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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오월의 박제관 / 배은정

  박제관은 폐쇄되었지만 밖에서도 유리부스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해화는 철제 난간에 허리를 걸치고 얼굴을 통유리에 바싹 들이댔다. 

  줄무늬가 선명한 호랑이가 앞다리를 쳐들며 포효했고 그걸 청설모가 바라보았다. 사나운 맹수의 기백을 마주한 자그마한 설치류의 태도치고는 다소 능청스러워 관람하는 입장에서는 맥이 빠졌다. 족제비는 지루한 듯 시선을 창 너머로 멀찍이 드리웠다. 사슴은 다소곳하게 다문 입 밖으로 송곳니가 튀어나와 기괴했다. 해화가 잇몸을 드러내며 따라 했다. 인조 나무에 앉은 백문조는 빛바랜 종족들과 달리 도기로 만든 변기처럼 윤기가 흘렀다. 황관 앵무가 눈알을 치켜 올려 해화를 쳐다봤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사자관과 철새관이 있었지만 중첩된 유리에 잔상이 겹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들어가서 보면 좋을 텐데…….” 
 
  정우가 난간에 매달린 해화를 쳐다보며 말했다. 

“박제라면 살아있었다는 거지?” 

  해화는 난간을 아예 타고 넘어버렸다. 난간에서 녹슨 철문 소리가 났다. 

  정우는 살아있었다의 ‘었’자를 강조하며 지금은 죽었다고 말했다. 해화는 같은 의미라도  말의 생기가 다르다며, 난간의 양 끝을 B와 D로 지칭하고 한쪽 발끝으로 반원 모양을 그리며 움직였다.  

“박제는 여기쯤 아닐까? Birth와 Death 사이의 여기.” 

  D 바깥에 선 해화의 어깨를 정우가 슬며시 B 쪽으로 당겼다. 정우는 난간을 넘지 않았기에 난간 너머는 해화와 박제품이 있었다. 박제품은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나온 공산품과 달랐다. 생명과 결부되어본 것들만의 특징이 있었다. 인위적으로는 절대로 만들 수 없는 진득한 세월의 더께 말이다. 정우가 적당한 표현을 떠올리며 침묵하는 사이 해화가 끼어들었다. 

“구차하달까…….” 

  해화는 다음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더니 곧 이어서 말했다. 

“너와 내가 나눠야하는 대화처럼 말이야.” 

  정우는 퇴단서를 꺼내려고 내려놓던 배낭을 다시 짊어졌다. 강의 조언대로 전망대가 나을 것 같았다.   

  해화는 손 그늘을 만들고 유리창에 바짝붙었다. 박제된 털은 결이 가지런했지만 인공의 광택은 없었다. 살았다면 부단하게 물고 빨고 핥았겠지만 손질 안된 티가 확연했다. 엉키고 뭉친 갈기를 철석거리며 달리는 박제 사자를 상상했다. 정우는 스틸은 괜찮지만 동영상은 부자연스런 것들을 열거했고 가슴확대수술을 한 여배우에 이르렀다.    

“오늘 우리 대화의 수위가 상당히 높은가 보구나?” 

  정우는 예술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을 뿐이라고, 불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변명을 길게 했다. 해화는 귀담아듣지 않고 줄곧 개미핥기의 발가락에 시선을 두었다.  

“박제될 걸 예상했나 봐요. 저토록 드라마틱한 자세로 죽은 걸 보면요.” 

  화제를 돌리려는 정우의 말에 해화는 대구도 없이 유리에 입김을 불고 개미핥기의 발가락 사이에 점을 찍었다. 이럴 때보면 반세기 넘는 해화의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이런 걸 발샅에 낀 때라고 하지.” 

  정우는 발샅의 의미를 몰랐지만 어쩐지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박제관은 단층의 두 개 동이 전부였고 면적에 비해 전시품이 많았다. 안내문에 따르면 H 리조트가 건설해 R 시에 기부했다. 리조트 뒤편의 숲 탐방로도 마찬가지다. 탐방로까지 도로가 닦여 있어 성수기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외발 수레를 밀고 가는 관리인이 두 사람을 흘깃거렸다. 수레에 담은 잔목은 관리인의 정돈 안 된 머리카락처럼 삐주룩했다. 관리인은 금방이라도 둘을 쫓아낼 기색이었기에 해화가 정우의 팔을 끌어당겼다. 오월 하순인데도 백합이 피어있었다. 한 그루 안에도 막 피어나는 봉오리와 쪼그라들고 말라비틀어진 꽃이 공생했다. 앞서가던 해화가 박제관 쪽으로 휙 돌아섰다. 뒤따르던 정우가 흠칫 놀라서 멈췄다.

“깃털이 흔들렸어.” 

  해화가 말했다. 날갯죽지를 한껏 펼친 백문조가 날개를 슬며시 접더라는 것이다. 해화는 돌아오는 길에 확인하겠다며 사진을 찍고 호랑이 옆의 청솔모, 족제비 뒤의 사슴을 되뇌었다.    

  리조트에는 손님이 없었다. 인부들 서넛이 끙끙대며 파라솔을 옮겼다가 원위치에 갖다놓았다. 가로등에 다가서니 음악이 켜졌다. 나무에 붙은 매미 스피커였다. 처음이라기에는 이미 아는 듯하고 우연이라기에는 정해진 듯하다는 가사였다. 

“우리가 여길 통째로 빌린 것 같네.”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던 해화가 말했다. 등산로 입구는 덩굴장미로 꾸며졌다. 바닥은 두툼한 야자 매트가 깔려 푹신했다.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통로 같은데요.”

  정우가 말했다. 얼마 안 가서 해화는 무릎에 손을 얹고 정우에게 눈을 찡긋했다. 극단에는 비밀로 해달라는 의미였다. 스스러울 것 없는 노화과정이 극단에서는 약점이 됐다. 정우가 아는 단원들 몇몇이 비슷한 속내를 드러냈기에 안쓰럽기까지 했다.   

  둘은 보조를 맞추며 걷다가 쉬었다. 성당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고즈넉한 성당 정원에는 조경수가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나지막한 회양목을 울타리 삼아 성모상이 마을을 보고 서있었다. 옴폭한 분지에 올망졸망 모인 건물 대부분은 숙박시설이었다. 왕년에 빛나던 관광지구는 박제품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인적은 드물었고 된볕만 넘쳤다. 쇠락했다기보다 시간에 멈춰버린 모양새였다. 정우는 극단이 떠오른다고 했고 해화는 무슨 말이 하고 싶으냐고 쏘아붙였다.   

“선배가 제출한 제안서 봤습니다.” 

  정우는 굳이 선배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해화와의 첫 회식에서 합의한 호칭이었다. 해화는 단무장이라는 호칭이 별로라고 했다. 너도나도 부르는 선생님은 질색했다. 해화는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선배의 선에서 타협을 봤다. 실제로 대학 선후배기도 했다. 정우의 직속상관인 강은 예술단 행정담당자가 연극단원과 어떻게 선후배가 되느냐고 했지만 해화는 운영의 묘를 살리려면 허울이 없어야 한다며 정우를 두둔했다. 해화는 제안서가 어떻더냐고 묻지 않았다. 정우로서도 급할 건 없었다. 탐방로는 길고 등반이 끝날 즈음 이야기는 마무리될 것이다. 걷기나 즐겨야지 생각하는데 해화가 서두는 치우고 결론만 요약해달라고 했다.  

“특별하지 않았어요.”

  정우는 구태의연하다는 말까지 하지 않았다. 특별함은 예술의 숙명이고 예술가에게 특별하지 않음은 치명적이라고 해화가 읊조렸다. 

  성당에서 삼종소리가 들려와 대화가 끊어졌다. 성모상 앞에서 누가 성호를 그었다. 정우가 보기에는 목발을 짚은 여자였는데 해화는 남자라고 했다. 아무튼 정우에게는 여자로 해화에게는 남자로 보이는 목발 짚은 이가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목발에 겨드랑이를 낀 쪽으로 상체가 비뚜름하게 기울었다. 성모상은 아기 예수의 머리에 고개를 파묻고 묵상했다. 

  볼수록 남자가 분명한 목발이 성모상에서 서너 걸음 떨어진 벤치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삭처럼 고개를 숙이더니 어깨를 들썩였다. 해화와 정우는 당혹스런 눈빛을 나눴다.

  들썩임은 잦아들자 문제의 순간이 이어졌다. 목발을 짚지 않고 일어서다 쓰러진 것이다. 벤치의 모서리를 부여잡고 안간힘을 썼지만 일어서지 못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주저않길 반복하다 제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저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해화가 말했다. 

“가시려고요?” 

“이런 대사가 있어. 예전의 당신과 완전히 이별하지 못했군요. 목발의 저이도 그럴거야.” 

  목발이 바닥을 치고 소리를 질렀다. 해화와 정우는 오던 길을 내려갔다. 갈림길이 나타났고 두 사람은 오지 않은 길을 택했다. 성당은 갈림길에서 멀지않았다. 방금까지 내려다보이던 성모상은 그대로였지만 목발은 없었다. 해화와 정우는 목발이 쓰러졌던 벤치에 앉았다. 정우는 해화에게 생수를 건넸고 해화는 벌컥 소리를 내며 들이켰다.  

“목발을 쓴 지 얼마 안 됐을 거야.”

  해화의 말에 정우가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목발은 건강한 다리에 짚어야 하거든.”

  정우는 이해되지 않았다. 아픈 다리를 보조하는 장치가 목발 아니냐고 되물었다.   

“성한 쪽에 목발을 짚고, 목발과 아픈 다리를 동시에 내밀며 걷는 거야.” 

  해화는 몸소 시범을 보였다. 목발에 엉켜 뒤뚱거리다 넘어져 가며 배운 지혜라고 했다. 

“목발의 그이는 잘 갔겠지?” 

  해화의 눈가에 주름이 깊어졌다. 가까이서 본 성모상은 표정이 모호했다. 마을을 굽어보는 시선이 자애로우면서도 근심스러웠다. 수몰하는 세상을 보는 모습이랄까. 정우의 말에 해화는 문학을 전공했다더니 소설을 썼냐며 피식 웃었다. 정우는 아무 말없이 배낭을 뒤적여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먼 길을 오느라 시장했던 터다. 출근하자마자 두 시간을 운전해왔다. 주소를 알려준 이는 강이었다. 강은 퇴단서를 쥐어주며 서명을 못 받으면 돌아올 생각을 말라고 했다. 

  해화는 포장지의 재료명을 읽었다. 성분 하나라도 내키지 않으면 먹지 않을 심사로 보였다. 밀은 캐나다산이고 멀티몰트믹스는 독일산이고 마가린은. 재료를 차례차례 읽던 해화가 처음 맡은 배역이 가린,이라고 했다. 마가린을 읊자마자 가린이라고 했기에 정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해화는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라며 정색했다. 가녀린 소녀 역할이었지만 어린 해화는 통통한 편이어서 지도교사가 대본에 없는 대사를 만들어주었다고 했다. 

“나는 가녀린 가린이라고, 모든 대사를 그렇게 시작해야 했어.”

  배우와 캐릭터의 부조화를 대사로 보완했던 셈이다. 해화가 대사를 읊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보이는 것과 달리 가녀리게 봐달라고, 가린이 대사를 할 때마다 관객석에서 폭소가 터졌다고. 벌써 사십 년이 넘은 일이라면서 샌드위치는 나중에 먹겠다고 했다. 

  평평하던 탐방로는 가파른 흙길로 접어들었다.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 사이로 바람 한 점도 불지 않았다. 쉴 곳을 찾던 두 사람 앞에 볕살 너른 곳이 펼쳐졌다. 도톰한 둔덕에는 나지막한 팻말이 꽂혀있었다. 분묘 번호 15번. 팻말에는 분묘 연고자의 연락을 기다린다는 이장 안내문이 적혀있었다. 해화는 분묘 앞에 주저앉았다. 정우는 무덤이라 신경 쓰인다며 어정쩡하게 쪼그려 앉았다. 해화가 여지껏 내려놓지 않던 배낭을 열었다. 배낭에 든 것은 와인 한 병과 오프너가 다였다. 

“웬 와인이에요?”

  정우가 기가 찬 듯 물었다. 

“극단엔 비밀이야.”  

  해화는 검지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분묘에 와인을 뿌리고는 병째로 들이켰다. 정우에게도 권했지만 운전을 이유로 거절했다. 해화는 자기 몫의 샌드위치를 정우에게 건내고 와인을 마시며 샌드위치 포장지를 다시 읽었다. 출석부를 든 담임처럼 성분을 하나씩 호명했고 정우는 맛을 음미하며 들었다. 이름에서 각각의 맛이 났다. 샌드위치 하나에 들어간 재료가 스물여섯 가지였다. 정우가 극단의 단원 수와 똑같다며 신기해했다. 해화는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되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완제품은 구성성분을 닮는다고 정우가 말했고 작품은 배우를 닮는다고 해화가 말했다. 해화는 대본을 읽듯 물티슈의 성분을 읊기 시작했다.  

  헥실렌글라이콜, 라우릴피리디늄클로라이드, 디소듐이디티에이……. 

  해화의 입술을 거쳐 나온 화학성분들은 마법을 부르는 주문 같았다. 하나같이 무게감이 꽉 찬 이름이었다. 

“복잡한 재료에 비해 결과물이 깔끔해서 좋네요.”

  정우는 거추장스러운 성분을 한 장의 펄프에 녹여낸 성공작이라고 말했다. 해화가 이해가 안 된다며 물었다.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것들로 만들어졌는데도?”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결과물이 중요하죠. 안 그래요?”

  와인병은 불투명했지만 해화가 고개를 꺾어 마시는 걸로 봐선 바닥에 가까웠다. 별말 없이 와인을 들이키는 해화에게 정우가 결정을 내려달라고 했다. 해화는 골치아픈 선택에서 벗어나려는 듯 태엽을 과거로 감았다. 

  해화는 돈사 근처에 살았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비가 오면 악취가 심해졌어.” 

  해화는 악취가 시간을 거슬러 온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정우도 따라서 인상을 썼는데 대화의 맥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해화는 비가 오면 돈사에서 분뇨가 쏟아져 나왔다고 말했다. 농장주는 빗물에 쓸려가길 바랐지만 말 그대로 바람에 불과했다. 민원이 불거지자 취재기자가 농장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농장주는 선대부터 해왔던 방식이라고 맞섰다. 원래 분뇨에서는 냄새가 난다고.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부터 돼지가 살았고, 젊은 농장주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냄새라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럼 우리 돼지는 어디서 살아야 하나요, 하소연도 했다. 

“아무래도 갠 날이 좋았겠어요?” 

  정우는 대화의 맥을 잊고 해화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해화는 입안에 머금고 있던 와인을 삼키면서 말했다. 

“맑은 날엔 포소리가 났어.” 

  외곽지 아파트는 저렴한 이유가 있었다. 사격훈련장은 거실에서도 보였다. 나무 한 그루도 자라지 않는 가파른 산비탈이었다. 훈련장으로 이어진 도로는 군용차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훈련 날마다 굉음이 요란하게 울려 돼지가 유산을 할 정도였다.   

“악취와 소음, 어느 편이 나을까?” 

  둘 중에 하나를 골라볼래,라는 말투였다.  

“그런 데서 어떻게 살았어요?”  

  정우는 골치 아픈 수학 문제를 집어던지는 아이처럼 심술궂게 말했다.  

“비가 오든 맑든 언제나 나는 말이야…….”

  해화의 눈에서 희미한 미소가 지나갔다. 

“그때가 좋았어. 극단에 막 입단했을 때거든.”  

  모노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순간이었다. 해화는 대화를 나눈다기보다 홀로 과거로 가버린 것 같았다. 핀조명만 비추면 해화는 무대에서 독백하는 배우이고 정우는 제1열에 앉은 관객이었다. 정우는 해화의 모놀로그에 집중했다. 해화는 그때 예명을 해화로 지었다고 했다. 생활비를 아끼려고 에어컨도 못 켰지만 괜찮았다고. 악취가 심하면 돼지들이 크고 있구나, 포탄 소리가 나면 군인들이 저토록 훈련에 열중하니 편히 자도 되겠구나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연습은 고됐지만 무대가 있어 감사했다. 고백컨대 한 번도 나태하지 않았다고. 그녀는 긴 대사를 마친 배우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연극은 대사 없는 구간에도 메시지가 있다. 반면 현실의 침묵은 어색했다. 해화는 대사가 많은 연극일수록 침묵의 묘미를 살려야한다는 말로 침묵을 깼다. 

  정우는 극단을 위해 선배들이 결단해달라고 부탁했다. 선배라면 누구냐고 해화가 물었다. 몇몇을 지목하니 그들이구나,라며 이름을 읊조렸다. 정우는 석이 빠진 이유를 서너 문장으로 준비하고 있었지만 해화는 묻지 않았다. 석이 시장의 라인이라는 소문은 파다했다.   

  해화가 그들과 사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건 정우도 알고 있었다. 무대에 임하는 태도 또한 달랐다. 다만 극단은 변화가 필요하고 해화는 연장자다. 무엇보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재탕한 제안서로는 어림도 없다.  

“극단은 쇄신이 필요해요. 고도만 기다릴 수 없다고요.”

“고도가 어때서?” 

  해화는 고도만큼 인간존재의 부조리성을 담은 작품이 어딨냐고. 부조리를 무대에서 구현하는 예술이 연극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대중은 새로운 걸 원해요.” 

“우리의 역량 안에서 새로운 걸 찾아으면 돼.”

  해화는 시간을 두고 고민하면서 우선 잘 하는 것에 집중하자고 했다.

“뭘 기다려요? 고도를요? 도대체 고도가 뭔데요?”

“그걸 알았다면… 베케트가 썼겠지.”

  다시 또 벽이다. 해화와의 대화는 풀리는가 싶다가도 어느샌가 막혔다. 해화를 거꾸로 읽으면 되는 화해는 멀어만 보였다. 

  극단은 언제부터인가 상임연출을 두지 않았다. 대외적으로는 극단만의 색깔을 찾는 여정이라지만, 속내는 상임을 둘 예산이 배정되지 않았다. 단원들은 연출 개인에 치우치기보다 극단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구축하는 기회로 삼자고 다짐했지만 객원 연출이 위촉될 때마다 객원과 합을 맞추느라 줏대 없이 흔들렸다.

  최근 위촉된 객원은 대학로에서 감각 있는 연출로 지명도가 높았다. 대다수 단원들보다 어렸지만 그의 열정에 배려는 없었다. 객원은 몸짓 언어로 인물을 드러내는 실험적인 작품을 제안했다.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트레이너를 데려와 스트레칭을 시켰다. 경직된 몸이 본인도 모르게 캐릭터 창조를 방해한다는 이유였다. 몸의 움직임이 자유로워야 입체적인 연기가 가능하다는 건 단원들도 동의했다. 다리 찢기나 반복하려고 배우가 된 건 아니지만 동작이 제대로 되지 않아 뭐라 할 말도 없었다. 객원의 말대로 연극은 몸짓과 언어의 시학이다. 대사 위주로 연기했던 배우들의 몸은 굳어있었다. 나이 든 배우들의 무대가 몸짓보다 언어 쪽으로 기울어간 탓이다. 

  서넛의 연장자를 시작으로 지각이 속출했다. 느지막이 나타난 배우의 셔츠 위로 부황 자국이 선명했다. 진단서를 들이미는 단원들을 연출가도 어쩌지 못했다. 물론 해화는 누구보다 성실히 임했고 후배들을 다독여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배역 테스트에서 연장자는 모조리 탈락했다. 최고 배점은 몸의 유연성이었다. 단원들은 관행을 송두리째 무시했다며 반기를 들었다. 의례적으로 주인공은 연장자에게 먼저 제안됐다. 연장자가 거절하는 제스처를 취하면 그제야 차순위를 의논했다. 정해놓은 규정은 없었지만 배역은 적절하게 배당됐다. 극단 나름의 오랜 규칙이 깨진 것이다.   

  강은 다시 정우에게 연락해 퇴단서를 가져오지 못하면 시말서로 대신해야 할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정우는 불쾌한 음성이 새나갈까 해화를 등지고 통화했다. 극단은 해체의 기로에 섰다. 의회는 예산 감액을 통보했고 장기적으로 법인화를 거론했다. 정우는 곧 마무리하겠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너도 고생이 많구나.”

  통화가 끝낸 정우에게 해화가 말했다. 강은 해화에게 말을 조심했다. 말을 해놓고 눈치를 보고 아니다 싶으면 말을 부정했다. 강이 해화에게 자주 한 말은, 그런 말이 아니고요,였다. 해화에게는 사람 좋은 척하다가 골칫거리는 정우에게 떠넘기는 꼴이었다. 바로 이 순간이 그렇다. 강은 사무실에서 전화기나 붙들고 있고, 정우는 무명의 묘지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정우는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퇴단해 주십시오.”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살피는 정우를 보고 해화가 피식거렸다. 도무지 심각해지지 않는 해화에게 정우는 그만 짜증이 났다.    

“극단도 변해야죠.”  

  정우가 극단이 올린 최근작들을 열거했다. 

“씨받이로 들어간 여자 이야기도 있었잖아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씨받이냐고 따지려는 의도였다.  

“만삭이 돼서야 독립운동가 남편이 돌아오지.” 

  금세 작품에 몰입한 듯 해화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죄다 지난 시대잖아요.”

  해화가 그게 뭐 어때서라며 정우를 쳐다봤다.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정우는 고전이나 기웃하는 방식으로 예술기금을 지원받기 어렵다고 했다. 예산 담당인 정우가 문화예술과로 차출된 이유는 재정 감축을 위해서다.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인 재정운영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시장의 공약사업 추진비를 최대한 확보하자는 의도였다. 사업의 중요도에 따라 예산을 배분하는 선택과 집중 전략에서 공공예술은 선택받지도 집중되지도 못했다.   

“젊은 관객 좋아하네.”  

  해화는 지금은 초고령 사회가 아니냐고 비꼬았다. 정우는 고령일수록 극장을 덜 찾는다고 말했다. 해화는 그래서 찾아가는 공연을 하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돌뱅이처럼요?” 

  정우는 단어 선택이 적절치 않다고 깨달았지만 이미 내뱉은 후였다. 정우는 극단만의 시그니처 극을 만들 계획이며 투자자를 찾는 것이 목표라고 마저 말했다. 원대한 계획에서 해화는 제외됐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배제된 이유를 모르겠다고 넋두리하는 단원들도 있기는 했다. 정우는 형의 놀이에 끼워달라고 보채는 어린 동생 같다고 생각했다.  

“목발도 성한 쪽에 쥐어줘야 한다면서요? 우리 처방이 그래요. 건강한 쪽에 목발을 주려는 거라고요.” 

  정우는 창단 20주년 기념식에서 감사의 뜻을 전하겠다고 덧붙였다. 예술회관 로비에 아트 월을 조성해 해화를 기억할 계획이다.   

“나를 박제하겠다는 거야?”

  해화는 얼음처럼 미동이 없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자잘하고 우아한 동작들, 쾌활한 언어와 눈웃음이 사라졌다. 연극 ‘마리오네트’의 주인공처럼 몸짓에 생기를 잃었다. 해화는 마리오네트 역이 마음에 들었지만 주인공을 열망한 다른 배우가 차지했다. 몸의 마디마다 실을 묶는 연기라 체력 조건도 고려됐다. 해화보다 한참 어린 배우는 의욕이 앞섰는지 몸짓이 과하다는 평을 받았다. 해화라면 어땠을지 상상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눈앞에서 현실이 됐다.      

  해화는 줄이 끊긴 마리오네트처럼 어깨가 늘어졌다. 무대에는 승강장 표지판뿐이고 마침 이곳에도 분묘 번호 15번 팻말이 있다. 망연자실하며 팻말 아래 주저앉은 승객은 돌아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를 따라 뛰어가봤지만 얼마 못가 벅찬 숨을 몰아쉬며 쓰러졌다.  배낭에는 백 미터를 18초에 뛰던 탄탄한 다리와, 무대만 보면 방망이질하던 심장과, 남이 뭐라든 상관없던 자존감과, 잃을 것 없으니 두려울 것 없다는 냉소와, 굵고 윤기나는 머리칼까지 들어있다. 배낭 없이는 살아본 적이 없으니 이전처럼 살려면 찾아오는 수밖에. 하지만 가진 거라고는 덜거덕거리는 무릎과 늘어진 어깨, 나약한 정신력뿐이었다. 

“박제가 아니라 기념하겠다는 겁니다.” 

  극단이 지금까지 오는데 해화의 역할이 컸음을 안다. 지렛대라는 말보다 주춧돌에 가까웠다. R 시의 가난한 연극인들은 20년 전 해화를 주축으로 공립극단을 창단했다. 직장에서 퇴근해야 연습을 할 수 있었던 배우들이 아침부터 연습실로 출근했다. 극단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무대에 집중했다. 해화는 초대 연출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배우로 남았다. 그동안 많은 작품들이 무대에 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연습해서 완성한 작품들이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호흡은 안정됐고 연기가 노련해졌다는 평을 들었지만 관객은 늘지 않았다. 무대를 마치고 뒤풀이 때마다 노련하다는 말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노련미 넘치는 무대라면 왜 관객은 오지 않는 것인지. 노련의 능란함과 익숙함 중에 무엇이 문제인지를 다투다가 술에 취했고 다음날이면 모조리 잊고 다시 연습을 했다.  

  패기에 찬 단원 일부가 관객을 직접 만나러 가자고 제안했고 거리공연이 성사됐다. 관객도 배우도 집중하기 어려운 무대였지만 호응은 좋았다. 대중적인 작품이 선택되고 통속적인 각색이 이뤄졌다. 극단이 야외에서 머무르는 동안 예술회관은 고가의 초청 공연으로 채워졌고 연일 매진을 기록했다. R 시의 세금으로 만든 극단을 시민들이 외면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위기를 뚫고 나갈 손쉬운 일 순위로 인력의 물갈이가 거론됐다. 연봉이 높은 단원을 정리하고 빈자리는 계약직으로 채우는 계획이었다. 

  정우의 말을 듣던 해화가 주섬주섬 배낭을 열었다.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뭐하는 거예요?”

  해화가 정우의 목에 오프너를 들이댔다. 코르크를 뚫던 나선형의 날카로운 끝이 울대를 건드렸다.

“어때?” 

  해화가 물었다. 정우를 더욱 당혹게 한 건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라는 것이었다. 기시감의 정체는 곧 무대에 오를 20주년 기념 연극이었다. 낭떠러지로 내몰린 주연배우의 표독한 연기를 정우도 본 적이 있다. 연출에게 서류를 전하러 연습실에 들렀던 때였다. 배역을 맡지 못한 배우들은 연습에 불참했지만 해화는 귀퉁이에 앉아 지켜봤다.     

  연습실에서 본 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주연배우는 상대의 뒤편에서 칼을 들이댔지만 해화는 정우를 마주 봤다는 것이다. 한 손으로 정우의 어깨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오프너를 들이댔다. 해화가 오프너를 조금 더 밀었다면 살갗을 건드렸을 것이다. 정우는 오프너를 보며 굴까개를 떠올렸다. 껍데기 속 보드러운 굴을 날카로운 끝으로 벗겨내는 신속한 손놀림을 말이다. 껄끄러운 상황을 어이없는 상상으로 모면하는 건 정우의 오랜 습관이었다. 눈앞의 위기를 회피하는 마인드 컨트롤의 일종이랄까. 해화의 돌발행동은 뾰족한 도구를 사용하는 온갖 장면을 떠오르게 했다. 

  정우는 그간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쳐진 것 같은 당혹스런 입장도 이해한다고. 그럼에도 극단의 미래를 위해 결단해달라고 부탁했다. 이곳까지 달려오느라 야근을 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해화의 팔목에는 핏줄이 불거졌고 나잇대 치고는 완력이 상당했다. 그럼에도 스무 살 아래 남성이 못 빠져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정우를 굴복시킨 건 눈빛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 관용 따위는 베풀 수 없는 자의 위태로움이 느껴졌다. 다행히도 위태로움은 유동성을 내포했고 곧이어 자포자기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해화는 평생의 하나를 내려놓는 심정을 아느냐고 했다.  

  날씨는 예보와 달랐다. 흐려진다더니 햇볕은 더 따가워졌다. 해화는 헉헉대며 전망대까지 올랐다. 가쁜 숨에서 달짝지근한 술 냄새가 났다. 해화는 내려가라고 했지만 정우는 별말없이 뒤따랐다. 잎끝이 날카로운 사철나무가 길을 알려주었다. 아카시아 꽃송이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먼저 도착한 해화가 벤치에 드러누웠다. 양말을 벗고 발을 휘저으며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읊었던 대사를 중얼거렸다. 지금은 공문이 유일한 글쓰기지만 한때는 문학도였던 정우가 들어도 멋진 대사였다.  

  벤치에서 관광지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을은 운치가 있었다. 저속 촬영을 해도 한 장면과 다를 바 없는 박제관 같았다.      

“동물을 어떻게 박제하는지 아니?”

  마을을 쳐다보던 해화가 물었다. 박제에 문외한인 정우는 체액을 제거하고 화학물질을 채워 넣는 줄만 알았다. 그러니까 뼈대는 진짜라고 생각했다. 

“마네킹에 가죽을 씌우는 거야.” 

  해화는 박제의 어원도 상세하게 알았다. 박제의 한자는 벗겨서 만든다는 뜻이지만 영어로는 가죽이 원래 위치로 움직인다는 의미였다. 외국에선 키우던 개가 죽으면 박제를 한다고 했다. 정우는 가죽이 제 위치로 돌아오는 장면을 상상했다.    

  바람이 불자 가지가 엉키고 잎사귀들이 포개졌다. 해화가 벤치를 차지했기에 정우는 모서리에 기대섰다. 해화가 누운 채로 몸을 움직여 앉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정우는 해화의 머리맡에 앉았다. 

“무성한 나무가 여기만 정돈됐네요.”

  벤치 앞쪽 회양목 가지 끝이 단정하게 잘려있었다. 벤치에 앉아서도 마을을 조망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듯 했다.  

“가지치기를 누가 했을까요?” 

  정우는 잔목이 수북하게 실어 나르던 외발 수레를 떠올렸다. 산을 오르며 본 사람은 리조트 관리인과 목발뿐이었다.  

“그보다는…… 누굴 위해 했을까?”  

  해화는 리조트 관리인은 아닐 거라고 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뒷산까지 누가 신경을 쓰겠냐고. 전망대에서 보는 관광지구는 미동이 없었다. 도로는 한산했고 숙박시설 주차장은 텅 비어있었다. 내리쏟는 햇살조차 변함이 없었다. 

  그때 해화가 상기된 목소리로 마을을 가리켰다. 

“저길 봐.”

  황량한 거리를 홀로 걷는 목발 사내였다. 그의 걸음은 엇박자처럼 덜커덕거렸지만 제법 리듬이 맞았다. 광활한 무대를 활보하는 배우처럼 경쾌한 걸음이었다. 해화는 배낭에서 종이를 꺼냈다. 정우가 건넨 퇴단서였다. 해화는 그걸 반으로 접어펴고 삼각형으로 접기를 반복했다. 그러고는 다 접은 비행기를 가슴에 대고 눈을 감았다. 몸을 일으킨 해화가 미세한 근육까지 늘려가며 기지개를 켜고 오른팔을 힘차게 뻗었다. 비행기가 나뭇가지에 걸려 내려앉는 것 같더니 다시 날아올랐다. 멀리서 버스 한 대가 관광지구로 들어왔다. 관광버스가 들썩이도록 흥겨운 음악이 전망대에서도 들렸다.


 

  <당선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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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제게 당선소감이라는 이름의 파일이 있습니다. 무턱대고 소감부터 쓰던 막막한 날들을 토닥토닥 위로해 봅니다. 막상 건질 문장 하나 없는 건 왜일까요.  

  신문사에서 연락을 받은 다음 날 해돋이를 갔습니다. 집 가까이 바다가 있지만 일출은 1년에 단 한 번인 연례 행사입니다. 그러니 올해 저의 ‘해피 뉴 이어’는 두 번입니다. 바닷가에서 해가 떠오르는 반대편을 오래도록 봤습니다. 밀려오는 여명과 걷히지 못한 어둠이 뒤섞인 색감이 아름답고도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제게 소설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윤슬의 반짝임은 흔들림임을 흔들리지 않으면 반짝일 수 없음을 이제는 압니다.  

  치열하게 쓰는 문우들이 많습니다. 쓰는 사람의 태도를 가르쳐 준 난계소설반 식구들. 소정, 영일, 미연, 성주, 지숙, 월향 님. 당신들처럼 소설에 진심인 이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김영, 이강란 님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창동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존경하는 엄창석 선생님. 차분하게 전진하라는 말씀 새기겠습니다. 지민, 지안, 사랑하는 우리 가족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웅크려들던 제게 한 걸음 더 가보라고 해주신 심사위원님과 신문사에 감사드립니다.

● 대구 출생
● 경북대 사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 과정 수료
● 현재 경북교통방송 'TBN 경북 매거진' 방송 작가


 

  <심사평>

 

  아픔과 슬픔을 통과하는 서사의 힘

  올해 전북일보 신춘문예에는 예년보다 훨씬 다채로운 주제와 소재를 갖춘 작품들이 대거 응모했다. 응모된 작품들만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 시대의 통증과 고민의 깊이를 충분히 체감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삶이 밑바닥부터 통째로 흔들리는 절박함 속에서 문학이 꽃을 피운다는 건 사실 슬픈 일이다. 다만 이 아득한 슬픔에 빠져 있는 나를 내가 내 힘으로 건져 올리겠다는 의지가 우리로 하여금 펜을 들게 한다. 그것이 서사의 힘일 것이다.

  예심과 본심을 거치는 동안 응모작들에 대한 다양한 검토가 교차해서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다음 번에 좀 더 새롭게 읽고 싶은 작품들이 많아 행복했다. '할 수 없는 말', '돌아가는 길', '소금이 오는 소리', '하얀 꼬리 줄다리기' 등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작품의 밀도를 조금 더 높이는 일이나 서사의 긴장도를 끝까지 밀고 가는 힘에 대해 숙고해주길 부탁드린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오월의 박제관'과 '알다가도 모르는 일'.

  숙의 끝에 심사위원들은 '오월의 박제관'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데 합의했다.

  '알다가도 모르는 일'은 추후 확장 가능성이 큰 작품이라고 격려하고 싶다. 작품에서 약간 거칠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던 게 옥의 티였다. 소설이 갖춰야 할 것들은 모두 갖췄고 또 그 조합도 훌륭했다. 세밀함에 대해 좀 더 고민하길 바란다.

  '오월의 박제관'에서 드러나고 있는 우리들의 문화 현장을 지키는 예술인들의 고민을 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동의하고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사 진행의 완급 조절, 성격 창조의 자연스러움, 오랜 수련의 흔적과 통찰의 깊이가 함께 드러나는 문장 등... 완성도가 빼어난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은 것에 대해 심사의 보람을 느꼈다는 말을 여기 꼭 적고 싶다. 내 삶의 자리를 찾기 위해 우리는 이처럼 아픔과 슬픔이 교차하는 곳을 통과한다. 정진하여 한국 서사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큰 작가가 되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 김병용, 백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