죽음을 인정하고 포옹하면서/ 매 순간의 나를 석방합니다/ 나는 춤을 춥니다// 뒤로 가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김이듬, ‘나는 춤춘다’ 부분)


위 시에서 시적 주체가 추는 춤은 뒷걸음치는 행위와 맞닿아 있다. “하찮아지고 보잘것없이 더 보잘것없어지자”(‘하인학교’)고 되뇌는 나는 “당신”이 주류의 표상인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도 “왼쪽”으로 간다. 김이듬에게 왼쪽은 시 ‘왼손잡이’에 드러나듯 “천치와 악마”들의 방향으로 낙인찍힌 곳이다. 그럼에도 “나”는 소수자의 자리이자 철저히 소외되는 길을 자신의 방향으로 삼고 그곳으로 자신을 밀고 간다. “이곳”으로 불리는 이 세계에 살기 위하여 역설적이게도 ‘주변으로 흘러가는’(‘강물아비’) 몸부림에 가까운 춤을 추는 것이다. 이 춤은 퇴행처럼 보이나 닫힌 세계에 대한 문 두드림이자 그 속에 갇힌 자들을 “석방”하는 행위가 된다.

여성이 영웅이 되는 서사가 아니라 언제든지 다시금 소수자의 자리로 가 그들과 겹쳐지며 영혼을 공유하는 과정은 체제로의 편입이 아닌 체제 자체를 파기하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므로 김이듬이 시 속에 내세우는 여성은 기고 있지만 날아가는 것 같고 용감무쌍하지 않지만 나약하지 않다. 여성은 소수자로서 여전히 기어 다니며 새로운 중심세력이 되려는 투사이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 ‘기어 다님’의 행위가 집단적으로 수행될 때, 중심-주변의 구도를 허물며 날아가는 것 같은 새로운 흐름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김이듬은 고통의 자리를 온전하게 견디며 “언제나 죽은 이들과 함께 흐르려”(‘노량진’) 할 뿐이다.

이 흐름은 목적한 방향이 없는 표류다. 단, 김이듬의 표류는 단순한 떠돎이 아니라 점성을 가진 흐름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실로 ‘축축하다’는 형용사를 빈번하게 사용하는 시인은 “물 속”, “욕조”, “바다”, “자궁 속”과 같은 습기를 가진 공간을 구축하고 “피”, “눈물”, “땀”, “물결”, “점액질”처럼 끈적한 촉각으로 흐름을 형상화한다. 점성이 있는 흐름은 주변의 사물 혹은 사람들을 단순히 지나치거나 관통하지 않는다. 이는 주변의 것들을 끈끈하게 데리고 간다. “우리는 잠시 젖은 후 흘러갈 거야”(‘함박눈’)라는 시구처럼 다르다고 분류된 이단아들, 소외된 자들을 불러 엮으며 함께 가는 것이다. 정해진 방향으로 홀로 건조하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울어주지 못해 미안’(<별 모양의 얼룩>의 서문)해하는 김이듬은 다른 이들의 눈물에 자신을 적시며 같이 구른다.

더 나아가 점성의 정의를 상기해보면 이는 ‘흐름에 대한 내부의 저항을 안고 흐른다’는 역설적인 의미가 된다. ‘우리’로 뭉쳐지기 힘든 것들을 잠정적이나마 ‘우리’로 끈끈하게 엮은 다음, 내부의 마찰과 외부의 비난을 안팎으로 견디면서 더 많은 ‘우리’를 만들기 위해 구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이듬이 반복해서 말하는 “구름”7)은 언제든 흩어지는, 홀로 고고히 떠 있는 하늘의 구름이 아니라 땅에 짓밟힌 이름 없는 것들로 기꺼이 흘러내려와 껴안고 가는 축축한 ‘구르기’가 된다.


4. 소외의 자리로 표류하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문제들이 있다. 시가 소수의 문학임을 자처하더라도 시는 언어를 전제로 한 예술이다. 언어란 언제나 다수에 의해 향유되는 것이며 그들의 시선을 담는 프레임이 된다. 여기서 다수는 수적인 우위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를 고려하여 소수자들이 김이듬의 시적 언어를 통해 현현되는 방식을 살필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남는다.


얼굴을 가리려니 다리가 나오고 음부를 숨기자니 젖가슴이 드러난다

성적 흥분을 일으킬 의도가 아니다 그들이

종이 한 장씩 던져 주며 체면을 구기지 말라니까

규격에 맞게 재단하라니까


나는 이 섬의 원주민 발가벗고 다닌다 잔치가 있는 날엔 조개 목걸이 하나 두르는 정도

별안간 장군인지 개척자인지 그런 자가 온다는 이유로

알몸 금지령이 내려졌다


(…) 환영의 표시로 손을 흔들 때

“저 호수 이름은 뭐니?”

“저리 가!”

그들은 저리가 호수라고 썼다(김이듬, ‘A4’ 부분)


시인이 “성적 흥분을 일으킬 의도가 아니다”라고 부연설명을 해도 우리는 “음부”와 “젖가슴”이라는 단어에서 이미 대상화된 여성의 신체를 떠올리게 된다. 언어가 갖고 있는 고질적인 재현 불가능함을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언어의 한계에 다시금 부딪히고 만다. 피해 여성들을 재현하는 문학에서조차 가해자들의 언어를 빌려야 하는 셈이고, 이는 그들의 관점과 시선이 점철된 언어로 피해자를 다시 가두는 일이 된다. ‘저 호수 이름은 뭐니?/ 저리 가!/ 그들은 저리가 호수라고 썼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소외된 자들은 언어를 갖지 못한다. 중심부 권력자들의 사고틀에 기반한 언어는 소수자들의 감각과 사고를 반영할 수 없으므로, 소수자들의 말은 발화되는 순간 왜곡된다. 이처럼 소수자들의 발화는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오역을 동반한다. 이를 고발하는 김이듬의 시도 예외일 수 없다. 김이듬은 소수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더욱 소외된 곳으로 흐르려 하지만 그 흐름을 언어로 포획하는 순간, 시인은 가해자의 언어로 피해상을 재현하는 공모자가 된다.

그럼에도 김이듬은 오기(誤記)를 불사한다. 말하고 쓰기 위해 오명(汚名)을 스스로 뒤집어쓴다. 시인은 “침묵을 말하기에 이르렀다”(‘불우 이웃’)고 선언한다. 그는 침묵하는 자리를 고수하지만, 그 침묵을 “말”하기에 이르렀다는 역설적인 발화를 통해 소외의 자리에는 언제나 말이 주어진 적이 없었으며 그러므로 침묵해왔던 자들이 여기에 있어 왔다고 증언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지만 김이듬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할 말이 우리에게는 없다고, 그렇기에 어긋날 수밖에 없다고, 이미 있어온 말들로 계속 틀리면서 말한다. 침묵을 보고도 침묵해왔다는 말은 필연적으로 잘못 발화되지만 이는 반복되면서 슬프고 끈적한 울림이 되어 얼룩을 남긴다.

이는 시의 차원으로 이어진다. 지금의 시는 어떠한 대중 담론도 형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문학은 언제나 소수의 몫이었으며 시는 본래 주변의 문학이지만, 현재의 시는 죽은 상태에 가깝다는 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김이듬의 시는 창조적 오독을 기다리며 이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퇴행하거나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소외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는 것으로 비가시적인 소외의 자리가 존재함을 증명한다. 김이듬은 스스로의 시를 폐기하며 불가능의 파편을 주워 모으고 한없는 가장자리로 흘러간다, 기어간다, 그러면서 동시에 날아간다. 그는 ‘우리’ 공동체가 내부의 마찰을 안고 있어 실패할 것을 예감하고도 이들을 뭉치고 허물기를 반복했던 것처럼 시 또한 “날마다 새로 세우고 날마다 새로 부수”(‘날마다 설날’)는 것이다.

‘소수적’이라는 말은 거대한(혹은 기성의) 문학이라고 불리는 것 안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문학의 혁명적 조건을 뜻한다.8) 시는 여전히 무용하다. 그러한 시 중에서도 김이듬의 시는 좀 더 무용하고 소수적이다. 그러나 소수적이기에 문제제기의 시작점이 된다. 김이듬의 시는 ‘흘러가며 이름이 바뀌는 강’(‘누수 그리고 단수’)처럼 스스로 폭력이 될 가능성을 경계하여 중심에서 멀어지면서도 재영토화되지 않으려 끊임없이 흐른다. 단, 그 흐름은 축축하다. 그저 떠내려가는 하나의 출렁임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로 가서 그들을 적시며, 균열이 뻔히 보이는 이 듬성듬성한 구름에 동참하기를 요청한다. 그렇기에 문학은 아직 유효한 것이 아닐까. 피에 젖은 소녀들, 나아가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들과 끈끈하게 엮여 표류하고, 더 많은 이들과 뭉치며, 우리는 불가능의 시대에서 문학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각주

1)이 글은 김이듬의 여섯 권의 시집 <별 모양의 얼룩>(천년의시작, 2005), <명랑하라 팜 파탈>(문학과지성사, 2007), <말할 수 없는 애인>(문학과지성사, 2011), <히스테리아>(문학과지성사, 2014), <표류하는 흑발>(민음사, 2017), <마르지 않는 티셔츠를 입고>(현대문학, 2019)를 대상으로 하며 이하 시의 제목만 밝힌다.

2)에이드리언 리치, ‘엘비라 샤타예브를 위한 환상곡’, <공통 언어를 향한 꿈>, 하현숙 옮김, 민음사, 2020, 19쪽.

3)미셸 푸코, <정신의학의 권력>, 오트르망(심세광, 전혜리) 옮김, 난장, 2014, 373~374쪽.

4)우에노 지즈코,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이선이 옮김, 현실문화, 2014, 217쪽.

5)정옥순, ‘지옥의 형벌보다 더 치떨리는 일본군의 만행’, 이토 다카시, <한겨레 21> 10월호, 1998.10.

6)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523쪽.

7)‘별 모양의 얼룩’, ‘나는 나무를 이해한다’(<별 모양의 얼룩>); ‘여드름투성이 안장’(<명랑하라 팜 파탈>); ‘호수의 백일몽’, ‘너무 놀라지 마라’(<말할 수 없는 애인>); ‘여파’(<히스테리아>); ‘옷걸이’(<표류하는 흑발>); ‘한 시’, ‘짐노페디’(<마르지 않는 티셔츠를 입고>)

8)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카프카-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이진경 옮김, 동문선, 2001, 48쪽.



  <당선소감>


   "희망과 온기로 쓰고 또 쓰겠다"


저를 아래로, 더 아래로 향하게 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모두 땅에 붙으면 어디가 하늘인지 모르니 날아다니는 것이 될 수도 있겠지요. 누구도 고통받지 않는 세상을 꿈꾸지만, 누군가 여전히 고통받고 있으므로 저는 반성문 같은 글을 계속 쓰겠습니다. 날개가 돋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아빠, 엄마, 언니 언제나 든든한 품이 되어줘서 고맙고, 사랑해요. 우리가 가족으로 만난 것이 제게는 자랑이자 축복입니다. 나보다 더 기뻐해 줬던 왕준형, 우리 앞으로도 서로의 행복이 되어주자. 문학의 길이 곧 윤리적인 길일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신 이경수 교수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늘 함께해 준 소중한 내 친구 혜윤, 준형아, 너희 덕분에 내가 있다고 생각해. 깊은 어둠에 빠질 때면 언제든 내 슬픔 속에서 함께 유영해주던 두환, 동오, 지윤아, 정말 고마워. 같이 고생한 쇠똥구리·야생집돼지 멤버 승현, 선율 언니, 재현, 주은, 형태야, 덕분에 무너지지 않고 계속 쓸 수 있었어. 현진, 주현, 선희, 은성 언니, 다은, 해람, 영훈, 영신, 민근, 재현 오빠, 당신들이 문학을 대하는 자세에 반하곤 했습니다. 늘 따뜻하게 대해주신 중앙대 국문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제 글을 믿어주신 심사위원분들께도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희망과 온기로 쓰겠습니다.



  ● 1993년생. 
  ●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심사평>


  분열하는 힘을 포착하고, 각각의 시를 엮어내는 유려함 돋보여


23편의 응모작 가운데 우리가 주목한 것은 최가은씨의 “문학비평/장과 ‘여성’ ”, 전서아씨의 “감정의 연금술과 만짐의 기술(技術/記述)―김초엽, 천선란, 정세랑의 SF소설을 중심으로”, 그리고 성현아씨의 “점성의 히스테리아―김이듬론”이었다. 최가은씨의 글은 최근의 비평 현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사유의 경합을 주밀히 살피며 하나의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서술의 힘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기존의 문학사 서술을 남성중심적이라고 뭉뚱그려 파문하기보다 그것을 분절시켜 문학사‘들’을 지향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도 정작 이 글이 분석대상으로 삼고 있는 최근의 페미니즘 비평‘들’을 여성본질주의라는 단일한 혐의 아래 뭉뚱그려 비판하는 것은 자가당착으로 생각된다. 전서아씨의 글은 타인과의 뒤엉킴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인 ‘몸’에 착안하여 SF 작품들에서의 몸의 구성 혹은 사용 방식을 검토하면서도 포스트휴먼 논의와는 다른 길을 찾아내려는 시도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글이 다루고 있는 세 작품들이 모종의 관계나 구도를 이루기보다 단순히 나열되고 있다는 점, 이 글에서 운용하고 있는 몸과 감정 그리고 만짐이라는 개념에 정밀함이 부족하다는 점을 간과하기 어려웠다.

성현아씨의 “점성의 히스테리아―김이듬론”이 기존의 김이듬론과 현저히 차이 나는 독창적인 것인가, 문학은 언제나 소수의 몫이며 시는 본래 무용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대목들이 자신의 사유의 전개 끝에 도달한 자리인가 하는 점에 대해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개별 시편 안으로 들어가 그 내부의 분열하는 힘을 포착하면서도 흩어져 있는 각각의 시 분석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 한편의 글로 완성해내는 유려함이 돋보였고, ‘모순으로 만들어진 사랑’이나 ‘히스테리적이기 때문에 수난을 껴안을 수 있는 사랑’을 포착하는 능력에도 무엇인가 기대하게 하는 바가 있었다. 짧지 않은 토론 끝에 성현아씨의 글을 당선작으로 선정할 수 있었던 이유다. 성현아씨의 당선을 축하한다. 좋은 글을 보내준 모든 응모자들에게도 심심한 위로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심사위원 : 양윤의, 권희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