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당선작>

  죽어서도 죽지 않을 한녀들의 러브레터 -김멜라론 / 윤소예

 

1. 자살하는 딸들

  딸들이 죽는다. 김멜라의 소설에서 젊은 여성들은 죽고 싶다고 말하거나(「물질계」) 자해하거나(「논리」) 자살을 시도하거나(「모여 있는 녹색 점」, 「물오리」, 「제 꿈 꾸세요」) 혹은 이미 죽어 있다(「제 꿈 꾸세요」). 「물질계」에서 홍주는 ‘죽고 싶다’는 말이 “현상적 비물질 상태를 은유한” 것 뿐이니 오해 말라 했고, 「제 꿈 꾸세요」에서 ‘나’는 “약물 과용”으로 자살을 먼저 시도하긴 했으나 “사흘 만에 깨어나” 실패로 돌아간 이후 “급히 먹은 원 플러스 원 초코바에 목이 막혀 죽”었으므로 사망 원인은 “엄연한 사고사”임을 밝혀두고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멜라의 세계에서 딸들의 자살은 부표처럼 위태롭게 넘실거리며 계속해서 범람한다. 아니, 오히려 죽음 앞에서도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사실 여부를 확실히 정리해두려는 특유의 개의치 않음과 태연함의 태도 때문에 더욱 그들이 자살과 가깝게 서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바이러스를 퍼뜨렸다는 사회적 죄목으로 눈초리를 받다 “집에 있는 약을 다 갖다 모아 한꺼번에 삼킨” 「물오리」 속 딸은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코로나19 바이러스 발병 이후 2020년부터 20대 여성의 자살률이 급증하며 젊은 여성들의 자해 및 자살이 사회적 문제로 가시화되었기 때문이다. ‘조용한 학살’1)이라 일컬어졌고, ‘코로나19는 공평하지 않다’2)는 외침이 들려왔다. 이에 20대 여성의 자살 원인에 대한 여러 분석이 사후적으로 쏟아져 나왔지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성찰은 “팬데믹을 통해 우리 사회를 잘 몰랐다는 것을 깨닫게”3) 되었다는 고백이다. 20대 여성들이 ‘죽을 만큼’ 힘든지는 몰랐다는 거다. “코로나로 인해 가속한 측면”이 있을 뿐 “이는 코로나 이전부터 나타”나던4) 문제였다는 말마따나 여성 청년 자살을 전혀 새롭거나 갑작스러운 뉴스인냥 조명하려는 천연함에는 분명 새삼스러운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문제를 가시화하고 ‘왜 여성들은 죽고 싶을까’를 마침내 공적으로 묻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죽고 싶어 하는 딸 앞에 선 부모들의 심정을 묻지 않을 수 있을까. “‘아빠도 따라간다!’”고 외치며 목을 매는 과격한 퍼포먼스로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애한테” “그런 죄는 죽어서도 천국 못 가는 죄라고” “기도인지 꾸중인지 모를 소리나” 하던 교회와 “슈퍼 전파자라는 딱지를 붙여 애가 다녔던 데를 무장 공비가 침투한 것마냥 읊어대는 뉴스와 신문”으로 대표되는 사람을 “살게 해”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아빠(「물오리」)가 있는가 하면, “아빠한테 제일 소중한 사람은 너야. 아빠는 아빠 자신보다 네가 더 소중해. 엄마 대신 네가 죽었으면 어땠을 것 같냐고 네가 물었을 때, 그때 아빠가 대답하지 못했던 건, 그건, 마음이 너무 아파서였어. 상상만 해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빠는 가슴이 다 부서지는 것 같았어. (…)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생각 하지 마. (…) 몸에 상처도 내면 안 돼. (…) 아빠가 미안해.”(「논리」)라고 죽지 말아 달란 애원에 가까운 사과가 초조하게 터져나오기도 한다.

  “어머니 세대인 1951년생의 자살사망률과 1981년생의 자살사망률을 비교하니 1981년생의 자살사망률이 5배나 높았다”고 한다. “(자살하게끔 만드는) 삶의 조건들이 5~7배 증가했다는 것”5)이다. 말하자면, 엄마들은 그다지 죽고 싶지 않다. 딸이 왜 죽으려고 하는지 공감하는 것이 어렵다. 하지만 “턱부터 이마까지 가면을 벗기듯 손톱으로 (…) 자기 살을 쥐어뜯”고 “자기 발을 뼈다귀로 착각해 깨무는 강아지처럼 멍한 시선으로 고개를 꺾은 채 손마디를 깨”물고 “정수리에 손을 얹고 뚝뚝뚝 머리카락을 뽑아”내는 행동을 반복하는 어린 딸의 위태로운 징후 앞에서, “고름이 맺힌 손톱”과 “동전만한 구멍이 생긴 정수리. 물어뜯고 깨물어 붉은 생살이 드러난” 상흔으로 점철된 작은 몸 앞에서, “왜 그래, 하지 마, 무슨 짓이야?”하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딸의 ‘죽고 싶음’을 향해 “화내는 소리”는 이제 어떻게든 “배울게. 엄마도 공부할게. 그래서 사람들을 찾아가 보여줄게. (…) 너의 엄마가 되는 법을 배우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공부할게.”라는 다짐을 꾹꾹 눌러 담은 “Letter, 편지”6)로 수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병명 안에 담기지 않는 것들: 딸은 왜 아픈가

  한국에서 죽음은 충분히 논의되지 않다 못해 거의 터부시된다. 내세관이 없는 유교 사상의 영향7)으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현세와 물질 집착적 사고가 지배적이며, 심폐 정지 및 생물학적 기능의 종결로서 선고되는 사망은 곧 완전한 끝이자 삶의 단절로 여겨진다. 더불어 의료기술의 발달로 죽음을 지연시킬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어떻게 잘 죽을까가 아닌 어떻게 죽음을 최대한 지연시킬까로 포커스가 옮겨간 것이 한국의 최빈도 죽음의 공간을 요양병원과 중환자실로 축소시키는 요인이 됐다. 하지만 사망은 누가 선고하는가. 죽음은 어떤 권위에 의해 축소 정의되는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는 죽음이 삶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믿음을 재생산하게 되는가. 지난 9월 열린 제5회 웰다잉 포럼에서 한국생사학협회장 오진탁 한림대 철학과 교수는 ‘병원 임종’은 의학적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며 삶의 질뿐만 아니라 ‘죽음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깊이 있는 고민과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살에 관한 사회적 침묵은 특히 문제적이다. “한국은 매년 1만3018명, 하루에 약 36명씩 자살하는 국가이지만 정작 자살에 관한 논의 자체는 텅 비어 있다. 자살이 도처에 만연한데, 모두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지낸다. 가족은 자살을 수치로 여긴다. 남겨진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한다.” 하미나는 사회학자 정승화의 논의를 빌려와 “자살이 의료화되고 우울증과 연결되면서, 결국 개인적인 치유 문화의 논리 안에서만 설명되기 시작했”으며 때문에 “한 사람의 죽음과 관련된 공적·정치적 내용이 텅 비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자살의 원인을 우울증으로 보게 되면, 여러 맥락 속에 있는 고통을 단순히 개인의 치료 문제로 환원하게 되고, 이는 자살을 둘러싼 사회경제적 설명과 의미를 끌어내는 것을 막는다”8)는 것이다. 가임기 여성들에게 저출산의 책임을 떠넘기는 출생률 관련 인구 정책들이 자주 도모되는 것과 대비되게 “자살 관련 정책이 증발해버”9)렸던 2022 대선 후보들의 선거 전략은 그 빈 공간을 여실히 보여주며 공적 층위에서 여성 자살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현주소를 시사한다.

  「코끼리코」에서 ‘202호’는 자신의 삶에서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이 된 “안간힘을 다해 허리를 세워보려 했던 수년 전의 그날”을 떠올린다. ‘그날’, 제사상에 올릴 생선찜을 하기 위해 찜통을 들어올리다 “척추 4번, 5번” 디스크에 강력한 통증을 느낀 그는 직감적으로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나”를 돌이켜보는 죽음에의 주마등을 경험한다. ‘202호’는 아버지의 유산 분배를 두고 입씨름을 벌이는 오빠들에게 “정형외과에 갔다가 비싼 도수 치료비에 전전긍긍한 끝에 내과로 가서 위통 약을 받고 피부과에 들러 가려움 완화 연고를 처방받는 자신의 심정을” 호소하며 “일을 하면 할수록 새로운 병만 늘어나 월급보다 병원비가 더 많이 나간다며, 편히 쉬면서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다고 말했다.” 보상금을 요구하는 일종의 민사재판처럼 이루어지는 이 대화 속에서 가슴 “한가운데 끈적하고 미끄덩한 고름이 찬 것처럼 갑갑하다고, 속은 늘 가스가 찬 것처럼 더부룩하고 허리 디스크 때문에 편히 누워 잘 수도 없다”는 병리적 증상들에 대한 서술은 증언이 되고, “팔뚝에 난 갈색 반점”과 “불그죽죽한 화상자국”이 기록되어 있는 ‘202호’의 몸은 자체로 증거물이 되며, “둘째 오빠가 믿을 수 있는 대학병원”의 공인을 받은 “병원 진단서”는 “그동안 202호가 열심히 살아왔다는 걸 보여주는 증빙 자료”로 기능한다.

  일련의 유사 재판을 통해 (제한적이지만) 물질의 풍요와 자신만의 공간을 획득해낸 ‘202호’의 고군분투는 스스로를 긍정하는 해피엔딩의 탈을 쓰고 있으나 한편으로 미심쩍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소설 안에서 ‘잘 죽고 싶다’는 욕망이 곧 ‘치료 거부’로 치환된다는 점이다. 분명 병리적인 신체 증상들과 통증이 존재하고 치료 또는 요양의 필요성을 체감하지만 ‘202호’는 ‘병원비’로 쓸 수 있는 충분한 금액의 예산을 손에 쥐고도 병원 대신 “칠이 벗어진 벽과 녹슨 구조물들 때문에 맨션 전체가 마치 갈색 눈물을 흘리고 있는 듯” 보이는 “언제 헐릴지 모를” 개나리맨션으로 향한다.

  같은 맥락으로 “의사는 뭐래. 피부에 왜 그런 게 나는 건데.”라는 오빠의 질문에 ‘202호’는 “몰라. 검사해도 병명이 안 나와. 내 병은 내가 잘 알아. 나 오래 못 살아.”라고 자가 진단을 내려 시한부를 선고한다. 그녀는 왜 아픈가? 이 ‘왜’의 지점에 두 층위가 있다면 질문자인 오빠가 물은 ‘왜 아프냐’는 질문은 면허를 소유하고 있는 의사의 권위 있는 의학적 설명으로 대답 되길 기대받는 명료한 것일 테고, ‘오래 못 살아’라는 ‘202호’의 진단에서 비롯된 왜 오래 살 수 없는가에 대한 질문은 ‘산다’는 일 자체에 대해 깊이 파고들며 서론에서 제기되었던 ‘딸들은 왜 자살하는가?’의 문제의식과 겹쳐질 뿐 아니라 “어머니 없는 집에서 유일한 여자로 살아온 자신의 처지”와 떨어져서는 결코 대답 될 수 없는 지점으로 향하게 될 테다. 그리고 이 ‘왜’는 병명 없음, 즉 의사가 진료할 수 있는 의학적 한계 너머 더 뿌리 깊은 차원의 일이다.

  흔히 여성 우울증의 원인을 호르몬 등 생물학적 요인으로 한정하는 현대 의학의 “설명은 우울을 경험하는 여성의 구체적인 사회문화적 맥락을 지워버린다.” “왜 유독 여성의 질환을 설명할 때는 남성의 질환을 설명할 때보다 생물학적 원인을 더 들먹이는가?” “남성의 우울은 여성의 우울과 달리 성 호르몬보다는 사회문화적 요인으로 설명된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 역시 성호르몬을 갖고, 또 특정한 생애 주기를 경험하지만, 테스토스테론은 남성의 정신질환을 진단하는 데에 주요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의학에서 표준이 되는 몸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남성의 몸이 표준이 될 때 아픈것, 병리적인 것, 비정상적인 것은 남성 몸 바깥에 놓인 것이어야 한다.” 19세기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아’라는 병명 아래 여성의 짜증스럽고 반항적인 성격 구조를 자궁이 몸 안에서 움직여 발생 되는 정신질환이라고 분석했다. 나는 오늘날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는 구호 아래 범주화되는 ‘예민한’ 여성들을 본다. 인식론적 차원에서 여전히 “여성의 우울은 그 원인이 여성의 ‘비정상’적인 몸 안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곧 여성이 아픈 것은 ‘원래 그렇게 태어나서’이다.” 이러한 역사 아래 「코끼리코」 속 병명 없는 고통에 대한 ‘202호’의 자가 진단과 ‘치료 거부’는 여성을 범주화하는 오랜 무기로 이용되어온 정신병의 낙인과 “함부로 한 존재를 병리적으로 보는 무례함”10)을 은밀히 폭로하는 정치적 전략으로 기능한다.

  ‘치료 거부’로 나타나는 의학적 권위에 대한 탈출 시도는 ‘유사 재판’적인 화자의 독백 서술 형식 자체와도 맞물린다. ‘치료 거부’가 아홉 살 때부터 군대에서 휴가 나온 오빠에게 “라면 끓여주다 덴” 일이나 혼자 “새벽부터 일어나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다 허리를 다친 일 등 ‘202호가 왜 아픈가’에 대한 유력한 용의자로 추정되는 불합리의 정황들을 단 몇 음절의 병명 아래 치료 가능한 질환으로 환원시키는 거짓말(내지는 도둑질)을 막기 위한 선택이라면, ‘유사 재판’은 ‘202호’가 집에 머무는 시간이나 집에서 무얼 하는지 관찰하는 아래층 상가 중년 남성들의 위협적인 무례나, “바로 옆에 있는 남자 화장실을 두고” “자꾸 여자 양변기에서 소변을 보는” 침범의 폭력 앞에서 이 “정도는 자신이 감수해야 할 불편함이라 여”기고 적응해서라도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과 “잘못한 사람은 통닭인데 왜 내가 숨고 조심”해야 하며 “왜 나만 꼬박꼬박 존댓말 쓰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건지 묻게 되는 “증오나 분노 같은” 양가감정이 충돌하며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202호’의 “몸의 통증보다 다른 사람이 던지는 비난의 말에 더 깊은 상처를 받곤 했던” “순하고 무른 성격”을 드러내는 효과를 가진다. ‘보상금’을 획득하기 위한 오빠들과의 논쟁에서 보여진 ‘유사 재판’적 묻기-변호하기의 형식이 ‘202호’의 내적 차원까지 이어져 있다는 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과장하자면, ‘202호’에게 ‘산다’는 일은 실상 죽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을 무한한 재판의 과정이며 묻기-변호하기는 그가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이미 깊숙이 체화돼있다.

  여성 화자의 내면화된 자기검열로서 ‘유사 재판’은 쉬이 큰따옴표를 업어 발화되지 않고 독백의 단락 안에서만 편집증적으로 소용돌이친다. “왜 말하지 못했을까. 왜 그때 통닭 앞을 가로막고 서서 따져 묻지 못했을까.” 자기 자신을 피고 삼아 책망하는 심문 끝에 ‘202호’가 마주하게 되는 건 “옆집 남자의 씨발 소리”나 “내가 도끼로 확 찍어버릴 테니까.”라고 외치는 “통닭의 고함” 앞에 “놀라 몸을 움찔”한 채 “자기도 모르게 손끝이 떨리며 얼굴과 귀가 붉게 달아오르”고 마는 신체적 반응과 말 줄임표(…)로 처리되고 만 ‘여자 화장실에 자물쇠를 달겠다’는 안전 보장 요구 발화의 끝내 완결되지 못함이다. 이 지점에 다다라 우리는 앞서 ‘성격’이라고 서술된 ‘202호’의 ‘유사 재판’적 독백이 사회적으로 학습되거나 강제된 침묵은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어진다. 고통을 고통이라고 인정받지 못할 때, 생존을 넘어 실존의 위협 앞에서 여자들은 ‘왜 나는 …’으로 시작되는 자책과 무력의 미궁 속에 고립된다.



3. 다중 쟁점으로의 확장: 약함으로 연결되기

  말하지 못하는 고통은 「저녁놀」 속에서 ‘눈점’에게 변곡점으로 작용한 또 다른 ‘그날’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눈점’은 버스 하차 문 사이에 끼인 채 몇 미터를 끌려가는 사고를 당한 뒤, 자려고 누울 때면 몸을 떨며 경련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오는 불안감과 숨이 멈출 것 같은 갑갑함을 느끼며, 더 이상 버스를 타거나 출근을 할 수조차 없게 된다. 눈점이 진단받은 ‘입면 장애’와 ‘스트레스 장애’, ‘공황장애’라는 병명 뒤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대로 정류장을 떠났던 버스 기사의 무책임과 여자 승객을 욕하던 택시 기사의 폭력은 감춰지고 ‘눈점’은 “왜 나는 남들처럼 무뎌지고 담담해지지 않는” 건지 “남보다 더 넘어지고 아파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책망하며 고립되어간다. ‘눈점’은 병원의 처방을 통해 치료되기는커녕 오히려 “입안 가득 넣은 알약에 목이 막혀 죽을 것”만 같다. 인정받지 못하는 ‘눈점’의 고통 속에서 ‘202호’가 기시적으로 겹쳐 보이는 건 우연일까.

  본명 대신 자신이 거주하는 집의 호수로 불리는 ‘202호’의 ‘이름 붙이기’가 내 집 마련은 고사하고 생존을 위한 근본적인 자원 부족과 씨름해야 하는 청년의 사회적 지위를 보여줌과 더불어 말하지 못하는 여성 고통의 맥락에서 이름 잃은 여자 되기를 보여주고 있다면, ‘눈점’과 ‘먹점’이라는 ‘이름 붙이기’에는 역시 여성으로서 서게 되는 취약한 자리와 사고를 당한 후에도 꿋꿋이 출근해야 하고 “급여는 그대로인데 업무량은 나날이 늘어”가는 불안정한 노동 및 경제적 지위에 대해서도 드러나지만 무엇보다 “두 여자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애정 표현을 하기 녹록지 않은 세상”에서 “점점 점이 되어가는 것”만 같은 퀴어 정체성이 강력히 스며들어 있다.

  “나와 지현이는 언제까지 먹점, 눈점이어야 할까”를 묻게 되는 지점은 먹점이 회사에 연차 사유로 “아내가 감기 기운이 있”다고 말하지 못한 때였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여성의 고통이 ‘히스테리아’ 또는 ‘페미니즘(이라는 정신병)’으로 병리화됨으로써 그리고 여성 우울증의 의료화로써 여성들이 어떻게 범주화됐는지 기억해보자. 동성애 또한 정신병으로 여겨졌던 역사가 있다.11) 「호르몬을 춰줘요」에서 보여지는 ‘남자가 될 건지 여자가 될 건지’의 이분법적 선택의 기로에 놓인 인터섹스 아동이 겪는 혼란과 의료적 침해는 “남성과 여성을 엄격하게 서로 배타적으로 구분하는 정의가 인터섹스에게 성기 수술을 해서 지켜야 하는 거라면, 그런 정의란 과연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이겠는가”12)하는 의문을 제기하며 이분법적 성 구분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개념임을 시사한다. 병으로 규정되는 어떤 특성들에 대한 진단은 정말 고정적이고 믿을 만한 것이며, 이들의 아픔은 ‘의학’에 의해 치료될 수 있는 개인적 문제일까. 김멜라는 ‘의학’이나 ‘과학’13)이라는 권력 아래 누군가를 병리화하고 범주화하는 무기로서 쓰여온 ‘진단’의 ‘이름 붙이기’를 가져와 취약한 자리들을 조명하는 가시화 전략으로 이용하고 있다. 제도 안에서 누군가의 보호자가 될 수 없다는 ‘자격요건 없음’의 배제 논리에서 드러나는 것은 지목된 자들의 자격 부족이 아니라 그 자격요건 자체의 의뭉스러움뿐이다.14)

  같은 맥락에서 죽음은 또한 누가 제도 밖으로 밀려나 있는지, 취약한 존재들을 가시화하는 민감한 구멍 같은 지점이 되기도 한다. 딸은 상주가 될 수 없으며, 혼인신고를 할 수 없는 동성애자 연인들 역시 공식적인 가족으로 상주의 자리에서 장례 절차에 참여할 수 없다. 동물들은 인간의 식자원으로 분류되어 살해당하며(「홍이」) 반려동물로 입양되어 ‘가족’이라 임명받은 동물들 또한 죽어서 사체가 되고 나면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려야 하는 법적 생활폐기물로 분류된다.15) 고독사한 지 7개월 만에 백골로 발견된 한 노인이 풍기는 시체 썩는 냄새(「홍이」)가 가시지 않은 와중에, 돈 낭비를 해선 안 된다는 이유로 하루라도 빨리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체’의 할머니가 곡기를 끊는 방식으로 꾀하는 느리지만 단호한 자살 시도는 차마 웃어넘길 수 없는 묵직함을 남긴다(「나뭇잎이 마르고」).

  자신의 살아있음에 있어 ‘돈 낭비’라는 부채 의식을 무겁게 지고 자살을 시도하는 할머니는 또한 자신의 첫 손녀 ‘체’를 어린 시절 바닥에 떨어뜨려 뇌병변장애를 가지게 만든 원인 제공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할머니를 탓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체’는 식음을 전폐한 할머니에게 음식을 먹일 방법을 강구하기보다 함께 굶어 자살에 동참하는 쪽을 택하는 어딘가 “헤아릴 수 없는 크고 높은 면”을 가진 인물이다.

  사람들에게 “먼저 주고, 준 만큼 되돌려받지 못해도, 다시 자기의 것을 주”며 먼저 카드를 꺼내 계산하기를 꺼리지 않던 ‘체’는 그러나 학교 홍보 모델로 선발됐다는 전화에 “옹사오 영예고 옹짜오 우여억을 행악 하이 마고 제애오 온을 지울해어(봉사고 명예고 공짜로 부려먹을 생각 하지 말고 제대로 돈을 지불해요)!”라고 목소리를 키운다. 일라이 클레어는 오랜 비장애 중심주의의 역사 아래 프릭 쇼에서 의사의 진료실로, 호기심에서 연민으로, 오락에서 병리로 한 인식틀이 또 다른 인식틀로 바뀐 것뿐 장애를 범주화하는 인식 자체는 변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오히려 진료실에서, 길모퉁이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놀이터에서, 레스토랑에서, 비장애인들이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빤히 쳐다볼 때, 교묘하고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오늘날의 범주화가 장애인을 구경하는 대가로 최소한 입장료는 지불했던 과거 프릭 쇼에서의 관음증적 장애 전시보다 더 나아진 게 없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꼬집었다.16)

  장애의 의료화는 교묘하고 일상적으로 장애인의 통제력을 빼앗아간다. 의사들은 태아에게 핸디캡이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에서부터 장애를 초래하는 다양한 증상이 있는 나이 든 사람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장애인의 삶에 중심적으로 관여하며 재정적 혜택의 할당액을 결정하고, 교육 설비를 선택하고, 노동할 능력과 잠재력을 측정하는 일에도 관여한다. 이 중 어떠한 경우에서도, 의학적 훈련과 자격증이 곧 의사를 그러한 개입에 가장 적절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말이다.17)

  분명 서로 특수한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여성-퀴어-장애가 의료화를 통해 어떻게 범주화되어왔는지 역사를 톺아보며 우리는 적어도 배제와 차별을 작동하게 하는 어떤 공통의 프로토콜 같은 것을 찾아낼 수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처럼 말하고 그녀처럼 웃기를 바랐다”던 ‘앙헬’이 ‘체’의 결혼하자는 말에는 ‘섹스도 중요하다’고 차갑게 일갈해 거절한 것처럼, 비장애인 여성이 장애인의 고통에서 공감할 수 있는 공통의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는 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체’가 자신을 힘으로 제압하지는 못할 거라는 물리적 힘의 우위에 대한 믿음과 장애인을 무성적 존재로 보는 시선 속에서 분명하게 읽히는 위계를 느낀다.

  하지만 물리적인 힘의 우위를 통해 상대가 나를 해치거나 공격할 수 없음을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다는 한 여성의 두려움과 경계를 단순히 위계 의식으로 읽어내도 괜찮은 것일까. 또한 반대로 “여자 가슴이 좋다”는 ‘체’의 말이 무성적 존재로 치부되는 장애인이자, 레즈비언 퀴어 존재의 발화로서 정치적 힘을 획득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성 착취와 포르노그래피가 과잉되어있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여성 신체 부위에 대한 성적 대상화에 일조 혹은 공모하는 불편함을 상기시킬 여지를 가지지는 않는가?

  복잡한 건 그뿐이 아니다. 앞서 여러 단락에 걸쳐 회의적으로 비판해온 ‘의료화’는 과연 절대 악인가. 아무리 그것이 반쪽짜리 인정이라 할지라도, 병명을 진단받고 약을 처방받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아픔이 언어화된다는 사실에 위로받기도 한다. ‘202호’의 ‘대학병원 진단서’가 권위로부터의 승인을 근거하며 가족들로부터 아픔을 인정받고 어쨌든 돈과 집을 비롯한 경제적 자원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기능했던 것 또한 축소하거나 누락할 수 없는 성과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재고해봐야 하는 것은 의료화의 당사자들이 단순히 시스템 속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대단히 적극적인 행위자일 수 있다18)는 사실이다.

  ‘눈점’은 자신이 아프다는 걸 인지하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정신과를 찾아간 여자였으며, 「저녁놀」에서 ‘이름 붙이기’는 퀴어로서 살아가는 삶의 난처함만을 말하는 슬픈 행위가 아니라 서로 사랑을 속삭이는 애정 어린 별명 붙이기이자 대파나 표범 인형, 딜도 같은 무생물에게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마음을 나누는 일을 가능케 하는 사랑의 행위이기도 했다.

  “개나리맨션이 좋고, 그곳에 사는 자신이 좋았다”는 ‘202호’의 고백을 ‘미심쩍은 해피엔딩’으로 일축했던 「코끼리코」의 결말을 다시 읽을 필요성 또한 요구된다. “씨부랄 거, 그냥 좀 싸!”라는 부정의 언어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실소 같은 무의식적·본능적인 긍정의 언어 앞에서만 샘물 터지듯 흘러나오는 오줌 줄기의 요동치는 물성과 생명력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는가. “제사상을 차리다 병이 나긴 했지만 엄마의 제사상이었으니까, 아버지가 먹을 콩자반과 멸치볶음이었으니까 202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던 ‘202호’의 아빠를 향한 고마움과 엄마를 향한 그리움과 그 흘러넘치는 사랑을, ‘개나리맨션 202호에 사는 내가 좋다’는 자기 긍정으로서의 ‘이름 붙이기’의 맥락을 모두 누락한 무례를 어찌 되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까.

  김멜라가 직조해낸 “칸과 칸 사이에 절취선이 그어진 휴지처럼 자의/타의로 말끔하게 끊어지지 않고 불규칙한 선으로 찢겨 나간” “빈 괄호”(「제 꿈 꾸세요」)의 세계에서 우리는 복잡성의 아름다움을 본다. 점선을 따라 명료하게 일직선으로 찢어지지 않는 지저분하고 애매하고 불규칙한 이음매, 틈새, 연결부에서 경이롭게 흩날리는 먼지를 본다. ‘어떻게 딸들을 살릴 수 있을까’를 묻는 부모의 마음에서 처음 시작된 질문은 이제 확장될 수밖에 없어진다. ‘앙헬’과 ‘체’ 사이의 미묘한 위계를 혹여라도 ‘여성 대 장애인’의 대립으로 보거나 ‘누가 제일 고통받는가?’를 측량 및 대결하는 파이 싸움으로 끌어갈 의지 또한 상실된다. 그 대신 ‘여자들의 사랑 이야기’를 쓴다는 김멜라의 말19)을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사랑의 세계”20) 안에서 “‘이삼십 대 여성의 고통을 보아달라’기보다는 ‘이삼십 대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달라.’”21)는 연루의 요청으로서 읽어내야 할 필요성만이 오롯이 파도친다.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인간으로서 버려야 할 단점이자 취약함”으로 여겨졌던 “자신 아닌 다른 존재에게 공감하고 되도록 폭력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하는” 다른 말로 “잘 느끼는”(「저녁놀」) 나약함은 이제 여기서 누구보다 잘 사랑할 수 있는 강력하고 유리한 특성으로 재구성된다.



4. 편지 쓰는 마음으로

  어느덧 두 번째 소설집을 출간한 김멜라의 작품세계에서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호르몬을 춰줘요」 속 의료화의 이분법적 성 구분 강제의 침해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던 아이는 「논리」에서 엄마의 죽음과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고 자해하는 아이로, 「홍이」 속 사람에게 잡아먹히고 또한 사람을 잡아먹는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경계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존재로서의 개는 「유메노유메」 속 꿈속을 경유해 인간과 연인 사이가 되는 사랑의 주체로서의 고양이로 그 계보가 이어져 왔다고 본다면, 최근작들에서는 특히 사후세계 즉, 죽음 이후의 이야기에 대한 상상이 두드러진다는 게 큰 차이점이다.22)

  「호르몬을 춰줘요」에서 어린 아이의 시점으로 겪는 혼란은 이태원이라는 공간과 ‘천사-트루’로 불리는 퀴어 인물에 의해 잠정적으로 구원받으며 일단락된다. 「논리」에서는 혼란스러워 하는 아이 ‘엘리’를 걱정하며 지켜보는 죽은 엄마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서술되며, 자해 충동으로 나타나는 ‘엘리’의 혼란은 ‘과카몰레’로 지칭되는 짧은 머리의 여자와의 관계를 통해 말린 꽃잎이 따듯한 찻물 안에서 잎을 펼치듯 마음을 펼치고, 그에게서 서핑을 배우면서 파도타기를 성공하고, 훗날 어른이 된 후에는 연인과 함께 서핑을 즐기면서, 결국 자신을 긍정할 수 있게 되는 성장담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중요한 것은 이미 죽은 ‘나’가 교통사고가 나던 날의 꿈을 반복해서 꾸면서 트라우마 속을 헤매고, 닿지 못하는 망자의 신분으로 유가족들의 곁을 맴돌면서 무언가를 깨달아가는 과정 안에 있다. 몇 번이고 처절하게 트럭과 충돌하면서 되뇌이는 오직 유일한 깨달음은 딸인 ‘엘리’가 “누구를 만나든, 누구와 사랑에 빠지든” 아무렴 괜찮아지는 ‘살아 있음’ 그 자체의 절대적인 소중함이며,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살아 있을 때 뭐가 중요한지, 삶과 죽음, 우리가 단절되어 있다고 믿는 그 사이에 어떤 힘이 있어 우리를 서로에게 연결해주는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연결되기’에 대한 각성적 깨우침이다.

  「유메노유메」에서 또한 꿈은 망자와 산 자를 연결해주는 시공간으로 기능한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단순히 ‘고양이에서 인간이 되었다’고 의도적으로 부분 생략되는 설명은 결말부에 이르러 “난 봄이 지나면 돌아가야 해. (…) 죽은 고양이들이 사는 나라”(로). 라고 말하는 ‘유메’의 고백에서 미애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꿈이라는” 진실을 자각하게 하며 극적인 반전 서사를 꾀함으로써 ‘유메’와 ‘미애’의 이별에 몰입하게 만든다. “프랑스인에게 발견돼 캐나다인에게 키워졌다 일본에 사는 한국인과 살았던 고양이답게, (…) 모든 장벽을 부드럽게 뛰어넘어 미애의 꿈에 찾아”온 ‘유메’는 미애에게 “미애는 내 최고의 친구였어. 언제나 나의 엄마, 언니, 사랑하는 여보야. 이제 난 안 아파. 그러니까 나한테 그만 미안해해도 돼. 아침이 되면 즐겁게 일어나서 또 하루를 시작해.”라고 위로 섞인 작별을 고한다. “이 사람의 손에서 저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듯 (…) 고양이와 인간을 넘나들며 미애의 꿈에 찾아와 미애를 위로”한 ‘유메’의 망자로서 산 자의 꿈에 찾아가는 사랑법은 「제 꿈 꾸세요」에서 이어진다.

  「제 꿈 꾸세요」 속 망자가 된 ‘나’는 길손이 되어 길잡이인 챔바를 만나고 누군가의 꿈으로 향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런데 “어떻게 서로 다른 개체의 뇌신경 활동이 하나로 연동될 수 있을까. (…) 나는 내 생각이 챔바와 이어져 있고 내 상상력 안에서 다른 사람의 꿈으로 갈 수 있다는 길손의 원리”를 삼각뿔 모양 커피우유로 깨우친다. “꿈을 꾸는 엄마의 마음과 그 꿈으로 간 내 마음,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을 이어주는 챔바의 마음이 삼각뿔의 세 직선처럼 하나의 꼭짓점에서 만나고 (…)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마음, 나보다 어둡고 나보다 빛나는 슬픔이 삼각뿔 커피우유의 밑면처럼 우리를 떠받치고 있었다”는 거다.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마음은 곧 “내 플러그는 내가 뽑고 싶어요”라는 문장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무엇 하나 통제하거나 욕심낼 수 없을 정도로 내몰린 삶에서 유일하게 제 마음대로 버리거나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죽음’에 대한 일종의 마지막 소유욕이며, 이는 역설적으로 살아 있는 동안의 무력감과 무능감이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함의한다. 어떤 사람들이 길손이 되냐는 질문에 “슬퍼한 사람”이라는 챔바의 대답은 그 맥락에서 길손이 된 ‘나’의 심연을 알아주는 위로가 되며 앞선 장에서 ‘나약함’이라고 얘기되었던 타자에 대한 공감 능력과 오직 스스로의 내면을 향해서만 공격력을 표출하는 ‘원망하지 않음’의 태도를 숭고화 하는 역할을 한다.

  소설의 초입에서 회상되는 <메기의 추억>과 <오! 수재나>같은 외국 민요들은 메기가 누구인지, 밴조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데, ‘나’는 그 수수께끼를 누군가에게 묻거나 찾아보지 않고 풀리지 않는 매듭 그대로 둔 채 미궁 속을 마음껏 헤매기를 선택했다고 밝힌다. 가사에 대한 의문이나 해석을 제쳐두고 높은 벼랑에서 별안간 훅 떨어지는 듯한 노래의 낙차에 울렁이는 가슴만 안고, 뜻도 모르는 이국 말을 흥얼대며 메기와 수재나가 만나 베르네로 향하는 상상을 음미했다고. 이 아름다운 미궁과 겹쳐 보이는 ‘나’의 죽음을 “비난도 칭찬도 아닌, (…) 판단 이전의” 빈 괄호로 비워두는 챔바의 겸허한 태도에서 가히 알 수 없음의 미학이 엿보인다.

  하지만 노래 속 새빨간 알핀로제가 알프스철쭉이란 것을 ‘나’는 죽고 나서야 알게 됐다는 말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까. “나는 몰랐는데 내 상상은 어떻게 아는 걸까. 난 끝났는데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걸까. 죽었는데 아직도 뭐가 두려운 걸까. 죽어서도 죽지 않는 감정이 있다면 노래가 끝나도 혀끝에 맴도는 멜로디가 있다면 누군가의 꿈에 찾아가 어떤 말을 해야 한다면.” 첫 번째 소설집을 낼 때 작가의 말에서 세상의 알 수 없음을 조금이라도 설명해보려는 시도로 소설을 쓴다고 밝혔던 김멜라는 이번 소설집에서는 한 가지 새롭게 알게 된 게 있다고 말한다. 그가 알게 된 유일한 진실은 “사랑하는 것은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도 헛되지 않다”는 것이다. 여전히 알 수 없는 것들의 복판에서 앎의 미학으로 궤를 옮겨온 작가의 쉽지 않았을 걸음에 나는 함께 발을 맞추고 싶다. ‘알 수 없음’의 다른 한편, ‘앎’의 지점에서 새롭게 차오르는 마음과 “손등으로 비빌수록 시야가 더 흐려져 알프스철쭉의 핑크색이 노랑, 초록, 파랑으로”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빛의 스펙트럼을 흐려지고 번지고 뒤섞이는 진창의 존재 그대로 마주하고 싶다.


  “리스본 사람들이 카리푸나족이란 부족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성과라면 성과야. 카리푸나족이 우리 앎의 지도, 인식의 지도 안에 들어왔어.”23)


  「앎의 지도」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포로감시원으로 동남아시아에 갔다가 광복 후 전범이 된 조선인들의 역사 쓰기를 조명한 정혜윤은 그들의 이야기가 삶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을 건드리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여태까지 나의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나의 삶이 아니었다는 앎. 식사는 식사 이상, 노래는 노래 이상, 삶은 자고 먹고 노래하는 그 이상의 것, 우리가 뭐라고 말하든 그 이상의 것, 죽을 때 돌아보고 후회할 우리의 것, 소중한 것, 그런데 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가? 그는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알게 되면(혹은 이해하게 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뭔가를 사랑하면서 알게 되는 일은 우리 삶의 방향을 바꾸고, 할 수만 있다면 알고 사랑하면서 수십 번, 수백 번 더 나은 사람으로 변신하고 싶게 만든다고 정언한다. 사형당한 전범들의 이름, 고향 주소가 적혀 있는 종이를 꺼내며 “우리 전범 친구들이 꿈에 자주 와요. 나는 항시 이 종이를 우아기(윗도리라는 뜻의 전라도 사투리) 주머니에 넣고 다녀요.“라고 말하는 이학래에게서 나는 김멜라가 그려내고자 했던 그리운 죽은 이와의 꿈속 조우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정말 위로가 되고 살아갈 힘이 되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

  우리는 단절을 이야기했다. 죽음이 곧 완전한 끝이라는 세속적 통념과 여성 자살 및 우울증을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시키는 의료화의 단절을 말했고 여성의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 어떻게 젠더, 장애 등 더 다양한 정체성 층위와 복잡하게 얽혀왔는지, 동시에 고통을 대결하면서 어떻게 서로 단절되어왔는지 말하려고 했다. ‘202호’가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을 기쁘게” ‘잘 살아 있는 일’이 곧 ‘잘 죽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과 다름 아니었던 것처럼 내가 ‘단절’에 대해 살펴본 건 또한 ‘연결’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죽는다는 건 죽은 엄마를 볼 수 있다는 의미이기에 202호는 죽음이 무섭지 않았다”는 말처럼 죽어도 끝나지 않는 소중한 마음에 대해서, 아니, 죽음 앞에서 더욱 진실해지는 어떤 강력한 연결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 김멜라는 이토록 사후세계를 상상하고 있다는 걸 정확히 알아주고 싶었던 것 같다. ‘알아줌’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다. 어쩌면 전부이다. 어떤 ‘알아줌’은 누군가를 죽고 살게 한다.24) 우리는 삶과 죽음의 필연성을 알아야 하고, 단절의 문법 아래 고립되어갔던 타자들을 더 많이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다른 앎의 지도, 인식의 지도를 더듬더듬 늘려가야 하고, 오직 두 발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어디론가 걸어가야 한다.

  지난 8월 출간된 소설집 『제 꿈 꾸세요』 작가의 말에서 김멜라는 작업실로 올라가는 이층 계단에서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해 삼 일간 보살피다 고양이별로 떠나보낸 일화를 언급하며 짧은 시간 곁에 머물렀던 갈색 줄무늬 새끼 고양이 ‘키요’의 존재와 그 어린 생명을 애처로워하는 제 애인의 마음을 이 책에 남기고 싶었다고 밝혔다. 글로 써서 기록해야 할 것은 바로 그 마음과 생명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애인과 ‘키요’를 위로할 수 있는 기록의 글쓰기로서 작품들을 써 내려갔다는 거다. 무심코 넘기던 소설의 책장 끝자락에서 마주한 작가의 고백에 이르러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이 소설집이 실상 자체로 한 통의 러브레터나 다름없다는 사실이다. 앞서 살펴본 「논리」, 「유메노유메」, 「제 꿈 꾸세요」 세 편의 소설에서 발견된 짙은 죽음, 남은 이들의 꿈에 찾아가는 망자, 죽음 이후에 애틋한 후회와 함께 터져 나오는 사랑의 말들, 함께 웃을 수 있는 꿈같은 시간들은 모두 작가가 사랑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남긴 편지의 흔적들로서 다시 읽히고, “사랑하는 것은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것도 헛되지 않다”는 언명은 누구보다 작가 자신을 향하는 다짐이자 약속으로 메아리친다.

  나에게도 이 평론은 분명 한 통의 편지다. 러브레터를 쓰는 마음으로 여러 밤 동안 조바심을 내고 허둥대며 그러나 조심스럽게 숙고했다. 지우개로 박박 지워가며 연필로 덧쓴 편지처럼 몇 번이고 수정되고 방향을 재설정하며 더듬더듬 걸음마를 뗀 나의 언어, 사랑을 한 움큼 실어 보내는 이 작은 편지를 받은 누군가 애달프고 울퉁불퉁한 사랑의 여정에 기꺼이 연루되어준다면, 그래서 당신과 나의 마음이 언젠가 삼각 커피우유의 꼭짓점에서 만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 사랑은 죽어서도 사라지거나 소멸되지 않을 테다. 그러니, 아무것도, 헛되지 않다.



=============각주======================

1) 이유정, ‘조용한 학살’이 다시 시작됐다, 슬랩, 2020-11-12.
임재우, ‘조용한 학살’, 20대 여성들은 왜 점점 더 많이 목숨을 끊나, 한겨레, 2020-11-13.
2) 김기범, ‘코로나19는 공평하지 않다’ 2020년 상반기 여성 자살 사망자 1924명, 플랫팀 여성 서사 아카이브, 경향신문, 2020-10-08.
3) 한은지, [김현수 인터뷰] 20대 여성의 자살 급증…심리적·경제적 방역을 서두를 때다, 피렌체의 식탁, 2020-11-17.
4) 김종현, 무엇이 20대 여성을 절박하게 하나...급증하는 극단선택, 연합뉴스, 2021-10-01. 백종우 경희대학교병원 정신의학과 교수 발언.
5) 김종목, 무엇이 여성 청년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가, 플랫팀 여성 서사 아카이브, 경향신문, 2022-04-21.
6) 김멜라, 「논리」, 『팔꿈치를 주세요』, 큐큐, 2021.
7) 대만의 사회학자 임기운은 저서 『죽음학 (죽음에서 삶을 만나다)』, 모시는 사람들, 2012-01-30. 에서 동양 특히 유교 사상이 주도적 위치를 점하는 중국과 한국의 ‘죽음과 상례를 중시하면서도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생명관을 설명했다.
8) 하미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여성 우울증)』, 동아시아, 2021-09-15.
9) 인아영, ‘자살’ 없는 대선, 플랫팀 여성 서사 아카이브, 경향신문, 2022-01-13.
10) 하미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여성 우울증)』, 동아시아, 2021-09-15.
11) 1952년 미국 정신의학회에서 출간된 DSM(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제1판에서는 동성애가 정신질환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12) 일라이 클레어, 전혜은/제이 역, 『망명과 자긍심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 현실문화연구, 2020-04-01.
13) 일라이 클레어는 『망명과 자긍심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 현실문화연구, 2020-04-01.에서 몇백 년은 된 괴물 연구인 기형학은 ‘과학’에서 나왔으며, 과학자는 장애인을 “단두계 하반신결합류 괴물종 암컷” 따위의 용어로 기술했다고 설명한다.
14) 오혜진은 「지금 한국 퀴어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 문학과 지성사, 문학과 사회 2018년 겨울호.에서 퀴어소설의 문제의식은 자신의 퀴어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퀴어한 것‘으로 인식하는 이 사회의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15) 현행법상 죽은 동물 사체는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담아 내놓거나 동물병원에서 의료폐기물로 처리하거나 동물 장묘시설을 이용해 처리할 수 있으며, 마당이나 산에 묻어 매장하는 것은 불법이다.
16) 일라이 클레어, 전혜은/제이 역, 『망명과 자긍심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 현실문화연구, 2020-04-01.
17) 마이클 올리버, 윤삼호 역, 『장애화의 정치(The Politics of Disablement)』, 대구DPI (대구장애인연맹), 2006-09-11.
18) 하미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여성 우울증)』, 동아시아, 2021-09-15.
19) 김멜라, [책읽아웃] - 황정은의 야심한 책 (284회) <인터뷰 ? 김멜라 소설가 편>, 문화웹진 채널예스, 2022-08-25.
20) 신형철,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 씨네21, 2013-07-03.
21) 하미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여성 우울증)』, 동아시아, 2021-09-15.
22) 초기작을 2010년대 중반 발표작으로, 최근작을 2020년 이후 발표작으로 구분한다면 2019년 발표된 「유메노유메」는 과도기적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본 평론에서는 최근작으로 포함해 분류하였다.
23) 정혜윤, 「앎의 지도」, 에픽(Epiic) #08(2022년 7,8,9월호), 다산북스, 2020-10-15.
24) 하미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여성 우울증)』, 동아시아, 2021-09-15.

 


 

  <당선소감>

 

   "끝없는 미궁 속 빛 발견한 기분"

  죽지 않길 잘했다, 글을 쓰길 잘했다는 뭉클한 안도감이 듭니다. 등단 제도에 편입되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가치있는 일일까 하는 질문에는 답이 갈리는 오늘이지만, 분명 어떤 알아줌은 사람을 살아가게 합니다. 여전히 그 알아줌엔 귀중한 면이 있습니다. 알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원고를 부치러 가는 날엔 눈이 왔습니다. 허리 통증과 안구건조증, 수족냉증, 역류성식도염을 달고 컴퓨터 방에 칩거한 채 밤을 꼬박 새워 글을 쓰던 제게는 그날 내린 폭설이 제가 올해 본 첫눈이었습니다. 집 밖으로 나간 일 자체가 오랜만이었습니다. 발끝이 시리고 뺨이 얼어 아려오는데도 백설기처럼 새하얀 세상이 왜 이렇게 예뻐 보이는지요. 아직 나는 눈이 좋구나, 생각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예쁜 쓰레기, 그런 멸시를 받고도 눈은 아랑곳없이 포근하게 쌓여갔습니다.

  백만 원의 고료 덕에 장학재단에서 학자금대출을 받을까, 물류센터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할까, 고민하던 생활비 걱정을 한시름 덜어서 기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쁜 점은 나라는 인간이 글로 밥벌어 먹고 살 수도 있겠구나, 하는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보았단 것입니다. 기사 같기도 하고, 에세이 같기도 하고, 칼럼 같기도 하고, 편지 같기도 한 나의 모자란 글이 과연 평론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의심하던 끝없는 미궁 속에서 멀리 빛이 새어 들어오는 쥐구멍을 겨우 발견한 기분입니다. 그 좁은 구멍에 코를 박고 상쾌한 바깥 냄새를 맡으며 자꾸 벅차고 서러워집니다. 내 글은 형편없지 않습니다. 나는 평론을 썼습니다.

  여전히 나를 믿는 일이 어렵습니다. 사실 어안이 벙벙하고 터무니없습니다. 아무래도 운이 좋았을 뿐이지 싶습니다. 그러나 내 삶은 나만의 삶이 아니듯이, 어렵단 이유로 내가 나를 믿지 않아 버릴 수는 없는 거겠지요. 내가 나의 엄마 정희의 유능함과 우직함을 믿는 것처럼, 내 언니들의 강인함과 내 친구들의 다정함과 내 애인의 정직함을 믿는 것처럼, 또한 나를 흔들림 없이 믿어주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내가 사랑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고 이해할 때 나는 무엇도 저버릴 수 없다는 걸 압니다.

  아직 알고 싶은 게 많습니다. 더 많은 사랑이 내 안에 남아 있고,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믿고 싶은 소중한 마음들이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 마음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쓰는 일을 멈출 수도 없겠지요. 게을러지지 않고 무엇이든 쓰겠습니다. 체념하지 않고 사랑하겠습니다. 죽지 않고 살겠습니다. 지면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경기 시흥시 출생
● 한신대 영상문화학과 전공·문예창작학과 부전공(2023년 2월 학사 졸업 예정)


 

  <심사평>

 

  "시간 깊이·고민 흔적 각인…새로운 시선 예리"

  심사에 오른 28편의 비평 응모작을 읽으면서 이런 문장들이 생각났다.

  엄연한 문학의 한 장르로서 비평의 언어는 예술의 자격을 요구받는다. 이 자격은 한 편의 작품으로서의 완결성과 서사적 긴장을 갖출 때 주어진다. 비평의 논리적 정합성은 글쓰기의 기술이 아니라 작품과 세계를 매개하는 정동의 운율을 읽어낼 때 담보되고, 철학적 사유의 현재성은 학습의 결과가 아니라 작품이 재현하는 세계를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사유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정확한 입사각을 통과할 때 드러난다. 이러한 독서 작업과 질문이 누락됐을 때 비평은 자칫 제 본연의 미학을 놓칠 수도 있다. 글쓰기의 기술과 학습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이론과 먼저 호흡하기보다 작가의 시선과 공명하는 자리를 찾을 때 기실 첫 문장이 제 길을 찾는다. 다소 긴 이 생각들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의 한 문장 쯤 되겠다. 비평도 아름다울 수 있다.

  이러한 기준으로 세 편의 글을 톺아 다시 읽었다. 김윤진씨의 ‘영화의 경계가 해체되는 순간-‘놉’과 ‘소설가의 영화’를 중심으로’, 이지연씨의 ‘멸종을 보류하는 상생의 에너지-기후 위기의 자장에서 천선란의 ‘나인’ 읽기’, 그리고 윤소예씨의 ‘죽어서도 죽지 않을 한녀들의 러브레터 -김멜라론’을 두고 오랜 시간 다시 읽으며 고민했음을 미리 밝힌다.

  김윤진씨의 글은 흔치 않은 영화비평이었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위치한 리더필름과 엔딩 크레딧이라는 형식을 글감으로 영화라는 장르의 경계성을 사유하면서 현실과 가상에 얽힌 질문까지 나아가는 내용성이 돋보였다. 첫문장부터 마지막문장까지 단숨에 읽혔다. 무엇보다 쉽고 정확한 문장은 닮고 싶은 장점이었다. 다만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의 깊이가 아쉬웠을 뿐이었다.

  이지연씨의 비평은 천선란의 작품이 던진 질문을 정확히 포착해 자신만의 완결된 구조로 재조직한 글이었다. 생명의 조건으로서 지구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들 간의 관계 맺기와 삶-방식에 대한 글쓴이의 사유는 다시 인간의 조건을 심문하는 질문으로 이어지며 글 전체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한 편의 비평작품으로서의 완결성과 서사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고, 때문에 심사하는 내내 하나의 좋은 기준이 됐다. 언젠가 비평가 이지연의 이름을 보게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마지막으로 윤소예씨의 글에는 작품과 함께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시간의 깊이와 고민의 흔적들이 깊게 각인돼 있었다. 지난 몇 년간 한국 문학의 가장 뜨거운 주제였던 젠더와 퀴어의 비평장에 뛰어들었음에도 익숙함보다 새로운 시선의 입사각들이 더 예리했다. 주제에 대한 집단적 학습의 흔적이 없지는 않았으나, 글의 논리는 병리학과 사회학의 칼을 빌어 관습적 사유의 한계를 넘어선 듯 보였다. 이는 자신만의 글쓰기를 수행할 수 있는 자생력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 또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응답을 찾기 위해 작품 이곳저곳을 탐색하며 근거들을 마련하는 시간들도 매우 많았을 터, 이 글에는 강박적일만큼 작품의 목소리들이 증언자로 소환된다. 때문에 글의 호흡이 너무 길어진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하지만 자기확신을 얻기 위한 이 강박이 글에 대한 믿음을 더해주었다. 또한 글의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글쓴이가 작품에 던진 질문에 최선의 응답을 길어내기 위한 노력이 돋보였다. 다양한 문헌에 대한 왕성한 포식성과 작가와 호흡을 함께하려는 지독한 독해 과정이 글에 녹아있다고 느꼈다면 조금은 과장일까. 짐작건대 이 글의 많은 문장들은 여러 번의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는 과정을 거쳐 다듬어진 결과로 보였다. 그래서인지 이 글의 문장들은 정동의 흐름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간혹 아름다웠다. 오래 고민했으나 윤소예씨의 글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며, 젊은 비평가의 출발에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 김영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