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당선작>

 

   어떤약속 / 김남희

 

맥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서야 배낭을 알아차렸다. 남자는 나처럼 앉으려다 말고 멈칫 섰다. 편의점 파라솔 자리를 두고 그와 내가 맞닥뜨린 거였다. 쥐고 있는 빵은 햄버거인지 새큼달큼한 짠 내가 났다. 초면이 아니라는 생각이 바로 스쳤다.

“쏘리.”

그가 먼저 물러났다. 짧은 영어 한마디였지만 원어민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러지 말고 앉으라는 뜻으로 말했다.

“플리즈.”

그도 우리가 구면인 걸 알아차린 눈치였다. 출근할 때 들르는 던킨도너츠에 그가 배낭을 메고 나타나기 시작한 건 일주일쯤 전이었다. 셀프바에 비치된 냅킨을 한 뼘쯤 집어서 배낭에 쑤셔 넣고, 도넛을 받아오는 길에 또 한 뼘쯤 그러는 광경을 나는 커피를 마시며 매번 고스란히 보았다. 뻔뻔한 태도라기보다는 무슨 이유에선지 부끄러움을 무릅쓴 것 같았다. 다시 ‘플리즈’ 하자 그의 눈이 웃었다. 술김이었을 것이다. 이미 한잔하고 온 나는 비닐봉지에서 맥주를 꺼내 건넸다. 그도 목이 말랐던지 차가운 물방울이 맺힌 캔을 보자 목울대가 움직이도록 침을 삼켰다. 후덥지근한 주말 저녁, 우리는 그렇게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을 필립이라고 소개했다. 미국에서 이십육 년을 살다가 열흘 전 한국에 돌아와서 줄곧 찜질방에서 지내왔다고 했다. 계단 끝에 있는 그 오래된 찜질방은 외국인이 나오는 예능프로그램에도 소개된 관광명소였다. 박모영. 나도 내 이름을 밝혔다. 소규모 유학원을 하고 있다거나 이혼했다는 말은 안 했다. 근방에 산다고는 했다. 네이버, 이웃. 한국말에 서툰 필립을 위해 나는 녹슨 실력을 발휘해서 영어로 말했다. 술을 마셔서인지 말이 제법 술술 통했다. 사실 아무리 술을 마시더라도, 누군가가 나에게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 그처럼 말하고 싶고 들어주고 싶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바닷가에 살고 싶어요. 매일 수영도 하고.”

그는 사진으로만 본 필리핀의 보라카이 섬에 가기를 꿈꾸었다. 나는 동해도 좋다고 말했다. 시리도록 푸른 쪽빛이라고 하자 그는 눈을 반짝이며 들었다. 그가 물에서 종일 떠 있을 수 있다는 말에 나는 손뼉까지 치면서 감탄했다. 수영을 잘하게 된 계기가 그를 때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부터 도망가다가 물로 뛰어들었기 때문인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죽도록 발을 구르며 말 그대로 생존 수영을 익혔다는 건 모르고, 그저 힘에 부치면 물에 몸을 맡기고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본 줄만 알았다.

“저는 발이 닿지 않으면 가라앉아요. 바다는 멋지지만 뛰어들려면 불안하죠. 검푸른 빛깔이라면 더더욱.”

막연한 불안은 실체가 없지만 그것을 의식하는 어떤 힘은 있었다. 가령 물속에서 내 목을 뻣뻣하게 만드는 힘. 필립은 그런 힘을 빼는 연습으로 엎드린 자세의 수평뜨기를 보여주었다. 물에 뜬 시체가 되었다고 생각하라는 거였다. 우선은 부력이 있는 물체에 의지해 보면 도움이 될 거라고도 말했다.

“저는 빈 페트병을 넣은 배낭을 메고 물에 떠 있기도 했어요.”

대화가 한창 무르익는 중에 톡이 왔다. 적자를 줄이기 위해 월세 사무실 공간 일부를 월세 놓기로 했었는데 계약하기로 한 사람이 마음을 바꾼 거였다. 공유오피스 게시판에 글을 다시 올렸다. 불편하더라도 결정적인 돌파구가 나오지 않는 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아니면 폐업을 생각할 처지였다. 핸드폰을 보다 고개를 드니 필립은 아껴먹듯 조금씩 먹던 햄버거를 결국 포장지에 묻은 소스까지 마저 닦아 먹고 있었다. 하지만 맛있냐는 말에는 가벼운 인상을 쓰며 웃었다. 저렴해서 먹지만 좋아하진 않는다고 했다. 좋아하지 않게 된 사연이 기가 막혔다.

“허기진 상태로 배낭에 기대어 앉아 있던 날이었어요. 힘없이 졸다가 깨어보니 커다란 개들이 어슬렁대고 있는 거예요. 물릴까 봐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어떤 여자가 불룩한 맥도널드 봉투를 안고 서 있었어요.”

“맞아요 덕수궁. 거기가 바로 제가 버려진 곳이에요.”

네 살 무렵 그는 덕수궁 앞에서 울고 있다가

경찰에게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냄새를 맡고 다가와 꼬리를 흔드는 개들에게 여자는 햄버거를 먹였다. 조금씩 뜯어서 주는 게 아니라 한 마리당 한 개씩이었다. 그는 주체할 수 없이 침이 흘렀지만 여자는 외면한 채 말했다. 노숙자는 쉼터에서 먹여 주면서 불쌍한 너희들은 아무도 먹이지 않았구나. 무정한 세상 같으니. 물론 그녀는 개들에게 말을 했겠지만 그 말을 알아들은 건 그였다. 노숙자라는 말이 걸렸지만 나는 그게 어디였냐고 물었고, 코네티컷주 하트포트였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코네티컷? 나도 코네티컷에 있었어요. 하트포트는 아니고 댄버리에.”

그도 놀라워했다. 마주쳤을 수도 있다고 흥분한 우리는 십 년이나 다른 시기에 각자 코네티컷에 있었던 걸 알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대학 입시에 실패한 나는 유학원을 통해서 패자부활의 길을 모색했었다. 당시 도피성 유학으로 합리적인 선택지였던 필리핀 치대가 물망에 오르다가, 돈을 더 들인 끝에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가 슈퍼살롱 브로엄을 타던 사장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유학 준비에 전념하려 했던 나는 어학원에서 만난 K와 폭풍 같은 첫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출국이 다가올수록 나는 그에게 집착했던 반면에 그는 예정된 헤어짐을 쿨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결국 졸업도 하지 못하고 귀국했다. 아이엠에프 여파로 집이 쫄딱 망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예전 같은 무모함이나 가슴 떨리는 순수한 감정은 내게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술이 오르는 걸 느끼며 맥주를 한 번에 쭉 들이켰다. 만 원에 네 개짜리 맥주 여덟 캔이 모두 찌그러졌고, 편의점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사방의 어스름을 나른하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필립을 처음 보았을 때 사실 나는 K를 떠올렸었다. 그래서 자꾸만 눈길이 갔었다. 나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그를 게슴츠레 바라보다가, 깨웠다.

“집에 가야죠. 찜질방으로 가요.”

계단 위 찜질방은 팔천 원에 열세시간까지 이용하고 초과하면 추가 요금을 내는 곳이었다. 저녁에 들어갔다가 아침에 나와서 한나절쯤 외출했다 돌아오는 식으로 필립은 그곳에서 지냈나 보았다. 황토방, 숯방, 히노끼방, 얼음방, 소금방, 식당과 수면실이 갖춰진 대규모 시설이지만 노후화된 분위기에 이용객이 적어서 휑뎅그렁했다. 식혜를 한 잔씩 손에 들었다. 술이 깨며 서먹해진 나는 찜질방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니폼을 입으니 결속력이 생기는 것 같지 않아요? 그를 따라 띄엄띄엄 앉은 사람들을 지나쳐서 어둡고 외진 공간으로 들어갔다.

“피곤하죠? 저는 여기서 혼자 눈을 붙이곤 해요.”

그는 찜질방 목침이 딱딱해서 대신 배낭을 베고 잔다고 했다. 배낭 양 끝에 각자의 머리를 기대고 떨어져서 누웠다. 피곤했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낯선 숨소리를 들으며 언제든 불이 켜질 것만 같은 어둠을 나는 바라보았다. 현실은 때로 그렇게 비현실적이었다. 슬며시 몸을 일으키고 그를 쳐다보다가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뺨과 입술을 더듬었다. 놀란 그가 눈을 뜨고 내 손을 잡았다. 순간 지나가던 누군가의 혀 차는 소리에 우리는 허둥대며 일어나 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졌다. 나는 이미 후회하고 있었지만 ‘쏘리’라고 말해 준 건 아무런 잘못 없는 그였다. 불이 깜박이다 켜졌고 꼴좋게도 우리가 마주 앉은 공간이 환해졌다. 잠을 자기는 그른 것 같았다. 그가 내 등에 배낭을 받쳐주었다. 아까도 느꼈지만 정말 폭신하다고 신기해하자 그가 배낭의 지퍼를 열고 속을 조금 보여주었다. 던킨도너츠 로고가 새겨진 냅킨 뭉치가 비죽이 드러났고 나는 웃음을 삼켰다. 무릎에 턱을 괸 채로 가만히 나를 보던 그가 모영, 하고 불렀다.

“원래 내 이름은 준필이에요. 김준필.”

김준필. 나는 그의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망설이고 있는 그에게 뭐든 좋으니 말해 보라고 했다. 커다란 집, 무슨 궁궐인데, 하며 그는 말했다. 독서공?

“덕수궁?”

“맞아요. 덕수궁. 거기가 바로 제가 버려진 곳이에요.”

네 살 무렵 그는 덕수궁 앞에서 울고 있다가 경찰에게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그럴까.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나는 실없는 소리를 해버렸다.

“궁궐에서 발견되었다면 혹시 왕족이 아닐까요?”

고맙게도 그는 피식 웃어주었다. 나는 그가 아동 양육 시설과 위탁 가정을 전전하다가 미국으로 입양된 사연을 듣게 되었다. 첫 번째 양부모인 왓슨부부는 불임인 줄 알았지만 나중에 아이를 갖게 되자 그를 ‘세컨핸드’ 시장에 내놓았다고 했다.

For Sale: 필립(12). 한국 태생의 온순한 소년. 음식 투정이 없어요. ($3,200).

믿을 수 없게도 그는 강아지와 고양이의 재입양 정보와 나란히 지역 무가지의 ‘리호밍rehoming’ 섹션에 등장했고, 이를 본 모레이 씨가 그를 두 번째로 선택했다. 입양에 따른 세금 공제와 보조금을 받은 모레이 부부는 그를 무료 기숙 군사학교에 보냈고 이혼하고 나선 연락을 끊었다. 성인이 된 그는 한동안 노숙자로 살아야 했다. 말하자면 그는 나처럼 흔해 빠진 실패담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왜 혹은 어떻게 한국에 왔는지가 더욱 궁금해졌다.

“아이 워즈 디포티드 I was deported.”

디포트? 추방되었다고? 놀라서 입을 막자 그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신중한 발음으로 한국말을 했다.

“범죄가는 아니에요”

범죄가? 아 범죄자, 하고 바로 알아들었지만 오히려 의혹이 일었다. 그는 답답한지 다시 영어로 말했다. 자신은 시민권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고, 그래서 시민권자라고 적은 게 공문서위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표정을 본 그가 ‘익스큐즈미’하고는 배낭을 뒤적이더니 책자를 꺼냈다. 중고책방에서 건져낸 듯 보이는 한국어 교본이었다. 책갈피 사이에 끼워져 있던 여권을 펴자 사진이 나왔다. 그가 아홉 살 때라고 했다. 영문으로 휘갈겨 쓴 이름과 생년월일, 일련번호가 적힌 푯말을 들고 있는 소년을 나는 숨죽이고 바라보았다. K로 시작하는 일련번호는 한국에서 그해 입양 보낸 아동의 순서였고, 그는 1528번째라고 했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어디선가 멀리서 비행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아주 좋지 않은 상황에서 만나고 헤어졌던 한 소년을 떠올리고 있었다. 혹시 이 남자가 그 소년은 아닐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소년이 결국 추방된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아 유 오케이?”

다가온 그의 손을 밀어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금 보니 그는 정말 나보다 한참이나 어렸다. 내 반응에 당황한 듯 움츠러든 그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그래서 그가 내게 들려준 나머지 얘기는 어떻게 보면 유일한 친구였던 벤에서 시작해서 벤으로 끝났다. 공원에서 남이 마시다 놓고 간 콜라를 빨대로 열심히 빨아 대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벤은 그를 보자 ‘코리안?’ 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고 했다. 트럭커, 그러니까 물류기사인 벤은 과거 한국과 필리핀에 있는 미군 기지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었다. 당시 ‘닭공장’에서 닭을 부위별로 정리하는 일을 했던 준필은 그의 보조로 트럭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벤은 필리핀 보라카이나 한국의 이태원에 다시 가고 싶어 했고, 만일 한국에 간다면 같이 가자고 했다.

“한국은 호텔이 비싸. 숙소는 스파를 이용하자. 디즈니랜드같은 스파도 저렴해.”

그는 사실 자신을 버린 한국이 아니라 필리핀처럼 새로운 곳에 가 보고 싶었다. 그게 가능하단 걸 새삼 깨달은 그는 열심히 돈을 모았다. 여권도 미리 만들어 놓기로 했다. 하지만 국토안보부에 여권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그는 영주권 갱신이 되지 않은 문제에 이어 자신이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란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국토안보부 직원은 그가 간직해 온 비자를 보더니 말했다.

“이건 IR-4 비자군요.”

그의 비자는 입양이 아니라 입양 ‘예정’으로 영주권을 보장받는 입국 비자였다. 입양아에게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제도가 도입되었지만, IR-4 비자는 여전히 해당이 되지 않아서 그가 시민권자가 되려면 양부모가 연방정부와 주정부 각각의 법원에서 입양 ‘확정’을 받고 귀화시켰어야 했다. 그런 절차를 밟지 않은 왓슨과 모레이 모두 입양을 약속한 후견인이었을 뿐 법적인 양부모도 아니었다. 충격을 받은 그에게 직원은 서류미비자, 즉 불법체류자 상태라면서 여권은 ‘당신네 나라’에나 알아보라고 말했다. 뜻밖의 상황을 벤에게 털어놓았다.

헤엄쳐 가는 사람이 보입니다.

멀어서 얼굴은 희미하지만,

초록색인가요, 배낭이 보입니다!

“해괴한 일이군. 이제껏 문제없이 운전면허도 내주고 했으면서 갑자기 지랄이래.”

불법체류자 추방작전이란 게 사실일지 모르니 행여 체포되지 않게 영주권 갱신이나 해두라는 충고는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국토안보부에 다시 가긴 싫었다. 만료된 지가 오래라서 인터넷으로 절차를 밟을 문제도 아니었다. 내가 도와줄게. 갱신 수수료 사백육십오 달러, 지문 등록 구십오 달러, 합쳐서 오백육십 달러만 달라고 하면서 벤은 말했다.

“대행 수수료는 무료, 우린 친구니까.”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지 않아 그는 이민세관단속국에 의해 체포되었고 구치소에 갇힌 채 과거 운전면허와 여권 신청 등에서 시민권자를 사칭한 공문서위조 혐의로 국토안보부의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민 구치소에는 그와 사정이 비슷한 유색인들이 넘쳐나서 바닥에 수건을 깔고 자는 날도 있었다. 한 달 뒤 추방이 확정되었고 명단과 사유를 통보받은 한국 영사관은 그에게 단수여권을 발급해 주었다. 외교부 차원에서 그는 미국에서 추방되는 수백 명의 한국인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추방된 입양인이라면 복지부 산하 단체에서 파악하고 지원하게 되어 있지만, 막상 출입국 관리는 외교부도 복지부도 아닌 법무부 소관이었다. 그는 영사관이 대신 끊어준 인천행 편도 항공권에 대한 비용을 치르고 배낭 하나만을 메고서 출국했다. 나는 물었다. 벤은요? 벤은 영주권 갱신 비용을 받아간 뒤로 연락이 끊겼다.

월요일 아침, 찜질방 앞에 선 나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준필씨, 이제 여기서 살아야 하니 주민등록증부터 만드는 게 좋겠어요.”

내 말에 그는 무심히 끄덕일 뿐 선뜻 받아들이는 기색은 아니었다.

“주민등록증이 있어야 대한민국 국민으로 보호받고 제대로 된 권리도 찾을 수 있어요. 정부로부터 생활비 같은 거라도 지원받아요.”

찜질방 바닥을 두드려 가며 나는 얼마나 열심히 말했는지 모른다. 주민등록번호조차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는 그에게 여권 하단을 가리키며 이게 그 번호라고 알려주었고 내가 도와줄게요, 돕고 싶어요, 우기다시피 해서 그로부터 주민센터에 같이 간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그곳을 나왔다. 하지만 자고 일어나니 신열이 내린 듯 지난밤 열의는 낯부끄럽고 출근길에 맨정신으로 찾은 찜질방은 낯설기만 했다. 아직 문들을 열지 않은 유흥가 곳곳의 쓰레기들을 바라보다 나는 생각했다. 그가 알아서 안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가 내게 도와 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때 찜질방 문이 열려서 나는 긴장하며 쳐다보았다. 한 할머니가 나왔다. 다시 문이 열리고, 동남아시아계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고, 아프리카계 남자가 따라 나왔다. 번번이 시선을 피하다가 자괴감이 들었다. 백인에게도 이랬을까. 평생 그가 느꼈을 시선은 어땠을까. 이윽고 문이 열리고 배낭을 멘 그가 나왔다. 유 오케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주민센터에는 의외로 대기자들이 많았다.

“이분이 한국말이 서툴러서 대신 말씀드립니다. 주민등록증을 새로 만들려고요.”

담당 공무원은 신청서를 확인하더니 예전 주소지를 물었다. 알고 보니 주민등록증 신청은 주민등록번호만 가지고선 안되는 거였다. 이전에 등록된 주소지의 시 혹은 도와 구 정도는 전산 입력을 해야만 공무원도 그의 주민등록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통역을 하자 준필이 한국어로 말했다.

“쏘울시 중구?

공무원이 고개를 저었다.

“안 나오는데요.”

준필이 ‘덕수궁 왕족은 아닌가봐요’ 하고 내가 했던 말을 영어로 속삭였다. 나는 공무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시 말했다. 강서구. 안 나와요. 마포구. 안 나와요. 나는 서대문구, 용산구, 관악구, 서초구, 생각나는 대로 계속 읊었고, 마침내 못마땅한 얼굴로 자판을 두들기던 공무원의 인상이 펴졌다. 기준등록지인 은평구의 아동 양육시설이 99년에 폐원된 이후 그의 주민등록말소가 확인되었다. 말소를 해지하고 재등록하려면 과태료 8만 원을 내야 했고, 새 거주지 주소도 필요했다. 찜질방은 안 되니 고시원이라도 얻어야 했다. 순번을 알리는 벨이 다른 창구에서 울렸다. 대기자들을 돌아보며 고민하던 내게 공무원은 다른 얘기를 꺼냈다.

“재외국민이면서 거주 불명 등록자로 말소되어서요, 이분 영주권자였죠?”

문제는 생각보다 더 복잡했다. 외교부에 가서 영주 귀국 처리를 한 후에 다시 와서 주민등록 재등록을 신청하라는 거였다. 주민센터에서 알려준 외교부 여권과로 직접 문의해 보았다. 전화 받은 담당자는 미국 대사관에 영주권 카드를 반납하고 반납 증명서를 외교부 여권과에 제출하라고 했다. 그제야 준필은 추방 과정에서 영주권 카드를 되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다시 여권과에 전화하자 담당자는 차선책을 알려주었다.

“경찰서에 영주권 분실 신고를 하시고요, 분실 접수증을 영문 번역해서, 공증하신 후에, 대사관에 반납 형태로 제출하실 수는 있으세요.”

2시까지는 회사에 가 봐야 했지만 하는 수 없었다. 경찰서를 찾아가서 받은 분실 접수증을 그 자리에서 번역한 나는 아는 공증법인사무실에 팩스를 보내고 대사관 근처 지하철 보관함으로 공증 서류 퀵서비스를 부탁했다. 이제 정류장으로 가자며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데, 준필이 나를 붙잡더니 오만 원 지폐를 여러 장 쥐여 주었다. 수수료라는 말에 나는 살짝 눈을 흘겼다.

“대행 수수료는 무료, 친구니까.”

벤을 따라 한 짓궂은 농담에 우리는 기운이 나서 같이 웃었다. 이렇게 많이 들지 않는다고 하면서 나는 한 장만 남기고 억지로 돌려주었다. 버스에 타서도 내려서 걸어가면서도 그는 행여 다른 사람과 스치지 않도록 몸을 조심하는 것 같았다. 배낭을 어깨에 걸친 채 한쪽 끈을 움켜쥐고 살짝살짝 비켜 가는 그는 배낭과 한 몸처럼 움직였다. 그것은 거북과 등껍질 같다기보다는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가 배구공 윌슨을 대하듯 배낭에라도 절실히 의지하는 느낌이기도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보니 배낭끈 한쪽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비로소 늘 한쪽 어깨에만 메고 다닌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사관에 도착해서 정문 경비원의 안내로 담당자와 통화를 시도했다. 아침부터 서두른 보람도 없이 영주권 반납은 매주 목요일만 가능하다고 했다. 허탈감에 씁쓸히 웃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사무실을 혼자 지키고 있던 직원이었다. 일찍 퇴근하기로 했으나 2시가 넘도록 내가 나타나지 않자 뚱한 목소리였다. 나는 준필과 수요일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주민등록 접수를 위한 거주지로 고시원을 미리 구해 두기 위해서였다.

“그냥 찜질방에서 지내면 안 될까요?”

보증금 없이 한 달에 삼십만 원, 두평 남짓의 고시원을 둘러본 준필이 말했다. 낮 동안의 열기가 채 빠지지 않아서 저녁인데도 찜통 같았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만들면 기초생활지원비를 받을 수 있게 되니 보증금을 모은 후에 방을 옮기면 되지 않겠냐고 타일렀다. 그는 시무룩한 얼굴로 배낭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 옆에 초록색 배낭을 살짝 내려놓았다.

“선물이에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지 그는 당황했고 대단한 선물이라도 되는 양 감동한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길거리에서 산 저렴한 배낭일 뿐이라 오히려 미안한 마음에 나는 목소리가 작아졌다. 힘내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목요일, 드디어 ‘주민등록증 발급신청 확인서’를 받았다. 실물 카드가 나올 동안 주민등록증과 동일한 효력이 있는 임시 신분증이었다.

“축하해요. 이제 정식으로 다시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겁니다. 김, 준, 필, 씨.”

힘주어 말한 나를 향해 환히 웃은 준필은 이제 여권도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우선 기초 생활 수급부터 알아봐야 한다고 그를 해당 창구로 끌었다. 담당자가 건네준 제출 서류들은 십여 종이었고, 그중 문제가 되는 건 부양 의무자 관련 서류였다. 혹시 모르니 가족 관계 등록부를 떼어 보기로 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생부모가 출생신고도 하지 않았는지 입양 기관에 의한 ‘고아 호적’이 전부였다. 긴장했던 준필은 실망한 빛이 역력했지만, 어쨌든 서류 하나는 필요가 없어졌다.

“주거 지원비까지 합쳐서 매달 최대 칠십만 원 정도 받을 수 있겠네요.”

담당 공무원이 말했다. 나는 이제 끝났구나 싶어 준필을 향해 웃어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 금액을 다 받을 순 없다는 말이 이어졌다. 병약자가 아니라면 정부의 자활 사업에 참여하여 수급비 상당의 소득은 올리도록 장려한다는 거였다.

“한국말이 서툴면 서툰 데로 거기에 맞는 일이 또 있어요.”

그러면서 추천한 일은 환경정화사업 쪽이었다. 쉽게 말해 하천에서 잡풀 뽑고 쓰레기 줍는 산책로 정비였는데, 역시 적을 내용도 없는 제출 서류가 복잡하게 요구되었다. 그래도 주 이십오 시간 일당 사만여 원을 삼 개월간 받게 된다고 하자 준필은 ‘코맙습니다’ 하고 허리를 숙였다. 흐뭇한 얼굴로 인사를 받은 공무원이 나를 보고 말했다.

“혹시, 생각 안 나세요? 지난달 유학원 박람회 때 부스에서 인사 나눴는데.”

“그래요? 선생님께서 거긴 무슨 일로…”

얼떨떨한 기분으로 되묻자 연수 프로그램을 검토 중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내가 준필을 가족처럼 돕는 모습에 감동했다면서 마침 유급 휴직 연수 프로그램 관련해서 업체를 찾는 윗선에 추천하겠다고 말했다.

“아일랜드 쪽 단기 연수도 하시죠?”

네? 네. 나는 무심코 아니 무조건 대답하며 명함을 건넸다. 아일랜드 쪽은 경험이 없어서 새로 알아봐야 했지만 못할 건 없었다. 어쩌면 기다리던 회생의 돌파구일지도 몰랐다. 이렇게 되면 준필이 오히려 나를 도운 셈이었다.

“우리 자축할까요? 제가 살게요.”

주민센터를 나와 걷다가 내가 말했다. 하지만 대답도 듣기 전에 핸드폰이 울렸다. 수수료 문제로 불만을 제기해 온 학부모였다. 통화가 길어지자 기다리던 그는 입 모양과 손짓으로 먼저 가겠다고 했다. 나는 수화기를 막고 조만간 고시원으로 연락하겠다고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일상으로 복귀하자 다시 바빠졌다. 명함을 준 공무원의 윗선에서 정말 연락이 오고 상황은 나아졌다. 간혹 낯선 번호로 전화가 울리면 준필을 떠올렸다. 받지 못한 번호로 재발신을 해보니 고시원이었는데, 일단 끊었다.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았고 발등에 떨어진 사안도 있었다. 몇 번인가 같은 번호가 뜰 때마다 공교롭게도 전화를 받을 형편이 되지 못했다. 우리는 결국 한 달 뒤에나 만날 수 있었다. 처음 만난 편의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였다. 그는 하천 정비를 한다고 햇빛에 그을어서인지 핼쑥해 보였다.

“일은 어때요?”

“괜찮아요.”

“주민등록증은 찾았죠?”

“네.”

우리는 전보다 서먹한 분위기였다. 일터나 고시원 사람 중에 친구가 생기지는 않았냐고 물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게 뭔지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했어요.”

그는 고시원으로 왔다는 우편물을 보여주었다.

‘김준필 님의 병역 의무 이행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뜻밖에도 징병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통지서였다. 준필은 서른넷이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나는 병무청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통화한 담당자는 대한민국 남자라면 만 서른일곱까지 모두 병역 의무 대상이라고 했다. 고아라면, 보육원에서 5년 이상 자란 기록을 제출하면 면제라고 해서 그와 급히 손을 꼽아 가며 확인해 보니 몇 개월이 모자랐다. 한국 물정도 모르고 말도 서툰데 어떻게 군대 생활이 가능하겠냐고 묻자 담당자는 기초 생활 담당자와 비슷한 말을 했다.

“한국말을 못 하면 못하는 데로 그에 걸맞은 보직이 맡겨지겠죠.”

여하튼 군대에 간 다음에 결정될 문제라는 거였다. 나중에 현역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고 조기 전역을 하더라도, 일단은 가는 게 맞는다고 했다.

“원하는 신검 날짜를 신청하세요, 안 하면 본인 의지와 관계없이 임의 소집됩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준필의 눈이 불안으로 일렁거렸다. 군대 가면 얼마나 있어야 하냐고 물었다. 이십일 개월이라고 하자 그는 그동안 여권을 만들어 놨으니 이제라도 필리핀으로 가겠다고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군 복무 대상자가 된 이상 출국은 이제 병무청의 허가를 받아야 해요. 출국이 제한되는 거죠.”

“주민등록을 취소할 순 없나요?”

그는 정말 혼란스러워 보였다. 울먹이듯 중얼대다 얼굴을 감싸쥐기도 했다.

“저는 이제 갈 곳이 없는 거네요. 거기밖에. 또 그런, 오 맙소사.”

집단구타가 있던 학교 기숙사와 노숙자 쉼터 그리고 이민국 감옥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견디면…. 그러나 이미 몇 번이나 했던 그런 말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모영, 당신은 최선을 다했어요. 당신처럼 나한테 잘해준 사람도 없었죠. 그런데도 저는요,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저 참 나쁘죠.”

원망하듯 보던 그의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목이 탄 나머지 급히 한 모금 마시다 사레가 들려 물잔을 쏟았다. 흥건한 물 위로 조명이 어른거렸다.

“모영, 당신은 왜 나를 도와줬나요?”

허를 찌르는 것 같았으나 내 생각일 뿐 그의 표정에 악의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말문이 막혔다. 잊으려고 할수록 어쩌면 한순간도 잊지 못한 오래전 기억과 떨치지 못한 부채감이 되살아나서 나는 눈을 감고 말았다.

그 여름, 내가 한국에 잠시 왔다 간 일은 부모님이나 친구 아무도 알지 못했다. 임신 사실은 미국에 가고 나서 알았다. 지정된 병원의 보험에 가입해 두기는 했으나 낙태 수술은 해당이 없었다. LA 한인타운 쪽까지 알아보았는데 미국의 의료비가 어마어마하다는 것만 확인했다. 그러다 지역 무가지 ‘메트로’의 한국판을 넘기던 나는 이거다 싶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되는 어린이를 양부모에게 인계할 때까지 비행기 안에서 돌보는 에스코트 모집 광고였다. 나는 한국의 아동 복지회들 세 군데에 팩스로 각각 신청서를 보냈다. 선정되면 왕복 항복권을 받는 대신 30만 원만 복지회에 기부하면 됐다. 에스코트 프로그램은 휴가철이면 해외여행을 싼값에 가려는 관광객들로 경쟁률이 대단히 높았다. 내가 그런 바늘구멍을 통과한 걸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에 도착한 나는 모텔을 잡고 산부인과에 가서 임신 12주의 태아를 중절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실에 걸려있던 달력에는 검푸른 바다가 담겨 있었고 나는 그 차가운 물 빛깔을 보면서 마취에 들어갔고 또 깨어났다. 다음날 서울의 H복지회 본부에서 유아 수유와 기저귀 가는 방법, 기내 유의 사항, 비상시 대처 등의 에스코트 사전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출국 날, 뉴욕으로 입양되는 아이는 열둘이었고 에스코트는 여덟 명이었다. 내가 맡은 소년과 아기는 남매인가 했더니 나처럼 처음 보는 사이였다.

“몇 살이니?”

소년은 나를 가만히 올려다볼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말없이 머리만 쓰다듬어 주었다. 품에 안은 아기의 손가락을 보자 초음파 사진이 떠올라 울컥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나의 옷자락을 슬며시 쥐고서 소년은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각자의 서러움과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당혹감을 끌어 앉은 채 한 덩어리가 되어 비행기 좌석에 앉았다. 이륙할 때부터 칭얼대던 아기가 정신이 아득해지도록 울어 젖혔다. 하도 많이 토하고 싸고 해서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아이를 어르는 일에 무척 서툴러서 소년이 자주 도와주었다. 난기류에 흔들리면 서로 끌어안았다. 우리는 힘이 들었고 그걸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서로 절실하게 기대었다. 멀리 도착지의 불빛이 보이자 나는 의젓해서 더 안쓰러운 소년의 자그마한 등을 쓸어내렸다. 그동안 참았던지 후드득 눈물을 떨어뜨린 소년은 재빨리 훔치고 시선을 돌린 채 가슴을 들썩거리며 심호흡을 했다. 열여섯 시간의 고된 비행 끝에 JFK 공항에 내린 나는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자지러지는 아기와 허리에 매달려 우는 소년을 입국장에서 기다린 각각의 양부모에게 억지로 떼어 인계했다. 퉁퉁 부은 나와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자 양부모도 글썽이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꽉 끌어안은 소년의 귀에 대고 말했다.

“울지 마. 좋은 부모님을 만났으니 이제 행복할 거야. 우리 나중에 멋진 어른이 돼서 꼭 다시 만나자, 약속.”

오래전 그때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던 그 소년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떨리는 내 손을 준필의 손등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그는 슬며시 손을 뺐고 나는 더 다가가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박모영 씨,이십니까?”

헌병대에서 온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사무실로 찾아온 공무원과 휴직 연수 상담을 마치고 계약서를 작성하던 참이었다.

“김준필 이병을 군무 이탈죄로 수배 중입니다.”

회사 직인을 꺼내기 위해 서랍을 열다가 멈추었다. 공무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직원을 불러 맡기곤 복도로 나가 속삭이듯 나는 되물었다.

“뭐라고 하셨죠? 혹시, 탈영했다는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가혹 행위가 있던 건 아니죠? 이제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죠?”

헌병은 대답 대신 마지막으로 그를 본 게 언제인지 물었다. 나는 석 달 전인가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그가 훈련소로 가는 직행버스에 올라타는 것까지 보았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날의 준필이 생각났다. 배낭을 메지 않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허전하고 쓸쓸해 보인 나머지 나는 그가 배낭을 버린 게 아니라 무인 사물함에 보관해두었다고 말하자 안도의 숨마저 내쉬었다. 헌병은 탈영병을 은닉하거나 비호하면 3년 이하의 징역이라고 말했다.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거예요?”

“만일 연락이 오면 바로 자수하도록 설득하고 저희에게 연락해주십시오, 그래서 전화드린 겁니다.”

“잡히면 어떻게 되는데요?”

헌병은 그가 며칠 내로 복귀했다면 자대 내 징계에 그쳤겠지만, 이렇게 헌병대로 사건이 넘어온 이상 잡히면 구속 수사 원칙에 따라 영창에서 미결수로 재판을 받고 최소 1년 이상 최고 10년 이하의 징역형으로 군 교도소에 수감될 거라고 했다.

“안 잡히면요? 언제까지 수배를 받는 거죠?”

“군무 이탈죄의 공소 시효는 10년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각 군의 참모총장이 탈영병들에게 복귀 명령을 계속 내리기 때문에 명령 위반죄가 중복되어 탈영의 공소 시효는 무제한이 되어버립니다.”

전화를 끊고 사무실로 들어가려는데 다리가 휘청했다. 문을 열자 벽에 걸린 TV를 보며 기다리던 직원과 공무원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유학원 분위기상 묵음으로 틀어 놓은 CNN 채널이 YTN으로 바뀌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겨우 자리에 앉았다. 공무원이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요, 아무 일도 아닙니다.”

서랍을 여는 손이 떨렸다. 직인을 꺼내다 서랍 속에 넣어둔 한국어 교본에 시선이 꽂혔다. 훈련소행 버스를 타기 전 준필이 내게 맡긴 유일한 소지품이었다. 나는 멍하니 집어 들고 처음으로 펼쳐 보았다. 책갈피에 끼워져 있던 그의 주민등록증이 툭, 하고 떨어졌다. 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내 들려온 뉴스 내용에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휘둥그레진 시선에 아랑곳없이 나는 넋을 잃고 TV 앞으로 다가섰다.

강원도 최북단 명파해변에서 3킬로 떨어진 바다에서 신원 미상의 남자가 빈 페트병을 넣은 배낭을 메고 북방 한계선을 헤엄쳐 넘어가다가 우리 군에게 사살된 일이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군 당국은 수차례 경고 방송에 이어 공포탄으로 경고 사격을 했지만 남자는 계속 헤엄쳐 나갔고, 이를 막기 위해 최전방 접적 지역에 준하는 메뉴얼에 따라 조준 사격을 했다고 합니다. 최근 연이은 경계 실패를 의식한 무리한 대응이냐 국가안보를 위한 정당 행위냐 해석이 갈립니다. 전문가를 모시고 의견 들어보기 전에 당시 조업 중이던 제보자의 휴대폰 동영상으로 직전 상황을 보시겠습니다. 날씨가 쾌청한데 물살은 꽤 세군요. 네, 헤엄쳐 가는 사람이 보입니다. 멀어서 얼굴은 희미하지만, 초록색인가요, 배낭이 보입니다! <끝>




  <당선소감>


   "‘병속의 편지’ 쓰는 기분으로 글 써"


편지를 쓰는 기분이었다. 짝사랑처럼 편지를 써 왔다. 바다에 던져서 어딘가에 가 닿은 기적 같은 편지. 이제 누군가 내 편지를 읽겠지. 세상에는 아무도 읽지 않는 편지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런 편지를 읽어주는 마음으로 소설을 쓰겠다. 나에게 깃든 이 행운은 나만의 것이 아니기에 감사할 이들이 너무도 많다.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분들과 경상일보에 우선 감사드린다.

나의 무지와 편견을 일깨워주는 철학과 교수님들과 동료 선후배들, 피어리뷰와 자주회 벗들에게 고맙다.

소설의 꿈이 구체화하도록 아낌없이 가르쳐주신 스승 조동선 선생님과 화요반 문우들에게 감사한다.

이번 소설을 쓰는 데 도움을 주신 입양인 뿌리찾기 관계자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내 오랜 전우 같은 본사와 사무실 및 회원들 모두에게 감사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에게 물론 고맙다.

마지막으로 이십 대에 울산 H중공업에서 일했던 그리운 큰오빠에게 이 영광을 돌린다. 엄마 아빠와 같이 거기서 기뻐하기를.


  ● 서울시립대 철학과 졸업 및 박사과정
  ● 2020 투데이신문 직장인신춘문예 소설당선


 

  <심사평>


  청년의 짧은 생애 강렬하게 표현…가독성 높고 서사 뚜렷한 작품


예선을 거친 16편의 소설들은 다채로운 소재와 주제로 폭넓은 스펙트럼을 이루었다. 그중 특히 주목해 읽은 작품은 네 편이다.

‘틈’은 안정된 구도와 유려한 문장이 좋았다. 그러나 이 소설의 상징이자 숨어 있는 주제라 할 수 있는 햇빛과 그늘, 거대한 위협으로 덮쳐드는 역병과 표층적 이야기와의 연결이 약하다는 느낌이다.

‘생의 자리’는 노년으로 접어드는 노부부의 무기력하고 음울한 일상과 병적으로 왜곡되는 복잡한 심리, 과거 자신들이 자식에게 저지른 잔인한 폭력에 대한 죄책감, 회복할 수 없는 상실감 등이 조용한 그로테스크함으로 파고드는 점이 인상적이다.

인터넷상에서 만난 세 사람의 남녀가 함께 동반자살을 한다는 ‘내일은 해피앤딩’은 정보화시대의 역기능적 사회문제로 빈번히 떠오르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재의 참신성은 덜하나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고독과 소외, 삶의 어려움, 급기야 마지막 탈출구로 죽음을 택하게 되는 여정을 아픈 마음으로 읽었다.

‘어떤 약속’은 여타의 소설들에 비해 가장 서사가 뚜렷한 작품이다. 고아로서 미국에 입양되었다가 거듭 파양당하고 양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와 학대, 유기의 기억만을 가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현실적으로, 정서적으로 온전히 한국인으로 살 수 없었던 인물 ‘준필’의 비극적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짧은 생애가 아프고 강렬하게 어필한다. 지금 이곳에서 살되 결코 우리와 이 세상에 속할 수 없었던 한 청년의 죽음을 화자는 자신의 내밀한 슬픔으로 받아안으며 섣부른 성찰과 판단을 유보하는 방식으로 문학적 형상화를 이룬다. 가독성도 뛰어나고 소설이 자기안에 고립되어 있는 우리들과 사회에 던지는 시사성, 메시지도 단순하지 않다. 망설임없이 이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한다.

심사위원 : 오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