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당선작>

  극빈 / 김도은(김정미)

 

그 많은 소란과
발걸음과 악다구니들을 겪고도
골목은 여전히 휑하다

그늘이 묻은 소매 끝에
삶은 돼지머리 냄새가 가득하다.
이마를 풀어헤친 나무의 복선사이로
저기, 좁은 골목 끝으로
환한 끝이 보인다.
그 끝으로 얼마나 많은 이쪽을
저쪽으로 끌어들였나.
기울어진 지붕 끝으로 끌어 내린
저 어둑한 그늘들은 누구의 뒤끝들인가
더는 새것이 찾아오지 않는
양쪽을 둔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이쪽 또는 저쪽에 속지 않는다
한때 유일한 재산이었던 포물선들은
조금만 펴거나 휘어도 뚝 부러지고 말 것 같은데
군데군데 구멍 난 혁명가를 입은 노인은
질긴 옛날 노래를 잇몸으로 부른다

극빈은 출렁이는 극한의 자세
팔꿈치에 휘감은 불안은 바짝 마른 저수지보다 컷다.
여전히 붙잡아두고 싶은 것들은 아름답지만
이 극빈도 조만간 헐릴 것이라는 말들
그래, 함께 헐리면 편하지
지탱이 지탱을 업고 하는 말들은 그마저도
죄다 빌려 온 말들이라는 것
돌려줄 곳도 없는 말들이라는 것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는
어둑한 한 평의 미궁들엔 다행히도
무더위가 웅크리고 있다는 것
들어올 것도 없이 여미는 겨울보다는 낫다는 것
홀로, 깊은 안쪽이 되는 것이다


 

  <당선소감>

 

   "쓸쓸하거나 따뜻하게"

  절실해질 때마다 망설인 것들을 생각했다. 망설이는 일들만으로 분명해지는 답이 있다면 또 얼마나 좋을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있을 결정들을 사랑하기로 했다.

  결정한 일로 이렇게 행복해졌다.

  파동이 잘 느껴진다는 것은 내 안에 수만 겹의 파동이 여유분으로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세상에 풀 죽은 채 돌아오는 날이 많아질수록 시를 써야 할 이유도 늘어났다. 간절한 것을 만들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었지만,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이 꿈만큼은 쉽게 내려놓아지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시 앞에서 도망치려고 했던 순간마다 내겐 운명처럼 여러 일이 일어났다. 무병을 앓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해될 때도 있었다. 이제, 좋은 글을 쓰는 일만 남았다. 빈 가방을 들고 불룩하게 길을 나서야겠다. 그렇게 좋은 글을 쓰다 보면 한 발자국씩 괜찮은 나와 만나지지 않겠는가.

  당선 소식을 그 누구보다 기뻐할 플라타너스 잎들이 휘날리는 교실 창가에서 가파른 세상의 언덕을 오르는 트럭이 삶의 메타포임을 눈 뜨게 해준 시의 첫걸음인 은사님 이영춘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우선순위에 둘 수 있게 해준 든든한 울타리인 남편 이두호씨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멋진 두 아들 윤범, 윤수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어 고맙고 다행이다. 긍정적이고 이쁜 우리 지은. 늘 응원해준 학순 언니.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준 내 동생 정혜. 먼 곳에 계신 아버지 엄마. 그리고 친구들과 문우들. 용기 잃지 말고 앞으로 더 나아가보라고 선물처럼 꿈을 허락해주신 박영교 선생님 이서빈 선생님 이옥 선생님 이진진 선생님 네 분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영주일보 관계자분들께 두 손 모아 감사드린다. 누가 되지 않도록 정진하겠다. 쓸쓸한 길이지만 따뜻하게 따뜻하게 걸어가 볼 수 있을 것 같다.

● -
● -


 

  <심사평>

 

  영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주옥을 골라낸 다양한 심사평

  경상북도 영주시 소재 영주신문(대표‧권오섭)은 32년째 계속 발행되는 전국에서 드문 지령 1337호를 맞이 하는 알찬 지역신문이다. 선비의 고장인 영주의 맥을 잇기 위해 2024년 제1회 신춘문예를 개최한 영주신문에 깊이 감사드린다.

  총 1756편의 응모된 작품을 심사위원들이 심사하였다. 지역별 응모 편수는 서울 28%, 경기 32%, 강원 7%, 경북 23%, 전남 3%, 전북 2%, 경남 5%를 비롯해 제주 등에서 응모하였다. 처음 실시하는 행사인데도 많은 사람이 응모해 왔다.

  응모한 전체적인 작품들을 읽어보면 작품 수준의 편차가 좀 크게 나타나고 있었다.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금방 본 사물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바로 작품으로 승화시킬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삭힌 뒤에 그 엑기스를 뽑아서 작품화해야 좋은 작품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새로운 언어를 가져다 쓴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언어가 그 작품 속에서 한 문장에 들어앉아 적확한 언어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작품들이 많았다. 또 다른 하나는 시적인 사회성이나 정치적 이슈 등을 작품 속에 끌어와 쓸 때는 완성도 있게 설정하거나 표출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을 들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는 한 작품에 대한 이미지의 형상화이다. 작품을 읽어보면 시인이 그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필요한 요소가 두뇌 속에 떠올려져야 하는데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분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체로 확고한 이미지를 만들지 못한 작품이 많았다.

  예심에서 올라온 여러 작품 중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 손에 남은 작품은 「대숲과 새」, 「검은 고양이」, 「극빈」 세 편이었다. 그 뒷받침을 해주는 각 4편의 작품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가가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었다.

  세 작품은 신선한 이미지를 창출해 내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잠깐잠깐 보고 떠오르는 이미지나 어휘를 적어놓은 것은 그 진한 맛을 독자들에게 제공해 주지 못한다. 이미지의 형상화가 어렵지만, 독자에게 주는 무게는 있어야 작품의 값어치가 나타나는 것이다.

  작품 「대숲과 새」는 이미지가 선명하다. ‘대숲이 항문을 조이면/ 새들이 침묵의 그네를 탄다’ ‘대나무가 허리를 펴면/ 새들이 알사탕처럼 쏟아진다’ 등의 문장들, 결국은 대숲, 바람, 새들 이 세 명제 속에서 이루어지는 작품이었다.

  작품 「검은 고양이」는 좀 다르다. ‘밤의 너그러움을 껴입은 고양이’ 검은고양이를 밤이라는 어둠 즉 밤의 너그러움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나와 검은고양이가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면서 검은고양이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켜서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 작품이었다.

  작품 「극빈」은 그 첫 연은 어떤 참사를 겪고 난 후 그곳의 골목에 대한 이미지를 이어 나가는 느낌을 주었다. 이 어려운 가난의 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기도 하면서 ‘혁명가의 노래로 그 길을 벗어 날려는 생각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극빈은 출렁이는 극한의 자세로 변하여 헐리고 말 것이라는 마음을 갖는다. 가난의 삶은 겨울보다 여름이 살아가기가 낫다는 생각에 접어들면서 끝을 맺고 있다. 작품 「극빈」 외 4편의 작품도 고른 수준이었다. 오히려 뒤의 4편 중에서도 이미지의 선명함을 만날 수 있었다. 작품 「모두 저녁을 찾으러 간다」, 「사슴은 수신중」, 「수동식 낙타」, 「하잠夏蠶」을 읽으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작품에 적확하게 심으려는 부단한 노력이 보였다. 새로운 어휘를 찾아내어 써서 좋은 작품을 만들려는 노력도 찾아볼 수 있었다. 작품 「하잠夏蠶」은 지하철 계단참에 누워있는 노인을 통해 하잠의 이미지를 얻어 왔으며 그가 돈 통(바구니)을 앞에 놓고 있을 때도 빈 바구니를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푸른 지폐를 한 장(남루도 견본이 필요하다)을 먼저 담아두어야지 지나가는 사람들도 돈을 넣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노인(걸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인심’을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작품 「수동식 낙타」에서는 ‘사막을 달려온 낙타가 온몸을 접는다’로 첫 연을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길들여진 사막에서 살아가는 낙타의 슬픈 생활을 표현하고 있다. 작품 「사슴은 수신중」은 수사슴이 그 뿔을 통해 전파를 찾는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것으로 모든 어려움을 해결한다. 즉 뿔의 주파수에는 맹수를 먼저 찾아내고 고요를 걸러내고, 초록의 여름을 지탱한다. ‘모두 저녁을 찾으러 간다’는 그 첫 연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날이 새면서부터 모두 저녁을 향해 간다’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가?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이면 일을 다 마치고 어둠이 오기 전 집으로 퇴근하는 일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더 비약해서 본다면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세상을 살아가며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궁극적으로 마지막에는 죽음을 향해 간다는 것을 낮은 비유로 표출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끝으로 수상자에게는 다시 한번 축하의 마음을 올리며 또한 응모한 모든 분들에게도 건강과 건필을 기원하면서 문운이 함께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 박영교, 이서빈, 이옥, 이진진