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광남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고독은, 크로노스의 뒤통수를 부여잡고 / 김재홍
<당선작>
고독은, 크로노스의 뒤통수를 부여잡고 - 시집 『급! 고독』을 통해 본 이경림론 / 김재홍
접힘
칠흑 같은 밤, 청년 철학자는 『티마이오스』1)와 데미우르고스와의 끝날 수 없는 대화에 빠져들겠지만 젊은 시인은 하늘을 스치는 별똥별의 빛나는 한순간에 경의를 표할 것이다. 그런 밤 청년 철학자의 가슴은 우주의 비의를 파고드는 열정에 타오를 것이고, 젊은 시인의 가슴은 깊고 오랜 어둠으로 물들 것이다. 세계의 본질을 향한 인간의 간절한 탐색이 철학이라면, 유한한 인간의 숙명에 가늘디가는 구원의 빛을 던지는 예술이 시다. 무한 세계의 철학은 광활한 우발성의 우주에서 단 하나의 원형을 갈구하지만 유한한 인간의 시는 장구한 시간의 바다를 떠도는 단 한 척 나룻배를 꿈꾼다. 시가 윤리적이라면 그것은 오직 인간을 위한 구원의 표징을 드러내는 데 있다. 철학이 필연적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외부에 인간을 포함하는 거대한 내부가 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을 향한 구원의 언어로서 시는 인간이 속한 거대 세계로서의 철학과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 이들의 영원한 길항 혹은 평행선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영원한 두 가지 인간지학인지 모른다.
만일 시인이 철학자를 경멸한다면 그것은 철학자가 인간을 배제한 우주를 꿈꿀 때뿐이다. 그러나 철학이 우주에 대한 탐닉 끝에 오직 하나의 본질을 정의한다 하더라도 혹은 전적으로 무한한 우발성의 체계로 우주를 내던져 버린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언제나 인간이 함께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시인은 영원히 철학자를 경멸하지 않는다. 시인은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을 벗어날 수 없다. 만일 철학자가 시인을 경멸한다면 그것은 시의 매혹에 빠지는 것이 두려운 열정적인 탐구자의 자기 보호 본능이라는 지적은2) 타당하다. 시는 시인 본인에게도 철학자에게도 매혹적인 위안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인을 경멸하는 철학자의 심리는 무의식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의식적이다. 그것은 시로 인하여 얻는 위안 때문에 우주를 향한 자신의 열정이 꺾이는 게 두려운 자의 대단히 의지적인 노력이다. 언제나 시는 철학이 열정적으로 걸어가는 길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그들은 아직 만난 적이 없다.
차라투스트라가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으로 들어가 십 년의 세월 동안 지치지도 않고 정신과 고독을 즐기며 살았던 것은 지혜의 탐구를 위한 결연한 자기 고립이었지만, 그는 태양을 향해 “그대 위대한 별이여! 그대가 빛을 비추어 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존재가 없다면, 그대의 행복은 무엇이겠는가!”라며 이제 자신은 지혜를 “베풀어주고 나누어주려 한다.”고 했다.3)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는 탐구자의 차가운 열정과 구원자의 뜨거운 의지를 모두 갖춘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동시에 시인이자 철학자인가. 그러나 ‘신의 죽음’을 전하며 초인(?bermensch)을 가르치겠다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시적이기보다는 장쾌한 사변에 가깝다. 시적 비유와 표현력이 넘실대는 한 편의 아름다운 항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통찰적 사유의 지혜를 전수하고자 하는 차가운 열정이 번뜩인다. 어쩌면 철학과 시의 궤도는 차라투스트라에서 가장 근접했었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둘의 만남이 성사되었다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4)
『급! 고독』의 ‘시인 K’는 뒤죽박죽 접혀 있다.5) 시공간의 접힘과 함께 의미도 되접혀 있다. 메신저 프로그램 상의 문자로 보이는 모두 스물아홉 건의 문장은 의미 맥락을 추적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우선 알파벳으로 코드화 되어 있는 발신자의 이니셜이 접혀 있다.6) 이들 발신자의 무작위적 이니셜은 그 자체로 일상의 접힘을 표현하지만, 무엇보다 발신자의 개체성을 무화시켜야 성립되는 이 작품의 표현욕을 반영하고 있다. 다음으로 이들이 보낸 각각의 문자(詩行) 내용도 뒤죽박죽 되접혀 있다. 의미의 일관성을 찾을 수 없으므로 발신 시점의 불규칙성까지 표상된다. 간혹 ‘발광’이나 ‘지랄’, ‘좆같은’과 같은 주목될 필요가 없는 수식어가 자극적으로 주목되기는 하지만 그것도 우발적이면서 단발적일 뿐이다. 「시인 K의 하루」는 마지막 한 줄에 모든 시적 의미가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당신은 소멸됩니다.” 앞선 29건의 문자처럼 아무리 무작위적이고 우발적으로 접히고 되접혀도 ‘시인 K’의 하루는 ‘소멸’이라는 필연성에 도달하는 과정임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크로노스(Chronos, 시간의 신)7)의 뒤통수를 아무리 부여잡아도 반드시 다가오는 ‘소멸’이다.
「시인 K의 하루」에서 이경림 시인은 세계와 마찬가지로 일상도 공존 불가능한 것들이 공존하는 거대한 일의적 세계임을 말하고자 했는지 모른다.8) 개가 짖듯이(“ㅋㅋ 그런 개 짖는 소리를?”) 혹은 장난치듯이(“오늘 수업, 빗자루와 몽둥이”) 혹은 욕하듯이(“지랄 같은 하루 되시기를”) 접힌 세계의 접힘은 ‘시인 K’만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존재 조건으로 상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번에 공존 불가능성들을 긍정하고 이것들을 관통하는 과정”이라는 인식이 되며, 동시에 세계는 그것이 발산하는 무작위적이고 우발적인 ‘놀이’라는 철학적 통찰이 된다.9) “L-2천만이 선택한 국민 게임, X 놓고 X 먹고 X 되기” 놀이 혹은 게임을 인간만 아니라 신도 즐긴다는 생각은 철학사의 물줄기 가운데 생성 혹은 지속의 사유에 가 닿는다. 그렇다면 이경림은 니체의 바로 옆에서 철학을 향해 달려가는 시인이라는 말인가.
「전율하는 도시의 9층 유리 안에서」도 접히고 되접혀 있다. 우선 공간이 접혀 있다. ‘전율하는 도시의 유리’는 이미 수직의 아홉 겹(9층)이다. 또한 9층 내부도 ‘공중부양 된 식탁’과 그 아래 ‘나른히 잠든 애완견’과 ‘양란(洋蘭)인 척하는 꽃자줏빛 돼지들’로 겹쳐져 있다. 공간은 안팎에서 접혀 있다. 다음으로 시간이 접혀 있다. 시적화자는 “어젯밤 / 나는 스물몇살 새댁으로 송림동 산동네 좁은 골목을 헤맸다”고 말한다. 시인의 출생년도를 감안할 때 적어도 기록자는 얼추 50년 가까운 시간을 24시간 안쪽으로 접어 넣었다. 이어 “내일은 / 검은 면사포를 쓰고 낯도 모르는 신랑과 혼례를 올렸다”(강조 - 인용자)고 한다. 이것은 미래와 과거의 뒤섞임, 시제의 접힘이다. 접힌 시공간 속에서 “하루에 두어차례 더러운 파도가 헐떡헐떡 왔”고, “알맞게 늙은 여자들이 연탄재처럼 둘러앉아 뜨개질을 하고”, “시어머니와 꼬리가 아홉인 백여우가 마주 앉아 시시덕거”리는 일련의 압축적 사건들은 시적화자의 회오(悔悟) 혹은 한탄으로 승화된다.
모든 것은 접혀 있다. 시인의 기억 속에서, 시적화자의 진술 속에서, 공간도 시간도 모두 접혀 있다. 접힘은 일차적으로 정서적 반응이지만 물리적 보편성 속에서 복합적 이미지를 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율하는 도시의 9층 유리 안에서」의 시적 성취가 드러난다. 시공에 펼쳐진 가능한 사건들, 혹은 펼쳐지지 않은 암흑의 사건들을 응시하는 시인의 통찰이 날카롭게 빛난다. 짐짓 무덤덤하게, 표내지 않고 내색하지 않는 시선 속에서 인간사의 어떤 진실을 표현하는 시적 기량이 주목된다. 그렇다면 이경림 시인은 “가능세계들에 모조리 발산을 배분하면서, 그리고 공존 불가능성을 모조리 세계들 간의 국경으로 만들면서, 고전주의적 이성을 재구축하려는 최후의 시도”10)로서의 라이프니츠의 가능세계론에 가 닿는다. 가능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 가능하지 않은 모든 것까지 표현하고자 하는 것, 이것은 바로시인들의 시적 이상이기도 하다. 『급! 고독』의 접힌 주름들은 이경림 시인 자신이 겪은 당대의 기억에 바치는 헌시와 같다. 그렇다면 주름과 접힘이란 영원히 반복되는 인간 세상의 잠재태일 수밖에 없다.
역전(逆轉)
언어는 흐른다. 말도 흐르고 글도 흐른다. 앞 말을 딛고 뒤의 말이 생성되고, 앞의 문장을 이어 뒤 문장이 형성된다. 앞에서 뒤로 혹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언어는 그러므로 맥락이다. 맥락을 분절하는 것은 시간이다. 분절된 언어가 언제나 조리 정연한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부조리할 수 있고 언제든지 의미 형성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일상어와 생활문은 통념적 맥락에 의거해 조리 있는 의미를 형성한다. 그러나 병리적 언어는 맥락이 파괴됨으로써 의미를 잃어버리며, 그 부조리로 인하여 병리적 언어로 진단된다. 시적 언어는 통념적 맥락에 따라 의미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의도적으로 맥락을 파괴함으로써 부조리한 의미를 생성하기도 한다. 병리적 언어가 의도되지 않은 오류라면, 시적 언어는 의도적인 파괴이다. 그런 점에서 시적 언어는 의미 요소들의 동시적 존립이 가능한 회화와 그 본성을 달리한다.
맥락은 흐르고 의미도 흐른다. 시적 언어는 흐르는 의미의 강물 위로 한순간 솟구치는 우발적인 특이점이다. 시간은 어떤 비의(秘意)다. 시간은 개체와 개체의 조건에 따라 매우 다르게 인식되는 전적으로 자의적인 개념인가 하면, 거리와 속도와 질량으로 양화되는 완전히 기계론적인 시간론도 존재한다. 시간은 이 두 극단 사이에 실존하는 무한한 다의성의 개념이다. 시간의 비의는 영원(Aion)을 갈망하는 인간을 끊임없이 절망으로 내모는 분절된 시간을 내포한다. 우리는 시간에 대해 본성적으로 영원한 크로노스, ‘을’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종착지를 향해 끊이지 않는 연속된 운동을 수행한다.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면서도 순간순간 잘게 부서지는 편린의 시간을 겪으며 사는 게 인간이다. 시인은 분절된 크로노스의 시간을 부여잡고 영원히 영원을 꿈꾸는 불가능한 꿈의 도전자11)이다.
순간과 영원의 ‘불일치’는 인간의 근원에 자리한다. 빅뱅 이론에도 불구하고 우주적 시간에 어떤 시작점을 지정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다. 인간은 자신에게 허용된 시간 동안 이러한 근본적 불일치에 저항하거나 고발하거나 체념하거나 복종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시의 탄생 혹은 출발 지점에 존재와 지향의 ‘불일치’가 있다면, 그것을 초래한 시간에 대한 무한히 다양한 반응의 원인은 오히려 시간 자체에 있다. 시간은 공간이 다른 사물의 동시적 존재를 허용하지만, 공간은 시간이 다른 사물의 순차적 존재를 허용한다. 이것은 엇갈린 운명이다. 스토아철학자 크리시포스를 따를 때 인간은 적어도 시간과 공간의 어떤 조화로운 합일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순간과 영원의 불일치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불일치라는 이중적인 불일치를 겪으며 사는 유한자이다.
영화 『인터스텔라』(Christopher Nolan, 2014)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 쿠퍼는 먼 우주의 시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병상의 늙은 딸을 만난다. 아직 젊은 아빠는 ‘꼭 돌아오겠다.’던 약속을 지켜냈지만, 사랑하는 딸 머피는 이미 늙어 세상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늙은 딸’에게는 더 이상 ‘젊은 아빠’와의 재회가 아니라 자손들과의 이별이 중요했다. 병상에 둘러 선 자식들과 손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복감에 젖어 죽어가는 늙은 딸 머피와 짧은 재회 끝에 홀로 병실을 나서는 젊은 아빠 쿠퍼의 발걸음에서 고독의 의미는 역전된다. 『바이센테니얼 맨』(Chris Columbus, 1999)의 똑똑한 로봇 앤드류 마틴(NDR-114) 역시 자신을 구입한 주인이 죽고, 그 딸이 죽고, 그 손녀까지 죽어가는 속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영원하지만 차갑기만 한 생명을 버리고 유한하지만 따뜻한 죽음을 갈구하는 앤드류의 모습에서도 고독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역전된다. 고독은 시간에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다.
만일 우리를 이중적 불일치에 체념하거나 복종한 사람이라고 부른다면, 이경림 시인은 그것에 저항하고 고발한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녀는 꿈꾸는 시인, 영원히 영원을 꿈꾸는 불가능한 꿈의 도전자이다. 만일 우리가 고독하다면 그것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때문이고, 『급! 고독』이 당당하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꿈에 마음껏 도전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체념과 복종이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영원에 갇힌 데 있다면, 이경림의 고발과 저항은 고독의 의미를 역전시킨 데 있다. 시인은 말한다. “흘러가는 구름을 기수급고독원이라 불러도 좋겠습니까”(「기수급고독원」). 고독은 초탈 선사의 게송과 같이 ‘흘러가는 구름’에 올라탄다. 이어서 ‘홀로 울울한 팽나무’에 올라타고 ‘위태로운 까치둥지’와 ‘검은 줄무늬 돌멩이’와 ‘떨고 있는 반백의 저 사내’에게 올라탄다.
흘러가는 구름을 기수급고독원이라 불러도 좋겠습니까
산비탈 공터에 홀로 울울한 팽나무를 기수급고독원이라 불러도 좋겠습니까
우듬지 근처, 위태롭게 얹혀 있는 까치둥지의 검고 성근 속을,
담장을 뒤덮은 개나리덩굴 아래 고양이처럼 앉아 있는 검은 줄무늬 돌멩이를,
엄동에 종일 생선 리어카에 붙어 서서 떨고 있는 반백의 저 사내를,
기수급고독원이라 불러도 좋겠습니까
- 「기수급고독원」 부분
고독을 외롭지 않다거나 쓸쓸하지 않은 것이라고 강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쓸쓸, / 쓸쓸함의 최고봉 / 쓸쓸함의 낭떠러지!”라면서 사전적 의미의 고독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명백히 서로 수명이 다른 구름과 나무와 돌멩이와 사내를 싸잡아 ‘기수급고독원’으로 불러도 좋겠느냐는 반복된 질문은 고독을 고독(孤獨)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변형시킨다. 고독을 겪는 주체를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 사물로까지 확대함으로써 고독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다. ‘급 고독’은 ‘급 고독(孤獨)’에서 ‘급! 고독(高獨)’으로, 또 ‘급(給), 고독’에서 ‘급(急), 고독’으로 변주된다. 고독의 의미에 일정한 변화를 유발함으로써 오히려 그 의미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기수급고독원」에서 고독의 의미 역전이란 고독을 겪는 주체의 외연 확장과 어의의 변주라는 두 가지 길을 통해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언어는 흐른다. 이른 아침 태양도 흐르고 한밤의 우주도 흐른다. 흐름 속에서 흐름에 반하여 시적 언어는 순간과 영원의 불일치와 시간과 공간의 불일치에 저항하며 고발한다. “나는 보았다. 그 속에서 수세기가 내 몸을 돌아 나오는 것을.”(「자정(子正)」) 이 시에 등장하는 도래실(경북 문경)의 많은 사람들은 저항과 고발의 증인이다. 똥장군을 지고 가는 장수 아버지, 취해 비틀거리며 골목을 돌아가던 아랫마을 김 영감은 물론 어머니, 할머니, 구호물자를 받으려 줄을 선 사람들, 악동 형태, 아버지와 광부들, 멋쟁이 신 선생, 봉암사 상좌승. 이들은 마을회관 지나간 밤의 광장 “허공에서 상영되던 무성영화들.”의 등장인물처럼 시인의 가슴에 넘쳐흐른다. 이들은 검은 새를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바람난 옥자’와 같이 “고통처럼 질기고 질긴 가죽혁대”가 되어 흘러가는 시인을 그 흐름에 역행하도록 붙잡는다.
인간은 누구나 서로 다른 공간에서 동시적으로 서로 다른 어떤 사건을 겪는다(공간 배타성). 그러므로 우리에겐 매우 많은 ‘동시대인’들이 주어지지만 결코 ‘같은’ 사람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 다른 시대를 경험한 매우 많은 인류를 포함하지만(시간 배타성), 그것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의 통공(通功, Communio)이다. 흐름에 역행하도록 시인을 붙잡은 ‘수세기’에 걸친 수많은 도래실 사람들은 순간과 영원의 불일치만 아니라 공간과 시간의 불일치에도 저항하고 고발한 주체들이다. 「자정(子正)」의 이경림 시인은 시간에 역행함으로써 흐르는 존재의 순행성에 비장미를 더했다. 그러므로 저항과 고발로서의 역행은 “영원성을 삶의 시간 안에서 실현시키며 살고 있는가”12)라는 도저한 물음에 다다른다.
그러나 시인은 한 발 더 나아간다. “가을비 잠깐 다녀가신 뒤 / 물기 질척한 보도블록에 지렁이 두 분 뒹굴고 계십니다.”(「지렁이들」)라며 크로노스의 뒤통수를 가차 없이 부여잡는다. “한 분이 천천히 몸을 틀어 / S?”라고 물으시자 다른 한 분은 “천천히 하반신을 구부려 / L…… 하십니다”라는 표현은 지렁이의 생태를 통해 순간의 의미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지렁이도 인간도 크로노스의 분절된 시간 앞에서는 근본적으로 같다. 영원이 아닌 어떤 순간도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지렁이들」은 말한다. “아아, 그때, 우리 / 이목구비는 계셨습니까? / 주둥이도 똥구멍도 계셨습니까?” 메말라 죽어가는 지렁이의 양태인 S와 L과 U, C, J, O 등은 수정란의 발생으로 도약한다. 죽음이 곧 탄생이라는 인식은 영원 앞에 선 유한자의 근본적인 도전이다. 그러나 여기서 시인은 한 번 더 크로노스의 뒤통수를 때린다. “그 진창에서 도대체 당신은 몇 번이나 C 하시고 / 나는 또 몇 번이나 S 하셨던 겁니까?” 죽음도 반복되지만 탄생도 반복되는 것이다. 「지렁이들」에서 크로노스는 뒤통수를 세 번 얻어맞았다. 한 번은 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또 한 번은 죽음에서 탄생으로의 도약에서, 세 번째는 죽음과 탄생의 무한 반복을 통해서.
펼침
임계점까지 구겨지고 접히고 되접히는 가슴, 숨 막히는 절망의 순간과 극한의 고통 끝에 만나는 환희가 있다. 시란 시인의 가슴에 접히고 되접힌 어떤 응어리의 펼침이다. 꼬깃꼬깃 접혀서 더는 접힐 수 없는 응어리가 일순간 펼쳐지는 게 시다. 그것은 시인의 작의가 관철되는 표현이 아니라 분출이다. 분출되는 시는 우선 시인 자신을 위로하고 독자를 위로하고 그럼으로써 세상을 향해 구원을 빛을 던진다. 꿈을 믿는다면, 그것은 우발적인 분출의 순간을 기다리는 바람 때문이다. 시인은 꿈꾸는 자일 수밖에 없다. 시인에게 시의 행로는 언제나 불규칙적인 점멸이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어떤 본질적인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시의 우발성이다. 시의 불규칙적 강림 이외의 제반 압력은 비본질적이다. 그러므로 탄생의 순간은 언제나 환희의 순간이다.
그러므로 펼침은 표현이 아니라 드러남이다. 기다림이 절박한 만큼 환희도 통렬해지는 시의 특성은 “표독한 자아, 극단의 주체가 오라!”13)고 외치는 패기 넘치는 시적 도발의 윤리적 근거이다. 택시 운전사인 ‘옆집 남편 b’를 분류하는 이경림 시인의 펼침은 도발적이다. b는 ‘불타는 눈깔’이자 ‘늪에 빠진 시계’이다. 또 ‘섹스하고 싶은 나나니벌’이며, ‘나무 가지에 날아든 수리부엉이’이며 ‘와르르 무너지는 굴뚝’이다. ‘쏟아지는 빙하’이며, ‘똥통 벽을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구더기’이며, ‘날뛰는 똥’이며, ‘뒤집힌 풍뎅이’이다(「비유적 분류」). “그외에도 그를 분류할 이름들은 만화방창이다.” 그것은 “꽃들의 종류와 형상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손님을 찾는 택시 기사의 분류에 한계란 있을 수 없다. 그가 날마다 만나는 헤아릴 수 없는 사건의 계열 속에서 그는 시시각각 다른 술어를 필요로 드러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펼침이 도발적인 것은 ‘눈깔’이나 ‘시계’, ‘나나니벌’, ‘수리부엉이’, ‘굴뚝’. ‘빙하’, ‘구더기’, ‘똥’, ‘풍뎅이’와 같은 명사 때문이 아니다. 본질상 택시 운전사는 사건을 선택할 수 없다. 그는 우발적으로 전개되는 사건의 수신자이지 발신자가 아니다. 사건을 예측할 수 없는 만큼 택시 운전사 b를 분류하는 비유어에도 한계란 있을 수 없다. 도발은 이것이다. 술어적 사건이 택시 운전사를 정의한다는 것. 때문에 사물과 사람, 동물과 곤충과 구더기와 똥이 얼마든지 그를 정의하는 속성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이 ‘옆집 남편 b’를 “꽃의 시간을 지나가는 중”이라고 말할 때에도 의미의 착란 없이 손쉽게 납득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아, 꽃들은 가마솥에 빠진 새끼 밴 고양이, 장작불에 얹힌 생닭, 금방 쏟아지고 말 먹구름, 없는 자정.”이라는 펼침도 부조리극의 대사가 아니라 술어적 우발성의 드러남으로써 매우 적실해진다.
Na와 na와 NA라는 2진법의 경우의 수를 모두 사용하는 「Na, na」도 펼침의 환희를 부르는 참신한 발상과 전개가 돋보인다. 고갱의 대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와 같이 모두 63행에 이르는 이 작품은 화자의 발화 시점을 기준으로 Na와 na에 얽힌 구체적인 에피소드가 유장하게 펼쳐진다. Na가 na의 마지막을 거두고 있는 첫 행부터 “늑대 한 마리가 태어나고 있다”라는 마지막 행까지 꼭짓점 없는 직선 같은 흐름으로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그때 na와 또 다른 na는 하굣길에서 깔깔거리던 단발머리 여중생으로 ‘독, 재, 타, 도’를 외치며 ‘어딘지 중앙’으로 몰려가는 성난 na들을 바라보는 구경꾼이었다. 몇 발의 총성과 매캐한 최루 연기가 폭죽처럼 터지는 도로에서 방향도 모르고 질주하는 토끼였다. 그렇게 뒤죽박죽 뒤엉킨 도로에서 na는 동행하던 na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첫 행의 Na가 na의 마지막을 거두고 있는 이유를 어림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중생인 na를 통해 Na는 적어도 그의 부모 세대임을 추정할 수 있고, NA는 타도의 대상인 성난 독재자로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시의 초반부(1~3연)는 na의 마지막을 거두는 Na와 그 사정을 드러내고 있다.
시의 중반부(4~8연)는 맞배지붕처럼 시제와 현실을 벗어나 수직적 이미지 속에서 na와 Na는 어디로 가며, 누구인지를 묻고 또 묻는다. ‘꽃비’가 내리는 필생처럼 na가 옷 벗기(몸 벗기 혹은 죽음)를 완성할 때 늑대는 태어난다. 죽음과 태어남 혹은 내림과 오름의 수직적 연결을 통해 안타까움과 쓸쓸함의 정조가 강화된다. 그러면서 갑자기 ‘요술 공주 핑키’를 등장시켜 “예쁜 핑키 여우 같은 핑키 염통도 없는 핑키 / 간도 쓸개도 밥통도 없는 두부 같은 핑키 / 핑키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닐 핑키”라며 조롱과 탄식과 비아냥과 회한을 뒤섞어 비장미를 더한다. 여중생 na의 마지막은 거리에서 드러났다(“촛대처럼 검게 서 있는 가로수”). 때문에 “그때 na는 그 무엇도 아니었을까 나무와 나무 사이를 떠도는 어떤 기미도”라는 시행은 더욱 절실해진다.
시의 후반부(9~12연)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한 언덕을 다 잡아먹고도 사라지지 않는 Na”를 질책하고, ‘환장하게 이쁜 na’가 껌을 짝짝 씹으며 슈퍼마켓에 들어서는 것을 본다. 또 ‘은행나무 아래 수도 없는 na들이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는 것을 보고, 숯불구이 광고 현수막은 ‘미친 듯 떨고’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마침내 “어디선가 꽃비가 내리고 있다 / 늑대 한 마리가 태어나고 있다”.로 마무리된다. 「Na, na」는 na의 마지막을 거두는 Na로 시작하여 늑대의 탄생에 이르는 흐름을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드러내고 있다. 들뜨지 않은 처연한 분위기 속에서 na를 위무하고, Na를 승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록 음악의 초고음의 샤우팅이 아니라 시작도 끝도 좀처럼 구별하기 어려운 장중한 아악14)과 같은 목소리다. 그것은 여중생 na의 꽃비 내리는 마지막이 한 마리 늑대의 탄생으로 이어지듯 죽음도 탄생도 모두 하나로 연결된 이어짐이라는 연속성의 철학에 가 닿는다.
‘표현이 아니라 우발적 분출’로서의 펼침의 필연성에 동의하는 것과 그 드러나는 양상의 필연성에 동의하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다. 「지렁이들」과 「Na, na」, 「시인 K의 하루」 등의 뛰어난 성과에도 불구하고 핵심적 의미가 비언어적 의미화에 의탁하는 일은 표현주의자의 지나치게 의욕적인 개입으로 보인다. 시인이 경계해야 할 것은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전언도 있거니와 참다운 시인은 자연스런 흐름으로서의 펼침을 기다리는 데 소홀할 수 없다.15) 의미의 겸허한 수신자가 아니라 의욕적인 발신자를 지향할 때 시인은 가장 위험한 순간에 직면한다. 모든 시는 시 양식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존재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의 몫이지 시인의 일은 아니다. 이것이 시 양식의 진정한 압력이다.
『급! 고독』이 보여준 놀라운 펼침의 환희는 평생을 두고 나날이 거듭되고 반복된 접힘의 결과이며, 그것은 순간과 영원과 시간과 공간의 이중적 불일치에 맞선 한 도전자의 역전과 역행을 통해 관철되었음을 확인한다. 모든 공존 가능한 것들의 무한한 접힘의 세계가 이경림의 시적 존재론이라면 그 표현태로서의 펼침은 시적 윤리학이다. 인간을 향해 구원의 빛을 던지는 언어의 접힘과 펼침을 통해 『급! 고독』은 크로노스의 뒤통수를 부여잡은 영원한 청년의 기록이 되었다.
<각주>
1) 기원전 360년경에 쓴 플라톤의 자연철학 저술로 소크라테스와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 등이 우주와 인간, 혼과 몸 등에 관해 대화하는 내용이다.
2) “철학자는 때로 시인들을 경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철학의 무의식이다.”, 신형철, 「감각이여, 다시 한 번 - 김경주의 시에 대한 단상」,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p.297.
3)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장희창 옮김), 민음사, 2004, pp.11-12.
4)니체는 10대부터 말년까지 일관되게 시를 적은 시인이었다. 뷔르바흐(Friedrich W?rzbach, 1886?1961)가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벳(Elisabeth F?rster-Nietzsche, 1846-1935)의 허락을 받아 편집한 무자리온 판 니체 전집 제20권에는 소년 시절부터 말년까지의 시들이 모두 들어 있다. 아키야마 히데오?도미오카 치카오 엮음, 『니체전시집』(이민영 옮김), 시그마북스, 2013., 참조.
5)이경림, 「시인 K의 하루」, 『급! 고독』, 창비, 2019, p.81.
6) 「시인 K의 하루」는 익명화된 발신자들인 ‘R-E-H-O-N-K-O-H-C-R-H-O-알 수 없음-B-MM-알 수 없음-R-C-Y-M-U-L-Y-C-@-D-$-W-&’ 등이 보낸 29건의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7) 크로노스의 어의는 ‘시간’이며, 그리스 신화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에서도 시간을 의미했다. 보통 형태가 따로 없는 무형의 신으로 묘사되거나 형태가 있는 경우 긴 수염을 가진 늙은 현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티탄인 크로노스(Cronus)와는 다른 신이다.
8) “천 갈래로 길이 나 있는 모든 다양체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목소리가 있다. 모든 물방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고, 모든 존재자들에 대해 존재의 단일한 아우성이 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차이와 반복』(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p.633.
9) “세계의 논리는 독특하게 변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산하는 놀이가 됐기 때문이다.”, 질 들뢰즈, 「영혼 안의 주름」,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이찬웅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p.150.
10) 질 들뢰즈, 「영혼 안의 주름」,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이찬웅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p.150.
11)“‘순간성’과 ‘현재형’을 근간으로 하는 ‘서정’ 원리는 ‘시간’ 형식과 구체적으로 결속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다.”, 유성호, 「시간 형식으로서의 서정」, 『서정의 건축술』, 창비, 2019, p.37.
12)“단독자인 나는 일상적 시간을 넘어 승화된 순간들, 죽음의 영역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삶의 고양을 가져오는 순간들을 맞이하면서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 이성혁, 「단독성과 영원성」, 『서정시와 실재』, 푸른사상, 2011, p.111.
13)류신, 「반서정의 잔혹극」, 『말하는 그림』, 민음사, 2018, p.421.
14) “아악의 시작은 시작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끝은 끝이 아니다. 또한 시작도 중간 같고 끝도 중간 같다. 이 비드라마적인 허술한 구조의 중간이 내가 태어나고 살고 죽는 시간과 공간이다.”(강조- 인용자), 전영태, 「끝도 시작도 없는 음악의 미로(迷路)」, 『쾌락의 발견 예술의 발견』, 생각의나무, 2006, p.72.
15) “서정시가 소리와 뜻 사이의 망설임이라고 말한 시인의 말은 골똘히 음미되어야 한다.”, 유종호, 「시적이라는 것」, 『시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5, p.251.
<당선소감>
"편린 속에 문학 표정들 남아 있음을 생각"
원적에 따르면 관향이 선산인 저의 할머니는 일제의 폭압이 드높던 1920년 장흥군 건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열일곱에 혼인하시어 강원도 삼척 두메에서 마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큰아들을 일본 아이치현에서 낳고 칠남매 막내를 효고현에서 보았으니, 할머니의 삶은 그다지 길지 못했으나 터는 좁았다 말하기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태어난 저는 으레 있을 법한 조손간의 정리는 쌓을 수 없었고, 아버지를 빌어 겨우 당신의 기억을 몸에 새겼을 뿐입니다.
거시 역사의 문맥에서 할머니의 삶은 이민족 제국주의의 수탈과 동족 간 살육과 독재와 쿠데타로 점철된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만, 사람의 삶에 꼭 그런 신산고초만 가득했겠습니까. 할머니가 장흥에서 보았던 것, 아이치현과 효고현에서 겪었던 것, 삼척에서 일구었던 것들 속에 그녀의 희로애락이 있었고, 떠난 지 62년이 흘러 이제는 알 수 없는, 그 수많은 편린 속에 또한 우리 문학의 표정들이 남아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제가 만일 진실한 문학평론가라면 작품 속에서 보아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겠습니다. 사람의 모습 및 그의 행적과 그의 기억을 찾아내 독자들과 함께해야 하겠습니다. 야심한 기획이나 시시콜콜 논평이 아니라 작가들이 영혼을 바쳐 이룩한 문학작품의 인간학적 아름다움을 그 높이대로 살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문학이 우리와 함께 우리의 삶을 도닥이고 주무르며 가로지르는 만화경을 그것대로 보이는 일이겠습니다.
언제나 앞서서 시의 길을 걸어가고 계신 스승 이시영 선생님, 박물학적 지식과 그보다 더한 애정을 문학에 쏟고 계신 스승 전영태 교수님, 늦된 제자를 이끄시어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게 해 주신 스승 유성호 교수님께 삼가며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또한 주제를 모르고 텀벙대는 한 사내를 곁에서 지켜주고 있는 김정선 작가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무엇보다 부족한 작품을 당선작으로 지지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부터 제가 할 일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제 빈 주머니에 마중물 같은 맑은 구슬을 넣어주신 심사위원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따르는 것입니다. 정진하겠습니다.
● 강원 삼척 출생
●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 한양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 2003년 중앙일보 제4회 중앙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
<심사평>
"문제의식 거창·인용 현란…논리 완결성 갖춰"
비평은 텍스트에 대한 읽기의 재구성이나 주석을 덧붙이는 일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새로운 문제설정에 입각하여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작업이 되어야 할 터다. 즉 텍스트를 매개로 삶과 세계에 대한 기존의 일반적인 자동화된 인식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재고할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설득하거나 공유하는 일이 비평의 요체라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비평을 단순한 해설이나 감상문, 보고서와 구별하는 결정적인 지점이다. 하지만 응모작 중 상당수는 스스로의 읽기에 대한 해설 또는 거창한 철학과 이론을 인용한 주석 달기에 도취된 상태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좋아서 또는 소위 ‘꽂혀서’ 어떤 텍스트에 대해 썼겠지만 왜 ‘지금 여기’ 이 텍스트를 통해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가에 관한 고민은 언제나 동반되어야 한다.
‘고독은, 크로노스의 뒤통수를 부여잡고’ 또한 이러한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작품에 대한 세부 논의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많았다. 문제의식은 거창했고 인용이 현란했다. 하지만 ‘접힘’(‘되접힘’)이라는 시 읽기의 틀을 설정하여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솜씨가 좋았고 이에 기초한 논리의 완결성을 갖추고 있었다. 이경림의 시집 ‘급! 고독’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개진하려는 의욕도 엿보였다. 나름 비평적 문체로서 신뢰할 법한 개성적 스타일이라고 할 만한 것을 구현하고 있었고 동서고금의 다양한 문헌과 사상을 스스로의 논리로 귀일시키는 독법 또한 다소 현란했으되 나쁘지 않았다.
‘지금 당신의 ‘이웃’은 어떤가요’ 외 2편은 응모작 중 가장 안정적인 문체와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소설 ‘네 이웃의 식탁’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 연극 ‘희작’에 관한 각각의 서로 다른 세 편의 평론을 한꺼번에 응모한 의욕이 놀라웠고 만만치 않은 박람강기 또한 돋보였다. 그러나 한 편을 제외하면 ‘지금 여기’에서 왜 이 텍스트가 논의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의식이 다소 희박했다. 또한 나름의 비평적 입장을 개진하기보다 여러 텍스트에 대한 지적인 해설에 충실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손에서 내려놓게 되었다.
‘끊임없이 의심하라’는 쉬운 문장으로 응모작 가운데 가장 선명한 입장을 개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 당신의 ‘이웃’은 어떤가요’의 완전한 대척점에 있었다. 영화 ‘랑종’에 관한 흥미로운 독해에 기초하여 일관된 논지를 견지하고 있었다. 함께 사유할 만한 문제의식이 제시되고 있다는 점도 돋보였다. 다만 일반적인 영화 리뷰에서 볼 법한 문구와 찬사로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텍스트에 대한 비평적 읽기의 거리를 확보하고 있는가에 관한 의구심이 들었고, 흥미로운 논의 끝에 일반론으로 수렴되는 결론도 다소 맥 빠지는 감이 없지 않았다.
지금 여기 비평은 무엇이며 어떻게 써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게 되는 순간 중 하나가 비평 심사를 담당할 때이다. 수상작 및 위에 거론한 작품을 포함하여 몇몇 응모작은 심사자로 하여금 이러한 문제를 사유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거울처럼 작용했다. 심사자에게 있어서 소중한 배움의 기회였다. 수상자에게 축하를 전한다.
심사위원 : 조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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