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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레드볼 / 김혜빈

 

    더미들

  우영은 진이 Jin-E의 오른팔을 마우스로 클릭했다. 깜빡이는 점선이 가느다란 오른팔뿐 아니라 속눈썹, 왼쪽 눈 테두리를 따라 떠올랐다. 우영은 진이가 오른팔을 흔들도록 모션 값을 입력했다. 진이의 속눈썹과 왼쪽 눈이 제자리를 벗어나 얼굴 위를 가로질렀다.
 
  레이어가 합쳐졌네. 우영은 결론을 내렸다. 그건 주형이 퇴사하며 남기고 간 흔적이었다. 우영은 진이의 오른팔을 작업 창에서 삭제했다. 한 파일로 묶여 있던 속눈썹과 왼쪽 눈이 함께 사라졌다. 진이의 얼굴엔 안와의 흔적조차 없었다. 우영은 진이의 으스스한 얼굴을 응시했다. 진이의 쌍꺼풀 없는 오른쪽 눈과 주근깨는 여전히 인상적이었다. 장 대표가 진이의 콘셉트를 옆집에 사는 신비로운 미소녀로 몰아붙인 보람이 있었다. 그래도 우영에게 진이는 지금이나 그때나 사연 많은 러시아 인형처럼 보일 뿐이었다.
 
  우영은 슬랙을 켰다. DM 창에 수십 개의 연락이 쌓였다. 대부분 주형과 일했던 디자인팀 사원이 보낸 메시지였다. 그들은 주형이 어째서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사라진 건지 의아해했다. 특히 주형과 사이가 가까웠던 디자인팀 유 팀장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손도 아니고 어떻게 팔을 눈이랑 합쳐요. 의도가 있는 거지.
 
  우영은 유 팀장의 메시지를 무시했다. 그녀는 대신 박 실장이 보낸 DM을 확인했다. 그는 진이의 오른팔을 살릴 수 있겠느냐고 벌써 두 번째 묻는 중이었다.
 
   ―아뇨,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해요.
 
  우영이 대답했다. 박 실장은 망설임 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미친년.
 
  우영은 가슴이 서늘했다. 박 실장은 보냈던 메시지를 빠르게 지웠다. 그가 다음 말을 입력하는 사이, 옆자리에 앉은 승규가 우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팀장님, 오디션 지원자들 도착했대요.”
 
  우영은 구글 캘린더에 뜬 일정을 확인했다. 오디션까지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승규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중요한 질문도 메신저로 건네는 다른 이들과 달리, 승규는 사소한 일도 꼭 말로 전했다. 그 때문에 승규를 불편해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우영은 그래서 승규가 좋았다.

  오디션은 모션 캡처실에서 이뤄질 예정이었다. 스튜디오는 회사 옆 건물의 망한 카페를 개조해 만든 곳이라 곳곳에 서비스 업장의 흔적이 남았다. 특히 선반 위에 적힌 ‘Be the Real, Be the Dream’이란 문구가 우영의 시선을 끌었다. 그건 장 대표의 지시로 남겨둔 글씨였다. 그는 OSMU를 부르짖는 이쪽 업계 대표들과 마찬가지로 진이를 통해 번듯한 사옥을 짓고 싶어 했다. 장 대표는 그 꿈을 위해서라도 진이라는 IP를 반드시 확장해야 했다.
 
  우영은 오디션장에 가기 전에 먼저 배우 대기실에 들렀다. 대기실은 오디션에 참가하는 배우들로 가득했다. 그 안엔 우영의 팀원들도 다수 있었다. 팀원들은 지원자들의 얼굴 위로 흰 전자 마커를 부착 중이었다. 마커가 자외선에 닿자 흰빛을 발했다. 오디션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자리기도 했지만 그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아카이브 해 진이의 데이터로 쓸 기회기도 했다. 배우들이 제대로 확인했는지는 몰라도, 그들이 서명했을 개인정보 제공 동의란엔 그 같은 사실이 조그맣게 적혀 있었다. 설령 지원자 중 적합한 배우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몸짓은 진이의 피와 살이 될 거였다. 우영은 일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한 뒤 대기실을 벗어났다.
 
  아직 심사위원석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우영은 가장 끝자리에 앉았다. 이번 심사엔 총괄 프로듀서와 박 실장, 각 비주얼 팀의 팀장들까지, 총 여섯 명이 참여했다. 우영은 리깅 애니메이션 팀의 팀장 자격으로 자리했으나 배우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며칠 전 PDF로 전달받았던 평가 항목을 다시 살폈다. 연기의 독창성, 자연스러움, 무엇보다 진이와의 적합성 부분에 배점이 컸다.
 
  우영은 진이와의 적합성이라 적힌 곳을 붉게 표시했다. 장 대표가 자랑했듯, 이곳은 대기업의 자회사이자 앞으로 더 큰 투자금을 받을 3D 영상 제작사였다. 아동용 애니메이션으로 북미에서 큰돈을 벌인 전적도 있었기 때문에, 사내엔 새 프로젝트가 실패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팽배했다. 우영은 그 기대에 부합할 수 있게 자기 이름이 포함된 모든 작업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가볍게 심사하라는 박 실장의 말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오디션 참가자분들 명단입니다.”
 
  일일 스태프가 명단과 함께 평가지를 배부했다. 오늘 오디션에 지원한 이들은 모두 마흔두 명이었다. 예상보다 많은 숫자였다. 우영은 그들의 프로필을 다시 살폈다. 지원자 중엔 아직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인 학생과 재연 전문 배우는 물론, 연기 이력이 전혀 없는 평범한 회사원 역시 있었다. 포트폴리오 속 사진만 보았을 땐 그들 중 누가 진이가 될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얼마 있지 않아 오디션이 시작됐다. 내부 조명이 어두워졌다. 첫 번째 참가자는 몸에 달라붙는 슈트가 낯선 듯했다. 그녀는 총괄 프로듀서의 요구대로 노래를 불렀다. 헤드캡에 연결된 작은 카메라가 여자의 표정을 실시간으로 담았다.
 
  우영은 그녀의 어깨와 팔, 팔꿈치, 손목으로 이어지는 선에 주목했다. 뼈를 따라 자리한 마커들 덕분에 여자의 움직임이 도드라졌다. 노래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르자 그녀는 두 손을 모아 가슴 위에 얹었다. 딱딱한 걸음걸이를 잊을 만큼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이었다. 총괄 프로듀서는 만족한 눈치였다. 그는 심사위원석에서 일어나 뷰파인더 앞으로 다가갔다.
 
  이어 두 번째 참가자가 카메라 앞에 섰다. 여자는 분홍 머리칼이 인상적인 학생이었다. 깡마른 몸이 탄탄한 슈트에 감싸여 더욱 왜소해 보였다. 여자는 체조 선수 출신답게 높이뛰기를 선보였다. 우영은 그녀의 가벼운 몸이 허공으로 떠오를 때마다 속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움직임에 집중하느라 표정에 기교가 없었다. 우영은 여자 위로 진이의 얼굴을 덧씌웠다. 퍼포먼스 자체는 어울릴지 몰라도, 안면 캡처에서 단점이 드러날 듯했다.
 
  우영은 여자와 진이의 적합성 부분에 낮은 점수를 매겼다. 그래도 진이는 벌써 노래하고, 체조 선수처럼 높이 뛸 수 있게 됐다. 여러 사람의 데이터가 쌓이면 쌓일수록 진이의 움직임은 몰라보게 매끄러워질 거였다.
 
  우영은 오디션이 진행될수록 긴장을 풀었다. 그녀는 마음에 들었던 참가자들의 번호를 따로 기록했다. 3번은 움직임이 자연스러웠고, 8번은 표정 연기가 좋았다. 14번은 다른 부분은 별로였지만 진이와 이미지가 적합했다. 마술이나 저글링 같은 특이한 동작을 한 이들에겐 잊지 않고 추가 점수를 줬다. 진이에게 막 스무 명의 재능이 쌓일 즘이었다.
 
  22번의 차례가 왔다. 우영은 22번이 카메라 앞에 서자 그녀의 지원서를 확인했다. 22번에겐 주목할 만한 이력이 없었다. 잠깐 연극영화과를 다니긴 했지만 2년 정도 다니다가 중퇴했다. 대학명은 적혀 있지 않았다. 내세울 만한 연기 경력도 없다. 그나마 이색적인 지점이 있다면, 자퇴 후 아프리카에서 1년간 거주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단 점이었다.
 
  22번은 자기소개서에 동물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오갔으며, 그중에서도 아프리카와 일본에 오래 머물렀다고 적었다. 우영은 아프리카와 일본의 어떤 점이 그녀를 사로잡았는지 궁금했다. 일본은 주형이 오래 머물렀던 나라기도 했다. 22번이 간단히 인사하자 박 실장은 그녀에게 불쑥 질문했다.
 
“아프리카 어디 있었던 거예요?”
 
“여기저기요. 오릭스를 보려고 갔어요.”
 
  대답은 그게 전부였다. 박 실장은 그녀에게 춤을 부탁했다. 22번의 춤 실력은 형편없었다. 심사위원들이 짜맞추기라도 한 듯 평가지에 무언가 적었다. 박 실장은 웃음을 참았다. 우영은 웃지 않았다. 22번은 어디로 보나 눈에 띌 만큼의 미인은 아니었다. 머리칼을 한데 모아 가지런히 묶었지만 거친 머릿결 때문인지 단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영은 22번의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22번이 춤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22번은 뒤이어 오디션장을 횡으로 가로질렀다. 어찌나 소리 없이 걷는지 귀를 기울여야 그녀의 발소리를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우영이 주목한 건 그 발소리였다. 22번은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하게 걸었다. 하지만 여태 봤던 그 어떤 참가자보다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정말 사람이 걷는 것처럼 걸었다. 모든 동작을 마친 22번이 마지막 인사를 하려던 때였다. 우영은 오디션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보시겠어요?”
 
  박 실장이 우영을 바라봤다. 22번은 의자 등받이를 한 손으로 잡더니 그 위에 편안히 앉았다. 마치 자기 방에 있는 의자에 앉듯이. 우영은 22번이 왜 다른 참가자들보다 눈에 띄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마치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굴었다. 22번은 타인이 있는 곳에서라면 응당 느껴야 할 긴장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총괄 프로듀서가 22번에게 수고했단 인사를 건넸다. 22번은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모션 캡처실을 벗어났다. 우영은 그녀의 이름을 확인했다.
이수희. 그게 22번의 이름이었다.

* * *

  우영이 모든 심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땐, 이미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다. 그녀는 약속을 핑계로 회식을 권하는 이들을 피했다. 짐을 챙기고 서둘러 사무실을 벗어나려는데, 아직 퇴근하지 않은 승규가 눈에 들어왔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승규가 안경을 벗으며 우영에게 아는 척했다.
 
“팀장님, 이것 좀 같이 봐주실래요?”
 
  우영은 피로했지만 승규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편히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할 때 적절히 의지하는 승규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우영 역시 이수희에 관해 이야기할 상대가 필요했다. 그녀는 승규의 모니터를 살폈다. 화면엔 눈과 입이 없는 회색 더미가 카페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빨대가 자꾸 깨져서 음료를 못 마셔요.”
 
  승규가 작업해둔 ‘drink’ 버튼을 눌렀다. 더미가 빨대를 이용해 음료를 마셨다. 우영은 더미의 턱 아래로 빨대가 튀어나오는 단순한 오류일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더미가 음료를 마시는 순간 빨대가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깨졌다. 부서진 빨대 파편은 더미의 턱을 뚫고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다. 우영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혓바닥이 껄끄러웠다. 승규는 몇 번 더 ‘drink’ 버튼을 눌렀다. 우영으로서도 알 수 없는 오류였다. 그녀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꺼냈다.
 
“프로그램 이슈 같네.”
 
  그녀는 프로젝트를 저장한 뒤 프로그램 자체를 재부팅했다. 하지만 빨대는 여전히 조각났다. 승규가 조심스레 추측했다.
 
“이것도 주형 씨 짓일까요? 더미 작업도 가끔 하셨던데.”
 
  우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회사는 언제나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렸다. 우영 역시 리깅 업무만이 아니라 잡무를 떠맡을 때가 많았다. 주형도 디자이너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자주 껴안았다.
 
“주형 씨가 한 거 아냐.”
 
  우영이 말했다. 승규가 멋쩍게 웃었다. 우영은 그에게 어서 퇴근하라고 조언했다. 그 뒤 짐을 싸 승규보다 먼저 회사를 나왔다. 우영은 역 앞 편의점에서 맥주를 네 캔 샀다. 그중엔 주형이 좋아하던 블루문도 두 캔 있었다. 우영은 블루문을 한 캔 땄다.
 
  처음부터 맥주를 좋아한 건 아니었는데. 우영은 주형이 회사를 관두기 전, 주말마다 주형의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때를 떠올렸다. 두 사람은 고된 작업에 질려 애니메이션보다 실사 영화를 자주 시청했다.
그날 우영은 주형의 낡은 소파에 앉아 ‘데스 프루프’를 보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한참 토를 하다 나온 주형은 우영의 어깨에 힘없이 머리를 기댔다. 화면에선 킴과 조, 애비 세 여자가 닷지 챌린저 440을 타고 도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사이코패스 스턴트맨 마이크가 그녀들이 탄 차를 뒤에서 들이받았다. 주형은 영화를 보다 말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 옥수수 냄새가 나.”
 
  우영은 티셔츠를 올려 냄새를 맡았다.
 
“아무 냄새 안 나.”
 
“아냐, 나.”
 
  어두운 방에서 주형과 우영의 시선이 교차했다. 우영은 몸을 움츠렸다. 겨드랑이 사이로 땀이 찼다. 우영은 주형에게 아무래도 땀 냄새 같다고 말했다. 주형의 눈에 웃음기가 어렸다. 화면 속에서 마이크가 킴의 차를 매섭게 들이받았다. 마이크는 쾌활하게 웃었다. 세 여자가 탄 흰색 닷지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멈춰 섰다. 킴이 차에서 내려 마이크에게 총을 두 발 쐈다. 마이크는 유유히 도로 저편으로 멀어졌다.
 
  주형이 우영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주형은 역시 옥수수 향이야 하고 중얼거렸다. 우영의 손등이 주형의 허벅지에 닿았다. 등장 내내 공포에 질려 있던 애비가 때마침 눈물을 흘렸다. 킴은 마이크에게 복수하러 갈 테니 애비에게 이곳에 남아 있으라고 권했다. 하지만 애비는 눈물을 닦았다.
 
  웃기지 마. 그 남자, 죽여버릴 거야.
 
  주형의 몸이 우영의 몸 위로 겹쳤다. 그들의 섹스는 새벽이 깊기 전에 끝났다. 주형은 그로부터 며칠 뒤 퇴사했다. 우영은 주형이 떠난 당일, 그 사실을 박 실장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 * *
 
  오디션 날로부터 사흘 뒤 여름 장마가 시작됐다. 사무실 중앙에 난 큰 창으로 빗줄기가 들이쳤다. 우영은 점심시간 이후, 총괄 프로듀서로부터 오디션 결과를 통보받았다. 예상했지만 이수희는 캐스팅 후보에도 거론되지 않았다. 적당히 예쁘고 춤 잘 추는, 대표가 원했던 청순한 이미지의 32번 참가자가 진이를 연기할 배우로 최종 낙점됐다.
 
  32번에겐 소속사도 있었다. 캐스팅 결과는 곧 전 사원이 볼 수 있는 공개 채널에 올라왔다. 박 실장이 32번의 오디션 영상을 업로드했다. 사람들은 32번을 어디서 봤는지, 봤다면 어떤 CF였는지 물었다. 직원들은 들떠 있었다.
 
  32번은 우영이 호감을 느끼지 못했던 참가자였다. 우영은 자신으로서는 알지 못하는 매력이 32번에게 있었나 보다고 여겼다. 그녀는 박 실장이 올린 영상을 내려받았다. 32번의 활달한 표정은 진이의 이미지와 제법 잘 어울렸다. 무엇보다 춤추는 모습이 쾌활했다. 우영은 32번의 영상을 3D 툴에 불러냈다. 그 뒤 32번의 얼굴 위로 진이의 얼굴을 덧씌웠다. 주형 때문에 없어진 파츠는 더미의 신체로 대체했다. 우영은 추출한 영상을 재생했다. 진이는 32번처럼 웃고, 32번처럼 춤췄다. 그 영상을 보고 나니 32번의 춤이 처음처럼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영은 진이가 춤추는 영상을 팀원들에게 공유했다. 예상보다 많은 이들이 우영의 글에 이모지를 찍고, 댓글을 달았다. 그들은 진이의 불완전한 얼굴도 기꺼워했다. 유 팀장이 우영에게 DM을 보냈다.
 
  ―진이 속눈썹이랑 왼쪽 눈 1차 작업 완료했어요.
 
  우영은 #Design이라 적힌 채널에 접속했다. 그곳에 올라온 PSD 파일을 열자 오른쪽 속눈썹과 왼쪽 속눈썹, 반짝이는 왼쪽 눈이 차례로 떠올랐다. 우영은 그 부위들을 조금 전 작업하던 프로젝트에 불러냈다. 속눈썹과 왼쪽 눈을 새 파일로 갈아 끼웠다. 어색하던 진이의 얼굴이 그럴듯해졌다. 우영은 ‘blink’ 버튼을 눌렀다. 주근깨 소녀 진이가 얌전히 눈을 깜빡였다. 숨을 쉬며 몸을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이 누군가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했다. 우영은 진이의 얼굴을 응시했다. 신비롭지만 마음을 잘 열고, 먼 것 같지만 어린 시절 친구처럼 가깝다. 장 대표가 요구했던 복합적인 이미지가 진이에게서 흘러나왔다.
 
  문제는 눈이었다. 우영은 모니터 밝기를 올렸다. 그녀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우영은 승규의 어깨를 두드렸다.
 
“승규 씨, 이것 좀 봐요. 진이 오른쪽 눈이랑 왼쪽 눈, 다르지 않아요?”
 
  승규가 쓰고 있던 헤드폰을 벗었다. 그는 우영의 옆에 붙어 앉았다. 진이를 한참 들여다보던 그가 조심스레 의견을 전했다.
 
“제가 보기엔 똑같은데요.”
 
  우영은 한 번 더 뭔가 이상하지 않냐고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승규는 주형에 관해 이야기했던 날 이후, 우영을 더 깍듯이 대하기 시작했다. 한 번 더 물었다간 아무래도 그런 듯하다고 소심히 동의할 게 뻔했다.
 
  우영은 진이를 응시했다. 허리까지 오는 긴 검정 머리칼과 고양이 같은 두 눈이 보는 이의 시선을 단숨에 빼앗았다. 하지만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의 부조화가 거슬렸다. 버추얼 휴먼은 자연스러움이 중요하기에 원래도 각각의 신체 부위를 완벽하게 대칭으로 만들진 않는다. 하지만 의도된 비대칭과는 결이 다른 이질감이 진이의 얼굴에 뚜렷이 드러났다.
 
  우영은 이미지 크기를 키워 주형이 작업했던 진이의 오른쪽 눈과 새로 작업한 왼쪽 눈을 비교했다. 눈꺼풀의 두께, 눈꼬리의 곡선, 동공 색깔 등 눈에 띄는 차이는 크지 않았다. 모든 게 의도한 범위 안이었다. 우영은 결국 유 팀장에게 DM을 보냈다.
 
  ―유 팀장님. 진이 양쪽 눈이 너무 다른 거 같은데요.
 
  그러나 30분을 기다려도 유 팀장에게선 답변이 오지 않았다. 우영은 유 팀장과 나눴던 대화 내용을 되돌아봤다. 우영 역시 며칠 전 주형에 대한 험담에 대답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건 사적인 일이었다.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업무 관련 질문을 감정적인 문제와 같은 선상에 둘 순 없었다.
 
  우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유 팀장이 앉아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그녀를 포함한 디자인팀 모두가 자리에 없었다. 우영은 회의실을 살폈다. 유 팀장은 박 실장과 함께 주간 회의 중이었다. 우영은 자리에 돌아왔다. 유 팀장의 답변이 도착했다.
 
  ―디벨롭 중이래요. 며칠만 기다려주세요.

* * *
 
  진이를 연기할 32번은 나현이란 이름을 가진 어린 배우였다. 그녀는 유명 연예인들을 배출한 공연예술과를 졸업한 후 대기업 CF부터 공익광고까지 다양한 곳에 출연했다. 하지만 많은 배우 지망생이 그렇듯, 높지 않은 인지도로 인해 제대로 된 배역을 맡지 못했다. 우영은 그 모든 사실을 32번과 부쩍 친해진 박 실장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우영은 진이의 첫 번째 티저 촬영을 위해 이른 시간에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박 실장은 자기가 테스트 결과물까지는 잘 만들어냈으니, 이후 이슈가 일어나지 않게 우영을 비롯한 모두가 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영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 있던 총괄 프로듀서는 박 실장의 밥그릇 싸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총괄 직함을 달고 있는 사람답게 대부분의 공을 차지할 거였다.
 
  우영은 박 실장을 피해 2K 조명기 아래에 섰다. 흰 조명이 벽에 반사돼 은은한 빛을 주위에 뿌렸다. 32번은 10초짜리 티저 촬영을 위해 1시간 전부터 대기 중이었다. 날이 날이니만큼 장 대표도 얼굴을 비쳤다. 32번은 장 대표의 사업 비전을 강제로 경청했다.
 
“잘 되면 이나현이라는 이름 석 자가 사람들한테 알려지는 거예요. 아바타의 실제 주인공이 누구인지 사람들이 얼마나 궁금해했어. 이제 봐, 그 사람들은 스타야.”
 
  그는 아바타 촬영 현장엔 감독의 상상력을 뒷받침해줄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있었으며, 이모션 퍼포먼스 캡처라는 새로운 기술이 적용됐단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배우들은 아바타 촬영 전에도 유명했다. 우영은 사람들이 잘된 드라마의 OST 가수를 궁금해하지 않듯, 진이가 스타가 되더라도 그 뒤에 어떤 배우가 있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으리라고 예측했다.
 
  곧 촬영이 시작됐다. 32번은 블루 스크린을 배경으로 모델처럼 걸었다. 총괄 프로듀서는 32번이 감을 잡지 못할 때마다 그녀가 진이의 대역으로 자리한 게 아니라, 진이 그 자체라고 못 박았다.
 
“감정을 살려서 웃어요. 그래야 화면에 잘 나오지.”
 
  32번은 입꼬리가 떨릴 정도로 웃었다. 이상한 미소였다. 현장 편집 일을 맡은 애니메이터가 32번의 얼굴 위로 진이의 얼굴을 덧씌웠다. 32번의 기이한 미소가 진이에게 전염됐다. 우영은 총괄 프로듀서에게 마커 위치를 재조정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나현 씨가 눈을 휘면서 웃어서요. 마커를 광대 쪽으로 더 올릴게요.”
 
  총괄 프로듀서는 스태프들에게 휴식을 알렸다. 우영은 32번의 눈꼬리 주위로 마커를 옮겼다. 32번의 이마는 뜨거웠다. 우영은 매섭게 돌아가는 에어컨을 살폈다.
 
“온도 좀 내려줄까요?”
 
 “아뇨, 괜찮아요.”
 
  32번은 지친 듯 웃었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영상보다 앳돼 보였다. 우영은 잠시나마 동정심을 느꼈다. 우영은 32번 이나현에게 이 일이 재밌냐고 물었다. 나현은 우영이 회사 관계자란 사실을 상기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우영은 마커 위치를 정비한 뒤 조명기 아래로 돌아갔다. 나현은 조금 기운을 차렸다. 그녀는 다시 지정된 위치로 가 걷고, 웃었다.
 
  그를 지켜보던 우영은 나현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네 얼굴은 진이의 후광에 가려질 테지. 오른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는 네 특유의 미소도, 네 걸음걸이도 이제 진이 거야.
 
  하지만 그래서 좋은 거잖아?
 
  주형이라면 그렇게 말했을 거다. 우영은 나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주형은 언제나 장막 너머의 삶, 연극으로 치자면 무대를 동경했다. 연기에 흥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주형은 살과 살을 맞대는 현실보다 이야기에, 만들어진 가상 세계에 흥미가 많았다. 잘 다니던 유명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3D 영상 업체에 이직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내가 얼마 전에 유튜브 영상을 하나 봤어.”
 
  올해 초, 함께 술을 마시기 위해 만났던 자리에서 주형은 머리끝까지 취해 있었다. 주형은 그 영상에서 플라톤의 동굴 비유를 오랜만에 봤다며 횡설수설했다.
 
  우영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주형의 이야기에 크게 관심 없었다. 단지 주형이 평소와 달리 와인을 연거푸 마셔서 괴로웠다. 우영은 와인보다 맥주가 그리웠다. 하지만 우영은 주형을 위해 내키지 않은 와인을 한 병 더 시켰다. 그러는 동안에도 주형은 동굴에 포박된 노예들에 대해 떠들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그림자가 진짜 세상이면 안 될 이유가 뭐야? 안 그래?”
 
“그건 플라톤이 말하려던 게 아니야.”
 
  우영은 나도 잘 모르지만, 하고 덧붙였다. 그녀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의 주형은 재미없었다. 우영이 현학적인 이야기를 피해 도망치려던 순간, 주형이 손을 뻗어 우영을 붙잡았다. 주형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안색이 창백했다.
 
“생각해봐. 해방된 노예들이 처음 뒤돌았을 때, 거기에 정말 동굴 입구가 있었을까? 이미 풀려난 다른 사람이 붙잡혀 있는 이들을 위해 그림자를 만들어주고 있었던 거면?”
 
  서버가 우영을 살짝 밀며 지나쳤다. 그는 죄송하다고 말했다. 우영은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의 음성이 거슬렸다. 우영은 화장실에 가는 대신 주형에게 겉옷을 입혔다. 그녀는 주형과 함께 술집을 빠져나왔다. 아직 덜 녹은 눈이 밑창 아래로 밟혔다. 바람이 차가웠다. 주형은 우영의 품에서 중얼거렸다.
 
“그 사람들한텐 출구도, 해도 없을 거야.”
 
  우영은 그날 새벽, 주형이 가족들과 오랜 시간 보지 못했단 사실을 전해 들었다. 주형은 그 이유를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 남동생 모두 살아 있었지만 주형은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러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주형은 카카오톡 프로필이나 SNS 계정을 통해 가족들의 삶을 이따금 훔쳐봤다.
 
  우영은 주형에게 가족들을 만나러 가겠냐고 물었다. 하지만 주형은 지금 보는 것 이상의 세상은 궁금하지 않다고 단언했다.


더블

 
  나현의 첫 티저 촬영이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장 대표는 이후 가벼운 회식 자리를 주최했다. 그는 최근 120억 원에 가까운 금액을 투자사로부터 받아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장 대표가 건배를 외치자 직원들이 하나둘 잔을 쥐었다. 우영은 잔을 건성으로 들었다가 내려놨다. 그녀는 오늘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진이가 세상에 공개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처리해야 할 잔업이 산더미였다. 디자인팀이 보완한 진이의 파츠들은 이제 완전히 제자리를 잡았다. 물론 우영이 보기엔 그 파츠들 역시 주형이 그린 것과 묘하게 느낌이 달랐지만, 이제는 그 불균형이 진이의 매력으로 다가왔다. 옆자리에 있던 VFX팀 직원이 우영의 컵에 생수를 따랐다.
 
“들었어요? 사장이 주형 씨 고소 준비 중이래요.”
 
  그는 주형과 우영이 한때 친한 사이였단 걸 아는 눈치였다. 우영은 그의 바람처럼 고소라는 단어에 동요하지 않았다. 법원을 오가는 건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인데다가, 장 대표는 이야기를 부풀려 전하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주형의 실수 때문에 작업 시간이 더 소요된 건 사실이었다. 진이의 티저 공개일도 한 달 늦춰졌다. 하지만 회사 소유의 파일을 삭제하고 간 것도 아닌데 고소가 성립할 리 만무했다. 우영은 주형이 괴로워질 수 있다면, 장 대표에게 주형을 고소해보라고 누구보다 먼저 부추겼을 것이다. 우영에게서 만족스러운 반응이 나오지 않자 그는 주형의 근황을 물었다.
 
“요새도 주형 씨랑 연락해요? 다른 회사에서 레퍼 체크한다고 전화 왔었다는데. 이직 준비하나 봐요?”
 
“저도 소식 끊겨서 몰라요.”
 
  우영은 그의 궁금증을 일축했다. 주형이 복권에 당첨된 게 아닌 이상 다른 회사에 입사하는 건 당연했다. 우영은 주형이 어떤 회사에 지원했는지 궁금했다. 이번에도 영상 회사일까? 그곳은 뭘 만드는 곳일까? 그곳 일은 주형이 만족할 만큼 현실과 유리돼 있을까?
 
  우영은 술잔을 들었다. 주형과 주말에 술을 마시던 때처럼. 킴과 조, 애비가 사이코 마이크를 잡아 죽였을 때처럼, 끊임없이 술을 따랐다.

* * *

 
  며칠 뒤 회사에선 각 팀 헤드들의 비상 회의가 소집됐다. 장 대표는 대회의실 상석에 앉아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전날 이뤄진 티저 시사회 이후, 장 대표를 비롯한 C 레벨들은 총괄 프로듀서를 데려다가 오랜 시간 면담했다. 진이의 외관이나 영상 퀄리티는 나무랄 데 없었다. 쟁점은 진이가 진짜 사람처럼 느껴지냐였다. 장 대표에게 진이는 잘 가공된 애니메이션 캐릭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문제가 뭐라고 생각해요?”
 
  장 대표가 물었다. 회의실 전면에 붙은 스크린 위로 10초짜리 티저가 무한 반복됐다. 페이셜 트래킹에 특별히 신경 썼기 때문에 표정 문제는 아니었다. 조명 연출을 담당하고 있는 파트장이 빛을 눌러 양감을 죽이면 3D 애니메이션 특유의 느낌이 사라져 좀 더 자연스러워 보일 거라고 의견을 내놨다. 장 대표가 다른 사람들을 둘러봤다.
 
“또?”
 
  팀장들이 돌아가며 의견을 보탰다. 그들 대부분이 각자 맡은 부분을 최대한 화려하지 않게 바꿔보겠다고 했다. 장 대표는 볼거리가 모두 사라지면 티저를 누가 보겠냐고 되물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곧이어 우영의 차례가 왔다.
 
“배우를 한 명 더 써보는 건 어떨까요?”
 
  장 대표는 누구를? 하고 눈으로 물었다. 우영은 22번 이수희 참가자의 오디션 파일을 찾아 스크린에 띄워달라고 요청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영상 속 수희에게로 쏠렸다. 수희가 부드럽게 오디션장을 가로질렀다. 우영은 의견을 피력했다.
 
“오디션 날 봤던 배우 중 가장 몸을 잘 썼어요. 페이스 값은 나현 씨 걸 쓰고, 모션은 수희 씨 걸 쓰면 진이의 움직임도 훨씬 자연스러워질 거예요.”
 
  마침 나현과 수희는 신체적 조건도 비슷했다. 장 대표는 수희가 의자에 앉는 모습에 집중했다. 그는 무작위로 다른 참가자들의 영상을 틀어 수희와 비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만 꼭 다큐멘터리 보는 거 같네.”
 
  그게 수희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장 대표는 우영의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총괄 프로듀서에게 물었다. 그는 나현과 수희가 합만 잘 맞춘다면 안 될 건 없다고 답변했다. 박 실장은 할 말이 많은 듯했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장 대표는 후반 작업을 다시 하는 일이 있어도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티저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게 120억 원 투자는 시작일 뿐이었다. 장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간은 충분히 늘려줬으니, 투자사 발표 날까지 결과물을 보여주세요.”
 
  장 대표가 수고했단 인사를 먼저 건넸다. 우영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책상 앞으로 돌아가 수희의 영상을 다시 확인했다. 수희의 춤 실력은 여전히 끔찍했다. 하지만 이따금 보이는 은은한 미소와 편안한 몸짓이 시선을 끌었다. 승규가 우영에게 DM을 보냈다.
 
  ―이야기 들었어요. 촬영 처음부터 다시 한다면서요?
 
  우영은 그렇다고 답장을 보냈다. 사무실 안 공기가 불편했다. 팀원들의 생각은 훤했다. 귀찮게 일 벌이네. 우영은 딱히 직업의식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닌 걸 맞다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조용히 넘기면 안 돼요?
 
  우영이 회사 일을 어렵게 만들 때마다 박 실장은 우영을 설득했다. 우영은 그때마다 헛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그냥 넘기지. 잘못된 걸 알면서. 가만히 있으라고, 그러면 해결된다고. 하지만 우영은 이미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여러 차례 이직한 상태였다. 이곳이 벌써 네 번째 회사였다. 우영으로서도 더 이상의 이동은 힘들었다. 어느 날 박 실장이 딴지 걸지 말라고 나무랐을 때, 우영은 그에게 처음으로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고 말했다. 박 실장은 형식적으로라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그 순간 우영은 진짜 죄인이었다.

  다음 날 오전, 우영은 출근과 동시에 낯선 문자를 받았다.
 
  ―사무실 앞에 도착했어요.
 
  짧은 문자 뒤엔 이수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우영은 처음에 담당자가 연락처를 잘못 알려줬나 보다고 생각했다. 몇 분 뒤 박 실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오늘 프로덕션팀이 바쁘다며, 우영의 번호를 수희에게 건넸다고 설명했다.
 
“오늘 오전 업무는 천천히 처리해도 돼. 촬영장 안내 좀 부탁할게.”
 
  우영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팀장이었지만 실무도 병행하고 있는 직원이었다. 오전 업무를 쉬엄쉬엄하면 오후가 편하지 않았다. 우영은 오랜만에 귀찮은 일을 벌인 죄로 박 실장에게 보복당하는 건 아닌가 의심했다.
 
  우영은 하는 수 없이 회사 밖으로 나갔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거리엔 뙤약볕이 내리쬈다. 수희가 우영을 알아보고 먼저 다가왔다. 수희는 우영의 기억보다 훨씬 키가 컸다. 우영은 수희에게 오시는 길은 어땠냐고 물었다. 그건 우영이 회사 외부인을 응대할 때 하는 형식적인 질문이었다. 수희가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원래 그런 걸 물으세요?”
 
“그런 거라뇨?”
 
“제가 오는 길이 어땠는지, 별로 안 궁금해하시는 거 같아서요.”
 
  우영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수희는 우영이 안내하기도 전에 모션 캡처실을 알아서 찾아갔다. 스튜디오 안은 서늘했다. 프로덕션팀 사람들은 테스트 촬영 준비를 거의 마친 상태였다. 박 실장이 우영을 보지도 않은 채 손짓했다.
 
“수고했어요. 촬영 좀 보다가 들어가면 되겠네.”
 
  우영은 하는 수 없이 조명기 아래에 섰다. 나현을 보던 때와 같았다. 수희가 준비를 마치고 카메라 앞에 나타났다. 우스꽝스러운 슈트 위로 흰 마커가 빼곡했다. 수희는 나현이 그랬듯, 마킹 테이프 위치를 확인한 뒤 카메라를 향해 걸었다. 우영은 수희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다시 보아도 나긋나긋한 걸음걸이였다. 우영은 수희의 자기소개서를 떠올렸다. 오릭스를 보러 아프리카에 갔다고 했나. 우영은 핸드폰을 꺼내 오릭스를 검색했다. 기다란 얼굴 위에 그려진 줄무늬가 인상적인 동물이었다. 오릭스의 머리 위로는 30cm 넘게 자란 곧은 뿔이 달려 있었다. 수희가 아프리카에 산 덕에 그런 독특한 움직임을 갖게 된 걸까? 하지만 수희의 걸음걸이는 초식 동물과 닮지 않았다. 본 적은 없지만, 아주 순수한 사람. 날 때부터 성인의 육체를 타고난 사람이, 감정이나 본능을 배제한 채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다면. 그때 수희처럼 걸을 것이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 아무런 기대도 없이.
 
  우영은 수희의 이름을 구글에 검색했다. 수희가 자그마한 극단에라도 소속돼 있지 않은 게 이상했다. 그녀는 수희의 과거 행적을 좇았다. 수희의 삶엔 이상할 만큼 노력한 흔적이 없었다. 대학도 중퇴, 타지살이 기간도 내세울 수 있을 만큼 길지 않다. 하지만 그 때문에 주눅 들지도 않았다. 수희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이들의 정보가 3, 4페이지까지 이어졌다. 우영은 페이지를 성의 없이 넘긴 끝에, 수희와 오릭스를 함께 검색했다. 한 유튜브 채널이 드디어 검색 목록에 떴다.
 
  우영은 채널 링크를 클릭했다. 2suhee. 그게 채널명이었다. 구독자는 열셋. 우영은 동영상 탭을 눌렀다. 올라와 있는 영상은 모두 세 개였다. 용케 열셋이나 되는 구독자를 모았구나 싶었다. 우영은 가장 처음 업로드된 영상을 확인했다. 첫 번째 영상 제목은 <오릭스>였다. 하지만 영상엔 오릭스가 아닌 황야만이 나왔다. 영상이 끝나갈 즘, 카메라가 수평선 쪽을 확대했다. 그곳엔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형체들이 무리 지어 서 있었다. 어떤 동물인지는 알아보기 어려웠다. 우영은 흥미가 식었다. 그녀는 수희가 그나마 최근에 올린, 2년 전 영상을 클릭했다. 제목은 ‘니가타에서 슈가와’였다.
 
  영상 속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우영은 그녀가 수희란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지금보다 피부는 탔고, 머리가 짧았다. 영상 속 배경은 마구간이었다. 수희는 가장 가까이 서 있는 말을 가리켜 슈가라고 불렀다. 번호가 적힌 화려한 천을 등에 건 걸로 보아 경주마인 듯했다. 수희 옆엔 일본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도 함께였다. 그는 폭이 좁고 긴 칼을 들고 수희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했다. 수희는 마치 동의를 구하듯 카메라 쪽을 돌아봤다. 화면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우영은 핸드폰 소리를 키웠다. 누가 찍어준 거지?
 
  수희는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남자에게서 칼을 건네받았다. 카메라가 말과 가까워졌다. 말은 경주를 막 끝낸 건지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수희는 말의 허벅지를 매만졌다. 그곳은 이상할 정도로 혈관이 부풀어 있었다.
 
“한다.”
 
  수희가 말했다. 칼끝이 말의 허벅지로 향했다. 수희가 댓잎 같은 칼로 말의 허벅지를 찔렀다. 혈관에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말이 꼬리를 흔들었다. 중년 남자가 말의 등을 두드렸다. 우영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수희는 작게 웃었다.
 
  우영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수희를 응시했다. 테스트 촬영이 끝난 건지, 프로덕션팀이 장비를 정리했다. 수희는 박 실장과 이야기 중이었다. 우영은 영상 속 수희와 눈앞의 수희를 구분 짓기 어려웠다.
 
  우영은 박 실장에게 다시 붙잡히기 전 스튜디오를 벗어났다. 시간을 허비한 만큼, 점심시간을 포기하고 일해야 했다.

* * *
 
  총괄 프로듀서는 수희의 테스트 촬영물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는 우영을 따로 불러 어떻게 수희가 그런 배우인지 알아봤냐고 물었다.
 
  “그런 배우라뇨?”
 
  “그런 거 있잖아. 독특한 거.”
 
  그는 진이가 잘되기 전에, 수희가 유명해질 수도 있다고 봤다. 수희가 진이 덕을 보는 게 아니라, 진이가 수희 덕을 볼 거란 이야기였다. 그는 원래 영화 제작사에서 장시간 구르다가 장 대표의 설득에 못 이겨 회사에 온 케이스였다. 프로듀서 쪽에선 잔뼈가 굵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안목을 신기해하다니. 우영은 내심 기뻤다.
 
“그냥 꾸밈없어서 좋았어요.”
 
  총괄 프로듀서는 우영의 대답을 흘려들었다. 그는 이번에 장 대표를 설득해서 추가로 장비를 샀으니, 리깅 파트에서 힘써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산 장비 중엔 우영이 요구했던 액티브 마커도 있었다. 우영은 반색했다. 일반 전자 마커는 모션 캡처 시 대상에게 구분점을 심을 수 없었다. 배우가 몸을 크게 굽히거나, 갑자기 돌아서면 카메라가 지금 보고 있는 곳이 가슴인지 등인지 인식하지 못해 움직임이 꼬였다.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입증하듯, 열흘 뒤 회사에 액티브 마커가 도착했다. 프로덕션팀 팀장이 승규를 불러 배우 대역을 청했다. 승규는 친한 형처럼 따르는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팀장님, 잠시 다녀올게요.”
 
“나도 같이 가. 장비 좀 구경하게.”
 
  승규는 우영이 선뜻 따라나서자 놀란 눈치였다. 우영은 스튜디오에 도착해 밴드에 연결된 액티브 마커를 꼼꼼히 확인했다. 스티커 같은 형태의 전자 마커와 달리 액티브 마커는 크리스마스트리에 쓸 것 같은 둥근 전구 모양이었다. 몸의 오른쪽과 왼쪽을 구분하기 위해 마커의 색깔 역시 달랐다. 우반신엔 흰색 구체가, 좌반신엔 붉은색 구체가 자리했다. 승규가 마커가 붙은 밴드를 조끼처럼 착용했다. 회색 더미가 실시간 모니터에 떠올랐다. 승규가 오른손을 들었다. 모니터 속 더미도 함께 움직였다. 반응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다. 우영은 모니터 속 승규를 새삼 신기하게 바라봤다. 승규가 우영에게 물었다.
 
“팀장님도 한번 해보실래요?”
 
  우영은 프로덕션 팀장의 눈치를 봤다. 그는 안 될 거 있겠냐며 우영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우영은 승규의 도움으로 슈트를 착용했다. 그녀는 마음이 들떴다. 슈트를 직접 입은 건 처음이었다. 학생 때엔 장비가 귀했고, 이후엔 실무를 하느라 현장에 참여할 일이 없었다. 승규는 우영이 자기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모니터를 돌렸다. 우영은 모니터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모니터 속 더미도 같이 손을 들었다. 거울을 보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우영이 더미를 따라 했다. 더미도 우영을 따라 했다. 승규가 우영에게 장난스레 말했다.
 
“테스트 촬영이라 생각하고 걸어봐요.”
 
  우영은 수희를 떠올리며 걸었다. 카메라가 우영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우영은 몇 차례 스튜디오 안을 거닐다가 슈트를 벗었다. 마치 뱀의 허물처럼, 더미의 신체가 무너졌다. 우영은 매번 보던 그 광경이 오늘따라 기이하게 느껴졌다. 우영은 승규와 프로덕션 팀장에게 인사했다. 승규는 이전처럼 살갑게 웃었다.
 
  박 실장은 나현과 수희의 첫 촬영을 앞두고 촬영 계획표와 콘티를 각 부서 팀원들에게 배부했다. 티저를 새로 찍게 된 만큼, 첫 촬영 때보다 준비가 철저했다. 다만 우영이 처음 제시했던 것처럼 나현과 수희를 동시에 찍기엔 장비가 충분하지 않았다. 박 실장은 바뀐 촬영 방법을 브리핑했다. 나현이 먼저 동작을 보여주면 그걸 수희가 보고 똑같이 재현한다. 방식은 간단했다.
 
“컷 오케이 날 때마다 진이 얼굴 씌워서 바로 총괄님한테 보여줘요.”
 
  박 실장이 말했다. 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박 실장의 요구에 따라 영상이 찍힌 즉시 현장에서 기초 모델링을 마쳐야 했다. 원래라면 연차가 얼마 되지 않은 직원이 처리할 일이었지만, 박 실장은 그녀에게 책임 의식을 언급하며 업무를 강요했다.
 
  우영은 박 실장과 더 이상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수희를 눈으로 찾았다. 수희는 나현과 똑같은 슈트를 입은 채 대기 중이었다. 두 사람은 슈트를 입어서인지 몰라도 마치 쌍둥이처럼 보였다. 다른 직원들이 나현과 수희를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다. 손가락으로 브이로 만드는 나현과 달리, 수희는 웃기만 했다. 우영도 촬영이 시작되기 전 핸드폰을 꺼내 두 배우를 찍었다. 사진을 찍고 보니 수희가 카메라 쪽을 보고 있는 거 같았다. 우영은 나쁜 짓을 들킨 사람처럼 핸드폰을 숨겼다.
 
  촬영이 시작되자 나현이 먼저 카메라 앞에 섰다. 한 번 경험해봐서인지 나현의 촬영은 매끄럽게 진행됐다. 스크립터가 총괄 프로듀서와 함께 모든 테이크를 확인한 뒤 오케이 컷을 추려 우영에게 전달했다. 우영은 그것들을 즉석에서 모델링했다. 진이의 표정에 이전보다 호소력이 드러났다. 총괄 프로듀서는 별 고민 없이 촬영을 마무리했다. 나현이 촬영을 시작한 지 30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현은 당황스러워하며 좀 더 빠르게 걷거나, 감정선을 바꿔보겠다고 자진해 나섰다. 하지만 박 실장은 나현에게 잠시 쉬고 있으라며 그녀를 스튜디오 입구 쪽으로 데려갔다. 이윽고 수희가 카메라 앞에 나타났다. 우영은 모니터를 통해 수희를 주시했다. 수희는 액티브 마커를 신기하게 보던 것도 잠시, 허리를 쭉 펴고 섰다. 카메라 감독이 롤 사인을 외쳤다. 녹화가 시작되자 수희는 중앙 카메라를 향해 걸었다. 수희를 둘러싼 여러 대의 카메라가 그녀의 신체를 다양한 각도로 담아냈다. 사람들은 수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들은 우영의 주장처럼, 수희가 특별하단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우영은 나현이 있는 곳을 확인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조명을 받는 수희를 응시했다. 나현은 박 실장을 놔둔 채 스튜디오를 홀로 벗어났다. 수희의 촬영은 1시간 뒤 끝났다. 총괄 프로듀서는 수고해준 수희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슈가

 
  한 달 뒤 완성된 첫 티저는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장 대표의 바람처럼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진 않았지만, 한국에 몇 있지 않은 버추얼 휴먼답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바이럴 마케팅 덕인지 벌써 각종 커뮤니티에선 진이가 사람인지 AI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며 입을 모았다. 장 대표는 진이가 이끌어 낸 결과에 고무돼 있었다. 그는 금요일 오후에 사원들을 불러 모아 격려의 말을 건넸다. 그 자리엔 수희와 나현도 함께였다. 우영도 이번엔 장 대표가 이야기하는 회사의 성공 비전을 집중해 들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벌써 몇몇 기업에서 진이와의 협력 제의가 들어왔다. 장 대표는 오늘 두 배우와 함께 신문사 인터뷰도 진행할 참이었다.
 
  우영은 회사 라운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진이의 티저 영상이 틀어져 있었다. 10초밖에 되지 않은 영상 내용은 간단했다. 진이가 원경에서 근경을 향해 걸어온다. 그동안 진이의 의상과 그녀를 둘러싼 배경이 초 단위로 바뀐다. 진이는 카우보이에서 우주비행사로, 의사에서 파일럿으로, 궁녀에서 뉴요커로 변모했다. 진이는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건 영화나 드라마에서 경험할 수 있는 대리 체험 같은 게 아니었다. 진이는 진짜 카우보이였고, 진짜 뉴요커였다. 나현과 수희가 진이가 되길 계속 원한다면 그들은 진이라는 또 다른 자아를 공유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진이가 되길 포기한다면, 그 즉시 다른 배우가 두 사람의 자리를 차지할 거였다.
 
  우영은 정크 파일을 모아놓는 회사 공유 드라이브에 접속했다. 그곳엔 승규와 우영이 테스트를 위해 함께 찍었던 몇 주 전 영상이 들어 있었다. 우영은 그 파일 일부를 살려냈다. 첫 중요 업무를 끝낸 시점이라 평소보다 업무량이 적었다. 우영은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승규의 몸 위로 진이의 얼굴을 씌웠다. 그 영상을 DM으로 보내자 승규가 웃음을 터뜨렸다.
 
“팀장님 것도 줘보세요.”
 
  우영은 승규에게 자신이 찍힌 파일을 순순히 건넸다. 승규는 장난을 치는 것치고는 꽤 오래 작업한 뒤 완성된 영상을 우영에게 보내주었다. 영상 속 진이가 수줍게 웃었다. 그건 어디로 보나 우영의 웃음이었다. 승규는 하다 보니 열심히 하고 말았다며 멋쩍어했다. 우영은 그 짧은 영상을 여러 번 돌려봤다. 수희나 나현이 연기한 진이와는 또 다른 진이가 그곳에 있었다. 우영은 그 영상을 개인 하드에 저장했다. 그녀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가슴이 크게 뛰었다. 하드 장치엔 주형과 함께 몰래 작업했던, 비밀스러운 파일들 역시 숨겨져 있었다.
 
  주형이 아직 회사에 있었을 무렵, 우영은 주형과 함께 유치한 장난을 자주 했다. 주형이 장 대표나 박 실장 같은 사람을 본떠 캐릭터를 만들면, 우영은 그 캐릭터를 숨 쉬게 했다. 애니메이션 속 장 대표와 박 실장은 보통 현실을 직시하라거나, 왜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냐며 짜증 나는 말을 내뱉었다. 두 사람은 그 광경을 보며 낄낄거렸다.
 
“잘 봐.”
 
  어느 날은 주형이 박 실장 캐릭터를 마우스 커서로 분해했다. 주형은 그의 머리와 눈, 입술과 코가 모두 떨어져 나갈 때까지 손을 멈추지 않았다. 박 실장은 달걀귀신 같은 모습으로 당당히 소리쳤다.
 
“왜 업무를 제대로 처리 못해?”
 
  우영은 주형과 함께 웃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우영은 그날 이후 장 대표와 박 실장의 캐릭터 파일을 삭제했다고 거짓말했다. 주형은 그 사실을 못내 아쉬워했다.

  몇 시간 뒤, 로비에선 수희와 나현이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나현은 오늘은 매니저와 함께 왔다며 먼저 회사를 벗어났다. 수희만이 홀로 라운지에 남아 수십 번은 봤을 티저 영상을 구경했다. 우영은 수희에게 다가갔다. 잠시나마 진이가 돼보았다는 동질감 때문이었다.
 
“인터뷰는 잘 끝나셨어요?”
 
  수희는 우영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우영이 예상하지 못한 물음을 꺼냈다.
 
“이 진이라는 캐릭터, 눈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우영은 수희를 바라봤다. 우영이 어디가 이상한지 되물었다. 수희는 진이의 눈을 가리켰다.
 
“눈이요. 양쪽 눈이 안 맞아요.”
 
  우영은 순간 충동적으로 말했다.
 
“저 그거 봤어요. 슈가 영상.”
 
  수희는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우영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다가 어떤 기억이 떠올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어떻게 찾았어요?”
 
  우영은 수희가 참여한 다른 작품을 찾으려다가 우연히 그녀의 유튜브 채널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우영은 회사 밖까지 데려다주겠단 핑계로 수희와 함께 회사를 나섰다. 우영은 영상을 본 후 내내 궁금했던 질문을 건넸다.
 
“왜 말을 칼로 찌른 거예요?”
 
  수희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찌른 게 아니라 벤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주마들은 레이스가 끝난 직후, 허벅지 근육이 경직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일본에선 자주 사혈 요법으로 치료를 한단 것이었다. 수희는 그것을 사사하리라고 불렀다. 우영은 그렇다면 경마장엔 어째서 간 것인지, 그 일본인 아저씨와는 무슨 관계인지 묻고 싶었다. 무엇보다 영상을 찍어준 사람이 궁금했다. 하지만 질문을 쏟아내기도 전에 수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제 두 번째 영상도 보셨어요?”
 
  우영은 세 개밖에 없던 동영상 목록을 떠올렸다. 첫 번째가 황야로 가득한 아프리카 영상이었고, 세 번째가 슈가의 영상이었다. 우영은 두 번째 영상이 뭐였는지 떠올리려고 했지만 어려웠다. 수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멀어졌다.
 
“그게 진짜예요. 꼭 보세요.”
 
  우영은 그날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수희의 유튜브 채널에 접속했다. 스마트 TV 위로 2suhee의 동영상 목록이 떴다. 우영은 어째서 두 번째 영상을 기억 못했는지 곧 깨달았다. 두 번째 영상의 섬네일엔 검은 화면만이 떠 있었다. 영상 제목은 ‘공과 나’였다. 길이는 다른 영상들과 비슷했다. 우영은 그 영상을 클릭했다. 거친 핸드헬드 영상이 나올 거란 예상과 달리, 조잡한 그림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 시작됐다. 배경은 서커스였다. 좁은 천막에 모인 사람들이 중앙의 원형 무대를 바라봤다. 그곳엔 대포나 재주 부리는 원숭이가 아닌, 붉은색으로 칠해진 거대한 공이 있었다. 잠시 뒤 젊은 여자가 갈채를 받으며 무대에 섰다. 그녀는 공처럼 붉은 타이츠를 입고 있었다. 여자는 도움닫기 없이 공 위로 단숨에 올라갔다. 관객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여자는 공 위에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카메라가 천천히 관객석을 비췄다. 그곳엔 여자와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가득했다. 영상은 그게 끝이었다.
 
  우영은 유튜브를 종료했다. 짧고 그로테스크한 애니메이션이었다. 하지만 딱히 불쾌하다거나 무엇을 의도한 건지 의미를 알아내고 싶지 않았다. 우영은 영상 속 여자의 얼굴을 되새겼다. 여자는 어딘가 수희와 닮아 있었다. 애니메이션 속 화풍이 우영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눈이 과장되게 크고, 코는 이상할 정도로 얇은 그 기이한 얼굴. 그것은 의심할 것 없이 주형의 작품이었다.

* * *

  두 번째 티저 촬영을 위해 박차를 가하기 전, HR팀에선 워크숍을 주최했다. 워크숍 장소는 강남대로가 내려다보이는 공유 오피스였다. 사람들은 이때까지 회사가 이뤄낸 실적을 공유하는 것보다, 경품에 눈이 멀어 있었다.
 
  우영은 창가 앞에 서서 미니어처 같은 사람들을 구경했다. 조금 전까지 수희와 나누었던 통화 내용이 우영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저 주형이랑 같은 대학 다녔어요.”
 
  수희는 주형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색했다. 그녀는 주형이 우영과 같은 회사에서 일했단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우영이 디자인과를 다니던 주형과 어떻게 친구가 되었냐고 물으니, 수희는 융합 콘텐츠 동아리에서 주형과 처음 안면을 텄다고 밝혔다. 그 기이한 애니메이션은 수희의 아이디어를 들은 주형이 오랜 시간 공들여 작업한 결과물이었다.
 
“사람들은 다들 자기 세계에 갇혀 있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애니메이션에 모두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영상 속 여자는 그 큰 붉은 공을 탄 채 장막 밖으로 나간다. 그 뒤 세상을 유랑한다. 절대 멈추지도, 내려가지도 않는다. 어디에서든 미끄러진다. 그렇게 다른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수희는 그게 진짜 자기 생각이라고 말했다. 영상 속 그 여자는 진짜 자신이었고, 그녀 주위의 모든 게 진짜였다. 우영은 그래봤자 지금은 진이의 뒤에 서지 않느냐고 되받아치고 싶었다. 수희는 다른 현장에 단역으로 일하러 왔다면서 곧 전화를 끊어야 한다고 했다. 우영은 통화를 종료하기 전 주형의 근황을 물었다.
 
“주형이는 요새 뭐 하고 살아요?”
 
  “저도 몰라요. 연락 끊긴 지 꽤 됐어요.”
 
  수희는 좋은 생각이 난 사람처럼 밝게 웃었다.
 
“주형이 친구시면 나중에 우리 집에 한 번 와요. 그 애니메이션 스케치, 아직 집에 남아 있어요.”
 
  우영은 그보다 슈가를 사사하리 하던 영상도 주형이 찍어준 건지 궁금했다. 우영조차 주형이 수희를 찍었단 사실과 수희가 주형에게 찍혔단 사실 중 무엇이 마음에 걸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전화가 끊겼다. 지나가던 팀원들이 우영에게 워크숍이 곧 시작될 테니 어서 들어가자고 권했다. 우영은 그들을 따라 넓은 홀로 향했다. 사회를 맡은 HR팀 팀장이 개회를 알렸다. 장 대표의 긴 축사 뒤 회사가 이뤄낸 실적이 줄지어 소개됐다.
 
  우영은 테이블에 앉은 이들을 확인했다. 그들 모두 평상시라면 대화조차 하지 않을 타 부서 사람들이었다. 지루함을 참지 못했는지,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우영에게 아는 척을 했다. 그는 진이 영상을 잘 봤다며, 움직임이 그렇게 자연스러운 버추얼 휴먼은 처음이라고 감탄했다. 우영은 감사하단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워크숍이 지루하긴 했지만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픈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주도적으로 사람들을 대화에 참여시켰다. 테이블에 모인 이들은 남자의 권유에 따라 자신이 어디 부서에서, 무슨 업무를 하는지 차례차례 소개했다. 그중엔 디자인팀 사람도 섞여 있었다. 남자는 그녀의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주형의 이름을 화두에 올렸다.
 
“주형 씨, 어떤 분이었어요? 소문만 무성해서요.”
 
  우영은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시선이 쏠리자 오히려 들떴다. 우영은 퇴사한 사람 이야기를 왜 하냐며 남자에게 눈치를 줬다. 디자인팀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문이 그렇게 났어요? 하고 여자가 말했다.
 
“주형 씨, 그만둔 거 아니에요. 잘린 거지.”
 
  그건 우영으로서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진이 개발하는 거 극비로 보호하고 있을 때, 주형 씨가 진이 관련 파일들 개인 클라우드에 업로드하다가 걸렸어요.”
 
  여자는 주형이 그 외에도 회사에서 개발한 이미지를 활용해 개인 작업을 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를 이용해 겸업했다거나, 따로 수익을 냈다면 법정까지 갔을 것이다. 여자는 자신도 주형이 정확히 뭘 했는지는 모르지만 HR팀의 노력 끝에 자진 퇴사로 처리됐다고 설명했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듣고 흥미로워했다. 우영만이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녀 역시 주형이 회사를 떠나게 된 정확한 내력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영은 주형의 퇴사에 어쩌면 자신이 개입돼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우영은 개인 하드에 저장한 진이 영상을, 주형의 흔적들을 떠올렸다. 이미 진이가 세상에 공개된 시점이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우영은 저장한 영상들 모두 집에 가자마자 삭제하리라고 마음먹었다. 이후 경품 행사가 진행됐다. 우영은 그곳에서 아무것도 타지 못했다.

워크숍이 끝난 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였다가 흩어졌다. 우영은 집으로 빠르게 돌아왔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침대에 누웠다. 컴퓨터 쪽은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서버에 어떻게 기록이 남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우영은 월요일 아침이 밝으면 회사 컴퓨터에 남은 검색 기록 하나까지 모두 삭제할 생각이었다.
 
  외장하드를 연결하자 문제의 파일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영은 진이 영상을 삭제하기 전, 마지막으로 영상을 재생해보았다. 수줍은 표정의 진이는 여전히 새로웠다. 영상을 보면 볼수록 우영은 슈트를 한 번 더 입고 싶어졌다.
 
  우영은 주형과 언제가 봤던 ‘존 말코비치 되기’란 영화를 떠올렸다. 우영은 처음에 대배우의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게 뭐가 그리 특별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존 말코비치의 삶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의 인생에 빠르게 중독돼 갔다. 그들은 그게 진짜 나라고 믿었다. 그의 몸에서 영원히 살 방법을 궁리했다.
 
  우영이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건 주인공 크레이크의 아내 로테였다. 그녀는 존의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뒤 환희에 젖어 혼잣말했다.
 
“거기 들어갔더니 내게 변화가 일어났어. 내가 누군지 알겠더라고.”
 
  우영은 로테의 말에 일부 공감했다. 내가 아니어야만 나를 알 수 있다. 우영은 수희가 말했던 진짜 나라는 단어를 상기했다.
 
  진짜 나. 진짜 나는 뭐지?
 
  우영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주형에게 오랜만에 메시지를 보냈다. 예상했지만 주형에게선 답변이 오지 않았다. 우영은 주형과 시간을 보냈던 때처럼 홀로 맥주를 마시고, 영화를 봤다. 주형은 주말이면 샤워를 하지 않았다. 우영은 처음엔 그걸 이해 못했다. 하지만 이제 우영은 평일이 아니면 머리를 감지 않는다. 신발도 주형처럼 아무 데나 벗었다. 끼니도 주형처럼 대충 때웠다. 가끔은 주형처럼 호화스러운 하루를 보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멀리 있는 재즈바에 가고,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고급 스파 제품에 탐닉했다.
 
“나랑 닮아가네.”
 
  어느 날 주형은 기분이 좋은지 안 좋은지 알쏭달쏭하다고 고백했다. 그건 우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함께하는 주말이 늘어날수록 주형도 우영과 닮아갔다. 주형은 우영처럼 멍게 맛에 빠졌다. 우형처럼 등산을 좋아했다. 영화 취향도 비슷해졌다. 뒷산에 처음으로 함께 올랐던 날, 우영은 주형과 자기 발이 맞춘 것처럼 똑같이 움직이는 걸 보고 놀랐다. 주형은 우영이 된 것이다. 우영이 주형이 됐듯이.
 
  기대하지 않았던 연락은 그 주 주말 저녁, 우영이 막 세 번째 영화를 틀었을 때 도착했다. 연락한 이는 박 실장이었다. 우영은 피로한 얼굴로 슬랙을 확인했다. 박 실장이 새로 만든 비밀 채널엔 각 팀의 헤드들이 초대돼 있었다. 박 실장의 메시지는 간결했다.
 
  ―이거 소스 유포한 거 누구예요?
 
  우영은 영화를 멈췄다. 그녀는 노트북을 켜 박 실장이 보낸 링크를 클릭했다. 혹시 신종 피싱이면 어떡하나 고민하는 사이, 검은 배경 화면이 떴다. 그곳엔 적나라한 포르노 배너 광고가 여럿 걸려 있었다. 우영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페이지 중앙에 3D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포르노가 떠올랐다. 우영은 망설이다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
 
  포르노의 주인공은 진이였다. 진이가 여러 남자에게 둘러싸인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진이가 옷을 벗자 남자들이 그녀를 사이에 두고 수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성기에서 비정상적일 정도로 많은 정액이 흘러나왔다. 진이는 수줍게 웃었다. 그건 우영의 미소였다. 우영은 사이트를 닫았다. 그러곤 하드 장치를 열어 진이 영상을 미련 없이 삭제했다.
 
  * * *

  장 대표가 보안팀을 압박한 결과, 파일 유출 경로는 예상보다 빠르게 규명됐다. 보안팀은 사원들이 공유한 파일을 타고 랜섬웨어가 유입되면서 일어날 일이라고 설명했다. 바이러스는 특정 전자 지갑에 비트코인을 보내지 않으면 작업한 파일에 접근할 수조차 없는 악질적인 종류였다. 장 대표는 사원들이 함께 다운 받은 파일이 무엇인지 특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사원 중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저지른 일은 아닌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다행히 우영의 컴퓨터는 멀쩡해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영은 오전부터 비어 있는 이들의 자리를 흘끗거렸다. 그중엔 승규도 포함됐다. 사원들이 술렁이는 동안, 진이의 두 번째 티저 소식이 빠르게 퍼졌다. 두 번째 티저가 나옴과 동시에 가전 회사와의 협력 광고도 공개될 예정이었다. 팀원들을 한참 닦달해야 할 박 실장은 보안팀과 회의 중이었다. 우영은 오랜만에 유 팀장으로부터 DM을 받았다.
 
  ―나현 배우 그만둔다던데, 이야기 들은 거 있어요?
 
  우영으로서도 금시초문인 소식이었다. 우영은 프로덕션팀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총괄 프로듀서는 회의실에 들어가 바삐 통화 중이었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프로덕션 팀장이 우영에게 아는 척했다. 우영은 그에게 나현 배우가 그만둔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우영이 걱정하는 건 나현이 아니었다. 그녀는 수희가 갑작스레 사라질까 두려웠다. 프로덕션 팀장은 기자들이 진이로 만든 포르노가 유포되고 있단 기사를 작성했다며, 그 소식을 나현도 확인한 것 같다고 전했다.
 
“나현 배우 얼굴 가지고 포르노로 만든 것도 아닌데 유난이지 않아요?”
 
  그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영은 언제는 진이가 나현 씨고, 나현 씨가 진이라면서요? 하고 받아쳤다. 물론 그건 총괄 프로듀서가 한 말이었다. 하지만 팀장 역시 그 말에 항상 동의했었다. 그는 예상대로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우영은 자리로 돌아와 박 실장이 공유해준 포르노를 보란 듯 회사에서 틀었다. 사실 진이를 이용해 포르노가 만들어지리란 건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우영은 화가 났다. 진이의 수줍어하는 얼굴은, 누가 뭐라고 해도 우영의 것이었다. 승규가 만든 영상을 기반으로 포르노가 만들어졌다. 그 너머에는 슈트를 입은 우영이 자리해 있었다. 우영은 수치스럽기보단 당혹스러웠다. 승규와 장난으로 만든 영상이었기 때문에, 우영은 그게 자기 얼굴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불쾌감은 우영이 짊어져야 했다.
 
  몇 시간 뒤, 승규가 면담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는 그날 업무가 끝날 때까지 말이 없다가 퇴근 직전 우영에게 술을 마시러 가겠느냐고 물었다. 우영은 다른 팀원들도 함께 간다면 좋다고 대답했다. 승규는 우영과 함께 리깅 팀원들을 모두 데리고 오랜만에 회사 앞 전 집에 들렀다. 두꺼운 철판 위에서 빈대떡이 튀겨졌다. 팀원들은 오늘 있었던 포르노 관련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신입 팀원이 이건 지식 재산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어떻게든 범인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이들도 동조했다. 누구도 진이가 성희롱당했다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우영은 나현 배우가 그만둘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프로덕션 팀장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자, 반은 수긍하고 반은 의아해했다. 우영과 친한 여성 팀원이 진이에게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면 어떡하냐며 걱정했다.
 
“이제 아무도 배우 하겠다고 안 나서는 거 아니에요?”
 
“그럼 누구든 해야지. 너든, 나든.”
 
  우영이 말했다. 승규는 우영의 말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우영은 그가 왜 자신을 오늘 불렀는지 깨달았다. 그는 이 애매한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사과해야 하나, 한다면 뭐라고 해야 하지? 우영은 뭉개진 빈대떡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그녀는 몇 시간 전 느꼈던 분노를 상기했다. 지겨운 열대야가 오늘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달리는 개

  포르노 사건은 2차 티저를 촬영할 시기가 가까워지자 금세 잊혔다. 하지만 이미 유포된 영상을 기반으로, 진이의 포르노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해 진이의 얼굴을 진짜 포르노에 이식하는 식이었다. 장 대표는 버추얼 휴먼과 관련한 법안도 이제 막 검토되기 시작한 참이니, 새 산업의 선구자로서 어느 정도의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현은 고민 끝에 진이 연기를 그만뒀다. 그녀는 소속사를 통해 진이와 자기 사이의 간극을 해결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결국 수희만이 남겨졌다. 수희는 진이를 독점하게 됐지만 첫 번째 티저 속 나현의 표정을 따라 하기 어려워했다. 수희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웃기지 않는데 웃는 건 싫어.”
 
  주말 아침 등산에 나선 어느 날, 수희는 그렇게 불평했다. 우영은 수희가 언젠가 청했던 대로 집에 놀러 가는 대신, 그녀와 사적인 시간을 자주 보냈다. 마음의 거리가 줄어든 만큼 격식도 사라졌다. 하지만 주형의 이야기는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 수희는 처음부터 주형에겐 그리 관심이 없었는지, 주형과 우영의 관계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우영은 감정 연기를 못하면서 어떻게 배우 일을 계속할 수 있었냐고 수희에게 물었다. 수희는 그래서 대부분 엑스트라 일만 맡고 있으며, 그마저도 대사가 없는 일이 태반이라고 했다. 수희가 나무뿌리를 밟으며 등산로를 힘차게 올랐다. 그녀는 우영을 따라 최근 등산에 흥미를 느끼게 된 참이었다. 수희가 그거 알고 있어? 하고 운을 뗐다.
 
“요새 진이를 보면서 어떤 연예인이랑 닮았는지 이야기한대.”
 
“누구랑 닮았는데?”
 
  수희는 유명한 여자 연예인들을 나열했다. 우영은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하지만 진이와 이미지가 부합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장 대표는 초상권 침해를 우려해 현대의 미인보다 고전 시대의 미인이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연예인들을 참고하라고 조언했다. 진이의 외모는 독보적인 듯 보였지만, 실상은 수백 명의 얼굴을 훔친 결과였다.
 
  우영은 산등성이에 서서 물을 마셨다. 아직 정상까지는 거리가 좀 있었다. 수희는 처음엔 뒤에서 걸었지만, 어느새 우영을 앞질렀다. 녹음이 우거져 수희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드리웠다. 우영은 수희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수희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우영은 잠시 멈춰 섰다. 한산한 등산로엔 수희와 자신뿐이었다. 우영의 목덜미를 타고 땀이 흘렀다. 찝찔한 냄새가 상의에서 났다. 우영은 티셔츠에 얼굴을 닦았다. 한참 앞서가던 수희가 어느새 우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희가 곧 해가 질 것이라고 외쳤다.
 
  우영은 산을 오르며 수희에게 해줄 말이 많았다. 그녀는 며칠 전 있었던 티저 콘셉트 회의를 떠올렸다. 장 대표는 전 사원에게 발언권을 주겠다며 회의실에 모이는 대신 구글밋으로 화상 회의를 열었다. 100여 명에 가까운 직원들이 노트북 스피커에 의지해 장 대표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장 대표는 음지에서 떠돌아다니는 진이의 포르노 덕에 회사의 인지도가 오르긴 했다고 조심스레 서두를 열었다. 그는 자극적인 추문을 이용할 생각은 없지만, 대중에게 진이의 이름을 각인할 타이밍이 왔다고 확신했다. 장 대표의 발언에 힘입어 회의에선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진이의 포르노를 대중이 잊도록 청순한 서사를 밀어붙여야 한다거나, 아예 자극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자는 식이었다. 우영은 그 의견들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유 팀장이 피그말리온 신화를 뒤집어 진이가 인간에서 버추얼 휴먼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자고 말했다.
 
“마네킹이나 조각상이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현대인이 다른 무언가가 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거죠.”
 
  우영은 유 팀장이 말한 다른 무언가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최근 수희와의 만남이 잦아지며, 우영의 다른 무언가는 수희라는 형태로 구체화 되고 있었다. 유 팀장의 말에 대부분 동조하는 눈치였다. 장 대표는 사람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후 결과를 차후 알려주겠다고 통보했다.
 
  우영은 수희 앞에 힘겹게 다다른 직후, 디자인팀에서 나온 2차 티저 콘셉트를 전해주었다. 수희는 그 이야기를 듣고 흥미로워했다. 우영의 발아래로 수희의 그림자가 밟혔다. 우영은 무심코 뒷걸음질 쳤다. 수희가 우영의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그녀는 우영에게 왜 멀어지냐고 물었다. 수희에게서 달콤한 향이 났다. 우영은 침을 삼켰다. 어디서 많이 맡아본 냄새였다. 그녀는 이 냄새를 잘 알았다.
 
“너, 옥수수 향이 나.”
 
  우영이 말했다. 수희가 웃었다.
 
“그냥 땀 냄새겠지.”
 
  하지만 우영은 분명 달짝지근한 옥수수 냄새를 맡았다. 수희가 우영의 뺨을 만졌다. 그러곤 다시 앞서 걸었다. 우영은 핸드폰으로 찍은 수희의 뒷모습을 다시 확인했다. 우영은 그 사진을 영원히 지우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 * *

  한낮 최고 기온은 35도였다. 우영은 땀을 닦으며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복도 곳곳에선 간식 쓰레기가 발에 치였다. 진이의 2차 티저 발표 날이 확정된 만큼 일정은 급히 진행되고 있었다. 우영은 살이 부쩍 빠진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업무량이 많아진 탓도 있었지만, 수희와 만나는 시간이 늘어나 쉴 틈이 없었다.
 
  우영은 주형과 그랬듯, 주말이면 수희와 함께 영화를 보고 술을 마셨다. 체력이 남으면 등산도 했다. 수희는 우영이 처음 생각한 것처럼 자아를 찾으려다가 스스로 위험을 초래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수희는 마음이 내키면 공장 단기 아르바이트를 한다며 사라졌다가, 빵이 가득 든 박스를 들고 나타났다. 그렇게 모은 돈은 모두 좋아하는 일에 썼다. 배우들을 위한 움직임 수업을 듣거나, 요가를 하고, 기계 체조에 관심을 가졌다.
 
“체육관 바닥이 트램펄린으로 돼 있어.”
 
  수희는 우영의 침대에서 높이 뛰는 시늉을 했다. 그곳에서라면 새처럼 움직일 수 있다, 탄성을 잘 이용하면 머리가 천장에 닿는다며 시끄럽게 재잘거렸다. 우영은 나중에 체육관에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 우영은 수희의 단단한 다리에 손을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한 시간이었다.
 
  우영은 중앙 모니터 앞에 앉았다. 그녀는 이번에 박 실장의 강요 없이 자진해 일을 맡았다. 2차 티저는 유 팀장이 낸 의견을 바탕으로 진행됐다. 그녀는 입사 이래 처음으로 의견이 수용됐다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 일을 축하해주지 않은 건 박 실장뿐이었다. 그가 마침 우영이 앉은 쪽으로 다가왔다. 박 실장은 도착하자마자 보기와는 다르게 수희가 약삭빠르다고 혀를 찼다.
 
“몸값 올리려고 노력 많이 하더라?”
 
  회사는 수희와의 계약을 연장하며 계약 기간을 길게 가져가고 싶어 했지만, 수희는 꾸준히 단기 계약을 주장했다. 박 실장에게 그건 페이를 올리려는 수작으로 보였다. 몸값을 많이 받는 이들이야 당연히 장기 계약을 선호했지만, 무명 배우들은 보통 계약을 단기로 끊었다. 더 좋은 배역이 언제 생길지 몰라서기도 했고, 한 번 계약한 곳에서 아쉬운 소리를 하길 바라서였다. 우영도 그 같은 업계 관례엔 이골이 나 있었다. 만약 우영이 수희를 몰랐다면, 그녀도 박 실장과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박 실장이 틀렸다. 수희는 서른이 되도록 옥탑방 원룸에 살면서 아쉬움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녀에게 돈은 최소한의 생계 수단이었다. 수희는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우선 저질렀다. 하고 싶을 때, 하고픈 걸 했다. 우영은 수희의 그 점에 항시 끌렸고, 불안했다.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있나 보죠.”
 
  우영은 박 실장에게 대꾸했다. 그는 테스트 촬영을 잠시 지켜보다가 우영에게서 멀어졌다. 세트장 중앙에는 수희가 올라갈 조각상 받침대가 놓였다. 2차 티저는 1차 때와 달리 배우의 맨얼굴이 나왔다. 수희의 얼굴은 아니었다. 좀 더 어리고 밝은 이미지의 배우를 일일 단역으로 고용해, 그녀가 진이로 바뀌는 모습을 간단히 보여줄 계획이었다. 수희는 그 사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수희의 관심은 지금 하는 일이 얼마나 재밌는가였다.
 
  우영은 촬영 시작 전, 수희에게 다가갔다. 높은 받침대를 보고 있으려니 ‘공과 나’ 영상이 떠올랐다. 서커스장이라는 특수한 장소만 바꾸면 수희의 아이디어를 언젠가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거대한 구체에 단숨에 올라가는 동작이야말로, 수희가 진이일 때 할 수 있는 시도였다. 우영은 수희의 심심함을 덜어줄 요량으로 조금 전 생각한 아이디어를 말했다. 이번 티저 촬영이 아니라도, 나중에 진이 영상을 만들 때 ‘공과 나’를 오마주하면 어떻겠냐고. 하지만 기대와 달리 수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왜?”
 
  수희의 기분이 단숨에 안 좋아졌다. 우영은 당황했다. 총괄 프로듀서가 촬영 시작을 알렸다. 수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영은 수희를 눈으로 좇았다. 수희는 동선에 맞춰 완벽히 연기했다. 하지만 평소보다 걸음걸이가 난폭했다. 누가 봐도 심기가 불편한 사람 같았다. 테이크 번호가 1에서 3, 다시 6으로 늘었다. 총괄 프로듀서는 티저 작업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촬영 중단을 선언했다. 결국 오늘의 주인공은 단역 배우가 독차지했다. 수희는 내일 다시 스튜디오에 오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녀는 우영에게 인사도 없이 모션 캡처실을 벗어났다. 우영은 수희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이미 수희는 사라지고 없었다.

  우영이 회사로 다시 돌아왔을 무렵, 리깅 팀원들은 그녀의 자리에 모여 있었다. 우영은 조금 전 수희를 화나게 한 일 때문에 겸연쩍었다. 그녀는 팀원들이 어디에선가 이야기를 듣고, 조금 전 수희의 태도, 혹은 수희와 자신의 기묘한 관계에 관해 이야기 중이라고 추측했다. 우영은 그들의 대화를 감내할 여유가 없었다. 그때 기척을 느낀 승규가 팀장님, 하고 아는 척을 했다. 우영은 도망치는 걸 포기하고 자리로 다가갔다. 팀원들이 어색히 웃었다. 우영이 무슨 말을 꺼낼까 고민하는 사이, 그들 중 하나가 케이크를 높게 들어 올렸다. 우영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내심 놀랐다.
 
“팀장님, 생일 축하드려요.”
 
  한 팀원이 말했다. 다른 부서 사람들도 박수를 보냈다. 우영은 얼떨떨한 얼굴로 초를 불었다. 슬랙 채널에 생일자 명단이 공유되긴 했지만, 보통 말뿐인 인사가 전부였다. 팀원들은 우영이 입사한 지 벌써 3년이 돼가고 있지 않냐며, 살가운 말을 건넸다.
 
“진이 만든 주역이시잖아요. 오늘은 좀 쉬세요.”
 
  우영은 그 말에 동요했다. 그녀는 팀원들과 오늘처럼 감정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수희를 생각하느라 얼어붙었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우영은 케이크를 들었다. 플라스틱 포크로 시트를 찌르자 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회사엔 항상 가시 같은 존재였어도 몇 명에게나마 괜찮은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우영은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영은 그날 미지근한 케이크를 벗 삼아 늦게까지 야근했다. 그녀는 퇴근 후 핸드폰을 살폈다. 수희에겐 아직 연락이 없었다. 우영은 집에 도착하기 전 수희에게 기분 나쁘게 해 미안하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물론 수희가 왜 기분이 나빠진 건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알고 싶었다. 뜻밖에 얻은 온기 덕에 수희를 붙잡을 힘이 생겼다. 한참 뒤 수희에게서 답변이 도착했다.
 
  ―내가 알려준 주소로 와.
 
  우영은 현관문을 열다 말고 다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수희가 알려준 주소는 그녀가 최근 빠져 있다던 기계 체조 체육관이었다.

  체육관에 도착한 시각은 밤 10시였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내부는 환했다. 우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우영에게 다가와 용건을 물었다.
 
“이수희 씨를 찾는데요.”
 
  우영이 말했다. 남자는 고민하지 않고 체육관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엔 머리를 높게 묶은 수희가 서 있었다. 우영은 바로 다가가지 않고 먼 곳에서 수희를 관찰했다. 수희는 트램펄린으로 만들어진 바닥에서 위아래로 높게 움직였다. 수희의 말처럼 천장에 닿을 만한 높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날아오를 듯 높았다.
 
  우영은 수희가 스튜디오에서 어째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이뤄내는 사람이었다. ‘공과 나’에서 본 여자처럼, 수희는 직접 그 붉은 공에 올라탈 것이다. 진이의 몸이 아닌, 자기 몸으로. 그 사실이 수희에겐 참을 수 없을 만큼 중요했다.
 
  우영은 수희의 연습이 모두 끝나자 그녀에게 다가갔다. 수희는 촬영 때보다 기분이 많아 나아져 있었다.
 
“집으로 가자.”
 
  우영이 말했다. 수희는옷을 갈아입은 뒤 우영의 집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붙인 채 걸었다. 우영은 집에 도착해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수희가 우영의 반대편에 앉았다.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그들은 주말처럼 술을 마셨다. 우영은 궁금했지만 미처 묻지 못했던 수희의 과거를 캐묻고 싶었다. 왜 대학을 중퇴했어? 어째서 아프리카에 간 거야? 무슨 일이 너한테 있었어? 하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건 다른 말이었다.
 
“네가 왜 그 공에 올라가려고 한 건지 알았어.”
 
  수희는 우영과 만난 이후 처음으로 웃었다. 그녀는 한참 뜸 들이더니 조심스레 상의를 걷었다. 둥근 가슴 아래로 붉은 수술 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우영은 그 흉터를 눈으로 훑었다. 낙뢰에 맞은 듯, 거미줄 같은 붉은 상처가 피부 위로 융기해 있었다. 수희가 속삭였다.
 
“내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모두 진짜야.”

* * *

  수희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그녀는 연기 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희의 몸은 그녀를 연기 밖으로 내몰았다. 처음 통증이 시작된 곳은 배였다. 하지만 아픔은 곧 등으로, 이윽고 전신으로 퍼져갔다. 고통의 원인을 찾기 위해 작은 병원에서 대학병원으로 옮겨갔지만, 뚜렷한 해결책은 없었다.
 
“아직 나이가 어리잖아요. 단순히 과로 때문에 느끼는 피로감입니다.”
 
  수희는 그 말을 몇 명의 의사에게 들은 뒤, 그녀의 병이 외로움을 타도록 내버려 뒀다. 이미 충분히 조영제를 맞고 CT를 촬영한 상태였다. 필요한 부위가 있다면 초음파도 찍었다. 그때마다 수희는 자기 몸에 어떤 이상도 없다는 사실을 새롭게 증명받았다.
 
“그거 알아? 배우의 배는 사람 인에 아닐 비 자를 써.”
 
  그때의 수희를 붙든 건 언젠가 들었던 같은 과 선배의 말이었다. 만약 아프지 않은 사람들을 연기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아프지 않게 되는 걸까? 수희 역시도 어느 순간 이 고통이 거짓은 아닐까 의심했다. 겉으로 보기에 수희는 그럭저럭 건강한 편이었다. 함부로 기침해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거나, 예민해진 나머지 누군가를 괴롭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수희는 진통제를 착실히 모았다. 최후의 순간을 위해, 그것들을 같이 먹어서는 안 되는 약들과 함께 빻아 잼통에 보관했다.
 
  가루가 통의 3분의 2를 채웠을 무렵, 수희는 드디어 병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장기에 가려져 미처 보지 못했던 암이 그녀의 십이지장에 숨어 있었다. 암은 제법 크게 전이된 상태였다. 수희는 암 센터에서 있는 동안, 친절한 옆 병상 사람들이 요양소로 가거나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자주 접했다.
 
  요양병원의 환자, 중환자실의 환자, 더 지속할 수 있는 환자, 그럴 수 없는 환자. 수희를 뿌듯하게 만들었던 이들 모두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수희는 몸의 유전이 모두 마르고 나면 보습제를 아무리 바르더라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항암으로 인해 건조해진 피부를 뜯는 것밖에 없었다. 그것은 뱀 등에 돋아 있는 것과 닮아 있었다. 비닐처럼 바스락거리고, 손톱으로 밀어내면 쉽게 떨어졌다.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얼굴을 봐도 이전처럼 친한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인 건 수희의 기억이 몸만큼 사막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하고 싶었던 것들, 해야만 했던 것들을 종이에 적었다. 그중 첫 번째로 이루고 싶었던 일이 아프리카 여행이었다.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이국적인 동물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팠다. 수희는 특히 오릭스의 뿔에 매료됐다.
 
  그녀는 대수술을 세 번 거친 뒤,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완치 판정을 어렵게 받긴 했지만 재발 가능성이 높은 상태였다. 하지만 수희는 한국인 봉사 단체와 함께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를 떠돌았다. 나미비아는 수희가 가장 마지막에 체류한 곳이었다. 수희는 나미비아의 평원을 보기 위해 투어를 찾아다니던 중, 응구기란 남자를 만났다.
 
“우리 가족이 곧 평원에 놀러 가.”
 
  그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국인 봉사 단체와 나미비아의 취약 계층을 연결해주는 지역 사업가였다. 응구기는 수도인 빈트후크에서도 꽤 부유한 편이었다. 수희가 그의 자식들을 몇 번 돌봐준 일을 계기로 응구기는 수희를 가깝게 생각했다.
 
“우리 애들이랑 박물관에 가주면 널 그 여행에 데려갈게.”
 
  응구기는 아이들에게 나미비아가 어떤 나라인지 자주 교육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무엇보다 그의 아내가 빈트후크의 독립 박물관에서 디오라마실을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여자들끼리 친해지면 좋지. 친구가 될 수 있잖아.”
 
  수희는 그때까지만 해도 응구기의 아내에게 관심 없었다. 하지만 평원을 무료로 둘러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수희는 결국 봉사 단체에 외출 승인을 받은 뒤, 응구기의 자식들과 함께 박물관을 방문했다. 디오라마실엔 응구기의 말대로 그녀의 아내가 서 있었다. 수희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작은 호기심을 느꼈다. 기관사를 연상시키는 색 바랜 푸른색 정복은 말끔히 다려진 채였다. 수희는 그 옷이 누군가가 실제로 일했을 때 입었던 정복일지 모른다고 추측했다. 수희는 응구기의 아내와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안녕. 응구기가 날 여기로 보냈어.”
 
“이야기 들었어. 난 아브나야.”
 
  그녀는 수희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아브나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었지만 보이는 것보다 젊을 듯했다. 빈트후크에는 그처럼 거대한 디오라마실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오는 부모들이 꽤 많았다. 아브나의 아이들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모형 전철과 기다란 레일, 회색 동굴을 가리키며 즐거워했다. 아브나는 해설 시간이 되자 정시보다 5분 일찍 단상에 서서 사람들을 기다렸다. 그녀는 가장 먼저 빈트후크역에 정차된 모형 기차를 출발시켰다. 기차가 둥글게 이어진 레일 위를 통과하니, 중앙에 놓인 현대식 건물에 불이 켜졌다. 역에서 멀어진 기차는 이제 드넓은 평온과 동물 모형 주위를 지나쳤다.
 
“곧 밤이 시작됩니다.”
 
  아브나가 말했다. 수희는 디오라마실 구석에서 아브나를 지켜봤다. 아브나가 레버 하나를 돌리자 백색 조명이 텅스텐 빛으로 변화했다. 디오라마의 세상에 해가 졌다. 모형 기차 내부에 장착된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실내 역시 어두워진 덕에, 기차 불빛만이 유일한 광원이었다. 기차가 지나간 주위로 잔상이 남았다. 수희는 그 모습에 빠져들었다. 아브나의 아이들 역시 숨을 들이켰다. 이윽고 아브나가 레버를 제 위치로 돌리자 다시 아침이 됐다. 아이들이 손뼉을 쳤다. 아브나는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
 
  수희는 아이들의 요청에 따라 디오라마실 앞에서 아브나가 퇴근하길 기다렸다. 수희는 오늘 일에 대한 대가로 고대하던 평원에 놀러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뻤다. 곧이어 아브나가 다가왔다. 박물관 밖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아브나는 아이들을 양옆에 낀 채 서둘러 걸었다. 그녀는 수희를 향해 물었다.
 
“넌 외동이야?”
 
“응.”
 
“난 애가 셋이야. 여기 있는 이 두 애들 말고도 집에 어린애가 하나 더 있지.”
 
  수희는 아브나에게 그렇게 많은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수희가 보기에 아브나는 그렇게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중에 결혼할 생각이라면 애는 낳지 마. 나처럼 될 테니까.”
 
  아브나는 농담조로 말했지만, 얼굴에 웃음기가 없었다. 아브나는 고통스러워 보였다. 수희는 아브나가 드러낸 고통에 상응하는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같은 한국인들에게도 내비치지 않았던 진짜 속내를, 그날 아브나에게 드러냈다. 어린 나이에 큰 병과 싸웠으며 이제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아 하고픈 걸 찾고 있다고. 지울 수 없는 흉터가 가슴 아래 남았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아브나는 수희의 상처를 위로하듯 허공 위로 성호를 그었다.
 
“신이 널 도우셨네.”
 
  아브나는 나미비아는 머물기 좋은 곳이니, 찬찬히 이곳에서 뭘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라고 권했다. 수희는 그로부터 며칠 뒤 아브나와 응구기, 그리고 그들의 세 아이와 함께 평원 여행을 떠났다. 평원은 예상과 달리 텅 비어 있었다. 기대했던 만큼 화려한 풍경은 아니었다. 동물들은 차 소리를 듣자마자 부리나케 도망쳤다. 응구기는 기찻길과 가까운 평원 초입에서 망원경으로 동물들을 관찰했다. 뜨겁고 마른 햇빛이 수희의 정수리를 찔렀다. 수희는 먼지바람을 피해 차 쪽으로 물러섰다. 그때 응구기가 소리쳤다.
 
“저기 오릭스가 있어!”
 
  수희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초식 동물로 보이는 한 무리가 평원 끝자락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 오릭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수희는 그래도 스마트폰으로 그 광경을 찍었다. 그게 수희의 유튜브 채널에 올라와 있는 첫 번째 영상이었다.
 
  수희는 그로부터 며칠 뒤 주형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수희가 나미비아 출국까지 일주일을 앞둔 시점이었다.
 
  ―난 곧 니가타에 도착할 거야. 심심하면 놀러 와.
 
  주형은 다니던 회사를 때마침 그만뒀으며, 하드를 정리하던 중 수희와 대학 때 작업하던 애니메이션을 발견해 연락했다고 설명했다. 애니메이션은 그때까지 미완인 상태였다.
 
  니가타는 거대한 경마장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지방이었다. 수희는 주형이 하는 경마장 이야기에 매료됐다. 주형은 일본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일주하며 여행 중이니, 일본에서 만나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다. 수희는 고민 없이 수락했다. 그녀는 여러 나라를 경유한 끝에 일본에 도착했다.
 
  수희와 주형은 만나자마자 니가타 경마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큰돈을 잃었다. <공과 나> 영상이 완성된 건 수희가 주형과 헤어진 시점으로부터 한 달 뒤였다. 주형은 수희와 2주 정도 함께 여행하며, 미완성이었던 영상을 끝내 마무리했다.
 
  수희는 그걸 개인 채널에 업로드했다. 그 영상을 보다 보니 배우 생활이 그리워졌다. 수희는 니가타를 떠나 도쿄로 향했다. 복잡한 도심에서 사람들을 관찰했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했지만 거리 공연을 해 푼돈을 벌었다. 당장 음식을 사 먹을 돈이 없어도 괜찮았다. 수희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일본 여행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제대로 된 아르바이트를 찾아 돈을 모은 뒤엔, 대행업체를 통해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얻었다. 그렇게 아프리카 때와 마찬가지로 1년을 체류했다. 이후 수희는 고국에 돌아왔지만 타국에서 거주하는 것처럼 살았다. 그녀는 가끔 나미비아를, 니가타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수희는 나미비아에도 니가타에도 돌아가지 않았다.
 
“다들 아이를 기르면 어른이 된다고 하지만 아니야. 난 더 어려지고, 약해졌지.”
 
  나미비아에서의 마지막 날, 아브나는 수희가 떠나는 걸 아쉬워하며 그녀를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아브나의 입에서 매캐한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주 높은 곳에서 물건을 떨어뜨려 본 적 있어? 그런 걸 보면 그 물건이 떨어지는 게 곧 내가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져. 어느 날 산을 오르다가 쓰고 있던 모자를 절벽에 떨어뜨렸는데, 그게 꼭 내가 떨어지는 것처럼 어지럽고 무서웠어.”
 
  아브나의 영어는 악센트가 세고, 몹시 빨랐다. 수희는 그녀가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듣지 못했다. 아브나가 담배를 비벼 껐다.
 
“결혼한 뒤에 다시 와. 우리 애들이랑 만나도 좋고.”
 
  아브나는 담배 케이스에 넣어둔 자신의 첫 남편 사진을 수희에게 보여주었다. 중매로 만난 사이라 남편과 각별한 애정이 있진 않았다. 갑자기 생긴 아이는 아브나의 결혼 생활을 거북하게 만들었다. 남편이 기관사 일을 시작했을 때는 세 가족이 고향을 떠나 빈트후크로 이사해야 했다. 아브나는 가까이 살게 된 시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친가와 멀리 떨어진 곳이라 삶의 조언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아브나를 위로해준 건 남편이 이야기해주는 기차 이야기였다.
 
  아브나는 그녀의 첫 남편이 자신에게 들려줬던 온갖 기차들에 관한 이야기, 그것들이 구획하고 이어주는 지역들의 맞물림을 수희에게도 전해주었다. 그건 이제 헤어진 남편이 아닌, 아브나의 언어였다. 아브나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해서 뭐 하겠어? 아무도 관심 없지. 그 독립 박물관을 봐. 관광객들이랑 아이들 때문에 먹고 살고 있어. 아이들, 이 동네에 사는 부잣집 애들이 학교가 끝나면 할 일이 없어 박물관으로 몰려와. 그런 애들에게 기차가 무슨 존재겠어? 오히려 멋진 차 하나를 더 보는 걸 좋아하지. 기차가 뭔지만 간신히 아는 데다가 재미를 느끼지도 못해. 저 거대한 기차를 보며 하품하지.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기차들도 마찬가지고. 그중 단 몇 명만이 눈을 빛내며 이런 크고 멋진 기계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에 경이를 느껴.”
 
  그녀는 남편의 기관사 복을 이어받아 자기 몸에 맞게 줄였다. 첫 남편 사이에 낳은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심장에 병이 있었다. 그녀는 아이가 아프단 설명을 의사에게 듣고 머지않아 일을 할 것을 결심했다. 아브나의 첫 남편은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기꺼이 모든 책임을 감수했다. 아이가 죽은 뒤 그들은 헤어졌다. 수희는 그들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배웠다. 어쩔 수 없이 이어졌다가,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것. 그게 사랑이었다.

* * *

  긴 대화 뒤, 우영은 수희를 응시했다. 수희는 술에 취해 있었다. 우영은 그럼 슈가 영상은 언제 업로드했느냐고 묻고 싶었다. 혹은 생략된 이야기 중 내가 알아야 할 일이 더 있느냐고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우영은 뜻밖의 질문을 꺼냈다.
 
“넌 나랑 사귈 생각 있어?”
 
  우영은 수희의 대답을 기다렸다. 수희는 자기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며 화를 냈다.
 
“나는 너랑 사귀기 싫어.”
 
  수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누군가와 닮아가는 게 싫었다. 수희는 그저 누군가를 흉내 낼 뿐이었다. 우영은 만약 수희가 자기를 흉내 낸 거라면, 그게 자신과 주형 중 정확히 누구를 따라 한 건지 궁금했다.
 
“진이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서울을 떠날 거야. 어쩌면 한국도.”
 
  수희가 말했다. 우영은 몸이 갈라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수희는 하고 싶을 때 하고픈 걸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누군가의 원본이 될 수 있었다.
 
  우영은 수희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좋은 호텔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청했다. 이별 여행 같은 거지. 우영은 수희와 제대로 만난 적도 없었지만 그리 말했다. 수희는 오랜 시간 고민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진이의 2차 티저가 나온 당일, 우영은 수희와 만나기로 한 백화점 앞에 홀로 서 있었다. 건물 전광판엔 진이의 티저가 재생 중이었다. 우영은 더위를 참지 못하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수희는 아직 도착할 기미가 없었다. 우영은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거울을 봤다. 쇼윈도 위 조명은 만져보지 않아도 뜨거웠다. 그녀는 어느 매장 앞에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우영은 어딘가에 자기를 슬쩍 비쳐 볼 때마다 입고 온 옷이 이렇게 볼품없었나 의문이 들었다. 그녀는 결국 도망치듯 화장실로 향했다. 한 손에는 큰 쇼퍼백을 든 채였다. 우영은 수희에게 줄 여러 선물을 갈무리한 뒤 약속 시간 2분 전, 화장실을 벗어났다.
 
  우영은 호텔 로비로 향했다. 백화점과 연결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넓은 로비가 펼쳐졌다. 어둑한 샹들리에가 부유했다. 벽면과 바닥 소재 모두 우아한 황갈색이었다. 우영은 반짝이는 바닥과 키 큰 호텔직원들을 지나쳐 데스크에 붙어 섰다. 직원은 우영의 예약 내용을 확인한 뒤 싱긋 웃었다.
 
“같이 묶는 분 있으신가요?”
 
  우영은 그렇다고 했다. 여자인 친구와 놀러 온 것이라고 불필요한 설명도 덧붙였다. 직원이 카드키를 준비하는 사이, 우영은 수희에게 어디쯤이냐고 메시지를 보냈다. 수희는 곧 도착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우영은 조금 안심했다. 직원이 우영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잠시만 소파에 앉아서 기다려주시겠어요? 방이 다 치워졌는지 확인해드릴게요.”
 
  우영은 괜찮다고 말한 뒤 로비 소파에 앉았다. 근처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홀에는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었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연주자가 그 앞에 앉아 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클래식 곡을 연주했다.
 
  소파엔 우영뿐 아니라 다른 숙박객들 역시 지친 모습으로 누군가를 기다렸다. 우영은 수희를 어서 만나고 싶었다. 수희가 어떤 마음으로 이 약속을 수락한 건지, 얼굴을 보면 조금 더 감이 잡힐 듯했다. 그때 체크인을 도와줬던 직원이 곤란한 표정으로 걸어왔다. 우영은 미리 입실해 있을 생각을 포기했다. 그녀는 방이 아직 완벽히 정리된 상태가 아니라며, 잠시만 더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우영은 대신 짐을 미리 올려드리겠다는 그녀의 호의에 힘입어, 커다란 쇼퍼백을 직원에게 넘겨주었다. 생각보다 무게가 나가서 놀랐는지 직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핸드폰으로 마침 수희의 연락이 왔다.
 
  ―나 도착했어.
 
  우영은 수희를 만나기 위해 호텔 밖으로 나갔다. 우영의 앞으로 많은 연인이 지나쳤다. 우영은 그들 사이에서 수희를 기다렸다. 수희가 오늘 약속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이미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일찍 나와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다른 나라로 떠나지도, 서로를 닮아가는 과정도 좋아했겠지. 우영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수희의 목소리가 인파 사이로 들려왔다.
 
“나 왔어.”
 
  우영은 수희의 손을 무심결에 꽉 잡았다. 사람들이 우영과 수희를 흘끗거렸다. 그들은 다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수희와 우영은 유령처럼 떠돌았다. 백화점 1층과 지하 식품매장, 그 엄청난 외국 식재료들을 감내하며 시간을 죽였다.
 
“이제 올라가자.”
 
  우영은 수희의 팔에 팔짱을 꼈다. 수희는 호텔 로비 장식을 보며 감탄했다. 우영은 조금 전 들었던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수희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브레이크타임인지 그랜드 피아노 앞은 텅 비어 있었다. 수희가 처음으로 걱정을 드러냈다.
 
“여기 너무 비싼 데 아니야?”
 
“오늘은 그런 거 생각 말고 그냥 놀자.”
 
  수희의 표정은 조명 때문에 밝은 듯도 어두운 듯도 했다. 네 대의 거대한 엘리베이터가 동시에 움직였다. 엘리베이터 옆으로는 큰 창이 나 있어서 호텔 터 내에 있는 인공폭포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우영이 물었다.
 
“이따 저녁에 저거 보러 갈래?”
 
  수희는 좋다고 했다. 우영은 수희의 손을 잡아 엘리베이터 안으로 이끌었다. 우영은 그 느낌이 좋았다. 그들은 1506호에 들어와 8평짜리 실내를 침묵 속에서 바라보았다. 수희가 트윈베드 중 오른쪽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리 와.”
 
  수희가 말했다. 우영은 그녀 옆에 앉았다. 싱글 크기의 침대는 좁았지만 그래서 좋았다. 우영은 조금 있다가 호텔 수영장에 가는 건 어떻겠냐고 권했다. 수희는 조금만 쉬었다 가자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얼마 있지 않아 수희의 가슴이 고르게 오르내렸다. 수희는 최근 여비를 만드느라 과로 중이었다. 우영은 에어컨을 켰다. 객실 위치가 도시 쪽으로 트여 있어 채광이 좋았다. 가만히 있어도 더위가 느껴졌다. 수희는 어느새 미동이 없었다. 우영은 수희를 응시하다가 화장실로 향했다. 욕실이 있는 벽면은 불투명한 시트로 덮여 있어, 샤워하는 모습이 흐릿하게 비치는 구조였다. 변기에 앉자 어디선가 클래식 곡이 들렸다. 천장에서 동작 센서기가 깜빡였다.
 
“화장실에서 음악이 나오네.”
 
  우영이 말했다. 수희는 그 말을 못 들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우영은 화장실에서 나왔다. 수희는 침대에 누워 있지 않았다. 그녀는 창가에 서 있었다. 수희는 창문 틈에 귀를 대기도 하고, 창문 위 천장에 난 알 수 없는 구멍을 쳐다보기도 했다. 우영은 왜 그러냐고 물었다.
 
“이상한 소리가 나서.”
 
  우영도 집중해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고작해야 창문 위 구멍에서 들려오는 작은 기계 소리가 전부였다. 우영은 수희의 손을 잡고 침대로 가려고 했다. 수희는 순순히 따라오지 않았다. 우영은 수희의 손을 놓고 침대 옆 객실 컨트롤러를 눌렀다. 터치패드로 에어컨을 끄고 조명도 최소한으로 했다. 모든 전원을 다 껐는데도 수희를 거슬리게 하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럼, 뭐, 누구라도 부를까? 하고 우영이 물으니, 수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영이 호출 전화기를 보고만 있자 수희가 움직여 프런트로 전화를 걸었다.
 
“여기 객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요.”
 
  우영은 침대에 앉아 겉옷을 걸쳤다. 곧 객실 담당자가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50대 정도 돼 보이는 여자로, 자기가 왜 여기에 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천장에서 소리가 나는데 끌 수가 없어요.”
 
  여자는 수희가 가리킨 곳을 보더니 객실 컨트롤러를 눌렀다. 그녀는 한참 컨트롤러와 씨름하다 말고 히터기와 창가 사이를 오갔다. 그러다 뭔가 깨달았다는 듯 짝, 손뼉을 쳤다.
 
“이거 공조기 소리 같네요.”
 
  그녀는 고층이라 공기 정화를 하려고 돌리고 있는 거라며, 이 기계를 끌 순 없다고 설명했다. 수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집에서 만날 때와 달리 어딘가 긴장한 기색이었다. 우영은 수희의 이상 행동이, 어쩌면 수희가 동요한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희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분명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 것만큼 한국을 개운하게 벗어나지는 못하면, 더욱 좋겠다고.
 
  우영은 그래도 어떻게 할 수 없겠느냐고, 힘내 물었다. 여자는 곤란해했다. 그녀는 시설관리과에 전화했다. 통화 소리가 전부 핸드폰 밖으로 빠져나왔다. 젊은 직원이 공조기는 끌 수 없다고 말하는 소리가 우영에게도 들렸다.
 
“안 되는 일이면 괜찮아요.”
 
  수희가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는 잠시 뒤 둥그런 스티커를 뭉텅이로 들고 와 탁자를 맨발로 디디고 섰다. 우영과 수희는 그녀가 탁자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테이블을 두 손으로 지지했다. 여자는 공조기에 스티커를 꼼꼼히, 앞에서부터 뒤까지 일렬로 붙였다. 그러고 나니 수희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우영은 수희에게 수영장에 가자고 권했다. 그들은 수영장과 피트니스 센터가 있는 4층으로 갔다. 두 사람은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희가 우영의 어깨에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우영과 수희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탈의실로 들어갔다. 우영은 배정받은 로커에 짐을 넣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수희는 수영장에 도착하자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우영은 수영을 못했기 때문에 수희만 바라봤다. 수영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놀이용이라기보다는 스포츠용에 가까웠다. 우영은 수영장 옆 자쿠지에서 몸을 덥히다가 게스트용 레인에 몸을 담갔다. 수희가 우영에게 다가와 물었다.
 
“왜 수영 안 해?”
 
  우영이 수영을 해본 적 없다고 하자, 수희는 자신이 수영을 가르쳐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수희가 우영의 양손을 잡았다. 우영은 수희가 알려준 대로 몸을 가볍게 띄웠다. 발을 크게 차자 물거품이 일었다. 레인을 몇 번 왕복한 뒤, 수희는 우영에게 이제 혼자서 해보라고 권했다. 우영은 두려웠지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녀는 레인의 시작 지점에서 끝까지 헤엄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숨이 차 번번이 몸을 일으켰다. 우영은 불평했다.
 
“다리가 자꾸 기울어져.”
 
  수희는 긴장을 안 해야 한다며 나름의 요령을 알려줬다. 우영은 그래도 물에 빠지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수희가 우영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면 내가 구해줄게.”
 
  물에 젖은 수희는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우영은 수희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럴 때의 수희는 이상할 정도로 상냥했다. 하지만 그건 이 관계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기에 나오는 여유로운 태도인지도 몰랐다.
 
  우영은 물안경을 다시 썼다. 그녀는 수영은 숨을 참는 게 아니라 내쉬는 거라던 수희의 말을 마음속에 새겼다. 우영은 벽면에 발을 힘껏 붙였다가 뗀 뒤 다리를 크게 흔들었다. 우영의 몸이 점차 앞으로 나아갔다. 우영이 숨을 참지 못하고 중간에 몸을 일으킬 때면, 수희가 지치지 않고 우영을 격려했다.
 
“이번엔 꼭 성공할 거야.”
 
  우영은 자신이 수희의 삶을 침범하던 초기를 떠올렸다. 함께 산에 오르고, 영화를 보던 주말을. 이제 와 생각하면 그건 수희가 허용했던 범위 안에서 이뤄진 행복이었다. 우영은 오늘만은 수희의 삶에 있어 예상하지 못한 변수이길 기도했다.
 
  우영은 힘차게 움직였지만 이번에도 레인 완주에 실패했다. 우영은 수희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물이 차가워서인지 수희의 입술은 푸르게 질려 있었다. 우영은 수희에게 자쿠지에 들어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하지만 수희는 고집을 피웠다. 그녀는 한국을 떠나기 전 우영이 수영하는 걸 꼭 보고 싶다고 했다.
 
  수희가 우영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우영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수희를 어서 따뜻하게 해주고 싶었다. 레인의 중간지점에 도착하자, 다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하지만 우영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영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물거품이 그녀의 앞을 가렸다. 우영은 더 이상 숨을 참을 수 없을 때쯤 고개를 들었다. 코 안이 화끈거렸다. 물안경을 벗자 레인 끝이 코앞에 보였다. 우영은 벽면에 손끝을 댔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수희 쪽을 바라보았다. 수희는 우영을 보고 있지 않았다. 수희는 우영의 시선을 느낀 뒤에야 우영과 눈을 마주쳤다. 우영은 수희 쪽으로 걸어갔다.
 
“이제 돌아가자.”
 
  수희가 말했다. 그들은 함께 객실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수희는 우영을 흔들어 깨웠다. 체크아웃 시간이 코앞이었다. 우영은 어제 약속했던 대로 수희와 폭포를 구경하려 했지만, 인공으로 만든 폭포는 바깥에서 구경할 수 없는 구조였다. 우영과 수희는 전날처럼 창가에 붙어 서서 폭포를 감상했다.
 
  우영이 체크아웃을 마치고 돌아오자 수희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저거 봐, 피아니스트야.”
 
  우영은 수희가 가리키는 곳을 살폈다. 로비 중앙엔 어제 우영이 봤던 피아니스트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어제와 달리 연한 녹색 드레스를 입었다. 두 소녀가 그랜드 피아노 주위를 맴돌며 키득거렸다. 우영과 수희는 나란히 서서 그녀가 연주하는 피아노곡을 들었다.
 
  한차례 연주가 끝나자 우렁찬 박수가 이어졌다. 우영은 깜짝 놀라 두리번거렸다. 뒤에 선 남자가 진지한 얼굴로 손뼉을 쳤다. 그는 풍채가 크고 당당했다. 남자는 오로지 피아니스트만 본 채, 으스대거나 놀리는 법도 없이 그녀에게 감사의 의미를 담아 박수했다. 주변을 지나가는 이들이 남자를 보며 미소 지었다.
 
  수희도 그를 따라 박수하기 시작했다. 우영은 그 소리를 들으며 짐을 바닥에 내려놨다. 피아니스트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수희의 박수는 멈추지 않았다. 우영도 한 번, 두 번 박수하며 피아니스트에게 찬사를 보냈다.
 
  두 사람은 호텔의 회전문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벨보이들이 친절히 인사했다. 바깥은 여전히 여름이었다.

* * *

  호텔에서 만났던 날 이후, 우영은 수희의 연락을 2주 만에 받았다. 수희는 여행 준비를 위해 집 정리를 하던 중, 주형의 스케치를 막 발견한 참이었다.
 
“버리기엔 아까운데 가져갈래?”
 
  우영은 내키진 않았지만, 좋다고 대답했다. 바깥에선 비가 많이 내렸다. 서늘한 원룸을 벗어나자 습기가 그녀를 덮쳤다. 우영은 우비를 꽉 여몄다. 그녀는 몇 번 길을 헤맨 끝에 수희의 집에 도착했다. 처음 방문한 수희의 집은 옥탑방답게 시야가 트여 있었다. 현관문은 열린 채였다. 우영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수희는 방 중앙에 앉아 바늘을 라이터로 소독 중이었다. 집 안은 여행 준비로 어수선했다. 수희는 우영에게 눈인사했다.
 
“발에 물집이 생겨서.”
 
  수희는 소독한 바늘에 명주실을 꿰었다. 그녀의 엄지발가락 아래엔 큰 물집이 잡혀 있었다. 등산 때문에 생긴 상처였다. 수희는 물집이 잡힌 곳을 바늘 끄트머리로 찌르더니, 실을 통과시켰다. 반대편 살을 뚫고 나온 실에 진물이 점차 흡수됐다. 수희는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도화지 몇 점을 가리켰다. 우영은 그것을 들어 올렸다. 연필로 그린 단순 소묘였다. 그림 속에선 눈앞의 수희를 닮은, 수희보다 앳된 여자가 웃고 있었다.
 
“가끔은 단순한 게 더 시선을 끌어.”
 
  수희는 그 때문에 채색보단 선화가, 물감보다 연필이, 자연스러운 것보단 어색한 게 좋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곧 시작될 여행이 기대되는 눈치였다. 가느다란 콧노래가 축축한 옥탑방을 메웠다. 우영은 수희의 짐 위에 놓인 원기둥 장치를 들어 올렸다.
 
“이건 뭐야?”
 
“조이트로프야. 예전에 여행 다닐 때 산 건데, 가질래?”
 
  그곳엔 일본어로 적힌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우영은 그걸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수희는 들고 다니면 역시 짐이 되겠다며, 우영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조이트로프를 떠넘겼다.
 
“지금 주형이 호주에 있다나 봐. 나도 거기 가서 색다른 걸 해보려고.”
 
  우영은 수희의 말에 집중하지 않았다. 우영은 골판지로 만든 조이트로프를 돌렸다. 장치 안에서 바람개비 소리가 났다. 우영은 조이트로프의 구멍에 눈을 가져다 댔다. 흰 배경 위로 꼬리 없는 개가 네 발을 교차하며 달렸다. 우영은 개가 멈추지 않도록 장치를 계속 회전시켰다.
 
  우영의 뺨 위로 바람이 불었다. 수희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기척이 멀어졌다. 현관문이 닫혔다. 우영은 뒤를 돌아봤다. 개가 달렸다. 그림자는 여전히 박차를 가해 움직였다.


줄거리


  3D 영상 제작사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하고 있는 우영은 버추얼 휴먼 ‘진이 Jin-E’를 만드는 신규 프로젝트에 투입된다. 하지만 진이의 파츠 제작에 문제가 생기며, 프로젝트는 난관에 부딪힌다. 일반적인 3D 캐릭터와 달리 진이는 오른팔과 속눈썹, 왼쪽 눈이 하나의 레이어에 작업 돼 있다. 오른팔을 움직이면 왼쪽 눈이 원래 위치를 벗어나 얼굴 위를 가로지른다. 그 모두가 얼마 전 퇴사한 주형이 저지른 짓이다. 회사 사람들은 주형이 개인적인 앙심을 품고 진이를 망친 것이라고 수군거린다.
 
  ‘손도 아니고 어떻게 팔을 눈이랑 합쳐요. 의도가 있는 거지.’
 
  디자인팀 유 팀장은 주형의 험담을 사내 메신저로 보낸다. 한때 주형과 깊은 관계였던 우영은 그런 유 팀장이 불편하다. 주형은 우영에게조차 퇴사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갑작스레 사라졌다. 우영 역시 해명을 듣고 싶지만 주형과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진이의 파츠는 결국 다시 제작된다.
 
  그사이 회사에선 진이의 세밀한 움직임을 연기해줄 배우 오디션이 이뤄진다. 오디션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자리인 동시에, 지원자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아카이브 해 진이의 데이터로 쓸 기회기도 하다. 제대로 확인했는지는 몰라도, 오디션 지원자들이 서명했을 개인정보 제공 동의란엔 아카이빙에 관한 설명이 조그맣게 적혀 있다. 설령 적합한 배우가 없다고 해도 그들의 몸짓은 진이의 피와 살이 될 것이다.
 
  우영은 심사위원 자격으로 오디션에 참가한다. 대중에게 얼굴이 알려지는 것도, 대단한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작업도 아니지만 지원한 배우들은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3번은 움직임이 자연스럽고, 8번은 표정 연기가 좋다. 14번은 다른 부분은 별로였지만 진이와 이미지가 적합하다. 진이에게 막 스무 명의 재능이 쌓일 즘 22번, 수희의 차례가 온다. 지원자 중 수희만이 걷고, 앉고, 말하는 기초 동작을 공들여 연기한다. 날 때부터 성인의 육체를 타고난 사람이 감정이나 본능을 배제한 채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다면. 그때 수희처럼 걸을 것이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 아무런 기대도 없이.
 
  오디션이 끝난 뒤, 우영은 독특한 매력을 지닌 수희를 캐스팅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팀원들은 감정 연기가 탁월하고, 조금이나마 인지도가 있는 배우를 선발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다. 결국 진이를 연기할 배우로 나현이라는 다른 지원자가 낙점된다. 사원들은 나현을 어디서 봤는지, 봤다면 어떤 CF였는지 묻기 바쁘다.
 
  얼마 후 진이의 새로운 파츠가 완성된다. 우영은 진이의 기존 파츠들과 새로 작업 된 파츠들 간의 부조화를 감지한다. 버추얼 휴먼은 자연스러움이 중요하기에 원래도 각각의 신체 부위를 대칭으로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의도된 비대칭과는 결이 다른 이질감이 진이의 얼굴에 뚜렷이 드러난다.
 
  그 사실을 눈치챈 건 우영뿐이다. 프로젝트는 지체되지 않는다. 나현은 슈트를 입은 채, 진이를 열심히 연기한다. 그를 지켜보던 우영은 나현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다. 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네 얼굴은 진이의 후광에 가려질 테지. 오른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는 네 특유의 미소도, 네 걸음걸이도 이제 진이 거야. 우영은 나현이 연기하는 모습을 통해 무대를 동경하던 주형을 떠올린다. 주형은 살과 살을 맞대는 현실보다 이야기에, 만들어진 가상 세계에 흥미가 많았다. 주형은 술에 잔뜩 취했던 어느 날 유튜브에서 본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생각해봐. 해방된 노예들이 처음 뒤돌았을 때, 거기에 정말 동굴 입구가 있었을까? 이미 풀려난 다른 사람이 붙잡혀 있는 이들을 위해 그림자를 만들어주고 있었던 거면?”
 
  주형은 그 동굴 안엔 출구도, 해도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나현의 첫 티저 촬영이 성공리에 마무리된 날, 장 대표는 가벼운 회식 자리를 주최한다. 그는 최근 120억 원에 가까운 금액을 투자사로부터 받아 기분이 좋은 상태다. 우영은 그곳에서 장 대표가 주형을 고소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하지만 회사 소유의 파일을 삭제하고 간 것도 아닌데 고소가 성립할 리 만무하다. 우영은 주형을 걱정하기보다 그녀가 어떤 회사로 이직했을지 궁금해한다. 이번에도 영상 회사일까? 그곳은 뭘 만드는 곳일까? 그곳 일은 주형이 만족할 만큼 현실과 유리돼 있을까?
 
  티저가 완성된 날로부터 며칠 뒤, 회사에선 각 팀 헤드들의 비상 회의가 소집된다. 진이의 외관이나 영상 퀄리티는 나무랄 데 없다. 쟁점은 진이가 진짜 사람처럼 느껴지냐다. 우영은 장 대표에게 배우 한 명으로는 진이를 진짜 사람처럼 보이게 하기 어렵다며, 더블 캐스팅을 권한다. 마침 나현과 수희는 신체적 조건도 비슷하다. 장 대표는 무작위로 다른 참가자들의 영상을 틀어 수희와 비교한다. 장 대표는 저 사람만 꼭 다큐멘터리를 보는 거 같다며 감탄한다.
 
  장 대표는 결국 우영의 의견을 채택한다. 수희는 나현과 함께 진이를 연기할 배우로 중복 캐스팅된다. 나현은 주로 감정 연기를, 수희는 걷고, 앉고, 말하는 일상적인 행위 연기를 도맡는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두 배우의 동작과 표정을 실시간으로 추적한 끝에 실감 나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우영은 수희의 연기에 감탄한다. 수희가 자그마한 극단에라도 소속돼 있지 않은 게 이상하다. 우영은 수희의 이름을 구글에 검색한다. 그리고 수희의 유튜브 채널을 찾아낸다. 그곳엔 세 개의 기묘한 영상이 올라와 있다. 우영은 아프리카에서 찍은 듯한 [오릭스]란 영상과 [니가타에서 슈가와]란 영상을 확인한다. [오릭스]에선 오릭스가 보이지 않는다. 끝없는 황야만이 펼쳐진다. [니가타에서 슈가와]에선 수희가 말의 허벅지를 칼로 찌르는 장면이 나온다. 우영은 수희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간다.
 
  회사에 새로운 장비가 도착한 날, 우영은 모션 캡처 슈트를 처음으로 입어본다. 같은 팀원인 승규는 테스트를 빌미로 우영의 모습을 촬영한 뒤, 그 위에 진이의 몸을 덧씌운다. 우영은 승규의 장난이 기껍다. 우영은 한순간이나마 진이가 된다. 우영은 진이의 수줍은 미소, 그 너머에 있는 자기 얼굴을 바라본다. 진이는 내가 아니지만, 나이다. 우영은 그 경험에 빠져든다.
 
  한 달 뒤 완성된 첫 티저 결과는 나쁘지 않다. 장 대표의 바람처럼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몇 있지 않은 버추얼 휴먼답게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하지만 수희는 그 같은 결과에 크게 관심 없다. 수희는 우영에게 진이의 양쪽 눈이 서로 다르다는 이야기를 불쑥 꺼낸다. 우영만이 알아차렸던 미묘한 이질감을 수희 역시 느낀다. 우영은 충동적으로 수희의 유튜브 채널 이야기를 꺼낸다.
 
“왜 말을 칼로 찌른 거예요?”
 
  수희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찌른 게 아니라 벤 것이라고 설명한다. 경주를 끝낸 직후, 말은 허벅지 근육이 경직되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일본에선 자주 사혈 요법으로 치료하며, 그 행위를 사사하리라고 불렀다. 수희는 [니가타에서 슈가와]보다 우영이 보지 않았던 두 번째 영상이 진짜라며, 그것을 꼭 보라고 권한다. 우영은 그날 집에 도착하자마자 수희의 유튜브 채널에 접속한다. 두 번째 영상의 제목은 [공과 나]다. 길이는 다른 영상들과 비슷하다. 우영은 그 영상을 클릭한다. 거친 핸드헬드 영상이 나올 거란 예상과 달리, 조잡한 그림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 시작된다. 배경은 서커스다. 좁은 천막에 모인 사람들이 중앙의 원형 무대를 바라본다. 그곳엔 대포나 재주 부리는 원숭이가 아닌, 붉은색으로 칠해진 거대한 공이 있다. 잠시 뒤 젊은 여자가 갈채를 받으며 무대에 나타난다. 여자는 도움닫기 없이 공 위로 단숨에 올라간다. 우영은 애니메이션의 특이한 화풍에 집중한다. 그 영상은 의심할 것 없이 주형이 만든 것이다.
 
  우영은 수희에게 물은 끝에, 수희가 한때 주형과 같은 대학에 다녔단 사실을 알게 된다. 우영은 주형이 요새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다. 하지만 수희 역시 주형의 근황을 알지 못한다. 수희는 다만 주형이 자기를 모델로 작업했던 캐릭터 스케치를 아직 가지고 있다며, 언젠가 집에 놀러 오라고 권한다. 그 일을 계기로 우영과 수희는 서로의 일상을 차츰 침범한다.
 
  그즈음 회사에선 진이의 파일이 유출됐단 소식이 퍼진다. 유출된 진이는 3D 애니메이션 포르노 사이트를 돌아다니고 있다. 우영은 포르노 속 진이의 수줍은 미소를 본다. 그건 의심할 것 없이 우영이다. 승규가 작업해준 우영 버전의 진이가 포르노에 쓰이고 있다. 우영은 그 사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포르노 이슈 이후, 진이의 표정 연기를 담당하던 나현은 계약 연장을 고사한다. 우영은 진이가 누구도 될 수 있는 동시에 누구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홀로 남게 된 수희는 꿋꿋이 진이를 연기한다. 수희는 이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의 삶을 상상한다. 하지만 그곳엔 우영이 없다. 어쩌면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 우영뿐이다. 수희는 자아가 흔들리는 우영과 달리,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수희는 우영이 다가올수록 멀어진다. 수희는 프로젝트 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한국을 떠날 거란 소식을 끝내 우영에게 전한다.
 
  우영은 수희와의 마지막 술자리를 통해 수희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듣는다. 수희는 큰 병을 앓은 직후, 자기가 진짜 살고 싶었던 삶을 찾아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곳에서 이브나라는 부인을 만나게 되며,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어쩔 수 없이 이어졌다가,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것. 그것이 수희가 정의한 사랑이다.
 
  우영은 수희가 떠나기 전, 처음으로 수희의 집을 방문한다. 수희의 집에 도착한 우영은 주형이 오래전 그린 스케치를 확인한다. 지금보다 앳된 분위기가 남아 있는 그림 속 수희는 실물보다 아름답다. 수희는 그 그림을 보며 가끔은 단순한 게 더 시선을 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래서 채색보다 선화가, 물감보다 연필이, 자연스러운 것보다 어색한 게 좋다.
 
  수희는 오늘 아침 주형에게 오랜만에 메시지를 받았다고 말하며, 언젠가 여행에서 산 조이트로프를 우영에게 선물한다. 우영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조이트로프 속 개를 응시한다. 개는 계속 달리고 있다. 어느 동굴 속 그림자처럼.


 

  <당선소감>

 

   자기만의 이야기 쓰는 작가들 응원

  주위 사람들에게 당선 사실을 밝히자 진짜 작가가 됐다며 축하해주었습니다. 그 순간 ‘레드볼’의 수희가 떠올라 조금 웃었습니다.

  ‘레드볼’은 다른 이름, 다른 얼굴로 살고 싶어 하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얼굴엔 특유의 물성이 존재해, 수술이나 의식적인 표정 변화로도 바꿀 수 없는 고유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그 면(面)을 부정하기 위해 복합체로 살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는 내 눈이 아닌, 내 피부와 혀로 이야기를 즐기리라고 생각합니다. 요새의 전 그런 세상에서 소설가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자주 고민합니다. 결국 여러 모드를 탑재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모드는 무엇인가, 이 모드를 내 의도대로 바꿀 수 있는가. 그 질문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작가들. 등단 여부나 지면에 구애 없이, 이 순간에도 자기만의 이야기를 쓰고 있을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예비 작가가 아닙니다. 작가입니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제가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글이 궁금합니다.

  마지막으로 나의 전부인 R에게 깊은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당선 전화를 받고 얼떨떨해하는 저 대신 R은 세 번이나 울어주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지금껏 글을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징그럽지만 그래서 귀여운, 모순된 사람들을 끊임없이 쓰려고 합니다. 오랜 시간 보호소에서 버텨준 반려견 B에게도 무한한 사랑을 보냅니다. B, 엄마 상 탔어!

 

● 1994년 광주 출생
●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 예술사 졸업
●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전문사 졸업


 

  <심사평>

 

  서사 구성에 소설 요소 활용능력 돋보여

  당선작 ‘레드볼’의 작가는 자신이 무엇을 쓰고자 하며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정확히 안다. 서사 구성에 소설의 요소들을 활용하는 능력도 돋보인다. 인간과 ‘버추얼 휴먼’(소프트웨어로 만든 가상인간) 간의 존재론, 꿈과 현실 간의 인식론, 나와 너, 성별 간의 관계론까지 폭넓은 문제의식을 다루면서도 전문성의 세계를 끌어들여 구체적인 흥미로 이끌기까지 한다. 이 작가에게는 인간과 세계를 사유하는 장르로서의 소설의 당대성과 미래적 역할까지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돋보인 작품에는 ‘6번들 생수 3800원’도 있다. 반성문과 탄원서를 직업적으로 대필하는 인물들을 통해 글(언어)이 갖는 힘의 양면성을 고민하게 함은 물론, 발화되는 언어가 발화 주체의 의식을 지배하는 딜레마적 상황까지 암시한다. 글이 실제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개연성의 고리를 이어놓음으로써 스릴러적 흥미를 부각하기도 하지만 진행이 다소 단조롭다.

  ‘홀랜드’는 납득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내쳐 나아가는 기세가 시원하다. 조직적인 문장을 쌓아나감으로써 모종의 구조를 완성해 나가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종횡을 상관하지 않고 거침없이 돌진한 파흔들로 새롭게 채워지는 소설이다.

  ‘벽에서 눈이 자란다’도 수작이다. 문장의 어디를 잡고 어떻게 뒤집어 얼마큼 익혀야 제맛을 내는지 아는 작가다. 표현의 레시피에서 관록이 느껴진다. 사람과 삶을 웅숭깊게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건져낼 수 없었을 위트가 펄처럼 반짝인다.

  ‘샤이닝, 샤이닝 블론드 헤어’에서 느껴지는 입담은 친근하다. 말 그대로 서로 친해 사이가 가까운 사람들을 그린 그림 같고 어쩌면 일기 같고 사진 같다.

심사위원 : 구효서, 은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