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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폐허를 서성일 것인가, 잔해를 수습할 것인가 〈드라이브 마이 카〉 / 윤성민

[장평]

1. 끝이 난 세계, 그 이후
  ‘이야기’는 ‘천일야화’에서 생사의 문제다. 왕비의 불륜을 목격한 샤리야르 왕은 복수심에 3년여간 여인들을 침실로 부르고, 날이 밝으면 그들을 참수한다. 여인들은 왕과 몸은 섞었으나 이야기를 섞는 데 실패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왕의 마음에 가닿지 못한 결과는 죽음이었다. 셰에라자드는 달랐다. 그는 “옛날에 재산이 많은 상인이 있었는데…”로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 이야기가 얼마나 매혹적이었던지 샤리야르 왕은 목을 친다는 사실도 잊고 매일 밤 이야기를 청했다. 그렇게 1001일 밤이 이어져 셰에라자드는 살아남았다. 이야기가 셰에라자드를 생존하게 했고, 샤리야르 왕을 참회하게 했다. 이 아랍 설화는 재미있는 이야기의 모음을 넘어 이야기와 소통의 존재론적 의미를 은유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선 ‘천일야화’의 플롯이 반대로 차용된다. 오토(키리시마 레이카)는 섹스를 할 때마다 무의식 상태에서 남편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후쿠는 날이 밝으면 그 이야기를 아내에게 다시 들려준다. 딸을 잃고 배우 일을 그만둔 오토가 TV 극작가로 성공했던 것도 그런 방식이었다. 어느 날부터 오토는 섹스를 하며 칠성장어 소녀 이야기를 한다. 자신의 좋아하는 마음을 몰라주는 소년의 집에 몰래 들어가 자신의 물건을 두고 나오는 소녀의 이야기. 이는 사실 딸을 잃은 뒤 마음의 입구를 닫아버린 가후쿠를 열어 보려는 오토 자신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후쿠는 오토의 불륜을 목격했다. 오토가 절정에서 칠성장어 소녀 이야기를 뱉어낼 때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려버리고, 다음날 “(이야기가) 기억이 잘 안 나”라고 말해버리고 만다. 그 날 밤, 오토는 불현듯 사망한다. 당도하지 못한 이야기는 죽음으로 끝났다.

  영화의 프롤로그치고는 길다. 약 40분이다. 하나의 중편영화가 끝나는 정도인데, 영화 속에서 하나의 세계가 끝난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가후쿠는 딸에 이어 아내까지 잃었다. 심리적으로 파산한 그는 자신의 마음속 공동(空洞)을 장례식장에서 공허한 눈빛으로 증명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본편이 시작된다.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미야케 쇼, 미우라 데쓰야와 대담에서 “확실히 이 영화에는 ‘끝이 난 후를 살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고 말했다. ‘끝’은 뭔가. 서사 속에선 ‘아내와 딸의 죽음으로 모든 걸 잃은 한 남자’라고 설명할 순 있지만,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후쿠시마 료타는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해석하며 일본 연호 헤이세이(平成, 1989~2019년)를 중요하게 언급한다. 버블 경제의 붕괴에서 시작해 옴진리교 사건을 거쳐 동일본 대지진과 그 후과(後果)로 끝나버린 시대 말이다. 그 사건마다 한 세계가 끝났고, 역사는 단절됐다. 전후(戰後) 일본이 쌓아온 금자탑이 무너진 폐허 속에서 일본인들은 ‘상실의 시대’를 겪었다. 희망 대신 체념이 시대정신이었다. ‘1Q84’가 헤이세이 시대 최고 소설로 꼽힌 뒤 하루키가 아사히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기존에 존재하던 것들이 무너지거나 사라져 버렸을 때, 제 작품이 더 읽히는 일이 많다고 느끼고 있다”고 말한 건 징후적이다. 그런 헤이세이 시대의 작품은 퇴행적인 데가 있었다. “그래서 모두,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로 상징되는 ‘엔드 오브 에반겔리온’의 결말은 종말론적이며, 기타노 다케시의 폭력과 쿠로사와 기요시의 공포는 현실 초월적이다. 헤이세이 작품의 인물들은 붕괴해버린 세계를 수습하기보다는, 그 잔해 속에서 서성거리거나 그런 현실에서 탈주해버렸다.

  ‘드라이브 마이 카’프롤로그에서 가후쿠도 헤이세이적 인물이다. 그는 아내를 잃고 난 뒤, 배우로서 삶을 포기하며 무대에서 내려온다. 아내의 불륜을 보고도 뒤돌아서는 게 가후쿠다. 이는 그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를 연기하는 장면이 영화 속에 문득 틈입하며 상징적으로 예고됐다. 그의 대사는 “내일 목을 매자. 고도가 안 오면 말이야”다. 블라디미르에게 고도가 도착하지 않은 현실은 목을 매야 하는 비(非)희망성의 공간이다. 희망이 부존재하는 건 왜인가. 누구에게나 필연이지만 그 각자에겐 우연처럼 다가오는 죽음처럼, 삶은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헤이세이 시대 일본의 문학, 영화 작품들은 그런 부조리한 세계를 다뤘고, 인물들은 그 세계에서 행동하기보다는 관망할 뿐이었다.

  딸의 죽음과 아내의 불륜, 이어진 아내의 죽음 뒤에 가후쿠도 삶을 재건하기보다는 빨간 사브 자동차 안으로 들어간다. 아내 오토의 음성(おと·音)이 계속 나오는 자동차(auto) 말이다. 가후쿠는 하루키의 소설에서 소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들처럼 자궁회귀적이다. 그런 면에서 프롤로그의 마지막 장면이 가후쿠가 사브 자동차 안에서 깨어나는 장면인 점은 의미심장하다. 히로시마로 운전을 다시 시작하면서 영화 크레딧이 화면에 뜨는데, 이런 숏의 연속은 ‘끝이 난 이후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영화의 본편을 연다. 류스케가 ‘아사코’에 이어 다시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2. 그래도 몸을 움직여 일을 한다
  영화의 본편은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가후쿠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운전사 미사키(미우라 토코)를 만나 서로 공감하며 마음을 회복한다는 내용. 중년 남성의 성장 드라마로 읽을 수도 있는 이 이야기는 그 자체로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함을 준다. 새롭지 않다. 그러나 ‘드라이브 마이 카’가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는 방식은 서사 자체가 아니라, 인물들의 약동하는 신체 에너지다. ‘신체성의 회복’은 ‘끝이 난 이후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자문에 대한 류스케의 자답이기도 하다.

  유나(박유림)는 신체성의 회복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댄서였다. 하지만 유산을 한 뒤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남편의 추천으로 가후쿠가 연출하는 연극 ‘바냐 아저씨’ 연습에 참여하는 유나는 수화로 이렇게 말한다. “체호프의 글이 안으로 들어와 움직이지 않던 몸을 움직이게 해줘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용기를 내서 다행이에요.” 가후쿠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겪은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신체를 움직이며 마음의 이지러진 자리, 그러니까 상처를 메워간다. 그리고 몸을 움직인다는 것, 그것은 용기였다고 말한다.

  가후쿠의 선택은 유나와 대비된다. 그는 아내가 사망하고 배우를 그만둔다. 몸을 움직이는 일을 그만둔 것이다. 영화에서 가후쿠는 “체호프의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 그것에 견딜 수 없게 됐어”라고 말한다. 하루키는 원작 단편소설인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자신의 몸에서 벗어나 타인을 연기하는 것이 그(가후쿠)의 생업”이라고 쓴다. 가후쿠는 타인도 연기하지 않고, 자신도 대면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히로시마로 온 가후쿠의 신체 움직임은 자제돼 있다. 사브 자동차 뒷자리에 꼿꼿하게 앉은 모습, 대사 연습 때 앉아서 지시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카메라도 가후쿠를 바스트 숏, 클로즈업 숏으로 담으면서 그의 신체적 움직임을 주목하지 않는다. 미사키와 히로시마 쓰레기 소각장을 찾기 전까진.

  정적인 가후쿠는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의 활기와도 상반된다. 연극 오디션을 보러 온 다카츠키는 상대역 재니스 창(소냐 위엔)을 벽으로 밀치고 종국엔 키스까지 한다. 젊은 활력과 에너지가 반짝이는 순간이 있다. 가후쿠도 “자넨 자신을 능숙하게 컨트롤하지 못해”라고 하지만 “배우로선 꼭 나쁘지 않아. 오디션에서의 자네도 나쁘지 않았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가후쿠의 탈색된 듯한 신체 움직임과 유나, 다카츠키 등의 생기 있는 신체는 선명하게 대비된다.

  신체성의 회복은 왜 중요한 주제인가.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인 우치다 타츠루의 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에서 헤이세이 시대 일본 청년들이 능동적으로 ‘액션’을 하기보다는 현상에 ‘리액션’(반응)만 한다는 점에 수긍하면서, 신체성을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회복을 위해 먼저 시작해야 할 일로 “걸레로 마룻바닥을 훔치는 일”을 제시한다. 농담처럼 들리는 이 주장엔 철학이 담겨 있다. “(청소한 뒤에도) 허무하게 변해버리는 것 안에 생명의 본질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주장은 실존주의를 향한 야유로도 읽힌다. 알베르 카뮈는 산꼭대기 위로 돌을 굴려 올리는 시지프를 예로 들며 세계의 부조리를 ‘의식’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산꼭대기로 올렸던 돌이 다시 굴러 떨어지는 그 부조리의 세계에서 “(시지프가) 산꼭대기를 떠나 …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 바위보다 강하다”는 게 카뮈의 생각이다. 그러나 타츠루는 ‘의식’이 아닌 돌을 굴려 올리는 ‘행위’ 자체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며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는 영화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안톤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의 철학이기도 하다. 카뮈는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라고 말했지만, 연극에서 소냐는 자살하려는 바냐를 설득하며 “운명이 우리에게 내리는 시련을 꾹 참고 살아가요”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라고 한다. 삶을 지탱하는 것은 일이며, ‘일’은 몸을 움직이는 행위며, 신체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세계의 부조리를 ‘의식’하는 게 아니라, 부조리를 인정하고 그 제약 속에서 몸을 움직이며 ‘행동’하는 것이 우리가 선택할 일이라는 것이다. 신체의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바냐 아저씨’의 결론은 다카츠키의 우발적 살해로 가후쿠가 포기했던 무대에 다시 오르는 영화의 결론과 대구가 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시작해 ‘바냐 아저씨’로 끝난다고 거칠게 요약할 수 있는데, 이런 흐름은 세계를 향한 가후쿠의 인식론적 전환을 은유한다.

  미사키가 히로시마 쓰레기 소각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어머니의 죽음 이후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운전을 하고 무작정 서쪽으로 달려 자동차가 고장난 곳에서 일자리를 구했다고 이야기할 때 이미 이런 전환은 예고됐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아니 ‘할 수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만큼 구하라’라는 이상을 실천하고 있는 인물이 미사키며 이런 실천은 가후쿠로 전이된다. 쓰레기 소각장 장면은 그런 면에서 영화 서사의 하나의 분기점이 되는데, 연출에서도 그렇다. 가후쿠의 자궁회귀적이자 자폐적인 공간 사브 자동차 안에서 가후쿠와 미사키는 ‘제대로’ 벗어나 산책을 한다. 둘을 담는 카메라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둘 전체를, 그리고 둘의 신체 전체를 풀 숏과 롱 숏으로 온전히 담는다. 미사키가 힘껏 원반을 던지는 모습까지 더해지면서 모처럼 영화는 활력을 가지며, ‘신체성의 회복’으로의 전환을 예비한다.

  이쯤에서 헤이세이 시대의 영화 또는 문학 속 인물을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한다. 헤이세이적 인물은 자력 구제하지 않는다. 이들은 지진으로 무너진 도시의 재건을 고민하며 전진하는 대신 붕괴한 도시를 멍하게 바라보거나, 현실을 탈주하는 방식으로 끝이 나 버린 세계를 체념했던 인물이다. 인물들은 비현실에서 활로를 찾거나 초월적이었다. 현실은 이미 망가졌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그들은 판단했다. 이건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표현 방식의 문제다. 행동을 포기하는 헤이세이적 인물들은 그 스스로 시대의 불안과 허무를 담지했다.

  그런 면에서 ‘드라이브 마이 카’는 ‘포스트-헤이세이’를 품고 있다. 가후쿠는 사브 자동차에서 나오고, 무대에 다시 오른다. 끝이 나버린 세계, 그 제약성 속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시작하는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운전이라는,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하는 미사키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손을 움직이며 말을 건네는 유나, 이들은 모두 신체의 한계성을 견디며 그 안에서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움직인다. 초월하는 대신 신체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외려 신체성의 회복은 가능하다. 헤이세이 시대 대표 감독군인 이른바 4K 감독(기타노 다케시, 구로사와 기요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가와세 나오미) 영화에서는 흔히 볼 수 없었던 인물들이다. 상실 이후의 세계에서도 ‘희망을 버리고 힘을 내’라는 지상 명령을 실천하는 인물들은 류스케의 영화가 일본 영화의 새로운 막을 열고 있다는 점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3. 평등한 상처, 연결된 구멍
  다만 ‘신체성의 회복’은 주제적으로는 이 영화의 가치를 일견 증명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는 께름칙함이 있다. 연극 ‘바냐 아저씨’의 결말에서 소냐의 “일하도록 해요”라는 대사는 영화의 결론과 맞물려 깊은 울림은 주는 건 사실이다. 이는 영화의 목표에 가깝다. 하지만 많은 영화가 목표 그 자체보다 목표에 가닿는 과정에서 예술적 성취를 이루는 경우가 더 많듯, ‘드라이브 마이 카’가 예술적으로 빛나는 순간은 ‘신체성의 회복’이라는 도착지로 향하는 길 도처에 흩뿌려져 있다. 나는 그것이 인물들의 위치 바꿈(전위·轉位)과,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상대적 위치(위상·位相), 그리고 등장인물 간 대칭적 위치(대위·對位)로 상징적으로 표현된다고 본다.

  영화의 핵심 소재이자, 그 자체로 주제인 빨간 사브 자동차를 대표적으로 얘기해보자. 미사키가 운전하는 자동차 안에서 가후쿠는 세 위치를 이동한다. 미사키가 운전을 한 직후 가후쿠의 첫 위치는 운전석 뒷자리고, 그다음은 운전석 대각선 뒤쪽이며, 종국에는 미사키의 옆자리로 이동한다. 마치 연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가후쿠의 위치 바꿈은 단순히 서사의 진전을 공간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가후쿠의 인식론적 성장을 은유한다.

  첫째, 운전석 뒤쪽의 가후쿠. 미사키가 못미더운 가후쿠는 백미러로도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심리적 거리일 테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가후쿠는 유나 집에 초청받은 식사 자리에서 미사키에게 운전을 맡기길 잘했다면서 “가속도 감속도 아주 부드러워 중력이 느껴지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미사키의 운전을 칭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앞서 자동차는 가후쿠에게 자궁회귀적 공간이라고 적었다. 그걸 기억한다면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가후쿠의 말은 심상하게 받아들일 건 아니다. 그는 여전히 퇴행적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어진 장면에서 미사키는 폭력적이었던 엄마 이야기를 한다. “술장사를 마친 엄마를 매일 아침 데리러 갔고, 운전이 미숙해 잠을 깨우면 엄마는 운전석을 발로 찼다”고 말한다. 가후쿠는 과거 미사키의 엄마가 앉았던 자리에서, 과거 자신이 운전하던 자리에서 발신되는 그 얘기를 듣는다. 바뀐 위치(전위)는 각자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를 환기하게 하고, 공감의 가능성은 조금씩 열린다.

  둘째, 가후쿠가 운전석 대각선 뒤쪽 자리로 옮기는 장면은 무성영화적인 아름다움이 빛나는 매력이 있다. 다카츠키가 갑작스레 동행을 청하자 가후쿠는 안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어 가후쿠는 오토에게 듣지 못한 칠성장어 소녀의 이야기 결말을 다카츠키로부터 듣는다. 그 이야기는 결국 오토와 가후쿠의 관계를 비유한 것이었다.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도 말없이 거울로 지켜보는 가후쿠의 시선은 아무 말 없이 설치된 CCTV로 유비된다. 이 장면에서 숏/리버스숏의 의미는 이미 몇 차례(송경원 등) 얘기됐다. 그러나 인물의 위치 바꿈의 의미는 덜 다뤄졌다. 다카츠키의 자리는 원래 누구의 자리인가. 가후쿠의 자리다. 둘을 비추는 숏/리버스숏은 점점 180도선 위로 수렴하는데, 다카츠키는 점점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다카츠키 얼굴을 유독 밝게 비추는 조명 때문에 마치 (내 자리에 있던) 거울 속의 ‘나’가 가후쿠 자신에게 말을 거는 듯하다. 심연이 나를 바라볼 때 나도 심연을 바라보는 것 같은, 그러니까 자신을 외면했던 가후쿠가 처음으로 자신의 상처 기원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장면이다.

  셋째, 다카츠키가 차에서 내린 뒤 가후쿠는 문득 앞자리로 옮긴다. 오토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보조석에 가후쿠가 앉은 것이다. 그 자리는 원래 오토의 자리였다. 이해는 타인의 입장(立場)이 되어본다는 의미일 텐데, 직전 장면에서 칠성장어 이야기의 결말을 들은 가후쿠는 오토가 있던[立] 자리[場]에 앉아본다. 퇴행했던 가후쿠는 두 번의 위치 바꿈으로 자신을 마주하고, 아내를 이해하면서 전진한다. 이 장면 이후로 오토의 <바냐 아저씨> 대사 음성은 멈춘다. 이 위치는 미사키와의 관계(위상)에서도 중요한 의미다. 앞뒤의 자리가 고용인-피고용인의 관계라면, 양옆의 자리는 동등한 관계다. 가후쿠와 미사키는 담뱃불을 선루프 위로 올리고 카메라는 그것을 마치 각각 아내와 엄마를 위령하는 향초처럼 비추는데, 이 순간 아내와 엄마에 대한 미필적 고의의 살인 혐의와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둘은 적어도 상처의 층위에서는 평등하며 신비롭게 공명한다. 둘은 사실 대칭적(대위)이다. ‘가후쿠-아내 오토-칠성장어 이야기’는 ‘미사키-엄마-(엄마의 또 다른 자아인) 사치’로 대응된다. 여기에 가후쿠가 예전에 잃은 딸과 미사키가 또래라는 설정은 순환론적 관계의 가능성까지 열어둔다. 이런 대칭성은 고통의 평등성으로 읽히는데, 이때 비로소 공감은 가능해진다.

  공감이라는 건 뭔가. 하나라는 느낌, 즉 서로의 마음이 연결돼 있다는 감각일 것이다. ‘연결’은 ‘끝이 난 이후의 세계’를 근심하는 류스케에게 중요한 주제다. ‘드라이브 마이 카’와 같은 시기에 제작된 ‘우연과 상상’에는 더 직접적인 대사로 표현된다. 마지막 에피소드 ‘다시 한번’은 인터넷상 모든 네트워크, 나아가 사람들의 연결 관계도 단절하게 만드는 바이러스 제온이 퍼진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우연히 만난 나츠코(우라베 후사코)와 아야(카와이 아오바)는 서로 고등학교 동창으로 오해한다. 흥미로운 점은 오해였다는 점을 깨닫고 난 뒤에도 나츠코는 아야에게 “뭘 해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너에게도) 분명 있을 거야. … 그 구멍을 통해 우린 지금도 연결돼 있을지도 몰라”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오묘한 구석이 있는데, 나츠코가 자신의 실제 친구에게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친구로 오해한 아야에게 하는 말인 건지 모호하다. 이런 모호성은 우리가 모두(일면식이 없던 제3자도) 구멍, 그러니까 상처를 통해 연결돼 있을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남긴다.

  ‘우연과 상상’이 우연적인 사건을 통해 ‘공감하는 상상적 공동체’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영화라면, ‘드라이브 마이 카’는 위치를 바꾸는 등 인물의 동적 움직임을 통해 그 가능성을 탐색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끝이 난 이후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류스케의 또 다른 대답은 공감, 즉 상처(구멍)를 통한 마음의 연결인 것이다. 헤이세이적 인물이 ‘스스로에게 침잠하는 인물’이라면 류스케가 제시하는 포스트-헤이세이적 인물은 ‘타인과 연결된 인물’이다.


4. ‘뭔가’의 이동 축선
  인물들이 연결돼 있다는 감각이 반짝 하는 순간은 부정할 수 없이 영화 속 연극 ‘바냐 아저씨’의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유나는 가후쿠를 뒤에서 안은 채로 가후쿠 눈앞에 손을 움직이며 수화로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일하도록 해요”라고 말한다. 원작에서는 유나가 가후쿠를 옆에서 쓰다듬으면서 말하는 장면이지만 류스케는 유나의 위치를 바꿨다. 그리고 이 장면을 관객석의 미사키의 시점숏으로 비춘다. 중간엔 문득 카메라는 무대 뒤로 가 마치 연출가의 시점으로 유나, 미사키의 연기와 관객을 비추기도 한다. 카메라와 인물 간의 위상을 따지면 ‘(가상)연출가-유나·가후쿠-미사키’가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유나, 가후쿠, 미사키는 각자 경험한 죽음으로 마음에 구멍(상처) 하나씩 가진 인물들이다. 이 장면 직후 미사키의 한국에서 삶이 불현듯 등장한다. 연극에서 ‘뭔가 일어난’ 순간이 미사키를 새로운 삶으로 추동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인상을 준다. ‘뭔가’는 뭔가. 그것을 확인하려면 직선적 구도 또는 배치가 나오는 앞선 두 개의 장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하나는 공원에서 연극을 연습하는 장면이다. 유나는 “난 정말 불행한 여자야”라고 말하는 재니스 창을 뒤에서 안고 낙엽 하나를 건네며 “(피아노를) 치세요”라고 한다. 가후쿠는 이를 뒤에서 지켜보며 연출한다. 구도를 보면 ‘가후쿠-유나·재니스 창-카메라(관객)’가 직선에 위치한다. 흥미로운 부분은 가후쿠가 유나와 재니스 창의 연기를 보며 하는 “지금 뭔가가 일어났어”라는 말이다. 사실 가후쿠는 둘의 등만 바라보고 있어 재니스 창이 유나의 위로에 싱긋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뭔가’에 대해 말하고, “관객에게 그걸 열어가”라고 한다. 이 장면은 ‘바냐 아저씨’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예언이다. ‘녹색 광선’ 등 에릭 로메(류스케는 로메에 대한 글을 쓴 적도 있다)의 영화에선 경이롭게 반짝이는 우연의 순간이 있는데, 그건 앞선 장면의 어떤 예언에서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로메적인 연출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는 이 장면으로 가후쿠가 예언하는, 위로나 진실로 번역할 수 있는 ‘뭔가’는 유나의 수화로 재현되고, 그것은 가후쿠의 마음을 통과해 관객석의 미사키의 마음으로 연결되며 전달된다.

  또 다른 직선 배치의 장면은 가후쿠와 미사키가 히로시마 쓰레기 소각장을 산책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위 두 장면에 대한 해설이다. 미사키는 평화공원과 원폭 돔 사이에 놓인 소각장 건물에 담긴 건축의 이념을 설명한다. “원폭 돔과 위령비를 잇는 선은 ‘평화의 축선’이라 불립니다. 이 공장을 지은 건축가는 그 선을 가리지 않고 바다 건너까지 연결되도록 이렇게 트이게 했대요.” ‘원폭 돔-쓰레기 소각장-평화공원’이 직선 구도에 놓여있다. 일본 역사에서 가장 큰 상처로 남은 ‘과거’ 원폭 피해의 상징과 ‘미래’의 평화를 기원하는 공원을 하나의 축선에 두고, 그 사이에 ‘현재’ 삶의 부산물인 쓰레기를 처리하는 공장을 둔 것이다. 쓰레기를 소각한다는 것은 그 물건이 가진 운명의 종말처리일 텐데, 미사키는 떨궈지는 쓰레기를 보곤 “눈처럼 보이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과거 오토의 죽음으로 상처를 품고 사는 가후쿠에게 끝이 나 버린 현실은 지리멸렬하지만, 때때로 ‘뭔가’ 반짝이는 순간 때문에 눈처럼 아름다워지기도 하며, 이는 미래를 열어가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5. 끌어올리는 손
  류스케는 헤이세이 시대에 발생한 ‘세계의 끝’ 중 하나였던 동일본 대지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본격적인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 그의 근심 중 하나는 ‘끝나버린 세계’에서의 관계와 이야기의 단절이었다. 그래서 그의 다큐멘터리는 생존자들이 마주보고 대화하는 장면에 공을 들인 흔적이 또렷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프롤로그에서 이야기의 단절과 죽음을 통해 헤이세이 시대의 붕괴를 상징적으로 요약한 뒤, 그 이후의 세계를 지탱하게 할 요소를 탐색한다. 그 결과가 마음의 연결, 즉 공감이며, 다른 하나는 움직이는 인물, 즉 신체성의 회복이다. 둘은 별개의 해답일까. 아니다. 두 개의 장면을 보자.

  히로시마 쓰레기 소각장을 찾은 가후쿠와 미사키는 개방감 있는 바닷가 계단으로 나간다. 미사키는 계단 위쪽에 앉아 있고, 가후쿠는 아래쪽에 서 있다. 가후쿠는 미사키에게 처음으로 아내의 죽음을 말한다. 그 얘기를 들은 미사키는 “전 그 차가 좋아요. 소중하게 대해 온 게 느껴져요”라고 말한다. 사브 자동차는 앞서 언급했듯이 아내 오토의 환유(換喩)로, 미사키의 말은 아내의 죽음에 죄의식을 떨치지 못하는 가후쿠에게 ‘그래도 당신은 아내를 소중히 대했잖아요’라는 위로의 말이기도 하다. 그리곤 미사키는 먼저 계단을 올라간다. 이때 가후쿠도 어떤 이끌림에 의해 올라가는데 미사키가 끌어올리는 듯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인물 간 척력을 동력으로 삼던 영화는 그제야 인력을 동력으로 삼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홋카이도 눈밭 장면에서 위상이 바뀐 채로 반복된다. 미사키는 죽은 엄마를 위해 언덕을 내려가 향을 대신해 담배를 눈구덩이 속에 피운다. 그는 산사태가 났을 때 엄마를 적극적으로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죄의식을 내비친다. 그리고 다시 언덕을 올라올 때 윗쪽에 있던 가후쿠는 몸을 움직여 손을 내민다. 미사키가 “더러워요”라고 해도 가후쿠는 그의 손을 잡아 끌어올린다.

  미필적 고의로 인한 살인 혐의, 스스로를 ‘더럽다’고 자책하는 죄의식을 공유하는 둘의 마음은 연결돼 공명하며, 자신의 신체를 움직여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위로 끌어올린다. 공감의 마음과, 끌어올리는 손을 우린 연대라고 부른다. 대개의 영화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윤리학적 텍스트를 제시했다. 하지만 류스케의 영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헤이세이 시대 이후, 끝이 나버린 세계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상구(相求)해야 하는지 연대생종론적 해법을 고민하게 만든다.


[단평]

지워진 목소리, 복원된 마음,
<오마주>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성경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말씀’(Word)은 예수라는 존재를 의미하고, ‘말씀’으로 비로소 존재 자체가 가능하다는 은유다. 하지만 역사상 여성의 ‘말씀’은 주목받지 못했고, 지워졌다. 그들은 존재했지만, 목소리가 사라진 곳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영화 ‘오마주’는 그곳에서 시작한다. 흥행이 저조한 영화 세 편을 만들고 더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걱정하는 지완(이정은)은 영화 세 편을 찍고 사라진 한국 두 번째 여성 감독 홍재원(김호정)의 영화 ‘여판사’의 사라진 음성을 마주한다. 영화 ‘여판사’는 실재했지만, 음성이 사라졌기에 마치 실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잊혔다.

  홍재원을 비롯한 당대의 여성들은 목소리를 갖고 싶었지만 그 시대의 멸시는 강고했다. 홍재원은 10년 동안 스크립터를 했는데도 감독의 기회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여판사’의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도 감독을 맡은 건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홍재원은 편집기사인 친구 이옥희(이주실)에게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데…”라고 편지를 쓴다. 여성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없었고, 그의 ‘목소리’는 세 번째 영화에서 멈췄다. 여자가 아침부터 편집실에 들어온다고 소금을 맞았던 이옥희는 이제 ‘영화’라는 단어가 기억 안 나 말하기를 주저한다. 시대가 달라졌지만 지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시어머니가 집에 막무가내로 온다고 했을 때 솔직한 마음을 말하지 못한다. 여전히 영화사 대표에게 “무슨 아줌마가 영화를 찍냐”는 소리를 듣는 게 현실이다. 그는 이제 ‘되’인지 ‘돼’인지 헷갈려하며 “시나리오 쓰는 게 무섭다”고 말한다. 이들은 목소리를 잃었거나, 잃어가고 있다.

  ‘지워진 목소리’가 영화 속 다른 영화를 통해 상징적으로 틈입하는 순간이 있다. 지완이 ‘여판사’ 필름을 찾으러 오래된 극장을 찾아갔을 때 에로영화 ‘애마부인’이 상영되고 있다. 여성들은 신음하거나 목소리가 없다. 영화이론가 카자 실버먼은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음향 사용에서 위계적 성 논리가 작동한다고 봤다. 여성의 음성은 ‘울부짖고, 헐떡거리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로 제시되고, 서사적 권위를 획득하지 못하고 좌절되거나 순종적인 특징을 갖는다고 분석했다. 미셸 시옹은 ‘스크리밍 포인트’라는 자신이 만든 개념을 통해 ‘사이코’ 같은 고전영화에서 여성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을 남성들이 ‘볼거리 조작자’로서 만들어낸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순간을 “언어가 갑자기 사라진 곳이자 블랙홀”이라고 했다. 실버먼과 시옹 모두가 지적하는 것은 고전영화에서 여성들의 실제 목소리는 지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여판사’의 사라진 음성은 그런 지적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다.

  홍재원이 ‘여판사’를 찍으며 원고지에 남긴 메모 “너는 언젠가 지워질 거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은 자신 영화의 운명에 대한 예고이자, 여성 운명에 대한 경고다. 그의 영화 장면들은 유독 여성에게만 날카로웠던 검열로 잘려나갔고, 음성은 무관심 속에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구체적인 형상도, 음성도 없이 그림자로만 나타나는 홍재원의 모습이 그것을 상징한다. 지완은 그 그림자를 마주할 때 공포보다는 연민을 느낀다. 자신의 운명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공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완이 하혈하며 자궁을 적출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여판사’의 복원에 안간힘을 쓰는 것일 테다. 생물학적 여성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워진 목소리와 장면을 통해 영화판에서도, 현실에서도 타자의 자리로 밀려났던 여성을 제 지위로 올려놓겠다는 목표가 그에겐 지상 과업이다.

  지완은 결국 ‘여판사’에서 사라진 음성을 더빙 녹음하고, 삭제된 필름도 찾아 복원에 성공한다. 지완은 이옥희 집에서 널어둔 이불감에 필름을 비춰 첫 상영을 한다.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고 검열해 삭제됐던 장면이 펼쳐진다. 손익분기점인 관객 20만 명을 넘어야 하지만 관객 4명이 전부인 극장, “실감이 안 나는” 숫자 1000만 관객이 다녀간 극장에서와 달리 지완의 얼굴은 영화를 처음 마주했던 그때처럼 벅찬 표정으로 가득하다. ‘여판사’의 실존 인물은 독살됐지만, 영화 속에선 주인공이 해피엔딩을 한 것처럼, 지완에게 이 영화의 복원은 현실과 다른 세상을 향한 꿈이다. 지완이 복원한 것은 홍재원의 <여판사>지만, 동시에 복원된 것은 여감독으로서 버티기 힘들어 무너져갔던 지완의 영화를 향한 마음인 것이다.


 

  <당선소감>

 

   ‘70매 마감’ 그 마음 기억하며 버텨나갈 것

  이를 닦다가 당선 소식을 전하는 전화를 받았다. 아무도 없는 복도로 나가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중정을 내려다봤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풀밭과 나무가 하얬다. 한때 포근했던 눈은 햇빛에 녹고 달빛에 어는 과정을 반복하며, 사랑이 사그라지면 남는 쓰라림처럼 날카로운 면과 날을 만들고 있었다. 봄이 오면 이 눈의 포근함과 날카로움도 결국 추억으로 남겠지. 창문에 손을 갖다 댔다. 유리는 서릿발처럼 찼다. 아침 기온 영하 12.4도를 기록한 날이었다. 신춘(新春)은 아직 멀었다. 몇 번의 포근함과 날카로움을 더 겪어야 할지 몰랐다. 그 난감함을 버티면 봄은 오는 것이라 믿는다.

  신춘문예 당선이 신춘을 앞당기는 건 아니다. 바뀔 것 없는 일상이었다. 1인분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출근했지만, 또 고기 1인분도 채 제대로 굽지 못하고 태운 심정으로 퇴근했다. 당선 전화 받을 때 포근해졌던 마음은 빨리 얼어갔다. 당선이 보장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응모작 보낸 날을 기억한다. 공고에 따라 우편봉투에 빨간 펜으로 ‘신춘문예 응모작품’이라고 크게 썼다. 민망해 우체국 직원 눈도 못 마주쳤지만, 그때만큼은 지구의 중력이 조금은 약해진 것 같았다. ‘총 70매 원고를 마감했다’는 마음이 나에겐 당선보다 중요했다. 일상의 자괴(自愧) 속에 그런 자부(自負)는 희소하겠지만, 그 마음을 기억하며 글을 쓰고 마감을 하고 버텨 나가겠다.

  고마운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당선 소감이라면 마땅히 ‘고맙다’고 써야 맞겠지만, 쉽게 써지지 않는다. 그들에게 많은 상처를 줬고, 난 덜 상처받았다. 미안하다. 이 소식을 듣는다면 가장 기뻐했을, 그러나 소식을 전할 수 없는 그에게도 미안하다는 말밖엔 할 수가 없다.

● 1984년 출생
●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심사평>

 

  ‘신체성의 회복’ 화두로 면밀한 추적 돋보여

  질적으로는 우수한 평문들이 많았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을 분석한 ‘시간의 주술과 결박된 인간’에서 평자는 이 작품이 한국 영화에서 오컬트 열풍의 정점에 섰다고 평가하고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주요 작품들을 토대로 작가의 철학적 질문들을 탐색한 평문도 흥미로웠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분석한 글은 여러 편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참을 수 없는 미저리 되기’라는 글은 해석의 참신성을 보여줬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를 분석한 글도 여러 편이었는데 그중 ‘폐허를 서성일 것인가, 잔해를 수습할 것인가’라는 글이 단연 돋보였다. 이 글에서 평자는 ‘신체성의 회복’이라는 화두로 3시간에 이르는 작품의 텍스트를 대단히 면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체호프의 연극은 수어(手語)까지 포함하는 다국적 언어로 수행되고 있는데, 극 중 연출가인 주인공 가후쿠가 앉은 자세로 프레임에 갇혀 있다가 극이 진행될수록 차츰 행위 주체자로 변화해 간다는 것이 평자의 분석이다.

  평자는 텍스트를 넘어 ‘컨텍스트’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의 연호인 헤이세이(平成) 시기를 기타노 다케시, 구로사와 기요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가와세 나오미 4인방이 주도했다면, 동일본 대지진 이후 영화계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고 그 중심에 하마구치 류스케가 있다는 것이다. 헤이세이적 인물들이 시대의 불안과 허무 속에 행동을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면, 류스케의 인물들은 신체의 한계성을 절감하고 다시 일어서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평자는 ‘드라이브 마이 카’가 포스트 헤이세이 일본 영화의 새로운 서막을 열고 있다고 본다..

심사위원 : 김시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