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부산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길 잃은 현존재들의 시간 / 최범석
<당선작>
길 잃은 현존재들의 시간 - 찰리 카우프만‘이제 그만 끝낼까 해’ / 최범석
Ⅰ. 방향 상실의 로드 무비
영화의 원제는 ‘i’m thinking of ending things’다. ‘이제 그것들을 끝낼 생각이다’이거나 ‘나는 끝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이다. 주인공 루시는 만난 지 6, 7주 된 남자친구 제이크의 가족을 만나러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루시는 처음부터 끝나는 것, 끝낼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끝까지 그 생각을 따라간다. 영화는 고전 영화의 1.33:1의 좁은 화면비를 활용하면서 루시와 제이크의 대화와 둘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가 시작한 후 30분 동안 자동차 안에서 루시와 제이크의 대화를 보여주고 다음 30분간은 제이크 부모와의 이상한 사건을 보여준다. 남은 1시간은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루시는 끝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만 원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상한 곳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영화는 가장 기이한 로드 무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조리극의 스타일을 활용하는 영화는 이상한 회귀의 여정 속으로 관객을 이끌고 간다.
영화의 주제의식은 하이데거의 저작 <존재와 시간>과 이어진다. 시간의 인식과 불안 같은 것들이 그러한데 하이데거는 인간을 시간과 존재의 의미를 더한 현존재라는 개념으로 일컫는다. 존재는 시간화하며 세계 속에 공존한다. ‘나’를 현재라는 시간성 속에서 밝혀내고자 했던 시도는 ‘이제 그만 끝낼까 해’의 여정과 맞닿아있다. 본 비평은 ‘이제 그만 끝낼까 해’를 <존재와 시간>에서 드러난 하이데거의 시간과 존재에 대한 인식과 함께 읽어낼 것이다.
1. 분절된 순간의 중첩과 반복
영화는 끊임없이 중첩의 과정을 거친다. 모든 시간(과거, 현재, 미래)이 그렇고 모든 인물들이 그렇다. 루시는 제이크고 그의 부모이기도 하며 청소부, 털시 타운의 직원이기도 하다. 루시의 직업은 물리학자였다가 화가, 영화 전문가, 노인학 학생, 웨이트리스가 된다. 제이크의 집에서 본 어린 시절 사진은 루시의 어린 시절로 착각되고 제이크 부모의 집에서 돌아올 때는 루시와 제이크의 성격이 바뀌기도 한다. 제이크는 울 것 같다가도 마치 그런 대화를 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갑자기 장난기가 있는 성격으로 바뀐다. 브르르 때문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핸들을 친다. 루시는 신경질적이었다가 이내 차분해진다.
사건 역시 중첩 혹은 대체의 과정을 거친다. 둘은 식사를 회상하는데 제이크는 영화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와 루시의 대화는 잘 통했고 루시는 와인을 많이 마셨다. 루시는 제이크 부모의 집으로 가는 도중 살면서 가장 많은 헛간을 봤다고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농장이 있는 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고 말한다. 루시는 제이크가 자신을 에임스라고 부르는 걸 듣고 생경해한다. 영화는 끊임없이 자신이 준 정보를 반박하고 갱신하는 방식을 반복한다.
영화에서 제이크와 가장 많이 겹쳐 보이는 사람은 털시 타운의 직원과 청소부다. 제이크와 청소부가 건네주는 슬리퍼가 같고 제이크의 세탁기에 있던 R이 쓰인 옷과 청소부의 옷이 같다. 청소부가 강당에서 연습하는 배우들을 쳐다보는 것은 마치 그가 뮤지컬 ‘오클라호마’를 연기했던 과거를 떠올리는 듯하다. 차에서 떠나지 못하는 청소부는 제이크 부모의 다툼과 루시가 집으로 오던 날의 제이크를 떠올린다. 시점 쇼트로 제이크를 비추기에 이 시선은 루시의 것 같기도 하다. 제이크는 학교에서 배척당한 부류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때 인서트 장면의 학생은 털시 타운의 직원이다.
동일시의 과정과 함께 끊임없이 분절되는 상황도 생성된다. 영화 연출적으로 컨티뉴이티는 끊임없이 깨어진다. 연속적인 장면이라 하더라도 카메라 위치가 바뀔 때 인물의 위치도 바뀌어 무언가 변한 듯한 느낌을 준다. 루시의 행동이 연속적이라도 주변 인물들이 어느새 다르게 행동하거나 대화의 분위기가 달라져 미묘하게 시간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의 상황들은 시간적으로 분절되었으나 동시적인 성격을 지닌다. 제이크의 아빠는 한순간 머리가 세고 기억을 잃어버리며 엄마는 침대에서 죽어간다. 아빠는 이내 젊어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한 공간에 분절된 시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엄마는 젊어지고 제이크의 이유식을 묻힌 옷을 세탁해 달라고 말한다. 그 옷은 늙은 제이크 엄마의 옷이자 이후 제이크 아빠가 가져다주는 옷이기도 하다. 시간은 교차되고 물건(옷)에 과거와 현재, 미래의 흔적이 남는다. 이와 함께 강아지 지미가 남기는 지하실 문의 자국도 시간의 흔적이다. 어린 시절 제이크의 방에는 루시의 시 ‘본도그’가 있는 책이 있고 죽어버린 혹은 죽을 지미의 유골함이 있다. 또 제이크가 브르르를 버린 고등학교의 쓰레기통에는 브르르 컵이 수백 개가 꽉 채워져 있다. 이처럼 흔적 보관소 혹은 기록물로서의 물건과 공간은 계절에 따라 꽃이 피어나고 지듯 유사한 형태의 삶이 반복적으로 지속되었음을 암시한다.
시간의 분절적이며 동시적인 성격은 루시의 말과 연결된다. 루시는 우리가 시간을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정지해있는 우리를 지나간다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주체성이 아니라 시간에의 수동성을 보여준다. 루시가 제이크의 부모를 지나가는 시간인 것처럼 느껴졌을 때 그녀는 제3자의 위치에서 쇠락해가는 가족을 바라본다. 하지만 루시는 다시 시간에 놓인 인간이 된다. 인간은 종속적인 위치에서 시간을 왜곡시킨다. 루시가 창밖에서 본, 차에만 내리는 눈은 시간이란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동차는 겨울이 지나도 부모의 집에 처음 도착한 계절을 기억한다. 영화에서 시간의 상대성은 물리학이 아니라 인지에 관한 것이다.
루시가 시간이 우리를 지나쳐간다고 할 때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우리가 시간을 지나쳐가고 있다고 믿지만’이라는 대사다. 우리는 시간을 종종 혹은 자주 오해한다. 인간이 정지시켜놓은 시간은 그 자체의 정지라기보다는 인식이 행한 정지일 것이다. 시간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라 주관적인 인식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기억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시간이 연속된다는 인식은 통속적이다. 하이데거는 시간성을 기재하면서 현전화하는 장래로서의 근원적 시간과 지금이라는 시점의 연속으로 이해된 파생적 시간으로 나눈다. 근원적 시간은 또한 본래적 시간성과 비본래적 시간성으로도 구분된다. 본래적 시간성은 죽음으로 선구하면서 기재를 반복하는 순간으로서의 시간성이며, 비본래적 시간성은 예기하면서 간직하고 기재를 망각하는 현전화를 말한다. 영화는 통속적이고 파생적인 시간으로부터 탈피하고 근원적 시간으로 향하지만 본래성을 찾는 문제에 있어 망설이고 또 망설인다.
본래성을 찾으려는 과정에서의 인식은 감정과 시간, 심지어 존재까지 정지시키고 왜곡한다. 강아지 지미는 두 번째 등장에서 루시의 앞에 있다는 정보는 있지만 화면에 나오지 않고 세 번째 등장에서는 화면에 나오지만 인물들은 지미를 마치 없는 것처럼 대한다. 있는 것은 없는 것이 되고 없는 것은 있는 것이 된다. 공간에 남겨진 시간은 지미와 마찬가지로 자주 전복된다. 루시와 제이크가 나누는 색에 대한 상대적인 인지의 이야기도 그와 관련된 것이다.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성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화하는 것이다. 시간화는 과거-현재-미래가 아니라 도래(자신보다 앞서다)-기재(이미 존재하다)-현전(존재와 함께 존재한다)이라는 개념으로 이루어진다. 현존재는 죽음과 관련된 존재이기에 다른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가능성과 함께 고유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시간에 관계된다. 하이데거에게 시간이란 지금이란 시점의 연속이 아니다. 그렇기에 통속적인 시간 인식에만 머무를 경우 목전의 현재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이때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것은 본래적인 자기로 도래하기 위한 죽음으로의 선구다. 극단의 가능성 앞에서 과거를 근원적으로 반복하면서 진리를 드러내는 상황이며 현재는 순간(Augenblick)이 된다. 영화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고 시간은 목전의 현재로만 인식되지 않는다. 모든 시간은 순간이 된다. 죽음에 선구하려는 시도 속에서 매순간 자신을 전체로 구현하는 분절된 순간을 목도한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한 개인의 시간뿐 아니라 모든 인물들의 시간을 현재로 두는 과정에서 시간의 혼란이 온다.
영화는 근원적 시간 속에서 시간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고 있지만 본래적 시간성만을 발견하지는 않는다. 영화의 초점은 결과보다 과정에 있다. 루시는 죽음 앞에서 비본래적인 자신을 끊임없이 발견하는 과정을 지속한다. 이러한 시간의 문제는 곧 인식의 문제로 이어진다. 인식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이 없는 풍경화인 루시의 그림에서도 연결된다. 그림에 사람을 등장시키지 않고 화가의 감정을 느끼게 하려고 한다는 루시의 말에, 제이크의 아버지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면 감정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느냐고 묻는다. 루시는 환경에서 느끼는 것은 자신이 느끼는 것이며 환경 자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동시에 내려다보지 않고 앞을 보며 풍경을 본다면 무언가를 느낄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인식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의 테마에 맞춰 본다면 시간에 적용됨을 알 수 있다. 이때까지 통속적인 인식으로 시간을 이해해왔다면 죽음으로 선구하면서 시간을 다시 인식하고 현재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가능하다.
2. 끝내지 못한 것들의 불안
영화는 돌아와야 한다는 목적을 향해 달리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 루시는 끝나는 것에 대한 질문을 지속한다. 부모의 집으로 가는 차에서도, 지속되는 반복의 계단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그녀가 지은 ‘본도그’라는 시는 루시가 결국 이루지 못한, 돌아오는 것의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루시의 여행은 출발에서부터 비극적인 결말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언제나 진정한 회귀가 아닌 길을 회귀라 믿으며 반복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루시는 집에 돌아왔으나 다시 떠났고 셀 수 없이 많은 회귀와 떠남의 반복 속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완전히 돌아오지도 못하는 삶을 보냈을 것이다. 이것은 영화가 삶 자체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다고, 적어도 나아지지 않는 삶이 언젠간 나아질 것이라 믿고 있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루시가 끝낼 것을 끝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자의를 넘어선 외부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는 루시를 잡아두려 한다. 직원은 루시에게 앞으로 갈 필요가 없으며 털시 타운에 남아있어도 된다고 말한다. 최초의 목표를 기억하는 루시와 제이크는 체인을 단 자동차를 달고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경로는 이탈되고 제이크는 루시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브르르를 버린 후에 제이크는 키를 뽑고 출발을 하지 않는다. 집으로 가자는 말에 농장 집을 말하는 거냐고 묻기도 한다. 루시와 키스를 하고서는 어디서 자신을 보는 청소부를 발견했다고 말하며 키를 가지고 남자를 찾으러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루시가 오랫동안 기다리다 나왔을 때 닫힌 문은 얼어버리고 루시의 앞에는 고등학교가 있다. 그곳은 루시가 가려던 곳과 전혀 동떨어진 곳이다. 루시와 제이크의 대역이 있는 고등학교는 루시의 과거로의 회귀로도 보이지만 그곳에서 목격하는 것은 대역의 재연과 죽음이다. 그곳 역시 그녀가 진정으로 돌아갈 집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영화는 종착점을 끝없이 비껴가는 길을 인간의 운명으로 본다. 그러한 태도는 영화의 연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이크의 부모를 기다리며 소파에 앉을 때 카메라가 선행해서 소파나 턴테이블을 가리키면 이후에 그들이 그곳으로 따라간다. 이것은 그들이 필연적으로 혼란스러운 집으로의 방문과 불가능한 귀로를 반복해왔음을 의미한다. 저녁 식사가 나와도 아무도 음식을 먹지 않은 채 식사가 끝나는데 이것을 치우는 사람은 처음 보는 손님인 루시이며 제이크의 가족은 가만히 있는다. 루시는 마치 이 집에 오래 와본 사람 같은 행동을 한다. 그렇다면 루시의 제이크의 부모 집 방문은 처음이 아니며 그녀는 늘 제이크, 그의 부모와의 관계를 끊고 떠나려는 생각을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후회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끝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해 영화는 강박적인 자문을 한다. 그것은 루시에게 걸려오는 전화로 알 수 있다. 안경을 써야만 전화를 받는 루시는 루시와 루시를 지칭하는 이름인 루이자로부터 계속 전화를 받는다. 영화에 삽입된 영화의 주인공 이본, 후에 루시와 대체되는 인물에게서 전화가 오기도 한다. 통화 내용은 영화의 도입부에 루시를 내려다보는 청소부가 중얼거리는 말과 겹쳐진다. '그 가정은 옳다. 내 두려움은 커진다, 이제 대답할 시간이다. 질문은 단 하나'라는 중얼거림 이후 전화는 같은 목소리로 '풀어야 할 의문은 하나다. 무섭다. 내가 미쳤나. 정신이 혼미하다. 그 가정은 옳다. 내 두려움은 커진다. 이제 대답할 시간이다. 질문은 단 하나'라고 한다.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하고 심적인 확신도 있다. 그리고 대답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대답을 독촉하는 전화는 루시를 계속 압박한다. 청소부가 루시로 동일시된다고 보면 전화는 루시가 자신에게 하는 독촉일 것이다. 끝낼 것을 생각한다는 루시의 직접적인 나레이션보다 중압감 있고 집착적인 느낌을 준다. 흐릿한 것을 명확하게 보게 하는 안경 착용의 행위는 자신의 상황을 바로 보려는 행위다. 그렇게 루시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행동하지만 결국 끝낼 것을 끝내지 못하고 돌아오려는 곳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인간의 존재를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것은 죽음의 불안이다. 불안이 불안해하는 것은 내던져진 세계-내-존재 자체다. 비본래적인(uneigentlich) 실존, 자신의 고유한 삶이 아닌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사는 삶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섬뜩하고 낯선 존재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것을 용기 있게 인수함으로써 죽음으로의 선구를 실천할 수 있다. 루시에게는 돌아와야 한다는 것, 무언가를 끝내야 한다는 것, 특히 제이크와의 관계를 끝내야 한다는 다짐은 불안은 일으킨다. 강박적인 자문으로도 그것은 실천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선구하는 것이 본래적인 실존을 비약하는 것을 의미하며 불안은 기쁨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루시는 기쁨으로의 전환을 마주하지 못한다. 그리고 영원한 퇴락과 반복의 구조를 따른다. 현존재의 존재 양식을 지닌 인간은 퇴락하면서 자신을 도구처럼 기능하게 하고 본래성을 잃어간다. 불안에 근거하는 퇴락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면서 세계 내부적 존재자에 몰입한다. 내부적 존재자는 제이크와 그의 가족이며 루시의 본래성으로의 회귀를 은연중에 방해하고 있다. 루시는 그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닌 일상적이고 친숙한 세계로 향하면서 끊이지 않는 불안 속에 살게 된다.
루시가 고등학교에서 사라져버리면 청소부가 시선의 중심이 된다. 청소부는 가짜 눈이 쌓인 남자 앞에서 청소를 하고 퇴근하려 한다. 트럭에 쌓인 눈을 치우고 들어가지만 키를 꽂지 않고 출발하지 않는다. 눈길을 달리는 상상을 하지만 차는 달리지 않고 눈에 덮여간다. 제이크의 시간에 대해 생각을 하던 청소부는 서서히 숨이 막혀온다. 괴로워하다가 옷을 모두 벗으면 털시 타운의 애니메이션 광고가 차창에 펼쳐진다. 어린 시절의 향수를 가져다주는 광고는 곧 구더기가 가득 찬 돼지 애니메이션으로 이어지고 돼지처럼 살찌고 하얀 나체를 한 청소부는 돼지를 따라간다. 청소부와 돼지는 서로가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돼지는 청소부에게 물리학자라고 말한다. 끊임없이 루시, 제이크와 중첩되는 청소부는 어린 시절의 순수한 판타지가 썩은 돼지로 변하고 그것이 자신과 동일시되는 과정을 마주한다. 그리고 옷을 입자는 돼지의 말을 따라 도달한 곳은 과거의 제이크가 공연했던 뮤지컬 ‘오클라호마’의 넘버 ‘Lonely room’이 공연되는 이상한 노인들의 시상식이다. 못생기고 나약하지만 진실된 나체는 그로테스크한 꿈을 옷으로 입은 채 자신을 거짓으로 가린다. 청소부 또한 돌아가야 할 곳에 가지 못한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으로 고등학교에 주차된, 눈이 덮인 자동차를 보여준다. 현실적인 장면으로 돌아오는 것은 이상한 시상식, 공연을 더욱 허구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여전히 집으로 가지 못한 상황을 인지하게 한다. 자동차는 목적지를 정하는 주체가 아니며 운송 수단일 뿐이다. 방향은 운전자가 정한다. 영화가 눈 덮인 자동차에 초점을 맞췄을 때 그것은 중단된 여로와 부재한 주체를 뜻한다. 여기서 의구심이 드는 것은 차 안에 정말 아무도 없는가이다. 마지막 장면에 주체가 존재할 수도 있다. 영화에서 가시적인 시간 점프가 일어난 시점은 차에 혼자 남겨져 벌벌 떨게 된 루시를 보여준 이후부터다. 루시가 자동차 밖을 나간 시점을 환상의 시작이라고 보는 시각도 가능하며 영화가 마지막에 보여주는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집은커녕 자동차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한 루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자동차 소리와 제설 작업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화면은 변화가 없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변화를 욕망하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영화의 원점 회귀와 이탈된 경로는 동일한 뉘앙스로 이야기된다. 선택과 행동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국 진정 원하던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인간은 살면서 수많은 마지막을 외쳤고 다른 형상의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진짜 마지막을 외치지 못한다. 영화는 수많은 후회의 반복을 통해 인간 역사를 비유한다. 주인공 루시의 이름이 태초의 인류를 뜻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3. 낡은 집에게 새 그네의 필요
죽음으로의 선구는 현존재의 의미를 시간성으로 드러낸다. 죽음은 인간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이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지만 인간은 본래적 삶에서 도망치면서 불안해한다. 죽음으로 선구하는 과정에는 자리하는 무의미의 심연 때문이다. 모든 일상적인 세계의 내부적 존재자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날 때 일상적인 편안함은 한꺼번에 무너진다. 현존재는 불안이라는 기분 속에 세계-내-존재로서 단독자가 되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 상태(ungeheuer) 속에 존재하게 된다. 섬뜩한 세계는 현존재의 근원적인 실상에 가깝고 현존재가 도피하는 곳은 편안하고 친숙한 일상적인 세계이다. 그렇기에 죽음 앞에 선 현존재는 섬뜩함과 불편함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통속적인 시간으로 편입되는 길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청소부의 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사야 구절은 죄가 주홍 같더라도 하얗게 희어질 것이라고 한다. 영화의 인트로나 루시의 머리카락, 제이크의 집 안은 주황색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하얗게 변한다. 눈이 내리는 부모님의 집이나 고등학교는 하얗게 변하고 자동차도, 영화의 미장센도 하얗게 변한다. 노화는 무기력해지고 나약해지는 과정으로 보인다. 속죄되는 과정이 생명력을 잃어가는 과정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이러니한 느낌을 준다. 제이크의 아빠는 제이크의 엄마를 앞에 두고 그녀에게서 사라진 예전의 모습을 그리워하는데 이것은 영화 전반에 흐르는, 지나가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루시는 먹고 자고 싸기를 반복하는 양과 죽은 양을 측은하게 보지만 그것은 인간 자신에 대한 자조다. 배에 구더기가 차서 죽은 돼지 역시 그렇다.
노화에 대한 허무적 감각은 루시가 농장으로 가는 길에서 본 버려진 집의 새 그네에서부터 시작한다. 루시와 제이크는 다 낡은 집에 새 그네가 있어서 무슨 필요가 있는지 묻는다. 대화의 초점은 새 그네보다 낡은 집에 맞춰져 있다. 낡은 집에 쓸모 있는 것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낡은 집을 노인으로 대치한다면 이 말은 꽤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이러한 허무적 감각은 노화뿐 아니라 삶 자체에 적용되어 있다. ‘본도그’라는 시는 집에 돌아오는 것이 지독하다고 말한다. 돌아오는 사이 낡고 변해버린 것들에 대해, 똑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만 늙어갈 뿐이고 집에는 뼈만 남는다고 말한다. ‘Every cloud has silver lining’. 불행 끝에 희망이 온다는 말은 제이크의 아버지가 제이크에게 하는 말이지만 이후 제이크에 의해 부정된다.
제이크는 끊임없이 소설과 영화, 과학 등 관객이 모두 알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이야기를 지속한다. 많은 말들은 일정 부분까지는 정보를 주다 이내는 피로하고 지루한 감각을 준다. 많은 정보와 이야기들로 인간이 소모하는 수많은 시간을 보여주는 의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정보의 잘못이 아니다. 영화는 많은 대사 속에 이미 자신의 의도를 전면에 내보이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반복하기까지 한다. 후회와 외로움에 대한 진실된 말이 있지만 그것들은 많은 말과 함께 파묻힌다. 루시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다만 행동하지 않을 뿐이다. 해소되지 않는 상황과 필연적인 망각은 시간을 사라지게 한다. 늙어버린 제이크의 아버지가 그렇듯 루시의 기억은 점차 사라져간다. 나이와 시간을 크게 헷갈려서 말하는 것은 찰리 카우프만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제이크의 엄마는 젊은 제이크에게 50살 생일에 대해 묻는다. 루시는 제이크와의 7주 전 첫 만남을 아주 오래된 것으로 기억한다. 또 청소부를 만난 루시는 자신과 제이크를 잊는다. 제이크를 잊어가는 루시는 모기만큼의 존재감을 가졌던 제이크를 찾는다. 이 행위는 자신이 투명인간 같다고 말하던 제이크의 말과 맞닿는다.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시작했는지도 잊어버린 채 행동을 반복하고 축적된 정보가 그러하듯 사라져가는 정보들이 익숙한 반복을 지속하게 한다.
무의미한 반복은 세계-내-존재를 중심에 둔 시각에서 출발한다. 죽어가는 엄마를 두고 슬퍼하는 제이크에게 루시가 다독여주자 그는 누군가 알아봐주는 것이 큰 힘이 된다고 말한다. 사람들을 의식한 기대와 바람은 이후 시상식 시퀀스에서 이어진다. 모든 인물은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 분장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노인 분장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사랑에 실패하고 그것을 다시 성취하기 위해 새 여자를 찾겠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는데 사람들은 감동한 듯 박수를 친다. 노래의 목표는 이미 루시가 제이크와의 대화에서 부정한 것이다. 허무맹랑하고 당혹스러운 상황은 오랜 시간 끝에 얻어낸 성취, 사람들이 인정하는 명예를 얻고 과거에 포기한 것(뮤지컬)을 보란 듯 해내는, 꿈으로 가득한 미래의 바람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보여준다.
젊음을 선망한다는 제이크에 대해 루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어떻게 개울의 한 지점을 보고 판단하냐고 묻는다. 개울의 어떠한 지점이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는 것은 인식의 문제다. 마찬가지로 노화는 인식의 문제에 놓여있다. 노화로 인해 신체적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이 사람을 노화보다 빨리 무력화시킨다는 것이다. 삶에는 늘 그렇듯 고난이 있고 끝내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시간에 기대를 하고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컴플렉스는 강화된다. 돌아온 집이 실망스러운 것은 기대 때문이다. 기대는 후회와 불안을 불러일으키고 사람은 그 자체보다 빨리 무기력해지고 늙어가며 나아지는 것, 끝내는 것은 점점 불가능한 것이 되어간다. 늙어가는 시간은 기대가 실현되지 않은 미래, 과거에 붙들린 현재, 최악의 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과거의 모습을 한다. 시간은 늘어났다가 줄어들며 사람을 옥죈다. 영화는 과거에 붙들리고 미래로 유예된 현재가 절망스럽게 재생산되는 근원적인 공포를 건드린다.
Ⅱ.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화
영화는 찰리 카우프만의 전작을 떠오르게 한다. 형식과 후회라는 주제는 ‘시네도키, 뉴욕’을 떠오르게 하지만 때론 ‘이터널 선샤인’이 떠오른다.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망각과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망각 후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차가운 시선을 보낸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를 ‘이터널 선샤인’의 속편으로 본다면 ‘이터널 선샤인’의 결말은 서글프게 느껴진다. <존재와 시간>의 관점에서도 본래성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이야기는 비애를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영화는 허무로 점철되어 있지는 않다. 모기만큼 제이크를 생각하고 잊어버린 루시가 그를 걱정한다고 하자 청소부는 그녀를 안아준다. 이것은 ‘시네도키, 뉴욕’에서 엄마 역할의 배우가 케이든을 안아주는 장면과 오버랩된다. 모두가 같은 나약한 인간이고 실수를 반복하기에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시선은 경비원과 제이크가 루시에게 건네는 슬리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발이 차더라도 상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호의다. 청소부를 제이크의 미래라고 본다면 슬리퍼는 과거에 건네줄 수 있었지만 미래에는 그때의 모습으로 건네지지 못한다.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진심이었다면 닿지 못했더라도 그것은 순간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미래에 대한 기대로 시간을 왜곡한다. 현재는 미래를 위한 것이 되면서 사라지고 순간은 잊히거나 변형된다. 영화가 슬리퍼를 크게 강조하지 않는 것은 진실되었으나 숨겨지고 잊힌 것들에 대해 말하기 위함이다. 또한 ‘이제 그만 끝낼까 해’의 로드 트립이 파생적 시간으로부터 탈피하여 근원적 시간으로 향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보면 모든 과정을 본래적 시간은 복원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으며 그것이 언젠가의 의미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인간의 후회에 대한 서글픈 우화이며 현재에 했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 그로 인해 후회하고 늙어가며 보낸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때론 생각이 행동보다 진실되다는 제이크의 말은 이와 관련된 것이다. 행동은 진심만으로 행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영화는 진실되지만 행동되지 못한 생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간은 때로 자신의 진심을 감당할 용기나 힘이 없다. 섬뜩함을 견딜 용기가 없기에 진심을 속이며 살아가고 자신에게도 거짓된, 비본래적 삶을 살아간다. 그러면서 끝없이 시간에 후회라는 점을 남기고 그 시간을 왕복해가면서 산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가장 현실적인 타임리프 장르의 영화로도 보인다.
영화의 첫 시퀀스에 빈집의 인서트 쇼트가 있다. 시간을 통과해온 인간의 흔적을 담았지만 루시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듯 환경은 그 자체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첫 시퀀스를 처음 관람할 때 관객은 크게 감정적인 것을 느끼지 못한다. 느낀다 하더라도 산발적인 단상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다시 첫 시퀀스를 보면 영화의 여정을 경험한 관객들은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루시와 제이크, 제이크의 부모, 지미와 저녁 식사, 많은 시간과 인물들이 존재했지만 사라진 공간에서 공허 혹은 슬픔, 혼란스러움의 감정이 생겨난다. 관객은 결말에 선구할 때 비로소 영원히 반복하는 캐릭터의 감정을 돌아볼 수 있다.
감정을 느끼는 것은 인간이다. 영화에 처음 등장한 루시가 맛본 눈의 감각은 찰나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현재는 바뀐다. 눈의 맛은 영원히 기억되지 않을 수도, 혹은 기억될 수도 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상대적인 인지는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선택의 영역에 있다. 지미가 젖지 않은 상태로 강박적으로 몸을 흔들듯 과거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며 현재를 보낼 수도 있다. 끝나지 않는 것의 끄트머리에 언제나 매달려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다.
동시에 마찬가지로 생각과 행동은 다르다. 외부 세계를 통제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시간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늘 실현 가능한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이런 딜레마의 연속인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그저 문제를 껴안은 채로 살아야 할 뿐이다. 순간순간에 놓아야 할 것을 놓거나 놓지 않으면서 살아야 한다. 확실한 건 삶은 기대를 벗어나며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길로 흘러가리라는 것이다. 영화가 나아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처음과 달라지는 형식의 이유와 같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변화하는 세상과 자신 속에서 자신의 본래성을 찾기 위해 끝없이 분투해야 한다. 기대하고 실망하겠지만, 어쩌면 그 과정 자체를 삶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참고문헌
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읽기, 세창미디어, 2013.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한병철, <시간의 향기>, 문학과지성사, 2013.
<당선소감>
영화에 대한 애정 키워 준 카우프만에게 감사
영화 ‘i’m thinking of ending things’가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보는 작품이 되면 좋을 것 같다. 장르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킬 수는 없지만, 어느 평론가님의 말씀대로 창작자의 영혼을 갈아 넣은 영화이기에 관람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 대한 애정을 키워주신 찰리 카우프만에게 감사를 드린다. 자신의 영화에 진심을 다한 예술가 덕분에 나도 좋은 영향을 받았고 진심으로 영화를 대할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진심을 담은 영화는 늘 가치가 있고 스크린 너머의 관객과 언제라도 맞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 개인적으로는 찰리 카우프만의 소설 ‘Antkind’도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어려운 길임에도 이해해주신 부모님과 누나께 감사드린다. 어수룩하고 미덥지 못한 막내지만 조금이나마 믿음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언제나 나를 발전하게 하는 G. 바쁜 와중에도 못난 초고들을 봐준 친구들. 많은 가르침 주신 학부 교수님들. 단편영화를 함께해준 스태프와 배우들. 2021년 한층 성장하게 도와준 한국시나리오협회 관계자분들, 멘토님, 동료 멘티께 글로는 전부 담지 못할 감사를 표한다.
올해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자만하지도, 좌절하지도 않겠다. 과분한 복을 받은 것 같아 송구스럽지만, 정진하고 나아가라는 뜻으로 알고 나와 진심을 갈고 닦아가겠다.
● 1996년 서울 출생
●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사회학 복수 전공) 졸업.
<심사평>
분석의 조밀함·해석의 깊이·단단한 문장력
문학평론이든 영화평론이든, 텍스트의 분석과 해석이 먼저다. 다음으로 비교하거나 사적 맥락을 따지는 게 순서다. 문학평론은 편수도 적었지만, 문학사적 의미망을 전제하거나 주관적인 해석을 펼치는 글이 대다수였다. 텍스트의 결을 따라 읽고서 그 문학적 가치를 평가하는 일이 중요하다. 영화평론의 경우에도 주관적이거나 텍스트 외부의 사례를 지나치게 끌고 오거나 이론의 과잉 적용이 적지 않았다. 문학과 영화를 결합하여 멋을 부리기도 하고 감독론을 목표한 과도함도 보였다. 기술변화에 따른 스트리밍 체제를 주목하거나 드라마와 넷플릭스 영화를 비평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은 변화는 앞으로 수용해 가야 할 과제라 생각한다.
마지막까지 선자에게 남겨진 작품은 모두 영화평론으로, ‘‘겟 아웃’, 그 ‘늑대’의 귀환에 대하여’ ‘생존보다 오래 살기: 바이러스의 메타포, 좀비영화를 중심으로’ ‘이 영화의 중심부는 어디인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 ‘길 잃은 현존재들의 시간-찰리 카우프만 ‘이제 그만 끝낼까 해’’ 등 네 편이었다. 서술이 다소 유기적이지 못하거나 영화적 장치의 특성을 드러내지 않고서 서사 위주의 서술로 일관한 경우를 제외하였다.
‘길 잃은 현존재들의 시간-찰리 카우프만 ‘이제 그만 끝낼까 해’’를 당선작으로 결정한 데는 분석의 조밀함, 해석의 깊이, 단단한 문장력을 겸비한 성실한 글쓰기가 있다. 부조리극에 비유될 만치 난해한 찰리 카우프만의 이 작품을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철학과 겹쳐 읽으면서 영화적 특이성을 포착하였다. 이론을 앞세우지 않고 감독의 다른 작품과 맥락을 생각하면서 이 영화의 위치를 잘 드러내었다.
심사위원 : 구모룡
'좋은 글 > 비평&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행동하는 비인간들의 힘 : 임승유론’ / 황사랑 (0) | 2023.01.03 |
---|---|
[2023 부산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농담하는 미친 광대의 춤과 노래 - ‘조커’에 나타나는 광기의 에피스테메 / 조현준 (0) | 2023.01.02 |
[2022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작] 난파와 해체를 넘어 인간 재건과 복원을 열망하는 언어 / 염선옥 (0) | 2022.01.02 |
[2022 광남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고독은, 크로노스의 뒤통수를 부여잡고 / 김재홍 (0) | 2022.01.02 |
[2021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착란의 시간, 착상의 언어 / 김진석 (0) | 2021.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