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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달팽이를 옮기는 방법 / 허성환

 

연차를 낸 평일에도 남편의 모니터 화면에는 복잡한 알고리즘이 그대로 떠 있다. 책상에 노트북이 켜진 거로 봐서 작업 중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뚜껑이 따진 캔 맥주와 핫바 껍데기, 과자봉지가 책상 위에 어지럽게 놓여있고 백화점 카탈로그가 아무 쪽이나 펼쳐져 있다. '단순함은 진정한 우아함의 핵심이다.'라는 코코 샤넬의 명언이 담긴 사넬 가방 광고였다. 카탈로그의 상품을 구매했다면 홈쇼핑 주문이니 밖에 나갈 이유가 없다.

남편은 우리가 같이 자는 안방에도 없었다. 침대 밑에도, 화장실에도 없었다. 남편이 숨바꼭질 같은 걸 할 사람은 아니었다. 안방 옆의 드레스룸에는 내가 즐겨 입던 계절별 옷과 시즌오프로 아울렛에서 산 옷들이 걸려 있다. 옷가지를 쓸데없이 뒤적거려보다가 깨달았다. 남편은 후드 티셔츠와 체크 남방, 트레이닝 복 몇 개 빼고는 옷이 없었다. 보일러실이나 세탁실을 가 볼 필요는 없어졌다. 남편이 밖으로 나간 것을 확신 쪽으로 기울였다. 거실로 나와서 현관 쪽을 쳐다보니 남편의 하나뿐인 운동화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중고 물품 거래를 하러 간 것일까. 이따금 남편은 중고나라 카페를 통해서 집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파티용 무드 플라워 향초나 빔프로젝트를 사 오기도 했다. 물론 그 빔프로젝트로 남편이 거창하게 떠들어대던 영화감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도무지 쓸 일이 없어 보이는 무드 향초도 스무 개나 사 와서 온종일 내게 구박받기도 했다. 남편은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바람도 쐬고 동네 사람도 만날 겸 사 왔다고 변명했다. 남편은 최근 들어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거실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테이블 아래 충전기를 꽂고 충전 시켜 두고 간 것이다. 테이블 소파의 맞은편에는 벽걸이 TV가 있고 그 옆에는 화이트보드가 있다. 화이트보드에는 우유, 삼겹살, 아이스크림 따위의 단어들이 지워진 자국이 있다. 남편에게 신혼 때부터 마트 심부름을 시켰던 흔적이다. 남편에게 주문할 때는 주의가 필요했다. 예를 들어 밤고구마를 사 오라고 남편에게 주문하면 남편은 밤과 고구마를 사 왔다. 밤고구마라는 품종이 있는 줄 몰랐다는 것이다. 카레를 만들어 주겠다고 돼지고기를 사 오라고 시켰더니 찌개용 고기를 사 왔고 잡채를 만들어주려고 고기를 사 오라고 했더니 가브리살을 사 왔다. 남편은 고기가 다 비슷하게 생겨서 그게 그건 줄 알았다고 했다. 시킬 때는 뭐든 구체적으로 적어줘야 했다.

"마트 갈 때, 우유 사 와. 아 참, 사과 있으면 6개 사와."

구체적인 개수를 알려줘도 다른 지점에서 문제가 일어나기도 했다. 남편은 사과가 아닌 우유를 6개 사 왔다. 그러니까 남편은 마트에 사과가 존재하면 우유를 6개 사 오라는 걸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후에 남편의 프로세스를 파악하고 구체적으로 오더를 했더니 실수 없이 잘 소화했다. 오늘은 마트 심부름을 부탁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남편은 어디로 갔을까.

요즘 같은 시대에 휴대전화를 두고 가면 정말 어쩔 도리가 없어진다. 거실을 서성이다가 단서를 찾을 만한 대상은 아무래도 컴퓨터뿐인 것 같아서 다시 작업실로 돌아왔다. 남편의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남편의 컴퓨터를 잘 못 손대다가는 중요한 파일이 날아갈 수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윈도우 작업 표시줄을 보니 바탕화면의 음악 플레이어에는 가수 이적의 '다행이다' 노래가 재생되고 있었다. 헤드셋이 연결되어 노래가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몰랐는데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생각났다. 남편은 내 생일 두 달 전 즈음에 보컬학원에 나 몰래 다니다가 적발됐다. 남편이 언성을 높이며 학원 원장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니, 제가 가수 데뷔하려는 것도 아니고 직장인 취미반을 등록했는데, 당연히 한 곡을 완곡 하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요? 발성 연습만 지금 두 달째입니다. 상담 때 말씀드렸잖아요! 아내 생일날, 아내한테 불러주려고 연습하는 거. 벌써 아내 생일 지났어요!"

"아니, 선생님, 이적이 장난입니까? 이적 노래를 그렇게 빠르게 마스터 할 수 없어요. 이적의 노래는 쉬워 보이지만 결코 만만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남편에게 따졌다. 여가활동이나 취미생활을 뭐라 할 게 아니라 나와 의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디 갔는지 말하고 가면 덧나냐고. 남편이 고개를 숙였다. 몰래 깜짝 연습해서 노래를 불러줘야 효과가 있는데 들켜서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방 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방 안에 있는 남편의 물건이랄 게 딱히 없었다. 동종업계 사람들은 피규어나 로봇, 장난감들을 전시하고 사는 경우도 꽤 있는 것으로 안다. 프라모델이 하나 있는 건 우리가 다니는 게임회사에서 출시한 것으로 전 직원에게 나눠준 거였다. 그 이외에는 내가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아직 뜯지 않은 택배상품이 박스채로 쌓여 있었다. 남편의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채워 넣자고 했다. 이제 남편도 여가생활을 챙겨야 하지 않겠냐고. 남편은 자기는 괜찮으니까 나보고 몸조리 잘하라고 했다.

나는 임신 9주 차에 약하게나마 뛰던 태아의 심장이 멈췄다는 진단을 받았다. 첫 아이는 임신 초기에 심장 뛰는 것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 유산됐다. 다이어트약을 복용 중이었고 대장내시경은 물론, 태아에게 악영향을 끼칠만한 행동을 많이 했다. 두 번째 아기는 우리가 원한 계획 임신이었다. 산부인과도 양재에서 강남으로 옮겼고 난임 카페에서도 좋은 글만 골라 읽었다. 육아휴직을 내고 극도로 신경을 썼는데 또 유산이라니. 내가 딛고 있는 지구가 와르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인공수정마저도 실패로 끝났다. 눈물이 더 나오지 않을 만큼 운 뒤에 남편과 함께 둘이서 즐길 수 있는 삶을 살자고 약속했다. 남편은 닌텐도 오락기도 샀고 플레이스테이션도 샀다. 새것은 아니었고 중고거래 카페를 통해서 헌것을 사서 가지고 놀았다. 그것마저도 다시 되팔아서 받은 돈을 내게 주었다. 우리는 웃음을 잃었다.

인터넷 목록을 뒤져서 남편이 최근에 옥션으로 산 목록을 체크했다. 침낭이 있었고 침낭이 들어갈 만한 큰 사이즈의 등산 가방이 있었다. 코펠이나 버너는 없는 것으로 봐서 낚시나 캠핑을 기획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닭가슴살도 있었다. 최근에 내가 남편에게 배가 나와 보인다고 살 좀 빼라고 구박했더니 운동은 하지 않고 닭가슴살만 주문해서 가끔 먹고 있던 것이다. 구매목록을 삭제한 내역은 없어 보였다. 나는 휴대전화를 들고 인사과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우리 남편, 회사에 있나요? 지금 회사에 없죠?"

"남희 씨, 연차 써서 휴가인데? 회사에 없어. 자기, 남편이랑 대화 잘 안 해?"

"아뇨, 휴가란 말은 들었는데 집에 없어서요."

"또 맨홀에 빠진 거 아니야?"

그제야 생각났다. 남편은 언젠가 집에 돌아와서 이불을 꽁꽁 뒤집어쓰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한여름에 이불을 뒤집어썼기에 뭔가 싶어서 이불을 걷었더니 온몸에 긁히고 찢긴 상처가 나 있었다. 남편의 몸에서 악취가 났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까 대답하지 않고 회피하려 했다. 누군가에게 맞았거나 넘어져서 다친 흔적은 아니었다. 내가 계속 들볶자 남편은 끝내 입을 열었다. 길을 걷다가 맨홀에 빠졌다고 했다. 나는 남편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했다. 아무리 휴대폰을 보고 길을 걷거나 딴청을 피워도 공사 중이면 위험이나 경고 문구를 주변에 표시해두지 않느냐고. 그러니까 남편은 푯말이 없어서 빠진 거라고 했다. 나는 남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밤 뉴스에 맨홀 뚜껑을 고물상에 내다 판 절도범이 검거되었다고 나왔다.

나는 전화를 끊고 서둘러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남편은 어딘가에 빠져버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밖은 완연한 가을인데 날씨가 우중충했다. 주차장에 차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아직도 남편은 한때 임신 중이었던 나를 위해서 차를 놔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습관이 그대로 남아있다. 내비게이션의 목록에는 아직도 강남의 산부인과가 추천 도착지로 설정되어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달렸다. 산책로와 가시나무가 있는 도로가 펼쳐졌다. 문득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겨울처럼 추웠던 어느 봄의 오후, 사내 카페테리아에서 인사과 지인과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인사치레로 서로의 의상을 칭찬하다가 뜬금없이 지인이 어떤 남자를 원하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내 말만 잘 들어주면 괜찮다고 말했다. 부모님의 권유로 맞선을 몇 번 봤었는데 별로였다. 그래서 평소에 사내커플이 되어보는 것도 괜찮다고 일부러 부서마다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인사과 지인이 남자 한 명이 곧 올 거라고 했다. 내 남편이 되기 전의 그는 우리 게임회사의 주력 게임의 캐릭터가 그려진 후드 티셔츠를 입고 내 앞에 나타났다. 그가 머뭇거리자 인사과 지인이 끼어들었다.

"남희 씨는 개발팀 프로그램팀장이고 연봉은…… 우리 다 같은 회사니까 대충 알지? 돈 잘 벌어."

그는 안절부절 못하며 나를 제대로 못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먼저 말을 걸어주길 기다렸다기보다는 달걀처럼 예쁜 두상과 어린 선인장의 가시처럼 듬성듬성 나 있는 그의 턱수염을 보고 있느라 말을 걸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미남이 아니라서 장점을 찾으려 애썼다. 침묵이 5초간 이어지자 그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구시렁거렸다.

"인생은 짧고 코딩은 길다. 일하러 가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그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아니, 서로 이름이라도 알고 지내요. 무슨 사람이 사람을 소개해줬는데 그냥 가버려요?"

"어차피 안 될 거 같아서요."

그가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전체적으로 표정이 어둡고 침울해져 있었다. 그렇게나 빨리?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인사과 지인이 그를 측은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사실, 남희 씨 소개팅 두 번 퇴짜 맞아서 자신감이 없어. 사람은 참 좋아. 속는 셈 치고 한 번 만나봐."

인사과 지인이 중재해서 그와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일주일 뒤에 첫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그는 내 집 앞까지 차를 몰고 왔다.

"날씨가 쌀쌀하네요."

그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대화 자체가 끊어져 버렸다. 차는 출발하지도 않고 주차된 상태였다. 그는 안절부절 못하고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설마, 이 사람, 에어컨을 틀 줄 모르는 건가. 아니면, 초보운전이라거나 설마? 무면허 운전? 곧장 제가 운전할까요, 라고 물으려다가 그건 법적으로 문제가 되니까 제안할 수 없었다.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후……. 연주 씨, 죄송해요. 제가 연애 경험이 너무 적어서 데이터가 없어요. 원래 첫 데이트에는 분위기에 좋게 비트가 빠른 팝송이나 최신가요 같은 거 틀어두고 신나게 달려야 하는 거 같은데, 음악이 없어요. 나, 여태껏 음악도 안 듣고 뭐 했지. 아, 생각해보니 우리 회사 게임 BGM이랑 OST만 죽어라 들었네. 라디오라도 틀까요?"

나는 뭔가 많이 잘 못 되었음을 느꼈다.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게 보였다. 순간, 그가 차를 운전하지 않아도 되는 아주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그냥 여기 주차해두고 우리 집으로 가요. 제가 맛있는 거 해줄게요."

"아, 정말요? 그래 주시겠어요?"

"네, 그럼요."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그는 갑자기 천진난만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나를 졸졸 따라서 내 집 앞까지 왔고 나는 도어락 문을 열었다. 오피스텔 안은 조금 지저분했지만, 속옷 같은 게 널려있지 않아서 상관없었다. 그가 나를 따라 들어왔다. 나는 부엌으로 갔지만, 그와 외식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요리할 재료를 사두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라면을 끓였다. 그래도 손님이 왔으니 파도 송송 썰어 넣고 달걀도 하나 풀었다. 김치도 꺼내서 식탁에 올렸다. 그는 정갈하게 차려진 라면 보고 휴대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몇 번 찰칵 소리가 나더니 마음에 드는 사진을 건졌는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잘 먹겠습니다!"

그는 라면을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다 먹었다. 그러고 나서 뒷정리를 시작했다.

"김치는 냉장고에 넣으면 되나요? 그릇, 싱크대에 놓을까요? 설거지, 제가 해요? 저, 설거지 잘하는데."

내가 설거지를 부탁하니까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설거지하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설거지를 잘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참 열심히 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를 쳐다보았다. 뭔가를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표정이 목줄을 한 골든레트리버가 주인이 시킨 대로 심부름을 하고 왔을 때, 머리를 쓰다듬어주길 원하는 눈빛이었다. 나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연히 유혹의 눈빛은 아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내적 고찰 중인데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지금 키스할 타이밍인가요?"

"아뇨."

그에게 천천히, 알 수 없는 감정이 들면서 빠져들 법 같기도 한데 얼굴을 보니 잘 생기진 않아서 첫날부터 키스하긴 힘들 거 같았다.

"앗, 죄송합니다. 연애를 글로만 배워서 이런 상황에서는 하는 거로 잘 못 알고 있었어요."

2분 정도 침묵이 있었고 그는 안절부절 못하고 좁은 거실과 부엌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화장실이 어디에 있냐고 물어본 뒤 화장실에 잠시 다녀왔고,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지 입을 열려다가 멈추고 다시 입을 열려다가 멈추었다. 나도 뭔가 말을 꺼내려다가 내가 꺼낸 말로 인해서 그의 대화가 어디로 튈지 몰라서 망설이는 중이었다. 그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 되더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내 앞에 섰다.

"저…… 몰라서 그랬어요. 저는 카이스트도 겨우 졸업했고 연애도 못 하고 만년 공돌이로 살다가 죽을 운명이었어요. 부모님이 너는 학벌도 좋고 대기업 다니면서 돈도 잘 버는데 왜 여자가 없냐고 매일 갈구세요. 그런데 연애는 또 다른 영역이잖아요. 저도 잘하고 싶었어요. 놀이공원 같은데도 같이 가고 싶었고 영화표도 예매하고 싶었어요. 좋은 레스토랑도 예약하구요.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알아봤는데 잘 안 됐어요. 미안해요."

그는 어느새 무릎을 꿇고 더 간곡히 부탁하는 자세로 허리까지 굽혔다. 나는 그를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첨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나요. 저도 뭐 연애 고수도 아니고. 우리 천천히 해봐요. 그럼."

"키스요?"

그걸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의 진지한 표정 때문에 상황이 애매해져 버렸다. 그는 미남도 아니고 조각 미남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신이 만들다가 포기한 조형 조각처럼 생겼다. 그나마 준 능력이 공부 머리 정도? 내가 그를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자 그는 강아지처럼 구석에 가서 벽을 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죄송해요. 초면에 말이 너무 심했죠. 만난 지 하루 만에 키스하는 사람은 엄청 잘생긴 사람일 텐데……."

그는 파양 당한 골든레트리버처럼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뇨, 남희 씨라고 못 할 거 없죠."

그가 침을 꼴깍 삼켰다. 나도 침을 꼴깍 삼켰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서 그의 상체를 잡아당기고 내 쪽으로 끌었다.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천천히 포개기 시작했다. 서로의 코가 닿지 않도록 얼굴을 조금 돌려서 키스했다. 그의 품이 이상하게도 포근했다. 나는 왠지 이 사람이 내 남편이 되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맨홀에 퐁당 빠져버렸다. 그 안이 어떨지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남편이 하필이면 그 넓은 서울 한복판의 맨홀에 빠졌듯이. 나도 퐁당.

우리는 작년 가을에 식을 올렸다. 그가 연애 세포가 없고 로맨스를 모른다는 것만 빼면 집안일 분담을 잘했고 말도 잘 들었다. 속을 썩이지 않아서 좋았다. 아이도 들어섰고 모든 게 순조로울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첫 유산을 맞았고 두 번째 유산까지 덮쳤다. 사랑스러운 우리의 아기를 보내줘야 할 미래가 펼쳐질 거라곤 도무지 상상조차 못 했다. 그 와중에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남편이 사라진 것이다.

차를 타고 달리면서 맨홀을 체크할 순 없었다. 맨홀이 있을 만한 곳에 차를 세우고 그 근처를 걷고 또 걸었다. 맨홀을 찾는 건 의외로 쉽지 않았지만, 각 기점과 합류점이 필요하겠다 싶은 곳에 분명히 있었다. 내가 발견한 맨홀은 뚜껑이 단단히 닫혀 있었다. 뉴스에 보도된 이후로는 누군가가 훔쳐 갈 수 없도록 확실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맨홀을 세 개 체크하고 나머지 네 개째에는 '공사 중' 푯말도 없이 맨홀이 열려 있었다. 나는 차를 갓길에 세워두고 맨홀 안을 들여다봤다.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었다. 나는 양손을 입 앞에 모았다. "여보, 거기에 있어?"하고 내가 물었다. "아니, 나 여기 없어,"하고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손전등을 가져올 걸 그랬다. 나는 다시 외쳤다.

"당신, 어디 있어? 당신까지 잃으면 나 어떻게 살라구!"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한 시간이 넘게 밖을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서 찬찬히 생각해보았다. 남편은 심부름이 아니면 어디 멀리 나가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꼭 집 근처에서 멀리 나가질 않았다. 걸음이 느렸고 먼 곳에 가는 것을 꺼렸다. 집에 없어서 밖에 나가보니 집에서 삼백 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주인을 잃어버린 강아지를 발견해서 같이 놀고 있다거나 동네 DVD방이 망해서 떨이 중인 DVD를 구경했다. 중고나라 거래 아니면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러 갔을 것이다. 그 의외의 동선은 추측하기 어려웠다. 그 둘 중 하나라면 이쯤에서는 집으로 돌아와야 정상이었다. 머리를 쥐어짰다. 집 근처에 갈만한 곳이 없다. 내가 처음 임신한 시점부터 남편은 차를 끌고 나가지도 않았다. 출퇴근 외에는 대중교통을 잘 이용하지도 않는다. 슈퍼마리오처럼 어딘가에 빠져서 다른 곳으로 나와버린 걸까. 남편이 멀리 갔던 적은 딱 한 번뿐이었다. 언젠가 청과물 코너에서 도매가로 할인 중인 과일을 사오라고 했더니 차를 타고 농산물도매시장까지 갔던 적이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어떤 명령어를 입력해두었는지 생각해봤다. 혹시나 오해의 소지가 있을 법한 명령어를 입력했는지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 봤다. 마트

장은 어제 보고 왔다. 보컬 학원도 그만둔 거로 알고 있다. 소파에서 일어나서 천천히 화이트보드 쪽으로 걸어갔다.

남편은 결혼 후에 집안일을 배치해달라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것과 매일 해야 할 것을 분류해서 화이트보드에 적어 두면 그대로 실행할 거라고 했다. 해야 할 일들을 적어두기만 하면 남편의 말대로 하루도 빠짐없이 행동에 옮겼다.

"일요일, 아침에 베란다 화분에 물 주기."

"노노, 그렇게 하지 말고 시간까지 적어줘."

"일요일 AM 9시, 베란다 화분에 물 주기. AM 11시, 진공청소기로 청소하기."

"그다음에 해야 할 것들도 다 적어줘."

우리는 요일을 나누어서 설거지와 빨래를 했다. 월, 화, 수는 내가 했고 수, 목, 금은 남편이 했다. 일요일은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이 했다. 남편은 내가 화이트보드에 적어둔 건 무조건 실행에 옮겼다. 문자 메시지나 전화로 이야기하지 않았거나 갑자기 시켜야 할 것이 생각나면 화이트보드에 적어두라고 했다. 대신 정확히 적어둬야 제대로 실행되고 명령어가 이상하면 오류가 날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화이트보드에 내가 무엇을 적어뒀는지를 살펴봤다. 철학관에서 지어온 아기의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글씨를 지우고 남은 얼룩까지 지우려고 남편이 행주로 거세게 문지른 자국도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 작은 글씨로 메모를 해둔 게 보였다.

'9월 27일. 우리 결혼기념일.'

남편에게 보라고 적어둔 게 아니라 내가 기억하려고 적어 둔 거였다. 크게 호들갑 떨 필요 없이 저녁에 간단하게 외식만 하자고 했다. 결혼 후에 서로의 살림을 합쳤다. 대출로 컨디션 좋은 신축 빌라에 들어왔다. 아낄 필요성이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작은 케이크 하나에다가 촛불을 붙이면 될 거 같다고 말했다.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명령어가 남편의 머릿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남편이 9월 26일 어제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은 9월 27일이다. 그렇다면 남편은 혹시 나와 식사를 하기 위한 레스토랑을 알아보러 다니는 걸까. 아니면 케이크를 사러 간 것일까. 케이크를 사두라고 말해두긴 했었다. 별 대수롭지 않게 흘러가는 말로. 집 근처에 유명 파티쉐가 운영하는 잘 나가는 제과점이 있었다. 거기 케이크는 가격도 저렴하고 너무 맛있어서 순식간에 동이 나곤 했다.

"일단 거기 제과점 가봐. 케이크 없으면 백화점 가봥."

처음으로 말투에 애교를 섞어봤다. 임신 후, 월, 화, 수요일 내가 하던 설거지와 빨래도 남편이 다했다. 두 번째 임신 중에 의자에 올라가서 장롱 위에 올려준 전기장판을 꺼내려다가 바닥에 넘어진 적이 있었다. 몸무게가 늘어나고 배가 나와서 무게중심이 달라진 걸 망각했다. 자칫 잘못하면 배가 바닥에 부딪혀서 유산될 수도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남편이 내게 편히 쉬라고 했다. 첫 유산 이후에 더는 유산 될 순 없었다. 남편이 원한 거였다. 그런데 결국 또다시 유산했다. 남편은 내게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여전히 가사 일을 내주지 않았다. 말이라도 예쁘게 해야겠다 싶어서 뒤늦게나마 말투에 애교를 조금 덧붙여본 거였다.

나는 뭔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제과점으로 갔다. 남편은 분명히 케이크와 연관이 있다. 나는 케이크를 사두라고 했었다. 해외 유학파 출신이 운영한다는 제과점은 벌써 문을 닫았다. 진열장에 놓였어야 할 알록달록한 케이크들이 다 떨어졌다. 마진 따위는 생각도 안 하고 과일을 잔뜩 올리더니 과일 케이크는 주문해야 사갈 수 있었다. 아마도 남편은 케이크를 사러 좀 더 먼 곳으로 갔을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에 놓인 리모컨을 들고 손바닥에 툭툭 치며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남편은 왜 나가면 나간다고 말을 하지 않는 걸까. 노래를 배우면 배운다고 말을 하고 케이크를 사러 나갔으면 케이크를 사 오겠다고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남편이 노래는 몰래 연습해서 불러줘야 효과가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남편은 내게 말하지 않고 다녀와야 효과적인 무언가를 하러 갔을 것이다. 조금 특별한 케이크를 산다거나 작은 선물 하나를 들고 올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남편이 맨홀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머리를 식힐 겸 진공청소기를 꺼냈다. 거실을 청소하면서 생각을 비우기로 했다. 남편은 꼭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바닥을 보니 이미 깨끗했다. 남편이 청소에 대한 명령어까지 실행하고 나간 것이다. 집에서 내가 할 일이 없었다. 난 이제 임신도 아닌데. 남편이 없으니 뭔가 딱히 신나는 일도 없고 적적했다. 할 일이 없어서 TV를 틀었다. 드라마, 영화, 다 무료했다. 남편이 옆에서 국가대표팀 축구를 훈수 두고 국회의원들의 정치에 대해서 구시렁거리지 않으면 사는 느낌이 나지 않는 것이다. 러닝 차림의 남편이 소파에 삐딱하게 누워있고 그것을 구박해야 작은 즐거움이 밀려오는 것이다. 남편과 리모컨 쟁탈전을 벌이는 게 그 어떤 예능프로그램보다 재미있었다. 채널을 돌리고 또 돌렸다. 볼 게 없어서 뉴스에서 멈췄다. 기자가 백화점에서 시민과 인터뷰 중이었다.

"샤넬 백 시세가 오른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새벽에 넘어왔다는 시민이 말했다. 카메라가 백화점의 명품관 입구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비췄다. 아나운서는 경기불황에 따른 보복 소비심리를 소개했고 심리학 박사는 리셀러들의 사회적 현상에 관해서 설명했다. 미취업 청년들의 경우엔 샤넬 백을 되팔면 100만 원 정도의 차익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텐트를 치고 밤새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남편이었다. 남편은 오픈 직전의 샤넬 매장 입구 바로 앞에 줄을 서 있었다. 남편이 뉴스에 나왔다. 왜? 도대체 왜? 집 근처 맨홀에 빠진 달팽이가 물길에 쓸려 저 멀리 다른 맨홀에서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굼벵이가 엉금엉금 기어가듯이 조금 더 앞쪽으로 이동하려 펜스 안에서 서로를 밀치고 있었다. 백화점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기자가 남편에게 마이크를 갖다 댔다.

"여성용 샤넬 백을 왜 사려 하시죠? 혹시 되팔기, 리셀러 그런 겁니까?"

"아뇨, 아내가 갖고 싶다고 해서 왔습니다. 저는 샤넬 백이 필요해요."

남편은 달팽이처럼 등에 침낭을 돌돌 말아서 배낭에 끼워서 메고 있었다. 배낭 안에 침낭과 담요가 공간이 부족해서 삐져나와 있었고 배낭의 주머니에는 물통이 달려 있었다. 남편은 밤늦게 백화점으로 넘어가서 대기를 타고 있었던 모양이다.

남편은 굼뜨고 느렸지만 꼼꼼하고 자세히 설명해주면 무조건 해냈다. 아내가 부탁한 건 무조건 해야 하는 단순한 사람. 서툴고 때론 실수도 했지만, 설명만 상세히 해주면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주어진 임무를 완료해야만 다음 행동을 했다. 레스토랑과 호텔을 예약하는 법, 혼자가 아닌 두 명의 식사를 준비하는 법, 임신에 따른 산부인과 일정에 맞춰서 연차나 반차를 내는 것. 내가 산부인과 병실 침대에 누워 있으면 내 손을 꼭 잡아주는 것. 내 뱃속에 탄생할 아기의 이름을 같이 머리 맞대고 고민하는 것. 생명이 끝나버린 아기를 마음속에서 비워내는 것. 망연자실한 표정의 나를 꼬옥 안아주는 것. 남편은 그렇게 결혼생활을 느릿느릿 하나씩, 헤쳐나갔다. 이제 드라이브를 하면 분위기 좋게 비트가 빠른 팝송이나 최신가요 같은 걸 틀고 신나게 달릴 줄도 알았다. 놀이공원은 할인 혜택을 적용했고 영화표는 공짜로 예매했다. 좋은 레스토랑은 반값 할인으로 갔고 신라호텔 디너도 예약할 줄 알았다. 만약에 내가 실수로 하늘의 별을 따오라고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다면 남편은 우주선을 만들러 NASA에 들어갈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을 것이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다. TV 속 남편이 외쳤다.

"우와아아아! 내가 1등이다! 나는 무조건 산다!"

남편의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남편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진공청소기의 전원 버튼을 다시 눌렀다. 거실에서 진공청소기가 계속 위잉,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5월 27 오후 9시 45분경에 남편이 돌아왔다. 나는 남편의 알고리즘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남편은 결혼기념일 이벤트를 실행했다. 남편은 심부름을 시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놓고 틈틈이 사라졌다. 이벤트에 필요한 무언가를 준비하기 위해서.

남편은 자랑스럽게 샤넬 로고가 크게 박힌 쇼핑백을 내게 들어 보이며 웃었다. 나는 남편에게 달려가서 남편의 어깨를 쳤다.

"당신이 거길 왜 가! 왜 거기서 그러고 있었어! 왜! 왜!"

"당신이 가방 갖고 싶다며."

"내가 언제?"

"당신이 어젯밤에 내게 말했잖아. 케이크가 없으면 백화점 가봥."

내가 남편을 부리기만 해서 난생처음 애교를 조금 섞어서 가보라는 말을 '가봥'이라고 했더니 남편은 '가방'으로 들은 것이다. 맙소사!

"아니! 그건 근처 제과점에 케이크가 다 떨어졌으면 백화점 지하 1층에 있는 베이커리에 가보라는 거였잖아!"

남편은 묵묵히 거실 바닥에 배낭을 내려놓고 앉아서 침낭과 텐트를 풀었다. 물이 다 떨어진 물통을 내려놓고 전자레인지에 데워간 닭가슴살 껍데기도 꺼냈다. 배낭 안쪽에 꽁꽁 싸매서 가져온 작은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꺼냈다. 내 나이의 개수만큼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중고나라에서 산 무드 향초를 가져와서 하트 모양으로 배치하고 불을 붙였다. 숨겨두었던 빔프로젝트도 꺼내와서 가동했다. 방 안의 불을 껐다. 우리가 결혼 했을 때의 사진과 연애 때 서로를 그윽하게 쳐다보고 있는 사진이 하트 모양의 불빛 위로 찬찬히 넘어갔다. 잔잔한 배경음악이 깔리기 시작했다. 남편이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남편은 맨홀이 아니라 내게 빠진 것 같았다. 남편이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몰래 보컬학원에 계속 다니고 있었어. 깜짝 이벤트를 해주려고 시간을 벌었지. 약속했잖아. 아기 없어도 우리끼리라도 행복하게 잘 살자고."

남편이 나를 껴안고 뽀뽀했다. 가을에 발견한 나뭇잎처럼 바삭, 메마른 남편의 입술에 내 입술이 포개졌다. 걸음이 아주 느린 로맨티스트 달팽이 한 마리가 내 심장 위를 엉금엉금, 우아하게 기어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키스를 하고 나서 남편이 나를 떼어냈다. 남편의 방에 틀어놓았던 노래의 긴 반주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남편이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남편이 보컬학원에 등록한 지 5개월 만에 이적의 '다행이다'를 부르기 시작했다.

(끝)




  <당선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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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소설가들의 당선 소감을 살펴봤다. 그들은 무조건 '쓰고 있다.'였다. 나도 쓰고 있었다. 신춘 시즌에 치열하게 썼지만, 깨졌다면 다음에 꺼내는 소설은 무조건 더 진화된 형태여야 한다. 다음 행선지는 문예지기 때문에 가독성이 좋고 가벼워 보이면서도 강렬한 주제 의식을 내포한 '당선 킬러'를 준비 중이었다. 누구와 맞장 떠도 지지 않을 자신으로 만들고 전장으로 보내야 한다. 그렇게 내보내도 은둔 고수가 말도 안 되는 솜씨를 뽐내며 내 소설을 단박에 제압해버릴 것이다. 소설 바닥은 아주 무서운 동네다.

소설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해서, 밀도 낮게 지난날을 보내서 가슴이 아프다. 문예창작학과 관련해서는 한 학기만 수업을 들었다. 그럼 나는 학교에서 무얼 배웠나. 실력파 교수들의 비밀 노하우는 문우를 찾으라는 거였다.

서른다섯 살에 문우가 처음으로 생겼다. 서로 글을 봐주는 일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은 이 짧은 지면에 다 나열할 수가 없다. 투고하기 전에 내 글을 읽어준 모두에게 고맙다. 신춘문예를 오래 붙들고 있으니 당선 이후에는 옷깃을 스쳤던 모든 사람까지 다 고맙게 느껴진다.

뜨내기 때나 조마조마했지, 이 바닥에 발을 디디고 쓴지 10년 차를 넘기니 별생각이 없다. 덜컥 된 게 아니고 여러 편의 소설을 보유 중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심사위원들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 미래는 심사위원들이 간혹 밥을 먹다가 '아, 맞아. 그때 그 친구 뽑길 잘했어. 계속 글 쓰고 발표하잖아.'가 되어야 한다. 나는 나를 믿어준 심사위원들을 위해서 죽을 때까지 소설을 쓰고 발표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분들의 이름을 내 가슴속에 새긴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그분들에게 맹세한다. 쉬지 않고 쓰겠습니다. 사실, 다음 작품도 미리 다 세팅해놨어요. 감사합니다.


  ● 1986년 경남 진주 출생
  ●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


 

  <심사평>


  힘든 시절이라 가볍고 따스한 작품 눈길


예심을 통과한 11편(퍼피밀, 내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의 이야기, 비타민, 닻을 주다, 달팽이를 옮기는 방법, 빵 트럭 습격, 솜 트는 사람들, 보통의 꿈, 짬뽕 아니 자장면, 블랙 라이트) 중에서 본심에서 비중 있게 논의된 작품은 5편(비타민, 블랙 라이트, 닻을 주다, 퍼피밀, 달팽이를 옮기는 방법)이다. '비타민'은 우리 시대 가난한 노년여성의 이중생활과 그 파국의 정경을 꽤나 치밀하게 직조해냈으나 그 치밀함의 작위성이 도드라졌다. '블랙 라이트'는 소극장과 병원이 있는 대학로의 풍경 묘사가 매우 인상적이지만, 정작 중요한 주인공의 고뇌와 방황은 상투적 서사에 머물렀다. '닻을 주다'는 바다와 잠수부라는 소재를 장악하고 밀어붙이는 작가의 내공이 남다른 작품이다. 다만 문장 수련이 조금 덜 되어 있고 주제의식이 희미하다는 단점을 넘어서는 장점을 보여주진 못했다.

'퍼피밀'은 반려견 문화가 얼추 정착되어가는 듯 보이는 우리 사회의 저변에 어떤 불편한 진실이 도사리고 있는지 파헤치는데, 그 폭로의 수준이 지독할 정도다. 생명체를 잔인하게 학대하면서도 끊임없이 거짓 구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모습 또한 리얼하게 포착했다. 그런데 생명 학대의 현장 묘사가 지나치게 날것이어서 오히려 선정적이다. 문학적 형상화 작업이 부족하다는 느낌도 준다.

'달팽이를 옮기는 방법'은 가볍게 읽히는 작품이다. 순문학과 웹소설의 경계에 있다고나 할까. 관점에 따라 치명적인 단점으로 꼽힐 수 있는 대목이다. 좋게 보면, 언어유희를 중심 서사와 공교롭게 결합하였고 영상물 쪽에서는 진작부터 인기 있던 너드(nerd) 캐릭터를 소설적으로 실감나게 구축해냈다. 상식과 사회성이 부족하지만 아이를 유산한 아내를 위하여 비상식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너드 남편, 그의 비상식이라는 껍데기보다는 그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는 아내가 따사롭고 달달한 메시지를 빚어낸다.

너무 길고 어두운 터널 속을 통과하는 듯 내남없이 힘든 시절이라 그런지 무겁고 끔찍한 현실 고발보다는 가볍고 따스한 소품 쪽으로 심사위원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당선자에게 진심 어린 축하 인사를 보낸다.

심사위원 : 김화영, 박정애, 오철환, 이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