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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빈집의 빈 외투로부터 다시 발화하는 기다림―기형도와 젊은 시인들 / 최의진

 

1. 발화(發火)

시는 스스로 불태우며 쓴다. 그 불길 속에서 ‘나’를 중심으로 하던 서정의 권위는 해체되었고, ‘나’ 아닌 목소리들의 위계 없는 등장은 이전 세대의 시들이 닿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탐색하며 문학의 지평을 확장했다.1) 그렇다면, 시가 지금껏 걸어온 자리는 현재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의미 있는 쓰기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불태워온 자리가 단지 잿더미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헌정은 과거의 시를 현재의 시각으로 다시 읽는다. 그리고 새로 발굴한 의미를 기초로 새로 쓰기를 시도하며, 이미 논해진 의미 이상을 향하여 과거와 함께 걸어간다.

추모가 과거의 권위를 재건하는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 헌정은 불태우며 걸어온 자리가 남긴 불씨를 지금의 새로운 의미로 옮겨 쓴다. 과거의 불씨가 재점화되는 자리에서 지금 여기의 목소리와 과거의 시는 한 자리에서 녹고, 뒤섞이기에, 과거에 덧씌워진 신화와 권위는 해체된다. 즉, 헌정은 지금 여기에서 과거의 불꽃을 발화할 뿐 아니라 지금껏 써온 자리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기형도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발간 3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된 트리뷰트 시집 『어느 푸른 저녁』은 이처럼 추모와 구분되는 헌정의 자리에 놓인다. 발화(發火)를 시도하는 젊은 시인 88인은 기형도를 “도저한 부정성”2)과 연결되는 죽음이나 “위태롭고 불안전한 수직 이미지”에 매달린 예수3)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이들은 그의 죽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안에서, 그를 뚫고 나가며, 그가 못다 한 말을 이어받고, 못다 본 희망을 실현한다.

2. 응답을 기다리는 곳

헌정의 첫 단계는 과거의 시를 지금, 여기에서 다시 읽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이는 곧 과거의 시가 가진 현대성4)을 찾아가는 것으로, “덧없는 것, 순간적인 것, 우연한 것”5)이 가득한 의미 상실의 시대에서, “다른 것을 한번 상상해보려는 필사적인 열망”6)을 발견하는 일이다. 기형도의 현대성은 그의 시에서 묘사되는 도시와 긴밀한 관계에 놓이는데, 그의 도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진눈깨비」7))과 같은 낯선 풍경의 충격이 존재하는 곳이자 퇴근길의 수많은 인파가 파편화된 채 얼굴 모를 군중이 되어 “제각기 하루의 스위치를 내리고 웅성이며”(「거리에서」) 사라지는 곳이다. 덧없고 순간적이고 우연한 것8)이 가득한 도시가 움직이고 변화하는 속도는 하나의 선으로 이어갈 수 없을 만큼 빨라서, 기형도의 도시는 무엇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상실의 중첩 상태에 놓였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인식할 수 없게 된 도시에서 기형도의 화자들은 상실을 포착하는 목격자로서 ‘잃어버림’ 자체를 복구한다.9) 상실로부터 회복하는 일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확인하는 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전문

지나온 과거를 상실한 자들에게는 현재 목격하는 풍경(“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어디선가 굶주린 구름은 몰려왔다”)이 파편화된 단편일 뿐, 변해온 과거와 현재, 그리고 변해갈 미래라는 하나의 선으로 연결될 수 없다. 그러나 과거를 현재의 관점에서 소환하는 화자에게는 길 위의 풍경이 하나의 파편이 아니라 이전부터 모습을 바꾸며 이어진 형상으로 인식된다. 화자는 자신이 바라보는 풍경에 과거가 있었음을 인식하며, 풍경의 과거를 현재로 소환한다. 이를 통해 단지 파편으로 존재하던 이미지들은 과거를 획득한다. 길은 파편화된 길이 아니라 “너무 멀리 떠내려온” 길이 되고, 현재 존재하지 않는 기쁨도 “흘러가버린 기쁨”의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사라진 과거를 포착하는 시선을 통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은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자라났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공중의 “희고 둥그런” 모양은 처음부터 그 모양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길 위의 기억”이 흐려지며 남긴 자국으로 복구된다. 지금은 굳은 채로 멈춘 물도 “소리 없이” 흐르던 시절이 있었으며, “굶주”리기 이전의 구름 또한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상실을 복구하는 화자는 길 위의 순간으로 파편화된 현재의 모습이 그 모습이 되기까지 변해온 역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인식함과 동시에 상실을 인식한다. ‘무언가 있었던 과거’를 인식함을 통해 ‘무언가 사라진 현재’를 파악하게 되며, 이를 통해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사실, 즉 잃어버림을 복구하는 것이다.

한편, 상실을 복구하는 자는 외롭다. 상실을 인식조차 할 수 없는 상실의 중첩 상태에서 상실을 깨닫는다 해도, 이미 잃어버린 것이 상실의 주체나 상실을 목격한 화자에게 돌아오지도 않기 때문이다.

(i)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 부분

(ii)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노인들」, 전문

인용문 (i)과 (ii)의 화자는 모두 상실을 복구하는 최전선에 서 있다. (i)의 화자의 등 뒤에는 “아무도 없”기에 화자가 상실을 복구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우는 이유조차 알 수 없게 된 서기의 슬픔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잊히고 상실의 중첩에 파묻힐 것이다. (ii)의 화자가 부러진 나뭇가지들의 과거에 “이미 다 지나”간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을 견뎌냈다는 사실을 배치하지 않으면 부러진 나뭇가지들은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과 마찬가지로 “추악”해질 것이다. 봄을 견디며 쇠약해져 “목을 분지르며 떨어”지는 나뭇가지들이 실은 “봄빛이 닿는 곳”을 기다려왔다는 사실이 지워진 채 바닥을 구르는 흔한 나뭇가지, 파편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구를 홀로 감당하는 과정에서 화자가 느끼는 것은 “내 몫이 아니”고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이며, 그들은 이 슬픔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한다. 상실을 복구할 뿐,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방법은 알지 못하는 무력함(“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이 그들을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실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상실을 복구할 뿐, 상실로부터 온전히 회복되는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대성은 상실을 회복하는 자들이 슬프고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품고 있다.

그러나 기형도의 현대성은 “벗어둔 외투 곁에서” 사랑을 잃고 “흐느”끼는(「그 집 앞」) 슬픔이나, “희망을 노래하련다”는 다짐까지도 “나는 이미 늙은 것”(「정거장에서의 충고」)이라는 탄식으로 끝나는 절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절망과 “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르는 슬픔을 견디고, 눈물을 “아무 때나”(「희망」) 흘리지 않을 날을 상상하는 희망 또한 존재한다. 이는 홀로 상실을 복구하는 자가 필연적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던 외로움과 슬픔을 넘어설 가능성이자, 아직 완성되지 못한 미완결의 희망이다. “눈 녹아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우리의 봄은 다가”(「겨울·눈·나무·숲」)오고 있음을 보게 하는 희망은 슬픔과 무력함 외의 것을 상상하는 길을 낸다. 미완결된 상상은 과거의 시도가 가진 필연과 제약, 한계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발견된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위반의 자리를 탐색10)하며, 현재에 응답의 자리를 열어둔다.

3. 그의 안에서

미완결된 희망을 품은 과거의 시는 더는 과거의 신화가 아니라 현재의 응답을 향해 열린 형태로 존재한다. 헌정은 먼저 과거의 시 안에서 응답을 시작한다. 이 응답은 과거의 언어를 동력으로 현재를 쓰고, 다시 읽기를 통해 발견한 현대성이 지금 이곳에서 시를 쓰는 일에도 유효한 부분이 있음을 확인하며 이루어진다.

나는 오늘 그 자리에 한 발자국도 꼼짝 않고 있었는데

매일 오늘이, 오늘 만난 사람처럼

나를 투명하게 통과해간다

나는 오늘 여기 그대로 서 있었는데

이상하기도 하지, 매일 나를 통과해간 오늘 저녁들 때문에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진 듯

내가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

(중략)

검은 건물 속에서 매일 보는 사람들이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까맣게 번져 나오는 이상한 시간

김중일, 「오늘 푸른 저녁」, 부분11)

화자가 놓인 도시는 기형도의 화자가 존재하던 도시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이곳은 “어느 푸른 저녁”(「어느 푸른 저녁」)이라는 특정한 순간에 목격했던 상실의 풍경이 매일 반복되는 “오늘”로 변해버리고, “서로를 통과해”(「어느 푸른 저녁」)감을 목격하던 화자가 “나를 투명하게 통과”해버리는 날카로움을 직접 경험할 수밖에 없는 도시다. 덧없고 빠르게 스쳐 가는 “오늘”에 관통당한 화자는 더는 속도를 관조하는 목격자로만 존재할 수 없다. “그대로 서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도시의 속도에 휘말려 “쉼 없이 움직이고 있는” 당사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상실을 바라보는 목격자의 위치에서 밀려나 도시의 속도에 휘말린 당사자가 되었음에도 화자는 여전히 도시의 속도와 풍경을 목격하며,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까맣게 번져 나오는” 사람들을 낯선 풍경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매일 보던 사람들”임을 기억하고 있다. 이는 화자가 「어느 푸른 저녁」의 언어를 변주하며 말하기에 가능하다. 기형도의 화자가 “어느 푸른 저녁”에 서 있었던 자리와 거기서 목격했던 풍경이 화자에게 목격자의 위치를 확보해주는 것이다. 어느 한때의 상실이 “매일 오늘”의 일상이 되어버릴 만큼 빨라진 도시의 속도에도 불구하고 기형도의 「어느 푸른 저녁」으로 침투하고 이를 변주하는 일련의 경유를 통해, 화자는 “어느 푸른 저녁”과 닮아 있는 “오늘 푸른 저녁”의 상실을 목격하고 쓸 수 있다.

이처럼 기형도의 언어를 경유하고 변주하며 상실을 포착하는 목격자의 위치를 다시 확보하는 화자가 있는 한편, 또 다른 헌정시의 화자는 기형도와 같은 방법으로 상실을 복구하며, 맥락에서 이탈한 이미지들을 재구성한다.

나의 벽에는 코트가 하나 걸려 있다 나는 저 코트의 주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은 내게 단추를 하나 채우도록 만들지만 침묵하는 나의 빈 코트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겨울을 건너온 것일까 몇 번의 밤 몇 개의 느린 눈송이 차마 내려오지 못하던 그 겨울들의 이력 몇 장의 백지 몇 가닥의 마른 손끝 검은 나무들이 날린 잎사귀들의 두려움 기억한다 우리를 비틀거리게 하던 그림자 그림자의 사이 지나쳐버린 속도 배웅해야 했던 웃거나 웃지 못하고 떨어뜨린 딱딱한 이름들 잊지 않을 것이다 한쪽 주머니에서 찾아낸 식은 글자들 꺼내 읽어보려 했던 입술의 창백한 모양 그저 음악 같던 추위와 추위의 하얀 뼈

유희경, 「빈 코트」, 부분

기형도의 언어는 “빈 코트”의 형상으로 도래한다. 주인의 자리가 공백이 된 코트는 화자가 “나는 저 코트의 주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함과 동시에, 화자의 것이 될 가능성 또한 가지고 있다. 코트를 수선하는 대신 단지 코트의 “단추를 하나 채”워 그것을 “나의 빈 코트”로 삼는 화자는 기형도가 상실을 복구하던 방법 그대로 상실을 목격하고 기록한다. 그러나 화자가 기록한 이미지들은 과거를 온전히 가지고 있지 않다. “몇 가닥의 마른 손끝”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딱딱한 이름들”은 누구를 부르던 것인지, “식은 글자들”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없다. 일련의 이미지는 소유격과 과거를 상실한 채 맥락에서 이탈한 파편처럼 부서져 있다.

그러나 기형도의 언어가 명백한 주인을 가진 코트가 되지 않고 “빈 코트”인 채로 “침묵하”기에, 화자는 새로운 맥락을 만들 공간을 얻는다. 이 공간에서 화자는 “기억”하고 “잊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겪어왔을 과거를 “우리”가 건너온 “많은 겨울”로 다시 쓴다. 사라진 줄도 몰랐던 것을 상상하며 상실을 복구하던 기형도의 시도를 이어받을 뿐 아니라, 상실해버린 맥락까지도 화자 자신이 기억하는 겨울로부터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때 누구의 것인지 모르게 되며 맥락에서 이탈했던 “딱딱한 이름들”과 “마른 손끝”은 화자가 기억하는 겨울을 구심점으로 삼아 “그 겨울들의 이력”이라는 맥락 안에 재구성된다. 이처럼 기형도가 남겨둔 공간에서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고, 그것을 잊지 않겠다 다짐하는 화자의 시도는 잃어버림 너머로 나아갈 위반을 시도하는 단초가 된다.

4. 그의 밖으로

헌정은 기형도의 안에서 현재의 잃어버림을 복구할 뿐 아니라 그것을 딛고 미완결된 희망 밖으로 빠져나온다. 과거의 시가 지닌 신화와 권위는 그의 안에서 쓰는 시도와 균열을 겪으며 사라졌기에, 과거의 곁에서 대등하게 선 헌정시의 화자는 그의 곁에서 쓰는 자로 선다. 이들은 그의 안에서 현재의 의미를 확인하는 것을 넘어 이후의 의미를 향해 전진한다. 외로움과 슬픔, 무력함의 제약을 뛰어넘는 위반을 향하여, 미완결된 희망이 성취되는 자리를 향하여.

빈집에 초대되었습니다

헐겁게 잠겨 있던 문을 열고 들어와

스스로를 가두고 나는 씁니다

(중략)

인사는 말자

저녁마다 산책을 떠났다가

돌아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빈집에 갇혀

나는 쓰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초대하는

박세미, 「빈집에 갇혀 나는 쓰네」, 부분

빈집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이나 “가엾은 내 사랑”(「빈집」)과 같이 이미 상실한 것을 가둬둔 곳이자, 동시에 누군가 들어올 수 있도록 비어 있는 공간이다. 이 여백은 “빈 코트”(「빈 코트」)의 비어 있음과 같은 종류로, 새로운 무언가를 쓰도록 허락하는 침묵이자 빈집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대가 된다. “빈집에 초대”받은 화자는 기형도가 상실을 가둬둔 곳에 들어가 앉아 함께 쓰는 행위를 통해 초대에 응한다. 이는 곧 기형도에게 보내는 “친애”다. 상실 이후로 나아가지 못하고, 홀로 상실을 포착하며 슬픔과 외로움을 겪을 수밖에 없던 기형도의 제약과 한계는 이 친애로 말미암아 위반된다. 화자는 “저녁마다 산책”하듯 밖으로 나갈 수도 있지만, 다시 빈집으로 “돌아와” 함께 쓰는 일을 스스로 택하기에 기형도의 화자는 더는 필연적으로 슬프거나 외롭지 않다.

한편, 화자의 친애는 빈집 내부에만 갇히지 않는다. 그는 “친애하는” 동시에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대는 외부로 향하기에, 화자가 “빈집에 갇혀”서 “스스로 가두고” 쓴 것들은 초대와 함께 빈집 바깥으로 빠져나가며 빈집은 다시 누군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으로 남는다. “초대하는” 행위를 통해 발신된 친애는 응답으로 돌아올 친애를 기대하고 기다리며, 초대받은 누군가가 또 한 번 미래에서 응답할 수 있는 자리를 열어둔다. 그렇게 “친애”를 담아 “초대”된 다른 화자는 함께 쓰기와는 또 다른 방법으로 상실과 슬픔 너머를 내다 본다. 그 시선은 잃어버린 것을 돌려받지 못해 비어 있는 상실의 자리와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사이를 오간다.

외투를 잃어버린 남자는

외투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외투 없이

겨울에 갇혔다

나는 여름에 남자를 생각했다

외투를 빌려주었다면

그는 여기서 밝고 환하게 웃고 있을까

귀뚜라미 소릴 들으며

부질없이

생각했다

외투 없이 겨울을 보낸다는 걸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기에

이따금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도 내 외투를 빌려가지 않겠어요?

강성은, 「겨울에 갇힌 한 남자에 대하여」, 부분

“겨울에 갇힌 한 남자”는 도저한 부정성을 가진 기형도의 화자이자 어쩌면 기형도 자체로도 읽을 수 있다. 기형도의 시에서 ‘겨울’을 다룬 시를 통해 남자의 이미지를 구체화하자면, 그는 “두꺼운 외투와 커피 한 잔으로 겨울을 정복하는 꿈”을 꾸었으나 슬픔과 무력함의 제약에 갇혀 “희망인가 절망일 건가”(「우리는 그 긴 겨울의 통로를 비집고 걸어갔다」)를 두고 고뇌에 빠진 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겨울 이후의 계절에 도착하지 못하고 미완결의 상태로 남은 이 남자는 화자의 가정 속에서만큼은 외투를 빌려 입은 채 “밝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이곳, 여름에 존재한다.

그러나 화자는 여름의 남자를 상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목소리를 내어 “중얼거”리며,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그가 상실한 자리를 향해 건넨다. “지금이라도 내 외투를 빌려가지 않겠어요?” 그 질문을 통해 여름 속에서 “밝고 환하게 웃”는 남자는 가정과 상상의 단계를 넘어 외투를 입고 겨울을 견딘 후 여름에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외투 입은 남자를 상상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외투를 빌려”가기를 직접 권하는 일은 희망을 실현하는 출발점에 서는 것과도 같다. 단지 안부를 묻거나 겨울을 뒤덮은 탄식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외투”를 직접 벗어주는 화자는 더는 슬프거나 무력하지 않다. 상상을 넘어 실현으로 전진하는 중얼거림이 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슬픔을 “중지시킬 수 없”(「기억할 만한 지나침」)던 겨울의 무력함은 과거에 버려지지 않고 외투를 입은 채 여름을 향한다. 그러나 과연 여름은 완벽한 회복이자 영원한 완결이 될 수 있는가.

붕괴해봤자 영원한 붕괴란 없다. 우리는 죽지 않고. 신이 사라지고 신 아닌 것들만 남아 있다. 너는 그림자처럼 일어나 긴 장화를 신고 쓰레기를 밟았다. 네가 걸을 때마다 우리의 지하실은 점점 넓어졌다. 우리는 어떻게 될까. 우리의 영혼이 다른 몸으로 갈아탄다면

외롭지 않지. 외롭지 않으니 슬플 일 따위도 없지. 내 손을 더 깊은 바닥으로 잡아끌면서 너는 웃었다. 너는 웃으면서 붕괴된 표정으로 잉크통을 쏟았다. 바닥에 흐르는 잉크를 더 먼 곳으로 흘려 보냈다. 떨어지고 흐른 후에야 활자 하나 얻는 시간이 있다. 마치 낙엽처럼. 잎사귀에서 낙엽으로. 창문에서 떨어지고 있다.

이영주, 「시인에게는 시인밖에 없다는 말」, 부분

시가 스스로 불태우며 지금 쓰는 곳 이상을 향해 나아가듯, 헌정 또한 지금 여기를 최종 목적지로 삼은 채 완결을 이룰 수 없다. 함께 쓰고, 외투를 내어주며 겨울에서 여름에 이른다 해도 그 여름은 완벽한 완결도, 종착지도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용문의 “나”와 “너”, 시인과 시인이 모여서 된 “우리”는 일정 부분 무력하다. 네 걸음으로 “지하실”을 점점 넓혀가더라도, 여전히 “지하실” 밖으로 떠날 길은 아직 찾지 못했고, “붕괴된 표정”을 붕괴 이전으로 돌이킬 방법은 요원하게만 보인다. 그러나 홀로 상실을 복구하던 시인 곁에 시인 한 명이 더 설 때, “지하실”과 “붕괴”는 슬픔과 무력함으로만 남지 않는다. 오히려 “영원한 붕괴란 없”으며, “외롭지 않”다고 선언하며, 기형도의 화자가 멀리서 바라보던 희망을 이곳에서 살아낸다.

가능성으로만 보이던 희망을 살아낼 때, 네가 “흘려 보”내는 것을 내가 포착하는 작은 연대가 가능해진다. “떨어지고 흐”르고 마는 슬픔을 위반하며 “활자 하나”를 얻는 새로운 쓰기의 순간이 도래한다. 헌정이 만들어낸 새로운 쓰기의 순간 속에서, “혼자 울고 있”는 서기와 건물들이 제 형상을 잃고 “눈을 뒤집어” 쓴 채로 “희고 거대한 서류 뭉치로 변해”(「기억할 만한 지나침」)가던 상실과 슬픔의 거리는 친애와 연대의 모습으로 바뀐다. 그때,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던 희망이 “내 곁을 걸어가는 한 사람의 단단함”(이제니, 「너는 나의 진눈깨비 앵무의」)이 되어 거리를 걷기 시작한다.

5. 미완의 역설

헌정은 이미 다 불타버린 줄만 알았던 과거에서 미완된 지점을 발견하고, 이를 응답의 요구로 읽으며, 과거가 남긴 언어 안에서, 그리고 그 바깥으로 나오며 새로 쓰기를 시도한다. 다시 읽고, 새롭게 응답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 기형도는 더는 죽어 있지 않다. 요절이라는 현실의 사건과 결합하여 죽음의 신화 속에서 읽히던 기형도는 상실을 복구하는 자이자, 슬픔과 무력함을 앓으면서도 희망을 보던 자로 선다. 그리고 그 희망은 한 시대의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제 지금, 여기의 희망과 맞닿는다. 그는 그의 언어 속으로 침투하고 경유하는 화자들과 함께 이곳에서 새롭게 말하며, 그가 상실을 포착하던 방법을 물려주고, 나란히 마주 본 채 친애를 건네는 이들과 함께 상실이 가득한 겨울을 지나 여름에 이른다. 그 여름이 완전한 완결은 아니기에, 과거는 불태우며 쓰고 있는 현재 이후로도 향할 수 있다.

또한, 과거가 헌정을 통해 발화되는 과정은 단지 과거의 재해석으로만 남지 않는다. 헌정을 통해 현재는 과거를 얻는다. 과거는 이제 더는 권위의 상징이나 굳어버린 신화가 아니다. 함께 쓰며 대화하는 존재이자, 미완결된 자리를 통해 새로운 쓰기를 가능하게 하는 유산이 된 것이다. 즉, 헌정은 이어받을 수 있었고 함께 쓸 수 있었으나, 과거의 권위와 신화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생긴 유실물을 되찾는 일이다. 이 유실물은 기형도에게 있어서는 미완결된 희망이었으며, 기형도 트리뷰트 시집의 시인들은 이를 이어받아 지금,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이 도시에서 말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했다. 친애와 초대를 발신하고, 이곳에서 시가 실현해야 할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이처럼 불태우며 걸어온 과거가 열려 있는 의미의 자리임을 인정할 때, 현재의 시는 스스로 불태우면서도 소멸하지 않는다. 재로 남는 대신 헌정을 통해 새롭게 쓰이는 과거는 현재와 새롭게 대화하며 계속해서 시를 쓸 동력이 되어준다. 거꾸로 걷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미완된 자리를 찾아 다시 읽고, 미완결이 품고 있던 한계를 위반하는 한 걸음을 시도할 때, 시는 불꽃이 되어 전진한다.

 

1)신형철, 「문제는 서정이 아니다-웰컴, 뉴웨이브」,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202~203면.

2)김현,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 『정거장에서의 충고』, 문학과지성사, 2009, 197면.

3)권성훈, 「시인의 죽음과 영웅 신화의 조건들―기형도론」, 『계간 시작』 19(1), 천년의시작, 2020, 219~220면.

4)푸코는 현대성을 시대를 나누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현대를 대하는 “일종의 태도”로 본다. 미셸 푸코, 김성기 역, 「계몽이란 무엇인가」, 『모더니티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4, 350면. 참조.

5)Charles Baudelaire, J.Mayne 옮김, The Painter of Modern life and Other Essays, Phaidon, 1964, 13면.

6)미셸 푸코, 위의 책, 350~354면 참조.

7)기형도, 「진눈깨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문학과지성사, 2019, 16면. 이후 같은 책에서 인용한 시들은 트리뷰트 시집의 인용문과 구분하기 위해 이탤릭체로 제목만 표기한다.

8)Charles Baudelaire, 앞의 책, 같은 면.

9)기형도의 화자는 사후주체로서 ‘나는 쓴다’는 행위를 전면에 내세우며 화자가 지나간 사건을 기록하고 포착하는 존재임을 명시하거나, 미래의 시점을 상정하여 이미 지나온 삶을 대상화한다. 그들은 과거 시제와 회상의 시제로 진술되나, 이는 “과거의 시간이 마음속에 재생되도록 내버려 두거나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그리워하는” 단순한 회상과는 다르게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관점에서 소환하여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재구성하며, 그렇게 재구성하는 행위 자체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오연경, 「기형도의 사후 주체와 거리두기 전략」, 『한국시학연구』 58, 한국시학회, 2019, 132~137면 참조.

10)이는 푸코적 비판으로, 비판은 현대성이 지닌 한계와 제약을 발견하고 이를 넘어설 수 있는 위반의 자리를 탐색하는 것이다. 미셸 푸코, 앞의 책, 359~360면 참조.

11)김중일, 「오늘 푸른 저녁」, 『어느 푸른 저녁』, 38~39면. 이후 같은 책에서 시를 인용할 때는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의 인용문과 구분하기 위해 시인과 제목을 병기한다.

 

  <당선소감>

 

   문학이 걸어오는 말, 서툰 언어로나마 계속 적어가겠다

  문학이 제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 좋았고, 그 말을 서툰 언어로나마 적어가는 게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누가 보아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조급한 마음에 도리어 누군가에게 글을 보여주기조차 싫었고, 써둔 글에 보이는 모자람을 보며 자신에게 한숨만 쉬기도 했습니다. 부끄러울 만큼 덜 자란 자리에서 한 편씩 글을 완성하며 느리게 자랐습니다. 나도, 곁도 찌르던 모난 구석이 깎여나가고, 어떻게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것에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글을 쓰면서도 부족한 것투성이겠지만, 그 부족함을 통해 더 깊이 사랑하며 쓰는 기쁨을 배워가고 싶습니다.

 이 소감에 적어둔 말들이 머쓱할 만큼 겨우 막 시작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작에 혼자 오지 않았음을 기억합니다.

 늘 저보다 한발 앞에서 글을 읽어주신 아빠, 쉽고 상냥하되 아름답고 깊은 글을 꿈꾸게 해주신 엄마, 제가 어려워하는 섬세한 사랑을 몸소 보여주는 동생 희진이.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치열하게 고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종학 선생님, 김지영 선생님, 김윤정 선생님, 제가 문학을 읽는 즐거움을 배우고 글을 시작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춘식 선생님, 황종연 선생님, 박광현 선생님, 좋은 독자가 되는 시작점에 세워주시고, 한 편의 글을 완성해 갈 수 있도록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보다 더 제 글을 믿어주고 사랑해 준 친구들과 가족들, 함께 읽고 쓰는 기쁨을 알게 해준 비평분과 학우들, 부족한 글임에도 가능성을 읽어주신 심사위원님, 그리고 미처 다 적지 못한 모든 고마운 분께 감사드립니다. 제 모든 글의 기초와 의미가 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2000년 서울 출생
● 동국대 국문과 졸업


 

  <심사평>

 

  논의의 밀도 아쉬웠지만 비평적 에너지 남달랐다

 작년보다 늘어난 응모작들의 관심은 다양했고 일정한 수준을 유지했다. 역시 동시대 젊은 문학에 예민한 눈길을 주는 풍경이었다. 진지한 문제의식과 예리한 분석도 많았으나, 한편의 비평 작품으로서 유기적 완성도를 갖춘 작품은 드물었다. 동시대의 기존 논의나 외국 이론에 편승하기보다, 스스로 한국문학 장에서 귀납적으로 발견한 비평적 질문을 던지면서, 창의적인 자기 비평을 수행하는 글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평론 방법론 비판’은 최근 평단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인데, 논점을 좁혀 더 구체적으로 파고들었다면 더 좋았겠다. ‘포스트-휴먼의 바이오필리아’는 인류세 시대의 문학에 관한 의미 있는 성찰이지만, 연역적 담론의 틀에 문학 작품들이 마치 임상 자료처럼 동원되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여성적 상속/계승 서사의 문제적 지평을 논의한 ‘미래 없는 자들의 미래’도 눈길을 끌었지만, 인용이 너무 많아 비평의 척추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편혜영의 ‘아오이 가든’에 나타난 좀비 형상화 문제를 다룬 ‘시체가 되거나, 비인간이 되거나’는 의미심장한 논점을 활달하게 제출하고 있어 논의의 밀도까지 더했더라면 당선권에 거의 근접했을 작품이다. 상호텍스트적인 읽기를 통해 해석의 가능성을 넓고 깊게 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징후와 연계하여 성찰할 수 있는 비평적 세목들이 어지간했다.

 기형도 트리뷰트 시집을 중심으로 시에 있어서 헌정의 문제를 다룬 ‘빈집의 빈 외투로부터 다시 발화하는 기다림―기형도와 젊은 시인들’은 비평적 관심과 다부진 열정 등 여러 면에서 인상적이었다. 대부분이 동년배에 의해 쓰인 지금, 여기의 감각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 글은 시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역설적 얽힘을 숙고한다. 논의의 밀도와 유기적 구조화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지만, 영향과 위반, 초대와 친애, 스며들면서 탈주하기의 역동적 맥락을 헤아리는 비평적 에너지와 박력이 남달라 보였다. 빈 집, 빈 외투 이미지에 주목하여 시 쓰기라는 미완의 역설이 어떻게 스스로 불태운 자리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인지를 응시한 점은 상찬할 만한 미덕이다. 이에 당선작으로 삼아 한국문학의 미래를 부탁하기로 한다. 기꺼운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

심사위원 : 우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