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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수도꼭지를 틀다 / 이종현

 

내딛은 발걸음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하루를 씻기 위해 손잡이를 돌린다

꼭지는 냉수가 직수 온수는 침묵이다

오른쪽, 왼쪽으로 길들여진 버릇이

흔적을 받아 들고 햇살을 가늠하다

조각난 풍경을 쥐고 씻어내는 저물녘

물방울 젖어 드는 눈금을 가늠하고

기울기 묻어나는 시간을 색칠한다

눅눅히 젖은 하루해 이불 덮어 재운다


 

  <당선소감>

 

   성찰·치유 깃든 작품으로 세상 만나겠다

  작품으로 사람과 세상를 만나겠습니다.

  끝이 보일 것 같았는데 보이지 않았습니다. 몇 번의 최종심 탈락이 반복되던 신춘문예. 푯대에 도착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그런데 당선 통보를 받고 가슴이 더 허전했습니다. 기다려왔던 소식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오랫동안 꿈꾸어 온 목표가 사라져서일까요.

  시조는 제 생의 반 이상을 함께했습니다. 시조와의 오랜 연애는 애증의 관계였습니다. 익숙함에 젖어 집 한 채 짓지 못하고 뒤척이던 날들. 지나온 시간을 뒤돌아보면 절실함이 없는 시조놀이였습니다. 때문에 다른 장르로의 권유를 받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시조. 하지만 욕망이란 명사를 끌어안고 저는 여태껏 시조와 배반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지난 22년간의 당선작품을 모아 공부하면서도 시조보다 삶을 우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거듭된 최종심 탈락은 당연했는지 모릅니다. 절실함이 없는 창작이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놓지 않았고 시조가 지금도 제 삶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찰과 치유가 깃든 작품으로 사람과 세상을 만나겠습니다. 정형의 틀을 지키고 내재율로 가꾼 시의 집을 짓겠습니다. 삶과 사물의 결을 들숨과 날숨으로 긴장과 절제의 시조를 직조하면서 신선한 감각으로 담아내겠습니다. 문을 열어준 경남신문사, 부족한 작품에 디딤돌을 놓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격려와 채찍으로 이끌어 주신 이영춘 선생님 고맙습니다. 시를뿌리다시문학회와 빛글문학, 화천 문창반 문우들과 이 기쁨을 함께합니다. 사랑하는 아내 방현미 씨와 민승이, 민주에게 선물을 안겨줄 수 있어 행복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기뻐하실 당선을 부모님 영전에 올립니다.  

● 1961년 전북 임실 출생 
● 춘천 거주
● 대한장애인역도연맹 상임심판


 

  <심사평>

 

  삶과 존재의 한 현상을 예리하고 참신하게 포착

  올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엔 200여 편 작품이 투고돼 평년 수준을 보였다. 심사위원들은 시조 형식을 준수하면서 그 형식 안에서 자유롭고 탄력적인 언어 활용, 동시대적 삶의 문제를 주제로 다루는 작품을 수상작으로 정하자는 선정기준을 가지고 심사를 보았다.

  그 결과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4편이었다. ‘간절곶’, ‘코로나 시대의 사랑’, ‘보청기’, ‘수도꼭지를 틀다’ 등이 그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어느 것이나 당선작으로 밀어도 좋을 만큼 높은 수준에 도달한 작품들이었다.

  먼저 ‘간절곶’은 시조의 형식적 제약을 세련된 언어적 표현으로 매우 탄력적으로 펼치고 있고 현대 도시인의 고독한 내면 심경을 잘 드러내줘 주목을 받았으나, 그러한 것들이 지금 시조 문단에서 많이 보이는 상투적인 발상과 표현에 가깝다는 점이 아쉬운 점으로 지적됐다.

  ‘코로나 시대의 사랑’은 시조 형식으로 동시대의 감수성과 문제의식을 잘 표현하고 있는 점이 매우 높게 평가됐으나 너무 시조로서 형식에 집착하는 듯한 갑갑함이 느껴졌고, 언어적 탄력감을 높이고자 하는 표현이 되려 유희적인 것으로 느껴져 감동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됐다. ‘보청기’는 청각 장애와 관련된 보청기의 특성을 아주 섬세하고 감성적으로 잘 포착하여 표현해내고 있는 점이 탁월하게 다가왔으나 대상의 인식에서 깊은 주제의식이 없는 점, 시조 형식 안에서 보여주어야 할 언어적 탄력감이 부족하다는 점이 아쉬운 점으로 지적됐다.

  이에 비해 ‘수도꼭지를 틀다’는 무엇보다 수도꼭지라는 대상의 특성을 통해 삶과 존재의 한 현상을 예리하고도 참신하게 포착해내고 있고, 시대정신이라 할 만한 동시대인의 고단한 감수성을 매우 탄력적인 언어 형식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점이 주목됐다. 다른 작품들도 상당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음을 두고 볼 때 당선작으로 선정해도 되겠다는 심사위원들의 합의를 얻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한국 시조단에 또 하나의 큰 별이 되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 : 이달균, 김경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