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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아름다운 괴물에서 불길한 폐허로-이불(Lee Bul)론


아름다울 이유: 희극과 비극 사이에서

희극은 우리만 못한 인간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우리보다 더 나은 인간을 모방하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중에서


1. 비극적으로 추락하기 위해서는 우선 아름다워야 한다

  비극은 하나의 추락이다. 그리고 추락은 아름답다. 그러나 무턱대고 무언가를 추락시키기만 한다고 비극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추락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것이기에 그 주체가 아름다운 것이어야만 한다. 추락하는 것이 아름답지 않으면 추락이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은 소문자 미(美)를 이용해 대문자 미(美)를 창출하는 하나의 사례이다.

  이불은 작가로 활동한 이래 줄곧 화려하고 복잡한 형상들, 폭발하거나 충돌하는 장면을 구현해왔다. 이불의 독특한 미의식의 원천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과 그 반전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다소 투박하다. 그에게 그것은 예상하지 못한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의도된 아름다움이다. 괴물에게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괴물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다만 괴물적인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는 있어도 소문자 미(美)의 언저리에서 머물 뿐, 대문자 미(美)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그것은 이불의 괴물이 충분히 아름답기에 비극으로 이행할 준비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희극으로 종결되기 때문이다.


2. 괴물적 그로테스크의 아름다움

  초기 이불 작업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는 괴물적 그로테스크에 기반한 아름다움이다.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와 <사이보그>, <몬스터> 등에서 이불은 신체의 괴물적 변형을 통해 기이한 아름다움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 작품들의 괴물과 같은 복잡성과 화려함은 최초의 대면에서는 가까이하기 힘든 인상, 언뜻 보기에 추에 가까운 인상을 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분명히 추에 가까웠던 작품이 어느새 미적인 대상으로 편입되어 기이한 만족감을 준다. 그러나 우선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그 미적 쾌감의 작동 기전보다도 이불이 괴물적 그로테스크라는 형식과 그 미(美)를 이용해 얻고자 한 효과가 무엇인지, 즉 <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의 대사가 어떤 함의를 가지고, 누구를 향한 것인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불의 괴물적 그로테스크는 ‘아버지’를 향한다.[1] 이불의 촉수들과 그 공격적인 외양은 기존의 관음적 시선을 고수하는 이들을 향한 의도적 폭력으로 보인다. 문제는 ‘아버지’를 향한 이불의 공격성이 일견 가부장에 흠집을 낸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불의 작업이 받아들여지는 양상을 추적해본다면 더욱 그렇다.

  이불이 ‘사이보그 여전사’의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국제 미술계가 그의 아시아-여성 마이너리티에 주목했기 때문이다.[2] 때문에 가부장적 아버지를 전복하려는 그의 시도는 애초부터 서구라는 거대한 아버지에 포섭될 수밖에 없었다. 이불의 여전사적 이미지는 ‘다스려진 폭력성’인 것이다. 이불의 작업들은 다소 폭력적인 외면을 갖고 있지만 관객들로 하여금 어렵지 않게 아름답다는 인상을 주며, 초반의 폭력적인 인상은 오히려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 지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불의 <몬스터>와 <사이보그>는 그렇게 작동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불의 작업들은 관객을 압도하고 공격해야 하지 관객의 시선의 포로가 되면 그 괴물적인 공격성의 이유를 잃는다. 다시 말해, 이불의 작업들은 분명히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실상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아야 하는 것들이다.

  이렇듯 이불의 괴물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방식, 즉 예술로써 소화되는 방식이나 그 미적 쾌감의 작동 기전에는 희극이 관여한다. 이불의 괴물들은 물론 1차적으로는 끔찍하고 무서우며, 여기에서는 언뜻 비극의 심연, 혹은 인식의 가장자리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인식의 테두리 바깥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오래 마주하기는 쉽지 않다. 때문에 관객들은 그 긴장감을 서둘러 해소하는데, 이불은 그 해소를 애초부터 설정된 배출구로 몰고 간다. 그 배출구의 이름은 남근에 대한 조롱이다. 관객은 그로테스크한 옷을 입은 이불을 볼 때마저도 그 장면에 놀라기보다는 그것이 지시하는 남근을 바라본다(조롱한다). 그리고 괴물은 이제 괴물 그 자체로 존재하기보다는 여성적 신체의 다른 버전으로서 존재한다.

  마치 <올드보이>에서 근친상간의 소재 위에 최면이라는 천을 덮어두는 배려를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불은 끔찍한 장면을 마주한 사람에게 웃음이라는 퇴출구를 열어두어 배려한다. 그리고 그 배려는 이불 작품의 공격성을 완화하고 아름다운 대상으로 만든다.


3. 이상적 도시의 화려한 추락

  반면 2000년대 이후 이불은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흐름의 이름은 나의 거대한 서사Mon grand récit이다. 이 흐름에서는 초기 작업과는 정반대로 반짝거리는 보석 같은 아름다움이 첫인상을 결정한다. 그러나 한 발짝 더 들어가 그 재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보잘것없는 물건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견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실상은 부서져있고, 추락하고, 별것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 수용자는 일종의 미적 쾌감에 도달한다.

  앞서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은 아름다움대로 놓아두더라도,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그것이 무엇을 위함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불이 구축한 작업들은 일종의 유토피아적인 도시 풍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면 발견할 수 있는 형편없는 재료들에서도 보이듯이 이 풍경들은 정말 완벽하고 지향해야 할 아름다운 풍경이라기보다는 무언가 고장 나고 망가진, 그리고 결정적으로 ‘실패한’ 유토피아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3]

  이후 2014년 한국에서 전시된 현대차 프로젝트에서는 보다 명확히 실패의 징후를 보여준다. 실패의 흔적이 황량한 뉘앙스와 철골구조 등에서 옅게 보였던 2000년대 초기의 작업과 달리, 이후의 작품들에선 실패라는 키워드가 더욱 강조된다. 대상은 부질없는 물건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역동적인 추락의 장면을 보여준다. 이상주의를 상징했던 어떤 비행선은 형편없이 추락해 연기가 피어나고, 반짝거리는 도시의 풍경은 온통 산산조각이 나있다. 이렇게 실패한 유토피아들은 장엄하게 추락하며 비극의 형식을 완성한다.

  앞선 이불의 괴물성이 아름다움을 발산하며 오히려 괴물성의 방향을 잃었던 것과는 반대로, 이 작업들에서는 오히려 아름다워도 괜찮거나 혹은 아름다워야 한다. 왜냐하면 무엇이 비극적으로 추락하려면 그것은 아름다워야 하기 때문이다. 비극은 자신보다 나은 대상이 추락하는 장면이고, 희극은 자신보다 못한 대상을 비웃는 것이다. 슬프고 비극적인 장면을 만드려면 대상이 아름다워야 한다.


4. 추락이 만드는 숭고의 아름다움과 공포

  충분히 아름다운 이불의 작업은 그것이 충돌하고 파괴되고 추락하면서 새로운 감정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숭고이다.[4] 무언가 추락하는 거대한 사건, 시간의 아득함을 느끼게 하는 안개의 사용, 무한히 반사되는 공간에서 우리는 숭고함을 느낀다.

  이불은 거울을 사용해 이 숭고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몬스터>연작 밑에 거울을 깔아 그 괴물이 자리한 바닥의 경계를 허무는가 하면 <Via NegativaII>(2014)에서는 거울로 만들어진 단순한 미로를 만든다거나 <태양의 도시II>(2014)에서는 공간 전체를 조각난 거울로 덮어버린다.

  이불은 조각난 거울을 이용해 바닥을 허물어버리고 관객을 낯선 곳으로 데려간다. 그곳은 이불의 웅덩이로 언뜻 보이는 현실의 대칭쌍이다.

  일상에서는 모든 것이 상승하거나 멀쩡하지만, 이불의 거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황폐화되어있고, 망가지고 추락한다. 상승하거나, 하강하거나 둘 중 하나만 본다면 현기증이 나지 않지만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본다면 우리는 마치 바닥이 없는 곳, 밤에 조명이 비치는 잔잔한 수면, 혹은 위아래가 없는 우주공간에서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상에서 불현듯 숭고함을 느끼게 된다.

  이불의 숭고는 높고 거대한 것에 대한 공포라기보다는 바닥 없는 숭고, 내가 있던 공간의 바닥을 치워버리고 그것의 새삼스러운 거대함을 인식하게 하는 공포이다. 그 공포는 아름답지만 동시에 무섭고 끔찍하다.

  이불의 숭고가 끔찍한 것이라면 작품이 굳이 숭고할 이유는 무엇인가? 왜 이불의 작품들은 끔찍한 장면을 향해서 한 발자국씩 걸어가는 것으로 보이는가?


끔찍해질 이유:그로테스크와 폐허 사이에서
지혜로운 마법사는 오로지 근친상간을 통해서만 태어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중에서


5. 지혜로운 마법사는 오로지 근친상간을 통해서만 태어날 수 있다

  이불의 작품이 반복적으로 끔찍한 장면을 상기시키는 것은 인간이 끔찍한 것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기이한 것에 끌리는가? 거기에서는 어떤 메커니즘이 작동할까?

  그것이 터부이기 때문에 호기심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이한 그림은 왜 터부일까? 어떤 것이 터부인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자주 위반되기 때문이다. 위반할 필요도 없는 금기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신발을 신을 때 맨발로 신지 말 것’과 같은 하찮은 금기는 없다. 일반적으로 금기는 더 중대한 위반과 관련해서 만들어진다.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 아직 썩지 않은 시체를 땅에 묻는 것에 대한 금기. 그리고 신체를 변형하는 것에 관한 금기.

  이런 금기는 섬뜩하다. 위반하는 순간 내가 딛고 있는 땅이 무너지는 금기, 체제를 전복할 가능성이 있는 금기이다.

  그러나 축제와 예술은 늘 혼란에서, 그리고 존재의 한계에서 출발한다. 사람은 현실의 질서가 파괴된 세계와 대면할 때는 긴장하고 섬뜩함을 느낀다.[5] 그러나 눈을 돌릴 수가 없다. 인간은 일상에서 언뜻 비치는 ‘저 너머’에 대한 욕구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고유의 목적telos와 고유의 한계peras는 같은 것을 의미했다.[6] 목적이 한계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한계는 인간의 목적과 결부된다. 저 너머를 보는 것, 인식의 가장자리에서 아슬아슬한 춤을 추는 것은 인간의 목적을 들여다보는 그 뿌리 깊은 욕망과 연관되어 있다. 저 너머는 규범 바깥의 공간, 자연의 위험한 생동력이 움직이는 공간, 인식 너머의 어두운 공간으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소제목 (지혜로운 마법사는 오로지 근친상간을 통해서만 태어날 수 있다)을 이렇게 변주할 수 있다.

  인간의 목적을 들여다보는 것은 오로지 괴물적인 상상력으로서만 가능하다.


6. 폭발해버린 신체와 폭발한 이후의 폐허

  이불의 소프트 조각들은 ‘그로테스크’의 어법을 가지고 금기를 위반한다. 신체 변형의 금기, 여성 신체의 전형성에의 위반이 그것이다. 본래는 그렇기에 섬뜩함을 느껴야 한다. 현실에 존재할 리가 없는 기이한 것을 마주치면 사람들은 긴장한다. ‘현실의 질서가 파괴된 세계’와 마주하면 사람들은 숨을 참는다.

  그러나 긴장은 금방 다른 감정으로 전이되곤 한다. 어떤 경우에는 폭소로, 어떤 경우에는 경이로움으로.

  금방 꺼질 듯이 위태롭게 부풀어 오른 풍선과 그곳에 그려진 아시안 스테레오타입으로서의 여성 이미지와 같은 형상<히드라>(1996)는 이론의 여지없이 남근에 대한 조롱이다. 이와 같이 이불의 ‘피부’는 일반적인 여성의 신체와는 다른 형태를 통해(어떤 경우에는 내부와 외부가 뒤집힌 형태로) 가부장적 시선을 조롱한다. 이불의 그로테스크의 사용에는 이렇듯 기존 권력에 대한 조롱과 조소가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이 작품들은 1차적으로는 질색과 놀라움, 역겨움의 감정을 전달하지만 2차적으로는 그것이 포함하는 조롱과 조소에서 비롯된 웃음을 전달한다.

  이 웃음은 해방구로서의 웃음이다. 난처한 형상을 마주한 사람은 긴장하고, 그 긴장에서 풀려나고 싶어 하기에 그 하나의 기제로써 웃음을 택하는데, 이불은 그 웃음의 방향을 가부장적 시선에 대한 조롱이라는 의도된 방향으로 몰고 간다. 때문에 그 긴장감은 즉각 해소된다.[7]

  다만 이 초기 작품들에서부터 이불의 일관된 미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무언가 폭발하거나 충돌하는 모양, 혹은 반짝거리거나 화려한 조각들, 결론적으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형상을 현실에 불러오는 것이 그것이다. 다만 이 시기에서는 그 화려한 형식(아름다움)과 그 내용(조롱과 조소)이 합치되지는 않는 듯 하다.

  이불의 폭발하는, 혹은 뒤집힌 신체는 여전히 폭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만 <몬스터> 연작에 이르러서 점차 그 힘을 잃어간다. 애초의 목적이었던 조소는 온데간데없고 기이한 아름다움만이 남아있다. 물론 기이한 아름다움만 남아서 현실과의 간극을 상기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여성의 신체여야 할 이유가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불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다.

  2000년대 이후, 이불은 신체의 그로테스크함에서 벗어나 어떤 풍경<Mon grand récit: Weep into stones…>(2005)으로 초점을 바꾸기 시작했다. 각종 철근 구조와 고가도로, 그리고 대형 전광판이 점멸하는 이런 풍경은 다소 쓸쓸하다. 움직이는 사람의 부재 탓일까, 공사 중임을 나타내는 철골 구조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만들어지는 중의 풍경이라기보다는 만들어지다 버려진, 혹은 남겨진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혹은 압도적인 시간이 풍경을 골조만 남긴 앙상한 풍경으로 바꾸어놓았음을 생각하게도 한다.

  이어지는 장면 <Mon grand récit: A portrait of an ideal>(2005)에서는 이불은 풍경을 다시 신체로 바꾸어놓기도 한다. ideal이라는 이름의 어떤 자는 앉아있는데, 동시에 어떤 천에 통째로 가려져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2000년대 이후 이불의 작업이 어떻게 전개될지 암시해준다. 이불이 다루는 대상은 ideal이고, 대상이 처해있는 사태는 어떤 사건이 발생한 이후이다. 모든 것이 끝난 이후, 혹은 죽음 이후에 천으로 덮인 이후, 대상은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이후이고 관람객은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린 곳에서 박제된 대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대상은 이미 소통 가능한 무언가가 아니다.


<After Bruno Taut (Beware the sweetness of things)>(2007)

  동 시기의 이불이 여전히 ideal을 다룬다고 하면 이 샹들리에를 닮은 작품을 해석하는 것 역시 ideal과의 연관성에서 파악해야 한다. 우선 이 작품명은 Bruno taut의 건축물을 암시한다. 그의 건축물 Glass pavillion과 그의 스케치 The crystal mountain 등은 그가 미래에 도래할 것으로 믿었던 유토피아의 일부로, 그는 ‘유리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것’이라고 믿었다.[8]

  그러나 Bruno taut는 재료로 사용되었을 뿐, 괄호 안의 Beware the sweetness of things가 유토피아에 대한 이불의 관점을 대변하기에 더욱 적절하다. ideal이 달콤한 것이라 간주한다면, 이불은 그것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Bruno Taut의 The crystal mountain의 단일하고 반짝이는 표면이 이상적이고 달콤한 꿈을 표방한다면 이불의 <After bruno taut…>는 그 반대항을 자처한다.

  앞선 장면<Mon grand récit: A portrait of an ideal>(2005)과 비교하면 그 모습은 비교적 더 명확해진다. 이불의 샹들리에는 성공해서 반짝이는 무엇, 유토피아적이고 좋은 향기가 나는 무엇이라기보다는 실패한 것, 더 정확히는 성공을 향한 반짝거리는 열망이 실패한 장면이다. 반짝거리는 재료들은 엉망으로 엉켜있고, 그것은 살아있는 생동감을 만들어내기보다는 허공에 죽은 듯이 매달려있다. 엉망으로 엉켜있어 도리어 생동감을 만들어내던 이불의 몬스터 연작과 비교하면 더욱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불의 거대 서사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 매달려있기에 슬프다.

  그리하여 이불은 장엄한 폐허에 도달한다<새벽의 노래 III> (2014)<태양의 도시 II>(2014). 앞선 시도들이 폐허를 대상으로, 조각으로 만들었다면 이 폐허들은 건축에 가깝다. 거대해진 폐허는 대상이라기보다는 경험이고, 나아가 이불이 모티브로 삼았던 구성주의 건축의 내부 그 자체이다. 000년대 이전의 이불이 말 그대로 여성의 신체를 ‘폭발’시켜 불온함을 낳았다면 2000년대 이후의 이불은 ‘이미 폭발해버린’ 장면의 중심으로 들어가 불길함을 낳는다.

  어떤 조각은 충분히 거대해져 건축이 된다. 이불의 조각이 자꾸만 커져 건축이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관람객을 인식의 가장자리로 데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인식의 가장자리로 데려가서, 그 자리에 오래 머물기 위해서는 우선 작품이 보이는 것보다는 경험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앞의 그로테스크한 소프트 조각에서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기이한 것에서 수반되는 긴장은 그렇게 오래 유지할 수 없다. 사람들이 자꾸만 심연에서 눈을 돌리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불의 작품은 폐허여야 한다. 어떤 사건이 ‘이미’ 벌어져 끝나버린 현장은 관객에게 안전함을 보장해준다. 폐허라는 안개를 거쳐서 본다면 인식의 가장자리와 좀 더 오래 눈을 마주할 수 있다.

  그렇게 관객은 인류의 유토피아가 몰락한 광경을, 혹은 몰락할 광경을 마주한다<Willing To Be Vulnerable>(2015). 이불의 작품에서 십자가가 사용된다면 그것은 여러 명이 동시에, 그리고 머리 없이 아슬아슬하게 사용되는 모양으로서다. 이불의 십자가는 위태롭다. 그것은 외발자전거를 타고 있기에, 서로 손을 맞잡고 달리기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머리가 없기에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 그들은 다만 실패를 위해 순교한다.

  투명한 풍선은 반짝거리지만 버려져있고 얇은 막으로 만들어진 타워크레인은 쓰러져 있다. 그 옆에는 앞선 장면<Mon grand récit: A portrait of an ideal>(2005)과 유사한 것이 은폐된 채, 혹은 죽은 뒤 천으로 가려진 채 놓여있다. 다른 십자가는 머리 없는 남자가 아닌 소녀이다. 소녀가 공중에 떠있고, 그녀의 심장에서 폭죽이 터진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너무나 얇고, 투명하고, 취약vulnerable하다.

  이 폐허는 모든 들끓는 열망이 이미 사라지고 그 잔해로서 남아있는 것들의 총합이다. 반짝거리는 소녀는 무언가 꿈꾸기 위해 반짝거리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꿈꾸었던 것의 흔적이다.

  이곳에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투명한 비닐처럼 얇은 것이다.


7. 의식 가장자리에서의 아슬아슬한 춤

  이불의 작품은 자꾸만 규범 바깥의 것을 바라보게 한다. 그것이 괴물적인 형상을 가진 불온한 공격성이던, 황량한 폐허의 불길한 안개이건.

  이런 규범 바깥의 장면을 오래 마주하기 위해서는 해독제가 필요하다. 괴물에는 조소와 조롱이라는 이름의 해독제가, 폐허에는 안개와 시간적 거리감이라는 해독제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는 괴물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후자는 폐허를 온전히 보존하는 결과를 낳았다. 괴물은 충분히 아름다움에도 그만큼 끔찍하지 못해 희극으로 남았지만 폐허는 충분히 아름답기에 기꺼이 끔찍해지는 비극을 받아들였다. 왜 이불의 작품은 기꺼이 취약해지고, 기꺼이 끔찍해지는가? 그것은 니체의 말마따나 지혜로운 마법사는 오로지 근친상간을 통해서만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불의 폐허는 의식의 가장자리에서 아슬아슬한 춤을 추고 있다.



[1] <내가 이 세상의...>의 출처로 보이는 최승자의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에서 해당 구절의 전문은 이러하다. “내 인생의 꽁무니를 붙잡고 뒤에서 신나게 흔들어대는 모든 아버지들아 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
[2] 노현정, “이불(李昢, 1964-)의 <사이보그> 연작 연구”, 28쪽.
[3] 김선정, 이소진, 『UTOPIA SAVED』 (2010), 31쪽.
[4] 김형미, 『MMCA HYUNDAI MOTOR SERIES 2014: LEE BUL 』(2014), 89쪽.
[5] 볼프강 카이저, 이지혜 옮김,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아모르문디, (2011), 45쪽.
[6] 조르조 아감벤, 윤벙언 옮김, 『내용 없는 인간』, 자음과 모음, (2017), 159쪽.
[7] 김예경, “그로테스크 미학 : 공포와 웃음 사이에서 “, 21쪽.
[8] 김선정, 이소진, 앞의 책, 51쪽.


7. 의식 가장자리에서의 아슬아슬한 춤

  이불의 작품은 자꾸만 규범 바깥의 것을 바라보게 한다. 그것이 괴물적인 형상을 가진 불온한 공격성이던, 황량한 폐허의 불길한 안개이건.

  이런 규범 바깥의 장면을 오래 마주하기 위해서는 해독제가 필요하다. 괴물에는 조소와 조롱이라는 이름의 해독제가, 폐허에는 안개와 시간적 거리감이라는 해독제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는 괴물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후자는 폐허를 온전히 보존하는 결과를 낳았다. 괴물은 충분히 아름다움에도 그만큼 끔찍하지 못해 희극으로 남았지만 폐허는 충분히 아름답기에 기꺼이 끔찍해지는 비극을 받아들였다. 왜 이불의 작품은 기꺼이 취약해지고, 기꺼이 끔찍해지는가? 그것은 니체의 말마따나 지혜로운 마법사는 오로지 근친상간을 통해서만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불의 폐허는 의식의 가장자리에서 아슬아슬한 춤을 추고 있다.


[1] <내가 이 세상의...>의 출처로 보이는 최승자의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에서 해당 구절의 전문은 이러하다. “내 인생의 꽁무니를 붙잡고 뒤에서 신나게 흔들어대는 모든 아버지들아 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
[2] 노현정, “이불(李昢, 1964-)의 <사이보그> 연작 연구”, 28쪽.
[3] 김선정, 이소진, 『UTOPIA SAVED』 (2010), 31쪽.
[4] 김형미, 『MMCA HYUNDAI MOTOR SERIES 2014: LEE BUL 』(2014), 89쪽.
[5] 볼프강 카이저, 이지혜 옮김,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아모르문디, (2011), 45쪽.
[6] 조르조 아감벤, 윤벙언 옮김, 『내용 없는 인간』, 자음과 모음, (2017), 159쪽.
[7] 김예경, “그로테스크 미학 : 공포와 웃음 사이에서 “, 21쪽.
[8] 김선정, 이소진, 앞의 책, 51쪽.


 

  <당선소감>

 

   미술의 거대한 세계… 하고 싶은 이야기 아직 많아

  계속해서 지면을 찾고 있었습니다. 관객이 있다면 어디든 좋았습니다.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형태가 무엇이든 좋았습니다.

  그 시작이 미술평론이라 기쁩니다. 저는 시도 쓸 수 있고, 사진도 찍을 수 있고, 이상한 글들도 쓸 줄 알지만 스스로 가장 재미있다고 여기는 것은 미술에 대한 글입니다. 미술은 인간이 형태를 부여한 것 중에 가장 흥미롭고 이상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걸 빚어낸 인간보다 더 흥미로울 때도 있습니다. 자꾸 이해를 거부하거나, 말로 가두려 해도 도망쳐버리는 모습이 제 이목을 끕니다.

  그러나 가끔은 곤혹스럽습니다. 미술이 낯설어질 때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낮잡아 말하게 되고, 글이 어려워질 때면 지레 겁먹고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이것은 제가 아직 모르는 세계입니다. 지금 제 앞에, 제가 모르는 세계가 거대하게 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쓰겠습니다. 알면 아는 대로 성실하게, 모르면 모르는 대로 더 공부하고 쓰겠습니다. 모르는 걸 안다고 우기지 않고 제가 아는 한에서 진실되게 쓰겠습니다. 거대한 세계 위를 재빠르게 비행하며 앞질러 가거나 문 앞에 서서 한없이 기다리지 않고 직접 문을 두드려 두 발로 걸어보겠습니다. 느리지만 꾸준한 제 발이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흥미가 갑니다. 그것이 무의식의 산물이라면, 그리고 지금껏 감춰져 왔던 것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올해는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묵묵히 지원해주신 부모님과 이상한 형을 둔 동생. 항상 귀를 기울여준 호연·인예·은채·신영. 그리고 등산 모임과 글쓰기 모임 친구들, 오래 만나지 못한 고향의 친구들에게 모두 감사합니다.

● 1997년 출생
● 연세대 생활디자인학과 4학년 재학 중


 

  <심사평>

 

  평론가·작가의 대화적 상상력이 중요하다

  올해 미술평론 응모작의 편 수는 많지 않았다. 해가 갈수록 미술평론 부문 응모작 수가 줄어들면서 신춘문예에서 이 분야가 있어야 할지 기로에 서게 됐다. 미술 관련 학위 논문이나 저술을 비롯해 다양한 기회로 평론가가 되는 길이 있지만, 그래도 ‘블라인드 테스트’인 신춘문예는 완전히 계급장을 떼고 경쟁할 수 있는 등용문으로서 위상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올해에는 적은 편 수 가운데도 동양화론부터 현대미학, 인공지능부터 브릭아트(레고블록으로 만든 조형), 도자예술부터 공공미술, 근대부터 현대의 작가까지, 크게 시각예술로 묶이는 여러 형식이 두루 다루어졌다. 올해의 당선작 ‘아름다운 괴물에서 불길한 폐허로: 이불 論’은 1980년대 말에 등장한 이래, 30년 넘게 국내외 미술계에서 중요한 작품을 쏟아내고 있는 작가 이불을 ‘괴물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역설적 개념으로 분석했다. 유명 작가라서 연구도 많을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기에 귀중한 평문이라고 생각된다. 평론가는 작가와 동행하는 자다. 앞서가지도 뒤따라가지도 않는 이 관계에서 대화적 상상력은 필수다. 그것은 예술가와 대중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생생한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너무 멀리 있는 대상이면 불리하다. 비평의 필수 조건인 동시대성에 대한 요구다.

  멀리 있는 대상은 대개 자료로 접근해야 하고, 그런 한에서 객관적 논증이 중시되며, 필연적으로 논문 형식을 요구하게 된다. 이번 응모작의 많은 수가 그런 엄격함에 치중해서 전후좌우의 맥락을 제대로 서술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장황해지는 등의 약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론은 물론 실기 부문까지도 박사과정이 보편화된 현실에서 오랫동안 학교에 머물며 그 문법에 너무 익숙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어떤 작품·작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논문과 평문은 질적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 평문과 논문의 관계는 길이다. 논문을 축약하면 평문이 되고, 평문을 풀어 쓰면 논문이 되는 것이다. 평문은 좀 더 순발력을 요구한다. 대부분 현장의 평론가에게 평문을 쓸 수 있는 시간은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 지면은 더욱 협소하다. 현재 막 생산되거나 회자되는 작품·작가들을 다루는 영역에서 객관성은 자료뿐 아니라 평문의 설득력에 달려 있다. 이번 응모작에서 거의 문인 같은 필력을 보여주는 평문도 있어서 수상작을 선택하는 데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작가·작품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다소간 자유로울 수 없는 비평의 필요 조건상, 연대기적 연구의 꼼꼼함을 겸한 평문을 선정하게 되었다.

심사위원 : 이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