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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어느 순례자로부터 온 편지(안태운론) / 송현지

 

1. 앙투안의 판타지
 
 2003년, 425파운드의 호랑이가 뉴욕 할렘의 어느 아파트에서 발견되었다. 이 호랑이와 함께 살던 이는 앙투안 예이츠라는 이름의 남성으로 그는 태어난 지 8주 된 시베리아 벵골호랑이를 자신의 아파트에 데려와 ‘밍’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와 같이 생활했다. 앙투안과 밍의 비밀스러운 동거는 그들이 함께 산 지 3년이 되던 해, 밍이 앙투안을 물면서 발각되었다. 미디어는 앞다투어 아파트 내부를 자유로이 오가는 밍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러는 사이 앙투안의 침실을 어슬렁거리며 침대 매트리스 위를 가로지를 뿐이던 밍은 어느새 도시와 자연의 경계를, 인간과 비인간동물이라는 종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비인간동물을 둘러싼 근원적인 질문들, 이를테면 비인간동물이 살아야 할 곳은 어디이며, 인간과 비인간동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등이 되물어졌다. 앙투안 역시 여러 차례 이어진 미디어 인터뷰에서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는데 그 대답은 늘 간명했고 낭만적인 데가 있었다. 그는 동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밍과 함께 살았다고 답했으며, 동물과 인간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말을 반복하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한국 문학장에서 여러 명의 앙투안들을 다시 만난다. 그들은 실제로 밍과 아파트를 나누어 살고 있지 않더라도 작품 안에 밍을 데려다 놓으며 밍과 문학적 동거를 하고 있다.1 그들로 인해 인간이 비인간동물과 감각을 공유하며 종의 차이를 넘나드는 장면은 201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의 문학 작품에서 우리가 자주 볼 수 있는 장면 중 하나가 되었다. 비평 역시 이러한 현상에 대해 데리다와 아감벤, 해러웨이 등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경유하여 분석함으로써 새로운 관계성을 상상하는 데 힘을 모았다. 그 결과 할렘의 앙투안이 선취한 종차를 넘어선 관계는 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힌 듯하다.
 그런데 이 글이 최근의 문학을 읽으며 앙투안을 떠올린 것은 단지 우리의 문학이 비인간동물과 그 자리를 나누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문학의 새로운 주제로 비인간동물이 등장하고 그와 관련된 담론이 몇 년간 이어지면서 우리의 문학이 인간과 비인간의 공생적 관계라는 당위만을 반복·재확인해 온 양상이 앙투안의 저 대답을 연상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순진하고 낙관적인 앙투안의 저 믿음처럼2 지난 비평이 종들의 차이가 무화된 현상과 그 윤리적 가치를 용어만을 달리한 채 강조하는 사이3 종들 간의 복합적 경계는 무시되었고 실재하는 현실의 문제는 논의되지 못했다. 공생이라는 윤리적인, 그래서 매력적인 귀결을 향해 비평이 서둘러 달려간 흔적을 우리는 안태운의 시에 대한 그간의 오독에서 찾을 수 있다.

 공터를 잃었네. 있었는데. 옆 사람과 흰 개와 함께 공터 밖을 서성이고 있었는데, 공터를 잃었고 옆 사람은 회상하고 있다. 흰 개는 잃은 공터를 향해 짖고, 못내 짖다가도 지치기를, 나는 바라며 기다렸지만 이내 흰 개를 내버려둔 채 옆 사람과 함께 공터 밖을 산책한다. 둘레의 움직임을 만들면서 걷고 걷다가 내가 바라보는 건 과거의 공터, 고개를 천천히 돌리면 옆 사람을 텅 비우는 공터, 계속 걷자 공터를 처음 잃었던 지점에 도착했는데, 흰 개는 없었다. 짖음도 없었고. 흰 개야. 아무도 없어서, 흰 개가 어디로 갔는지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나는 흰 개마저 잃어버렸네. 옆 사람은 나를 쓰다듬었지. 상심하지 말라고, 엎드려 흰 개의 흉내를 내며.
                                                                                                                                                    ―「공터를 통해」 전문4

 잃어버린 공터를 찾기 위해 공터 밖을 서성이다 흰 개마저 잃은 이들을 다루는 이 작품에서 그간의 비평이 주목한 것은 이 시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흰 개를 잃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옆 사람”이 ‘나’를 흰 개인 양 쓰다듬고 그 자신도 흰 개의 흉내를 내며 엎드림으로써 그들 모두가 흰 개와 유사해지는 이 장면은 ‘나’와 흰 개, 그리고 “옆 사람”이 “서로 얽히고 변하는” 모습을 통해 인간과 개가 동등한 실체자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로 거론되거나5 ‘나’와 흰 개의 “긍정적인 결속”을 보여주는 장면으로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실천”의 연장선상에서 설명되었다.6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간과한 것은 정작 저 장면에 흰 개는 없으며 인간만이 남아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흰 개는 이곳을 떠났고 공터는 사라졌다. 그들은 흰 개를 흉내 낼 뿐 흰 개가 될 수 없으며, 없는 개의 존재를 서로에게 대신해 주려는 그들의 몸짓은 사라진 개의 존재를, 그리고 개가 사라진 현실을 잠시 잊게 해줄 뿐이다. 오히려 이 장면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흰 개와 함께할 공터를 되찾으려다 흰 개마저 잃어버린 어리석은 인간들이 행하는 낭만적 연대의 민낯이다.
 이러한 장면에서 종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을 읽고자 하는 비평의 욕망은 증상적이다. 시 속 그들의 연대가 “없는 개”(「없는 개를」)의 존재를 은폐하면서 개가 없다는 결핍감보다 서로가 있다는 충만감을 느낀 것처럼 지금의 비평은 비인간과의 공생적 관계를 문학에서 함께 사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윤리성을 확보한 것인 양 고무되며 작품과, 그리고 다른 비평들과 공모하였던 것은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지난 비평에 의해 오독되었던 안태운의 이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오독이 작동하는 방식을 신랄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안태운의 신랄함은 이 작품만이 아니라 그의 두 권의 시집 여기저기에서 확인된다. 그는 우리가 아무리 꿈에 머무르려 “감은 눈으로” 지낸다고 해도 사건은 꿈과 “다른 곳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감은 눈으로」), 그간의 연대가 ‘없는 개’의 존재를 상상으로 메우면서 은폐해 온 것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지금 안태운의 시를 읽는 일은 지난 비평의 욕망이 구축한 환상의 기만에서 벗어나 실재를 살피는 일이다. 이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난 후에야 우리는 인간과 비인간동물의 동등한 관계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2. 바깥의 동물들

 안태운이 눈을 뜬 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여기에는 “인간과 비인간 (…) 상호 간의 긍정적인 연결”7은 없다. 작품과 비평이 공히 인간과 비인간의 새로운 관계성에 대한 상상을 이어가면서 문학 내부에서 일어난 패러다임의 전환이 마치 현실8이 되었다는 서술은 현실에 비해 너무 빨리 도착해 있었다. 여전히 지금-이곳에서 비인간동물은 배제되며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는 견고한 분할선이 그어져 있다. 안태운은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하는 삶의 양식을 상상하기 전에 눈을 뜨면 마주하는 이 장면들을 자세하게 적는다.

 날벌레가 날고 있었다. 그는 방 안에 있었다. 내가 바라봤을 때 그는 창을 열었고 창밖에서 소음이 들렸으며 날벌레는 방 안에서 날고 있었다. 그는 방충망을 열고 싶었다. 하지만 방충망은 열리지 않았으므로 그는 날벌레를 창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그는 움직이고 있었다. 현관문 쪽으로 손짓하면서 여기로 오라고, 안내하듯이 여기로, 그는 다가가 문을 열었다. 거기까지는 날벌레가 따라오지 않았고 그럼에도 열린 문을 통해서는 누구라도 대신 나가야 할 것 같았고 그는 문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날벌레는 날고 있었다, 방 안에서. 여전히 문밖으로는 나오지 않은 채 창 주변을 맴돌았고 그는 문밖에서 서성였다.
 열린 문으로 날벌레가 나오길 바라며 그는 한참을 기다렸다. 날벌레는 나올 리 없었다. 어떻게 밖으로 불러낼 수 있을지 그는 궁리했고 문밖에서 집 둘레를 걸으며 아까 열었던 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 그는 도구를 찾으려 했다. 다행히 발견할 수 있었고 구한 도구를 이용할 줄 알았으므로 그것으로 방충망을 찢고 있었다. 날벌레는 날고 있었다. 그는 방충망의 찢어진 공간을 통해 손을 넣었고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그 순간 날벌레는 창밖으로 날아올랐다. 그는 날벌레를 바라보다가 이내 찢어진 방충망에 시선을 두었다. 더 찢을 수 있었다. 그는 그 공간으로 몸을 밀어 넣을 수 있었고 실제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 그는 방 안에서 다시 손짓하며 날벌레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들어올 리는 없지. 그는 애타게 손짓하고 있었다. 애타게 찾고 있었다, 날아갈 수 있는 것을. 나는 방에 숨어서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열린 창과 열린 문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열린 창과 열린 문」 부분

 날벌레를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러한 현실을 극명하게 제시하기 위한 그의 전략이다. 날벌레는 비인간동물 중 하나이지만 인간이 돌봐야 하는 반려동물이나 가축이 아니며, 기후 위기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북극곰도 아니다. 그들은 인간과 늘 가까이 있으나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사유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그야말로 바깥의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우리와 함께 방 안에 있다면 그들을 잡아 죽이거나 방 밖으로 내보내는 일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안태운은 이 일상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상세하게 그림으로써,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날벌레를 방 밖으로 내보내려 할수록 부조리극의 주인공처럼 우스꽝스러워지는 ‘그’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자연스레 행하는 이 행위가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것인가를 드러낸다. 이는 안태운이 다소 도식적인 방식으로 인간과 비인간이 위치하는 장소(안/밖)와 그들이 오가는 출입구(창/문)를 구분해놓은 데 기인하는데 시 속의 ‘그’가 날벌레를 밖으로 내보내는 과정에서 인간의 것으로 인정되었던 영역이 허물어지며 씁쓸한 웃음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날벌레를 방 밖으로 내보내려던 ‘그’가 오히려 방 ‘밖’에 위치하게 되고 날벌레는 여전히 방 ‘안’에 남는다거나 ‘창문’을 통해 ‘그’가 방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그러하다. 이는 인간이 비인간과 자신을 구획하기 위해 설정한 경계가 얼마나 자의적이고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방증한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놓인 상상의 분할선에 대한 안태운의 비판적 시선은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지만 이는 ‘비인칭시’로 명명되는 최근의 작품들이 그러하듯 이들이 동등한 실체자라는 사실을 단순히 주장하기 위함으로 보이지 않는다.9 그것은 방충망을 찢어서라도 날벌레를 내보내려는 ‘그’의 광기 어린 행동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나’의 정체성을 안태운이 불명확하게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열린 창과 문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느 출구로 나갈지를 고민하는 ‘나’는 벌레인가, 아니면 ‘그’와 같은 인간인가. 안태운은 이를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써 이 일상적 사건을 섬뜩한 광경으로 바꾸어 놓는다. 방의 ‘안’을 자신의 자리라고 주장하며 다른 존재들을 밖으로 내보내려는 인간이 있는 한 장소에서 배제되는 것은 비인간만이 아니라는 섬뜩한 진실. 이러한 진실 앞에서 비인간과 인간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점에서 동등해진다.
 반려동물의 경우는 어떠한가. 유계영의 「개와 나의 위생적인 동거」 등에서 확인되듯 최근의 시들이 반려동물과 인간이 공생하는 장면을 주로 다루는 것과 달리 안태운은 반려동물이 어떻게 교묘한 방식으로 장소에서 배제되는가를 보여주는 데 공을 들인다. “사람들만이 가능하다”라는 종차별적 발언이 스스럼없이 이루어지고, 반려동물과의 분리를 입고 있는 옷을 벗는 일과 동일하게 치부하여 이를 쉽게 요청하거나 인간의 필요에 의한 예외적인 경우에만 개의 머무름을 허용하는 장면들을 안태운은 「기르는 얼굴」에서 차례로 담아낸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이러한 행동이 반려동물을 기르지 않는 자들에게만 국한되어 행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물론 반려동물을 기르는 이들의 행위는 더욱 교묘해서 이를 눈치채기란 쉽지 않다. 그간의 평들이 아래의 시에서 화자와 흰 개의 감응 장면만을 짚어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흰 개가 있어. 나와 함께 공터를 산책한다. 흰 개는 나의 개이자 공터의 개 그러므로 나와 함께 공터를 산책하지. 산책하며 서로 사라지기도 하지. 나는 흥얼거리며 흰 개를 두고 달렸다. 흰 개는 나를 따라 달렸다. 하지만 흰 개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더 빨리 달려. 더 빨리, 나는 속으로 외치며 더 빨리 달렸어. 흰 개는 쫓아오다가 쫓아오기를 그만두고 멈춰서 나를 쳐다보기만 한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는 흰 개에게 되돌아가지.
 (…) 나는 공터를 산책하고 있지. 공터를 돌면서 흥얼거린다. 공터의 흰 개, 사람들의 흰 개 그러니 나는 흰 개와 멀어져서 공터를 돌고 있다. 흰 개가 없으니 빨리 달려도 괜찮아. 더 빨리 달릴 수 있다. 공터를 계속해서 달리고 싶어. 나는 더 빨리 달렸다, 더 빨리. 그래도 더욱더 빨리 달릴 수는 없었지. 문득 내 뒤로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게 슬퍼졌지. 아무도 내 뒷모습을 바라보지 않는 게 낯설었다. 흰 개는 어디에 있나. 나는 흰 개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나를 잊었으려나.
 (…) 흰 개는 공터를 돌았어. 공터를 끝도 없이 돌 것처럼 돌며 돌다가 공터 밖으로 뛰어나가고 있다. 공터를 벗어나자 흰 개는 일어났다. 일어나서 아주 천천히 걸어 나갔다.
                                                                                                                                 ―「흰 개를 통해」 부분

 일단, 이 시의 화자는 흰 개와 함께 산책을 하고 있지만 이 행위가 그들의 동등함을 드러내는 표지는 아니다.10 화자는 산책 도중 별다른 이유 없이 흰 개를 혼자 두고 달리거나 다른 이들에게 그를 놓아두다가도 그가 필요해지면 흰 개에게 되돌아가는 등 내키는 대로 흰 개를 대한다. 시종 자신을 따라다니는 흰 개를 그가 “나의 개”이자 “공터의 개”, “사람들의 흰 개”라고 명명하는 것 역시 문제적인데 이는 그가 흰 개를 누군가의 소유물이자 어딘가에 속해 있는 존재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여기에 “소중한 타자”11로서의 흰 개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우리가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혼자 남은 흰 개가 공터 밖을 벗어나는 장면을 시인이 상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개가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독립적인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한 우화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태운이 최근 발표한 「생물 종 다양성 낭독용 시」(『현대시』, 2021.5)에서 세계 밖으로 내쫓긴 여러 종들이 있다는 사실을 짚으며 그 절멸한 종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장면은 반려동물에게도 예외 없이 닥칠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읽힌다. “차별의 상징체계를 전복할 힘이 없는” 흰 개가 더 이상 자신의 존엄성에 손상을 입지 않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서 “주어진 장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12
 인간이 그들을 애타게 부르며 다시 손짓해도(「열린 창과 열린 문」) 이미 세계 밖으로 사라진 비인간들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안태운은 직감한다. 인간과 개가 함께 산책할 수 있는 공(空)터가 더 이상 공(共)터가 되지 않을 때 서로의 만남은 다음과 같이 회상의 양식을 빌린 가상에서만 가능하게 될지 모른다.

 그럼 나랑 같이 놀아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속으로 여러 차례 목소리를 내봤어요. 그럼 나랑 같이 놀아요. 입을 통해서도 말했습니다.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듣지도 입 모양을 보지도 못했을 테지만. 나는 말했어요. 이 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밤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지금 나는 거기 없지만 훗날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럼 나랑 같이 놀아요, 하고 반복했습니다.
 (…) 이 기차는 사람을 태우지 않고 갑니다. 사람이 없으니 내부는 텅 비었고 외부에서 누군가 창문을 통해 바라봅니다. 텅 빈 안에서라도 누군가는 밖을 쳐다보는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기차와 멀어져가요. 나는 편지를 따라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어디에 있나요. 나는 어디 있는 건지. 나랑 같이 놀아요.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사실은 잘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기는 싫었어요.
                                                                                                                                 ―「백설」 부분

 「생물 종 다양성 낭독용 시」에서 그가 나열했던 “랩스 청개구리(Ecnomiohyla rabborum)/ 브램블 케이 멜로미스(Melomys rubicola)/ 포오울리(Melamprosops phaeosoma)/ 크리스마스섬집박쥐(Pipistrellus murrayi)/ 콰가(Equus quagga quagga)/ 세실부전나비(Glaucopsyche xerces)/ 스텔러바다소(Hydrodamalis gigas)/ 타이완구름표범(Neofelis nebulosa brachyura)”은 이미 멸종되어 시라는 가상의 세계에서만 거주하고 있는 생물들이다. 시인은 위의 시에서 ‘백설’과 같이 흰 개의 목소리를 재현하며 흰 개의 미래가 그들과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경고한다. “같이 놀아요”라는 반복적인 요구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제는 글 안에만 거주한 채 더 이상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 흰 개(“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사실은 잘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기는 싫었어요”). 이것이 안태운이 바라본 비인간동물의 현실이며 다가올 미래이다.



3. (제)자리라는 정치성

 인간과 비인간동물의 관계적 불균형이 비인간동물의 장소 상실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한 안태운은 장소의 문제에 천착하여 그들의 관계성을 재구성할 수 있는 방안을 사유한다. 인간을 “지배할 자격을 갖는 자”로 간주하고 인간의 지배 아래 결집된 질서를 ‘정상적’인 것으로 여겼음13을 문제 삼은 그는 이제 이 질서의 정상성을 의심하게 하기 위해 장소를 정치적인 장소로 변형시킨다. 「산양」의 버스가 바로 그러한 장소이다.

 버스가 온다. 버스와 마주하고 있다.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어린 산양을 안은 채로 그는 좌석에 앉는다. 허벅지 위에 산양을 앉히고 있다. 그것을 팔로 감싼다. 쓰다듬고 있다. 그러면 버스는 비포장도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산을 휘돌며 올라가고 있습니다. 절벽을 경유한다. 마을에 이르렀고 버스는 정차하고 있었다. 몇 사람이 내리고 있었다. 또 몇 사람은 오르기 위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중에는 산양을 들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 사람을 본다. 좌석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가 일어나고 있다. 산양을 안은 채로 문으로 다가가고 있다. 산양을 건네주고 있습니다. 다른 산양을 건네받으면서. 그는 다시 돌아와 앉았다. 버스는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산양은 잠들어 있다. 동물의 냄새는 버스 안으로 퍼져 간다. 버스는 다른 마을에 도착해 간다. 또 다른 사람이 산양과 함께 있었다. 그는 그것을 바꾼다. 다시 좌석에 앉는다. 버스는 출발한다. 정차하고 있었고 이러한 행위는 반복되고 있었다, 순례를 하듯이. 빈자리는 차차 늘어나고 있었다. 버스는 또 다른 마을에 이르러 있었다. 여기서는 다들 내려야 합니다. 내린다. 사람들은 내리고 있다.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마지막으로 기사마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일어서고 있었다. 기사가 앉았던 자리에 산양을 앉힌다.
                                                                                                                                 ―「산양」 전문

 야생에 있을 법한 산양이 사람의 품에 안긴 채 반려동물처럼 쓰다듬어지고 산양과 사람들을 태운 버스가 산을 휘돌며 올라가다 지명이 없는 마을들에 차례차례 정차하며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루는 이 시는 비현실적이고 기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 기이한 분위기를 걷어내면 이야기의 구조는 의외로 단순하다. 산양을 안고 버스 밖에 있던 ‘그’가 산양과 함께 버스 안으로 자리를 옮기고, 버스가 정차할 때마다 버스 안과 밖의 산양의 자리가 바꾸어지다 종국에는 버스 기사의 자리에까지 산양이 앉게 되는 이야기. 이 이야기를 지탱하는 것은 자리바꿈의 반복이 전부인 것이다.
 비인간을 분할선 밖으로 내보내며 장소에서 배제해 온 앞서의 인간들을 생각해 볼 때 버스 밖에 있는 산양을 버스 안으로 데려와 자신의 허벅지 위에 자리를 내어주는 ‘그’의 행위는 다분히 시사적이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사건들을 통해 안태운이 보여주는 것은 자리바꿈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수행인 것이다. 예기치 않은 장소에 놓인 산양으로 인해 우리가 생경함을 감각한다는 사실은 ‘제자리’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얼마나 완고한 것인가를 확인하게 한다. 산양만이 버스에 남아 있는 저 마지막 장면 앞에서 우리가 이 낯섦의 기원을 찾아가다 보면 우리는 장소의 주인이라는 것은 과연 정해져 있는 것이며, 장소에 인간만이 존재하는 것이 ‘정상적’인 질서인가를 새로이 의심하게 된다.
 그런데 존재를 예기치 않은 자리에 앉힘으로써 기이함을 발생시키는 ‘그’의 이러한 행위는 안태운이 첫 시집에서부터 시점의 변주를 통해 반복해 온 것이기도 하다.

 고인 물은 멈추지 않고 있다. 잎이 떨어지고 벌레가 드나드는 탕으로 물이 모여 있다. 자정하고 있다. 숲 속의 탕 주위로 새가 날고 새의 언어는 구전되어 떠돌고 있다. 너희는 가고 있었다. 탕으로 연결된 길을 따라서. 그러나 이미 다다랐다고 너희 중 한 명이 말하고 너는 너희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탕이 생성되어 있다. 너희는 입수한다. (…)
                                                                                                                                 ―「탕으로」 부분

 여기에는 자리를 옮기는 산양은 없다. 대신 낯선 자리에 앉은 산양과 같은 문장이 있다. 이를테면 “너는 너희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라는 구절을 살펴보자. 이 문장에서 안태운은 주어의 자리에 ‘나’ 대신 ‘너’를 놓는다. 오해의 여지가 있는 이 말은 시란 화자의 내면 고백이며 ‘나’의 제자리란 주어의 자리라는 재래적 장르 관념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작품에서 안태운이 ‘나’ 대신 ‘그’와 ‘너’를 주어의 자리에 둠으로써 그의 시가 1인칭 발화가 주를 이루는 서정시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종류의 기묘한 느낌을 전달하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1인칭의 역습”14이라 할 만큼 현실과 맞닿은 1인칭 발화들이 우위를 이루는 최근의 시들 사이에서 2인칭, 때로는 3인칭으로 발화하는 그의 시의 독특성을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런데 저 문장의 기이함은 단순히 주어를 ‘너’로 상정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리에 의도적으로 이와 어울리지 않는 다른 존재를 앉힘으로써 발생한다. ‘너희’를 ‘너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분명 ‘너희’에 속하지 않는 ‘나’이지만 안태운은 ‘나’라는 인칭을 지우고 ‘너’를 주어로 삼음으로써 어색한 문장을 발생시킨다. 마치 주어를 ‘나’로 썼다가 주어의 자리에 ‘너’만 앉힌 것처럼 1인칭 시점의 잔여물을 남긴 이 문장을 통해 그는 ‘제자리’라는 고정된 관념을 흩트리는 것이다.15
 물론 인간과 비인간의 제자리가 있다고 믿고, 그 자리를 고정하고자 했던 노력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는 점에서 이미 정해진 질서와 제자리에 대한 견고한 관념을 깨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산양」이 다분히 ‘현실적인’ 수행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수행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현실적인 문제 역시 안태운이 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태운은 버스 밖에서 안으로 산양이 한 마리 옮겨질 때마다 버스 안에서 밖으로 다시 내보내지는 산양을 함께 언급한다. 어느 한 마리의 산양이 장소 안에 머무르거나 기사의 자리를 점유하는 순간 또 다른 산양이 다시 장소에서 배제되는 사태는 장소의 안과 밖을 가르는 분할선이 우리의 생각보다 공고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이러한 행위가 마법처럼 단숨에 바깥의 존재를 모두 안으로 들여올 수는 없음을, 그 과정에서 희생하는 수많은 비인간들이 존재함을, 그리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기까지의 여정이 지난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태운이 이 자리바꿈을 ‘순례’에 빗댄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는 이 행위가 인내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행해야 하는 고된 여정과 같으며, 그것이 현실적 이익이 아닌 다분히 윤리적인 가치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또한 이러한 “물리적 노력”이 궁극적으로는 태도의 변화라는 “형체 없는 목적지”에 닿기 위한 행위16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처럼 ‘자격 없는 자와 몫 없는 자로 배제’17되었던 산양에게 자리를 주어 그들을 환대하고 그들을 위해 자리바꿈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행위를 ‘순례’로 지칭하는 한편, 이 행위의 주체자를 ‘사람’으로 직접적으로 명시한다. 이는 그가 ‘인간, 그러니까 나인 인간’18이 자신의 자격과 몫을 직접적으로 요구할 수 없는 비인간을 대리하여 이러한 순례를 행함으로써 이 사태 해결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4. 산책의 중지

 그렇다면 안태운이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성급한 “구분의 중지”19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자리바꿈을 시를 통해 수행함으로써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였다고 할 때 그의 이 수사적이고 상징적인 행위는 과연 어떤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일까.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다소 우회할 필요가 있다.

 자재는 운반을 필요로 한다. 자재가 운반되고 있다, 노동력으로. 여기서 저기로 필요가 불어나고 있다. 자전거가 도로 밑으로 돌진한다. 도로 위로 가스가 새고 있다. 그와는 별개로 운반은 반복되고 있다. 이 자재는 강도가 셉니다. 이것으로 기초를 세웁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파동이 감지되고 있다. 국외에서는 난이 일어나고 있다. 밖에서 안으로 공간에 따라 빛이 증감한다. 그와는 별개로 필요는 망각되지 않는다. 필요는 운반되고 있다. 숲이 허물어진다. 필요 없이도 경기가 진행된다. 그와는 별개로 노동력이 이동하고 있다. 강이 가능하지 않게 된다. 자재로 자재의 원천을 깨뜨린다. 묘사할 수 없게 되었다.
                                                                                                                                 ―「자재로」 전문

 먼저, 안태운이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위 시를 살펴보자. 이 시에서 사건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필요”는 끊임없이 생산되며 노동력은 쉴 새 없이 자재를 운반한다. “몸을 나르는 몸”들이 서로를 “재촉하”며(「원경」) 자재의 원천을 소진시킬 때까지 자재를 운반하는 이 세계의 성격을 유동성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안태운은 존재들 간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파편화된 세계가 사실은 좀처럼 “망각되지 않는” “필요”라는 하나의 코드로 이어져 빠르게 흘러가고 있음을 현 세계의 특성으로 짚어낸다.
 세계의 속성이 이러하다면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 역시 이 속도에 떠밀려 시간과 함께 흘러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필요”와 무관하다면 밖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우리와 “별개”의 일들에 불과하며 우리는 우리 밖의 인간들과 비인간들을 무심히 지나치며 서로가 서로의 “행인들”(「행인들」)이 된다.
 안태운의 저 반복적인 수행은 이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의 시가 여러 차례 버스의 좌석에 산양을 앉힐 때(「산양」), ‘나’의 자리에 ‘너’를 둘 때(「탕으로」) ‘제자리’에 대한 우리의 공고한 관념이 흔들리며 발생하는 저 생경함을 그의 말을 빌려 ‘이국 정서’라고 칭해보자. 그는 이 이국 정서가 우리를 멈추게 하는 순간들을 아래와 같이 적는다.

 이국 정서, 걷다가 나는 순간순간 무춤하면서도 왠지 이제는 뒤돌아봐야 한다고 느꼈고 그렇게 돌아보니 과연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멀쩡한 풍경 속에 있었는데도 이국 정서, 그것에 휩싸인 듯해서 다시 돌아봤죠. 무언가 훅 끼쳐왔으므로 어떤 냄새 속에서 순간 길 잃은 듯 아연해졌습니다. 하지만 갈 길이 있으므로 간다. 가고 있어. 도중에 할 일을 계속하면서도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지. (…) 어떤 공간을 떠올리면 내 신체가 그 공간과 맞닿아 있는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이국 정서, 멀리 있는 인간에게 안부를 보내기도 했지. 멀리 있지만 언젠가 볼 수 있지 않겠어요, 하지만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르고, 거기서 부디 잘 지내길, 그렇게 안녕과 행복을 기리는 것, 그런 둥근 마음을 주고받는 것, 멀리 있는 인간에게, 그러자 누군가의 이국 정서 속에 내가 있는 듯도 해서 아득하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 나는 내내 멈춰 있었는데 약속 장소에서 가방을 든 누구도 나를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국 정서」 부분

 “경계를 넘어 다른 도시로 향”했을 때 “순간순간 무춤하면서” 뒤를 돌아보게 했던 낯선 느낌을, 그리하여 걷는 행위를 잠시 멈추었던 순간을 안태운은 시 안의 자리바꿈을 통해 우리에게 되돌려주려 한다. “간다. 가고 있어”와 같은 그의 시에서 되풀이되어 온 굴절되는 서술 방식은 이 작품에서는 더 이상 지루한 “시집 내부의 클리셰”20가 아닌, 그의 시를 여러 번 끊어 읽게 함으로써 우리를 잠시 멈추는 효과적인 방법론이 된다.
 이 멈춤은 분명 우리를 쉽게 “약속된 장소”로 데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버스가 정차하였을 때 비로소 버스 안에 산양의 자리가 마련될 수 있었던 것처럼 이 멈춤은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실질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
 새로이 자리를 배치함으로써 우리를 멈추게 하는 일, 아니 멈춤을 통해 새로이 배치된 풍경을 확인하게 하는 일, 그리하여 제자리의 정치성을 의심하게 하는 일. 이것이 바로 안태운이 시를 통해 행하는 창발적 수행이다.
 이제 당신에게는 서로를 지나치며 걸어가는 행인들을 멈추어 세우며 안태운이 건네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로이 들릴지 모른다. “잘 지내나요, 행인들/ 행인을 멈추며 행인이 되어보고자/ 나는 허밍을 합니다”(「행인들」). 너무나 오랫동안 “움직이는 것들에만 반응”해 온 이들을 쉽게 멈추어 세울 수는 없기에 그는 허밍이 달아난다면 “시도 때도 없이 허밍을 하고”, “노래가 되어 춤을 춰보”며 계속해서 말을 건넨다. 이렇게 반복하여 “누군가를 서성여” 본다면, 이 생경함 앞에서 산책을 멈추고 “여기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문득 낯설어하며/ 주위를 둘러”보다 “인간으로서 잘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인간의 어떤 감정과 장면」, 『문학동네』, 2021년 가을호), 멀리 떨어져 있는 이의 안부를 물어볼 이가 있으리라 믿으며.
 “산책하는 사람에게” 건네는 그의 편지가 오늘 당신에게도 당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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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년대 후반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동물을 주제로 한 시집, 소설집, 에세이집 등이 그들을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이다. 시집으로는 유계영 외,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 아침달, 2019; 권민경 외, 『그대 고양이는 다정할게요』, 아침달, 2020.
 2 물론 앙투안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 말들은 그가 긴 법정형에서 벗어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전략적인 말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사실 여부를 파악하는 것은 이 글의 논의와 무관하다. 다만, 이 글이 그의 말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과 비인간동물을 쉽게 동일성으로 환원하거나 동물을 사랑한다는 말만을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하며 무책임한 일일 수 있는가를 성찰하기 위함이다. 같은 아파트의 주민들은 밍의 먹잇감이 될 가능성에 놓여 있었으며, 맨해튼의 번화가에 위치한 공동주택에서 호랑이를 보았다고 말한 이들은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아야 했다. 앙투안 역시 밍에게 물려 치료를 받아야 했음은 물론, 밍은 결국 동물보호 센터에 갇힌 채 생을 마감했다. 앙투안과 밍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미국 Animal Planet 채널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2010)과 필립 워널의 (2014) 등 참조.
 3 최근까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포스트휴먼 논의와 객체지향 존재론에 기반한 글들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논의들은 인간과 비인간의 공생적 관계를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충분하지만 그 매력적인 당위만이 거듭 확인된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이 비판적으로 검토할 비평으로는 차미령, 「고양이, 사이보그 그리고 눈물―2010년대 여성 소설과 포스트휴먼 ‘몸’의 징후들」, 『문학동네』, 2019년 가을호; 김보경, 「인간의 가장자리로 걷기」, 『문학과사회』, 2020년 여름호; 김지윤, 「비인칭 객체들의 헤테로버스, 포스트휴먼의 감각」, 『청색종이』 창간호, 2021.
 4 이 글에서 인용하는 안태운 시의 대부분은 『감은 눈이 내 얼굴을』(민음사, 2016), 『산책하는 사람에게』(문학과지성사, 2020)에 수록되어 있다. 이하 두 시집에 실린 시를 인용할 때는 시 제목만을 표기하고 시집에 실리지 않은 시를 인용할 때는 따로 서지사항을 밝혀 적는다.
 5 김지윤, 위의 글, 51-54쪽.
 6 김보경, 「시퀀스를 연습하세요―안태운론」, 『문학과 사회 하이픈』, 2021년 봄호, 71쪽.
 7 김보경, 앞의 글, 2020년 여름호, 423쪽.
 8 차미령, 앞의 글, 535쪽.
 9 비인칭시에 대한 설명은 김지윤, 앞의 글, 49쪽 참조. 김지윤은 이 글에서 최근 시가 “특정한 ‘인칭’으로 환원되지 않는 가변적인 다중주체들”을 보여주며, “인간과 동물, 사물의 목소리가 동등하게 존재하는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10 김보경은 「인간의 가장자리로 걷기」에서 산책하는 행위가 인간과 비인간의 동등함을 드러내는 지표라고 설명한 바 있으며 이러한 해석의 틀을 그대로 가져와 안태운의 『산책하는 사람에게』에 적용하였다. 김보경, 앞의 글, 2021년 봄호, 71쪽.
 11 도나 해러웨이, 「반려종 선언」, 『해러웨이 선언문』, 황희선 옮김, 책세상, 2019, 118쪽.
 12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20쪽.
 13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08, 220쪽.
 14 이는 2019년 3월 28일, 까페창비에서 이루어진 7차 <요즘비평포럼>의 포럼명을 인용한 것이다.
 15 이 외에도 안태운은 ‘제자리’란 없으며 우리의 위치가 정해진 것이 아님을 다양한 방식으로 강조한다. 가령 「어느 주말에 이르러 침대와 의자」에서 그는 침대와 ‘나’의 위치 및 의자와 ‘나’의 위치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상황을 그림으로써 비인간인 사물과 인간의 관계 내에서도 고정된 자리는 없다는 자신의 관점을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나’의 자리는 침대 위나 의자 위에 놓이며 ‘나’는 그곳에 누워 있거나 앉아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지만, 그는 ‘나’가 침대의 “네 다리를” “두 팔로” “혼자 들어 올린 채” 침대의 아래에 있는 장면과 “의자 위에 마냥 서” 있는 장면을 그림으로써 제자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기하고자 했다.
 16 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김정아 옮김, 반비, 2017, 90쪽.
 17 자크 랑시에르, 앞의 책, 223-227쪽.
 18 이는 자크 데리다의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최성희·문성원 옮김, 『문화과학』76, 문학과학사, 2013)에서 사용된 표현을 차용한 것이다. 이러한 말을 빌리면서 이 글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안태운이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동물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완전히 지우거나 그들 사이의 동질적 연속성을 강조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이 단절의 심연을 인정하였다는 사실과 인간을 바라보는 동물의 시선에 주목한 데리다와 달리 동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에 주목(「안개비」)함으로써 인간책임주의를 수행하려 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19 이 용어는 황정아가 아감벤과 데리다의 동물담론을 비교하며 아감벤식 해법을 간명하게 정의한 것을 빌려온 것이다. 황정아, 「동물과 인간의 ‘(부)적절한’ 경계: 아감벤과 데리다의 동물담론을 중심으로」, 『안과 밖』, 영미문학연구회, 2017, 98쪽.
 20 신형철, 「선택 2016년 겨울」, 『문학동네』, 2017년 봄호.


 

  <당선소감>

 

   좋은 시에 목소리 보태 서툴더라도 길 찾을 것

  당선 소식을 듣고 학부 시절 보냈던 겨울방학들이 생각났습니다. 겨울방학이면 저는 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린 채 그해 모아둔 문예지들에서 시가 수록된 페이지들만을 골라 읽어보곤 했습니다. 이 연례행사가 끝난 것은 ‘아, 나는 평론가가 될 수 없겠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린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시를 오래 보아야지만 읽을 수 있던 저는 동시대 시인들과 함께 호흡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척 절망했습니다. 문학 연구자로 살기로 했던 것은 시를 천천히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논문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의미 있는 말이라면 느리게라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르치는 학생들의 자리를 빼앗는다는 미안함보다 좋아하는 시들에 제 목소리를 보태고 싶다는 열망이 커질 무렵 글을 내보았습니다.

  소박한 저의 글에서 가능성을 보아주신 김형중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산양’의 ‘그’가 그러했듯 버스 밖의 저를 안으로 데려가 기사의 자리에 앉혀 놓으셨어요. 서툴더라도, 구부러진 산길에서 길을 잃지 않겠습니다. 저를 호렌스타인으로 살게 해준 ‘바람의 연구자’ 선생님들, 세 분의 다정함이 저를 글 쓰게 했습니다. 인간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게 해준 달래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항상 용기를 주는 은영이, 오랜 친구 수민이,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육감’ 친구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느린 제자를 묵묵히 바라봐 주시는 이남호 선생님, 매번 애정 어린 그림편지를 보내주시는 윤석달 선생님, 사랑으로 저를 품어주시는 서재원 선생님, 아무것도 없는 저를 믿어주시는 장옥관 선생님의 응원이 늘 힘이 되었습니다. 누구보다 저의 등단을 기뻐하실 저의 높은 산 아버지, 시간을 기워 쓸 수 있게 당신의 시간을 선뜻 내어주신 어머니, 두 분에게만은 마음껏 응석을 부리겠습니다. 할머니와 라희를 비롯한 다른 가족분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남편과 딸 나연이에게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다정함을 잃지 않고 성실히 쓰겠습니다.

● 1984년 대구 출생.
●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 현재 고려대 한국어문교육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


 

  <심사평>

 

  문단의 화두로 떠오른 ‘비인간동물과 연대’… 숱한 ‘오독’ 파헤쳐

  시나 소설 응모자 수에 비할 때, 올해 문화일보 문학평론 분야 응모자 수가 많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투고된 열일곱 편의 비평문을 검토하면서 놀랐던 것은 두어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독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수준이 고르다는 점이었다.

  심사를 맡은 선배 평론가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열일곱 편 중 함량 미달의 두 편을 제외한 열다섯 편을 정독했다. 그중 최종적으로 손에서 내려놓지 못한 채 다시 읽어야 했던 글은 세 편이었다. ‘어느 순례자로부터 온 편지 - 안태운론’ ‘파편들의 연대, 차세대 필멸자들의 상생법 - 송승언론’ 그리고 ‘폐기되는 젊음과 인간-물질의 사유법 - 서이제론’이 그 글들이다.

  신인의 비평문들을 읽을 때 우열을 가리는 기준은 대체로 세 가지다. 비평 대상이 적절한가? 그가 한국 문학장의 맥락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판별하기 위해서다. 비평적 장치 혹은 도구를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그가 앞으로도 훌륭한 글들을 생산해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공부가 되어 있는가를 판별하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지배적인 담론을 거슬러 읽으려는 비판적 의지가 충분한가? 왜냐하면 그가 앞으로 한국 문학장에 보탬이 될 새로운 담론을 산출할 능력이 있는지를 판별하기 위해서다.

  ‘폐기되는 젊음과 인간-물질의 사유법’의 경우 좋은 문장과 적절한 대상 선택에도 불구하고,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해석하는 범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웠다. 이 글 한 편만으로는 글쓴이의 시야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파편들의 연대, 차세대 필멸자들의 상생법’의 경우도 이와 유사했다. 송승언의 시 세계를 ‘죽음 이후에 대한 끈질긴 사유의 과정’으로 읽어내는 독법의 꼼꼼함이 돋보였으나, 결국 블랑쇼와 낭시의 공동체론에 기대는 결말은 별로 새롭지 못했다.

  결국 ‘어느 순례자로부터 온 편지 - 안태운론’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실은 처음 읽을 때부터 어느 정도 결정된 선택이기도 했다. 이 글은 ‘비인간동물과의 종차를 넘어서는 연대’라는 한국 문학장의 최근 화두를 안태운 시인의 두 시집을 통해 비판적으로 조망하는 글이다. 그러나 이 화두와 관련해 오독을 누적하고 있는 현재 비평장의 ‘낭만적 낙관’을 결에 거슬러 읽음으로써, 되레 종차를 넘어서는 비인간과의 연대라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작업을 필요로 하는지를 역설하는 글이다. 비평 대상과 장치의 적절성, 그리고 생산된 결과물의 새로움에서 이 글을 능가하는 비평문을 최소한 올해의 투고작 중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당선자에게 축하와 격려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 김형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