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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섬 - 어느 독거노인의 죽음

유헌

 

엎어진 숟가락처럼 섬 하나 놓여 있다

막걸리 쉰내 나는 툇마루만 남아서

밤마다 갯바람소리 환청에 떨고 있다

 

느릿느릿 애 터지게 바람이 불어온다

둘이 같이 살아보자 옆구리 토닥이던

파도가 밀려왔던 자리, 절벽이 생겨났다

 

무연히 쓸어보는 방바닥엔 흰머리뿐

파도에 멍든 자리 동백꽃이 새살 돋고

창문을 더듬는 햇살, 하얗게 질려간다

 

칠 벗겨진 양철대문에 파도소리 출렁인다

그물코에 빠져나간 한숨들을 깁는가

오늘도 뱃고동소리 속절없이 지나간다

 

<당선소감>


마음 깊은 곳에 긴 두레박을 내려

 

어제는 참 포근했습니다. 당선통보를 받고 하루가 지났습니다. 창밖에 찬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목포항 앞바다는 출렁대는 물결로 허리가 아픕니다.

차가운 거리로 나섰습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지나 갑니다. 그런데 그 강풍조차도 차갑지 않고, 가슴을 파고들며 흩날리는 눈송이도 시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슴은 벅찬 설렘으로 뜨겁습니다.

신춘문예 마감일까지 고치고 또 고친 원고뭉치를 보내고 우체국을 나서던 순간도 그랬습니다. 상기된 얼굴을 스쳐가는 겨울바람은 산마루를 돌아나오는 건들마처럼 서늘했습니다. 먹물처럼 어두워진 깊은 하늘에서 빛나던 차가운 달빛은 차라리 시원한 한줄기 바람이었습니다.

그간 심하게 앓았던 시조를 향한 열병 때문이었을까요? 지난 며칠 동안은 추워도 춥지 않았습니다. 그 열정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습니다. 뜨거운 가슴을 타고 내리는 가락들을 4음보로 길어 올리는데 결코 소홀하지 않겠습니다. 신춘이라는 분에 넘친 텃밭을 내어 주신 '국제신문'과 심사위원님들께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긴 두레박을 내려 낮은 자세로 더 비우렵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아내에게는 참 미안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깊은 밤에도 벌떡 벌떡 일어나 생각의 파편들을 글로 옮기곤 했으니까요. 그럴 때마다 아내는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고 하니까, 그간 제가 참 무던히도 요란을 떨었나 봅니다.

늘 치열한 문학정신을 일깨워 주신 한국 문단의 거목 소설가 천승세 선생님, 시조의 깊이를 알게 해준 박성민 시조시인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말을 가장 우리말답게 담아낼 수 있는 정형의 그릇, 시조의 큰 바다에 돛을 올려 작은 배를 띄웁니다. 흔들림 없이 노를 젓겠습니다.

 

약력 1957년 전남 장흥 출생. 광주대 언론홍보대학원 언론학석사. 26회 한국방송대상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 현재 목포MBC 국장.

 

<심사평>


하나의 제재를 집요하게 이미지로 조형

 

우리의 모국어를 풍요롭고 아름답게 가꾸어갈 역량 있는 신인을 뽑는 신춘문예는 선자들의 가슴마저도 기대감으로 부풀게 한다. 금년도 국제신문 신춘문예 응모작들의 수준은 상당히 향상되어 있어서 매우 고무적이었다.

대다수의 작품들이 시조의 정형미학을 잘 체득하고 있어서 안도감을 가지고 심사에 임할 수 있었다. 우리는 보내온 작품들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서 읽어나갔다. 엄격하게 걸러내는 작업 끝에 최종적으로 세 분의 작품 '길 너머' '귀성 길' '떠도는 섬'이 남게 되었다. 이 작품들은 문예지에 그대로 실어놓아도 조금도 손색 없을 만큼 두드러진 작품성을 지니고 있었다.

'길 너머'는 구도자적인 내면 탐색에 천착하고 있는 점이 높게 평가되었으나 '생의 봇짐' '득음'과 같은 관념적인 투어가 아직 가셔지질 못했다. 이렇게 하여 '귀성 길''떠도는 섬'이 남아 마지막으로 경합을 하게 되었다.

이 두 작품은 충분히 당선권에 속하는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 두 심사위원은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 장시간 논의를 했다. '귀성 길'은 언어를 섬세하게 다듬는 기법이 탁월했으나 소재의 영역이 확장됨에 따라 한 작품 속에 담고자하는 주제가 넘쳐 응축성이 미진한 감을 주었다.

'떠도는 섬'은 독거노인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제재를 집요하게 이미지로 조형하여 현실 문제를 부각시킨 점이 우리의 마음을 더 사로잡게 했다. 당선을 축하드리며 언어의 조탁에 더욱 힘쓸 것을 당부한다.

심사위원 : 정해송 전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