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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은유와 고조 / 전지호

 

포메 0325, 포메라니안 주인은 럭셔리하게 생겨서 셔리라 지었다고 했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되풀이되는 진흙탕 흙이 신발에 찐득찐득 들러붙었다

검은색과 은빛 여우털들이 오토바이에 실린 채 무더기져 쌓여있었다


포메 0325. 보호소에 새로 들어온 포메라니안 이름이다. 0325를 주인은 다섯 살 된 셔리라고 했다. 럭셔리하게 생겨서 셔리라 줄여지었다고 말했다. 은유는 셔리보다 주인이 더 럭셔리하다고 생각했다.

셔리는 은유를 향해 자지러들 듯 짖어댔다. 셔리, 그만해, 쉿 조용, 하고 말하는 주인의 목소리는 셔리보다 앙칼졌다. 셔리는 두려움의 눈빛으로 은유를 노려봤다. 우리 셔리는 방안에서만 자랐어요. 밖에 나가 본 적이 거의 없어요. 안 데리고 나가서였는지 나중에는 아예 밖에 나갈 생각을 않더라구요. 현관에서 짖기만 할 뿐 내가 외출해도 따라나선 적이 없었어요. 오늘이 처음 외출이라 겁을 먹었나, 셔리가. 주인의 얘기는 쓸데없이 길었다.

은유는 셔리를 받아들고 몸무게를 가늠했다. 0325는 병도 없고 예방주사도 잘 맞췄고 중성화 수술도 했다. 몸무게 3.5㎏ 흰색 털, 작고 예뻤다. 은유의 품안에 안겨 부들부들 떨면서도 짖었다. 짖기를 그치고 애원하는 표정으로 은유를 바라봤다. 저런 눈빛, 많이 봐왔다. 하루에 두세 번쯤 그리고 어쩌면 더 자주. 털빛도 건강하고 고왔다. 한 달쯤 전 미용했는지 가장 예쁘게 자라있었다. 발끝 털이 더 수북하게 자라있어 발톱을 감췄고 귀엽고 생기 있어 보였다.

0325의 주인은 사흘 전 미리 전화를 줬고 약속한 시각에서 30분쯤 늦게 보호소에 도착했다. 조금 늦었죠? 미안해요. 주인은 결코 미안해하지 않는 밝고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은유는 셔리의 머리를 매만지며 주인에게 싫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보호소 찾느라 조금 헤맸어요. 내비게이션이 왜 빙빙 돌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이 근처를 두 번이나 지나쳤는데 겨우 찾았네요. 꼼꼼한 사람이었다면 이곳을 지나치진 않았으리라. 개 짖는 소리가 들렸을 테고 멀리에서도 키 낮은 울타리가 보였을 테니. 넓지는 않지만 개들이 운동할 수 있는 푸른 잔디가 깔린 마당도 있다. 셔리가 오래 머물지 않을 테니 보호소가 어떤 환경인지 주인은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은유는 비어 있던 케이지에 셔리를 넣었다. 어머, 벌써 그곳에 넣으면 어떡해요. 빨리 꺼내주세요. 주인은 화들짝 놀라며 부산을 떨었다. 꺼내서 주인에게 건네려는 순간 셔리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은유 팔에 길게 긁힌 자국이 생겼고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주인이 셔리를 잡으려고 뒤따라갔다. 은유는 화장지를 떼어 핏방울을 닦아냈다. 붉은 선이 그어졌다. 셔리는 책상 밑으로 들어가거나 의자 다리 사이를 오가며 주인의 손길을 요리조리 피했다. 주인이 가방에서 간식을 꺼냈다. 주인에게 다가가서 닭고기 져키를 무는가 싶더니 주인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셔리는 바닥에 떨어진 져키를 물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 뜯기 시작했다.

결혼한 딸이 다음 주면 아이를 낳는다고 했다. 딸은 학교 선생으로 근무하니 자신이 손자를 키울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셔리를 키울 수 없다고 주인은 말했다. 5년 키운 셔리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그러다 길을 잃고 헤매거나 나쁜 주인을 만나서 구박이라도 당한다 생각하면 잠도 못 자겠어요. 나와 헤어져서 슬퍼할 셔리를 생각하면 차라리 안락사시키는 게 더 낫지 않겠어요? 주인은 셔리가 듣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하는 모양이었다. 이미 결정을 하고 사흘 전 전화로 얘기를 했고 여기 데려오지 않았는가. 다른 좋은 주인을 만나면 지금처럼 편안하게 살아갈 수도 있겠죠. 은유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글쎄 제 친구 딸이 비글을 키웠잖아요. 결혼을 하면서 남편이 데려오지 말라고 했다나 봐요. 그래서 가까운 사람에게 줬는데 그 사람이 못 키우고 또 다른 이에게 줬대요. 네 번을 옮겨 다니고 나서야 친구 딸이 다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나요. 우리 셔리에게도 그런 일이 생겨 봐요. 어떻게 그런 일을 겪게 하겠어요. 주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셔리를 바라봤다. 셔리는 져키의 마지막 부분을 아작아작 씹어 삼키고는 손을 뻗어 입 주위를 닦았다. 앙칼지게 할퀴고 깨무는 걸 보니 셔리는 약하지 않았다. 다른 주인을 만나도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지난겨울 여행이 세 사람에게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호텔은 지나치게 크고 화려했지만 얼음 속처럼 추웠다. 은유는 추위에 떨며 밤새 잠을 거의 못 잤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추위에 아랑곳 않고 고조는 편안하게 잘 자는 눈치였다. 호텔 입구에는 공장에서 나온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재오가 가장 늦게 로비로 내려왔다. 차를 타기 위해 호텔 밖으로 나왔는데 밖의 기온과 로비의 기온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히터 열기에 따뜻해진 차 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추위에 굽어진 허리를 편안하게 펼 수 있었다.

호텔에서 시장까지 오는 동안 잠깐 잠을 잘 수 있었다. 쨍하게 추운 날씨가 상쾌하다고 고조가 말했다. 발아래를 내려다보며 걷던 은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나치게 푸른 하늘에 옅은 구름 몇 조각이 지평선 언저리에 닿아있었다. 시장 주위로 시야가 안 닿는 곳까지 넓게 빈 밭이 펼쳐져 있었다. 여름이면 희끗희끗한 목화송이가 저 빈 들판에 끝없이 들어찬다고 재오가 말했다. 봄에 건조한 바람이 불면 밭에서 이는 흙먼지가 얼굴에 부딪쳐 상처가 생긴다고도 했다. 은유는 픽 웃고 말았지만 재오의 시답잖은 농담이 싫지는 않았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되풀이되는 진흙탕 흙이 신발에 찐득찐득 들러붙었다. 주차를 하고 시장 입구까지는 채 오십미터도 되지 않았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은유는 짜증이 났다. 움푹움푹 빠지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고조의 얼굴에는 웃음이 묻어났다. 이렇게 질척이는 흙길을 오랜만에 걸어본다며 오히려 즐거워했다. 시장 입구에 다가설수록 더 질척였고 신발이 더 깊이 빠졌다. 흙덩이가 덕지덕지 붙은 자신의 빨간 어그부츠를 내려다보며 그나마 다행이지? 발이 젖지는 않잖아, 하고 고조가 웃었다.

톈진에 있는 따영까지 가게 된 건 고조의 고집 때문이었다. 원단구매는 재오 몫이었다. 모피원단의 생산 공정은 재오가 따영에 다녀올 때마다 되풀이해서 얘기해 줬다. 고조가 굳이 그것을 봐야겠다고 우길 필요까진 없었다. 고조는 가고 싶지 않으면 굳이 같이 가지 않아도 된다고 은유에게 말했다. 차마 할 수 없었던 얘기를 낯선 곳에 가면 꺼내기가 쉬울 수도 있다고 은유는 판단했다. 억지 부리며 따영에 따라온 이유였다.

디자인은 거의 카피였다. 카피를 얼마큼 잘하느냐, 그것이 유능한 디자이너의 능력이었다. 비싼 원단이 적게 들어가고 효율적으로 어필되는, 유행을 잘 포착해내는 능력. 여성복 패션 디자이너로 불리는 고조가 해오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계절감각에 맞게 수많은 디자인이 나올 수가 없다고 말했다. 고조는 카피를 일종의 벤치마킹이라고 우겼다.

그러니까 고조는 굳이 모피 생산과정까지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카피가 전문인 디자이너에게 원단생산 공정 따위는 알 필요가 없었다. 재오는 고조에게 너그러웠다. 따영에 다녀올 때마다 다음엔 꼭 같이 가자고 말했다. 은유는 그저 하는 얘기라고 생각했지만 고조는 재오에게 약속 꼭 지켜야 돼, 라고 다짐을 받았다. 고조가 근무하던 의류회사에 재오가 입사 한 이후부터 셋은 자주 어울렸고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서로 편했다.

시장 입구에는 석탄 덩어리를 실은 리어카가 길게 줄지어 놓여있었다. 가공되지 않아 크기가 제각각인 석탄 덩어리는 검고 굵은 돌덩이처럼 보였다. 덩어리를 사서 적당히 잘게 부수어 난방을 하거나 필요한 곳에 쓴다고 재오가 말했다. 은유에게는 모든 게 낯설고 불편했다. 고조는 저 덩어리는 우리가 쓰는 장작 같은 거네요? 하고 물었다. 그렇지. 재오와 고조는 나란히 걸었고 은유는 두어 발짝 뒤따랐다. 고조의 와인빛 머플러가 바람에 날려 재오의 등에 닿았다 떨어지곤 했다.

석탄 리어카를 지나자 검은색과 은빛 여우털들이 오토바이에 실린 채 무더기져 쌓여있었다. 머리에서부터 꼬리까지의 길이가 1미터도 더 돼 보였다. 윤기 흐르는 여우 털은 바람에 스칠 때마다 가볍게 흔들렸다. 저런 여우 털을 사다 공장에서 손질해 원피를 만든다고 재오가 설명했다. 붉게 상기되어 있던 고조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고조가 곁에 와서 은유의 팔을 붙들었을 즈음 이상한 냄새가 떠돌기 시작했다. 역한 냄새가 코끝을 떠나지 않았다.

셋은 어느새 더 좁고 시끄럽고 냄새나는 거리에 들어와 있었다. 재오가 한 곳을 향해 곧장 걸었다. 은유가 재오의 뒤를 따랐고 고조는 은유의 팔을 붙들고 걸었다. 떠도는 공기마저 축축하게 느껴졌다.

여우들이 맑은 눈을 빛내며 철망 우리 안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우리에서 흘러나온 배설물이 흙과 뒤섞여 있었다. 냄새가 진동했다. 칠흑처럼 까만 털을 가진 여우가 우리 밖 세상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시장 안 좁은 통로로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오갔다. 시끄러운 목소리와 역한 냄새가 잘 섞여든 시장 분위기는 활기차고 복잡했다. 재오의 목소리도 약간 들떴다. 처음이지? 매번 볼 때마다 참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어. 끔찍함이 배어 나오지 않은 가벼운 목소리였다. 약간 상기된 기대감까지 느껴졌다.

찐득하게 들러붙은 머리가 귀밑까지 자라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남자가 우리 안에서 여우를 잡아 끌어냈다. 여우 뒷다리를 잡더니 머리를 땅바닥에 세게 내리쳤다. 엉겁결에 끌려 나온 여우는 한마디 괴성을 내지르다 멈췄다. 기절한 여우를 한쪽에 던져 놓고 우리에서 다른 여우를 꺼내 바닥에 내리쳤다. 다섯 마리의 여우가 꽁꽁 언 흙바닥에 널브러져 쌓였다. 희미하게 정신을 차린 듯 꿈틀대는 머리를 나무 몽둥이로 차례로 내리쳤다. 죽은 듯 누워있는 여우에게 남자가 손도끼를 꺼내 다가갔다. 작은 베개만 한 나무토막에 여우 발목을 올리고 도끼로 내리쳤다. 뭉툭한 칼을 꺼내 여우 목에 대고 칼집을 넣은 뒤 뒷다리 부분에도 몇 차례 더 칼집을 넣었다. 기계적이고 재빠른 손놀림이었다. 잘려나간 발목 부분에서부터 천천히 껍질을 뒤집어 벗겼다. 찌이익, 살 찢어지는 소리가 겨울 공기에 섞여들었다. 뒤집어 벗은 옷인 듯 벗긴 껍질을 언 땅에 던졌다. 옷을 벗어 붉게 실핏줄 드러난 하얀 여우 몸뚱이도 다른 쪽에 쌓았다. 여우가 힘겹게 눈을 떴다. 경련하듯 파닥거리는 여우 몸에서 흰 김이 피어올랐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껍질을 벗겨야 가죽 상태가 좋아. 재오가 덤덤하게 말했다. 꽁꽁 언 흙바닥에 붉은 핏물이 고여 갔다.

고조의 손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은유의 손을 꼭 쥐고 있었는데 손끝부터 얼음처럼 차가워가는 느낌이 또렷했다. 감기든 사람처럼 몸까지 오돌오돌 떨었다. 상대적으로 은유의 손이 뜨거웠던 걸까. 은유는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고 몸을 꼿꼿이 했다. 달아나려는 고조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뭉툭한 칼을 잡고 여우 껍질을 벗기는 남자의 손놀림은 순발력과 기교가 있었다. 여우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까. 칼이 지나가고 있다는 느낌도 알아챌 수 없는, 도의 경지의 손놀림을 발휘해 여우도 남자도 무엇도 느끼지 않았으면 싶었다. 찌이익 껍질 벗겨지는 소리. 겨울 공기를 가르고 북적대는 시장의 소음 속으로 사라져 갔다. 고조는 움직일 생각이 없는 건지 딱딱하게 얼어 있었다. 은유가 세게 잡아 끌어낸 다음에야 겨우 걸음을 떼었다.

그날 밤 고조가 마신 술의 양이 얼마였는지 은유는 오래도록 의문으로 남았다. 재오가 처음부터 중국의 백주를 권했다. 고조에게 잘 맞을 거라며 노정공주를 시켰다. 소주도 잘 못 마시던 고조는 노정공주를 잘 받아 들이켰다. 술은 단맛이 느껴졌고 부드러웠지만 목을 넘길 때 느껴지던 톡 쏘는 끝 맛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노정공주를 두 병째 비우고 이후로는 좀 더 저렴한 술로 몇 병 더 비웠을 것이다. 술자리는 새벽녘까지 이어졌고 부축해 들어왔던 고조는 다음 날 깨어나지 않았다. 따영 병원에서 며칠을 보내고 여전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고조는 은유와 함께 돌아왔다.

병원냄새는 갈 때마다 불편했다. 몸속까지 끈질기게 파고드는 냄새는 영원히 익숙해질 수 없을 것이라고 은유는 생각했다. 고조의 병실은 3층이다. 천천히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3층까지 오르는 동안에 뭔가를 정리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병실 문 앞에 서 있곤 했다.

침대에 누운 채 두 눈을 뜨고 있는 고조를 마주보며 앉았다. 저런 눈빛, 하루에도 몇 번씩 부딪치는 눈빛이다. 뭘 원하는지 알 것 같다. 다 들어 줄 순 없다. 밖으로 나가고 싶겠지.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할 때의 눈빛도 저렇다. 손을 우리 밖으로 내밀며 보호사를 만지고 싶어 빈 손짓을 할 때의 강아지들 눈빛도 저와 같았다.

은유는 보호소에 들어온 지 며칠 안 된 애플푸들의 밖으로 나온 손을 무심코 잡았었다. 손을 놓고 몇 발짝 옮기지도 않았다. 함께 갇혀 있던 개들이 애플푸들에게 모두 달려들었다. 집단 린치를 당한 애플푸들은 바닥에 뻗어버렸다. 끙 끙, 가는 신음소리를 냈다. 깨물리거나 할퀴어서 어딘가 다쳤을 것이다. 길들이는 거였다. 이제 들어온 네가 감히 주인의 손을 만져, 라는 경고. 모른 척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관심을 보인다면 애플푸들은 다른 케이지로 옮겨야 한다. 들어온 지 며칠 안 된 아이든 오래 갇혀 있는 아이든 은유가 지나치면 케이지 밖으로 손을 내밀어 잡아달라는 눈빛을 보낸다.

고조 지금 넌 뭘 원하는 거니? 은유는 눈빛으로 묻는다. 배고파? 아니면 나가고 싶어? 고조는 어쩌면 지금도 재오와 잘 사귀고 있어? 라고 묻는지도 모른다. 아니, 헤어졌어, 라고 말할 수는 없어. 네가 편안하길 바라지 않으니까. 내가 대답을 할 때까지 그런 눈빛을 나에게 보낼 거지? 넌 말이 많았어. 원하는 게 있을 땐 주저 없었어. 그런 네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무시하면 곧장 불이익이 따라왔지.

은유는 병원을 찾을 때마다 고조의 옷을 갈아입혔다… 늘 같은 디자인의 환자복이다

은유는 죽은 강아지를 신문지에 둘둘 말아 박스에 네 마리씩 넣어 두었다

쓰러지게 된 원인은 뇌출혈이었다… 고조의 뇌가 촬영된 사진을 수없이 봐왔다

재오가 입은 자주색 칠부 바지 아래로 정강이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중3 때였다. 담임선생님이 참고서를 줄 테니 은유에게 교무실로 따라오라고 했다. 그때 왜 고조도 함께 갔는지. 고조가 보는 앞에서 담임이 한 아름 참고서를 은유에게 안겨줬다. 한 권쯤 나에게 줄 수도 있었는데 열권이 넘는 책을 너에게만 줬다고 고조는 말했다. 그 다음 날 고조는 담임에게 반장을 그만두겠다고 했고 은유가 반장을 넘겨받았다. 담임은 다시 반장 투표를 하는 건 번거롭고 성적도 가장 낫고 여러모로 은유가 적합하다고 말했다. 자존심이 약간 상했지만 담임의 생각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물려받았다는 게 견딜 수 없었다. 처음부터 반장을 했더라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게 아닌가.

너, 누워 있으면서도 그런 기억 떠올리곤 하니? 도무지 말이 없으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야. 언제까지 누워있어야 하는지, 네 부모님은 언제 볼 수 있는지 궁금할 거야. 나는 말이 없는 편이었어. 너를 만나러 와서 말이 없는 건 당연한 거야. 뭘 숨기려고 얘기를 안 하는 게 아니야. 얘기를 해도 너는 반응도 없잖아. 눈을 깜빡이거나 몸을 뒤채거나 나를 빤히 바라보거나 해 보란 말이야. 너의 피부는 여전히 곱구나. 살도 찌지 않았어. 위로 살짝 들린 야윈 콧날로 품위를 드러내고 싶겠지만 글쎄. 나를 제외한 친구들 얼굴 본 지도 꽤 오래됐지? 네겐 나뿐인 거야.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매주 수요일마다 널 찾는 것도 나뿐일 거야. 처음엔 부모님도 자주 왔었지만 너무 먼 길이잖아. 친구들도 몇 번 찾아 왔었지, 이젠 볼 수 없지만. 모두에게 잊히는 시간이 짧아 내심 놀랐어. 너를 이곳에 입원시킨 건 내 뜻이었어.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같이 살아왔었으니까 너를 내가 책임지는 건 당연해. 병원에 떠도는 이런 냄새, 따영에 갔을 때 시장에서 맡았던 것보다 덜하다고 생각하지? 자주 오고 싶진 않아, 병실에 떠도는 냄새 때문에라도. 네 곁에 오래 앉아 있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마. 언젠가 너에게 주저리주저리 얘기할 때, 내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넌 땀을 흘리며 입술을 움직이려고 한 적이 있어. 틀린 얘기를 하더라도 넌 듣고 있어야만 하는구나. 재오와 노정공주를 마실 때, 넌 나를 화나게 했지. 재오는 왜 너에게 더 친절했는지, 마치 내가 아니고 너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굴었었지. 그날 내가 재오와 사귀고 있다고 너에게 처음 말한 날이었어. 그 말을 듣고 네가 화난 사람처럼 굴었지. 그래서 재오가 너에게 친절했을 거야. 난 그게 싫었고. 은유는 고조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소리쳤다.

고조 맞은편 침대는 조용했다. 치매를 앓는 할머니 주변에 가족들이 몇 보였다. 두런거리는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할머니의 60을 넘긴 아들은 일주일에 두 번, 꼬박 병원에서 보내면서 할머니를 돌본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가 아들인지 보호사인지 구별하지 못했다. 아들은 젊었을 때 어머니에게 너무 많은 불효를 저질렀다고 했다. 일주일에 이틀, 간호하는 시간을 얻기 위해 아들은 직장까지 옮겼다. 그로인해 이혼을 당했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했다. 그 일이 이혼을 결정했는지 이혼을 하려는 찰나였는지 알 수 없다. 소문이 그렇다면 그렇다고 믿을 수밖에. 할머니는 아들이 오면 환자복을 벗고 예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병원 정원을 산책하거나 멀지 않은 마을길을 걸어 돌아올 뿐이었다. 할머니의 옷장에는 화려한 색의 외출복이 빼곡히 걸려있었다.

고조의 옷에 대한 안목은 남달랐다. 신발, 가방도 고조의 것이 되면 특별해 보였다. 학생 모두가 입었던 교복마저 어딘가 다르게 고쳐 입었다. 손수 고쳤기 때문에 누구와도 같지 않았다. 고조에게 부탁해 은유도 교복을 고쳐봤지만 느낌은 달랐다. 은유는 고조에게 너와 다르게 고쳤다고 우겼다. 고조가 처음 패션디자이너가 꿈이라고 말했을 때 충격이었다. 은유도 패션디자이너가 꿈이었다. 그 말을 은유가 먼저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고조가 없을 때만 은유는 친구들에게 패션디자이너가 꿈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고조의 늘 한 발 앞서가는 느낌이 싫었다. 은유는 패션디자이너의 꿈을 버렸다. 친구들은 너희 둘 언제나 손을 잡고 긴 복도를 걸어 화장실을 다녀오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둘이 싸우는 것도 남들 눈에 띄게 해서 졸업 후 모일 때면 수다거리를 제공하곤 했다. 고조는 목소리 크게 덤볐고, 은유는 차분하고 조용하게 따지기 시작하면 싸움은 서로 밀리지 않았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말싸움이 그치지 않을 때도 많았다. 긴 말싸움이 싫었던지 고조가 의자를 들어 은유에게 던진 적도 있었다. 그런 싸움 다음날에도 둘은 손을 잡고 화장실을 오갔다며 놀렸다.

은유는 병원을 찾을 때마다 고조의 옷을 갈아입혔다. 늘 같은 디자인의 환자복이다. 어떤 옷이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잘 어울렸던 고조의 예전 옷들은 거의 버렸다. 이제 은유는 그런 것들에 질투할 필요가 없어졌다. 고조의 신발을 훔치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카피에 불과했지만 포인트를 잘 잡아 약간씩 변화를 준 스케치들로 채워진 고조의 디자인북을 찢어버리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다. 은유가 갈아입히는, 늘 같은 디자인의 옷에 핀잔을 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고조는 누워서 얕은 숨만 내쉬고 있었다.

어제 박스 열 두 개가 나갔다. 은유는 죽은 강아지를 신문지에 둘둘 말아 박스에 네 마리씩 넣어 두었다. 이 주에 한 번 박스를 처분하기 위해 폐기물수거 트럭이 왔다. 기사는 바퀴 달린 케이지에 네 개씩 싣고 박스를 냉동차에 옮겨 실었다.

말티즈 0332. 보호소에 들어온 지 2주일이 지났다. 일곱 살이면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나이다. 들어올 때부터 약했다. 재분양의 기대는 포기했고 지금껏 살아왔던 것도 기적처럼 느껴졌다. 혀가 밖으로 밀려 나왔고 입 주변은 찢어져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먹이도 스스로 먹지 못해서 매일 유동식을 주입했다. 빼어 문 혀로 숨을 꼴깍꼴깍 들이마시면 주사기로 흘린 먹이가 목 안으로 넘어갔다. 목으로 넘기는 양보다 밖으로 다시 흘러나오는 양이 더 많았다. 하루 다섯 번 빠뜨리지 않고 은유가 해오던 일이었다. 한꺼번에 많이 먹을 수 없어 자주 적은 양을 줄 수밖에 없었다. 워낙 못 먹다 보니 소화력이 점차 약해졌다. 0332는 조금씩 기운을 잃어갔다. 2주 동안 잘 버텨주었다. 잘 못 먹어서인지 뼈마디도 약했고 전체적으로 홀쭉했다. 길게 자란 거친 털은 뭉쳐져서 샴푸를 해도 풀리지 않았다. 은유는 털을 깎아야겠다, 생각은 했다. 0332를 케이지에서 꺼내 안아 들고 책상 위에 놓았다. 은유를 빤히 바라봤다. 은유는 0332를 볼 때마다 숨을 쉬는 것이 오히려 고통이 아닐까 생각했다. 은유 팔에는 강아지들이 할퀸 길고 가는 상처들이 많았다. 오래돼서 희미해져 가거나 아직 핏물이 배어 나올 것처럼 선명한 상처까지. 0332는 은유의 손길이 익숙해졌을 테고 또한 반항할 기운도 없을 것이다. 은유는 0332에게 석시콜린을 주입했다. 긴장감에 팽팽했던 0332의 근육이 서서히 늘어졌고 눈도 감겼다. 신문 몇 겹을 꺼내와 두 번을 말아 쌌다. 은유는 세 마리가 들어있던 박스를 꺼내 0332를 넣고 테이프로 마무리해서 냉동고에 넣었다. 0332를 넣어 둔 박스가 마지막이었다.

냉동고가 텅 비었다. 텅 빈 냉동고를 볼 때마다 가볍고 홀가분하단 생각과 냉동고를 채웠던 강아지들이 떠올라 무겁고 혼란스러웠다. 보호소에서 2주일을 채운, 재분양이 안 된 강아지와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하기 힘든 강아지도 있었다. 몸이 사르르 이완되어가는 느낌은 늘 불편했다.

고조가 쓰러지게 된 원인은 뇌출혈이었다. 고조의 뇌가 촬영된 사진을 수없이 봐왔다. 은유가 알 수 있는 건 검은 바탕에 흰 부분이 있으며 전체적으로 먹물이 풀려 희미한 그림이 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몸무게 230g인 시루의 머리는 은유 주먹보다 작다. 그 작은 뇌를 움직여서 은유의 말을 알아듣고 배고프다는 표현을 하고 두려움에 떨며 숨어들기도 한다. 한 줌도 안 되는 뇌를 작동시켜 사고하는 시루를 볼 때마다 신기하다.

고조의 뇌도 누구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약간 검게 표시되어야 할 부분이 흰색으로 두드러져 보인다는 것뿐이다. 두드러진 흰색 부분으로 인해 고조는 한 줌 뇌를 가진 시루도 할 수 있는 배고프다는 표현도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드러낼 수 없다. 밤을 새워 얘기하고 토론하고 싸움으로 번질 수 있었던 것도 뇌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유는 손 안에 들어오는 시루의 머리를 쥘 때마다 해맑기만 한 눈을 들여다보게 된다. 시루가 고조보다 더 많은 걸 가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치곤 했다.

시루는 유기견으로 들어온 토이푸들이 낳은 새끼였다. 두 마리를 낳았고 시루의 형제는 두 달 만에 분양되어 나갔다. 시루를 키우게 된 건 은유가 보호소에 들어온 후 태어난 첫 생명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시루를 남기고 그 어미는 곧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어미는 새끼를 낳을 때까지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시루는 어미의 유족이 되었다. 유족이라니, 남아있는 가족. 시루는 그러니까 새끼 두 마리를 낳고 죽은 푸들의 유족이었다.

시루는 대부분의 시간을 은유 방에서 보낸다. 밖으로 나와서는 은유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은유가 시루를 예뻐하는 기미라도 보이면 시루는 아마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보호소 내에서도 질서라는 게 있다. 위계도 있고 권력도 있다. 덩치가 크고 강하고 약삭빠른 개들은 더 많이 먹을 수 있고 케이지 안에서도 더 자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시루처럼 작거나 잘 섞이지 못하는 아이면 종일 우리 구석진 자리에서 꼼짝을 안 한다. 구석진 자리에 쪼그려 앉아 있더라도 괴롭힘당하지 않고 무사하게 넘어가는 날은 드물다. 크기별로 구분해서 케이지에 넣기는 하지만 섞여서 생활할 때가 있다. 이유 없이 깨물리기도 하고 할퀴어서 피가 나는 일이 흔했다. 시루가 밖에 나와 은유와 가깝게 보인다면 어느 순간 덩치 큰 개들이 뛰어와 시루를 낚아 채 갈지 모른다. 시루는 대부분의 시간을 은유 방에 갇혀 있고 밖으로 나와서는 멀리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은유의 보호를 받는 대신 혼자 방안에 갇히는 대가를 받아들이고 있다, 시루는.

재오와 헤어진 건 시루 때문이었을까. 나보다 시루를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 재오가 떠나겠다고 말하기 전, 은유에게 머뭇거리며 꺼낸 첫마디였다. 친구로 몇 년을 지냈고 사귀자, 라는 말을 꺼낸 이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래. 그게 물음이었고 답이었다. 고조가 없는 둘만의 시간들이 지루하고 어색해졌었다. 시루 핑계를 댄 건 고조에게서나 나올 법한 위트였다고 은유는 생각했다.

재오가 다녀갔다. 헤어진 후 첫 방문이었다. 시루가 꼬리를 흔들며 반겼다. 밖의 우리에서도 컹컹, 개 짖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마치 재오를 반기는 것처럼. 시루 때문에 떠나간 건, 그런 핑계를 댄 재오는 비겁하다. 시루가 재오의 입술에 폭풍 뽀뽀를 했다. 얇고 가는 시루의 혀는 재오의 입술을 코를 턱을 핥고 또 핥았다. 냄새를 다 핥아 없앤 시루가 재오의 품을 빠져나와 은유의 품에 안겼다. 시루에게서 재오의 냄새가 느껴졌다. 재오의 코에서 맡아지던 얄팍하고 인색한 냄새. 차라리 진하거나, 진해서 역겹거나, 처음엔 좋았다가 잠시 후 역해졌다면 그 냄새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색하고 얄팍해서 더 간절했던 냄새였다. 시루에게서 아주 짧게 재오의 향이 났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재오가 커피를 내렸다. 시루는 재오의 발끝을 졸졸 따라다녔다. 창밖의 잣나무 이파리는 여전히 누르스름했다. 잣송이가 창 아래 가까운 곳에 떨어졌는지 향이 흘러들었다. 떨어질 때 벗겨졌거나 짓이겨진 잣송이 상처에서는 머리가 어지러운 독 같은 향이 배어 나왔다. 공기 중에 섞여 날아든 향은 부드럽고 향긋했다. 누워있는 고조의 눈빛에서 보이는 원망과 간절함과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빛, 그렇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고조의 눈빛이 은유는 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 고조는 은유의 청바지가 크고 헐렁해서 다리가 멸치 같아 보인다고 말했다. 은유는 무심코 고조를 밀쳤다. 넘어지면서 보도블록 모서리에 부딪쳐 정강이가 찢어졌다. 고조의 정강이뼈에서 피가 흘러 흰색 컨버스화가 빨갛게 물들어갔다. 둘 다 놀라서 두 눈만 뜬 채 잠시 동안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멸치가 아니야, 중얼거리며 은유는 도망쳤다. 고조가 책가방을 들고 절룩이며 은유의 집 앞을 지나가길 오래 기다렸지만 그 날은 볼 수 없었다. 정강이뼈에 크게 흉터가 남았다.

재오가 입은 자주색 칠부 바지 아래로 정강이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카키색 가죽 스니커즈와 바지의 조합이 잘 맞았다. 고조의 패션 감각이 재오에게서 느껴졌다. 재오의 손놀림은 침착하고 빨랐다. 수동식 커피머신에서 떨어지는 탄자니아 AA의 향이 잣 향을 눌렀다. 세 잔을 내리곤 했던 재오는 이제 두 잔만 내려도 될 것이다. 세 사람은 모두 커피를 지나치게 좋아했다. 인터넷에서 커피 맛집을 찾아 200g씩 주문을 했다. 커피를 마실 때 전문가인 것처럼 맛을 평가하곤 했다. 커피 맛은 매번 달랐지만 평가는 크게 다르지 않은 말들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 구별되는 맛을 맛 그대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어떠한 낱말로도 적확하지 않았고 매번 비껴갔다.

은유가 재오와 사귀는 사이라는 말을 했을 때, 고조는 적확하게 의미를 짚고 싶었을 것이다. 고조와 재오가 회사 동료로 만난 이후 셋은 오래 친구로 지내왔을 뿐이었다. 고조는 얘기를 듣고도 무덤덤해 보였다. 말이 없었고 술 마시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고조가 쓰러지던 날 셋은 모두 취했고 고조가 더 많이 마셨을 리도 없었다. 많이 마신 술 때문이었는지 충격 때문이었는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고조는 테이블에 엎드려 잤고 더 오래도록 마시던 재오와 은유가 일어서려 할 즈음에 고조는 의자 아래로 쓰러졌다. 둘이서 고조를 부축해 호텔로 향했고 끌리는 느낌이었지만 분명 고조는 다리에 힘을 주곤 했다.

커피 맛은 좋았다. 고조 눈빛이 달라졌더라. 재오는 누르스름한 잣나무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은유도 그쪽에 눈빛을 두었다. 창밖 잣나무 잎은 누르스름했다. 고조가 키우던 장수풍뎅이 애벌레를 잣나무 아래 묻었던 다음해부터 변했다. 고조는 싫증을 잘 냈다. 장수풍뎅이를 몇 달 기르더니 못 키우겠다며 애벌레를 잣나무 아래 묻었다. 물고기도 기른 적이 있었고 자라도 길렀었다. 은유와 헤어진 후 재오가 고조에게도 발길을 끊은 줄 알았다. 은유는 묘한 배신감이 느껴졌다.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내 눈을 오래 바라 봐. 무슨 말일까 궁금해. 재오는 혼잣말처럼 다시 중얼거렸다. 시루가 꼬리를 흔들며 테이블 아래에서 은유와 재오를 번갈아 올려다보았다.

처음 잣나무 이파리가 누렇게 변해갈 즈음 나무 아래를 파보았다. 까맣고 부드러운 부엽토 속에 애벌레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고조가 묻었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은유는 다시 흙을 덮었다. 잣나무와 애벌레는 서로 공생관계를 유지한다고 했다. 애벌레를 모두 없애버리면 잣나무 또한 살아남을 수 없다. 처음부터 없었다면 모르지만 이미 서로 깊숙이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했다. 잣나무 잎이 누렇게 변해가는 걸 보고 조경전문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장수풍뎅이 애벌레가 잣나무 아래 터를 잡았고 잣나무에게 가는 양분의 일부를 차단하거나 보내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서로 도우면서 괴롭히는 사이? 잣 열매는 여전히 크고 단단했다.

재오는 두 잔의 커피를 다시 내렸다. 커피콩은 고조가 수동그라인더로 갈았었다. 그라인더가 작아 두 번을 갈았다. 셋이 두 잔씩의 커피를 마시려면 두 번을 갈곤 했다. 은유는 재오가 커피를 갈고 내리는 걸 바라보았다. 셋은 휴일이면 커피를 마시며 잣나무가 보이는 마당을 내려다보며 무슨 얘긴가를 끊임없이 주고받았다. 고조는 출퇴근 시간이 너무 길어 이사를 가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올 때부터 은유는 고조와 함께 살았다. 도심을 한참을 벗어난 보호소에 있는 집으로 이사 올 때 고조와 함께 오는 것이 은유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재오가 은유를 바라보며 고조에게 같이 갈까? 하고 물었다. 아니. 은유는 거절하고 혼자 왔다.

은유는 빤히 눈을 뜨고 누워있을 고조를 떠올리며 소리나지 않게 문을 열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어느새 고조는 자고 있었다. 큰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고조는 하루의 대부분, 아니 전부를 잠으로 시간을 채운다. 고조의 앞자리 할머니 상태가 위급해 보였다. 60이 넘은 아들은 할머니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앉아있었다. 아들의 동생인 듯한 남자, 그리고 며느리인 혹은 딸인 듯한 여자, 손자인 것처럼 보이는 젊은이까지 할머니 침대 주변에 서 있거나 앉아 있었다. 의사며 간호사가 번갈아 할머니를 살폈다. 조용하지만 서두르는 기색이 엿보였다. 침대 주변을 커튼으로 대충 가렸지만 그들의 숨소리까지 들렸다. 여자는 훌쩍이거나 가늘게 흐느꼈다. 진심이 느껴지는 울음이었다.

은유는 고조의 손을 잡았다. 살이 조금 더 내려 정맥이 도드라진 손은 부드럽지만 차갑게 느껴졌다. 만지작거리다 자신도 모르게 꼭 눌렀다. 손을 살짝 빼는 느낌이 들어 깜짝 놀라 고조를 바라봤다. 잠에 취한 눈빛이었지만 점점 또렷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잘 잤어? 일어났어? 머릿속에서만 무수한 말들이 오갔다. 마주보는 서로의 눈빛에서 감정이 읽혀졌겠지만 그건 의심만 더해갈 뿐이었다. 나 지금 불편해, 라고 하는 말을 네가 미워, 라고 읽을 수도 있었다. 고조가 입을 다물었으니 은유도 다물었다. 말들은 오해만 더했다. 그런 오해 때문에 숱하게 싸웠고 숱하게 사과했다. 차가웠던 고조의 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은유는 손을 꼭 눌러주고 시트 위에 놓았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으려다 옆 침대가 생각났다.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고조에게 신경 쓰는 사이 발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사람들은 사라지고 할머니마저 보이지 않았다. 커튼은 걷혔고 시트마저 벗겨졌다. 반 넘어 들어있는 링거병이 걸려있고 침대 아래는 할머니 것이었을 슬리퍼 한 짝만이 놓여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다. 곧 임종을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고조의 손에서 움직임이 느껴졌고 잠시 고조를 바라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병실은 한결 조용했다. 책을 읽는다면 은유의 목소리만 조그맣게 울릴 것이었다.

은유가 읽으려던 책은 복사본이었다. 책 표지와 앞 페이지 몇 장이 뜯겨져나간 책이 있었다. 청록색에 가까웠지만 이미 바래고 낡아가는 뒤표지만 남아있는 문고본 책이었다. 고등학생 때 고조와 함께 살던 방에 언제부터 그 책이 책장에 꽂혀 있었는지 기억에 없다. 어느 날 은유가 그 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걸 본 고조도 읽었다. 일본이 배경이었고 번역본임이 틀림없었다. 둘의 기억에 오래 남아있었고 20대의 어느 날 그 책에 대해 오래 얘기했다. 토막토막 기억나는 내용을 떠올렸고 주인공 이름이 칸나였다는 것도 기억해냈다. 은유는 인터넷을 검색했고 주인공 이름을, 내용을 입력해서 책의 제목을 알아냈다. 이미 절판되었고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A4 용지에 복사했고 제본을 했다. 그때처럼 청록색 표지로 갈무리했다. 은유는 첫 문장을 읽으려다 그만두고 책을 할머니 침대 끝에 놓인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병실을 나왔다. 어디선가 잣 향이 흘러들었다. <끝>




  <당선소감>


   "어릴때 꿈 이뤄…새로운 꿈 가져도 될 것 같아"


친구와 태백 여행을 다녀왔다. 둘이서 나눈 많은 말들 중 초등학교 때부터 나의 꿈은 소설가였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것이 충격이었는지 친구는 "초등학교 때 꿈이 소설가였다니"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초등학교 때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그 친구가 말했다.

왜 그랬는지 그것이 나의 꿈이었던가, 스치듯 그런 생각을 했다. 수많은 꿈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많은 꿈들을 절박하게 희망했거나 어떤 꿈들은 나도 모르게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더 새로운 꿈을 가져도 될 것 같아 기쁘다.

한강 발원지라는 검룡소에도 다녀왔다. 오가는 두어 시간 동안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친구와 둘이 걸었다.

바람에 떨어진 낙엽들이 하얗게 눈 덮인 길 위에서 굴러다녔다. 푹푹 빠지는 눈 위에 동물 발자국도 자주 보였다. 눈이 녹으면 흔적 없이 사라질 발자국이겠지만 친구와 두리번거리며 열심히 찾았다. 누군가 봐주지 않더라도 내내 무엇인가를 열심히 할 것 같다.

당선 전화가 온다면 서울예대 박기동 선생님에게 맛있는 걸 사드려야겠다는 다짐을 오래 해오고 있었다. 겨우 5개월을 못 기다려주신 선생님. 많이 죄송합니다.

한신대 최수철 선생님, 아주 오랜 인연 수많은 이야기들. 큰 힘이 되었습니다. 윤후명 선생, "열심히 하는 사람이 제일 좋아"라는 말 새기겠습니다. "소설가 언제 될 거야"라는 농담을 못하게 되었다고 걱정하는 가족들. 포기하고 있었는데 '오올, 드뎌' 소식을 전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리고 많이 고맙습니다.


  ● 본명 박규숙


 

  <심사평>


  주제의식, 표현·구조 통일 속 성공적으로 부각


2021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투고된 작품은 190편이었다. 수십 년 전 기억을 되살리는 내용이라든가 일상을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양상의 투고 작품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개 보편으로 확장되지 못한 채 개인사의 범주에 머무르고 만다. 신춘문예는 신인들의 등용문인 만큼 선별기준을 주제의식이라든가 형식에서 이전과 다른 새로움에 둘 수밖에 없다.

심사자들은 먼저 동시대와 호흡하는 한편 개성이 드러나는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합의하였다. 각 심사자는 예심에서 응모작을 절반씩 나누어 읽은 뒤 열 편 내외의 작품을 선정하였으며, 본심에서는 스무 편 가량의 진출작을 두고 논의를 펼쳤다.

그 가운데 본격적으로 검토한 작품은 '은유와 고조', '파랑', '그래도 해피 크리스마스', '재연과 재연과 재연의 사이' 네 편이다.

'은유와 고조'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문장이 내공을 드러낸다. 특히 살아있는 여우에게서 가죽을 벗겨내는 장면의 묘사가 퍽 강렬하다. 이러한 강렬함은 작품의 구조와 맞물리면서 그 의미가 배가된다.

한 편에는 반려견이 있다면 다른 한 편에는 병상에 누운 혼수상태의 친구가 있다. 이성 없는 대상을 둘러싼 인간의 사고 및 행위의 문제를 따져 묻는 주제의식이 표현과 구조의 통일 속에서 성공적으로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 문제를 다루고 있는 '파랑'은 분위기를 만드는 힘이 돋보였다. 찬찬한 흐름 속에서 어린 시절 당한 성폭력이 어떻게 존재 의미를 뒤흔들게 되는가가 설득력 있게 펼쳐졌다.

열악한 노동 현실과 현실 종교의 상황을 결부시키고 있는 '그래도 해피 크리스마스'는 시의적절한 주제를 적절하게 포착하였으나, 펼쳐놓은 문제들을 모두 다 수습해 내지 못하였다는 느낌을 남겼다.

'재연과 재연과 재연의 사이'는 욕망의 복제 양상을 발랄하게 풀어나가는 문장이 강점인 반면, 중반 이후의 전개가 다소 작위적으로 흘러 아쉬움이 남았다.

'은유와 고조'와 '파랑'을 두고 최종 논의를 거친 뒤, 당선작으로 전지호(필명)의 '은유와 고조'를 선정하였다. 전지호씨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심사위원 : 김별아, 홍기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