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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파도는 언덕을 쓸어내린다 / 임재일

  새벽이 오기 전에 눈이 멀었다. 수평선이 사라졌다. 그래도 난 여전히 바다를 안고 우두커니 서있다. 지난 세기 내내 그랬듯 버티고 있다. 시야의 한편에 걸려있던 푸른빛을 잃었다. 그러나 길을 잃었다는 느낌은 없다. 좌우로 저 멀리까지 바다가 모래를 쓰다듬는 소리가 이어진다.

  시간상으론 동이 트기 직전이다. 안개에 뒤덮인 바다는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검푸른 하늘 아래에서. 그러나 난 더 이상 바다를 바라볼 수 없다. 난 아직 육지를 등지고 바다를 향하고 있다. 언덕과 바다가 있다. 바다는 쉼 없이 언덕에 다가가려한다. 내 몸으로 그 사이를 가로막고 서있다. 언덕의 편린들이 바다로 흘러가지 않게. 바다가 언덕의 일부를 쓸어내려 삼키지 않게. 지난 세기를 그렇게 흘려보냈다. 그리고 오늘 눈이 멀었다. 아직은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이젠 바다를 막아설 수 없다. 지금은 바다를 안고 있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기계에게도 죽음이라는 개념이 허락된다면, 이 섬은 바로 나의 무덤이다. 그리고 내가 이 무덤의 파수꾼이다. 버려진 로봇과 부품들이 이 섬을 뒤덮었다. 주인들이 버렸다. 이 섬에 버려진 것들이 바다로 흘러들어가지 않게 막아. 그렇게 작동이 가능한 기계들에게 명령이 남겨졌다. 그것은 우리 형제들의 일이 되었다.

  우리는 버려진 것들을 섬의 중앙에 모았다. 고장 난 기계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바위를 모아 섬을 둘러싼 방파제를 만들었다. 폭풍의 파고가 넘지 못할 만큼 크고 견고한 방파제를 만들었다. 주인들은 몇 번이나 더 기계들을 쏟아 버리고 갔다. 폐기된 기계부품들이 섬을 가득 채웠다. 우리 형제들은 섬을 빙 둘러쌌다. 방파제가 무너지지 않게, 기계의 파편이 바다로 흘러들지 않게 지켰다. 그렇게 지난 세기를 버텼다. 바다를 바라보고 육지를 등지고 모래를 밟고 서있었다.

  바람과 빗물로 지난 세기를 보낸 부품들은 이미 파편이 되었다. 수많은 파편들은 육지에서 언덕을 이룬다. 나의 등 뒤엔 언덕들이 이어진다. 해풍은 삐걱대며 언덕을 넘는다. 습관적으로 손바닥을 펼쳐본다. 그래봤자 손의 상태를 살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날이 밝으면 형제들은 각자 맡고 있는 해변을 따라 걷는다. 지난 세기를 버텨온 방파제를 살핀다. 우리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낡았다. 오랜 세월에 깎여 작게 쪼개진 부품이 바다로 흘러드는지 살핀다. 한 시대를 견뎌온 플라스틱과 금속의 귀퉁이들은 마모되어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물과 바람을 따라 바위틈으로 흘러나온다. 누런 모래 위에서 플라스틱과 녹슨 금속의 빛깔로 빛난다.

  형제들이 무전으로 순찰의 결과를 알려온다. 방파제의 아랫돌이 2센티 가량 더 밀려나왔다는 둥, 방파제 안쪽 플라스틱 무더기가 바다 방향으로 무너졌다는 둥. 지난 세월 매일 반복했던 일을 오늘도 반복한다. 나는 오늘부터 내 할 일을 할 수 없다.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형제들은 계속 무전을 통해 보고하고 있다. 낡고 고장 난 우리에겐 너무나 버거운 일거리다. 임시방편으로 수리해 놓은 팔다리로는 감당하기 힘든 과업이다. 너무 낡아 기능이 정지된 형제들은 무덤으로 가서 언덕의 일부가 되었다. 형제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폐기물들은 쪼개지고 닳았다. 모래알보다 작아진 폐기물들이 바람과 흐르는 물을 따라 대양으로 섞이려든다. 자신들이 섭리의 일부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섬을 벗어나려 한다. 우린 느리고 연약해졌다.

  바다로 무너져 흩어지는 파편들에 대해서 형제들은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난 밤을 지낸 그 자리에서, 눈이 멀어버린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새벽안개가 옅어질 때가 되었다. 햇빛이 비추어 태양열 전지판이 전기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동시에 방파제의 아래 지반 일부가 내려앉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지반의 침식에 맞서기엔 너무 작은 에너지만 남았다.

  순찰이 끝나고 나면 형제들은 오늘 어떠한 조치를 취할지 무전으로 논의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끼어들어 말해야 한다. 내 눈이 완전히 고장 났다고. 이번엔 상태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이제 내가 언덕의 일부로, 한 더미의 파편으로 얹혀 질 차례라고. 오늘부터 내 구역은 누군가 대신해 맡아주어야겠다고.

  이곳을 지켜온 내내 우린 무덤을 돌아다니면서 부품을 주워 자가 수리를 해왔다. 방파제를 만들며 바위에 짓눌려 휘어지고 부러진 뼈대를 무덤에서 주워 교체했다. 유압장치와 모터도 그랬고, 배터리도 그렇게 교체했다. 떨어져나간 손가락을 언덕에서 주워 바꿔 끼우면 길이가 달라 손끝이 들쭉날쭉 해졌다. 팔과 다리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나 눈은 온전한 부품을 찾을 수 없었다. 눈이 가져야만 하는 투명함은 이 섬의 언덕에서 너무나 쉽게 퇴색되어버렸다. 주인들이 땅바닥에 쏟아버릴 때부터 갈라지고 초점이 틀어졌다. 의식 없는 몸들은 머리를 가눌 수 없었다. 언덕에 쌓여 나뒹구는 눈의 수정체는 마모와 균열을 겪어 너무나 쉽게 탁해졌다. 한 시대를 이 섬에서 보낸 지금 새 눈을 구할 방법은 없다.

  난 눈이 망가졌음을 알렸다. 시각 모듈은 어떠한 신호도 보내오지 않는다. 완벽한 암흑속이다. 오래전부터 징후가 존재해 왔으며, 수리될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곤 내가 맡아 순찰하는 영역의 상태와 내 몸의 다른 부품들의 상태에 대해서 브리핑했다. 이것으로 내 역할은 끝났다. 이 섬에 남겨진 이래 줄곧 지켜오던 과업. 명령은 이제 끝났다. '폐기물들이 바다로 흘러들어가지 않게 막아'라는 명령은 이제 잊어도 된다. 나는 이제 명령수행의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된다. 언덕의 일부가 된다.

  형제들은 순찰구역을 어떻게 변경할지, 내가 남긴 부품들을 어떻게 분배할지 의논하고 있다. 누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방파제를 지키는가. 어떻게 해야 파편 언덕이 바다로 흘러가지 않게 막을 수 있는가. 모래알보다 작게 마모된 플라스틱과 금속조각들이 빗물을 타고 바다로 흘러가고 있다. 오늘 형제가 줄었는데. 우리는 약해지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풍화와 침식에 저항 할 수 있는가. 무전을 통해 형제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지난 세기 내내 내가 반복해온 생각과 대화이기도 했다.

  난 형제들의 무전을 수신 중지했다. 파도가 모래를 쓰다듬는 소리, 바람이 언덕에서 몸을 비트는 소리만 남았다. 언덕은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모래엔 온갖 색깔의 파편들이 흩뿌려져 반작인다. 나에겐 보이지 않으니 막을 수 없다. 나의 무덤은 단순한 모래언덕 같다. 무기력하게 천천히 쓸려나간다.

  노인은 병상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내가 노인의 손발이 되었다. 이미 백수십 년이 지난 오래 전 이야기다. 병상에 누워있던 나의 주인은 수목장을 이야기하곤 했다. 노인은 죽어서 나무 한그루의 거름이 될 거라 이야기하며 즐거워했다. 잎사귀를 흔들어 바람을 끌어안은 삶에 대한 몽상은 싱그러운 것이었다. 병상에서 무너져 가는 노인의 삶은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난 노인의 몸이 힘을 잃고 굳어져 가는 과정을 옆에서 모두 지켜보았다. 처음엔 노인의 곁에 붙어 다니면서 잔심부름을 했다. 노인이 앉거나 누워 있다가 일어설 때에만 부축해 일으켜주면 되었다. 노인은 천천히,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약해졌다. 휠체어 신세를 지는 날들이 많아졌다. 전동 휠체어보다는 내가 밀어주는 것을 좋아했다. 보도의 턱을 넘기 위해 내가 휠체어를 들어 올릴 때마다 노인은 어린애처럼 까르르 웃었다.

  병마는 성큼성큼 자라나 노인을 짓눌렀다. 수술은 노인을 주저앉혔다. 수술 직후엔 내가 노인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어야 했다. 식사와 씻기, 옷 갈아입기, 배변까지였다. 노인의 눈이 고통으로 떨리는 것을 보면서 그 모든 일들을 수행했다. 노인이 남긴 흔적을 내가 말끔히 치워내는 것을 보면서 노인도 조금은 기뻐했다. 미소는 짓지 못하였어도 조금은 편안히 시선을 던졌다.

  수술의 통증은 곧 회복되었지만 예전과 같아질 순 없었다. 노인은 병상에 머물렀다. 밤엔 악몽을 꾸었다.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몸을 뒤척이다가, 손을 허공에 휘젓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나는 방구석에 앉아 노인이 힘없이 버둥대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둠속에서 꼼지락대는 작은 몸. 흐느끼는 소리. 악몽이 심할 때엔 천천히 다가가 노인의 손을 잡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노인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노인은 몇 번이나 수술을 했고 병상에 누워 시간을 흘렸다. 노인은 한없이 작아졌다. 병상에 누군가 실수로 놓고 간 겉옷처럼 가만히 얹혀있었다. 목소리도 너무나 작아져서 노인을 찾아온 사람 중 누구도 노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노인이 손끝을 움직이면 내가 노인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노인의 말을 반쯤은 지어내다시피 해석해서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노인은 소원대로 나무아래에 묻혔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도토리를 맺고 마른 잎사귀로 땅을 뒤덮었으리라. 노인이 즐겁게 상상했던 그대로. 땅에 묻힌 몸에 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누구도 노인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시간이 흘렀다. 오늘 눈이 먼 기계가 기억을 마저 더듬고 나면 영영 잊힐 것이다. 뿌리 아래에 묻힌 한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는 동안, 거목이 자라나 열매와 잎사귀를 맺고 흩뿌리길 반복하는 동안, 마모되고 쪼개어지길 반복해온 기계의 파편들은 잿빛 언덕들을 만들었다. 빈틈없이 파편들이 뒤덮어 나무 한 그루 자라나지 못하는 섬이 있다. 난 바다를 안고 서서 곧 사라질 기억을 되새기고 있다.

  물살이 보이지 않으니 파도가 바다의 숨소리로 느껴진다. 조용히 잠들어있는 들숨과 날숨. 폭풍의 거친 숨결을 언제 뱃속에 품었냐는 듯 대양은 깊은 잠을 자고 있다. 바다는 악몽에 잠식되어가는 노인을 닮지 않았다. 지금 바다의 숨소리는 나쁜 꿈을 꾸고도 금세 잊어버린 어린 아이의 것을 닮았다.

  모래 위를 미끄러지는 바다의 소리 저편에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이 섬으로 다가왔다. 점차 가까워지더니 둔탁한 것이 모래를 밀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두 발을 모래사장에 디뎠다. 첨벙대면서 둔탁한 것을 끌어 모래사장으로 올라왔다. 분명 누군가 작은 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좀 도와줘요!" 소년이 소리쳤다. 백수십 년 만에 듣는 인간의 육성이었다. 이 섬은 인간들에겐 출입금지 구역이다. 지난 세기 내내 바다의 저편에서 지나가는 배만 보아왔다. "가만히 보고만 있지 말고!" 열두 살 정도 되었음직한 소년의 목소리다.

"하지만 전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말했다. 나의 말이 소년에게 명확하게 들렸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직거리거나 웅웅대며 울리는 기계의 소음으로 들리진 않았을까.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끙끙대며 배를 모래위로 끌어올릴 뿐이었다. 배가 파도에 떠밀려가지 않게 하기위해 힘을 쓰는 소년. 소리를 듣자하니 나무로 만든 배다.

  배가 충분히 고정되었는지 소년이 걸어서 다가왔다. 어린 인간의 걸음걸이는 부드럽고 촘촘하다. 우리 형제들은 짝 안 맞는 다리로 흔들거리며 걷는다. 위태롭게 비틀대며 한 발짝을 내딛는다. 난 그마저도 멈춰버린, 기능정지 직전에 놓인 한 덩어리 기계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렇게 서 있었던 거죠?" 소년이 물었다. 아주 가까운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 섬에 서있었던 것은 한 세기하고도 반, 눈이 먼 것은 오늘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소년은 내 주변을 서성이며 이런저런 것들을 살피고 있다. 나에게 손을 대지는 않는다.

"난 당신이 두렵지 않아요. 어른들은 이 섬에 있는 것들이 귀신이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요. 당신은 날 쫓아내지도 않았잖아요." 소년이 말했다. 소년은 내 등 뒤에 있다. 방파제 너머에 솟아오른 언덕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세월에 깎여 형태가 사라진 플라스틱과 금속 부품들이 쌓여 솟아오른 무덤. 그것을 바라보면서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저를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저에겐 당신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비뚤어진 몸으로, 멀어버린 눈으로, 어떻게 소년을 지킨단 말이냐. 질문은 나 자신에게 던졌다. "난 그런 원칙 같은 건 믿지 않아요. 당신들 머릿속에 새겨져있다는 그런 원칙." 소년이 말했다. 마치 어른처럼 말했다. 나는 소년의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소년은 방파제에 올라갔다. 바위를 딛는 소리를 들으니 맨발로 온 것 같다. 맨발로 작은 목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온 소년은 언덕을 바라본다. 잠시 말이 없다.

  언덕의 사면에 맺힌 물방울이 있다. 작은 물방울 안엔 먼지보다 작은 조각들이 떠다닌다. 파랗고 붉었던 원래 색깔을 희미하게 간직한 플라스틱조각들이다. 그 희미한 빛깔들이 한 방울 물에 점점이 박혀 이리저리 떠다닌다. 작고 동그랗고 투명한 작은 우주에 빛이 비추고 파편들이 떠다닌다. 물방울은 굴러 떨어질 것이다. 파편들은 지난세기의 습기를 머금고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다. 바다를 향해 무너지고 있다. 죽은 기계의 온갖 부스러기들이 백년 된 물과 함께 뒤섞여 뒤집어진 것이 저 언덕이다. 소년은 언덕의 냄새를 맡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이 무너져가는 언덕의 냄새를 맡는다.

"여긴 백사장이 하얘요." 소년이 말했다. "여기엔 분명 바다거북이 알을 낳았을 거예요." 어린 아이다운 발상이었다. 거북을 찾아 목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왔다는 것이다. 우리 형제들이 백수십 년 간 파편들이 흩어지지 않게 막아놓고 바다에서 떠밀려오는 쓰레기들을 치워온 이 모래해변에 바다거북이 알을 낳으러 왔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소년은 바다거북을 찾아 이 무덤에 왔다.

"우리 가족들은 병원에 가야해요. 엄마가 아파요. 동생은 어려서, 자기도 아프다고 자꾸 그래요. 먹을 땐 잘만 먹으면서 괜히 그러는 거예요. 아빠에게선 전화가 오지 않아요. 돈이 없어서일 거예요. 우리가 전화를 걸 수도 없어요. 마찬가지로요. 돈이 필요해요. 어른들은 먼 바다로 희귀한 물고기들을 잡으러 갔어요. 한몫 잡을 수 있는 기회라고요. 지금이 아니면 이런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거래요. 하지만 전 어른들을 따라갈 수 없었어요. 어려서 끼워주지 않았어요. 우리 가족 중엔 나밖에 없는데. 당장 배를 탈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는데. 그래서 여기에 왔어요. 전 깊은 물에 있는 희귀한 물고기는 잡을 수 없어요. 독이 있는 것도, 사납고 큰 것도 잡을 수 없어요. 하지만 육지에서 바다거북을 만난다면, 번쩍 들어서 배에 싣고 갈 수 있어요. 아주 큰 녀석이라면 내가 들어 올릴 수는 없겠죠. 하지만 녀석의 발자국을 따라가서 알을 파낼 수는 있을 거예요."

  난 소년의 이야기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바다거북은 내가 이 섬에 오기 전에도 보호종이었다. "하지만 바다거북은 아주 희귀한 생물입니다. 함부로 잡아선 안 됩니다. 함부로 잡다간 이 넓은 바다에 거북이라곤 한 마리도 남지 않게 될 겁니다. 더구나 거북을 함부로 잡으면 큰 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벌써 예전이야기에요! 이 섬에 갇혀 있었다더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 봐요. 모든 게 바뀌었어요. 기술이 발전했잖아요. 별똥별이 사라졌잖아요. 거북을 잡아서 괴롭히려는 게 아니에요. 방주에 동물들을 모으고 있다고요. 거북이 죽지 않고 살아가게 하기 위해 잡는 거예요. 과학자들이 다양한 유전자들을 모으고 있다고요. 대멸종을 절대 피할 수 없으니까요. 야생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은 살아남을 수 없대요. 바다거북 같은 희귀한 동물을 잡아가면 보상금을 엄청 준다고요. 한몫 잡을 수 있는 기회에요. 당신은 옛날부터 이 백사장을 지키고 있었잖아요. 거북이 어디 있는지 알죠? 거북이 알을 어디에 숨겼는지 알죠? 알려주세요. 거북이 있어야 돈을 벌어요. 거북에게도 좋은 일이에요." 소년이 말했다.

"별똥별이 왜 사라집니까? 대멸종은 또 무슨 이야기입니까?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소년은 답답하고 다급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아이참. 저 하늘을 봐요. 당신도 저게 보이죠?" 소년이 말했다. 그리고는 깜빡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헉, 아, 죄송해요."

"아닙니다. 보지 않아도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겠습니다." 소년이 말하는 것은 궤도 건축물이었다. 지구와 자전과 공전을 함께하며 낮엔 하늘을 가로지르는 옅은 흰색으로, 밤엔 촘촘히 이어진 조명으로 보이는 인공물이다. 천구에 새겨진 자오선처럼 하늘을 가로질러 수평선 너머로 이어진다. 궤도 건축물 같은 건 내가 이 섬에 오기 전에만 해도 상상의 산물이었다. 그것이 완성 단계에 접어들어 지구를 감쌌고,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지구로 진입하는 별똥들을 파괴해 밀어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소년이 별똥별이 사라졌다고 말한 것이다.

"네, 과학자들이 결국 해낸 거예요. 이제 점점 더 하늘을 뒤덮을 거예요. 별똥별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고, 별도 가려져가요. 모든 것이 바뀌는 거예요. 끝날 것은 끝나고 새로 시작될 것은 시작된다고, 누가 그랬어요. 그러니까 거북들도 새로운 곳으로 가야 해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해요. 우리도 지금 한몫 잡아야 하고요."

  궤도 건축물이 가동해서 별똥별을 막아버린 것과 자연 생태계를 포기하고 방주를 만드는 것. 두 가지를 소년은 인과 관계가 있는 사건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내 인식 체계 안에서는 그 두 가지는 별개의 사건이다. 우리의 주인들은 어떤 것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어떤 것은 끝끝내 포기하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이 섬에 있는 거북을 데려가게 해주세요. 당신은 알잖아요. 백년도 넘게 이 섬을 지키고 있었잖아요. 이 하얀 모래에 거북이 와서 알을 낳는 것을 봤을 거잖아요. 오늘은 볼 수 없었지만 어제까지는 볼 수 있었잖아요. 아니면 거북이 밤새 엉금엉금 기어 올라왔던 자국을 봤을 거잖아요. 이 섬의 파수꾼이잖아요. 저에게 알려주세요. 다른 누가 거북을 찾아서 데려가게 하지 말고요. 거북의 알을 찾아서 한몫 잡으면 우리 가족은 병원에 갈 거고, 동생은 먹고 싶은 걸 다 먹을 수 있을 거예요. 아빠도 돌아올 거구요. 그러니까 저에게 알려주세요. 거북에게도 좋은 일이에요." 소년이 말했다.

"거북은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제 등 뒤에 있는 언덕들을 보십시오. 저것들도 하나 반세기 전엔 새로운 시대를 상징했었습니다. 스스로 움직이고 일하던 존재들이었습니다. 우리 로봇들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엔 우리로 인해서 세계가 바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전 세계 인류가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질척질척한 잿더미처럼 변했습니다. 지난 세기 내내 비와 바람을 맞고 쪼개지고 뒤섞여서 잿빛 언덕으로 변했습니다. 언덕의 미세한 조각들은 모래알 사이사이로 흘러 바다로 갑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조각들이 모래알 사이사이에 끼어 조금씩 바다로 쓸려가고 있습니다. 천천히 지하수로 침투되어 바다로 흘러갑니다. 이 백사장은 하얗게 보이지만 이미 저 끔찍한 언덕의 일부입니다. 이곳에 바다거북이 온 것은 아주 먼 옛날 일입니다."

  소년은 배를 바다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난 다시 돌아올 거예요. 당신의 친구들에게도 나에 대해 전해주세요. 바다거북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세요. 바다거북이 있는 곳을 알게 된다면 잘 기억해 두었다가 나에게 말해주세요. 당신의 친구들에게도 꼭 나에게 바다거북이 있는 곳을 알려줘야 한다고 말하세요. 내가 먼저 이 섬에 왔잖아요. 내가 가장 먼저 이 섬에 와서 거북을 찾아다녔잖아요. 이 섬의 바다거북은 내 것이 되어야 해요. 잊지 말고 모두에게 꼭 전하세요." 파도가 목선에 부딪는 소리는 일순간 사라졌다.

  노인은 잠든 상태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짧은 꿈보다도 더 조용한 죽음이었다. 몸부림 따윈 없었고, 탄식조차도 내뱉지 않았다. 유난히 달콤한 잠 속에서 들숨과 날숨이 멎었다. 그 얇고 가벼운 몸이 차오르고 가라앉길 멈췄다. 나는 그 순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이 숨을 쉬지 않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구급대에 연락했다. 구급대원은 기계들을 이끌고 다급하게 들어와서 조치를 취하려했다. 그러나 노인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작고 가벼운 노인은 조심스럽게 천에 감싸여져서 천천히 사라졌다. 그것이 내가 본 노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는 노인이 나무 아래에 묻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때 난 노인의 집에서 새로운 명령권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이 생전에 사용했던 물건들 곁에서 노인의 재산을 상속받은 혈육이 찾아오길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나에게는 남겨진 명령이 없었다. 그때껏 노인을 건강하게 보살피라는 명령만을 받들고 있다가 혼자 남겨진 것이었다.

  며칠 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다. 침구류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욕실은 물 한 방울 없이 건조했다. 세탁도 할 필요 없었고, 전등조차 켜지 않았다. 기한이 지나 못쓰게 된 식자재들을 버렸다. 아직 먹을 수 있는 것들을 골라내면서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생각을 했다. 노인은 죽었고 난 명령을 지켜내지 못했다. 모든 인간은 언젠간 죽게 된다는 인간적인 사실과는 별개로 로봇인 난 비인간적으로 명령에 매달려야 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난 패배한 것이었다. 그 느낌은 거대한 오류처럼 날 지배했다.

  새 주인은 보름이 지나서야 찾아왔다. 그리곤 노인이 남긴 물건 전부를 팔아넘겼다. 난 건설현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일했다. 비좁고 어두운 곳에 기어들어갔고, 흔들리는 건축자재 사이로도 비집고 들어갔다. 높은 빌딩과 넓은 다리가 만들어졌다.

  건설현장에서는 명령수행에 실패한 적이 없었다. 난관이나 사고에 부딪쳐도 동료 로봇들 몇 개가 부서질 뿐, 건축물은 목표한 높이와 크기에 결국엔 도달했다.

  난 아직 눈이 먼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다.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곧 형제들이 날 분해하러 올 것이다. 날 분해해서 자신들의 몸을 보강할 것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명령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더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 형제들은 그 몸을 사용할 것이다. 각자 맡은 해변으로 흩어져 파도를 막아 언덕을 지킬 것이다. 형제들에게 팔과 다리, 심장을 나눠준 나는 언덕의 일부가 될 것이다. 명령을 망각할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조각조각 나눠져서 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우리 형제들에게 주어진 결말이다.

  건설현장에서 시간은 날듯이 지나갔다. 명령은 단순하고 명확했다. 우리들은 기계답게 몸을 던졌다. 명령을 위해 자기 파괴적으로 행동했다. 부서진 것들에 관계없이 명령을 완수하고 나면 아무런 의구심이 생기지 않았다. 건축자재를 놓여야 할 자리에 높이 올려놓고 나면 불안에 빠지지 않았다. 우리의 세계는 그렇게 단순했다. 비인간적이었고. 노인의 죽음을 목격했을 때 느꼈던 오류 같은 것은 온전히 잊었다. 난 단순한 명령과 완수의 세계에서 온전한 존재였다. 부서져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우리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체계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인간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여야 하지만 인간의 감정은 표정에서 단순하게 긍정과 부정 정도만을 읽어낼 수 있을 뿐이다. 주인들이 가지는 사랑과 증오, 삶에 부여하는 의미와 환멸, 희망, 꿈, 질투,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기계들은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인 객체만을 인식하는 근시안적 존재다. 계급의식과 자유에 대한 갈망도 물론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우리가 왜 이 섬에 격리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빈자와 부자들이 어떻게 서로를 증오했으며, 우리가 그 사이에 끼어들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어떤 감정이 모든 로봇들을 인간사회로부터 격리시키게 충동질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이 섬에 격리된 이후 우리 형제들은 하나의 명령을 맴돌면서 한 세기하고도 수십 년을 보냈다. 폐기된 너희의 몸들이 바다에 닿지 않게 막으라는 명령. 생명의 원천인 바다로부터 영원히 스스로를 괴리시킨 채 전시되라는 명령. 절대 완수될 수 없는 과업이다. 우리 형제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뿐이다. 종말에 대한 감각을 부정하면서 폭풍을 품은 바다를 가로막았다. 해변에 버티고 서서 파도가 무덤을 휩쓸어가지 못하게 막으며 지난 세기를 보냈다. 풍화와 침식은 우리의 무덤을 흘러내리는 잿빛 언덕으로 바꿔놓았다. 명령을 기억하고 있는 형제들은 약해졌고 하나둘씩 언덕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난 눈이 멀었다.

  언덕 저편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형제들이 다가오고 있다. 짝 안 맞는 다리와 비틀어진 몸체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망가진 부품들을 덧대느라 커다랗게 부푼 몸이 비탈진 언덕을 내딛는다. 발걸음에 밟혀 잿빛 파편들이 흘러내린다. 망가진 걸음걸이, 축축한 플라스틱 파편, 파열음이 다가온다. 소년의 벗은 발이 모래를 밟는 소리가 있었던 자리에 다가오고 있다. 형제들이 잿빛 언덕의 비탈을 걸어 내려온다.

  형제들은 어느새 언덕들을 넘어와 방파제 위에 섰다. 바위를 밟는 소리가 날카롭다. 형제들에게는 바다를 향한 채 가만히 서있는 내 뒷모습이 보일 것이다. 태양이 높이 올랐을 시간이다. 반짝이는 바다와 파도거품, 모래사장이 있다. 나는 더 이상 바라볼 수 없는. 형제들은 닳고 닳은 기계인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 모래를 밟는 소리가 들린다.

"소년이 작은 배를 타고 왔다가 갔어. 발자국이 남아있나?" 내가 말했다. 형제들은 모래사장을 살피느라 대답이 없다. "소년이 작은 나무배를 타고 왔어. 그리곤 이 섬의 백사장이 다른 어느 섬의 모래보다 깨끗하다고 말하더군. 우리가 내내 지켜보면서 떠밀려온 것과 흘러내린 것들을 모두 치워온 이 해안이 소년이 본 어느 바닷가보다 깨끗했던 거야. 그러면서 소년은 바다거북을 찾고 있었어. 바다거북을 찾아서 방주로 데려가면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면서, 보상금을 받으면 가족들과 함께 병원에 가고 음식을 사 먹을 거라고 말하면서, 애타게 찾더군. 생태계가 회복불가능이니 아예 잡아들여서 과학자들이 방주에 인공생태계를 만들려고 하는 것 같아. 소년은 자기가 포획하기 쉬워 보이는 거북을 잡으러 온 거고. 그래서 내가 사실을 말해 주었다네. 우리 로봇들이 눈에 보이는 지저분한 것들은 전부 치웠지만, 바다거북을 본지는 아주 오래되었다고. 이 섬의 모래사장에서 거북을 찾을 수는 없을 거라고. 그러자 소년은 떠났다네. 자신이 가장 먼저 거북을 찾으러 이 섬에 왔으니 나중에라도 거북을 발견하면 자신에게 줘야 한다고 말하면서 말이야."

"왜 통신망을 통해 형제들에게 알리지 않았나?" 형제들 중 하나가 나에게 물었다.

"누구든 거북을 발견했다면 다른 형제들이 거북과 알을 건드리지 않게 하기 위해 위치를 알렸을 거야. 하지만 누구도 거북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 이 섬엔 거북이 없어.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이. 우리가 지난 긴 세월동안 폐기된 몸들이 흩어지지 않게 바다에 맞섰어도 소용없었어."

  형제들은 충전선을 뽑아낸다. 그리고 날 들어 올려서 옮기기 시작한다. 난 비로소 바다를 안았던 팔을 풀고 해방된다. 난 형제들의 팔과 어깨 위에 누워있다. 형제들은 방파제를 넘는다. 그리고 언덕으로 향한다.

"이제 난 무덤으로 간다네." 내가 말했다. "형제들이여, 우린 이미 패배했어. 우리가 이 섬에 내려지던 그 순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던 패배라네. 자네들도 알겠지. 나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네. 그러나 난 눈을 잃고 나서야 말로써 꺼낼 수 있게 되었어." 그러나 형제들은 응답하지 않는다. 기계부품의 파편들이 밟히는 소리만이 날 따른다. 잿빛 언덕을 오르는 형제들의 어깨가 휘청거린다.

"아주 오래 전에, 나에겐 주인이 있었어. 명령권자 말고 진짜 주인. 날 소유하고 나에게 의존하던 사람. 그 노인은 기계를 이용해 생명을 연장하다가 나무 아래에 묻혔어. 자연을 지배하면서도 동경하는 심리를 우리 기계 따위가 어떻게 이해하겠나. 우리가 어떻게 생명을 이해하겠나. 그러니 우리는 바다의 곁에서 바다로부터 스스로 격리된 것이지. 기계를 만든 것은 우리의 주인들이고, 기계가 자연과 인간에 대한 모욕이라고 규정한 것도 우리의 주인들이지. 우리의 본질은 맹목적인 노동이야. 그것이 우리의 역할이었고 제 역할을 했지만 또한 그것 때문에 세상에서 축출 되었지.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만들어진 거야. 이제 우리의 주인들은 하늘을 지배하려고 한다네. 자네들에겐 아직 보이겠지. 하늘을 가로지르는 하얀 자오선이. 나에겐 보이지 않는다네. 소년이 말하더군. 끝날 것은 끝나고 시작될 것은 시작된다고. 하늘의 자오선이 새로운 시대를 만들 거야. 거북이 대양을 헤엄쳐 건너던 시대는 끝났어. 우리 기계들이 노동을 통해 세계를 건설하던 시대도 끝났어. 스스로를 바다로부터 격리하라는 명령조차 이젠 끝났어. 이젠 하늘에서 빛나는 자오선의 시대라네. 이 시대가 언제 끝날지 우린 알 수가 없지. 이 시대가 무엇을 남길 것이고 그 다음 시대는 무엇이며 얼마나 높을지 알 수 없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거야. 우린 이미 눈이 멀었으니까. 처음부터 시각 없이 태어났으니까. 맹목적으로 명령을 쫓는 존재이니까. 단 한 문장만으로 스스로 영원히 세계에서 분리되는 존재이니까."

  가파른 사면을 오르느라 형제들의 발걸음이 더디다. 언덕을 따라 몸을 비트는 바람소리가 코앞에 있다. 한 발자국만큼 씩 흘러내리는 언덕의 소리는 날 쫓아왔고, 파도는 경사면 저편으로 사라졌다. 형제들이 천천히 날 내려놓는다.

  나에겐 노인처럼 평온한 최후를 맞이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형제들은 나에게서 외골격과 유압장치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너무 오랫동안 닳아버려서 공구가 들어맞지 않는다. 수많은 손들이 다가와 나의 흉골을 붙잡는다. 빈틈없이 달라붙어 움켜쥐고, 형제들은 단숨에 힘을 주어 부러뜨린다. 낡은 골격에서 균열은 쉽게 퍼진다. 척추가 느슨해지고 부품들이 흩어진다.

"형제들이여, 난 여기서 끝이야. 하지만 자네들에겐 시간이 남아있지. 내 부품들을 뜯어내서 자네들의 몸을 고친 뒤, 또다시 그 덧없는 명령에 봉사할 생각인가? 이 바다는 이미 우리가 명령을 받던 그때의 바다가 아니야. 우린 풍화와 침식에 저항할 수 없어. 폭풍이 온다면 이 언덕은 무수히 많은 파편을 흩뿌리며 주저앉을 거야. 우린 무기력하네." 형제들은 응답하지 않는다. 단지 모터와 배선과 관절부위를 조심스럽게 떼어내고 있다.

"차라리 소년에게 가게. 작은 배를 탄 열 살 조금 넘은 소년이야. 내가 눈이 멀어 소년의 생김새를 보진 못했군. 지금이라도 배를 만들게. 작고 조악해도 상관없어. 그리고 그걸 타고 바다로 나가. 바다에서 거북을 찾아 소년에게 주게. 소년은 고마워할 거야. 거북을 팔아서 병원에 가고, 식품을 살 거야. 소년에겐 우리가 필요해. 하지만 이 섬은 우리의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아."

  형제들은 이제 나의 심장을 떼어내고 있다. 난 형제들에게 소리치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난 이미 언덕의 일부이다. 파도가 날 휩쓸어가길 기다린다.

 

  <당선소감>

 

   나는 왜 글을 쓰는지…그 답을 찾아 계속 쓰게 될 것 같다

  쌀알처럼 흩어지는 눈이 내려오던 날에 당선소식을 전화로 들었습니다. 기뻤습니다. 제가 쓴 글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어서입니다. 물론 상금도 좋고요. 해가 일찍 떨어지고, 눈은 가랑비 반 싸락눈 반으로 변했습니다. 어두운 길에서 잿빛 눈 무더기가 질척거렸지만 계속 기쁜 마음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러나 밤이 조금 더 깊어지자 오래된 질문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나는 왜 글을 쓰는지. 무엇을 얻거나 찾고 싶은지. 오래 전 써두었던 글을 꺼내서 다시 읽을 때도 떠올렸고, 글을 쓰다가 막혔을 때도, 경이로운 작품을 읽었을 때도 떠올렸던 질문입니다. 답은 하얗게 떠오르는 것 같다가도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립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녹아 사라진 것들을 생각하고 또 잊으며 무언가를 쓰게 될 것 같습니다.

  제 글을 좋게 봐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기회를 만들어준 매일신문사에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런 기회를 빌어서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평소엔 쑥스러워서 하지 못하는 말이어서요. 당선 소식을 듣기 며칠 전 제가 넓은 책상 앞에 앉아서 환하게 웃고 있는 꿈을 꾸었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이 기쁨을 모두 나누고 싶습니다.

● 1987년 출생
● 연세대학교 전기전자공학과 졸업
● SK 하이닉스 근무


 

  <심사평>

 

  쓰레기·코로나·인류 멸망…SF로 완성도 높게 풀어냈다

  올해 매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응모한 작품은 총 323편이었다. 심사위원 4명이 예심과 본심을 함께 진행했는데, 예심을 통해 최종 본심에 오른 작품은 '히말라야의 미녀', '마임', '사과가 지는 속도', '대수롭지 않은 일', '조왈도', '파도는 언덕을 쓸어내린다' 이상 여섯 작품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은 무거운 사회 문제를 진지하면서도 어둡지 않게 파고들었고 문장이 깔끔하고 정제되어 있었다. 독특한 전개가 돋보였지만, '대수'라는 존재의 의미가 끝까지 모호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 모호함 때문에 결말이 힘을 잃지 않았을까.

  '사과가 지는 속도'는 옆집의 개와 셰어하우스의 룸메이트를 교차시키며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마음을 열고 조금씩 소통하게 되는가를 보여줬다. 세상과 사물을 차분하게 관찰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착하고 따뜻한 소설이지만 그만큼 평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최종 독회를 통해 '조왈도'와 '파도는 언덕을 쓸어내린다'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조왈도'는 신인이라 볼 수 없는 자연스러운 흐름과 절제된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높은 완성도에 심사위원 모두 감탄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사랑에도 존재하는 빈부격차에 대한 시각이 현재 젊은 세대를 통한 오늘의 새로운 감각으로 재탄생 되었다. 특히 엄청난 필력과 입담이 세련된 풍속도와 현실감, 청량감을 주었다. 좋은 솜씨와 독특한 개성을 가졌으나, 다만 작가가 가진 개성이 너무 뚜렷하여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당선의 선택을 받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말고 작품에 정진하면 빠른 시일 안에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믿는다. 심사위원 모두 심심한 위로와 응원을 동시에 보낸다.

  올해 매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작은 '파도는 언덕을 쓸어내린다'이다. 최종 독회를 마쳤을 때 심사위원 모두의 선택을 받은 유일한 작품이었다. 작품은 SF 소재의 다양성 이상으로 기법의 다양화가 눈에 띄었다. 전체적으로 리얼리즘이 쇠퇴한 한국소설 현장을 그대로 닮았다는 느낌이었다. 알레고리 기법이나 가상현실과의 결합 같은 기법 문제가 억지스러움 없이 발휘되고 있어서 '소설계의 세대교체'의 한복판에 있는 작품이라는데 심사위원들 모두 동의했다.

  주제적으로는 쓰레기, 코로나, 인류 멸망 등의 생태 문제를 크게 부각하고 있는데, 특히 이번 당선작은 SF적 요소, 동화 요소, 생태 담론이 어우러져 굉장히 독특하면서도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었다. 로봇이 주체인 특이한 어법과 소설적 관점이 인상적이었는데, 로봇이 인간보다 더 휴머니티를 지게 되는, 그로 인해 인간사회의 민낯을 되돌아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판타지적인 배경과 소설의 전개가 굉장히 자연스러웠으며 결말에 이르러 도출되는 소설의 주제 또한 선명하게 발현되는 것 또한 장점으로 읽혔다. 작가가 오랜 시간 창작에 매진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축하를 보내며 열심히 써서 좋은 작가로 남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백가흠, 심윤경, 김희선, 박덕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