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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 / 손연후

 

노란색 상자 안에

털실 뭉치 좋아하는 고양이를 기르는 일

누구나 동그란 노란색으로 웅크려본 날들 있었지
쉼표 모양 씨앗처럼 고요히 꿈꾸는 연습

감자야, 하고 부르면 눈이 동그래져서 딸꾹 하고
딸기향 나는 감기에 걸린 것 같아
당신 넥타이에도 딸꾹거리는 딸기가 묻었어,
우리는 서로의 코를 쿡 찌르며 웃어버렸지

커튼을 열면 우리도 고양이 꼬리처럼 기다랗게 기대어 보고
노란 고양이 무늬 닮은 햇빛이 머리 위로 얼룩덜룩 흘러내렸지
반짝이는 유리잔마다 함께 이름을 붙이던 날
사람은 이름대로 사는 거래, 여기저기 우리 이름을 붙이자
우리는 감자 눈동자 속에 살고 유리잔과 식탁보 넥타이 구두에도 살고
사람들 와르르 모였다 흩어지는 보도블록 횡단보도에도 길쭉하게 누워 있는 거야
수많은 버스 차창 손잡이에도 상냥한 고양이 키스처럼 토닥토닥 흔들리고 있는 거지

하늘이 자몽즙 같은 노을빛으로 젖어들면
기다란 빨대 꺼내 눅눅해진 하루를 보글보글 휘저어볼래
볼을 삐죽 부풀린 거품들 퐁퐁 터지고
푹 익은 노을 냄새 싫어하는 감자는 자꾸만 빨대를 타고 기어오르고
잭의 콩나무처럼, 하늘 위로 쑥쑥 자라나는 노란색 빨대를 올려다봤지
높이 더 높이, 어느새 굵어진 줄기에서는 샛노란 꽃잎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어

날마다 눈부시게 타오르는 구름 위로 훨훨 날아가는 꿈을 꿨어
감자는 점프를 잘했고 우리는 고양이 무늬로 웃으며 서로에게 손을 뻗었지
하늘에서 빨간색 노란색으로 뒤섞여 열리던 우리의 기다랗고 사랑하는 미래들

감자에 대해 말하자면 먼저 사랑에 대해 말해야 해
우리는 노란색이었고, 커튼을 열면 유리잔마다 함께 반짝이며 살아있었지
우리는 씨앗처럼 가벼워 이 계절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늘씬한 고양이처럼 숨차게 달려보지 않겠니

매일 밤 노란색 상자 안에서
우리는 털실 뭉치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었고

통통 고양이 발소리 다가오자
우리는 눈 맞추며 함께 큰소리로 웃어버렸어 


 

 

  <당선소감>

 

   "슬픔 가득한 계절 속 상냥한 등불같은 시 쓰고파"


  크리스마스 사흘 전, 학과 졸업시험을 마치고 하교하던 길에 당선 소식을 듣게 되었다. 대학로 구석진 담벼락 아래에 서서 전화를 받으며 오랫동안 조용히 울먹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항상 혼자서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뭘 적고 싶은 건지도 잘 모르는 채로, 나는 노트를 펼쳐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곤 했다. 나는 멋대로 그것들을 시라고 불렀다.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건 어쩌면 철없는 바보의 짝사랑 같은 거였을까.

  그동안 길을 잘못 들기도 하고, 혼자 컴컴한 시간 속에서 한없이 헤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사실 나도 좀 더 멋진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시간의 빚만 뿌옇게 쌓여갔다. 힘든 시간 속에서 문득 내게 위안을 안겨준 것은, 대학 교양 수업에서 접하게 된 프랑스 시인들의 시편들이었다. 시를 읽으면 칙칙하게 말라가던 내 영혼의 색이 밝은 빛으로 환하게 칠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란 참 따뜻한 거였구나.

  용기를 내어 다시 펜을 들고 내 멋대로 감히 시라는 걸 써봤는데, 우연히 교내 문학상에서 상을 받게 되었다. 시를 좀 더 알고 싶어서 여기저기 동아리도 전전해보고, 학과에서 열리는 시 수업도 들어보았다. 그리고, 계속 썼다.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멈추지 않고 계속.

  시를 쓰는 법에 대해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아직 많이 부족한데도 운 좋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겸손한 자세로, 계속해서 열심히 써나가고 싶다. 모두가 많이 아프고 힘든 계절이다. 잔혹한 슬픔으로 가득한 이 추운 계절 속에서, 누군가에게 작고 따스한 위로를 전해줄 수 있는 상냥한 등불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들, 항상 곁에서 함께해준 고마운 친구들, 하연·진희·성은, 한 해 동안 함께 열심히 임용시험을 준비했던 우리 스터디원들, 하림· 주민·지성 그리고 경호, 한번 시를 써보라고, 그래도 된다고 제게 용기를 주셨던 이순욱 교수님과 국어교육과 시 동아리 '모임'의 학우분들에게도 모두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아름답고 광활한 세계에 저를 초대해주신 영남일보사와 관계자분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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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경쾌·발랄한 시어 구사…당찬 신인의 미래 기대"

 

  본심에 올라온 스무 분의 시 가운데 장현숙씨의 '뭉친 나이' 외 2편과 김지영씨의 '뜨겁고 흰 유언' 외 16편, 홍담휘씨의 '카라멜마끼야또가 꽃피는 동안' 외 3편, 손연후씨의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 외 2편이 선자의 눈길을 끌었다. 장현숙씨의 작품은 시를 차분하게 끌고 가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만지는 솜씨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글에 생기가 부족하다는 점이 흠이었다. 김지영씨의 시에서 두드러진 것은 현실 묘사 능력이었다. 다만 완성도에서 "이거다!"하고 내세울 수 있는 한 편이 보이지 않았다.

  홍담휘씨와 손연후씨의 작품들을 놓고 장시간 논의가 있었다.

  홍담휘씨의 '젠가'는 젠가 게임을 통해 일상과 가족, 현대성의 문제, 지구온난화까지를 유머러스하고도 시니컬하게 담아내는 능력이 돋보였다. "마스크 쓴 계절도 빙하가 녹는 북극까지도 쌓아야 하는데/ 밤하늘이 하나둘 별빛을 빼내고 있었죠"를 비롯한 빼어난 표현이 촘촘히 박혀 있다. 이 작품만으로 본다면 당선작으로 뽑아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투고한 다른 시편들의 질적 균질감이 편차가 있었다.

  손연후씨의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를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이 시에서 유독 강조되는 '노랑'은 삶의 어둠과 우울을 들어 올리는 힘이다. 우리는 "노란색 상자 안에 털실 뭉치 좋아하는" 감자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기른다. 놀라운 건 감자와 교감을 하면서 마침내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노란색 상자 안에서/ 우리(도) 털실 뭉치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게 된다"는 것이다. 서두와 종결부의 아름다운 대응을 보라.

  그건 '감자'의 무늬에서 번지고 성장하는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유리잔과 식탁보 넥타이 구두에도" 산다. 그 사랑의 힘이 "눅눅해진 하루를 보글보글 휘저으며" 그때마다 "볼을 삐죽 부풀린 거품들이 퐁퐁 터진다." 이 당찬 신인은 자기만의 스타일로 경쾌한 시어와 발랄한 상상력을 구사한다. 이 싱싱한 능력은 이 신인의 미래의 가능성을 예고한다. 동봉한 '여름의 아이들을 아세요'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아깝게 당선에서 밀려난 홍담휘씨에게도 힘찬 응원을 보낸다.

심사위원 : 손진은, 안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