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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 최주식

 

부산데파트 앞 버스정류소는 7번 국도의 시작 또는 종점

우리집은 종점이었어 산7번지 처음 보는 마이크로버스가

똑같이 생긴 집에서 똑같이 생긴 아이들을 실어 날랐어

똑같은 책가방을 메고 똑같은 학교에서 똑같이 생기지 않은

한 여자아이를 좋아하던 어느 날 내가 전학 온 것처럼

그 아이도 전학을 가버리고 나는 인생이 무언가 오면

가는 것이라고 비정한 것이라고 잡을 수 없는 것이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하루는 종점에서 시작되었어

아침이면 늘 신발이 젖었어 밤새 파도가 다녀간 거야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온다고 그래서 종점에 내려

처음에 이상했던 일이 계속 일어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

아무도 도망치지 못한 하루가 말라비틀어진 화분 사이로 걸어가면

아저씨 제발 화분에 물 좀 주세요 글쎄 파도가 화분만 적시지 않는구나 공허한 대답처럼 버스가 다시 오면 젖었다 마른 행주처럼

종점에서 시작되는 아침 젖은 신발을 신고 다니면 세상이 질척거려

자꾸 달아나고만 싶어 7번 국도를 달리면 바다를 볼 수 있을거야

파도를 만나면 내 젖은 신발을 두고 올거야 다시는

젖은 신발을 신지 않을 것이라고 똑같이 생기지 않은

여자아이를 닮은 다 큰 여자가 국수를 마는 집을 나선 날

종점에 버스는 한 대도 없었어


 

 

  <당선소감>

 

   나이 들며 무너진 마음, 그걸 잡아준게 詩


  눈이 오네. 창밖을 물끄러미 보다가, 잠깐 나갔다 올까 속엣말을 하며 문을 여는데 그새 희미해진 눈발이 비 되어 내린다. 그래도 나선 길, 다시 우산을 챙겨 들고 동네 주변을 좀 걸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우산 위에 송골송골 맺힌 쓸쓸한 기분을 툭툭 털어내고 의자에 앉으니 전화벨이 울린다.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소식이다. 거짓말 같다는 말, 정말이다.

  서면 영광도서에 서 있던 이십 대 초반 무렵의 내가 보였다. 서점 한 벽면을 가득 채운 수많은 시집들의 무게에 눌려 아, 저기 내 자리는 없겠구나 돌아서던 뒷모습. 그리고 시를 쓰지 못했다. 삼십여 년의 세월이 거짓말처럼 지나갔다. ‘나이 드는 게 편해’라는 위약을 매일 유산균처럼 먹었다. 날들과 계절이 오고 갔다. 마음이 견디기 힘들 때 시를 읽으니 조금 나아졌다. 나도 모르게 무너지는 마음일 때 그것을 잡아주고 버티게 해주는 힘. 다시 시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똬리를 틀었다.

  우연히 눈에 띈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 공고. 학교에 가겠다고 하니 아내는 왜? 라고 묻지 않았다. 그래, 하고 싶었던 거 해. 눈물이 살짝 기쁜 마음은 잠시, 두려움이 피어오른다. 내가 시에서 얻은 위로만큼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시를 쓸 수 있을까. 이 상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주는 것이리라.

  김이듬 손택수 김참 심사위원님께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좋은 시를 써야 한다는 것. 꼭 갚아야 할 부채로 알겠다. 시에 대한 안목과 자세에 대해 가르침 주신 정홍수 류근 황인찬 이지아 선생님께 감사 인사 올린다. 아내 재인, 우리 아이들 성렬, 민서 고맙고 사랑한다.

● 1964년 부산 출생. 
●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재학 중. 
● 현재 월간 ‘오토카코리아’ 편집장


 

  <심사평>

 

  

3편 각축, ‘파도는…’ 공감의 폭 높은 점수

  응모된 시의 경향은 다양했지만 대체로 서정적인 시, 실험적인 시, 새로운 감각의 시로 분류할 수 있었다. 사회문제를 다루는 시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것들이 많았다. 젊은 세대의 독특한 언어 감각과 생활상을 보여주는 시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심사위원들은 십여 편의 시를 집중적으로 검토한 뒤, ‘쪽방촌 오르트 씨’, ‘미행’,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세 편의 시를 놓고 마지막 논의에 들어갔다.

  세 편의 시에 관한 다양한 의견이 오갔지만 단 한 편의 당선작을 뽑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심사위원들은 세 편의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며 음미해보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작품의 깊이와 높이를 가늠해 보기도 했지만 세 작품이 각각 다른 개성과 장점이 있어서 심사위원들 간의 이견이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당선작을 내는 데는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쪽방촌 오르트 씨’가 던지는 메시지는 가볍지 않았다. 기법적 완성도도 높았고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도 뛰어났다. ‘미행’은 담백하면서도 깊이와 품격을 지닌 좋은 시였다. 재치 있는 마무리도 인상적이었다. 풋사랑을 그려낸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는 공감의 폭이 넓은 시였는데 특히 뒷부분의 반전이 좋았다.

  좋은 시에 필요한 요소는 많다. 언어의 깊이와 생각의 높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공감의 폭 등이 그것이다. 최종심에 올라온 세 편의 시는 모두 이런 요소를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이 가운데 오늘날 우리 시에 가장 필요한 것이 공감의 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심사위원들은 공감의 폭이 가장 넓은 ‘파도는 7번 국도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당선작은 언어 감각이나 호흡 면에서는 보완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이 점은 시를 계속 써나가면서 점점 좋아지리라 생각된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드리며 앞으로 선보일 좋은 작품을 기다려 본다.

심사위원 : 김이듬, 김참, 손택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